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M 기초학습과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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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M 기초학습과정(7)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 코뮌의 교훈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이번 호에 게재>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신민주주의 경제계획의 시행은 혁명의 전국적 승리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홍군과 중국 혁명이 전략적 공세로 접어든 1947년 직후부터 마오는 신민주주의 혁명의 세 가지 주요 경제 정책을 선언하고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1) 봉건 계급의 토지 몰수와 소농 계급으로의 분배, 2) 매판 자본 계급의 자본 몰수, 그리고 3)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상공업 보호를 뜻했다. 이상의 정책은 혁명의 통제하에 있는 화북 지역 대부분에서 즉각 채택되었고, 1950년대 중기에 이르면 농지 개혁이 완수된다. 이후 농지 개혁 계획은 나머지 지역에서도 완수되었다.

총노선과 단계적 집단화: 1951년, 중국 공산당은 후일 과도기 총노선이라 불리우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이 시기의 기본적 목표는 중국의 공업화와 농업·수공업·자본주의적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 설정된 목표는 대략 18년이었다. 이는 내전이 초래한 손상과 파괴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재건 3년, 그리고 경제의 계획적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 세 개를 아우르는 15년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총노선에 따라, 농업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단계별 계획이 작성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열 몇 가구 이내로만 구성된 농업생산호조조(農業生産互助組)를 조직하도록 소농들에게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집단들은 구성원 사이의 원조와 협동과 같은, 사회주의의 기초적 요소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호조조에 기초해 초급농업생산합작사(初級農業生産合作社)를 조직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였다. 초급사는 본성적으로 반(半)사회주의적이며, 출자로서의 토지 공유와 통합된 경영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반사회주의적인 초급사를 더욱 결집시켜, 완전히 사회주의적이고 대규모인 고급농업생산합작사(高級農業生産合作社)를 조직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였다. 이 단계별 계획의 기저에 있는 기초 원칙은 자발적 참여와 상호 이익이었다. 소농들은 이 집단화 과정에서 자발적 참여를 하도록 설복될 것이었다.

첫 번째 단계인 호조조는 혁명이 전국적으로 승리하기 전부터 해방구에서 시행되었다. 초급 합작사를 향한 두 번째 단계는 1953년부터 1955년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급합작사를 향한 세 번째 단계는 1956년에 이루어졌다. 지방에서의 사회주의화는 말 그대로 고조되었다. 동시에 1956년 초반에 이르면, 관련된 운동은 산업 국유화 과정을 급속히 진전시키고 완수시켰다. 이 로써 중국의 상공업은 사적 소유에서 전 인민의 소유로,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이전되었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대한 마오의 변증법적 접근: 총노선은 사실상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 모델에 의존하고 있었다. 공업, 특히 중공업의 강조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의 제1차 5개년 계획의 중심적인 방향이었다. 나아가 소련의 정책 전부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소련공산당 내에서 현대 수정주의가 발흥한 이후(특히 수정주의적인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당대회 이후), 중국공산당 내의 수정주의적 조류가 즉시 강화되었다. 1956년에는 사회화 과정을 지연시키려 하는 등, “경솔한 진전을 반대”하려는 당내 운동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당 부주석이었던 류사오치가 대표하는 생산력에 관한 수정주의 이론이 당내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 조류의 대변인들은 흐루쇼프주의자들을 떠받들며, 계급 투쟁을 부정하고, 주로 중공업을 통해 현대적 생산력을 건설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생산력이 변화의 중심 동력이며, 중국의 낙후된 생산력이 중국의 발전을 저해시키고 있는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었다. 생산 관계에서의 변화는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농업의 합작사화는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여 농업 기계화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같이 생산 관계와 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부정하였다. 이는 수정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류의 성장과 새로운 착취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소련의 경험을 통해 수정주의의 위험성을 직감한 마오는 당을 지배하고 있던 이러한 조류에 맞설 투쟁을 즉시 개시하였다. 투쟁에서 마오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1956년 4월에 한 연설인 「열 가지 큰 관계를 논함(论十大关系)」이었다. 마오는 소련 형식의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대한 명쾌한 비평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중공업, 그리고 경공업 및 농업 사이의 관계를 논하면서, 마오는 다음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소련 및 다수의 동유럽 국가들보다 잘 해냈습니다. (…) 그들이 농업과 경공업을 등한시하면서 중공업에 편향적인 강조점을 둔 것은 시장의 물자 부족과 통화 불안정을 초래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오는 “소농들을 지나치게 쥐어짜는” 소련 정책을 비판하였다. 또한 마오는 소련 및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에서 배우면 서도, 중국공산당 안에서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을 베끼고 기계적으로 이식”하려는 교조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나아가 마오는 흐루쇼프를 따라 스탈린을 무차별적으로 깎아내리는 이들 을 비판하였다. 마오는 스탈린이 7할의 공적을 남긴 위대한 맑스주의자라고 옹호하였다. 따라서 마오는 소련 개량주의자들과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과오를 폭넓게 비판하면서, 중국공산당 내에서 당시 지배적이던 개량주의적 생산력 노선에 맞선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마오의 이 연설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사회주의 건설 및 사회주의 계획의 과정에 관한 이해를 큰 폭으로 진전시켰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열 가지 관계로 제시함으로써, 마오는 변증법과 모순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 과정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마오는 어떻게 사회주의 건설이 그저 생산과 분배의 목표를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주의 건설 과정의 주요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힘을 동원하는 것까지 포함하는지를 설명하였다. 마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열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 하나의 기본 정책, 사회주의의 대의에 복무하도록 안팎으로 가능한 모든 힘을 동원하는 기본 정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열 가지 관계는 모두 모순입니다. 세계는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순이 없다면 세상은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모순을 올바르게 다루는 것입니다.”

