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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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스탈린 사후
1952년 10월 말, 스탈린은 생전에 죽음을 수 달 앞두고 차기 지도부를 구성하던 도중 상층부 당 기구의 인원들을 2배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의 제안은 중앙위원회에 의해 승인됐으며, 소련 공산당 상임위원회와 서기국 위원 후보자들의 확충된 명단에 대한 추천안도 마찬가지로 모두 관철됐다. 흐루쇼프 자신의 “회고록”에서 묘사된 대로라면, 스탈린의 계획은 흐루쇼프를 긴장하게 만든 행보였다. 흐루쇼프는 자서전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일체의 자문도 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축출할 계획에 있었는가? 서방 국가들의 소련학자들 중 일부는 물론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축출에 대한 본의와는 별개로, 스탈린은 생전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인원 확충에 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953년에 사망했다. 스탈린의 사망 당시 후계자로서 자격을 지녔던 공산당 상임위원회와 서기국의 위원들은 36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서 대다수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맑스-레닌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능력과 추진력을 갖췄고, 스탈린의 위신에 필적할 정도로 두각을 보인 인사들―당 지도부에서 가장 출중한 자질을 보유한 몰로토프 외무성 장관조차도―은 아무도 없었다.
공산당 내부에서 성취에 대한 자기만족감과 기회주의의 성장 속에서, 신흥 자본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속됐던 사회주의적 제도와 원칙의 약화 속에서 상황을 일거에 바로잡을 만한 권한을 보유했던 이는 단 한명, 스탈린 뿐이었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에 사망했다.
스탈린의 장례식은 수백만 명에 달했던 근로인민들에 의해 엄숙하게 치러졌다. 소련의 노동자들보다 세계 각지에서 스탈린의 죽음에 대해 비통에 잠기지 않은 노동자들은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과 국가를 역사적 성취들로 채워진 30여 년 동안 지도했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의 노정으로부터 소비에트 권력을 유리시키려 했던 “좌익”과 우익 분파들에 맞서 거대한 전투를 수행했다. 스탈린이 이끈 집산화와 산업화를 위한 투쟁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에 대한 소비에트 인민들의 위대한 승리에 있어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 모든 오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레닌의 적법한 후계자다운 행보를 취했고, 행동했다. 그는 맑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방어했다. 당의 지도자인 스탈린과 함께, 볼셰비키당은 소련의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을 혼란과 후진성, 고립을 딛고 성장을 이룩해갔던 국제적 사회주의 진영의 중심부에서 현대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향해 건져냈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장악한 영악한 광대들에 의해 전가된 산더미와도 같은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1953년 3월 5일 붉은 광장에서 열린 스탈린의 장례식에 대한 몰로토프의 연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맑스-레닌주의적 평가의 표본으로 되고 있다.
“스탈린의 불멸의 이름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소비에트 인민과 모든 진보적 인류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민의 복리와 행복,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노동계급을 향한 영광스러운 위훈은 시대를 불문하고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한 쏘비에트 지도자의 시신이 안장되기 직전에도, 스탈린의 잠재적 후계자들 사이에서 장래의 당 노선을 둘러싼 투쟁은 1917년과 1937년 사이의 시기-하지만, 정치적으로는 1917년~1937년의 변혁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부르주아 독재로, 사회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서 사회제국주의로 이행했다. 이 때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양대 계급 사이의 투쟁이었지만,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 다툼으로 비춰졌다. 투쟁은 이내 주요 국가기구의 지도부 내부에서, 국가기구와 국가기구의 투쟁으로 치달았다-를 명실상부하게 변화시킨 것처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전개됐고, 쏘비에트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으로 끝내 확전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개시됐고, “반당파”의 패배와 1957년 6월 흐루쇼프의 권력에 대한 공고화로 귀결됐던, 복잡다단한 권력투쟁의 예외적으로 굴곡진 노정에 대한 개괄적인 총평은 오직 이러한 측면에 입각할 때만이 설명될 수 있다.
스탈린 사후에 일어난 전반적인 일련의 사건들은 흐루쇼프가 정치적으로 스탈린과 맑스-레닌주의 사상의 방어자로서, 후계자임을 가장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했고,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흐루쇼프는 1956년 20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에 맞서 공개적으로 입장을 급격히 전환했을 때 권좌에서 빠른 속도로 밀려났다. 흐루쇼프는 육·공군 총사령관의 개입을 통해서야 1957년 축출의 위기로부터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치열했던 권력투쟁의 굵직한 사건들은 1953년 3월 6일 베리아의 쿠데타를 시작으로 흐루쇼프와 말렌코프의 권력투쟁(1953~1956)과, 흐루쇼프와 주코프의 1957년 6월 무혈 쿠데타로 이어지며 종언을 고했다.
