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공산당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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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공산당사 연표

 이 글은 https://vivelemaoisme.org/nepal-timeline/ 에 올라온 네팔 혁명의 성공과 수정주의적 패배를 시기별로 다룬 “nepal-timeline”이라는 글을 번역한 것이다. 1990년대 페루 혁명공산당의 패배 이후 벌어진 네팔 혁명은 파시스트 국가를 상대로 한 인민전쟁 전술이 여전히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왜 네팔의 마오주의자들은 혁명공화국 건설에 실패하고 말았는가? 이 문건을 통해 우리는 왜 네팔 혁명이 신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이념적 문제가 인민전쟁 전술마저 포기하며 네팔 인민들의 열망 또한 배신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서 인용되고 언급된 여러 문헌들은 향후 추가 번역 작업을 통해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네팔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 푸슈파 카말 다할, 이 글에서는 주로 혁명 시기 예명인 프라찬다(독한놈이라는 네팔 단어)로 불리운다.

1986년 4월 1일 : 네팔 공산당(횃불)[1]은 선거에 반대하며 실패한 무장 행진을 시도했다. 카트만두[2]에서는 트리부반 왕[3]의 동상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여러 경찰 초소가 공격을 받았다.

 1990년 4월 9일 : 정당 금지가 해제된다.

 1990년 11월 9일 : 새로운 헌법이 공포된다.

 1990년 11월 19일부터 20일까지: 네팔 공산당(횃불), 네팔 공산당(제4차 대회)[4],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조직[5], 네팔 공산당(민중중심)[6]의 합당. 새 조직의 이름은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7]이다.

1991년 4월 6일: 총파업과 관련된 폭력 사건들로, 경찰이 12명을 살해하다.

1991년 5월 12일: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이 만든 네팔 통일인민전선[8]이 총선에서 9석을 차지해 의회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이 된다.(UML[9]: 68석, 네팔 의회당[10]: 110석)

1994년 5월 22일: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의 분열, 프라찬다로 알려진 푸스파 카말 달 파벌과, 니르말 라마 파벌로 갈라졌다.[11]

1995년 3월: 프라찬다와 바부람 바타라이의 지도 하에 있는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이 선거를 보이콧하고 제3차 전당대회에서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로 당명을 변경한다.[12]

1995년 9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는 인민전쟁 원칙을 채택하고, 세 가지 전선을 조직한다: 네팔 동부의 신둘리, 카브르, 신두팔촉 지구 / 네팔 중부의 고르카, 람중 지구 / 네팔 중서부의 롤파, 루쿰, 자자르콧 지구. 정부는 두 달간의 "로미오 작전" 동안 130명 이상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약 6,000명을 마을에서 쫓아냈으며, 수십 명의 여성을 강간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1996년 2월 4일: 네팔 통일인민전선을 대표하는 바부람 바타라이가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총리에게 요구사항 40개 항목을 제안한다.

1996년 2월 13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인민전쟁을 개시한다. 전국 75개 지구 중 35개 지구에 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조직을 운영한다: 라다크 달(전투 그룹), 가운 수락차 달(마을 방어 그룹), 그리고 스와얌세와카 달(의용군 그룹). 초기에는 303 구경 소총, 몇몇 사제 총기, 그리고 쿠후리라고 불리는 네팔 칼로 무장했다. 15일 동안 선전, 사보타지, 게릴라, 계급적 적군 처형 등 네 가지 유형에 속하는 6000건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1998년 5월 26일 : 경찰이 루쿰과 롤파 지역에서 "킬로 시에라 II" 작전을 개시한다.

1998년 11월 27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기지 지역 개발을 촉구한다.

2000년 8월 7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평화 회담 제안을 거부한다.

2001년 1월 22일 : 정부는 무장 경찰 부대라는 전투 여단의 창설을 발표한다.

2001년 2월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제2차 전국대회에서 프라찬다의 장기 전략 문서 "대약진: 역사의 필연적인 필요"가 채택된다. 이것은 "프라찬다 노선"이라고 불리게 된다.

"제국주의자들의 내부 모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에 따른 불균등 발전과 분배를 통해 이러한 객관적 상황의 발전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든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 국제적 중요성은 명백하다.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가 혁명의 폭풍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분석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21세기가 인민 전쟁의 세기이자 세계 사회주의 체제의 승리가 될 것임을 분명히 시사한다. 이 외에도, 1980년 이후 혁명 모델의 일반적인 개념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무장봉기와 장기적인 인민 전쟁 전략의 융합은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혁명은 어느 나라에서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
사실, 새로운 상황은 20세기의 80년대까지 무장봉기와 장기적인 인민 전쟁 사이에 존재했던 전략적 차이의 본질이 대체로 변화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무장봉기의 길을 추구해야 하며, 억압받는 제3세계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장기적 인민 전쟁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혀 혼란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 정세의 변화는 무장봉기와 장기적인 인민 전쟁의 특성을 필연적으로 연결하는 상황을 만들어냈고, 나아가 이를 위한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발전 상황 때문에, 처음부터 무장봉기의 여러 가지 특징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제3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도시를 마을로 포위하고 거점 지역을 건설하는 장기적 인민전쟁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무장봉기의 군사 노선은 반동 국가의 중심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처음부터 정치적 선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혁명적 요구에 따라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을 지속적인 파업과 거리 투쟁으로 훈련시키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적의 군대와 관료조직에 대한 공작을 계획적으로 전개하며, 중앙 차원에서 다양한 수정주의 및 개량주의 집단에 맞서 집중적인 정치 투쟁을 벌이고, 마지막으로, 적절한 국제적, 국가적 상황에서 무장봉기를 통해 국가 권력을 탈취하는 등의 몇가지 기본적인 특징들을 포함한다. 제3세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도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무장봉기의 특성을 인정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2001년 5월 28일 : 프라찬다가 혁명적 국제주의 운동 위원회(Committee of the Revolutionary Internationalist Movement)에서 제작한 '승리의 세계' 인터뷰를 진행한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에서 주로 우파 수정주의와 같은 이질적 경향에 맞선 격렬한 투쟁을 통해 지도력 문제를 해결한 오늘날, 인민 전쟁의 급속한 발전은 불가피하다. 제3세계의 반봉건적이고 반식민지적인 국가들에서 만연한 착취, 억압, 빈곤의 객관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대중에게는 반란과 혁명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
의식적 계급 투쟁의 최고 표현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종합을 출발점으로 삼아 진지한 연구를 진행했다. 페루 공산당, 미국 혁명 공산당의 발전 과정에서 분출된 이념적 투쟁에 대해 특히 열정적으로 연구했다(…).
 당은 맑스-레닌-마오주의의 보편적 원칙: <인민군이 없으면 인민은 아무것도 없다>,<정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무장한 대중의 바다>에 따라 인민군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는 혁명의 필수요소다."

