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있을 때마다 (‘인류 역사’는 말할 나위도 없이) 유물론은 자신의 형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왜 양자역학인가
오늘날 인류 문명은 말 그대로 양자역학 위에 서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우리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응용한 각종 장치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스마트폰의 CPU에는 전자의 파동성을 이용한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의료 현장의 MRI(자기공명영상)는 인체를 구성하는 수소 원자핵이 지닌 고유한 양자적 성질인 스핀을 강한 자기장 속에서 공명시켜, 몸을 절개하지 않고도 내부 장기와 조직을 정밀하게 촬영해낸다. 인터넷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하는 광섬유 통신망, 편의점 계산대의 바코드 스캐너에 내장된 레이저 다이오드, 심지어는 태양광 발전 패널까지, 이 모든 기술은 양자역학의 발견과 이해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또한, 세계 주요 연구 기관들은 오늘날 양자 알고리즘을 이용해 기상 패턴과 기후 변화 시나리오를 보다 정밀하게 예측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으며, 다양한 복잡계 문제들을 분석하고 조율하는 양자컴퓨팅 알고리즘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과학기술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관통하고 있는 양자역학은 이제 더 이상 일부 물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양자역학이라는 과학기술적 성과가 문명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발전과 변혁을 지향하는 이들 가운데 이 새로운 과학의 기본 원리와 그것이 함축하는 세계관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과학의 발전에 역행해온 철학자들과 반동 진영, 심지어는 양자역학을 개척한 일부 물리학자들조차 이 이론을 신비화·미신화하여 여러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아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전자를 관측하기 전에는 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나 “인간의 의식이 실재를 창조한다”는 왜곡된 해석이 대중의 인식을 장악해왔다.
심지어 우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이들마저도 이러한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양자역학이 내포한 다양한 과학적·철학적 함의가 오히려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줄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방치해온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을 총괄하고 이를 변혁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와 그것이 함축하는 세계관적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과제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혁신적 기술들을 가능케 한 양자역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이 미시세계의 운동 법칙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온 전통적 논리학과 세계관에 대해 어떤 함의를 내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탁월한 방법을 제공한다. 우선 고전물리학이 딛고 서 있던 기본 전제들과, 그것을 뒷받침했던 형식논리학적 사고방식부터 짚어보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형식논리학과 고전물리학의 세계
형식논리학은 인간 사고의 엄밀성과 일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고안된 논리 체계이다. 그 핵심에는 동일률(A는 A이다), 모순율(A는 non-A일 수 없다), 배중률(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며, 제3의 가능성은 없다)이라는 세 가지 기본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중에서도 모순율은 가장 확고한 기초로 간주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 바 있다.
“모든 근본적인 원리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상호 모순되는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이러한 형식논리학적 세계관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의 철학적 근간이 되었다. 고전물리학에서 우주는 거대한 시계 장치와 같은 결정론적 체계로 간주되었다. 어떤 시점에서의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뉴턴의 운동 방정식을 통해 그 물체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상태를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지배적이던 결정론적 세계관(라플라스적 결정론)의 요체였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입자는 점(點)과 같이 국소화된 존재이고, 파동은 매질을 따라 퍼져나가는 분산된 교란이다. 빛은 뉴턴 시대에는 입자의 흐름으로, 훗날 하위헌스와 영에 의해 파동으로 기술되었지만, 핵심은 그때마다 빛이 오직 하나의 실체로만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양자택일의 문제였을 뿐이다.
이와 동일한 사고 체계는 현대 컴퓨터 과학의 기초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는 오로지 0 아니면 1의 상태만을 가질 수 있다. 0과 1이 공존하는 상태는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며, 이러한 비트들의 결정론적 연산이 모든 디지털 시스템을 구동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거시적이고 직관적인 일상 경험과 대부분 부합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절대적인 진리처럼 군림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물리학은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한다. 관측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와 아원자 수준의 미시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고전물리학과 형식논리학의 기본 전제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실험적 사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계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명확히 구분된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용어사전
형식논리학: 명제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 구조에 근거해 타당한 추론 규칙을 다루는 논리 체계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출발해 이후 수리논리학으로 발전했다.
동일률·모순률·배중률: 형식논리학의 세 가지 기본 법칙이다. 동일률은 “A는 A이다”, 모순율은 “A는 non-A일 수 없다”, 배중률은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며 제3의 가능성은 없다”로 요약된다.
라플라스적 결정론: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우주의 한 시점에서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뉴턴 역학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모든 상태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고전물리학의 한계와 양자역학의 태동
인류는 오랫동안 원자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 간주해왔다. 그리스어 ‘아토모스(atomos)’라는 명칭 자체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믿음은 무려 2천 년 이상을 버텨온 견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1897년, 영국의 물리학자 J.J. 톰슨이 음극선 실험을 통해 모든 원자에서 공통적으로 방출되는 미세 입자, 즉 전자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이 신념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더 작은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구조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어진 러더퍼드의 알파입자 산란 실험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얇은 금박에 알파 입자를 쏘았을 때, 대부분의 입자는 그대로 통과했지만 극히 일부는 큰 각도로 튕겨 나갔다. 이 결과는 원자가 사실상 텅 빈 공간이며, 그 중심에 극도로 작고 무거운 무언가, 즉 원자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후 과학자들은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냈고, 더 나아가 양성자와 중성자조차도 쿼크라는 더 근본적인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물질의 근본적인 층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연쇄적으로 붕괴하고 재건된 것이다.