스탈린 사후에 일어난 라브렌티 베리야의 쿠데타는 대개의 경우 진위의 소재를 알 수 없고, 역사적 전환점의 한복판에서 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장된 사건이었다. 3월 6일 새벽, 모스크바 주둔군의 사령관들은 불시에 체포되어 구금당했으며, 베리야의 지휘 하에서 준군사적 권한을 보유했던 비밀경찰에 의해 산하의 병사들은 병영 내부에 고립됐다. 베리야의 비밀경찰은 모스크바와 크렘린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확보했다. 당일 밤 스탈린의 개인 비서로 후계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포크레비셰프 사령관은 행방불명되어 연락이 두절됐다. 3월 6일이 끝날 무렵, 10명에 달했던 당 서기국원들과, 1952년 10월 중앙위원회에 의해 선출된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후보위원 36명 중 22명이 직책에서 밀려났다. 기존에 52개였던 정부의 장관급 부처들 중에서 27개 부처들도 마찬가지로 폐지됐다. 새로운 당 지도자들의 명단에서 베리야의 지위는 말렌코프보다 바로 밑의 서열인 제 1 부수상으로 급부상했다. 말렌코프 또한 당의 최고위 직책인 제 1서기로 임명됐다. 흐루쇼프도 이 당시 말렌코프에 다음가는 지위로 올라섰다. 주코프 소련군 원수는 한직에서 국방성의 공동 부상(副相)으로 올라섰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의 순간들을 상세하게 조명한 신빙성 있는 자료와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국의 소련학자인 에드워드 크랭크쇼(Edward Crankshaw)는 베리야의 부대가 “쿠데타의 실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스탈린의 상임위원회를 겨냥한 공세에서 베리야의 역할을 대체할만한 논거는 전무하다”고 말했다. (≪흐루쇼프 –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생애(1966)≫, 뉴욕, 188쪽) 이후 살아남은 지도부는 같은 해 6월에 베리야의 숙청을 단행했다.
흐루쇼프의 “자서전”에 따르면, 상임위원회의 위원들은 베리야에게 출두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베리야의 면전에서 당을 오염시킨 출세주의자로서 그간의 행적을 규탄했다. 회의실 내부에서 비밀 단추가 눌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옆방에서 주코프 소련군 원수가 난입하여 “항복하시오!”라고 외치며 베리야를 체포했다. (≪흐루쇼프 회고록≫, 뉴욕, 1970, 364~366쪽) 베리야는 즉시 총살당했다. 비밀경찰에 대한 통제권은 베리야가 총살당한 이후 흐루쇼프의 수족한테로 넘겨졌다.
말렌코프는 스탈린 사후에 외견상 명백한 후계자로서 부상했고, 당과 정부의 최고위 직책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주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당 지도부에서 사임했고, 흐루쇼프가 당 기구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다. 1953년 8월, 여전히 소련 정부의 수반이었던 말렌코프는 이른바 “신노선” 정책을 추진했다. 말렌코프는 소비재 공급의 급격한 증가를 약속하며, ‘모든 텃밭에 닭을’ 이라는 표어를 공공연하게 내걸었다.
이러한 정책에는 크게 두 가지 맹점이 존재했다. 첫째, 말렌코프의 소비재 확충에 관한 정책은 중공업과 군수품의 생산보다 경공업의 비중을 높이는 절차가 결부됐다. 둘째, 당의 사전승인이 전제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교묘하게 이러한 약점들을 이용했다. 흐루쇼프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전통적으로 주된 부문으로 기능했던 중공업의 대변인으로서, 냉전 당시 자본주의적 포위에 대항하여 군수산업의 옹호자로서, 무엇보다도 당시 말렌코프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지지하는 대변인임을 가장했다. 1955년 2월 말렌코프 산하의 정부 부처들이 당의 노선에 상반되는 방침을 선전(정부의 공식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가 소비재에 우선순위를 뒀다면, 소련 공산당 기관지에 해당됐던 ≪프라우다≫는 중공업 우선주의를 방어했다)했을 때. 말렌코프는 본래의 직책에서 사퇴를 강요받았다. 흐루쇼프는 말렌코프와 산하의 추종자들을 “반당파”로 낙인찍음으로서 권력을 향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흐루쇼프는 말렌코프의 우익적 편향에 맞서 기존의 노선, 즉 스탈린의 노선을 옹호하는 듯한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말렌코프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이를 수많은 말렌코프의 지지자들을 당에서 축출하는 데에 활용했고, 당의 주요 요직에 측근들을 등용했다. 정치적 경쟁자들을 축출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화한 이후, 흐루쇼프는 몰로토프의 방침과 소련의 기존 외교정책에 상반되는 견해를 내놓기 시작했다.
정세의 국면은 판이하게 변화했다. 몰로토프 외무성 장관은 “신노선”에 대하여, 더 나아가 외교문제에서 어떠한 일탈도 없을 것임을 표명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에 의해 구축된 노선에 따라 정석적으로 움직였다. 1954년 12월 대중국 회담과 그로부터 1년 후 인도, 버마(미얀마), 아프가니스탄 국빈 방문에서 제외된 것처럼 의도적인 결례도, 1955년 겨울 제네바 4자회담에서 위신이 추락한 사건도 몰로토프를 자극하지 못했다.
흐루쇼프는 매사에 초지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옛 볼셰비키에 맞서 사상적인 면모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야 했다. “신노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당사자는 반대파가 아니라 바로 흐루쇼프 자신이었다. 흐루쇼프는 1955년 5월에 몰로토프의 강력한 반대에 맞서 유고슬라비아 국빈 방문의 형태로 티토 원수(元帥)의 부르주아 정권을 극찬했다. 중국 혁명의 숙적인 인도의 네루에 대한 아첨과 함께, 1955년 말엽 제네바 4자 정상회담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흐루쇼프는 사회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의 “평화공존”이라는 생경한 이론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흐루쇼프는 스탈린에게 맞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가하지 못했다.