이듬해 마오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를 뒤이어 저술하였다. 마오는 여기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관한 변증법적 이해를 계속하여 발전해 나갔다. 마오는 이 과정의 중핵에 계급투쟁을 배치하였다. 마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계급 투쟁은 절대 끝나지 않았다. (…)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끝내 이길지는 아직 진정으로 해결이 나지 않았다.” 이로써 마오는 계급 투쟁이 사회주의하에서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던 수정주의 파벌에 맞선 투쟁을 개시하였다. 이는 전국적 교정 운동인 반우파 운동의 개시를 알렸다. 이 시기 많은 고위 간부가 대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수백만의 학생들이 노동자·농민과 통합되고자 육체노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공장과 농업합작사의 당 간부 전원은 육체노동에 참여해야 했고, 노동자들은 자기 공장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시작했 으며, 소농 계급 사이에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은 인민과 더욱 가까워졌고, 당 안팎에서 자라던 우경적 조류는 점검되었다.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의 탄생: 교정 운동의 진전과 함께, 당내 우익은 수세에 몰렸다. 이는 1956년 제8차 전국대표회의를 지배한 잘못된 생산력 이론이 1958년에 교정되는 데까지 이어졌다. 이 이론의 주창자인 류사오치는 1958년 5월 제8차 전국대표회의 제2회기 직전에, 사회주의 건설이 완수되기 이전의 주요모순이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회주의로의 길과 자본주의로의 길 사이의 모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 류사오치의 보고는 당시 시작된 대약진 운동을 언급하고 있다.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업, 농업 및 여타 영역들은 더 크고 급속한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 외에도, 대약진 운동은 이전의 계획과 총노선의 우선순위를 크게 바꾸는 것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총노선은 1957년 11월 말에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정식화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총노선은 중공업 강조를 일변하고, 농업, 중공업, 경공업의 동시 발전을 목표로 하였다. 새로운 총노선은 도농 사이, 노동자와 농민 사이, 노동자·농민과 지식인·관리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자 하였다. 대약진 운동의 총노선은 경제 발전만이 아니라, 도농을 변화시킬 기술·정치·사회·문화혁명을 목표로 하였다.

1958년, 중국은 인민공사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은 먼저 가뭄의 타격을 입은 지역의 농민협회들이 노동 및 다른 자원들을 통합해 관개 계획을 시행하려는 안을 자발적으로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마오는 이러한 합병에 “공사(公社, 코뮌)”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오는 인민공사의 형성을 장려하였고, 인민공사는 즉시 중국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인민공사는 치수, 절수, 조림, 어업, 운송 같은 대규모 계획을 감행하기 위해 이웃하고 있는 합작사를 통합하는 식으로 형성되었다. 나아가, 많은 인민공사는 트랙터, 화학 비료 및 여타 생산 수단을 만들어내는 공장을 스스로 건설하였다. 인민공사를 수립하는 운동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유명한 1958년 12월의 우한결의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958년 여름에 시작하여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국의 74만여 농업합작사 전부가 농민 대중의 열성적 요구에 힘입어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로 재조직되었다. 1억 2천 가구, 다양한 민족을 포함하는 중국 농민 가구 전체의 99%가 인민공사에 가입하였다.” 중앙위원회는 나아가 인민공사의 정치적 본질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민공사는 공업, 농업, 상업, 교육, 군사를 아우르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 사회 구 조의 기초 단위이며,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 권력의 기초 조직이기도 하다. 맑스-레닌주의 이론과 우리 나라 인민공사의 첫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인민공사가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의 속도를 드높이고 우리 나라에서 다음 두 가지의 이행을 실현하는 데 최선의 형태를 구성할 것임을 예견케 한다.
첫째, 집단적 소유에서 지방 전 인민의 소유로의 이행.
둘째,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민 공사가 우리 사회 구조의 기초 단위로 남아있으리라는 것 역시 예견할 수 있다.

인민공사 운동은 농업 집단화 과정이 사실상 완수되었다는 엄청난 진전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공사가 완전한 공적 소유와 공산주의로의 이행 과정을 진전시키리라는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도시에 인민공사를 세우려는 시도 역시 공고화되지 못했다.

대약진 운동 가운데서 일어난 인민공사 운동의 초기에는 “좌경적” 오류가 있었다. 마오는 1959년 2월 연설에서 이러한 오류를 “공산주의 바람”이라고 불렀다. 마오가 지적한 “좌경적” 오류는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첫째 오류는 인민공사 전체를 하나의 회계 단위로 삼아, 인민공사 내 빈곤한 조와 부유한 조를 평균화한 것이었다. 이런 조치는 (이전에 고급합작사였던) 더 부유한 조의 농민 구성원들이 받을 몫이 공사 형성 직후에 받던 몫보다 적어진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인민공사의 형성을 원망하였고, 이들의 참여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오류는 인민공사의 자본 축적이 너무도 컸고, 인민공사가 너무도 많은 무상 노동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많은 양이 자본 축적을 위해 보존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받는 몫은 적어졌다. 추가적인 무급 노동은 그만큼 의식이 형성되어야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오류는 모든 종류의 “재산”의 “공유화”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암탉이나 돼지 같은 소자산조차 인민공사 아래 두려는 시도도 벌어졌다. 이 역시 반발을 마주하였다.