실험적 발견 못지않은 이론적 충격도 밀려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흑체복사 문제다. 이 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호기심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당대의 첨예한 산업적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19세기 말 독일은 제철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겪으며, 제철소에서 쇳물의 온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런데 뜨거운 쇳물에 온도계를 직접 담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당대의 사람들은 쇳물이 방출하는 빛의 색깔과 온도의 관계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렇게 뜨거운 물체가 방출하는 빛의 색깔과 온도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려 하자, 고전물리학은 난관에 봉착했다. 고전물리학의 공식으로 가열된 물체의 복사 스펙트럼을 계산하면, 짧은 파장(자외선) 영역에서 에너지 밀도가 무한대로 치솟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뜨거운 쇳물 근처에 접근하면 치명적인 자외선 폭탄을 맞는다는 황당한 예측을 넘어, 우주 자체의 열적 평형이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900년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양자(quantum)’라고 불리는 불연속적인 작은 덩어리 단위로만 방출·흡수된다는 획기적인 가설을 도입했다. 이것이 ‘양자’ 개념의 시작이다. 양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물리적 작용의 최소 단위를 의미하며, 이 개념은 이후 물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기초로 자리잡게 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가설을 더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는 전자기파(빛)가 파동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광양자(광자, photon)’라는 에너지 입자들의 흐름이라는 광전효과 이론을 발표했다. 금속 표면에 일정 진동수 이상의 빛을 비추었을 때 시간 지연 없이 전자가 즉시 튀어나오는 현상은, 에너지가 파동처럼 연속해서 축적되는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광자 하나가 가진 에너지가 전자 하나에 일시적으로 전달되는 광양자설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때 광자의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빛의 진동수에 비례한다.
$$ E=hv $$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 \(v\)는 빛의 진동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용어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물리학에서는 관습적으로 ‘빛’ 이라는 단어를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영역인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전자기파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어에서 ‘빛’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만을 떠올리기 쉽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맥락에 따라 ‘전자기파’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할 것이다. 쇳물이 방출하는 열복사도, 라디오 전파도, 우리 눈에 보이는 붉은 빛도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은 훗날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정도로 혁혁한 성과였지만, 동시에 전자기파가 파동이라는 사실이 수많은 실험으로 확립되어 있던 당시 물리학계에 거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전자기파가 입자라는 주장과 전자기파가 파동이라는 실험적 증거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고전적 사고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객관적 모순이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전형적 계기였다. 미시 세계의 실재 자체가 입자성과 파동성이라는 대립적 성질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축적되는 실험적 증거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거대한 인식의 장벽을 넘는 과정에서 태동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은 원자 및 아원자 수준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보여주는 이러한 비고전적 운동 법칙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한 학문으로, 오늘날 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를 이룬다.
파동 및 입자의 이중성과 이중슬릿 실험
양자역학이 밝혀낸 가장 근본적이고 충격적인 발견은 파동―입자 이중성이다. 전자기파(빛)와 전자 같은 미시적 실체들은 한 실험 조건에서는 파동으로서 간섭하고 회절하며, 다른 조건에서는 입자처럼 불연속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이해해야 할 점은, 이러한 두 가지 성질이 단순히 외양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체에 종속된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사실이다.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존재 방식은 분리 불가능하게 하나의 실체를 구성한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것은 이중 슬릿 실험이다. 이 실험의 구성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전자총이나 단일 광원을 이용해 입자를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할 수 있도록 조정한 뒤, 두 개의 평행한 좁은 틈이 뚫린 장벽을 향해 쏘고, 그 뒤편에 형광 스크린을 설치해 입자들의 도달 위치를 기록하도록 구성된다.
상식과 고전물리학에 기초한 예측은 누구에게나 명확했다. 총알을 두 개의 구멍을 향해 하나씩 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뒷벽에는 두 개의 구멍과 일직선상에 대응하는 두 개의 탄흔 무더기가 쌓일 것이다. 입자는 분명 슬릿 A 또는 슬릿 B 중 하나를 통과했을 것이므로, 스크린에는 두 개의 밝은 띠만이 형성될 것이라는 예측이 자연스럽다.

실제 실험 결과는 이 예측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었다.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해 입자 간의 상호 간섭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자들이 스크린에 축적되자 거기에는 수많은 밝고 어두운 띠가 교차하는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이 간섭무늬는 파동이 두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뒤, 각 경로에서 나온 파동이 서로 만나 보강(마루와 마루)되거나 상쇄(마루와 골)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하나의 전자가 고전적인 입자 궤적을 따라 어느 한 슬릿으로만 진행한 것이 아니라, 전자의 상태를 기술하는 파동함수가 두 슬릿을 모두 통과하며 형성한 간섭 패턴에 따라 위치 확률이 결정되었다는 점이 실증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현상이 전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9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안톤 차일링거(Anton Zeilinger) 연구팀은 60개의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풀러렌(C60) 분자에서도 간섭무늬가 형성됨을 확인했다. 이후 실험은 계속 확장되어, 2013년에는 810개 원자(질량 약 1만 amu 이상)로 이루어진 분자에서, 2019년에는 2,000개 원자(질량 약 2만 5천 amu)로 이루어진 분자에서까지 간섭무늬가 관측되었다. 같은 2019년, 15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천연 생체분자 그라미시딘(gramicidin)에서도 이중 슬릿 간섭 현상이 처음으로 확인되면서, 양자적 파동성이 생명 활동에 관여하는 분자에까지 적용됨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파동―입자 이중성은 미시 세계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물질 일반의 보편적 성질임이 드러난 셈이다.
이 장면은 고전물리학 세계관이 단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운동 범주가 펼쳐지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단일한 실체가 입자와 파동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존재 방식을 동시에 드러내는 상황은 더 이상 논리적 오류로 치부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 자리 잡았다. 이 대립의 인정과 포섭을 통해서만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고방식, 즉 더욱 포괄적인 논리 체계가 요구되는 지점이 열린 것이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립물의 동일성이란, 자연의(그리고 여기에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된다) 모든 현상과 사건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 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시 입자에 내재한 파동성과 입자성은 명백히 상호 배타적이다. 파동은 공간에 퍼져나가는 분산을 본질로 하고, 입자는 한 점에 집중된 국소성을 본질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이 하나의 실체를 구성하며, 실험 조건이 변화할 때 각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현현한다. 이것이야말로 대립물의 통일이며, 그 통일의 내부에서 지속되는 투쟁이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현실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용어사전
파동—입자 이중성: 전자, 광자 등 미시적 실체가 실험 조건에 따라 파동의 성질(간섭, 회절)과 입자의 성질(불연속적 충돌)을 모두 나타내는 양자역학의 근본 현상.