1956년 2월 20차 당 대회의 말미에서 “비밀연설”이 발표된 이면의 배후와 일련의 과정들은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흐루쇼프가 당의 제 1서기(1953년 9월에 공식적으로 취임한 직책)로서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연설했던 20차 당 대회 첫날 전체보고에서는 사망한 전임 지도자에 대한 찬사밖에 없었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당 대회가 소집됐을 때 흐루쇼프는 상임위원회에 “스탈린의 과오”에 대한 연설을 개진할 것을 요구한 당사자였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는 이에 항의했다. 회기는 질풍노도처럼 흘러갔고, 흐루쇼프는 마침내 최후통첩을 내놓았다. “모든 상임위원회의 위원들은 대회에서 발언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체보고에서 정해진 노선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도 입장을 표출할 권한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하오.” (≪흐루쇼프 회고록≫, 381쪽) 당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흐루쇼프의 말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회고록”에 서술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20차 당 대회의 특별 회기는 “비밀연설”을 발표한 장소에서 주로 흐루쇼프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미국의 반동적 황색언론사의 경영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주니어(William Randolph Hearst Jr.)의 말에 따르면, “반공주의 성향의 지식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전가했던 혐의들에 있어 흐루쇼프만큼 격렬하게 폭로하지 못했다.” (≪흐루쇼프와의 여정≫, 1960, 86쪽) 공산당 상임위원회의 전체 대의원들이 흐루쇼프의 20차 당 대회 비밀연설의 전문을 봤거나, 사전에 흐루쇼프의 목적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의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비밀연설’ 이래로, “평화공존”과 “평화적 경쟁”, “평화적 이행”을 골자로 삼은 흐루쇼프의 테제―당 대회 전체보고에 조심스럽게 상정됐던―에 대한 모든 논의는 스탈린 문제를 둘러싼 당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스탈린에게 협력했던 당의 모든 당원들은 “비밀연설”의 낭독 즉시 형언할 수 없는 ‘범죄’와 ‘참상’의 공범이었다는 비난들로 인해 직접적으로, 내지는 간접적으로 하나둘씩 피고자의 처지에 내몰렸다. 비밀경찰의 문서고를 통제했던 흐루쇼프는 경쟁자들을 겁박하기 위해 “증거”를 취사선택적하여 발본색원했고, 반대파한테 위협을 가했다. 맑스-레닌주의의 지지 여부나 “평화공존론”에 대한 옹호 여부, 그리고 당의 성격이 프롤레타리아 정당인지, 부르주아 정당인지에 대한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 당시 근본적인 문제로 부각된 쟁점은 당원들 각자가 1934년, 혹은 1937년을 비롯한 여러 시기에서 피고인이 판결을 부당하게 받았거나, 재판조차 거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했던 1930년대의 정치적 재판에 관여했는지, 관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부에 있었다. 정치적 노선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신하여, 도덕적 범죄에 대한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여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고, 정치투쟁은 도덕성에 대한 놀이로 전락했다. 숙청에 각기 다양한 경로로 “연루”됐던 모든 이들은 흐루쇼프의 사례를 따라 모든 책임을 죽은 스탈린의 시체를 향해 전가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모든 일은 정해진 각본대로 순순히 흘러가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당원들의 대다수는 흐루쇼프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비밀연설’이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에 알려지며 반향을 일으킬수록 흐루쇼프의 입지는 1956년 전반에 걸쳐 사상누각처럼 흔들렸다. 흐루쇼프의 “신노선”은 지속적인 참사를 야기했다.
1956년 말엽이 되자 흐루쇼프는 전면적으로 퇴각했고, 스탈린에게 우호적인 연설을 강요받는 처지로 내몰렸다. 흐루쇼프의 정치적 운명은 1957년 초순에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1957년 6월 18일에 소련 공산당 상임위원회는 투표를 통해 흐루쇼프를 당 지도부로부터 축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6월 22일 무렵, 흐루쇼프의 구출을 돕기 위해 주코프와 소련 공군이 나서면서 몰로토프에게 유리했던 전세는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11. 흐루쇼프의 쿠데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을 통해 촉발된 정치적 격동은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16개월이 지난 후인 1957년 5월에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는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흐루쇼프의 노선을 두고 지지자들과 반대파들 사이에서 일어난 마지막 대결이었다.
흐루쇼프는 당 지도부에서 축출됐고, 권력을 박탈당했으며, 그 후 2주만에 다시 본래의 직책에 복귀했다. 정치적 격동의 전말과, 소련군 수뇌부가 당대에 맡은 역할은 오늘날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의에 중대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정치적 격동의 한복판에서 발생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은 소비에트 상부구조의 최상층 지도부에 속했던 소수의 일원들에게 사실상 한정됐다. 흐루쇼프의 반대파가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 비밀연설의 안건들에 대한 공론화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면, 흐루쇼프의 지지자들은 반대로 인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의 과반수를 차지했던 대다수의 당원들은 심지어 ‘비밀연설’ 초기부터 논의에서 배제됐. “비밀연설”의 유출된 사본에 따르면, 1956년 2월 20차 당 대회의 대의원들은 2만자 분량인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문에 대해 “우레와 같은 긴 박수갈채”로 “전원 기립”하며 화답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는 소련 공산당의 역사에서 최초로 중대한 의의를 지닌 고위급 당원의 당 대회 연설을 대다수 당원들에게 비밀에 부칠 것을 결의했기 때문에 ‘비밀연설’을 향한 열광적인 찬사가 기층보다 상급 당 기구의 당원들 사이에서 더욱 강력하게 표출된 것이었다.