이러한 오류는 곧 교정되었다. (이전에 고급합작사였던) 생산대대가 유지되어 기초적인 회계 단위가 되었고, [회계단위는] 1962년에는 생산대라는 더욱 낮은 단계로 내려가기까지 하였다. 소유와 회계의 수준을 더 높은 층위, 더 큰 사회화 및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으로 드높이는 전망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성사될 수 없었다. 회계 및 소유의 기초 단위는 1976년까지 계속해서 가장 낮은 단계인 생산대에 머물렀다.

주자파(走资派)에 맞선 투쟁: 비록 “좌경적” 오류는 곧 교정되었으나, 류사오치가 이끄는 주자파의 위세는 당 상부 내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두 가지 노선의 투쟁은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1959년 7월,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에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하며, 그 “소부르주아적 광신”과 “단번에 공산주의로 들어서려는” 욕망을 비판하였다. 마오는 이러한 공격을 물리치고, 대약진 운동을 옹호하였다. 펑더화이가 패퇴되었음에도, 다른 주자파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공격을 계속해나갔다.

공격의 한 가지 방법은 미디어에서 펑더화이를 은근히 옹호하고 마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글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지만, 펑더화이를 강직한 성품 탓에 희생당한 동지로 그리도록 연출된 연극이나 문화 공연을 통해서도 벌어졌다. 공격은 상부에서 결정된 주요 정책의 시행을 늦추거나 우회하는 식으로도 나타났다. 1962년 중앙위원회 제10차 총회에서 의결한 사회주의 교육 계획 및 문화대혁명 개시 결정을 방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자파들은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음에도, 당 구조 내 자신들의 지배력을 통해 대중 동원이 절대 일어나 지 않도록 하였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계급 투쟁이 아니라 학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려 하였다.

마오는 이 시기(1959~1965)에 여러 층위에서 전투를 벌였다. 마오는 소련의 경험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부활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위험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마오는 흐루쇼프주의적 수정주의의 정치와 경제를 깊이 탐구하고 이론적 교훈을 도출해 중국 및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교육에 공헌하였다. 마오는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대토론 투쟁을 벌여 전세계 및 중국 전역의 혁명가들을 결집시키려 하였다. 마오는 자신의 저작 『소련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이나 중국 공산당의 분석 「흐루쇼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그 세계 역사상의 교훈에 관하여(关于赫鲁晓夫的假共产主义及其在世界历史上的教训)」를 통해, 수정주의와 자본주의 부활에 맞서 싸울 이론적 기초를 당 간부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다.

그러나 마오가 주로 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며 자본주의 부활을 방지하는 투쟁에 대중을 인입시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그의 사회주의 교육 계획 외에도, 마오는 다자이촌과 다칭시의 경험을 사회주의 건설의 모범적 경험으로 삼아 사회주의적으로 모방할 것을 요청하는 구호를 만들었다. 대중을 동원하려는 모든 시도가 당 관료층에 의해 우회되자, 마오는 각고의 노력 끝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대중의 역량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맑스주의 원칙을 발전시킨, 마오쩌둥의 실천적 정점 이었다.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1953년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이끄는 수정주의 파벌은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 정당인 소련공산당의 통제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당내의 혁명가들을 축출하거나 살해하고, 최초의 사회주의 조국에서 자본주의를 부활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제국주의 진영, 특히 미 제국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소련공산당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한 후 1956년이 되자, 이들은 제20차 당대회에서 다른 공산주의 정당들에 수정주의라는 독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스탈린 개인숭배를 공격하는 동시에, 평화이행·평화 공존·평화경쟁의 “세 가지 평화”라는 수정주의 이론을 주창하였다.

평화이행은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의미한다. 흐루쇼프는 현시기에 사회주의가 의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할 개혁을 감행함으로써 평화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흐루쇼프는 혁명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요컨대, 이 이론은 베른슈타인과 여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수정주의를 반복한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서로 다른 사회 체제를 지닌 국가들의 평화공존을 사회주의 국가 외교 정책의 총노선으로 제안하였다. 이로써 흐루쇼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 정책의 한 측면에 불과했던, 레닌의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 공존 정책을 왜곡하였다. 흐루쇼프는 제국주의와의 평화 공존을 유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다른 모든 것을 종속시켰다. 흐루쇼프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고 이들에게 원조를 하며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돕는 정책을 냈으나,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열강과의 평화 공존을 위한 여러 조건에 의존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러한 평화공존은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정책일 뿐이었다.