중첩이란 무엇인가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양자역학적 개념이 바로 중첩이다. 중첩이란 관측이나 측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양자계가 이론적으로 허용된 복수의 상태들에 동시에 걸쳐 존재한다는 원리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해서 확률을 부여하는 고전적 통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다.
여기서 잠시 양자역학의 핵심 용어를 하나 짚고 넘어가보자. 양자역학에서는 측정했을 때 특정한 값이 확정적으로 나오는 상태를 고유상태라고 부른다. 예컨대 전자가 “틀림없이 슬릿 A를 통과한 상태”나 “틀림없이 슬릿 B를 통과한 상태”는 각각 하나의 고유상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이 고유상태들 중 오직 하나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이 고유상태들이 ‘합쳐진’ 상태, 즉 입자가 여러 고유상태에 동시에 걸쳐 있는 상태가 실재한다. 이것이 바로 중첩이며, 복수의 고유상태가 공존할 수 있는 이 성질을 물리학에서는 중첩의 원리라고 부른다.
중첩을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비유가 회전하는 동전이다. 동전이 공중에서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 그것은 앞면도 뒷면도 아닌, 양면의 특성을 모두 지닌 일종의 중간 상태에 있다. 이 상태에서는 “앞면이다” 혹은 “뒷면이다”라는 명제 어느 쪽도 확정적으로 참이 아니다. 동전을 탁자에 내리쳐 회전을 멈추는 순간에야 비로소 앞면인지 뒷면인지가 현실로 확정된다. 미시 입자 역시 이와 유사하게, 관측이라는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있기 전까지는 다수의 가능한 상태들로 구성된 ‘가능성의 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양자 중첩은 이 비유보다 훨씬 풍부하고 정교하다. 동전이 단 두 가지 상태(앞/뒤) 사이의 중첩만을 보여주는 반면, 전자는 이중 슬릿 실험에서 공간 전체에 걸친 연속적이고 무한한 위치 상태들의 중첩으로 존재한다. 즉, 전자는 ‘왼쪽 슬릿을 통과하는 상태’와 ‘오른쪽 슬릿을 통과하는 상태’라는 단순한 이산적 선택지에 머물지 않으며, 그 파동함수는 스크린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경로들의 확률 진폭을 포괄한다.
이러한 중첩 상태는 표면적으로는 형식논리학의 모순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가 슬릿 A를 지남과 동시에 슬릿 B를 지난다는 것은 고전적 명제 논리로는 명백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중첩은 확정된 현실 상태를 기술하는 개념이 아니라,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들의 구조를 기술하는 개념이다. 슬릿을 통과하는 순간의 전자는 특정한 하나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고전적인 입자가 아니다. 따라서 “A를 통과했다”는 명제 자체가 아직 성립할 수 없는 존재 상태에 있다. 확정적 진리 판단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순율의 적용을 유보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전적 관점에서는 단순히 각 상태가 일어날 ‘확률’들이 더해지지만, 양자역학의 중첩은 파동의 성질을 갖는 ‘확률 진폭’들의 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확률 진폭은 더해지는 과정에서 서로 보강되거나 상쇄될 수 있기 때문에 고전적 확률의 합과는 다르다.
예컨대, 고전적 확률의 합이란 검은 구슬과 흰 구슬을 주머니에 섞는 것과 같아서,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총합에 머문다. 혼합물은 여전히 검은 구슬과 흰 구슬의 개별적 성질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러나 양자 상태의 중첩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성질의 물(H₂O)을 만들어내는 화학 반응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은 수소도 산소도 아니며, 이들 각각에게는 없던 새로운 성질, 예컨대 상온에서의 액체 상태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슬릿 A를 통과한 상태’와 ‘슬릿 B를 통과한 상태’의 중첩은 원래의 두 고유상태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패턴, 즉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중첩 상태는 개별 고유상태들의 단순한 합이 아닌, 질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상태이자 실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중첩은 왜 가능한가? 물질의 운동 상태가 근본적으로 파동의 성질, 즉 파동함수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파동의 본질적 속성은 여러 상태가 공간적으로 겹칠 수 있다는 데 있다. 바다 위에서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밀려온 파도가 만나면, 그것은 더 이상 원래의 두 파도 중 어느 하나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파도를 형성한다. 이때 새로 형성된 파도는 두 파도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보강 간섭과 상쇄 간섭이라는 파동의 결합 방식을 통해 제3의 상태로 출현한다. 고전적인 입자란 애초에 이러한 '겹침'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개의 당구공이 동일한 공간을 동시에 점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자가 공간 내 특정 위치에 고정된 알갱이가 아니라 복수의 상태에 걸친 중첩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미시 세계의 물질이 이처럼 확률적인 파동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파동―입자 이중성의 두 측면 중에서 중첩이라는 현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파동적 성질이다.
스크린이나 검출기에 전자가 도달하는 순간,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측정 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동함수가 붕괴하면서 중첩 상태는 깨지고, 전자는 스크린 위의 특정한 한 지점에서 입자로 검출된다. 바로 그 순간에 한해서만 고전적 형식논리학이 적용된다. 전자는 그 지점에 존재하며, 동시에 다른 지점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모순율을 충족한다. 변증법적 논리는 이처럼 모순율이 적용되는 경계면과 그 이전의 운동 상태를 통일적으로 포섭함으로써, 형식논리학보다 더 넓고 유연한 정합성을 확보한다.
