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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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극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개요

“다극화”는 오늘날의 국제정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점진적으로 해체되고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새로운 행위자들이 국제정세의 일익으로 떠오르고 있는 작금의 다극화 현상은 소련 붕괴 이래로 이어져온 전통적 국제질서를 개변시키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극화 현상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비단 각국의 외교안보엘리트와 금융계 인사들 뿐만이 아니다. 변혁을 꿈꾸는 좌파들 또한 다극화 현상을 주목하며, 각자의 논평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다극화가 제국주의 해체의 신호탄이며, 미제국주의에 맞선 중러 반제국주의 진영의 반격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다른 일각에서는 중러 또한 제국주의 세력에 불과하기에 다극화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아귀다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두가지 주장은 일견 보기에 서로 완전히 대립되고 있지만, 양쪽 모두 다극화라는 현상을 미국과 중러 간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중러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이론적 규정에 따라 해당 대립의 성격 또한 결정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다극화라는 초유의 정세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규정에 현상을 가두어 근엄한 평결을 내리기 이전에, 다극화라는 현상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고 현 국제정세의 주된 행위자들의 실질적 행동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을 통해서, 필진은 국제적 다극화 정세의 세부적 면모들을 톺아보고 남한의 변혁적 좌파들이 현 정세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다극화와 국제정세

소위 다극화라 불리는 경향의 실질적 현상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대안적 국제결제망의 구축이다. UAE,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산유국들이 브릭스에 가입한 이후 브릭스 국가들은 위안을 새로운 석유 결제 화폐로 채택하였다. 석유의 거래는 이제 더 이상 달러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수많은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는 국가들이 위안을 통해 석유를 결제한다. 위안은 국제시장에서 석유로 태환되며, 석유로 교환할 수 있다는 안정성은 곧 위안을 새로운 국제결제화폐의 지위에 앉혀놓았다. 코로나를 비롯한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자국의 경제부양을 위해 무제한적으로 달러를 발행하고, 달러 발행으로 인해 팽창한 통화량을 무역상대국들에게 구매하도록 강요해온 미국의 통화정책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현상은 미국의 정책 변화이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동이득 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질서를 보증하고 자유무역질서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을 앞장 서서 공격하던 미국은 자신들이 보증하던 자유무역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더 이상 자유무역질서 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트럼프 정권은 WTO 및 UN을 비롯한 핵심적 국제기구에서의 탈퇴를 운운하고 있으며 동맹국과 적국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으며, 자국 기업들에 대한 덤핑을 통해 제조업을 부활시키려 하는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더하여, 미국은 남한, 일본, 유럽 등을 비롯한 외교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의 대기업들에게 덤핑 및 관세라는 채찍을 내세워 미국으로 생산공정을 이전할 것을 강요하며 실질적으로 산업을 약탈하고 있다. 상술한 경향은 생산공정을 반식민지 국가로 이전하여 이윤을 ‘착취’하던 기존 미국의 정책이 이제는 타국 자본과 산업기반에 대한 노골적인 ‘수탈’로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 현상은 브릭스의 결속화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래로 러시아에 가해진 서방의 제재는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적 결합을 촉진하였다. 오늘날 러시아는 국제무역에 있어서 중국의 통제 하에 있는 결제망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소비재와 공업재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다. 기존의 브릭스에서 러시아가 중국과 대등한 파트너로서 브릭스의 집단지도를 이끌었다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종속되어 감히 중국에 대한 견제를 꾀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브릭스에 UAE와 사우디 등 최근들어 중국에 밀접해진 국가들이 대거 가맹하면서 인도의 브릭스 내 운신 폭이 좁아지자 올해 초 인도는 중국이 제안한 국경분쟁 협상에 응하며 중국과 인도 간의 오랜 갈등 요소였던 국경분쟁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이렇듯, 브릭스 진영은 점차 결속되고 있다.