평화경쟁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이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적 경쟁을 통해 해소되리라고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이로써 평화경쟁론은 제국주의의 반동적이고 전쟁광적인 성격을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평화경쟁론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사이의 모순이 평화적인 투쟁 형태로 해소될 비적대적 모순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즉, 흐루쇼프의 세 가지 평화 이론은 완전한 수정주의 이론이었고, 흐루쇼프는 이를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강요하려 하였다. 세 가지 평화 이론은 제국주의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정향해 있었다. 흐루쇼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개인숭배를 빌미 삼아 스탈린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스탈린이 상징하고 수호하는 혁명적 원칙을 무너뜨리기 위 해서는, 먼저 온 세상의 혁명가들과 대중 사이에 퍼진 스탈린의 이미지를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거짓과 퇴폐적인 선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세계 공산당 지도부의 대다수는 수정주의적 흐루쇼프주의 노선을 지지하였다. 수많은 주요 지도자 및 정당들은 금세 자국에서 수정주의 노선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얼 브라우더는 재빨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휴에 관한 이론을 내세워,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탈하였다. 이전에 제3인터내셔널의 지도부에 속해있었던 프랑스의 모리스 토레즈는 반파시즘 전선 시기 이후 부르주아 계급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전후 프랑스령 식민지의 인민들에게 민족 배타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프랑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시종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제3인터내셔널의 지도부였던 이탈리아의 팔미로 톨리아티는 부르 주아 의회에서의 “구조적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개량”하고 “재구조화”하고자 하였다. 인도 공산당 지도부는 평화 노선을 인정하는 쪽으로 전술 노선을 변경하였다. 이처럼 앞선 시기에 충분히 비판받고 패퇴되지 않은 이 수정주의 세력은 흐루쇼프에 기꺼이 협력했 다.

그러나 수정주의 정당들이 어떻게든 진지하게 선거 제도를 통해 “평화이행”을 도입하려 하 는 곳이라면, 그리고 이런 시도가 사회 질서를 충분히 위협하게 된 곳이라면, 브라질(1964), 인도네시아(1965), 칠레(1973)에서 그랬듯이, 군사 쿠데타와 잔혹한 탄압을 거치며 제거당했다.

새로 수립된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이미 1948년부터 수정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해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곧 티토와 우의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잔존 지도부 대부분도 흐루쇼프에 동조하였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흐루쇼프주의적 수정주의를 인지하여, 맑스-레닌주의를 용맹하고 결연하게 옹호한 것은 중국 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의 지도하에 이 투쟁의 전위에 섰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로부터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중국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에 관한 역사적 경험(关于无产阶级 专政的历史经验)」이라는 글을 내서 스탈린을 뛰어난 맑스-레닌주의자로 옹호하였다. 이는 1956년 12월에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의 역사적 경험을 다시 논함(再论无产阶级专政的历史经验)」으로 이어져, 사회주의 진영이 친구와 적을 명확히 구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 대회, 특히 1957년 60여 개 우당(友黨)의 회의 및 1960년 81여 개 우당의 회의, 그리고 소련 공산당 지도부와의 회의에서 흐루쇼프주의적 수정주의 노선에 맞서온 칠년간의 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소련 수정주의자들은 투쟁이 격화되자 1959년 6월에 국방 영역의 기술 원조를 철회하였고, 1960년 7월에는 중국에서 일하고 있던 기술자 전원을 갑자기 철수시켰다. 알바니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중국 공산당은 「레닌주의 만세(列宁主义万岁)」와 다른 두 편의 글을 내, 제국주의, 전쟁 및 평화,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에 관한 레닌주의의 기초 원칙을 옹호하였다. 이 글들은 소련공산당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수정주의적 입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더욱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1961년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제22차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맑스-레닌주의의 본질,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이라는 가르침을 수정하였다. 이 계획은 소련에서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라는 소련공산당의 본질을 변경하였다. 소련공산당 제22차 대회는 “전인민국가” 및 “전인민의 당”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흐루쇼프는 대회에서 알바니아 노동당을 향해 공공연한 비난을 가하며,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의 타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이를 반대하였다.

또, 흐루쇼프는 다른 공산당들이 중국공산당을 공개 비난하도록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에서 출간된 수많은 글들 역시 중국지도부를 공격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1962년 말부터 1963년 초까지 일곱 편의 글을 통해, 이탈리아 공산당의 톨리아티, 프랑스 공산당의 토레즈, 미국 공산당의 거스 홀 등이 가한 비난 일부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적인 견해는 유명한 1963년 6월 14일 서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총 노선에 관한 건의(关于国际共产主义运动总路线的建议)」에 잘 요약되어 있다. 소련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답하였다. 이제 모든 문제가 공개되어 있기에, 중국 공산당은 언론에서 공개 논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공개서한에 아홉 편의 논평을 출간하여, 대중들 앞에서 모든 문제를 분명히 하였다.

1963년에 공개되어 1964년까지 이어진 이 투쟁은 후일 대논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논쟁은 막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원칙적이고 종합적인 투쟁이었다. 대논쟁은 전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 세력이 집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논쟁은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적 발전으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총노선을 제시하였다. 마오는 이 투쟁에서 막후의 원동력으로서 힘썼다. 마오는 대논쟁을 통해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답하며 맑스-레닌주의라는 과학을 발전시켰다. 세계의 근본모순 은 무엇인가?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가? 운동의 목표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성사시킬 경로는 무엇인가? 이상의 정식화는 6월 14일 서신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아홉 편의 논평은 신식민주의, 전쟁 및 평화, 평화 공존, 유고슬라비아, 흐루쇼프 수정주의와 그로부터 도출 되어야 하는 역사적 교훈과 같이, 2차대전 이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마주하고 있는 여러 중 대 문제에서 취해야 할 혁명적 입장을 개괄하고 정교화하였다. 대논쟁을 통해, 마오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 혁명적인 세력들에게 지도이념으로 더욱 더 많이 수용되었다.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흐루쇼프주의자들과 주자파들이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쌓은 여러 벽과 방해물에 대한 맑스주의의 응답이었다. 특히 소련에서 수정주의가 발호하자, 마오는 자본주의 부활과 관련된 가장 큰 위험이 다름 아니라 당 내부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오는 대토론 내내 수정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자본주의 부활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답을 찾고자 하였다. 동시에, 마오는 류사오치나 덩샤오핑과 같은 중국의 흐루쇼프주의자들과의 투쟁에 깊이 관여하였다. 따라서 마오는 중국공산당의 문건 「흐루쇼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그 세계 역사상의 교훈에 관하여」으로 대논쟁을 끝맺으면서, 자본주의 부활이라는 문제의 특정한 지점들을 강조하였다.