모택동은 『모순론』에서 레닌의 말을 재차 강조하며 “본래적 의미에서 변증법은 사물들의 바로 그 본질 안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라 밝혔다. 양자 중첩이야말로 전자의 본질 자체에 입자성과 파동성이라는 상호 모순된 경향성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압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파동성은 전자가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는 중첩 상태를 형성하도록 추동하고, 입자성은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려는 경향으로 작동한다. 이 두 대립적 경향성의 길항이 바로 중첩과 측정이라는 양자역학의 근본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중첩 상태에서 여러 가능성이 단순히 공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간섭을 통해 전혀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현상 역시, 대립물의 투쟁이 질적으로 새로운 통일을 만든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주요한 원리를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용어사전
중첩: 관측 이전까지 양자계가 그 존재형식으로 말미암아 허용된 복수의 상태에 동시에 걸쳐 존재하는 양자역학적 현상.
고유상태: 특정한 물리량을 측정했을 때 확정적인 값 하나가 나오는 양자 상태. 이러한 고유상태들이 여러 개 겹쳐 있는 것이 중첩 상태다.
파동함수: 양자계의 상태를 수학적으로 나타내는 함수로, 이 함수의 값(확률 진폭)의 제곱이 특정 위치나 상태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결정한다.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
중첩의 원리를 더 깊이 추적해 들어가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라는 양자역학의 두 기둥에 도달하게 된다. 이 두 원리는 양자역학이 발견한 미시 세계의 모순적 구조를 더욱 정밀하게 정식화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또는 에너지와 시간처럼 물리학에서 켤레 관계라 부르는 한 쌍의 물리량들 사이에 성립하는 근본적 한계를 규정한다. 위치를 더 정확히 측정하려 할수록 운동량은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두 양을 동시에 무한히 높은 정밀도로 확정하는 것은 측정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객관적 속성으로 인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많은 부르주아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이 불확정성 원리를 오해하여, “자연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거나 “자연은 순전한 우연의 연속이다”라며 불가지론적 해석을 전파해 왔다. 그러나 불확정성 원리는 인류가 라디오를 발명한 시절부터 음향, 전자, 통신 등 파동 신호를 다루는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져 있던 현상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파동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물리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파동 신호의 기본 성질을 살펴보자. 어떠한 종류의 신호이든 우리는 보통 시간에 따른 세기의 형태, 즉 파동으로 그것을 송수신한다. 그런데 신호에 담긴 정보를 분석하려면 이 파동을 ‘주파수별 세기’의 형태로 분해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교향악단의 연주를 하나의 소리로 녹음한 뒤 이를 악기별 음높이로 분해하여 악보로 복원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에 따른 파동을 주파수별 성분으로 분해하는 수학적 과정이 바로 푸리에 변환이다. 시간과 주파수는 앞서 언급한 켤레 관계를 만족하는 변수들이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 집중된 신호를 푸리에 변환하면 넓은 주파수 대역에 걸친 파형을 얻고, 반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수신한 신호를 푸리에 변환하면 그 신호의 주파수 대역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 실제로 물리학 교과서에서도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성 관계는 파동함수의 푸리에 변환이 지니는 수학적 성질로부터 직접 도출됨을 보여준다. 결국 불확정성 원리가 함의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의 모습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물질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뿐이다.
음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가 듣는 소리가 일정한 진동수로 이루어진 단일 파동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듣는 소리는 여러 진동수의 파동이 각자 다른 세기로 더해져 있는 파동이다. 만일 우리가 소리를 짧은 시간 듣는다면 그 소리의 진동수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소리의 진동수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오랜 시간 들어야 한다. 진동수, 즉 주파수란 파동이 단위 시간에 진동하는 횟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파동이 진동하는 횟수를 세어 측정하는 데 걸린 시간으로 나누면 진동수를 얻는데, 만일 파동이 존재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으면 파동이 채 한 번을 진동하지 못하게 되므로 진동수가 부정확하게 정의된다.
마찬가지로 켤레 관계를 만족하는 두 물리량인 위치와 운동량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위치는 입자를 특정 순간에 공간의 한 점에 고정하는 규정이다. 그것은 운동을 멈추고 대상의 공간적 규정성만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반면 운동량은 입자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규정이다. 이것은 대상의 운동 상태, 즉 변화의 계기를 포착하려는 시도다. 완전히 정지된 대상의 운동량은 0으로 완벽히 규정되지만, 그 순간 대상의 위치는 모든 곳에 퍼져 있을 수 있다. 운동량의 완전한 확정은 위치의 완전한 불확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의 위치를 완벽히 고정하려 들면, 그 대상이 어떤 운동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소멸한다. 이처럼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규정될 수 있는, 일종의 대립적 규정들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 대립적 규정들이 동시에 완벽해질 수 없다는 자연의 본질적 한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는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이 명제는 위치와 운동량이 측정 직전에 어떻게든 고정된 값으로 존재했으나, 우리가 둘 모두를 실험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위치와 운동량은 대립적 규정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애초에 측정 직전에 ‘고정된 값’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량을 가진 입자는 공간상에서 퍼져나가려는 성질, 즉 파동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간상의 정확한 위치에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물론 입자는 공간상의 정확한 위치에 고정되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운동량은 움직임의 경향이기에, 고정된 위치에서 측정되는 입자에는 정의할 수 없는 물리량이다.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는 불가지론이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는커녕, 파동과 입자가 가지는 물리량 사이의 관계를 완전하게 기술한다.
보어가 제창한 상보성 원리는 더욱 폭넓은 철학적 함의를 지닌다. 보어에 따르면, 미시 세계의 완전한 기술을 위해서는 입자적 그림과 파동적 그림이라는 두 가지 기술 체계가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이 두 그림이 고전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실험적 배치는 반드시 이 두 그림 중 하나만을 드러내며, 두 그림을 동시에 완전하게 드러내는 실험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재의 전체 모습을 재구성하려면 이 대립하는 두 그림을 모두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보완한다. 이것이 상보성이라는 말의 의미다.