1956년 20차 당 대회 이후 소련 공산당이 대중적인 차원에서 발표한 문건은 악의가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흐루쇼프의 최종연설에서 마지막 여섯 문단은 “개인숭배”의 종식과, 개인숭배의 ‘오류’와 ‘과오’에 대해 재검토를 모호한 표현으로 촉구했던 세 가지 의제가 주축을 이뤘다. 흐루쇼프의 연설은 점잖게 쓰인 글로 스탈린을 겨냥한 일체의 중상모략―예를 들면, ‘배반’과 같은 단어들이 그랬다―도 들어가지 않았다. 스탈린의 이름은 심지어 언급조차도 되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연설 전문은 소련 국내에서 고위급 당원들에 한해 도합 6천부가 배포되는 정도에 그쳤다. (펄로치-호르바트, ≪흐루쇼프: 독재자의 탄생≫, 보스턴, 1960, 211쪽) 이 당시 소련 공산당의 규모는 약 800만 명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설문의 전문을 열람할 수 있었던 당원들의 숫자는 1000분의 1보다 적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 조직 내부에 독소를 흩뿌리고, 유언비어와 스탈린 시대의 ‘참상’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퍼트리며, 의심과 동요,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는 당의 단결을 해치고 전복시키는 데에 있어 충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만으로는 ‘비밀연설’ 이후 지탄의 대상으로 공공연하게 낙인찍힌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존경심을 함양하고 수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육받았던 절대다수의 당원들을 충분히 와해시킬 수 없었다.
‘비밀연설’의 전문을 소장했던 정치인들 사이에서 군부의 이해관계를 가장 노골적으로 관철시킨 장본인은 당대에 국방상을 맡고 있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였다. 주코프는 제 2차 세계 대전 도중 붉은 군대에서 최고의 사령관으로 활약했고, 수차례에 걸쳐 찬란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성공은 주코프로 하여금 상급자들과 부하들을 향해 허세를 부리며 자만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스탈린은 종전 이후 주코프를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주코프는 이후로 앙심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로 전후(戰後)의 처우가 흐루쇼프와 동맹을 맺게 되는 계기로 됐기 때문이었다. 1953년에 국방성의 공동 부장관으로 승진한 주코프는 1955년 흐루쇼프에 의해 말렌코프가 실각되자마자 국방장관에 정식으로 임명됐다. 주코프는 소련에서 전문 군사교육을 이수한 최초의 국방장관이었다. 흐루쇼프는 또한 12여 명에 달했던 군 장성들에게 소련군의 최고 직책인 소비에트 연방원수직을 수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흐루쇼프는 정부와 여러 기관들에 대한 당적 지도의 옹호자로서 본색을 감췄지만, 동시에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주코프 원수의 반당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20차 당 대회가 열리기 1주일 이전만 해도 주코프는 소련군의 공식 기관지에서 군 사령관들에게 간섭하지 말 것을 당에게 요구하며 노골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전의 방침들은 군 사령관들의 공식 업무를 당 회의에 종속시키기 위해 고안됐다. 이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다. 우리의 본분은 사령관들에게 부여된 권한의 전방위적인 강화에 있으며, 열성을 아끼지 않는 장교들과 사령관들을 지원하는 데에 있다.” (펄로시-호르바트, ≪흐루쇼프: 독재자의 탄생≫, 190쪽에서 인용함.)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의 정기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치러지기 전날인 1956년 2월 23일에 주코프는 붉은 군대 창건 38주년을 맞아 모스크바에서 고위 장교들에게 반(反) 스탈린적 경향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군 기관지에 밝힌 바와 유사한 태도를 재차 표출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주코프는 군인의 신분으로서는 예외적으로 당 상임위원회 후보위원에 임명됐다.
먼 훗날, 흐루쇼프는 주코프에 대해 “보나파르트적 경향”을 지녔고, ‘우리 조국(소련 - 역자)에서 남미식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흐루쇼프 회고록≫, 14쪽) 흐루쇼프의 주장은 사실관계와 실질적으로 괴리되지 않았다. 주코프는 정치보다 군부를 우위에 두며 권력을 향한 개인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흐루쇼프에게 있어 단지 차후의 문제였다. 1956년만 해도 주코프는 흐루쇼프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용 가능한 장기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이후 초기 몇 달 동안 소련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집단농장의 농민들이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확실하게 찾아보기 어렵다. 소련에서 1970년대 초반에 탄압받기 직전에 활동했던 맑스-레닌주의자들의 비밀조직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의 평당원들은 “중앙위원회가 스탈린의 공헌에 대해 맑스주의에 입각한 객관적 평가를 내릴 것을 요구했다. 평당원들의 이러한 요구는 소련 공산당의 기회주의적 지도부가 수많은 당원들한테 맞서 공격과 박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투쟁에 대한 헌신성으로 명성을 떨친 상당수의 당내 세포들을 해산시켜야 했을 정도로 끈질기게 지속됐다.” [≪혁명소비에트 공산당(볼셰비키)의 강령과 원칙들≫, 뉴욕, 1967년, 4쪽.]