 

2001년 6월 1일: 디펜드라 왕자가 미쳐서 왕을 포함한 가족 10명을 살해하고 자살하며, 갸넨드라가 왕이 되었다. 디펜드라는 연초부터 왕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중앙)과 협상하기 위해 사절로 두 차례 파견한 인물이다.

2001년 7월 22일: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가 총리가 되어 평화 회담을 촉구한다.

2001년 7월 25일: 전면 휴전.

2001년 8월 30일: 카트만두에서 열린 1차 평화 회담.

2001년 9월 13일부터 14일: 바르디야 지구에서 열린 제2차 평화 회담.

2001년 11월 13일: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3차 평화 회담.

2001년 11월 21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는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42개 지구의 경찰과 군 초소를 대담하게 공격하였으며, 특히 고라히(당 지구)에서 1,100명의 강력한 부대를 이끌고 네팔 왕립군을 처음으로 공격한다.

2001년 11월 26일 :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네팔 왕립군이 동원된다.

2002년 5월 7일 : 미국이 반란 진압 지원을 발표한다.

2002년 5월 15일 : 영국이 반란 진압 지원을 제안하고, 인도가 그 뒤를 잇는다.

2002년 5월 22일: 갸넨드라 국왕이 의회를 해산한다.

2002년 10월 4일: 가넨드라 왕이 정부를 장악한다.

2003년 1월 29일: 전면 휴전.

2003년 4월 27일: 카트만두에서 1차 평화 회담 개최.

2003년 5월 9일 : 제2차 평화 회담 개최.

2003년 8월 17일 : 세 번째 평화 회담. 도람바에서 가짜 교전으로 17명의 간부와 2명의 다른 사람들이 사망한다.

2003년 8월 27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평화 회담에서 철수한다.

2003년 12월 17일 : 네팔 왕립군이 휴전 종료 이후 1056명의 마오주의자들을 살해했다고 발표한다.

2004년 4월 : 지난 몇 달 동안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중앙위원회 95명 중 11명이 인도에서 체포된다.

2005년 1월 31일 : 바타라이는 인민전쟁을 중앙집권화하고 인도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를 거부하고, 2004년 12월 네팔 주류 언론을 이용해 "반대 의견"을 조장한 혐의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임시 구금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

2005년 2월 1일: 가넨드라 국왕과 네팔 왕립군이 국가 통치권을 장악하다.

2005년 4월 29일 : 비상사태 종료.

2005년 6월 20일 : 7당 동맹[13]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게 인민 전쟁을 중단하고 함께 국왕에 대항할 것을 촉구한다.

2005년 9월 3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3개월간의 일방적 휴전을 발표한다.

2005년 9월: 프랑스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는 네팔에 관한 기사: “혁명을 끝까지 이끌 것인가 아니면 설탕으로 코팅된 총알에 패배할 것인가?”를 발표하고, 10월에는 “전환점의 네팔 혁명 : 감히 새로운 국가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개혁’할 것인가?”를 발표한다.

 “대부분의 “제 3 세계” 국가는 다소 “민주적”인 헌법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국이 제국주의와 그 제국주의에 팔린 관료적 부르주아, 그리고 대지주가 지배하는 파시스트 국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 기존 정당들이 진보적인 척을 하면서도 파시즘 국가에 대항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파시즘 국가를 민주적이라고 규정하고, 인민전쟁에 항상 반대하여 쓸모없다는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파시즘 국가를 언제나 지지하며 인민전쟁을 반대해온 정당들을 '동요하는' 정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CPN(m)은 기존 정당의 기회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기반으로 건설된 전위대인데, 역사적으로 자리가 대체된 그들을 부활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쪽으론 네팔의 인민 전쟁이 전략적 공세 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다른 쪽에선 구 국가를 파괴해야하는 바로 그 시점에 무장 투쟁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CPN(m)은 당이 군과 전선을 차례로 구축한 후, 이 세 가지 형태를 모두 지도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군대를 통일전선의 지도 아래에 두고, 당의 정책을 통일전선에 종속시키는 것은 혁명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2005년 10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춘왕 바이탁 중앙위원회 회의는 "인민공화국" 목표 대신 "민주공화국" 원칙을 채택했다.

2005년 11월 15일: 1981년에 창당된 네팔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14]가 당의 두 파벌[15]을 통합하여 네팔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 중앙)을 결성한다.

2005년 11월 22일: 7당 동맹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중앙)이 평화와 제헌의회 개최를 촉구하는 12개 조문 합의서에 서명한다.

2006년 2월 10일 : 프라찬다가 인도 신문 더 힌두(The Hindu)와의 긴 인터뷰를 진행한다.