네 번째 현상은 유럽의 탈미화, 재무장화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대거 삭감되자 유럽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명목 하에 유럽 국가들 간의 통합적 지휘체계와 통합적 정보협력망 등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럽 블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인 프랑스와 독일 등은 국내적으로 징병제 부활과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등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을 끊어내고 러시아를 주된 적성국으로 삼는 새로운 군사적 블록으로 발돋움 하는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군국주의화에 발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 현상은 일관적으로 자유무역질서의 붕괴와 블록화, 그리고 이로 인한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 및 모순의 첨예화라는 현 정세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제국주의 자본은 더 많은 시장과 더 많은 자본수출로를 요구하기에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 및 모순의 첨예화는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양차 세계대전과 같이 세계재분할을 목표로 하는 국제적 군사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우리는 다극화가 전례없는 특수한 현상이 아닌, 낡고 쇠퇴해가는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의 필연적이고 파국적인 귀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파국을 향해 달려나가는 제국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극화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이다. 이제 우리는 다극화 현상을 주제로 한 몇가지 논제들을 살펴보며 변혁적 좌파가 다극화라는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지를 논해보겠다.

3. 다극화를 둔 논제들

남한 좌익 진영의 다극화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입장은 다극화가 제국주의 세계질서 해체의 신호탄이며 중국과 러시아의 부상은 미제국주의가 쇠퇴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다극화를 본질적으로 반미/반제국주의적 기획으로 바라보며, 다극화 기획에 편승함으로서 제국주의에 의한 종속을 극복하고 변혁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첫 번째 입장을 취하는 이들 내부에도 중국과 러시아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본질적 층위에서는 이들 모두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주체로서의 중국과 러시아를 지지한다.

반면, 다극화에 대한 두 번째 입장은 다극화가 제국주의 열강 간의 아귀다툼에 불과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최근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또한 제국주의 국가이기에, 다극화 기획 또한 제국주의적 기획이므로 미제국주의와 질적으로 동일한 타도 대상이라고 바라본다. 동시에, 이들은 다극화 현상에 대해 중러 모두 제국주의이며 타도 대상이라는 입장, 그리고 ‘반미와 반제는 동일하지 않다’는 형식적 구호 외에는 추가적인 분석을 내놓지 않는다. 이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거부하며 정세분석에 있어 전술적 층위에서의 사고를 배제한다.

다극화에 대한 이 두 가지 입장의 대립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논제에 기초해있다. 다극화는 반제국주의인가? 또한, 다극화 기획은 반미적 기획인가? 이 두 가지 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상술한 대립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본질적 논제의 분석 없는 상호논박은 남한 운동사회의 오랜 병폐인 정파적, 형식적 구호의 난무로 이어질 뿐이다. 우리는 조사에 있어 변증법적 방법론을 고수하며, 악무한에 빠져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다극화를 둔 쌍방의 공허한 선전구호들을 제쳐두고 이 두 가지 본질적 논제에 집중하겠다.

 

다극화는 반제국주의인가?

다극화 기획이 반제국주의적이기 위해서는 다극화를 추동하는 주요한 주체들이 반제국주의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다극화의 가장 중심적 주체인 중국의 경우 제국주의 국가인가의 여부를 둔 수많은 논점들이 존재한다. 제국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자본수출의 수준을 살펴보자면, 중국은 2023년을 기준으로 세계 해외직접투자량의 11.4%를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인 해외직접투자의 규모는 2.96조 달러로, 이는 세계 3위에 달하는 수치이며 국내총생산인 19.79조 달러의 10%를 넘는다. 동년 미국의 해외직접투자량은 6.9조 가량이었으며,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인 27.72조 달러의 약 25%에 달하는 금액이다. 동년 독일의 해외직접투자량은 1,300억 달러 가량이었으며, 이는 독일의 국내총생산인 4.5조의 약 3%에 달하는 금액이다.

즉, 중국의 국내총생산에서 해외직접투자, 즉 자본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제국주의에 비해서는 낮으나 독일제국주의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높다. 중국공산당은 2000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3차회의에서부터 해외진출의 대대적 추진을 결정했으며, 중국의 해외직접투자의 대부분은 반식민지 국가의 토지를 대거 매입하고 매입한 토지에 공장이나 사업장을 새로 짓는 ‘그린필드 투자’로 이루어지고 있다.

