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VS 레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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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VS 레닌(1)

반란 편집자의 말
이 글은 인도공산당(CPI)의 창립자인 당게가 쓴 글이다. 단게는 인도 공산주의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독립운동가로,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후의 단게는 인도 국민의회와 네루를 지지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인해 당의 분열(이 때 차루 마줌다르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과 공산주의 운동의 좌절을 불러온 인물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여기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건에서 수행된 간디주의 비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있다.


우리는 정부에 세수 확보를 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부가 사법 행정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법원을 가질 것이며, 때가 되면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다.

-로크마냐[1] 발 강가다르 틸라크, 1906년에

나만의 서문

 모든 책에는 서문이나 머리말이 있어야 하며, 그 서문은 잘 알려진 작가나 대중의 호감을 얻는 '지도자'가 쓴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서점에서 책을 출판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 우리 시대의 출판물에 대한 서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서문은 (i) 해당 주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대한 찬사를 담고 해당 주제에 대한 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2) 출판물의 주제에 대한 요약과 1~2개의 보잘것없는 제안을 담고 있다. (3) 해당 주제를 잘 아는 사람이 책에 대해 공정하게 판단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점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세 번째 종류의 서문이 있는 좋은 책을 찾기가 힘들다. 싸게 팔고 싶어 하는 엉터리 작가들이 눈부신 플래카드를 들고 서점마다 우리를 찾아와 서문이나 머리말을 쓴 작가의 이름을 거침없이 언급한다. 백 명 중 아흔 명은 당대 정치계의 애국자 지도자 행세를 하는 선동가이다. 대중은 그 불쌍한 작가가 대중의 호감을 사는 지역에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하는 위대한 지도자에게서 머리말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는 지구 중심부에 있는 몇몇 덜 유명한 지도자들의 위성을 통해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 '큰손'은 때때로 자신의 신변이 충실한 '사기꾼들'에 의해 그토록 철저히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서론을 마친 후, 불쌍한 서문 작성자는 '위대한 지도자'에게 아첨하며, 평소처럼 그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의견이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대중은 그의 견해를 듣고 싶어 한다는 등등의 말을 해야 했다. 그러면 '위대한 지도자'는 온통 미소를 지으며 책을 한 번 읽어보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며칠 동안 불쌍한 작가는 책이 다 읽히는 꿈을 꾸며 울부짖었다. 그는 일의 압박 때문에(물론 '지도자'는 공적인 일로 경마장이나 투기 시장을 방문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2] 하지만 그는 기꺼이 곧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그 정직한 사람의 말에 의지하여 작가가 작품이 나올 시간을 광고했다면,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출판이 지연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의 집에 오가며 명함을 보내는 이 모든 번거로움(지도자의 집에서도 사람들은 힌두교도처럼 이름을 보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틸라크는 '교양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농민들은 자신을 알리지 않고도 그에게 가서 말을 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대중은 애국심, 국가의 새로운 사회, 출생권, 죽음에 대한 자유의 싸움 등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요즘 모든 작가는 적어도 한 번은 킬라파트 운동[3]과 펀자브의 잘못들을 언급해야 한다!] '강력한 표현과 고상한 관념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고 있는 위대한 인물의 서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이 목적을 위해 특별히 돈을 받고 유지되는 그의 학식 있는 개인 비서가 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4] 이 말로 모든 출판물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서문이 저자에 대한 단순한 찬사이거나 뒤따를 주제에 대한 요약이라면, 책에는 서문이 없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는 책을 직접 읽은 후에 저자와 요약을 모두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초보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존슨이 존슨 박사가 되기 전에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제 나 자신의 진정한 서문을 시작하겠다. 나는 N.C.O. 운동[5]이 시작될 무렵, 반대자들이 운동에서 볼셰비키 활동의 흔적을 찾아 운동 자체를 파괴하려 들며 운동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을 때, 이 소책자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중은 신문의 호황으로 만들어진 몇 가지 허황된 이야기 외에는 볼셰비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를 보고 나는 N.C.O.의 활동 방식과 볼셰비키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계획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해 이 소책자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에 대한 이런 저술을 쓸 만한 문헌은 많지 않다. 정부는 이 주제에 대한 진정한 문헌이 인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신중하다. 허용된 문헌은 볼셰비키를 증오하고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자신 있게 글을 쓰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자가 러시아의 거대한 운동의 기본 원칙과 N.C.O.를 볼셰비즘으로 분류하는 자들의 위선에 대한 아이디어를 최소한 제공한다면, 그리고 나의 동포들이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가 가야 할 극단주의의 규모를 인식하고 정부 테러리즘을 예상하고 대비한다면, 인도 땅에서 실제로 더 큰 아일랜드가 탄생할 것이다!

 서문은 끝났다. 미안하지만, 마지막에 저자의 원고를 첨부하여 내 책 교정본을 읽고 교정해 준 친절한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없다; 관례대로라면 내가 직접 교정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봄베이에서, 1921년 4월                                                   S.A.Dange

목차

서문
1. 소개
2. 오늘날의 사회 : 계급 투쟁

3. 간디 vs 레닌
4. “무장 타격”5. 인도 혁명

부록 A
부록 B
부록 C

챕터 1. 소개

 땅은 신의 것이니 저주받을 수 없다.