바로 이러한 상보성 때문에 양자적 실재는 입자의 논리만으로도, 파동의 논리만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실재는 파동과 입자의 통일물이자, 그 둘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양자적 실재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적 실재를 형식논리학으로만 포착하려 하면,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연이 기이하고 논리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양자역학의 ‘비논리성’과 ‘기이함’에 당혹감을 느끼며, “양자역학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예측은 놀랍도록 실험과 일치한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면 전혀 기이할 것도, 비논리적일 것도 없다. 오직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을 제공한다.
용어사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 위치와 운동량처럼 켤레 관계에 있는 물리량의 쌍을 동시에 무한한 정밀도로 측정할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근본 원리. 1927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했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 — 미시 세계의 실재를 완전히 기술하려면 입자적 그림과 파동적 그림이 모두 필요하지만, 하나의 실험 배치는 둘 중 하나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원리. 1927년 닐스 보어가 제시했다. 파동―입자 이중성과 자주 혼동되지만, 학계에서는 두 개념을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본다.
켤레 관계 — 위치와 운동량, 에너지와 시간처럼 하나를 정확히 알수록 다른 하나가 불확실해지는 방식으로 수학적으로 짝지어진 물리량 쌍.
푸리에 변환 —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신호를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주파수 성분으로 분해하는 수학적 방법. 프랑스 수학자 조제프 푸리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닐스 보어 — 덴마크의 물리학자로, 원자 구조 모형과 상보성 원리를 제시해 양자역학 해석(코펜하겐 해석)의 토대를 마련했다.
관측의 문제와 가능성
양자역학에서 가장 오래도록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주제는 이른바 측정 문제다. 중첩 상태로 존재하던 미시 입자가 거시적 측정 장치와 상호작용하는 순간, 그 파동함수는 왜, 그리고 어떻게 하나의 확정된 상태로 불연속적으로 붕괴하는가? 이 과정에서 중첩 상태를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연속적이고 결정론적)과 측정 과정(불연속적이고 확률적)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의 깊이를 가장 통렬하게 보여준 것은 슈뢰딩거 자신이 제안한 ‘고양이 사고실험’이다. 밀폐된 상자 안에 방사성 원자, 방사선 검출기, 독약병, 그리고 고양이를 넣는다. 방사성 원자가 붕괴하면 검출기가 이를 감지해 독약병을 깨뜨리고 고양이는 죽는다. 방사성 원자의 붕괴는 전형적인 양자적 사건이어서, 일정 시간 동안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이 중첩을 상자 전체로 확장하면, 관측 이전의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기묘한 중첩 상태에 놓이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거시 세계의 경험은 이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난제에 대해 가능성과 현실성이라는 범주를 통해 하나의 일관된 해석적 틀을 제공한다. 이전에 우리는 중첩이 무엇인지 논했다. 측정 이전의 파동함수와 그 중첩 상태는 실재가 취할 수 있는 가능성들의 객관적 구조를 나타낸다. 이 가능성은 단지 우리 머릿속의 주관적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 미시 입자라는 물질적 실체가 지닌 객관적 경향성이다. 전자는 스크린 위의 여러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들의 복합체로서 실재한다. 다시 말해서 중첩 상태란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들의 합을 지닌 실재인 것이다. 이때의 '실재'는 아직 현실화된 사물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현실화로 나아가려는 운동의 형태를 띤 실재이다.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전자는 원자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고 통찰한 것도, 이처럼 전자에 내재한 무한한 가능성의 층위, 그 잠재적 전망을 가리킨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전자가 이러한 가능성의 중첩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전자가 파동성을 갖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서 파도가 만나면 새로운 형태의 파도가 되듯, 여러 파동이 만나 합쳐지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파동이 될 수 있다. 전자는 파동의 이러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전자의 실재는 전자가 될 수 있는 여러 파동들이 합해진 형태가 된다. 이때 전자는 이러한 가능성들이 그저 개별적으로 담겨 있는 그릇과 같은 상태가 아니다. 가능성들의 합은 그들의 전체이면서도 동시에 그들 개별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다른 상태로 존재한다.
측정 장치라는 거시적 물리계와의 상호작용은 이 가능성의 장을 하나의 현실로 수렴시키는 결정적 계기다. 특정한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면, 그동안 공존하며 길항하던 대립적 가능성들의 투쟁이 일시에 종결되고 그중 하나가 현실로 도약한다. 이 과정은 양적이고 연속적인 변화(파동함수의 결정론적 시간 진화)가 축적되어 질적이고 불연속적인 도약(파동함수의 붕괴)으로 전환되는, 자연계의 모든 수준에서 관찰되는 운동 법칙의 한 사례다.
이때 관측은 인간의 주관이 개입되는 행위라는 대중적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관에 반대한 아인슈타인이 동료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에게 산책 중 “당신은 정말로 내가 달을 보지 않을 때만 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가?”라고 되물으며 항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관측을 곧 ‘인간이 바라보는 행위’로 오인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관측이란 인간의 주관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개념이다. 관측이란 양자적 계가 그 외부와 상호작용하여 정보를 교환하는 사건을 뜻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거쳐 계는 가능성의 합으로 존재하던 상태에서 그중 하나가 실현된 상태로 변화한다. 계와 그 외부가 상호작용을 통해 계의 양자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물질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포착하며, 관측은 양자역학에서 그러한 상호작용과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중첩 상태의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다”는 역설은 범주의 혼동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중첩 상태는 ‘현실화된 상태들의 공존’이 아니라 ‘가능성들의 병존’이다. 고양이의 생사가 하나로 확정되기 이전의 단계는 현실성의 범주로 기술되어서는 안 되며, 가능성의 범주로 기술되어야 한다. 가능성이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 즉 거시적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모순은 해소되고 고양이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로 확정된다. 관측 문제의 난점은 가능성과 현실성이라는 이 두 존재 범주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한 데서 발생한 것이다.