혹자는 중국의 자본수출이 미국,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수출과는 다르게 구조조정이나 관세 인하 등 약탈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상호호혜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는 달리 타국에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가하지 않기에 중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첫째로, 중국의 자본수출이 구조조정이나 관세 인하 등의 조치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약탈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중국의 해외투자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중국이 서방과 달리 해외투자의 조건으로 투자대상국의 구조조정, 관세 인하, 시장화 조치 등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은 그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소위 ‘패키지형 개발사업’은 상당히 관대한 조건으로 대상국에 투자를 제공하지만, 그 대가로 투자대상국이 투자받은 자금을 중국계 기업에 수주를 맡기고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데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즉, 중국의 ‘패키지형 개발사업’의 본질은 단순한 투자이익을 수취하는 것을 넘어 투자금액이 다시 자국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게끔 만드는 이중수취에 있다. 이러한 자본수출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서방에 비해 훨씬 더 호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서방의 자본수출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착취적 경향성을 보인다.

둘째로, 중국이 타국에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중국은 덩샤오핑 정권 때부터 인도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의 벵골 지역 마오주의 반군 진압을 적극 도왔으며 미얀마의 군부 파시스트 정권을 지원한 바 있다. 또한 중국은 지부티에 해군 기지를 건설했으며 파키스탄에 군함을 배치하고, 몰디브, 적도 기니, 미얀마 등지에 군사 기지를 건설 중에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독일제국주의를 능가하는 자본수출량을 보이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이며 중국의 자본수출전략은 본질적으로 서방제국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착취성을 지니고, 중국의 대외정책은 덩샤오핑 정권 이래로 타국에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가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중국은 반제국주의적 지향성을 지니는 국가일 수 없다.

그렇다면 혹자는 비록 중국이 제국주의 국가일지언정 브릭스에 함께하고 있는 인도, 브라질 등의 정권은 반제국주의적 목적을 지니고 중국과 전술적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 브라질은 대토지 소유가 청산되지 않고 대다수의 자본이 해외에 종속되어 있는 전형적인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이다.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의 경제는 해외 독점자본에 종속된 매판자본이 지배하는 식민지적 부문과 봉건적 대지주들이 지배하는 봉건제적 부문으로 나뉜다. 이러한 두 부문은 상호의존적인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반식민지-반봉건 국가 내에서의 경제적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의 자체적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의 퇴행적이고 봉건적인 부문이 유지되도록 압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의 식민지적 부문은 봉건제적 부문에 의존하며, 봉건제적 부문은 식민지적 부문에 의존한다.

반제국주의란, 자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을 청산하고 국제 제국주의에 맞서는 지향성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인도, 브라질 등의 정권이 반제국주의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면 자국의 반식민지적 부문을 청산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국의 자체적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봉건적 부문, 즉 대지주에 의한 지주소작제를 청산해야만 한다. 반봉건 없는 반제국주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허나 인도의 모디 정권과 브라질의 룰라 정권은 자국의 봉건적 생산양식을 청산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모디 정권은 코로나 시기 농촌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룰라 정권은 1기 집권기 당시 토지개혁을 빙자한 토지개악을 통해 아마존 지역의 사적 토지소유관계를 강화한 바 있다. 이는 모디 정권과 룰라 정권이 본질적으로 매판자본과 봉건지주를 대변하는 종속적 정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권이 반제국주의적 성격과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피억압 국가에서 반식민지적, 반봉건적 경제부문을 청산하는 작업은 하나의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으로 교체하는 사회혁명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으며 결코 매판자본과 봉건지주를 대변하는 정권에 의존할 수 없다.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의존하는 것 또한 결코 방법이 될 수 없다. 브라질, 인도에서의 제국주의의 청산은 오직 노동자와 농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 즉 공산당이 주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결론적으로 다극화 기획은 반제국주의적 세력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제국주의 국가의 지도부와 피억압 국가의 종속적 매판세력을 대변하는 정권들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다극화는 반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논제가 있다. 과연 다극화는 반미적 당파성을 지니고 있는 기획인가? 이 지점에 있어서, 상술한 다극화 편승론자와 다극화 제국주의론자들은 동일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세계적 지위를 위협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중심이 되어 추동 중에 있는 다극화는 반미적 당파성을 띈다는 것이 그들 모두의 입장이다. 다극화 편승론자들은 그렇기에 다극화가 지지해 마땅한 반미-반제국주의 기획이라고 주장하며, 다극화 제국주의론자들은 ‘반미가 곧 반제국주의는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의 실질적  정책을 살펴볼 때, 다극화 기획은 일관적인 반미적 지향성을 띄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중국의 국제정치전략을 연성패권전략으로 규정한다. 연성패권전략이란 기존 패권국과의 직접적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전략으로, 기존 패권국의 지위와 입지를 인정하면서 자국의 지역적 패권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양상이다. 실제로, 중국은 미국의 핵심이익지대를 단 한번도 침범한 적 없다.