"우리는 20세기 혁명과 반혁명의 경험을 새로운 기준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3년 전, 우리는 21세기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핵심 과제로 삼았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20세기의 부정적 교훈과 긍정적 교훈이 종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3년 전, 우리는 정치적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치적 경쟁이 없다면 기계적 혹은 형이상학적 태도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결정한 것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8월에 우리는 의회 정당들과 실질적으로 어떻게 연대를 구축할 것인지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우리가 시작한 인민전쟁이 다당제 민주주의에 반대하거나 주로 반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민전쟁은 주로 봉건 독재에 반대하고 봉건 구조에 반대했다."
"우리는 국가 권력을 추구할 것이고 권력을 잡으면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했던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레닌은 권력 문제를 다룰 시간이 없었다. 스탈린은 혁명적이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과학적이지 않았고, 약간 형이상학적이었고, 그 후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전원회의에서 마오쩌둥도 평가했다. 1935년부터 1976년까지 - 젊었을 때부터 늙어서 심지어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질 때까지 -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살펴보면, 꼭 주석직을 유지하고 모든 일을 다뤄야만 하는가? 말이 되는가?“
"우리는 기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계급 투쟁과 국제 정세의 균형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민주 공화국과 제헌의회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전술이 아니라 정치다. 이것은 중간계급은 물론 부르주아와 민족 자본가들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이다."
"다당제 민주주의 - 임시 정부, 제헌 의회와 민주 공화국 – 에서 우리는 여러분 모두와 평화로운 경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가 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제헌의회가 끝난 후 우리가 무기를 버릴지 묻는다. 이것은 질문이다. 우리는 군대를 재편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새로운 네팔 군대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것은 전술적인 질문이 아니다."
"양측의 무기는 통합되어야 하며, 양군은 유엔이나 다른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의 감독 하에 하나로 전환되어야 한다. (…)
선거 결과에 따라 군대가 창설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확실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제헌의회가 군주제를 갖자고 말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다. 국민들이 군주정을 원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2006년 2월 : 프랑스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은 더 힌두(The Hindu)와의 인터뷰에서 프라찬다의 견해로 인해 그를 "현대 수정주의의 추종자"로 정의한다.

2006년 4월 21일 : 7당 동맹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시작한 대중 운동의 일환으로, 카트만두와 랄릿푸르를 둘러싸고 있는 27킬로미터 길이의 순환 도로를 19일간의 총파업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인파가 가득 채운다.

2006년 4월 25일 : 7당 동맹이 총리직을 수락하고 의회를 재건하며 운동을 중단한다.

2006년 4월 26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3개월간의 휴전을 발표한다.

2006년 5월 3일 : 7당 동맹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와의 휴전 및 평화 회담 시작을 발표한다.

2006년 5월 18일 : 네팔 왕립군이 네팔 군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국가는 세속주의를 채택한다.

2006년 5월 26일 : 2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통치 조약을 체결하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와 정부 간의 첫 번째 평화 회담.

2006년 6월 16일 : 카스키 지구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카트만두로 이동한 후, 프라찬다가 7당 동맹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리 관저에서 정치 활동 35년 만에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다.

2006년 6월 17일 : 임시 헌법과 정부 설립, 평행한 마오주의 정부 조직과 의회의 동시 해산, 네팔군과 인민해방군 무기의 관리를 유엔 감독하기 등이 명시되어 있는 정부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간의 8개 조항의 협정.

2006년 6월 : CPI(Maoist)[16]의 대변인 아자드가 기관지 인민행진 (People’s March)에서 인터뷰를 한다.

 "먼저, 우리는 프라찬다 동지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당이 다당제 민주주의에 헌신하고 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적 정권 장악 이후가 아닌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 내에서 실천될 것이라 제창한 것에 크게 동요하고 있다. 2003년 전원회의 문서는 CPN(마오주의)의 다당제 민주주의 또는 정치적 경쟁 개념이 상당히 모호했다. 즉, 혁명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는 프라찬다 동지와 CPN(마오주의)가 전술을 21세기 세계 혁명의 전략과 경로 수준으로 전환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프라찬다 동지는 더 힌두와의 인터뷰에서 마오주의자들의 다당제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은 전술적인 것이 아니라 3년에 걸친 당내 오랜 이념 논쟁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2006년 8월 27일 : 콜롬비아 공산주의 노동자 연합(MLM)[17]는 네팔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주요 동지들에게 형제적, 국제주의자적 호소를 하여, 부르주아 독재의 완성된 앞잡이인 의회 공화국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참여에 대한 재고려를" 촉구했다.

2006년 11월 13일 : 인도 공산당(마오주의)가 "신 네팔은 반동 국가를 분쇄해야만 가능하다! 유엔의 감독 하에 인민해방군(PLA)의 무기를 보관하는 것은 대중의 무장 해제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인민군의 무기를 지정된 주둔지에 보관하기로 한 합의는 위험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이 행위는 네팔의 억압받는 대중을 무장 해제시키고, 네팔의 인민들이 10년간의 인민 전쟁에서 막대한 대가를 치루며 만든 성과를 되돌리는 것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인도 공산당(마오주의) 중앙위원회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분파 중 하나로서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와 네팔 민중에게 무기 보관 협정에 내재된 심각한 위험을 경고하고, 쓰라린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전술을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 네팔에서의 ”전술“이 남아시아의 다른 마오주의 정당들에게도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주장이다. 프라찬다 동지는 또한 다른 마오주의 정당들에게 혁명 전략을 재고하고 21세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당제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 중앙위원회는 CPN(M)과 민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국가 권력의 장악 없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으며, 소위 다당제 민주주의는 민중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을 크리스탈처럼 뚜렷하게 밝힌다.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정당과 인민들에게 마오쩌둥 동지가 보여준 것처럼 장기적인 인민 전쟁의 길을 계속 갈 것을 촉구한다."

2006년 11월 21일: 정부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포괄적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2006년 11월 : 콜롬비아 공산주의 노동자 연합(MLM)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지도에 대한 기회주의적 배신에 맞서 싸우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6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는 마오쩌둥의 탄생 114주년을 맞아 "21세기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관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한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공산당(마오주의), 부탄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 인도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 이란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 필리핀 공산당, 이탈리아 마오주의 공산당, 튀르키예/쿠르디스탄 마오주의 공산당, 미국 혁명 공산당의 대표들이 참석한다. 마지막에 언론 성명서가 게재된다.

네팔 인민전쟁 발발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21세기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국제 세미나가 14개 마오주의 정당과 단체의 참여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세미나는 네팔 민중들이 적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에 열렸다. 그리고 세계 민중들의 주요 적인 미국 제국주의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침략 전쟁에 휘말리고 있을 때였다.

2007년 2월 13일 : 카트만두에서 열린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대규모 집회.