비당원 대중들의 경우 평당원들과 다르게 흐루쇼프에 반대했다는 일말의 징후조차도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당원 대중들에게 제공됐던 부실한 경제적 혜택―흐루쇼프는 과거에 비판을 가했던 말렌코프의 ‘신노선’ 정책을 이제 거리낌 없이 차용했다―을 고려한다면, 불만은 상당한 수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모든 활동이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없지만, 펄로치-호르밧은 걷잡을 수 없는 수위의 정치적 불안을 논하면서, 동시에 자생적인 시위와 파업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교정시설에 갇힌 수많은 수감자들 중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던 가지각색의 반동적 인사들은 흐루쇼프의 대사면령을 통해 석방되어 사회 내부에 활발하게 침투했다. 펠로치-호르밧은 소요에 대한 사전예방적 차원에서의 조치와 경고의 일환으로서, 소련군과 비밀경찰이 만일을 대비하여 1년마다 1번씩 열었던 군사훈련을 소련 각지의 주요 도시들과 인접한 지역들에서 예외적으로 개시했다고 말했다. (펠로치-호르밧, 219쪽)
그러나 흐루쇼프를 위기의 문턱으로 몰아넣은 정치적 파동은 소련이 아니라 동유럽의 동맹 국가들에서 기인했다. 1956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폴란드에서의 노동자 봉기와 헝가리의 실패한 반혁명이 연이어 발생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흐루쇼프의 반(反) 스탈린 노선과 “평화공존”에 대한 설교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발생한 소요들에 대한 흐루쇼프의 대처는 비판을 더욱 야기했다. 1956년 가을 무렵, 흐루쇼프는 “불시에 축출당할 위험”의 한복판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생애≫, 246쪽) 흐루쇼프는 1956년 겨울 내내 공식 석상에 더 이상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연설을 발표할 때조차도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충성스러운 후계자로서 스스로를 치장해야 했고, 스탈린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내몰렸다.(크랭크쇼, 243쪽) 흐루쇼프는 20차 당 대회 비밀연설의 핵심적인 논제를 포기한 것처럼 비춰졌다.
대중적 여론과 공산당 상임위원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됐던 흐루쇼프는 주코프가 아니었다면 1957년 2월에 반격을 위한 최종적인 계획을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흐루쇼프는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의 기반으로서 기능해왔던 중앙위원회에 급격한 경제적 “탈집중화”에 대한 안건을 제시했다. “탈집중화”는 단지 선언적 표어에 그치지 않았다. “탈집중화”의 주된 안건들 중 하나는 국영 기계 - 트랙터 기지(MTS)를 집단농장에 매각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서 개별 집단농장으로 하여금 생산수단을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산업 부문에서 ‘탈집중화’ 계획은 레닌과 스탈린의 지도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구축됐던 중앙경제계획 부서들의 폐지를 시사했다. 중앙계획기구의 기능과 권한은 중앙의 느슨한 지도만 남은 채로 100개가 넘는 지역경제회의(소브나르호즈)로 이관됐다.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와, 사회주의 계획기구를 겨냥한 전면적인 공세는 평소에 흐루쇼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충성을 다했던 중앙위원회조차도 용인할 수 없는 조치였다. 몇 주에 걸친 투쟁을 통해 흐루쇼프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안은 공개토론에 회부하기 위해 분권화에 대한 안건을 단지 출판하는 것이었다. ‘분권화’에 대한 공개토론은 1957년 봄에 진행됐다. 1957년 봄의 공개토론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흐루쇼프는 지지세를 결집시키기 위해 지방 각지를 순회했다. 크랭크쇼의 서술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순회 도중 “소련 전역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모든 인사들에게 유례없는 특전을 약속했고, ‘모스크바 관료제’가 폐지될 경우 수많은 지방 관리들의 권한을 확대하여 승진의 폭을 넓힐 것”을 약조했다. (247쪽)
소련 공산당 상임위원회의 반대파들―이 당시 말렌코프와 몰로토프, 그리고 몰로토프의 동반자였던 카가노비치는 여전히 본래의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다―은 흐루쇼프가 ‘분권화’를 추진하는 순간까지도 하나같이 침묵을 유지했다. 정면승부를 치루지 않고도 흐루쇼프를 꺾을 수 있으리라고 자신한 것이었다. 펠로시-호르밧에 따르면, 흐루쇼프에 의해 장악됐던 당 출판물에서도 수많은 비판이 가해졌을 만큼 ‘분권화’ 정책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다. (24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의 계획은 “국가안보”적 측면―세부적인 경위는 단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다―에서 계획기구의 분권화를 옹호했던 주코프 원수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크랭크쇼는 중앙의 강력한 정부 부처들보다 사분오열된 지역경제회의에서 오는 저항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흐루쇼프를 향한 주코프 본인의 지지가 예상 밖의 일이 전혀 아니었다고 말했다. (248쪽)
흐루쇼프의 탈집중화 정책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적 파란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유례없이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경제조직의 탈집중화는 소련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제일 “선진”적인 제반 요구들을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표어에 함축시켰고, 맑스-레닌주의자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경제 부서들과의 연계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으며 상당한 특전을 누리고 있었던 비(非) 맑스-레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흐루쇼프에 맞서 모든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이처럼, 상임위원회의 다수가 당 규약에 의거하여 특별회의를 정식으로 소집하기 위해 1957년 6~7월에 핀란드 순행에 있었던 흐루쇼프를 소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크랭크쇼에 따르면, 핀란드에서 귀국했을 때, 흐루쇼프는 고립된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흐루쇼프는 상임위원회의 다수에 의해 1서기 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정도로 혹독하게 비판받았지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승인이 떨어지기 전까지 사임을 거부함으로써 승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우리가 7:4로 우위에 있지 않소?”라고 불가닌이 소리치자, 흐루쇼프는 이에 응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학적으로 2 더하기 2는 명백히 4입니다. 하지만 정치는 산술이 아닙니다. 정치는 산술과 다릅니다.” (249~250쪽)
브레즈네프 전기의 저자인 존 도른버그(John Dornberg)는 상임위원회의 과반수 이상이 흐루쇼프를 “기회주의적, 트로츠키주의적 정책을 추구한 혐의로 고발"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도른버그, <브레즈네프>, 뉴욕, 1974년, 152쪽) 흐루쇼프는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즉각적인 소집을 요구했다. 상임위원회 내부에서 회의가 길어질수록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크랭크쇼의 말대로(도른버그의 설명은 모든 기준에서 사실관계와 전반적으로 일치해도 상세한 설명이 부족하다) 의견 대립이 격화되자, "흐루쇼프 분파는 기습작전을 실행했다. 회의장에 참석했던 흐루쇼프의 측근들이 흐루쇼프에게 다수표가 쏠릴 때까지 회의의 진행 절차를 방해하는 동안, 지방 곳곳에 산재했던 흐루쇼프의 지지자들은 주코프 원수의 지원으로 군용 수송기를 통해 모스크바로 몰려들었다.”