먼저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 시기에도 끝까지 계급 투쟁을 지속해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오는 생산수단의 소유에서의 변화, 즉, 경제전선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하였다. 마오는 혁명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치 및 이념 전선에서의 철저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오가 거듭 강조한 다른 지점은 이러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군중노선을 고수하고, 군중을 대담하게 각성시키며, 대규모로 군중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당은 사회주의의 적들에 맞선 공통의 투쟁에서,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인민대중에게 의존하고, 인민대중을 설득하고, 인민대중과 결합하여야 했다. 마오는 “도시와 노동에서 거듭해서 광범위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수행”할 필요성 역시 강조하였다. 마오는 이러한 인민을 교육하는 지속적인 운동에서 혁명 계급 제세력을 조직하고, “반사회주의, 자본주의, 봉건 세력에 맞서 반격하는 날카로운 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따라서 마오는 명확히 군중의 폭넓은 참여가 자본주의 부활을 막을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라 보았다. 이는 어떻게 당 지도부의 수정주의자들이 자본주의 부활을 초래하는 주요 요소가 되는지를 마오가 경험해 본 것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안에서도 류사오치가 주도하는 상층부의 저항이 있었다. 이들은 마오가 제안한 이상의 이론과 구체적 계획을 실행하는 데 반대하였다. 즉, 비록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는 1962년 제8차 중앙위원회 제10차 총회에서 승인되었더라도, 그 실행은 지지부진했고 마오가 제시한 노선과 방향성이 반대되었다. 오히려 류사오치의 통제하에 있는 당 관료층은 마오가 취하려는 행동을 가지고 마오를 비판하였고, 펑더화이 같은 주자파들에게 취해진 조치에 반대하였다. 당 관료층은 자신들이 꽉 쥐고 있는 언론 기사, 연극 및 여타 문화적 장에서 비판을 전개하였다. 당 관료층의 통제는 마오가 자신을 변호하는 글을 베이징의 어떤 언론에도 실을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결국 마오와 마오가 제시한 정책을 변호하는 글 은 1965년 11월, 베이징보다 훨씬 혁명적인 상하이의 언론에서 출간되었다. 이는 마오가 나중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신호”라고 부른 사건으로, 이로부터 미디어 및 문화 영역에서 당 관료층을 비판하고 마오 노선을 지지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주동자들이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는 요구 역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 관료층은 문화대혁명이 대중적 성격을 갖추게 되는 걸 막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문화대혁명을 개시하고 지휘해야 할 문화혁명 5인소조가 실제로는 반대 의견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고, 이러한 논의를 학술 영역으로 옮겨갔다.

결국 마오가 지휘하는 중앙위원회는 1966년 5월 16일에 통지를 발행하여, 문화대혁명에 대 한 방해를 사주받은 “5인소조”를 해체하고, 정치국 상임위원회 직할로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새로이 창설한다. 「5.16 통지」는 주자파, 특히 당내 주자파를 비판하고, 이들의 저항을 분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실제적 시행으로 이어져,수백만 인민을 아우르는 대중적 사건으로 문화대혁명을 빚어냈다.

첫 번째 대자보는 5월 25일 베이징대학교에 게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부총장과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국의 학생과 대중들이 사회의 잘못에 대해 의견을 표하고 비판하며 내건 수천 편의 건실한 대자보 가운데 첫 번째일 뿐이었다. 교수나 당 관료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와 대중적 비판이 쇄도하였다. 얼마 안 가 일군의 학생들은 입학시험의 철폐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중앙위원회는 6월에 대학 및 전문학교 신규 입학을 육 개월 동안 정지 하는 명령을 내려, 학생과 청년들이 문화대혁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육 개월은 너무 짧다는 게 드러났고, 대학은 사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열렸다.

마오 역시 문화대혁명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마오는 6월 17일에 만 명의 사람 들과 함께 양쯔강을 가로지르며 헤엄쳤다. 이는 마오 본인이 문화대혁명의 물줄기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8월 5일, 마오는 중국 공산당 제11차 총회 도중 더욱 직접적인 신호를 주었다. 마오는 스스로 대자보를 써붙였다. 마오의 주된 구호는 “사령부를 포격하라!” 였다. 이는 류사오치가 이끄는 당내 주자파들의 자본주의적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명백한 요청이었다. 마오의 요청은 문화대혁명의 행동과 전투성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8월 18일, 마오는 베이징에서 열린 홍위병들의 첫 번째 집회에 참석하였다. 베이징에 모인 홍위병은 백만 명이었다.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 참가를 위해 중국 전역에서 만들어진 수천 개의 대중 조직에 속해 있었다. 초창기의 대중 조직은 주로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나, 문화대혁명이 세를 불리면서 노동자, 농민, 사무원 사이에서도 조직들이 생겨났다. 8월 18일 집회의 뒤를 이어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한때 전국에서 2백만 명이 넘는 홍위병들이 수도에 모일 때도 있었다.

