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마오주의적 필연성
슬라보예 지젝은 “레닌을 회피하고서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맑스’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젝보다 더 나아가, 마오를 회피하고서 도달할 수 있는 맑스와 레닌은 없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맑스의 이름을 가진 과학, 맑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마저도 이 과학이 큰 도약으로 발전한 이론적 사례들을 통해 굴절되어야 한다. 더 큰 연속성의 일부로서 파열의 순간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연속성-파열의 변증법에 근거하여 개입하였고, 이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마오주의가 역사와 사회과학에 있어 가장 최근의 이론적 지형이라는 가정이다. 또한 맑스주의를 살아있는 과학으로 인식하기 위해 이 변증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연속성은 파열만큼, 파열은 연속성만큼 중요하며, 이와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혁명과학의 기초를 약화시킨다. 이는 마오주의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메타정치적 지점에서, 그리고 의미의 수준에서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는다는 점에서 철학적인 지점이다. 결국, 인민전쟁이 현장을 점령한 혁명적 투쟁의 지형에서 ‘왜 마오주의인가?’를 묻는 것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마오주의를 표방하는 인민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해답을 제시한다.
어쨌든 연속성과 파열이 밀접하게 관련된 용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암시는 어느정도 성찰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파열의 순간을 거부하고 연속성의 순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연속성의 순간을 거부하고 파열의 순간만을 선호하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양자는 어떤 곳으로도 우리를 이끌어가지 못한다.
파열을 거부하고 ‘순수한’ 맑스주의에 대한 개념화를 요구하는 이들은 향수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쓴 글이 모두 옳았고, 그들의 충실한 지지자들이 쓴 글 역시 모두 옳았기 때문에 이들은 모든 모순의 순간과 오류들을 무시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파열을 물신화하고 연속성을 거부하는 이들은 상상적인 미래에 도취될 것이다. 단절된 순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으면서,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 끝없이 헤메기 십상이다. 과거가 우리를 악몽처럼 짓누르고 있지만 이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는 이전 시대의 모든 실수, 막다른 골목, 수정주의적 결말을 재발명할 위험에 처한다.
연속성과 파열의 변증법은 모순의 한 측면에 집착하는 이들에 의해 억제될 수 없다. 반대의 측면은 언제나 표현될 것이고, 억압된 것은 끊임없이 복귀할 것이다. 파열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야말로 최악의 형태의 파열을 가져올 것이다. 만약 맑스주의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살아있는 과학이라면, 연속성만을 찾는 것 역시 맑스주의로부터의 파열일 것이다. 동시에, 파열의 물신화 역시 연속성을 낳을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과학적 관심 없이 새로운 혁명전략을 생산하려는 연속성,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연속성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속성과 파열은 관계적인 전체에 포함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맑스주의와 마오주의를 연결하는 혁명적 연속성이 존재한다. 맑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 사이의 중요한 파열 역시 존재한다. 한때 우리는 레닌주의의 문을 통해서만 맑스주의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는 마오주의의 렌즈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시작한 혁명전통과의 연속성이 파열과 관계없이,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충실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운동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산주의자인 것은 공산주의가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인 이유는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공산주의를 만드는데 전념하는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했던 마오주의 운동들은 혁명전략의 중심에 그들의 이론을 두었고, 인민전쟁을 통해 특정한 정세에서 공산주의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초점은 마오주의를 선전에 만족하고, 일관되지 않은 운동주의적 전략에 참여하며, 혁명적인 군사전략을 추구하지 않는 다른 공산주의 경향과 구별되게 하였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혁명의 전망을 유보하는 일부 경향들은 낮은 수준의 선동과 개량주의적 정치 참여에 만족하며, 대중이 자생적으로 전문화된 군대에 대항하여 성공시킬 반란을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마오주의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또 다른 경향들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부분의 대중들이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것을 기다린다. 이들은 다른 사회적 맥락의 혁명가들이 세계적 혁명을 일으키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데르벤트(T. Derbent)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사회혁명 프로젝트는 군사적 대결 문제를 미리 고민해야 한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러한 연구를 미루는 것은 혁명 세력을 무력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군사정책의 개발이 혁명이론의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겠지만, 이러한 발전이 정치노선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경향에 필요하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초점이 없다면,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해 존재해야 하고, 공산주의의 출현은 전략화되어야 한다. 적들은 공산주의의 출현을 막을 방법을 전략화했다.
하지만 마오주의의 역사적 경험은 혁명전략에 대한 거부로부터 벗어나 공산주의를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혁명전략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다양한 포괄적 당 조직을 만들어냈다. 마오주의의 출현은 인민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주의는 이러한 실천에 대한 전략적 통찰력을 만들어냈다.
맑스가 계급혁명의 필연성을 주장했다면, 맑스주의의 전통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이들은 누구나 그 필연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현대 마오주의가 대표하는 연속성과 파열의 마지막 측면이 존재한다.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연속성, 그체적으로 혁명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 연속성과 파열의 전체 문제는 이 초점에 의해 통합된다.
역사는 자신들의 정치를 전략적으로 실행하지 못한 혁명운동의 묘지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우리의 임무는 이 지하묘지를 탈출하여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는 필연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은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실천적 토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