크랭크쇼는 계속해서 말한다. “폴란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주코프는 대숙청 당시 행적을 구실로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말렌코프를 직접적으로 공격했으며, 반대파가 지난 시기의 행적을 반성하지 않을 경우 과거에 숙청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담긴 문서들을 공개하여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시 주코프의 개입이 지녔던 함의는 흐루쇼프의 지지자들을 모스크바로 제때에 이송시켰다는 측면과, 숙청 당시의 참상들에 관한 “문서들”을 공개하기 위해 반대파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소련 국방성의 수장으로서 주코프는 군 조직의 이해관계를 전반적으로 옹호했다. 주코프의 연설은 평소보다도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는 군대가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의 ‘반당파’ 내각을 향해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모든 상황이 정리됐을 때 반대파를 몰아낸 데에 대한 보상―몰로토프는 몽골 대사로 추방됐고, 말렌코프는 시베리아에서 전력 발전소의 한직으로 좌천됐으며, 흐루쇼프의 다른 반대자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으로서 주코프는 상임위원회에서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3달 후, 군사봉기론(putschism)이 흐루쇼프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을 때 주코프는 함정에 걸려들었고, 결국 본래의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다.
1957년 6월 이래로 흐루쇼프와 그 일파가 지지자들을 핵심 요직들에 배치시켰던 데에 반해,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의 측근들과 지지자들은 지도적인 위치에서 종종 밀려나거나 당과 정부에서 전원 밀려났다. 정쟁은 종결됐다. 흐루쇼프의 정책을 막을 이들은 당과 정부 기관들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1956년 6월에 흐루쇼프의 측근들과 반대파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의 막바지에 유혈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몰로토프와 말렌코프, 카가노비치와 이들의 지지자들은 근본적으로 군의 개입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흐루쇼프의 권력 장악은 피를 동반하지 않았고, 당의 규약에 따르면 흠 잡을 데 없이 “합법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본질적으로 흐루쇼프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군부의 우경적인 쿠데타였다. 흐루쇼프의 권력은 의문의 여지없이 총칼로서, 혁명적 병사와 농민들의 총칼이 아니라 부르주아 장교단의 총검을 통해 지탱됐다.
12. 공고화
1957년 6월의 “궁정” 쿠데타는 소비에트 국가의 조종실에서 일시에 조타를 부여잡고, 맑스-레닌주의 노선으로 회귀할 잠재적 역량을 부분적으로 갖추고 있었던 유일한 지도적 집단―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말렌코프―을 축출시켰다.
오늘날 책상머리에만 앉아 몰로토프와 그의 동지들이 패배를 예방하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 사전에 미리 알았다는 듯 조언을 베푸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물론, 몰로토프와 그의 동지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투쟁을 상부구조의 상층부 집단들에 주로 국한시키지 않았어야 했다. 이들은 투쟁을 대중적 차원으로 과감하게 확대시켰어야 했다. 한 소련학자가 밝혔듯이, 20차 당 대회(1956년 2월) 직후 수 달 동안 “상임간부회의 위원들조차도 공장에서 신흥 부유층 ‘권력자’들로 성토당했던 격렬한 회의들이 빗발쳤다.” (로버트 콘퀘스트, 소련의 산업노동자들, 뉴욕, 1967년, 11쪽) 만약 몰로토프와 그의 동지들이 공장에서 십시일반처럼 번져나갔던 이러한 흐름과 연계하고, 신흥 부유층 ‘권력자’들에 대한 성토에 합세했다면, 대중운동의 지도부에 투신했다면 결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해 이러한 사후적 판단에 몰두할 때,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려 들 수도 있었던 몰로토프나, 당과 국가의 지도적 인사들 중 어느 누구도 흐루쇼프의 연설과 정치적 모략뿐만 아니라 흐루쇼프 휘하의 비밀경찰을 위시하여 주코프 국방성 장관의 통제 하에 있었던 붉은 군대의 군사력과도 마주쳐야 했을 것이고, 패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56~57년에 흐루쇼프 일파의 축출은 일찍부터 내전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군대가 노동자들에게 총탄을 난사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 것인가? 군대의 어느 사단이 주코프와 흐루쇼프에게 충성할지, 몰로토프를 누가 지원했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명실상부하게도, 아무도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답변을 제공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질문은 분명 흐루쇼프 일파에 맞서 대중운동을 지도하고자 했던 지도부의 모든 성원들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됐을 것이다. 국제정세도 마찬가지로 중대한 요소였다. 소련에서 새로운 내전의 여파가 동유럽의 동맹국들에게 끼칠 파급은 무엇이었겠는가? 사태의 그러한 격화는 헝가리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반혁명적 복고를 위한 시도들을 더욱 촉진시키지 않았겠는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이라는 현실적인 위험은 냉전기의 풍토를 고려할 때 여전히 도사리고 있지 않았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역사적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살펴본다면, 극도로 복잡다단한 수십여 가지의 문제제기들은 마치 공리공담가처럼 몰로토프와 그의 동지들에게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조언하려 드는 모든 이들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의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발상은 추측의 영역에 불과하다. 그러나 흐루쇼프 일파가 최상층 당 기구에서 입지를 공고하게 다졌을 때 발생했던 일은 역사적 사실관계의 영역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국의 소련학자인 크랭크쇼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있는 흐루쇼프의 언사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미래로 역행했다.”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생애≫, 270쪽) 크랭크쇼가 말했던 바는 흐루쇼프 고유의 방식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흐루쇼프 일파가 권력 장악을 서둘렀을 때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도입된 세부적인 정책들과 강령들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오래 전 반혁명분자로서 진압했던 수천 명의 인원을 석방하고, 명예를 회복시킨 만큼이나, 흐루쇼프는 역사의 다양한 변곡점에서 볼셰비키 당이 투쟁을 전개했고 분쇄시켰던 반혁명적 정치 노선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을 향한 공격에 있어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논리였다. 흐루쇼프의 강령에서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새로운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흐루쇼프 시기 정책의 구체적인 요소들과 내용은 모두 당대의 여러 지도자들과 차기 지도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이들 중 대다수의 이름과 사상은 스탈린의 감수 하에 집필되어 소련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사≫나 기타 여러 서적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놀랍지 않게도, 흐루쇼프의 강령에서 핵심적으로 제기된 쟁점들 중 하나는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사≫에 대한 격하와 출판의 금지, 그리고 1961~62년 당시 수정주의적 당사로의 대체에 있었다.)