제11차 총회는 문화대혁명을 “우리나라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 더 깊고 폭넓은 단계로의 발전”이라고 규정하였다. 마오는 총회 폐회사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및 여타 착취 계급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주의적 조건하에서 일으킨 위대한 정치 혁명입니다. 중국 공산당과 그 영도하의 광범한 혁명적 군중이 국민당 반동들에 맞서 벌인 장구한 투쟁의 연장인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간 투쟁의 연장인 것 입니다.”

제11차 총회는 「문화대혁명 16개 항」을 채택하였다. 「16개 항」은 「5.16 통지」에서 논한 바, 즉 지금의 혁명은 인민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탈바꿈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반복하였다. 착취 계급의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은 여전히 여론을 주무르며, 복고의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정신적 관점은 탈바꿈되어야 했고,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어야 했다.

제11차 총회는 “당내에서 권력을 쥐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이들”이 주된 표적이며, “노동자, 농민, 군인, 혁명적 지식인, 혁명적 간부들”이 혁명의 주력군이라고 밝혔다.

혁명의 목표는 “당내에서 권력을 쥐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이들과 투쟁하여 이들을 분쇄하고, 반동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학술적 “권위”와 부르주아 및 여타 모든 착취 계급의 이념을 비판하고 물리치며, 사회주의적 경제 기반과 조응하지 않는 교육, 예술, 문예 및 여타 모든 상부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공고화와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혁명의 형태는 수억의 군중들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내뱉고, 대자보를 쓰며, 대논쟁을 벌이도록 각성시켜, 집권 주자파들의 정체가 까발려지고 자본주의를 복원시키려는 이들의 계획이 분쇄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의 본질적 측면은 마오의 군중 노선을 발전시키고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노동 계급이 “모든 일에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정치가 행정을 지휘”하도록 하며, 공직을 보는 모든 이들 이 “보통 인민의 일원으로 존속”하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군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부르주아 이념에 총공세를 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제11차 총회 결의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군중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며, 군중을 대신하는 어떤 방법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군중을 믿고, 군중에 기대, 군중의 자주성을 존중하라. 두려움을 내던지라. 무질서를 두려워하지 마라. (…) 군중이 이번 대혁명에서 스스로를 가르치고, 선과 악을, 행 함에 있어 옳은 방식과 그른 방식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군중은 전력을 다해 혁명 속으로 들어갔고, 혁명위원회라는 새로운 조직적 형태를 만들어냈다. 혁명위원회는 “삼위일체” 조합에 기초한 것이었다. 혁명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당, 인민해방군, 대중 조직(구성원 3천만의 홍위병) 출신으로, 선출직이며 소환 요청에 응해야 했다. 혁명 위원회는 공장이나 인민공사부터 지역 및 지방 정부의 기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층위로 뻗어나갔고, 국가 경영에 대중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혁명위원회라는 삼위일체 권력 기구는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이 군중 사이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가 경영에 대한 혁명적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와 각계각층의 정치권력 기구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감독은 지도 집단이 모든 층위에서 군중 노선에 충실하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강화는 전세계에서 여태 까지 이룩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가운데 가장 폭넓고 깊은 것이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문화대혁명의 첫 번째 돌풍하에서 당내 부르주아 사령부는 확실하게 분쇄되었으며, 류사오치, 덩샤오핑 같은 지도격 주자파 및 그 추종자 대부분은 당직을 박탈당하고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이는 중국의 대중들을 고무시켰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 사이에 혁명적 열기를 불어넣은 대승리였다.

수많은 혁명세력이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혁명적 노선으로 집결한 것은 대논쟁기였지만, 이들이 마오주의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여러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주로 문화대혁명때였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 부활이라는 적에 대한 대 답이 맑스주의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맑스주의의 이러한 발전은 전 세계의 수많은 혁명 단체 및 정당이 맑스-레닌-마오주의에 기초하여 공고화될 수 있게 하였고, 그 지도하에서 혁명적 투쟁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현재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그저 첫 번째 것에 불과하며, 향후 불가피하게 더욱 많이 벌어질 것입니다. 혁명에서 누가 이길지는 장구한 역사적 시기를 거쳐서만 결정되겠지요. 적절히 다스리지 못한다면, 향후 언제건 자본주의 부활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아가 마오는 1969년 제9차 당 회의에서 다음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계급은 계속해서 투쟁할 것입니다. 패배한 계급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돌아다니고 존재하기에, 우리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완승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레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완승이라 함은 자국 프롤레타리아 계급 및 폭넓은 군중의 노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세계 혁명이 성공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체계가 이 땅에서 철폐되어 인류 전원이 해방되는 데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의 혁명 완승을 가벼이 입에 담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레닌주의를 거스르는 것이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오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되었다. 당시 부총리이자 중국 공산당 제9차 회의에서 마오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던 린뱌오는 마오를 암살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는 당 내 혁명 세력의 경계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이후 덩샤오핑과 같은 주요 수정주의자들은 당과 국가 기구의 요직으로 복귀하였다. 문화대혁명 말기에는 다시금 주자파에 맞선 투쟁이 일어났고, 덩샤오핑은 마오가 1976년 9월 9일에 죽기 전에 다시금 비판을 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자신의 대리인들을 요직에 많이 두고 있었다. 마오 사망 직후 당을 장악하여 자본주의 부활의 길로 이끄는 쿠데타를 꾀한 것은 바로 이 변절자들이었다. 문화대혁명을 방해하고 1976년에 공 식적으로 그 종료를 선언한 것도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쿠데타와 자본주의 부활은 문화대혁명의 진리가 갖는 타당성을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쿠데타와 자본주의 부활이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하에서 혁명을 지속할 필요성에 관한 마오의 가르침을 입증해준다.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 부활에 맞선 투쟁에서, 그리고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이론적 투쟁에서 개발된 과학적 도구이다. 문화대혁명의 과학적 타당성은 중국 혁명이라는 실천적 시험에서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에 맞선 투쟁에서 막대한 대중을 무기로 동원하는 문화대혁명의 효율성 역시 입증되었다. 그러나 마오 본인이 짚고 있듯이, 어떤 무기도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즉, 주자파들이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사회주의 건설 및 방어를 위한 투쟁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무기가 필요하고 효율적이라는 객관적 진리를 조 금도 약화시키지 못한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맑스-레닌-마오주의가 국제 노동자 계급의 무기고에 남긴 가장 큰 공헌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오는 사회주의를 공고화하고, 현대 수정주의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 부활을 막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하에서 지속되는 혁명에 관한 이론을 개발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가 맑스주의에 바친 이 가장 큰 공헌을 실천적으로 시행하였다. 문화대혁명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갖는 중요성은 오늘날, 모든 사회주의 기지가 다름 아니라 공산당 내의 부르주아들이 벌인 기만적 책동으로 인해 상실된 세상에서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즉, 맑스주의자에 관한 레닌의 정의를 수정할 때가 온 것이다.