-마치니.[6]

 탐욕, 허영, 경쟁,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 위대한 마케도니아 정복자의 천재가 바빌론에서 침묵 속에 누워 있을 때, 아마도 철학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탐욕, 허영, 경쟁,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이여, 그대는 무엇이었기에 지금 먼지 속에 누워 있느냐!" 아랍 사막 위의 오두막집에서 잠자던 불이 활활 타올랐을 때, 이것들 외에 다른 것이 그들을 움직여 불신자들을 칼로 찔렀다. 하룬 알 라시드[7]의 황금률[8]이나 유목민 징기즈 칸의 유목민 무리가 황폐화되던 시대는 오직 이것들, 이것들만이 지배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들끓는 요소들의 화산 폭발만이 역사의 가장 흥미롭고 분주한 시기를 채운다. 조화로운 세상의 통치 속 불화는 역사의 표제다. 조화가 있는 한, 전 세계 사람들은 기록된 역사를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 최초의 일을 한 날은 바로 이 요소들이 폭발한 날, 신의 집에서 불화의 진흙이 된 날이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주의는 이러한 제국의 위엄 - 탐욕, 허영심, 경쟁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이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척도이다. 당시 왕국이 한 나라의 단 한 명의 천재에게만 확장되었을 때, 군주정이 존재했다. 수많은 그러한 천재들이 폭정의 지배에 참여하고 인간 정신의 변형된 측면에 있는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히드라 머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귀족정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범죄의 지배 도구에 노예가 되었을 때, 태양 아래에서 그리고 태양 너머에서 그들이 천상의 삶의 형태라고 생각했던 것을 달성했다는 기쁨의 환호로 인간 내면의 신의 목소리를 압도할 만큼 충분했을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도래라고 불렸다. 따라서

 군주정: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비자유민.

 귀족정: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비자유민.

 민주정: 강력한 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비자유민.

상호 결속과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투쟁하는 대중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억압이 한 사람의 머리와 한 손에 집중되어 있는 한, 즉 군주정이 존재하는 한, 해방을 위한 투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는 고대에 강력한 군주정조차 비교적 쉽게 전복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군주정이 귀족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면서, 오만한 지식인들과 소위 국민의 선택받은 자들로부터 억압의 대열이 결집되기 시작하자, 해방을 위한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일반 시민은 증오와 경외심을 품고 인민의 선택받은 착취자들의 호화로운 장원을 바라보며, 인도든 유럽이든 상류층이나 하늘처럼 높은 선천적으로 타고난[9] 계급을 위해 강제 노동[10]과 과세[11] 제도 아래 짓밟히면서 자신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고, 오직 자신에게는 무익하지만 선택받은 착취자들에게는 유익한 노동만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은 사냥용 짐승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영주가 사냥에서 돌아오면 두 명 이하의 농노를 죽이고 그 따뜻한 피와 장으로 발을 적셔도 된다는 법이 존재하기도 했다.[12] 군주의 노예부터 영주나 더 높은 자의 농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쌀쌀한 지역에서 더 높은 법과 더 높은 이상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냉각되었고, 태양 아래 있는 인도인들의 뜨거운 상상력은 현재의 물질적인 삶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체념하고 비관적이 되어 하늘을 향해 눈을 돌리고 앉아 죽음이나 속세의 삶을 거부하는 구원을 고려했다[13]. 마침내 루터, 루소, 볼테르는 온 생애를 바쳐 인간에게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도록 가르치고, 굶주린 개인에게 자신이 자신의 운명과 삶의 주권자임을 깨닫게 했다. "그들은 인류에게 잃어버린 작은 행위들을 되찾아 주었다." 이는 선과 악을 동시에 드러낸 것이었다. 개인이 주권자였다니! 아! 그렇다면 왜 그는 정복하지 않고 자유롭지 못할까! 금박으로 장식된 왕좌를 가진 군주제와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과 저주로 지어진 성을 가진 귀족제는 무너졌다. 개인은 자유롭고 주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악의 시작이었다. 거짓을 부정하고, 선택받은 소수에게 복종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 외에는 이상을 갖지 못했고, 더 높은 신의 법, 공동선과 연합의 삶에 복종하는 이상을 나란히 부여받지 못한 개인은 오직 거짓을 억누르려고만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 억눌렸을 때 무엇이 ​​남았는가? 인간의 악마적 본성 전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규칙이나 고삐 없이 맹목적으로 분노했다. 야만적이면서도 문명의 모든 도구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에서 새로운 광경이었다[14]. 개인은 자신의 권리만 생각하고 의무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타도한 자들의 자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선택받은 소수가 있던 자리에는 일반 대중이 다수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똑같은 범죄적인 억압의 지배에 가담하고 있었다. 억압의 대열이 피억압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투쟁은 더욱 격렬하고 격렬해졌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참여자이자 스스로를 억압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구질서의 귀족, 장교, 고위층들은 신질서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의 뒤를 따랐다.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 인정되었지만, 다른 민족의 자유는 거부되었다. 여러 민족이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특권층의 지배로부터 개인을 해방하는 두 번째 단계, 즉 유럽에서 개인주의가 부상하는 시기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인권의 심장과 중심부는 새로운 시대에 그 운명을 예측한 사악한 권위자들의 음모로 인해 쇠퇴와 침체를 겪었다. 메테르니히와 그의 동료들은 한동안, 1848년 혁명과 헌법의 해가 올 때까지 개인의 의식의 흐름을 막았고, 그 후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높은 왕좌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 혁명과 코르시카 정복자의 전면적인 평준화 작전 덕분에 폭정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헌법을 먹고 민주주의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행복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노예 제도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잊고 정복과 타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에 대해 새롭게 생각했다. 그들은 "각자 스스로", "이 땅에서만, 다른 곳에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교리를 소화하고 삶의 살과 피로 바꾸면서, 그들의 삶의 이상은 "탐욕, 허영심, 경쟁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이 되었다. 역사는 이 비뚤어진 4인방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순교자들의 수고와 피의 흐름 끝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 결과와 변화는 이 비뚤어진 4인방의 지배권이 군주와 귀족-노예 소유주로부터 많은 노예들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들은 손을 바꾸며 기뻐했고, 그들은 차례로 이러한 악마적인 요소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정복을 추구하며 인도, 아프리카, 페르시아, 그리고 동방의 다른 공국들을 정복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문명화된 질서의 새롭게 해방된 노예와 노예 소유주들 아래에서 인도와 그 발전이다.