2007년 2월 : 칠레 공산주의혁명연합(MLM)[18]는 “네팔에서 거대한 수정주의적 배신이 자행되었다.”라는 긴 문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프라찬다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존재해 온 기회주의 노선이자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처럼 일탈한" 사람처럼 등장시킨다.

“2006년 11월 21일은 네팔의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혁명적 투쟁의 역사에서 비참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이 날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역사에서 MLM 원칙을 배반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2007년 2월 23일: 네팔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 중앙)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합류한다.

2007년 4월 1일: 임시 정부 구성에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당원 5명이 참여.

2007년 4월 1일 : "네팔 혁명 상황은 어떻습니까?"라는 기사가 캐나다 혁명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Red Flag)에 게재됨.

10년이 넘는 무장 투쟁 끝에 구체제의 기반을 흔들고 전 세계 수백만의 착취받는 사람들과 프롤레타리아의 찬사를 얻은 네팔에서 지난해에 일어난 사건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부와 네팔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 내부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지도부의 결정과 혁명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한다. 인도 공산당(마오주의)와 필리핀 공산당과 같은 주요 마오주의 정당들은 네팔 동지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인터넷 밖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정당이나 조직들은[여기서는 "프랑스 맑스-레닌-마오주의 공산당"라는 소규모 단체를 지칭한다.] 네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혁명 과정의 정상적인 경로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이득을 보려 CPN(M)의 지도부와 심지어 "프라찬다 수정주의"(네팔 당의 주요 지도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라는 호소에 따르지 않는 다른 정당과 조직들(특히 혁명적 국제주의 운동 위원회)에 대항하는 거친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리는 몇몇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의 아늑한 아파트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투쟁의 복잡성을 완전한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유아적 입장과는 분명히 떨어져있다. 많은 곳에서 혁명적인 경험이나 전략적 필요성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혼란스러운 혁명적 이상을 추구하는 온갖 종류의 개인과 집단이 있다. 그러한 집단이나 개인들은 때때로 특정한 혁명적 관념에 이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결코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장 투쟁가들의 이미지와 공공연한 반란 행동을 보고 네팔 혁명을 낭만화했으며, CPN(M)을 칭찬했다. 그러나 최근 마오주의 당이 적용한 전술과 새로운 이미지의 등장, 예를 들어 프라찬다가 카리스마 넘치는 신비로운 혁명 지도자가 아니라 코이랄라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의 편협하고 군사주의적이며 낭만적인 혁명관은 두 가지 활동이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며, 이 과정 자체가 항상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긴 하지만, 작년의 진전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실제로 중요한 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네팔의 혁명 과정을 처음부터 지지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분파 역할을 해온 마오주의 조직으로서 혁명 공산당(RCP)은 다음을 고려 사항으로 제출한다:
1. 네팔의 혁명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지난 10년간 가장 진보적인 혁명 경험이었다. CPN(M)이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네팔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네팔의 혁명 대중은 급속한 발전을 거두고 연이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네팔의 혁명 과정은 또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를 발전시켰다. 이는 맑스-레닌-마오주의 사상의 장기 인민전쟁이라는 전략적 노선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네팔의 혁명은 민중과, 민중만이 세계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마오주의 명제를 보여준다; 이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연계된 맑스-레닌-마오주의 전위당이 구현하는 견고한 혁명 지도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2. 지난 18개월 동안 CPN(M)이 내린 전술적 결정은 이 당이 발전시킨 방향과 일치하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혁명이 진전될 수 있었다.
우리의 첫인상은 이러한 결정들이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는 인민전쟁을 처음 선포했을 때 채택한 계획을 따르고 있다. 처음부터 CPN(M)은 네팔의 계급 구성 내에서 네팔 인민들의 주적이 봉건 지주와 매판 부르주아, 그리고 그들의 제국주의 동맹인 미국과 인도로 구성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반동 계급들은 그들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해, 네팔 사회에서 억압적인 관계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지탱하는 군주제 국가 유형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모든 혁명 세력을 집중시켜 한 번에 한 명의 적을 공격하는 것을 바탕으로, CPN(M)은 봉건 군주제를 목표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주 공화국을 건설할 제헌 의회의 구성을 요구했다. 군주제에 반대하는 세력과 통일 전선을 시작하기 위해 싸웠으며, 일부 주저하는 세력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신중하게 혁명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3.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결정과 혁명 과정의 이 단계는 CPN(M)이 주로 대답해야 할 몇 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그중 하나는 이 정치 과정이 끝날 때 어떤 세력이 주도권을 잡을지를 결정할 중요한 군사 문제에 관한 것이다. 2006년 11월의 평화 협정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민해방군이 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무기를 창고에 보관한 것 뿐이었다.
2007년 2월 3일, 뉴델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마침내 3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으며, 이제는 CPN(M)의 국제 관계를 이끌게 된 가우라브 동지는 인민해방군이 완전히 동원되는 데 단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Kanpitur.com, 2007/02/03).
마오주의자들이 제헌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면 국군을 어떻게 해산될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 지도자 바부람 바타라이는 최근 국가 군대를 "대체로 감축"하고 인민 민병대로 대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기했다 (eKantipur.com, 2007/02/09).