용어사전
측정 문제 — 연속적이고 결정론적인 파동함수의 시간 진화(슈뢰딩거 방정식)와, 측정 순간 발생하는 불연속적이고 확률적인 파동함수 붕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양자역학의 근본적 난제.
슈뢰딩거의 고양이 —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1935년 제안한 사고실험. 양자 중첩을 거시세계로 확장했을 때 발생하는 역설적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능성과 현실성 —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사물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범주. 가능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일정한 조건 아래 현실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를, 현실성은 그 가능성이 실제로 구현된 상태를 가리킨다.
전자구름과 소립자 세계의 내적 모순
이러한 양자적 성질은 비단 광자나 특정 실험 조건에만 국한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모든 미시 입자들의 보편적 존재 방식이다. 그중에서도 원자 속 전자의 거동은 특히 깊은 함의를 품고 있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 전자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정해진 타원 궤도를 따라 원자핵 주변을 회전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모형은 전자가 가속 운동을 하면 전자기파를 방출하며 에너지를 잃고 결국 핵으로 추락해야 한다는 치명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러더퍼드의 태양계 모형은 수소 원자가 방출하는 빛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현대 양자역학의 원자 모형이다.
보어는 러더퍼드 모형의 허점을 간파하고, 원자핵 주위에 구속된 전자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불연속적인 궤도에만 존재하는 모형을 제시했다. 전자는 정상파 조건을 만족하는 에너지 준위를 갖는 궤도에만 존재하며, 빛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흡수하여 더 높은 에너지 준위의 궤도로 전이하거나, 빛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며 낮은 궤도로 전이한다. 전자가 불연속적 에너지 준위 사이에서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빛의 파장도 불연속적이게 된다. 이 때문에 전자는 원자핵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고,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처럼 불연속적인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하지만 보어가 제시한 원자 모형은 수소 원자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의 스펙트럼 관측 결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현대 물리학의 원자 모형은 이러한 한계들을 딛고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다.

현대 물리학은 전자의 상태를 전자구름이라는 용어로 기술한다. 이 표현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서 특정한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입자가 아니라, 각 에너지 준위에 대응하는 특정한 형태의 파동, 즉 정상파로서 핵 주변 공간 전체에 걸쳐 확률적으로 분포해 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입자이지만, 원자라는 구속 조건 속에서는 그 입자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고 파동적 존재 양식이 전면에 나타난다. 이 파동적 분포는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 값이 불연속적으로 양자화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정상파는 오직 특정한 파장, 따라서 특정한 에너지만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원자 내 전자의 ‘양자 상태’다.
이 전자구름 상태에서 전자는 입자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입자성과 파동성이 하나의 통일된 존재 방식으로 지양되어 있다. 외부에서 관측 장치가 개입하여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 하는 순간, 이 파동적 분포는 불연속적으로 붕괴하고 전자는 특정 지점에서 하나의 입자로 검출된다. 두 성질이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어떤 조건에서는 파동성이, 다른 조건에서는 입자성이 두드러지게 발현되는 이 구조는 물질이 정적이고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 대립적 계기들의 역동적 통일체임을 보여준다.
더 깊이 양자장론으로 눈을 돌리면, 물질의 변증법적 성격은 한층 더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양자장론에서 우주의 근본적 실재는 입자가 아니라 장(場, field)이다. 공간의 모든 지점은 진공이라 불리는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의 장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 진공은 결코 비어 있는 정적 공간이 아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진공에서는 입자와 반입자 쌍이 끊임없이 생성되었다가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소멸하는 양자 요동이 영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공은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소용돌이다.
이러한 양자 요동은 단순한 수학적 표현이나 이론적 예측이 아니다. 네덜란드 물리학자 헨드릭 카시미르는 1948년 이 양자 요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힘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예측했으며, 이는 1997년 스티브 라무로의 정밀한 실험을 통해 실증되었다. 진공 상태에서 두 장의 얇은 금속판을 아주 가까이(수십에서 수백 나노미터 수준) 붙여놓으면, 아무런 힘을 가하지 않아도 두 금속판 사이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인력이 작용한다. 진공 상태에서의 양자장 파동은 곧 쌍생성되는 입자의 파동이 된다. 금속판 사이에서 양자장의 진동은 두 금속판을 마디로 하는 정상파만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금속판 밖의 양자장에서는 이러한 제약이 없다. 그 결과 양자 요동으로 순간 탄생하는 기본 입자의 수는 평균적으로 금속판 사이에서 그 바깥보다 더 적다. 이로 인해 입자들이 만들어내는 압력의 차이가 금속판을 서로 밀어붙여 인력을 만들어낸다. 이를 카시미르 효과라고 한다.
전자와 그 반입자인 양전자는 이 진공의 양자 요동에서 창발할 수 있고, 다시 만나면 쌍소멸을 일으켜 순수한 에너지, 즉 광자로 전환된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 \(E=mc²\)은 물질과 에너지라는 대립물이 상호 전환되는 법칙을 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질이 에너지로, 에너지가 다시 물질로 이행하는 이 변환은, 고정된 실체란 없으며 모든 것은 과정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원리에 대한 물리학적 증명이다.
레닌이 『철학노트』에서 “변증법이란 대립물이 어떻게 통일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통일하게 되는가를, 즉 어떠한 조건하에서 대립물이 상호 전환되어 통일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학설이다”라고 밝혔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자연의 심층적 운동 원리를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뮤온, 중성미자, 쿼크 등 표준모형에 편입된 수많은 입자들도 각기 고유한 내적 모순(질량, 전하량, 스핀, 색전하, 맛깔, 나선도, 패리티와 수명,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 사이의 긴장 등)을 지니며, 극히 짧은 순간에 붕괴와 변환을 통해 다른 입자로 이행한다. 이들 입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실험적으로 직접 포착하는 것은, 뮤온처럼 수명이 극도로 짧거나(약 2.2마이크로초) 쿼크의 색가둠 현상처럼 특수한 조건들 때문에 매우 어렵지만, 원리적으로 모든 아원자적 실체는 이 대립적 성질들의 통일체로 존재한다.