 인도는 민족을 계급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체계를 통해 그 철학과 인도적 사고방식을 발전시켰으며, 그 철학의 원리를 온전히 실현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철학은 그 특정한 형태의 사회 분열 정신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데 특히, 그리고 철저하게 효과적이었다. 본래 사회 노동 분업을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15], 나중에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억압적인 것으로 변한 인도의 계급 분류 유지해 온 것은 다름 아닌 힌두 철학과 인생관이었다.

 힌두 철학에서 인류의 전 발전과 사건의 진행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으며, 개인은 이 미리 정해진 우주의 계획을 성취하고 실제로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교리는 개인을 운명론의 확고한 신봉자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인도인들은 모든 재앙, 모든 선과 악, 모든 불의의 원인을 미리 정해진 운명에서 찾았다. 그 운명 앞에서는 자신의 강력한 에너지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는 신비롭게 정해진 사건의 진행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건의 이러한 반대 또는 유리함을 그럴듯한 원인이 아닌 징조, 즉 점성가, 마한트[16], 파키르[17]의 예언에서 판단했다. 이러한 방법들은 주관적인 에너지에 대한 믿음을 잃은 개인들이 객관적인 신호와 발언을 통해 예정된 과정에 대한 계시를 구하는 사회에 만연하다. 첫 번째 원칙의 필연적인 귀결인 또 다른 원칙은 만족의 원칙이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계획에 따라 존재했기에, 개인은 아무것도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었기에, 투쟁의 쓸모는 무엇인가? 그들은 만족하며, 운명에 따라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덜 투쟁하고 덜 끈기 있게 되었다[18]. 더욱이 자연이 인도인들에게 생필품을 비교적 쉽게 양보해 준 덕분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더욱 굳건해졌다. 인도인들은 당시의 질서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태어난 사회 질서의 낡고 억압적인 형태에서 비롯된 비참함에 굴복하는 풍토를 형성했다. 만족의 원칙과 비관적인 인생관에 따라, 그들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발명이나 탐험, 착취를 통해 삶의 편의를 증진하려는 노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러한 모든 미덕(!) 때문에 유럽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에게 유리하고 인도에서의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즉, 생필품이 거의 없이 사는 것, 법을 준수하는 자연, 급진적인 변화나 혁명에 대한 혐오감과 같은 미덕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미덕들이 인도 정치의 현 단계에서 우리의 이익에 매우 해로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교리의 파괴적이고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인도인들을 구해 준 것은 신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극도의 신앙이었다. 오직 그 놀라운 신앙, 인도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신앙만이 그들을 종족의 완전한 멸종이나 부동성으로 인한 내부적 부패로부터 구해주었다.

 인도 역사는 만약 위대한 투쟁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도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 신앙과 종교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국민의 힌두 국가가 야심 찬 군주가 아니라 국민에 의해 건설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신앙과 종교를 보호하고, 보존하고, 공포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불교 제국과 마라타 혁명이 이를 분명히 증명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인도인들을 사회 질서의 비참함에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사회 질서가 너무 억압적이어서, 자네슈와르(드냐네스슈와르[19])나 투카람[20] 시대처럼 위대한 지성들이 이를 전복하거나 수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뒤에 형성된 신성의 성격[21]은 종종 진정한 의미에서 오해를 받아 그들을 지지했고, 인도에서는 농노제나 상류층에 대한 속박이 계속 증가하는 반면 유럽 세계에서는 동일한 것이 파괴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공격적인 정신이 그 활동을 확대하기 시작했을 때, 인도에서는 정복의 손쉬운 대상을 찾았다. 정복을 위한 투쟁은 백인들의 탐욕스러운 정신과 인도 공국의 지배 세력 사이에서 벌어졌다. 인도의 대중들은 자신들 안에 깊이 빠져 외국인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 손님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새로운 손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전리품으로 가득 찬 만찬을 즐기며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새 주인의 횡포가 대중의 속을 쥐어짜기 시작하자, 그들은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의 근원을 찾아내 공격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들 속으로 물러나 더욱 생필품을 줄이며, 신의 뜻이며 자기들의 운명을 탓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제 인도 대중이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도래하는 새로운 정신에 눈을 뜨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치명타를 가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주관적인 의식이 없었던 인도인들은 그런 종류의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루소와 볼테르가 개인에게 자유와 주권에 대한 권리를 가르치고, 개인이 자신의 잠재적인 힘을 의식하도록 하는 데 평생을 바치도록 강요받았듯이, 위대한 천재 틸락의 전 생애는 인도인들에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그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임을 느끼게 하는 데 필요했다.