그러나 선거가 치러지고 마오주의자들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진행할 수 있을 때까지, 심지어 인민해방군의 무장 능력을 무력화하지는 않았다 해도 적의 군대는 인민해방군과 동등한 수준의 병력, 무기 및 보급품의 일부만을 같은 방식으로 내려놓았기 때문에, 평화 협정의 조건은 여전히 적의 군대를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현재 국군은 엄밀히 군사적 측면에서 선거 과정에 개입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평화 협정의 정신과 약속에 위배될 것이며, 혁명세력의 정당성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면 인민해방군은 자유민주주의 경로의 온전성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기에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CPN(M)이 군주제 국가를 완전히 폐지하고 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으로 민주 공화국으로 이끌기를 바라는 과도기적 과정은 여전히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어떤 국가에서든 혁명을 향한 길은 결코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예측 가능한 직선을 따르지 않는다. 각 단계가 일종의 역사적 결정론에 따라 다음 단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핵심은 전위당에 속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과정을 주도하고, 그 힘을 축적하며, 매 단계마다 상황의 현실에 맞게 행동하여, 계급 동맹을 구축하고 해체하며, 전진하고 후퇴하고, 다음 단계에 필요한 과업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혁명 정당이 직면하게 될 가장 큰 고난이다.
얼마 전 CPN(M)의 지지자가 말했듯이, 당이 권력 장악에 가까워질수록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진전이 생기고, 오차 범위가 그만큼 좁아진다. 1996년 인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당은 (물론 상대적으로) 실수를 할 여유가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혁명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패배나 한 번의 실패로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없었다.
4.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 우리는 네팔 혁명에 있어 최종적인 것은 없으며, 확정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당 내에서 부르주아 노선이 승리하고 혁명은 패배했다고 가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명백히 거부한다.
네팔의 혁명 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혁명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수백만 명의 민중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군사 및 정치 전술에서 능숙함이 입증되고 훈련과 전투로 입증된 전위당의 기여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인민 전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타협과 휴전은, 병력를 축적하고 적을 고립시키며 혁명 진영을 더 유리한 위치에 놓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혁명의 주요 중심지인 당(및 다른 곳)은 분명히 부르주아 노선이 재발전할 곳임이 분명하다.
1957년, 중국 혁명이 승리한 지 8년, 신민주주의 3년, 사회주의 건설 4년이 지난 후 마오쩌둥은 이렇게 썼다: "계급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계급 투쟁, 각파 정치 세력 간의 계급 투쟁, 그리고 의식 형태 면에서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계급 투쟁은 의연히 장기적이며 곡절적이며, 때로는 매우 치렬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개조하려 하며 부르주아도 마찬가지다. 이 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할 문제에 관하여[19]) 우리는 네팔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5. 네팔의 혁명에 대한 도전은 혁명 세력과 세계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여러 어려움과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CPN(M)은 네팔 혁명과 세계 혁명을 연결하는 변증법적 연결고리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네팔의 혁명을 세계 혁명과 연관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로 네팔의 내부 요인을 포함하더라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관계는 남아시아, 특히 네팔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지배적인 외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도에서의 혁명으로 시작된다. CPN(M)은 이 지역의 마오주의 혁명 세력을 통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이 권역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를 확립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전략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국제적 차원에서 CPN(M)은 혁명 국제주의 운동(RIM)과 협력으로 세계 혁명과 인민 저항을 발전시키고, 전 세계 곳곳에 맑스-레닌-마오주의 전위정당과 조직을 구축하며, 국제 혁명을 이끄는 중심에 참여한다.
단기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과 미국의 패권적 제국주의 공세(소련 사회제국주의의의 몰락 이후, 특히 2001년 9월 11일 공격 이후)로 특징지어지는 현재의 국제적 맥락 때문에, 공산주의 주도의 혁명 정권을 등장시키고,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은 한 나라의 공산주의자들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도전이다. 이 도전은 맑스-레닌-마오주의자들, 전 세계의 혁명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세력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6. 이러한 맥락에서 네팔의 혁명에 대한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우리는 네팔의 혁명 대중을 계속 지지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그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이것은 CPN(M)의 방향에 대한 논쟁과 논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네팔의 동지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공개적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경험을 통해 세계 혁명이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하며, 이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세계에 단 하나의 구체적인 혁명 운동이 밖에 없다면, 그것은 네팔에 있을 것이다. 이 혁명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혁명이다.
마오주의적 혁명 개념은 어떤 "아버지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배제한다. 수정주의자들 덕분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항상 괴롭혀온 이 일탈은 과거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이를 반대하며 격렬하게 싸웠으며, 오늘날 CPN(M)과 진정한 맑스-레닌-마오주의 세력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네팔의 혁명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혁명의 문제들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너무 많은 부분을 특징짓는 두려움과 단조로운 무기력함, 그리고 결의력 부족을 극복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따라 공개적으로 토론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우리가 혁명의 길로 단호하게 전진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진전이 네팔 혁명에 미칠 영향, 네팔 혁명가들이 사회주의를 향한 다음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에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헌신은 확고하며 네팔에 있는 동지들에게는 우리의 연대가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