쿼크는 강입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이다. 이때 양성자와 중성자가 바리온의 일종이다. 쿼크는 색전하라는 물리량을 갖는다. 마치 전기 전하를 갖는 입자들이 상호 간에 전자기적 인력 혹은 척력을 미치는 것과 같이, 색전하를 갖는 쿼크들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작용이 존재하는데 이를 강한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강한 상호작용은 쿼크를 묶어 입자를 형성하게끔 하는데, 일반적으로 쿼크와 반쿼크가 묶여 중간자, 세 개의 쿼크가 묶여 바리온이 형성된다.
쿼크는 빨강, 초록, 파랑 세 종류의 색전하를 가질 수 있고, 반쿼크는 반빨강, 반초록, 반파랑(혹은 시안, 마젠타, 노랑)의 색전하를 가질 수 있다. 색전하의 각 이름은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색깔과는 무관하게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이때 쿼크는 반드시 서로 다른 색전하를 갖는 쿼크와 짝을 이뤄 총 색전하가 백색이 되도록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 개의 쿼크가 빨강-초록-파랑을 이루든가, 쿼크와 반쿼크가 파랑-노랑을 이루든가 하는 식이다. 따라서 백색이 아닌 색전하를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쿼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를 색가둠이라 한다.
양자 얽힘
양자역학이 제시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발견은 양자 얽힘 현상이다. 두 입자가 한 번 상호작용을 거친 뒤에는, 아무리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각각의 입자를 독립적으로 기술할 수 없게 된다. 오직 두 입자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파동함수로만 그 상태를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예컨대 총 스핀이 0인 두 전자가 얽힘 상태에 있을 때, 한쪽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여 ‘위’ 방향으로 확정되면, 다른 쪽 전자의 스핀은 그 즉시 ‘아래’ 방향으로 결정된다. 두 입자가 수 킬로미터, 이론적으로는 수 광년 떨어져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비국소적 상관관계는 아인슈타인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1935년, 그는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이른바 EPR 역설 논문을 발표하여, 이러한 비국소성이 예측된다는 사실 자체가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임을 증명한다고 공격했다. 그에게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사물이 순간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 어떤 신호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는 상대성 이론의 기본 원리와 충돌하는 “유령 같은 원격작용”에 불과했다. 그는 양자역학 너머에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는 ‘숨은 변수’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64년 존 벨은 EPR의 숨은 변수 이론이 충족해야 할 부등식을 수학적으로 도출했고, 이후 1980년대 초 알랭 아스페를 비롯한 실험물리학자들의 정밀한 실험은 자연이 벨의 부등식을 명백히 위반한다는 사실을 확증했다. 아스페는 1981년과 1982년에 걸쳐 프랑스 오르세 연구소에서 세 차례의 정밀한 실험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벨의 부등식을 다섯 표준편차 이상의 신뢰도로 위반했다. 다시 말해, 자연은 정말로 그렇게 비국소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은 실재를 올바로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업적으로 아스페는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와 함께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 실험 결과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두 입자는 더 이상 고립된 개별자의 집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불가분한 전체의 두 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부분들의 성질은 부분들이 맺는 내적 관계의 총체에 의해 규정되며, 이 관계는 공간적 거리와 무관하게 즉각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빛보다 빠른 신호 전달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쪽에서 측정된 결과만으로는 다른 쪽에 어떤 정보도 전송할 수 없으며, 상관관계의 존재는 양쪽의 측정 결과를 사후에 비교할 때만 확인할 수 있다. 인과율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전체가 부분에 선행한다는 전체성의 원리는, 사물을 분리된 조각의 집합이 아니라 내적 연관과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와 놀랍도록 합치한다.
또한 이는 본질적으로 물질이 파동성을 지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질적으로 국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입자와 달리, 파동은 공간상에서 넓은 범위에 퍼져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공간상에서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사실 하나의 파동으로 묶여 있다면, 양자 얽힘 현상이 가능한 것이다. 얽힌 상태의 물리적 실재들은 측정 이전에 파동으로 존재한다. 이 파동을 측정하여 측정자가 입자 하나의 상태를 얻더라도, 이는 결국 전체 파동의 일부를 측정한 것이 된다. 따라서 파동은 최종적으로 두 입자로 붕괴하게 되고, 나머지 입자의 상태도 이때 함께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결국 그 본질이 파동성에 있으며, 양자역학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파동성과 입자성의 통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상이다.
용어사전
양자얽힘 — 두 개 이상의 입자가 상호작용을 거친 뒤 서로 독립적으로 기술될 수 없게 되어, 하나의 공통된 파동함수로만 그 상태 전체가 기술되는 양자역학적 현상.
양자 컴퓨팅
양자역학의 원리들은 단지 인식론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기술의 변혁으로 직결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양자 컴퓨터가 있다. 양자 컴퓨터는 정보의 기본 단위로 큐비트를 사용한다.
