웹진 “반란”을 창간하며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도약하기 위해
— 반제국주의 웹진 반란 창립선언문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도 대중을 사로잡는 즉시 물질적 힘이 된다.
— 카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작금에 구태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념이라는 말이 웃음거리인 시대, 누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만큼 아는‘ 시대이다. 새로운 사상에 대한 말을 들으면 대부분은 속아 넘어가기 쉬운 사람이나 그러한 비상식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은 당연한 상식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교육’이 필요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는 자신들의 ‘상식‘과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험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짧아서, 아니면 위선적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반란〉지는 공산주의 언론을, 그 중에서도 맑스-레닌-마오주의 언론을 표방한다. 국가나 거대 자본이 소유한, 수 많은 취재원들과 기자, 보도 매체를 가지고 있는 언론들부터, 누가 보긴 하는지 의심스러운 인터넷 한 구석의 웹사이트까지, 이미 언론의 바다는 포화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진 물 한 방울에, 그것도 노골적으로 비주류적이고 대부분의 독자들의 ‘상식‘과 충돌할 물 한 방울에 관심을 줄 이유가 있을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과 일치해서 이미 옳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언론이 아니면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미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발행 부수가 많고 보는 사람이 많더라도 이들이 독자들과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옳은 생각일까?

우리는 태어나서 많은 것들에 대해 감각으로 느끼거나 귀로 듣고 확신한다. 아이는 손으로 눈을 가리면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아이는 학이 물어다 주거나 다리 밑에서 주워 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확신은 그 자체의 운동을 견디지 못하고 깨진다.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아이가 부모님이 그렇게 ‘숨은‘ 자신을 금방 찾아냈을 때 아이는 이러한 개념이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점검하고 수정할 때는 부모가, 교사가 모든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전달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안에 있는, 그 자체의 모순을 인식하고 현실에 맞게 수정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린 시절 뿐만 아니라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울 때는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사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고작 수십 년의 시간을, 수십 수백 명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한 지역이나 나라에서 살아가며 형성된 생각에 불과하다. 우주와 인간 사회의 장구한 역사와 광대한 규모에 비교해보면 한낱 티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든, 사상, 이념 정치적 성향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우리 모두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생각은 그 자체의 모순를 견뎌낼 수 없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야 할 씨앗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사회에 대한 우리 생각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까?

철학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그 중에서도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어떤 천재가 모든 인류 사회에 적용되는 불변의 해결책을 번개처럼 떠올려 인류에게 전달한 진리가 아니며,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지상이나 천상의 불변하는 낙원을 약속하는 다른 사상들과 다르다. 카를 맑스는 독일에서 발전한 변증법 철학에서 종교적인 신비주의를 벗겨내 유물론적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사회에 적용해 자본주의 안에서 그 자체의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영원히 유지될 수 없으며 공산주의 사회로의 전환이 필연적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탄생 이후에도 맑스주의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인 이상 맑스주의는 현실 안에서 운동하며 그 자체의 모순을 품고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다.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 주요 맑스주의 이론가들의 모순, 그리고 그들 자신의 모순보다 훨씬 많은, 정치 운동에서 맑스주의를 실제 적용하는데 실패한 맑스주의자들의 오류, 또한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의 인류사의 거대한 사건들에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을 맑스주의 자체에 다시 적용해 도약하는 것만이 바로 맑스주의 그 자체에 맑스주의적 방법을 적용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맑스주의의 현재 단계는 바로 맑스-레닌-마오주의라고 불린다. 1848년 혁명과 파리 코뮌 이후에 그 경험을 이론화해 맑스주의가, 러시아 혁명 이후에 그 경험을 이론화해 맑스-레닌주의가 탄생했듯이 중국 혁명의 경험을 이론화한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맑스주의의 최신의, 그러나 마지막은 아닌 필연적 세 번째 단계이다.

그리고 우리 〈반란〉지는 여러분이 현재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든, 이미 맑스주의자이지만 맑스-레닌-마오주의자는 아니든, 사회주의자이지만 맑스주의자가 아니든, ‘우익’이든, ‘좌익’이든 간에 우리 사회라는 현실 안에서 살고 있는 이상 이성과 논리에 의지해 비판적이고 성실하게 사회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맑스-레닌-마오주의의 단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조금의 도움이 있다면 그 과정은 더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반란〉지가 앞으로 수행할 역할이다. 맑스-레닌-마오주의를 소개하고, 맑스-레닌-마오주의의 방법을 우리 사회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적용해 맑스-레닌-마오주의가 현 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과학적 방법임을 증명하는 것. 이를 위해서 우리 〈반란〉은 맑스-레닌-마오주의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경쟁하는 여러 이론과 주장에 맞서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하고 전개하는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의 현존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분석과 논평,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 통속적으로 유통되는 ‘맑스주의’ 이론이 과연 과학적인 역할, 실천에 어떤 차이를 낳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우리의 분석이 실천에 어떤 차이를 낳을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사회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개인과 단체를 설득하는 것이 우리 〈반란〉지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반론과 토론에도 열려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병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증상에 불과해 병리학적 표본으로써 모두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이든, 아니면 우리의 오류를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라 과학적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든, 그 중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맑스-레닌-마오주의가 ‘현재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과학‘이라는 주장에 걸맞은 태도로써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의 논쟁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반란〉지가 자신의 말을 증명할 기회를 주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