2007년 8월 3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5차 확대 회의에서 2000명 이상의 간부가 참석했다.

2007년 8월 20일 : 프라찬다와 바타라이는 선거, 공화국 수립, 국왕 재산 몰수, 네팔 군대의 민주화 및 인민해방군과의 통합, 마오주의 전사들의 유족들에게 10만 루피(1,100유로)[20]의 지급 등 22개의 요구 사항을 담은 두 개의 별도 성명을 발표했다.

2007년 9월 17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정부를 떠난다.

2007년 12월 15일 : 7당 연합은 선거 직후 새 의회의 첫 회기에서 네팔을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기로 합의한다.

2007년 12월 30일: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정부에 합류한다.

2008년 1월 8일: "Comité de Solidarité Franco-Népalais"(프랑스-네팔 연대 위원회)는 2007년 12월 15일 네팔에서 "진보적인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 민주적 과정을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설명한다.

2008년 3월 : 칠레 공산주의혁명연합(MLM)은 "세계에서 인민전쟁을 재편하고 ICM 내의 프라찬다주의적 수정주의에 맞서 싸우자."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세계의 공산주의자들(맑스-레닌-마오주의)은 21세기 마오주의 내에서 발생한 수정주의 경향과, 눈에 보이는 수장 프라찬다에 맞서 힘을 합쳐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수정주의자들을 폭로하고, 인민전쟁의 길을 버리고 프라찬다적 수정주의를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기회주의적 노선이 등장하고 발전하는 위험을 막기 위해 광범위한 국제적 토론을 전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요즘 ICM(맑스-레닌-마오주의)에서는 프라찬다주의자들의 배신을 강력히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무지함, 혹은 그들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회주의나 흔들림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8년 2월 28일: 캐나다 혁명 공산당이 몬트리올에 있는 미국 영사관 앞에서 "네팔 인민 공화국"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2008년 4월 10일: 첫 번째 네팔 제헌의회 선거.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는 38,1%, 네팔 의회는 19,1%, 네팔 공산당(UML)은 1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8년 4월 13일 : 캐나다 혁명 공산당 선언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다".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중앙위원회에게,
프라찬다 동지와 모든 무장 세력, 그리고 당의 모든 활동가들께,
친애하는 동지들께,
네팔의 군주제와 구 정권을 종식시킬 제헌의회 선거라는 틀에서 여러분이 방금 승리한 것을 큰 기쁨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들의 감정으로 환영한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네팔 건설을 향한 다음 단계, 즉 중요한 단계를 내딛고 있다. 네팔 국민의 완전한 해방과 혁명 정권 수립으로 가는 길은 분명 장애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세계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제국주의 열강들과 구세계 질서를 수호하고 즐기는 반동 세력은 혁명의 승리를 막기 위해 작전과 음모를 꾸밀 것이 분명하다. 지난 12년간 쌓아온 귀중한 경험과 혁명적인 네팔 대중의 확고한 결의는 최종 승리까지 앞으로 나아가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길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전투적인 연대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롤파 지역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여단 도로 건설 현장에 참가하면서, 우리 당은 여러분의 성공과 결의를 직접 목격했다. 여러분들이 이긴 역사적 승리는 우리가 더 열정적으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2008년 4월 24일 : 인도 공산당(마오주의)가 네팔 선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다.

네팔의 선거 결과는 네팔의 낡은 봉건 군주제 통치에 대한 대중의 압도적인 분노, 인도 확장주의자들의 네팔 괴롭힘과 지배, 미국의 지배와 억압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다시 한 번 입증했으며, 이는 민주주의와 토지, 생계와 제국주의 및 봉건적 착취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에 대한 네팔 대중의 열망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CPN(M)이 권력을 장악한 후인 지금부터 시작된다. 기존 국가를 분쇄하지 않고서는 체제의 근본적인 재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위로부터" 시작된 조치, 즉 국가 법령과 법률을 통해 체제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CC, CPI(Maoist)는 CPN(Maoist)에게 미국 제국주의자들, 인도 반동적 지배 계층, 네팔 봉건 매판 세력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쿠데타, 정치적 암살, 경제 봉쇄 및 파괴를 통해 인위적인 빈곤 조성, 민주적 과정의 전복을 경계하고, 무력으로 이러한 반동자들에 맞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을 촉구한다 (…).
CC, CPI(Maoist)는 오늘날 네팔에서 대중에 확고하게 의존하고 진정한 토지 개혁과 제국주의/확장주의 지배에 맞서 계급 투쟁을 강화함으로써 혁명적인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보고 있으며, 모든 반동적인 음모와 계획을 경계하고 있다. 마오쩌둥 당의 주요 지도부가 정부의 일원이 되지 않고 대중을 동원하여 계급 투쟁을 지속하는 주요 임무에 집중할 때 이것은 가능하다.“

2008년 5월 10일 : 프랑스 마오주의 공산당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의 선거 성공을 축하한다.

《 저희 당은 2008년 4월 10일 선거에서의 귀하의 승리을 환영한다. 이것은 주로 10년간의 인민 전쟁의 결과이다(..). 여러분들이 취하는 길이 일부 사람들에겐 정통적이지 않지만, 공산주의로 가는 길에 귀하 혼자만은 아니다. 》

 2008년 6월 19일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이 발행한 ‘붉은 별’(Red Star) 표지에 도요타 광고가 실린다. 이건 2월 3월에도 해당되었다. 네팔 텔레콤과 인터넷 제공업체 Ncell도 이러한 광고를 실었다.

2009년 1월 1일 : 캐나다 혁명 공산당 기관지인 적기에 "네팔: 유망한 혁명 돌파구"라는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2009년 1월 12일: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등불)[21]에서 분열된[22]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등불)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합류하여 네팔 통일공산당(마오주의)[23]가 되었으나, 여전히 ​​네팔 공산당(마오주의)로 주로 통칭된다.

2009년 2월 1일 : 키란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가 발행한 '붉은 별'에서 "거리 투쟁은 평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터뷰에 응한다.

"CPN-마오주의와 CPN(연합 중앙-등불)의 통합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우리 당은 이미 혁명 정당들과 조직의 단일 간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혁명가들 간의 단결의 시작이다. 이 단결은 분명히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국가와 인민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이다 (…).
거리 투쟁이 미래의 봉기와 관련이 있는가? 거리 투쟁은 평화 과정의 진전과 관련이 있다. 정부, 제헌의회, 거리투쟁이라는 세 전선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나 반민중적이고 반동적인 세력이 헌법 작성과 평화 과정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만들어낸다면 투쟁의 전선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009년 2월 16일 : 키란은 "인민 전쟁에서 표현된 위임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붉은 별에 게재한다.

"12년 전, 네팔 마오쩌둥 공산당(CPN-M)은 2월 13일 구 국가 권력에 대한 공격을 통해 신국가 권력 수립을 위한 인민 전쟁의 역사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 날은 네팔 민중들에게 중요한 날로 자리 잡았다. 이제 우리는 전국적으로 13주년을 기념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인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했던 것을 기억하며 위대한 인민 전쟁의 명시적 명령의 채택과 이행을 위해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10년간의 인민 전쟁과 19일간의 인민 운동 사이의 평화로운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위대한 인민 전쟁의 목표는 네팔에 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목표 달성의 출발점으로 제헌의회(CA) 선출을 하여 새로운 네팔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2009년 5월 4일 : 프라찬다는 네팔 의회당의 람 바란 야다브 대통령이 네팔 육군참모총장 루크만구드 카타왈을 해임하자 탄핵을 가한 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009년 10월 12일: 세계인민저항운동이 영국에서 찬드라 프라카쉬 가주렐 "가우라브"를 인터뷰한다.