레닌은 맑스주의자를 정의하면서, 맑스주의자로 불리기 위해서는 계급 투쟁을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레닌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모두를 인정하는 인정하는 이들만이 맑스주의로 불릴 수 있다고 하였다. 맑스주의자라면 문화대혁명의 기초적 이해를 인정해야만 한다. 즉,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인정을, 세계 혁명을 완수 하고 최대한 빠르게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상부구조의 부단한 혁명에 대한 인정으로 확장시키는 자만이 맑스주의자이다.

32. 마오 사후

1960년대 말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맑스-레닌주의의 새로운 단계로서 마오주의가 수립 되던 시기인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혁명적 소요가 벌어진 시기였다. (베트남, 캄푸치아, 라오 스를 아우르는 영역인) 인도차이나에서의 혁명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막강한 군사력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제3세계 각지에서,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혁명 세력들이 마오주의의 영도하에 무장 투쟁을 감행하였다. 필리핀과 인도에서 진행 중 인 무장 투쟁은 이때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격전을 벌이는 민족 해방 투쟁 역시 게바 라주의 이념(쿠바와 볼리비아의 혁명 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체 게바라의 견해와 실천을 따른 이념)하에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일어난 무장 투쟁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인도차이나 전쟁, 제3세계에서 격화되는 투쟁, 문화대혁명은 60년대 말에 자본주의 세계 전역에서 쏟아지듯 불거져 나온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의 주된 요인 가운데 일부였다. 1968년 5월 파리 학생 봉기는 학생 봉기의 물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긴 하나, 미국, 이탈리아부터 심지어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까지 이르는 물결의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은 제3세계 각지의 학생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미국 및 세계 각지에서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전쟁 및 핵무기 경쟁에 반대하는 유럽 주요 도시의 거대한 평화 운동과 함께 고조되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어떤 동맹국들도 베트남전에 파병하지 않기로 합의 할 정도로 사실상 고립되었다. (베트남전에 미국 외에도 호주, 뉴질랜드, 태국 등이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하고자 전투 부대를 파견 한 것으로 볼 때, 이는 1973년 파리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미국,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가 체결한 베트남 평화 협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정은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승인된 베트남의 독립 주권을 존중하고 전쟁을 종결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음에도, 실제로 는 닉슨 행정부의 미군 철수만 이루어진 채 전쟁이 재개되었다. 저자들은 여기서 세계적 평화 운동의 측면에 집중하여 미국의 패권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학생 운동의 뒤를 이어 서유럽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산업 노동 계급의 투쟁이 주로 경제적 요구에 국한되었음에도 크게 성장하였다. 크나 큰 파업의 물결은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 전체를 자주 마비시켜왔다.

70년대 중기에는 오래된 식민 정권들 대다수가 기나긴 유격전 끝에 마침내 전복되었다. 즉, 미국과 그 꼭두각시들은 1975년에 베트남, 캄푸치아, 라오스에서 쫓겨났다. 이 시기 아프리카에서는 모잠비크, 앙골라, 에티오피아, 콩고, 베냉에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대부분은 새로운 제국주의, 즉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꼭두각시들에게 장악당했다. 유명한 예외는 캄푸치아로,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 세력인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이 소련 제국주의자들 의 명령에 따라 1978년에 침공할 때까지 독립하여 존재하였다. (본 자료는 상당히 오래 전에 작성된 것으로, 당대의 맑스-레닌-마오주의자들은 크메르 루주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날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CIA의 지원을 받은 기회주의 집단임이 밝혀졌고, 그들의 학살은 제노사이드였다. 역자들은 CPI(마오주의)가 당시에 내렸던 이와 같은 평가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뒤따른 시기에도 근본 모순이 첨예화되고 제국주의가 더욱 약화되는 등, 훌륭한 혁명적 정세가 계속 존재하였다. 특히, 식민지 및 반식민지는 계속하여 세계 혁명이라는 폭풍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의 초반에는 짐바브웨, 니카라과, 에리트레아 등 여러 국가에서 유격 투쟁이 지속되었다. 페루에서는 1980년부터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지도하에 인민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란의 샤는 타도되었고, 반미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978년 소련 괴뢰정부가 수립되고 1979년 소련 사회제국주의군의 점거 이후 민족해방전쟁이 발발하였다. 아프간 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소련 정권에 치명상을 입혔고, 소련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 인민들의 투쟁이 갖는 역사적인 중요성은 제국주의와 피억압 민족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었다. 베트남과 아프간의 전쟁은 초강대국이 약소국조차 점령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사실은 90년대에 UN 평화유지군이 개입하려는 여러 지점에 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랫동안 영국 및 이탈리아 식민주의자들이 큰 어려움 없이 통제한 소말릴란드는 90년대에, 미국 및 여타 국가의 병력들이 인민의 공격을 받아 불명예스 럽게 후퇴할 수밖에 없는 소말리아로 거듭났다. 이 시기의 어떤 나라, 민족, 인민도 점령군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제국주의가 인정하였다는 것은, 이라크와 유고슬라비아가 지상 병력의 투입 없이 지속적인 대규모 폭격을 받았다는 점에서조차 드러난다.