흐루쇼프는 오래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강령을 복기함으로써, 이를 전면에 제기한 장본인의 명예와, 그러한 정책의 재도입에 부응했던 인물의 신원을 회복시켜야 했다. 따라서 이와 동일한 방향에서 보다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하다가 1949~50년에 체포와 처형을 통해 제지당했던 보즈네셴스키 전(前)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기리기 위한 낯 뜨거운 공론화와 흐루쇼프의 중앙계획부처 폐지(1957) 조치가 보조를 같이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 9장을 보라.) 회고록에서 술회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1930년대 초반의 농업집산화에 반대했고, 쿨락의 이해관계를 옹호했던(이에 관해서는 본서의 제 4장을 보라) 지노비예프와 부하린, 리코프, 그리고 더 나아가 “인민의 여러 지도자들”을 공공연하게 옹호하는 지점에서 보듯 1956년에 흐루쇼프 자신을 방해했던 일정한 제약들, 즉 전권을 장악할 수 없었던 요인들은 명실상부하게 존재했다.(≪흐루쇼프 회고록≫, 보스턴, 1970년, 385쪽) 흐루쇼프의 1957년 연설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처럼, 이른바 “모스크바 관료제”에 맞선 혈기왕성한 장광설 또한 망명 시절 트로츠키의 옛 발언을 모방한 것이었다. 흐루쇼프 회고록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침묵은 실로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공산당 내부에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말렌코프가 당의 요직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이들 집단은 심지어 상임간부회에서도, 중앙위원회에서도 저항의 공간을 마련했고, 흐루쇼프의 노선을 저지했던 상당한 숫자의 동조자들과 동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흐루쇼프와 그의 일당은 1957년 내내, 1959년 1월의 21차 당 대회와 1961년 10월의 22차 당 대회를 통틀어 몰로토프의 “반당파”와, 이에 협력한 모든 당원들에 맞서 지속적인 비난과 중상을 전개했다. 당 지도자들을 향한 대대적인 축출과 교체는 이러한 투쟁의 한가운데서 발생했다. 중국과 알바니아의 공산당-노동자당들의 문헌에 따르면(소련 공산당 중앙위원들의 전체 명단이 항상 출판되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서방의 소련학자들은 단지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52년의 19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들 중 약 70%는 1956년의 20차 당 대회와 1961년의 22차 당 대회 사이에 숙청당했다. 마찬가지로, 20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약 50%도 22차 당 대회에서 숙청됐다.” (≪흐루쇼프의 가짜 공산주의에 대하여≫, 북경, 1964년, 29쪽과 ≪현대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알바니아 노동당의 투쟁≫, 티라나, 1972년, 258쪽을 참조하라) 당의 기층 조직들은 맑스-레닌주의 조직의 지하 팸플릿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1957년에 열린 회의들에서 “20차 당 대회의 결정들―흐루쇼프의 노선 등―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진 모든 당 세포들은 어쩔 수 없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해야 했다.” 기층 당 조직 차원에서 20차 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도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은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양적 변화들의 정점은 당의 성격 변화를 의미했다. 흐루쇼프의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론이 맑스-레닌주의와 대치된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당원은 수정주의적 노선을 수용한 당원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전체 당 차원의 노선을 확립하기 위해 “평화공존론”과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경쟁”으로 대표됐던 흐루쇼프의 총노선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흐루쇼프가 새로운 외양으로 부활시킨 카우츠키의 사상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읽고, 카우츠키보다 레닌의 입장에 섰던 당원들을 축출함으로써 본색을 어김없이 강조해야 했다. 당의 사상적 성격은 이로 인해 맑스-레닌주의적 당에서 수정주의적 당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이러한 사상적 변화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1961년에 그는 적대적 계급이 소련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여기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이에 부응하여 ‘전인민국가’로 변모됐다. 소련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 아니라 ‘전 인민의 당’으로 불리었다. 당의 계급적 구성이 중대한 문제로 되는 한, 새로운 강령은 부르주아적 출신 배경이나 오늘날 부르주아적 입장을 지닌 인자들의 입당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막을 당 규약에서 제거하는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공식적인 해설에 따르면,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당원의 계급적 견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방의 몇몇 학자들이 이른바 ‘개혁’에 대해 논한 것처럼 그 여파는 소련 노동자들의 생활과 동떨어져 있었던 관리자들과 전문가들, 관료들, 고위 학자들에게 당의 문호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학자 존 해저드(John Hazard)가 서술한 것처럼 당원증은 당원들의 사상과 지도적 역량과는 무관하게도 “영국의 기사작위”와 같은 용도로서 성공한 행정가들과 전문가들에게 수여되는 훈장으로 변질됐다. (발린스키 외, ≪소비에트 경제개혁의 정치학: 1960년대 소련에서의 계획과 시장≫, 뉴브런즈윅, 1967년)
