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글은 캐나다의 철학교수, 맑스주의자인 무파와드 폴이 작성한 글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오늘날 가부장제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잔재를 이용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밀한 조준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공산주의적 페미니즘"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여성의 적이다!
J. Moufawad-Paul
나는 모든 공산주의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공산주의 진영에는 페미니즘의 개념에 대한 약간의 혼란이 존재한다. 우선, 페미니즘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지지도 여전히 소위 통합된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소부르주아적” 일탈이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그들도 아마 공산주의 기획에 여성 해방이 포함 될 수 있으며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노동계급만이 노동계급을 해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공산주의자의 주요한 과업이 노동계급의 해방이기에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주요 과업에 대한 초점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가부장제의 지속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여러 페미니즘 전통의 체리피킹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도 존재한다.
나는 이미 여러 글을 통해 상술한 첫 번째의 혼란, 즉 페미니즘의 거부에 대해 다루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반복해서 기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최종적 상황에서 분명히 혁명적 중심점으로 기능할 것이지만 우리는 이 최종적 상황이 광범위한 억압의 지점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부치 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과 젠더는 종종 “가장한 계급”이다. 즉, 계급 구성은 여성혐오와 같은 실존하는 억압에 영향을 받는다-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종종 여성화되고 종종 인종화 된다-그리고 성과 젠더(혹은 다른 억압의 지점)의 압력에 의해 공동 규정되지 않는 완벽한 노동계급을 상정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상상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동계급은 주로 백인과 남성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맑스와 레닌을 거쳐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혁명이든 본질적으로 소위 “제 2의성”의 자결과 관련이 있다고 인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페미니즘에 관한 공산주의자들의 두 번째 혼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이는 공산주의 페미니즘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대신에 복수의 비공산주의(때로는 반공주의) 페미니스트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고 페미니스트 투쟁과 공산주의 투쟁을 마치 별개의 것인 양 분리하는 관행이다. 우리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서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진보주의자, 혹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른 의미여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전체 페미니스트 전통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예를 들어, 우리가 공산주의자로 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중요한 통찰을 전유할 수 없다거나 하는(나는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주장해왔다)-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 유형의 페미니즘과 일반적이고 모호한 페미니즘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전체 페미니즘 전통을 어떻게든 반공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격하하려는 입장에 맞서 싸워야 하듯이, 결국에는 혁명의 마비를 초래하고 말, 무비판적인 “뭐든지 좋은” 페미니즘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이 글의 제목은 PCR-RCP[1]의 페미니스트 전선이 국제 여성의 날 행진에서 제창한 구호에서 유래했다. 페미니스트 전선은 “가부장제는 여전히 여성의 적이다”라는 주최측의 구호에 “자본주의는 여전히 여성의 적이다” 라는 구호로 응답했다. 페미니스트 전선은 이러한 구분을 공산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 간의 중요한 변별점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 전선은 다른 페미니스트 기획들은 이들이 얼마나 급진적 외양을 지니 는지와 무관하게, 핵심적인 공산주의 기획을 통해서만 확립할 수 있는 혁명적 단결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여성의 적이다: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페미니스트 전선을 위해”라는 문건에서, PCR-RCP의 페미니스트 전선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 여성들은 투표를 할 수 있다. 또한 캐나다의 부르주아 법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혼모와 실업 여성들이 법을 통해 지키거나 유지할 재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 당신의 유일한 소유물이 당신 자신의 노동력일 때, 당신에게 할당된 유일한 것이 집세를 내고 생존하기 위한 작고 불충분한 월급 뿐일 때, 부르주아 법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법률 상의 남녀 평등은 지배계급을 제외한 그 어떤 이들에게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전선이 표현하려 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으로, 이는 인도공산당(마오주의)의 후기 중앙위원이었던 아누라다 간디[2]에 의해 이론적으로 주조되어 마오주의 정파들에서 일정한 호응을 얻고 있는 공산주의 유형의 페미니즘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의 선례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그리고 여성해방에 말로만 봉사하는 것을 넘어 공산주의 유형의 페미니즘을 실제로 행동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최근의 혁명운동(페루 공산당의 여 성 간부 동원과 권한부여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은 히실라 야미[3]의 매우 중요한 문건인 인민전쟁과 여성해방[4]에서 더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페미니즘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에 대한 별다른 사고 없이 단순히 다른 페미니스트 전통들을 게으르게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고, 공산주의 기획의 맥락에서 혁명적 공 산주의를 위한 페미니즘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즉 그들이 경쟁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전통들을 게으르게 취사 선택하기 보다는 다양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조류를 체계화 하는데 성공했다면, 공산주의자들 또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급진적 페미니스트 전통(물론 급진적 페미니스트 전통은 중요성을 지니 지만)이나 기존의 모호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가부장제의 종식과 모든 젠더, 성별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강력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전통은 역사 상 처음으로 여성의 해방을 위 한 근거를 말 그대로 만들어내면서 가치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 북미와 유럽의 여성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지니지 않았던 반면에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은 여성에게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부여했으며 피임과 임신중절을 합법화하고, 여성 거래를 분쇄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전통을 체계화 해야 하며, 체계화를 통해서 이론적으로 간단명료하며 진정 우리의 것인 페미니즘 유형을 개척해야 한다.