UAE, 사우디 등을 브릭스로 끌어들인 것은 이미 미국이 트럼프 1기 당시 셰일가스 개발에 중점을 기울이고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 투사를 일정하게 포기한 뒤의 일이며 중국이 활발한 자본수출을 진행 중인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또한 미국의 필수적 이해관계와 관련이 없는 지역들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있어서도 중국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는 기존 서방제국주의의 위선적 구호였던 양국방안을 대외적으로 고수하며 양국방안의 실현 촉구를 반복적으로 외칠 뿐이었다.

이렇듯, 다극화 기획은 미제국주의 패권의 붕괴를 추구하는 반미적 기획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과 지위를 일정하게 인정하면서 중러 등 지역 패권국들의 국제적 발언력과 교섭력을 강화하여 현 국제질서를 보완하고 개편하려는 개혁주의적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4. 다극화 정세에서의 전략

다극화 정세에서 기회를 얻어 정권을 탈취한 사헬연합 지도자들

그렇다면, 다극화 현상은 일부 초좌익들이 주장하듯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제국주의자들의 아귀다툼에 불과할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제국주의자들은 서로의 살을 깎아먹게 된다. 국제 제국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침략할 수 있었던 일극 시대와는 다르게, 다극화 시대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공동의 이득을 추구하기 보다는 서로의 영향력을 저해시키는 것에 집중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일부 피억압 국가들에서는 일정한 권력공백 상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를 테면, 프랑스와 중국이 치열한 상호견제를 벌이고 있는 아프리카의 경우 특정 세력이 정치군사적으로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등의 국가에서 토마스 샹카라를 계승할 것을 주장하는 반제국주의적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단순한 군사정변을 통한 사회적 변혁은 매우 어려우며, 또한 해당 정권들의 실질적 성격의 경우 앞으로 지켜보고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이는 다극화라는 현상이 반제국주의 세력에게, 그리고 국제 좌익에게 어떤 가능성을 제공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상호투쟁은 곧 피억압 국가 내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의 기회이다. 변혁적 좌파들은 단순히 다극화 기획을 추종 및 편승하거나, 혹은 마땅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무시해 마땅한 분쟁 정도로 규정하는 등의 태도에 만족하지 않고 다극화가 불러오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피억압 국가의 좌파들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상호투쟁 심화라는 정세에 맞춰 반제반봉건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전면적 변혁운동에 나서는 한 편, 제국주의 국가의 좌파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피억압 국가에 대한 군사개입에 맞선 반전평화운동을 강화시키고 피억압 국가에서의 변혁운동을 옹호 및 방어하며, 반전평화운동을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종합하여 볼 때, 남한 좌파들의 다극화 정세에서의 책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는 우크라이나에서, 근 미래에는 대만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일체의 파병과 참전, 지원을 거부하기 위한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할 것.

둘째,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을 남한 내의 매판적, 종속적, 분단적 세력들을 파괴하고 자주적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혁명적 통일운동으로 발전시키고, 해당 운동 내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력을 확립할 것.

셋째, 피억압 국가 인민들과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며 인도, 브라질, 터키, 필리핀을 비롯한 피억압 국가에서의 인민전쟁을 방어하고 해당 국가의 반동적 정부에 대한 남한 정부 및 기업의 지원을 가로막기 위한 혁명방어운동을 조직할 것.

넷째, 상술한 과업들을 추동하고 지도하기 위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 즉 공산당을 건설할 것.

남한 좌익의 정치적 운명은 위 네 가지 책무를 달성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며, 이 네 가지 책무의 달성에 실패한다면 남한 좌익들은 다극화라는 고조적 정세에서 그 어떤 정치적 이득도 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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