 유럽 ​​정복자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그들의 통치가 잠시 이어지면서, 새로운 통치자들이 도입한 법 체계는 유럽 체계의 정신을 상당 부분 계승하게 되었지만, 신중한 사려와 정책적 조치로 인해 사람들의 관습에 널리 퍼져 있던 옛 법 체계의 필수적인 특성 중 상당 부분이 새로운 통치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변화는 사회 전체를 계층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치자들에게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었으며, 통치자들은 당연히 법을 공포할 때 이를 무시했다. 이러한 기억 속의 구분 원칙은 세속 권력의 승인과 지지를 잃었지만, 소위 종교적 승인과 사람들의 습관적인 복종에 힘입어 계속 존재했다.

 새로운 외국인들은 문명이 세련된 미덕과 품성, 그리고 높은 수준의 정신적 자질을 의미한다면 정복당한 신민들보다 더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연의 힘에 대한 지배, 그들의 교묘하고 독창적인 기계 과학이었다. 분명히 사람들은 자다베 유형의 마라타인이 무굴인에게 보인 그런 본성의 사랑이나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백인 외국인들은 그들의 인종 구성원들의 개인적 이익과 그들의 국적의 집단적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왔다. 당연히 그들은 세대를 거쳐 외국인의 정신에 항상 종속된다고 생각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배출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을 육성했고, 그들은 감정과 성격 면에서 동포 대중과 크게 분리되었다.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이러한 분열은 통치자들에게 유리했다. 지배자들은 지식인들을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하인으로 여기고, 폭압적이고 생명을 빨아들이는 정부 체제를 돕고 지지했다. 이것이 18세기 말 인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이었다.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기발한 세금 제도로 인한 부의 유출로 인한 궁핍 때문에 손을 비비고 있었고, 어느 나라에서나 대중을 이끌고 악의 근원을 보여줄 수 있는 지식인 계층은 대중과 소외되어 대중의 감정과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천재 틸락이 증가하는 악의 흐름을 막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을 때 인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천재성, 칼리안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영웅이었던 그는 담대하고 힘차게 말하고, 폭정이라는 철권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 결과 많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대중을 몽유병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필수적이었고, 그는 성공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모든 문제의 근원을 깨닫게 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그들의 구원자를 따랐다. 그는 지식인과 대중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지식인들은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대중을 이끌고 사랑하게 되었다. 벌어졌던 틈새가 메워졌다. 그는 대중에게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땅에 홀로 남겨지고 외국인을 위해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가르쳤다. 그의 노력은 인도가 외부 세계를 의식하게 하고, 신세계의 세력을 지배하는 사상들과 동등하게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인도의 더 높은 법과 종교에 대한 믿음은 유럽 국가들의 경우처럼 새로운 개인 권리 사상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다. 바로 이 근본적인 특징이 틸락의 투쟁적 천재성을 신성 그 자체의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

 따라서 틸라크 시대는 권리 의식의 시대였다. 역사는 그러한 의식이 헌법에 대한 단순하고 진지한 요구와 함께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루이 16세에게 헌법을 요구했지만, 루이 16세는 이를 내놓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알베르 1세에게 헌법을 요구했고, 러시아는 차르에게 요구했지만 쓸모없는 두마를 얻었다. 헝가리도 마찬가지였고 메테르니히의 일격을 받았다. 따라서 권리 주장의 초기 단계에서 거의 모든 곳에서 헌법 투쟁이 첫걸음이 되었다. 역사는 또한 이 단계가 등장했을 때 억압이 폭군들의 수단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전형적인 장면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든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대중)들은 음울하고 나른하게 외딴 곳에서 발버둥 치고, 건강은 어둡고, 음식은 빈약하다.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희망의 시대는 떠오르지 않다. 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암울한 안식처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믿음 또한 쇠퇴하고 있다. 배우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배불리 먹지 못한다! 벙어리 세대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일 뿐이다. 왕의 의회와 세상의 공회당에서 대변인으로 활동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뢰를 얻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드물게 괭이와 망치를 내던지고, 생각하는 인류를 놀라게 하며, 위험하고 목적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베르사유 궁전의 길이까지 도달한다. 튀르고는 곡물 무역을 바꾸고 가장 터무니없는 곡물법을 폐지하고 있다. 빵이 부족하다. 진짜이거나 '가짜'라고 할지라도 의심할 여지 없이 부족하다. 1775년 5월 2일, 이 황폐한 무리들은 이곳 베르사유 성에서 창백한 얼굴과 불결함, 날개 달린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비참한 만연함을 드러냈다. 마치 읽을 수 있는 상형문자처럼, 그들의 불만 호소문을 제시했다. 성의 문은 닫혀야 하지만, 왕께서 발코니에 나타나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은 왕의 얼굴을 보았고, 그들의 불만 호소문은 읽히지는 않았지만, 검토되었다. 그 대가로 그들 중 두 명은 40피트 높이의 새 교수대에 매달리고, 나머지는 잠시 동안 굴로 쫓겨났다!"