 "우리 당이 다당제 경쟁이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21세기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점은 중국에서는 모든 반봉건 및 반제국주의 세력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당은 그 정당들이 UCPN(M)과 경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경쟁이 허용되지 않고 협력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선거에서 그들은 일종의 타협이나 협상을 통해 합의에 따라 후보를 확정했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다른 정당들이 후보를 내세웠지만 중국 공산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후보가 없었지만 중국 공산당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오늘 여기 네팔에서는 경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정당은 UCPN(M)과 경쟁할 수 있도록 허용될 것이다. 우리는 그 정당들과 마오주의자들과 직접 선거를 치룰 수 있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2009년 12월 15일 : 프랑스의 맑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조직-프롤레타리아의 길[24]이 "인도와 네팔의 혁명 만세!"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5년 이래로 아시아 대륙은 세계 혁명의 심장부다(…).
네팔에서는 마오주의자(네팔 통일 공산당 마오주의)들이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군주제를 무너뜨린 민중 봉기를 조직했다.
오늘날, 그들의 주도하에 경제, 정부, 군대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특히 인도와 주요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부르주아들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한 새로운 민중 봉기의 물결이 네팔에서 막 시작되었다. 작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반봉건 국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논쟁과 노선 투쟁에서 네팔 마오주의자들은 민주 혁명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우리 프랑스의 맑스-레닌주의-마오주의-프롤레타리아의 길은 인도와 네팔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지지를 약속한다. 그들이 오늘날 세계 혁명의 희망을 지탱하는 사람들이다!"

2009년 3월 29일: 미국 혁명 공산당이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와의 서한 교환을 공개하면서 네팔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한다.

2009년 7월 24일 : 인도 공산당(마오주의)가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에게 24페이지 분량의 공개 서한을 작성한다.

"우리는 귀하의 당과 전 세계 마오쩌둥 혁명 진영 내에서 논쟁적인 토론을 벌이기 위해 이 공개 서한을 귀하의 당에 보낸다.
네팔 혁명의 발전 과정에서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현대 사회에서 마오주의 혁명가들이 추구해야 할 전략-전술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심각한 진전 때문에 이 단계가 필요해졌다; 또한 MLM의 이념에서 심각한 일탈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더는 귀하의 당만의 내부 문제가 아니다 (…).
UCPN(M) 지도자는 매판 부르주아-봉건 의회 정당들에게 자신의 당이 모든 정당과 평화적인 경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직접 확언했다.
그리고 이 다당제 민주주의에 대한 결정을 전략적이고 이론적으로 발전된 입장으로 설명함으로써 프라찬다 동지는 위험한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다-혁명을 통해 지배 계급 정당을 전복하는 대신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명제; 소위 의회 선거에서 제국주의 또는 외세의 꼭두각시인 지배 계급 정당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의회 정당과의 평화적 경쟁;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무기한으로 포기; 그리고 대중의 후진성과 국내외 반동 또는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세력의 막대한 후원을 이용하여 봉건적 반동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주의 방향에서 자본주의로의 사회 발전 과정 전체를 탈취하여 집권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준다.
전체적으로, 프라찬다 동지의 다당제 민주주의에 관한 결론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들의 헌법에 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
CPN(M)의 융합 이론은 처음 제안된 이후 5년 동안 더욱 일탈을 거듭했고, 2006년에는 반동 정당과의 평화적 경쟁과 인민민주주의 및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이론이 되었다.
인민 전쟁과 봉기가 융합된 프라찬다의 절충주의 이론은 협상과 외교적 조작의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현대 세계 상황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신식민지 형태의 제국주의가 이제 세계화된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우리 중앙위원회는 당이 SPA와 동맹을 맺고, 임시 정부의 일원이 되고,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고, 총사령관-봉건 정당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고, 거점 지역을 포기하고 인민해방군과 YCL[25]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서 벗어나고, 제국주의, 특히 미국 제국주의와 인도 확장주의에 대한 유화 정책을 채택하는 등 당이 추구해 온 잘못된 개혁 노선에 대해 깊이 검토할 것을 UCPN(M)의 지도부와 계급에 호소한다.“

2009년 10월 21일: 인드라 모한 시그델 바산타가 세계인민저항운동에 인터뷰를 진행한다.

"우선, 두 지도자 간의 투쟁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프라찬다 동지는 우리의 의장이며; 오랫동안 우리 당과 혁명을 이끌어 왔다. 키란 동지는 고위직이며, 심지어 프라찬다 동지보다 더 선배이다.
때때로 외부에서는 프라찬다와 키란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분명히 몇몇 동지들로부터 나오는 이야기이며, 우리의 경우 프라찬다 동지와 키란 동지는 서로 단결과 대립하는 투쟁, 즉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해 온 지도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이 외부 언론에 보도된 방식은 잘못된 것이며 우리 당을 분열시키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프라찬다 동지가 온건파이고 키란 동지가 강경파라고 투영했다. 이러한 투영은 반동주의자들이 우리 당이 계속 단결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존재했다. 그들은 당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현실에서 그들 사이의 주요 측면은 단결이다. 그들이 단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당을 함께 이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다르고, 그래서 특정 사안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2010년 4월 29일 : 프랑스 마오주의 공산당이 네팔 통일공산당(마오주의)를 지지하는 기사를 발표한다.

"UCPN-마오주의의 지도부 일부가 내세우는 이론에 대한 논쟁이 있다. 우리 당은 이미 몇 가지 비판과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지에 대해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네팔에서 마오주의자들이 이끄는 대중 운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UCPN-마오주의는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 민감한 시기에서 우리의 임무는 반동 세력에 대한 대중의 주도권을 지지하는 것이다."

2010년 6월 16일 : Netra Bikram Chanda "Biplap"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기사를 붉은 별에 게시한다.

“네팔은 현대 세계에서 혁명가들의 정치적 지도력이 있고 국가 전체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손에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혁명가들의 지도력은 단순히 숫자의 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의제에 기인한다.
제헌의회(CA), 신인민헌법, 연방주의, 토지개혁, 소수자 권리, 민족 독립 및 새로운 국군은 UCPN 마오주의가 개발하고 전면에 내세운 의제이자 개념이다. 네팔 사람들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강력한 지지를 하고 있다. 지식인, 상인, 사업가, 심지어 치안 병력까지 이를 지원하고 있다."