맑스주의자의 입장에서 사적 유물론의 방식으로 페미니즘 의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분명히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에, 특히 “재생산 노동”의 이론화에 중대하게 공헌 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헌은 체계적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창출이라기 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맑스주의의 개입이었다. 후자는 공산주의 유형의 페미니즘을 건설해내는 단계로서 중요성을 지니지만, 전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세계적 차원에서, “재생산 노동” 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해방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 간디가 주장 했듯이, “재생산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의 여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질문은 여성이 생산 수단(단순히 재생산 뿐만이 아니라 그 들의 신체와 사적 영역)과 필수품의 확보 수단, 그리고 부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여성의 종속이 끝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아누라다 간디의 중요한 에세이 중 하나인 페미니즘 운동상의 철학적 조류들[5](간디의 활동명 Avanti라 는 필명으로 작성된)은 스스로를 다른 페미니스트 조류와 분리하여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을 건설하려 시도한다. 또한 이 에세이에서, 간디는 기존의 다양한 페미니스트 경향들이 일정한 중요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혁명적 기획에 있어 막다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와 혁명적 실천보다 가부장제를 강조한 것에 있었다. 즉, 사회적 계급 간의 근본적인 분화를 남성과 여성의 분화로 인식한다면, 사회가 하나의 총체로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적 억압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들의 계급적 입지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이해관계를 가질 때, 이러한 분화에 기초한 혁명적 기획이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다르게 말해, “여성이 충분히 혁명적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간디의 답은 성/젠더 정체성은 물론 혁명적 기획을 통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며, 또한 가부장제의 지속성과 여성혐오의 역사에 대한 인지가 부재한, 조잡한 방식의 계급 이해 또한 억압받는 대중을 동원하기에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 히실라 야미(프라반티 동지라는 활동명을 사용했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성은 억압 받는 집단들 중에서도 가장 억압받는 집단일 뿐만 아니라 가장 마지막으로 해방될 집단이고, 혁명의 승리 뿐만 아니라 혁명의 지속에 있어서도 활용되어야 할, 가장 믿을 수 있으면서도 안정적이고, 기초적인 역량이다.” 여기서 히실라 야미의 주장은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나 피억압 대중에 속하는 여성은 같은 계급의 남성보다 혁명의 진입에서 잃을 것이 적기 때문에 혁명운동에 있어서의 그들의 권한은 혁명을 지속하는 열쇠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히실라 야미는 여성을 지도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실패한다면(물론, 이는 가부장적 사회관계로 인한 오류이다) 혁명 또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성보다 잃을 것이 적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이념적, 정치적 권한이 부여된다면 남성 간부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혁명을 보호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차 별적 오류, 즉 여성을 이념적,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오류는 혁명 대열 내의 여성(히실라 야미 는 혁명적 군중 속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들로 하여금 혁명의 실패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고 정세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없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이념적, 정치적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여성들은 혁명 이 실패의 시기에 접어들어도 잃을 것이 없을지도 모르는 남성 지식인들의 분석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미의 주장은 페미니즘에 대한 간디의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페미니스트 기획이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부르주아 여성 간의 단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야미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자신들과 물질적으로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부르주아 여성보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더 많은 공통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스트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부르주아 여성 간에는 혁명적 단결이 있을 수 없고, 부르주아적 권리를 위한 일시적 단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여 성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단결만이 존재 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 혁명적 단결이 있을 수 없다는,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사실은 이러한 단결 시도를 검토해볼 때 명백해질 것이다. 일례로, 이 글은 여성혐오자 무리가 존재했던 /r/communism[6]에서, 이 공간이 공산주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공간이기도 하다는 적절한 선언과 함 께 벌어진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투쟁을 기념하여 페미니스트 서브레딧과 통일전선을 펼치려는 선의의 시도가 있었고, 페미니스트 서브레딧의 이용자들은 여성혐오자들에 맞서 단결하기를 희망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반공주의적 이유로 인해 공산주의와 동일시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간의 융화가 실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실패는 투쟁의 대상, 그 리고 투쟁에서 예견되는 계급 통일이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보자면, 페미니스트 전선에서 가져온 이 구호, 즉 가부장제가 아닌 자본주의가 여성의 적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부장제 생산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부장제는 반봉건적 사회 체제(즉, 법적으로 여성이 소유물로 간주되는 체제)에서 물적 기반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정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몇몇이 바라듯이 가부장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가부장제의 잔재는 매우 명확한 방식으로 남아있다. 가부장제의 잔재는 상부구조에 보존되었으며, 과거의 생산양식에 의해 승계되었고, 토대의 발전을 추악하게 방해하고 있다.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로서 작동하기 위해 가부장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최종적 상황에서는 가부장제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는 가부장제에 의해 매개되며, 자본주의의 사회 계급은 가부장제의 옷을 물려받는다. 가능세계의 자본주의(즉, 상상 속의 자본주의)만이 이러한 가부장제의 잔재 없이도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에 따르면, 이러한 통찰은 궁극적인 목적을 규명해낼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가 여성의 적으로서 가부장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가부장제에 의해 매개되고 중재되며 현재 가부장제가 의존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 아닌, 이념적 상부구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부장제에 맞서야 하지만, 자본주의에 맞선 근본적인 투쟁의 일부로서 가부장제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투쟁은 비공산주의 페미니즘이 창출할 수 없는 혁명적 통합을 필요로 한다.
- 캐나다의 맑스레닌마오주의 정당인 캐나다혁명공산당을 의미한다.
- 인도공산당(마오주의) 소속의 혁명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로, 인도공산당 전투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혁명이디바시(인도 중부지역의 원주민)여성조직을 이끌었다.
- 과거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소속의 혁명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
- https://www.marxists.org/subject/women/authors/yami/337330316-Peoples-War-Womens-Liberation-in-Nepal.pdf
- https://www.marxists.org/archive/gandhy/2006/philosophical-trends-in-feminist-movement-2nd-printing.pdf
- 공산주의 관련 서브레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