고전 비트가 회로의 전압이 높거나(1) 낮거나(0) 하는 식으로 오직 하나의 확정된 상태만을 취한다면, 큐비트는 중첩을 통해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획기적이지만, 진정한 도약은 다수의 큐비트가 얽힘 상태로 연결될 때 일어난다. \(N\)개의 고전 비트는 \(2^N\)개의 상태 중 오직 하나만을 표현할 수 있는 반면, \(N\)개의 큐비트는 \(2^N\)개의 상태 모두를 동시에 중첩으로 담아낼 수 있다. 예컨대 \(N=2\)라면, 두 큐비트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상태를 한 번에 중첩으로 나타낸다.
$$ ∣00⟩+∣01⟩+∣10⟩+∣11⟩ $$
이 공간에서 연산을 수행한다는 것은, 고전 컴퓨터가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시도해야 할 방대한 경우의 수들을 말 그대로 ‘동시에’ 처리하는 것과 같다. 큐비트 수가 늘어날 때마다 표현할 수 있는 상태의 수는 2배씩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큐비트 수가 조금만 늘어도 고전 컴퓨터로는 현실적 시간 안에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상태 공간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작동 방식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해설한다면 흥미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큐비트가 중첩 상태를 유지하며 진화하는 단계는 ‘가능성들의 병렬적 변환’이다. 연산 과정에서 원하는 답의 확률 진폭은 보강 간섭으로 증폭되고, 원치 않는 답의 확률 진폭은 상쇄 간섭으로 소멸된다. 대립적 가능성들 간의 이 투쟁이 양자 알고리즘의 핵심이다. 예컨대 그로버 알고리즘은 이러한 증폭 과정을 반복해, 정답에 해당하는 상태의 확률 진폭만을 선택적으로 키워나간다. 마지막으로 큐비트들을 측정하는 순간, 중첩은 붕괴하고 하나의 결과가 현실로 튀어나온다. 이 전체 회로는 가능성과 현실성, 연속적 진화와 불연속적 도약이라는 범주 없이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양자 컴퓨팅은 단지 고전 컴퓨팅의 연장선이 아니라, 논리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질적 도약인 것이다.
용어사전
큐비트(qubit) — 양자 정보의 기본 단위, 고전 컴퓨터의 비트(bit)와 달리, 중첩을 통해 0과 1 두 상태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보강 간섭과 상쇄 간섭 — 두 파동이 만났을 때 마루와 마루가 겹쳐 진폭이 커지는 현상을 보강 간섭, 마루와 골이 겹쳐 진폭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상쇄 간섭이라 한다. 양자 알고리즘은 이 두 간섭을 이용해 정답의 확률을 높이고 오답의 확률을 낮춘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방법의 의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들은 자연 세계가 결코 고정되고 정적인 실체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대립적 계기들의 길항과 통일, 상호 전환으로 충만한 동적 총체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파동-입자 이중성, 중첩, 불확정성, 얽힘은 단지 수학적 형식 체계가 아니라, 물질 세계의 심층적 운동 원리를 물리학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원리들을 피상적 역설로 치부하지 않고 그 풍부한 함의를 끝까지 사유하기 위해서는, 형식논리학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유 체계가 요구된다.
칼 포퍼 같은 과학철학자는 변증법이 모순율을 부정함으로써 비합리주의로 나아간다고 비판해왔다. 포퍼는 1937년 발표한 논문 「변증법이란 무엇인가?」에서, 변증법이 대립물의 상호 전환을 인정함으로써 전통 논리학의 모순율을 정면으로 위반하며, 하나의 모순이 허용되는 순간 그 체계로부터 무엇이든 도출할 수 있게 되어 학문 전체가 붕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변증법이 말하는 ‘모순’을 형식논리학적 오류로서의 모순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변증법의 대상은 인간 언어의 오류가 아니라 실재에 내재한 객관적 대립의 긴장이다. 양자 중첩이나 파동-입자 이중성은 언어적 모순이 아니라, 물리적 실재 자체의 존재 방식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인식하고 포섭하는 것은 비합리주의로의 후퇴가 아니라, 현실의 복잡성과 동적 성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인식의 진보다.
또한, 레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대 물리학은… (중략) …의식적이지 못한 채 지그재그로, 불안정하게, 때로는 등을 돌리기까지 하면서 더듬거리며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현대 물리학은 지금 진통을 겪고 있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통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이 말은 물리학 자체의 객관적 발전이 변증법적 사고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음을 지적한 선언이다. 20세기 초 레닌이 물리학의 위기 속에서 통찰한 이 전망은, 이후 100년 동안 축적된 양자역학의 눈부신 성과들에 의해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었다.
나가며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물질의 가장 깊은 층위가 정적이고 고립된 알갱이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대립과 운동, 전환과 생성으로 충만한 생동적 총체임을 가르쳐주었다. 이 세계에서는 확률이라는 형식으로 포착되는 객관적 가능성이 현실화의 토대를 이루며, 부분은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내적 관계 속에 놓인다. 전자의 파동함수는 가능성들의 지도이며, 측정은 그 지도 위에 현실의 깃발을 꽂는 행위다.
이러한 실재의 복잡성과 동적 본성을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형식논리학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보다 더 포괄적인 인식의 틀이 요구된다. 형식논리학이 보장하는 명료성과 안정성은 확정된 현실 세계에서 여전히 유효한 진리지만, 그 현실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미적분이 등장했다고 해서 초등 산술이 무효화되지 않듯, 변증법적 논리는 형식논리학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큰 체계 안에 포섭하고 지양한다. 관측이 완료된 후의 확정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모순율이 변함없이 적용된다. 그러나 그 사실에 이르는 과정,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 대립물의 길항과 전환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방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철학자들과 반동 진영, 심지어는 당대에 양자역학을 개척한 물리학자들마저도 양자역학을 신비화하고 미신화하여 이를 통해 관념론과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다른 한편에서 변혁 진영은 양자역학의 심오한 철학적 함의,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 보다 풍부하고 합당한 형태로 도약하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지난 세기 동안 양자역학을 통해 대중들에게 설파되어 온 온갖 관념론과 비합리적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해석할 때 자연과학이 올바른 토대 위에 설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변혁을 목표하는 이들이 자연에 대한 타당한 시각을 구축하고, 양자역학을 변혁에 기여하는 하나의 무기로 다룰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