 1917년 4월, 수도 델리에 있는 관료의 궁궐로 향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쏟아진 총탄의 응답—40피트 높이의 새 교수대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인 해결책—과 펀자브에서 벌어진 디리심의 활약은 프랑스의 풍경을 가장 잘 재현한 것이며, 헌법 제정 투쟁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한 풍경 없이는 자극과 그에 따른 발전은 불가능하다.

 틸라크 시대는 이 외에도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민족의 지도자는 독자적인 철학이라는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기타에 대한 탁월한 논문을 통해, 자신만이 지닌 권위로 인간 행동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그는 염세주의 철학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간파하고 그 관점을 바꾸었다. 인도 사람들은 언제나 종교적 근원에서 비롯된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기타는 누구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다. 40년간 기타에 따른 행위에 대한 연구와 경험을 통해, 그는 세상, 특히 인도에 카르마의 결과에 대한 이기적인 탐욕 없이, 인간 안에 신성을 실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카르마의 근본 원리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살아있는 모범을 통해 인도인들에게 이기심 없이 인류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의무를 가르쳤다. 무위나 사두이즘의 교리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점차 관점을 바꾸고 그를 믿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투쟁 속에서 인류에 봉사하면서 사람들의 비관주의를 파괴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정복이었다. 권리의 틸락 시대는 인도인들에게 "땅은 신의 것이므로 저주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인도는 현대화되었다. 오늘날 우리 인도인들이 바로 그렇다. 틸락의 현대 인도에서, 한 마하트마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틸락이 시작한 현대 투쟁 체계는 중단되고, 톨스토이 학파의 완전히 새로운 방법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투쟁 뒤에는 억압이 따르고, 억압 뒤에는 대개 민중의 성공이 따른다. 이제 순교는 피에 젖어 있다. 그러나 이 부처의 땅에서, 자유의 나무는 폭군들의 피로 물들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해야합니까, 오! 신이시여!

챕터 2. 오늘날의 사회 : 계급투쟁

 오늘-날의 사회: 계급 투쟁.