동유럽 및 소련 소속의 여타 공화국에서는 관료 정권이 붕괴한 이래, 혁명적 위기가 불어닥쳤다.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에서조차 위기의 악화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극대화되고 산업 노동 계급의 파업 투쟁이 거듭 물결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혁명 세력은 세계 사회 주의 혁명을 진전시킬 이 훌륭한 세계적 혁명 정세를 활용할 만큼 조직적 강력함을 갖추지 못했다.

1976년 마오 사후, 당내 존속한 주자파들은 수정주의의 핵심인물인 덩샤오핑(鄧小平)의 지도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소위 중도파인 화궈펑(华国锋)의 이름뿐인 지도하에 당을 장악하였다. 마오가 자주 논했듯, 사회주의의 기지는 수정주의자들의 손에 정치적 지배력이 넘어가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손을 떠났다. 동시에, 알바니아 노동당의 지도부는 마오주의를 공격 하고 마오를 소부르주아 혁명가로 매도하는 기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크메르 루주는 캄푸치아에서 계속 집권하였으나, 혁명을 방해하는 안팎의 적과 지속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참화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소련이 지원한 베트남군에 패 퇴되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화하지도 못하였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 권력을 공고 히 통제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사회주의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마오 사후 덩사오핑과 함께하는 수정주의자들이 화궈펑을 통해 자신들을 마오주의의 수호자로 묘사하려 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상당한 이념적 혼동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은 수정주의적인 “세 가지 세계 이론(三个世界的理论)”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마오의 총노선이라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많은 혁명 세력은 이러한 입장을 수용하였으나, 공공연하게 수정주의적인 1981년 「역사 결의」와 1982년 제12차 회의 이후 세계 대부분의 혁명 세력은 덩샤오핑의 수정주의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세력은 덩샤오핑수정주의 노선을 계속 따랐고, 마오의 혁명적 가르침을 저버렸다. 다른 일부 세력은 마오주의 를 향한 알바니아 노동당의 기회주의적 공격에 편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들은 이후 붕괴되었거나, 자신들의 수정주의적 성격을 공개적으로 내보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수정주의에 결연히 맞서 마오주의를 실천적으로 수호한 이들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오늘날 이 세력들은 혁명적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페루, 필리핀, 터키, 네팔, 인도에서 무장 투쟁을 이끌고 있다. 이 세력들이 아직 조직적으로 매우 미약하더라도, 이들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이들의 힘이 성장하는 주된 원천은 맑스-레닌-마오주의 이념의 올바름이다. 지난 이십여 년 간 주된 역사적 사건의 연쇄는 마오주의가 내린 평가의 대부분을 확증해주었다. 특히 소련이 인민들의 투쟁을 마주하면서 붕괴하게 되었고 초강대국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점, 그리 고 세계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마주하자 초강대국 미국이 만만찮게 약화되었다는 점은, 이 제국주의자들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며 인민들이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줄 것이라는 마오의 평가가 올바른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마찬가지로 마오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피억압 인민이 각자의 나라에서 혁명의 계획을 개발하고 시행할 최고의 도구로 남아있다. 또한, 마오주의는 지구 각지에서 민족 해방을 위해 벌어지고 있는 무장 투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록 이 시기에 맑스주의 과학과 이론에 중요하거나 유의미한 발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여전히 적용 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맑스-레닌-마오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올바른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적 완수를 향한 길에서 승리-패배-승리의 과정을 겪고 있다. 이 과정의 부침에 낙담하였다면, 마오가 대논쟁과 문화 대혁명에서도 제시한 이해를 복기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한 착취 계급이 다른 착취 계급으로 대체되는 부르주아 혁명조차 반복되는 역전을 겪고 수많은 투쟁을 목격한다. 혁명, 복고, 그리고 복고의 전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유럽 국가는 이념적 준비에서 시작해 국가 권력의 최종적 장악 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착취의 모든 체계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혁명이기에, 착취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신의 모든 특권을 빼앗는 것을 순순히 허 락하리라고 생각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즉, 일시적인 패배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장구하고 우여곡절 많은 길에 예상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레닌-마오주의 발전의 150년사는 오직 맑스-레닌-마오주의라는 원칙 만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최종적 승리로 이끌고 안내하는 역사적 운명을 지닌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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