소련 공산당의 새롭게 변화된 사회적, 계급적 구성은 흐루쇼프가 "생산원칙“이라고 일컬은 당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다. 신경제정책의 초기 단계에 작성된 레닌의 저술들에 대한 무맥락적인 인용문에서 이론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흐루쇼프는 당원들이 경제관리의 임무와 생산량의 증대를 정치적 지도부나 사상적 논쟁보다 우선순위로 삼을 것을 주문했다. (칼 A. 린덴, ≪흐루쇼프와 1957~1964년 소련 지도부≫, 볼티모어, 1966년, 159~152쪽 등을 보라) 당은 명백하게도, 외면상으로도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관리자들의 당으로 변질됐다. 관리자들의 권한은 그동안 괄목할 정도로 강화됐다. "생산원칙“을 체계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흐루쇼프는 당을 산업당과 농업당으로 양단했고, 지역 당원들의 급여를 농장과 공장의 "경제성과지표"에 따라 동일시하는 조치를 제시했다. (알렉 노브, ≪경제적 합리성과 소련의 정치≫, 뉴욕, 1964년, 93쪽) 이는 다르게 말해 당원들이 기업소에서 창출한 이윤의 양에 의거하여 임금이 결정되리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당의 계급적 구성 변화에 따른 실질적인 여파를 떠나서, 흐루쇼프의 당 '개혁'은 또한 레닌과 스탈린 하에서 소련 국가의 정책적 기조였던 노농동맹에 대한 훼방을 초래하는 결과도 또한 초래했다. 당을 농업당과 공업당으로 분할시킨 조치는 촌과 주 단위에서 당원들이 더 이상 노동자-농민의 유대를,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당 사업의 일부로서 더 이상 보존하고 강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당원들은 공업당과 농업당을 불문하고 두 편으로 갈라졌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전투구를 일삼았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정치와 경제의 제반 영역들에서 몰로토프와 그의 동지들의 '교조주의'에 대항하여 집중적인 공세를 가한다는 미명 하에 전개됐고, 새롭게 재개된 반(反) 스탈린적 비방과 함께, 1961년 붉은 광장 영묘에 안치된 스탈린의 유해를 제거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로버트 콘퀘스트 소련학 교수―결코 스탈린의 지지자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는 일련의 "모든 완화책들"(당 지도부의 스탈린에 대한 격하 운동을 뜻한다.)이 시행될 때마다 1962년 노보체르카르스크(Novocherkassk)에서의 "대규모 봉기"와 같은 사례들을 포함하여, 노동계급에 의한 파업과 기타 시위들로 점철됐다고 진술했다. (≪소련의 산업노동자들≫, 11쪽) 비록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러한 저항은 당 지도부가 스탈린에 대한 격하운동이 주춤할 때마다 기본적인 방향성을 유지하되, 스탈린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일정 부분 양보의 자세를 취했던 유력한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소련 공산당의 상태에 대해, 특히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정당으로 전환을 겪은 이후 보다 자세한 정보를 찾기에는 난맥이 따른다. 과거에도, 현재도 투쟁과 분파싸움, 그리고 역사에서 추론할 수 있는 각종 제 세력의 불화는 대표적으로 1964년 흐루쇼프 자신의 축출과 이후의 사건들에서 보듯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1960년대 초반 이래로는 어떠한 정치 지도자나 당 내부의 분파도 흐루쇼프의 노선에 대해 전략적이며 근본적인 반대를 천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층부 차원의 불화는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그럴 듯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해도 수정주의자와 맑스-레닌주의자들의 대결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의 한 분파와 다른 분파간의 싸움에 불과했다.
기층 당 조직의 상황은, 특히 이유를 불문하고 당에 잔류했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상황은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알바니아 노동당의 책자는 소련과 동유럽의 수정주의 정당들의 상태를 논할 때 레닌주의에 대한 악의적인 희화화로 규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수정주의 정당들에서 당 지도자들은 민주집중제를 목청껏 외쳤지만, 레닌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볼셰비키’적 비판과 자기비판을 논해도, 볼셰비즘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당적 규율을 외친다고 해도, 레닌주의적 규율이 아니라 오직 파시스트적인 규율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르주아적, 반(反)프롤레타리아적, 반맑스주의적 윤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성을 대체했다. 수정주의 국가들에서 애당심과 노동계급성에 입각한 사상적 표현은 교도소와 집단수용소의 마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알바니아 노동당의 반수정주의 투쟁≫, 415쪽) 1960년대 초반은 흐루쇼프 치하의 소련―앞서 인용한 맑스-레닌주의 지하조직의 소책자에 게재된 주장들을 보라―에서 최초의 맑스-레닌주의 지하조직들과 정파들이 극도의 비밀주의와 고립화된 여건 속에서 산발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