 우리는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상류층과 특권층에 대한 개인적 속박의 단계를 벗어났으며, 개인주의의 부상이 그 투쟁의 산물임을 보았다. 우리는 20세기 초 20년, 틸락 시대에 인도가 현대화되는 것을 보았고, 이제 우리는 우리 사이에 개인주의가 등장한 첫 번째 결과로 외세의 굴레를 타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인도가 현대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안에 인도의 삶과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인도의 근대화는 유럽의 진보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유럽에서의 사건들이 진전되어 그 민족의 행복과 복지가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같은 유형의 진보가 우리 민족의 행복과 복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비참함과 죽음을 가져온다면, 우리 땅에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아마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한 민족의 문명이 다른 민족의 복지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호주 원주민들에게 백인 문명의 도래가 그들의 종족을 멸망시킬 신호였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문명의 도입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몰살 계획에 의해 멸망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한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함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참함과 죽음을 초래한다. 극지방 출신의 에스키모족은 흑인이나 중국인처럼 인도의 기후에서 행복하게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구 밀집 도시와 더러운 집에서 살도록 강요받은 많은 사람들은 에스키모인이든, 인도인이든, 중국인이든 그 해로운 영향으로 틀림없이 고통받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단순한 이유는 파괴와 죽음의 세력이 개발과 문화의 세력보다 더 균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새로운 진보가 유럽과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유럽에게 생사를 가르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에게도 생사를 가르는 것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평민을 억압에서 해방하는 작업과 더불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산업 혁명이 유럽에서 일어났다. 이 산업 혁명은 우리 시대의 기계 시대를 열었다. 이 혁명이 일어난 모든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수준은 엄청나게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경제학이라는 옛 학문은—지금처럼 복잡한 학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지만—혁명으로 도래한 새로운 사회 질서의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기계 발명은 대량 생산을 쉽게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량 생산은 당연히 기계 농장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했고, 이는 그러한 투자를 할 수 있는 계층, 즉 자본가 계층을 탄생시켰다. 기계적 생산과 산출은 중세 시대의 가내 산업과 마을 산업 또는 길드 산업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산업의 몰락은 기존의 독립적인 길드 노동자들을 실직시키고, 자본가들의 지배 아래 두게 했으며,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주인들에게 자신들의 조건에 따라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계 시대는 민중의 삶에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기계 농장은 동시에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농장의 소재지는 주로 노동 대중으로 가득 찼다. 교육 부족과 자금 및 개발 시설 부족으로 인한 이러한 대중의 열악한 상황은 도시 생활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전에 마을에 살던 노동자들은 모든 독립성, 건강한 환경, 개방적인 마을 생활의 도덕적 환경을 상실했다. 반면에 기계를 통해 단시간에 무제한 생산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단을 제공했고, 이는 탐욕, 허영심, 경쟁심, 권력에 대한 욕망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기계처럼 여기게 된 노동자들의 처지를 무시하게 되었다. 이전의 영주, 농노, 노예는 폐지되었지만, 그 불쾌한 직함 없이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종류의 영주와 노예가 생겨났다. 애국심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적인 이익과 변덕을 위해 전쟁을 벌이던 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군주 계급, 즉 '은의 왕들'[22]과 '구리의 왕들'[23]이라는 다양한 직함을 가진 자본가들이 투기꾼, 위탁 대행인, 수출업자, 수입업자라는 경영자들을 거느리고 나라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적 이익을 위해, 시장과 나라를 장악하여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마치 생명 없는 기계처럼 몇 시간씩 노동시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엄청난 양을 생산했으며, 이 잉여 생산물을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이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가? 맨체스터 자본가가 왜 인도 전체를 옷 입히려 드는가? 누가, 그리고 누가, 내버려 둔다면 이 새로운 노예 소유주들의 자선 없이 살 수 있는가? 왜 그들은 자국민들을 풍족하고 싸게 입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경쟁과 전쟁 이후, 누가 혜택을 받고 행복할 것인가? 고생하고 고생한 노동자들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경쟁을 통해 국내 노동자들을 굶기고 해외 노동자들을 파멸시켜 얻은 모든 부는 자본가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쓰였다.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만큼이나 인간이었지만, 이 괴물들은 만족해야 할 욕망이 있었고, 수백만 명의 인간이라고 불리려는 헛된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 괴물 같은 놈들은 세상의 부와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지만, 노동 대중은 궁핍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민주적 대의라는 허울을 쓴 정당과 국가 기구는 그들의 돈주머니에 지배다. 이렇게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인 정치의 수레바퀴를 장악한 그들은 노동계급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외침을 억누를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사회는 세 계층으로 나뉘게 되었다. "자본가는 토지, 공장, 현금, 원자재와 같은 노동 수단과 도구를 소유한 자다. 계약자는 노동의 책임자이자 창시자다. 상인은 지성을 대표하거나 대표해야 하며, 노동자는 육체 노동을 대표한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노예들의 주인이 되었고, 노예들에게는 인간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교육, 지적 발달, 사회적 기능 수행, 사회적 교류, 신체적 정신적 활동을 자유롭게 즐길 시간, 이 모든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그러나 맹목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열정, 잉여 노동에 대한 늑대인간 같은 갈증 속에서 자본은 노동일의 도덕적 한계뿐 아니라 순전히 육체적인 한계까지 뛰어넘는다. 자본은 신체의 성장, 발달, 그리고 건강한 유지를 위한 시간을 빼앗는다. 자본은 식사 시간을 엉뚱하게 활용하고, 가능하면 생산 과정 자체와 결합시켜 마치 보일러에 석탄을, 기계에 윤활유와 기름을 공급하듯이 노동자에게 단순한 생산 수단으로 음식을 제공한다. 신체의 회복, 수리, 재충전에 필요한 숙면을 완전히 지친 유기체의 회복에 필수적인 무기력증으로 축소시킨다. 노동일의 한계를 결정하는 것은 정상적인 노동 유지가 아니라, 아무리 병들어 있더라도 가능한 한 최대로 매일 노동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휴식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의무적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자본은 노동력의 수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루 노동 시간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자본은 탐욕스러운 농부가 땅의 비옥함을 빼앗아 생산량을 늘리는 것처럼 노동자의 수명을 단축시킴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자본은 노동자의 실제 수명을 단축시킴으로써 주어진 기간 동안 그의 생산 시간을 연장한다.”

 새로운 체제의 악이 이처럼 극심해지자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품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을 뜯어내기 위해 파업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자본가들을 움직이지 못한다. 일자리가 부족한 시기에 부유하고 배부른 자본가들은 기다릴 여유가 있는 반면,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더 나쁜 조건에 굴복하고 굴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가 날마다 자본과 노동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사려 깊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우리는 인도가 현대화되고 산업화가 격렬하게 추진되는 것을 보았다. 당연히 인도의 산업화는 유럽 체제를 따라 이루어질 것이며,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유럽 산업주의의 모든 악, 자본주의와 노동 사이의 모든 계급 투쟁 방식이 우리 사회에서도 다시 자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유럽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인해 마지막 한 푼, 마지막 한 톨의 곡물까지 빈곤에 빠질 최대의 위험에 처해 있다. 이들은 우리 국민의 내부 지원과 압제적인 외국 정부의 사악한 계략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이러한 빈곤화는 매우 조직적이고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개인의 경우라면 교묘한 강도와 살인에 해당할 뿐, 살인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점진적인 기아 조장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2억에 달하는 우리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궁핍과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 세금은 국경 부족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외국 군대에 돈을 지불하는 데 낭비되고 있다.[24] 국경 부족들은 아마도 인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는 애국심을 꺾고[25] 엄청난 양의 유럽 민간인을 연금으로 먹이는 데에만 사용된다. 유럽 민간인은 전체 통치 체제에서 최악의 집단이며, 인도의 황금빛 목초지에서 친척들과 함께 풍족하게 방목한 후 인도를 떠나자마자 인도의 이익에 반역하는 사람들이다.[26] 또 다른 빈곤화 방법은 유럽 국가들을 먹이기 위해 인도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우리 병사들이 습지를 개간하고 경작하기 위해 고생했던 땅에서 이주 정착민들을 금지함으로써 우리에게 보복한다.[27] 정부는 인도의 한 지역에서는 기근을 선포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나라로 곡물을 수출하는데,[28] 이 모든 부당이득을 챙기는 사업은 유럽의 계약자와 자본가들이 담당한다. 우리 농민들은 세금 징수원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시된 높은 가격에 곡물을 팔고, 땅에서 더 많은 농산물을 착취한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경작지에서 비옥함을 잃고 더욱 심각한 기근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기근 유발 시스템은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 역사에서도 다소 유사한 양상[29]을 보인다. 몇 줄 인용해 보자. "그 사이, 상류 사회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백성들, 특히 경작자들 사이에서 빈곤과 비참함이 심화되었다. 그 심각성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 그들의 견해가 지나치게 온건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마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온건 진영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투기꾼들과 더욱 탐욕스러운 궁정 신하들은 이러한 비참함을 이용하여 거래를 했고, 당대 사람들이 '기아 협정'이라고 불렀던 것을 조직했다. 일련의 시장 조작을 통해 전국의 곡물 전량이 수출되었고, 수출에 대한 프리미엄이 지급되자 재고 전체가 저지 섬과 건지 섬, 그리고 다른 창고에 축적되었다가, 사람들의 필요가 극에 달했을 때 마치 아메리카에서 온 것처럼 매우 높은 가격에 다시 팔렸다."[30] 만약 프랑스의 굶주린 농민들이 공포 정치로 이에 대응했다면, 그들을 비난해야 할까? 그런데도 윌리엄 피트와 그의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 프랑스를 죽이도록 했다!!

 네 번째 빈곤화 방식은 인도의 산업 발전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곤을 심화시키는데, 이는 인도 특유의 현상이다. 인도인들은 자원 개발을 갈망한다. 정부는 아버지 같은 애정으로 이를 기꺼이 허용한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들은 정부가 아니라 유럽 자본가들이 착취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모든 이윤은 결국 백인 자본주의자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인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인도 국민을 위해 착취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을 위해 착취된다. 철도 회사, 차, 황마 및 기타 농장, 광산 회사, 해운 회사 등은 매년 인도의 부를 99%가 유럽 자본가인 주주들에게 배당금 형태로 지급한다. 이러한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산업이 방치되고, 더 큰 불행은 국민들이 자신의 산업을 건설할 자본을 확보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런던의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번창하는 산업이나 번창하는 관료 체제 중 하나만 가질 수는 있지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분명 첫 번째 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반드시 파괴해야 하는가? 둘은 상호 배타적이다!

 다섯 번째 방법은 통화와 관련된 정부의 체계적인 도박이다. 인도 상인들은 상품을 수출한 외국에서 금을 수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수입 대금은 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금이 인도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종이 조각만 받는다. 종이 조각은 1파딩이든 1,000파딩이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농민들은 절망에 빠져 "내 목숨과 곡물을 팔았는데, 내게 남은 건 뭐냐? 인쇄된 종이뿐!"이라고 외친다. 우리의 금 보유고는 영국에 잠겨 있고, 백인 자본주의는 그 위에 살찌고 우리는 인쇄된 종이로 먹고산다. 언젠가 우리가 일어나 인도가 파산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국가적 빈곤과 파산이라는 이러한 임박한 위험 외에도, 우리는 또 다른 위험, 즉 산업화의 폐해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 유럽인들에게 그랬듯이 우리 사회에도 고유한 재앙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은 첫 번째 위험에 대한 해결책이며, 우리는 다음 장에서 다룰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진다 하더라도, 근대화의 위험,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 투쟁의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계급 투쟁마저도 우리 안에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식 공업의 도입은 우리의 곤경에 처한 농민들을 점점 더 대량으로 공장으로 끌어내어 노예적인 임금 노동자의 삶으로 몰아가고 있다. 산업 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은 우리 임금 노동자의 삶의 수준이 얼마나 낮아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자본가 계급을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럽의 수많은 악의 근원이다. 전쟁 시기에 생계비가 엄청나게 치솟자 인도 자본가들은 굶주린 인도 노동자들의 요구에 유럽 자본가들만큼이나 완강하게 맞섰다. 백인 자본가들은 인도인들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과 기질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인도 자본가들은 누구인가? 우리 무역의 대부분은 해외와 내륙을 막론하고 구자라트 공동체의 셰티아, 마르와리인, 파르시인, 그리고 보흐라인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외국 정부와 외국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우리 사회의 이러한 자본주의 공동체들은 당연히 우리의 해방 의지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형태와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모든 탐욕, 게으름, 잔혹함, 사치스럽고 타락한 삶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지주들은 넓은 땅을 독점하고 소작인들에게 터무니없는 임대료를 부과함으로써 중산층을 파멸시킨다.[31] 그들 중 일부는 공익을 위한 산업을 시작한다는 허울을 쓰고, 그 구실로 전제적인 편파 정부의 도움을 받아 농민들을 그들의 소유지에서 몰아낸다.[32] 이렇게 인도 자본가들은 세 가지 죄를 짓고 있다. 첫째, 그들은 우리에 대한 외국의 전제주의를 지지한다. 둘째, 그들은 우리 사회의 농민과 임금 노동자 계층을 약화시키고 파멸시킨다. 셋째, 그들은 유럽 자본가들을 지원하고 먹여 살리며, 결국 그 대륙 노동자들의 빈곤을 부추긴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외세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던질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지면 그 속도가 두 배로 빨라질 우리 안의 자본주의의 악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 두 가지 치명적인 질병을 파괴할 방법을 제시했다. 간디주의는 현대 산업화와 현대 문명 사회를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시에 볼셰비즘은 러시아와 유럽 사회에서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두 체제 모두 모든 민족에게 공통된 악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다행이든 불행이든 사실상 같은 시대에 탄생했기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철학과 행동 체계를 비교 대조하고,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효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자 주) 마라티어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자’라는 뜻. 인도의 독립운동가나 저명한 이들은 이런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간디의 별명 “마하트마”가 제일 유명하다.

[2] 나는 유명한 마라티어 학자이자 교수를 알고 있는데, 서문을 쓸 시간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그 시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3] 역자 주) 남아시아 무슬림 정치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많은 무슬림들이 칼리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특히나 영국령 인도에서는 지배자에 반대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비폭력 운동을 벌이는 힌두교도(인도 국민회의)와 손을 잡기도 했다.

[4] 봄베이의 많은 자본가와 금융계 거물들은 ''때로는 변호사이기도 한 개인 비서에게 연설문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통화 위원회와 산업 회의에서 연설한다!

[5] 역자 주) 영국령 인도에서 벌어진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칭하는 걸로 보임

[6] 역자 주) 주세페 마치니는 아닌 것으로 보임. 누구를 가르키는지 분명치 않음

[7] 압바스 제국 칼리프, 천일 야화의 주인공

[8] 역자 주) 수많은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원칙의 하나로, '다른 사람이 해 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는 윤리 원칙이다.

[9] 브라만 계급

[10] 프랑스에서, 그리고 인도의 강제 노동 제도인 베스(Veth)에서

[11]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세금 면제를 받았고, 튀르고와 네케르 내각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는 1789년 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다.

[12] 토머스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역사

[13] 특히 힌두교 철학의 산야신 학파와 불교의 히나야나(소승불교) 학파.

[14] 토머스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역사

[15] 인도의 카스트 제도, B.G. 틸락

[16] 역자 주) 힌두교 사제

[17] 역자 주) 이슬람 금욕주의자

[18] 다크시나티아(인도 남부 거주민)가 처음에는 열정적이라는 산스크리트 속담은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19] 13세기 말 인도의 힌두교 성인

[20] 17세기 초 인도의 힌두교 성인

[21] geeta, 힌두교 경전 중 하나

[22] 역자 주)Bonanza Kings라고도 하며, John William Mackay, James Graham Fair, James Clair Flood, and William S. O'Brien를 말한다.

[23] 역자 주)구리광산을 운영한 Marcus Daly, William A. Clark, James Andrew Murray, F. Augustus Heinze를 말한다.

[24] 1921-22년 예산에서 66크레르(약 1,600만 루피), 즉 총 수입의 51%가 군비에 책정되었는데, 여기서 유럽의 군수품(잭부츠)이 인도의 세포이(세포이)보다 4배나 더 많이 지급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우랑제브 진영의 호화로운 무굴 병사들은 훨씬 적은 돈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25] 윌리엄 빈센트 경의 로스앤젤레스 연설은 이러한 동기를 명확히 보여준다.

[26] 커즌 경과 시든햄 경은 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다.

[27]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다.

[28] 에이라 지역에 기근이 선포되자 인도에서 밀 1,500만 톤, 쌀 1,900만 튜니가 수출되었다. 정부는 수송량 부족을 호소했지만, 4만 대의 마차가 석탄 운반에만 동원되었다. 인도인들을 굶주리게 하기 전에 외국 기계부터 먼저 보급해야 한다!

[29] 혁명 이전의 프랑스 농민과 우리 농민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본 내시는 그의 저서 『대기근』에서 토지 수입의 엄격한 분배를 언급하며, "혁명 이전 프랑스 농민들처럼 비참하게 처참하게 몰락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파멸과 굶주림을 매일같이 겪어야 했지만, 전염병과 콜레라가 그들을 덮쳐 언제든 파업을 일으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영 제국 정부는 마치 중개인과도 같았다."라고 말한다.

[30] Fr. Revolution. Mazzini p. p. 278.

[31] 높은 임대료 부과는 봄베이에서 특별 임대법을 시행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광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법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32] [야심 찬 자본가 타타 가문은 봄베이 제분소에 전기를 공급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푸나 지역의 멀시 페타(Mulshi Peta) 농장에서 소작농들을 몰아내고 토지를 확보하고자 한다. 제분소 수익은 제분소 소유주에게 돌아가고, 제분소의 몫은 타타 가문에게 돌아간다. 제분소의 90%를 타타 가문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공공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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