2011년 5월 27일 : "네팔 혁명의 어려운 상황"이라는 기사가 캐나다 혁명 공산당 도당 게시판에 게재됨.

"네팔 동지들의 마오주의자들이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당 분열설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에베레스트 산 위를 휘날리는 붉은 깃발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겠지만; 우리는 네팔 혁명가들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한다."

2011년 9월 2일: 프랑스-네팔 연대 위원회는 네팔의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2주 후 활동을 중단한다.

“네팔에서 두 가지 중요한 소식이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혁명 투쟁의 회복의 신호라기보다는 혁명에 대한 큰 위험의 신호이다.
첫째, 바부람 바타라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네팔 개혁파 노선를 대표한다. 그는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의 설립을 지지하며, 인민공화국 수립을 향한 필수적인 단계로 보고 있다. 그는 혁명적인 과정을 영영 멈추기 위해 어떤 타협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둘째로, 인민해방군의 무기가 담긴 주요 컨테이너가 방금 통합특별위원회에 전달되었으며, 이는 사실상 인민해방군의 항복을 의미한다. 부사령관이 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말한 카일리의 주둔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 9월 : 프랑스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는 "네팔의 노선, 경향, 파편과 질문"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소위 마오주의자들과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2006년 평화 협정으로 네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아래가 아닌 위에서 현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네팔 혁명에 대한 기계적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만 바라본다.
그들은 네팔 혁명이 나선형으로 진행된다는 점, 그래서 인민 전쟁의 전개가 전위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인민들은 큰 패배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을 모른다. 네팔의 프라찬다와 같은 수정주의자들이 "전술"을 발명한 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적 법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노선은 삶(빨간 선) 또는 죽음(검은 선)의 표현이며, 그 이념적 종합은 현상의 경로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높은 단계이다. 이것이 바로 위기라고 불리는 것이다. 노선은 전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인 문제의 표현이다. 이러한 이유로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에는 두 개의 노선이 없다.
그들은 두 가지 경향이 있고, 여러 가지 지점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경향들이며, 이제는 너무 많아서 공공연히 반대하게 되고, 파편이 되고, 공개적인 경향이 되었다. 그러나 두 경향 모두 평화 협정에 찬성했으며, 모두 인민 전쟁을 필요한 반란으로 이해하는 대신 인민 전쟁의 길을 "선택"하는 척했다.
두 사람 모두 2000년대에 "21세기 사회주의"를 장려하고, 공산당의 지도 아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하는 등 프라찬다주의를 받아들였다.

2011년 9월 23일 : 프랑스 마오주의 공산당이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 내 노선 투쟁에 대하여 라는 문서를 발표함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완전한 항복, 반란 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포기. 당이 이러한 거래에 참여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권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진전이 없었다. 대중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더 나은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거나, 더 나쁜 것에 실망하고 있다.
2. 대중을 동원하는 혁명 투쟁의 재개. "하나는 둘로 나뉜다"는 것이지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아니다. 선택해야 한다. 우파 노선은 대중에게 비난받아야 한다. 대중은 역사를 만드는 동시에 지도자가 거짓되고, 희미해지거나, 청산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 입장을 취할 때 고통을 겪기 때문에, 대중에게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2011년 11월 : 콜롬비아 공산주의 노동자 연합(MLM)는 "네팔에서의 배신과 소위 붉은 분파의 역할에 대하여"라는 문서를 발표하며 프라찬다주의 당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2011년 12월 26일 :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단결은 수정주의와 중도주의의 패배를 요구한다!"라는 공동 선언문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 CPN(M)은 RIM 회원으로서 마오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맑스 레닌 마오주의에 맞서고, 낡은 반동 국가를 파괴를 포기하고, 인민전쟁을 포기로, 인민을 무장 해제로, 이미 정복된 대중 권력의 기반을 해체로, 인민해방군을 착취자들의 반동군으로 해산함으로, 마침내 수정주의 정당인 등불과 합쳐져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 - UCPN(M)으로, 그리고 다른 모든 기회주의 정당들과 타협하여 지주, 부르주아, 제국주의의 계급 독재를 방어하고, 인민을 통치하기 위해 헌신한다는 수정주의 강령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RIM 위원회(CoRIM)가 수정주의 노선과 CPN(M)의 배신에 침묵을 지키며 사실상 국제적인 주도적인 역할을 사임하고 RIM의 위신을 훼손한 것도 명백하다.(…).
기회주의와 완전히 단절하고 차별화해야 하는 이러한 필요성에 맞서 공산주의 운동 역사에서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의 ≪조정자≫ 역할로 알려진 익숙한 중도 경향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 공산당(마오주의)가 이끄는 중도주의 경향은 지난날 RIM과 위원회(CoRIM)에서 중도주의의 직접적인 연장선이다.
개방적인 프라찬다주의의 공개적인 부르주아적 퇴보 속에서, 지난날 그의 이론을 칭찬하고 네팔의 배신을 무시하며 UCPN(M)의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지지했던 중도주의자들은 오늘날 프라찬다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프라찬다주의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더는 프라찬다 대신 키란을 지도자로 인정하는 프라찬다주의의 분파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 그들은 혁명의 항복에서 바타라이와 프라찬다의 현재의 상징적인 행동을 거부하지만, 2006년 평화 협정에서 자행된 인민전쟁이라는 진정한 정치적 배신에서 당의 수정주의적 성격은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한다.
중도주의는 네팔의 수정주의 우파의 일부를 ≪적색파≫라고 부르며 화해하고, 수정주의와 중도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을 ≪교조적 수정주의자≫와 ≪기회주의적 청산주의자≫로 부르며 분노하며 싸운다.
중도주의는 UCPN(M)의 수정주의 노선과 이념적, 정치적, 조직적으로 완전한 단절과, 이것 없이는 네팔에서 진정한 혁명 노선을 구상하고, 인민전쟁으로 돌아가 이를 이끌며, 국가 전체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2011년 12월 26일 : 이탈리아 마오주의 공산당이 만든 마오주의의 길 누리집이 공동 선언에 대한 답변을 한다.

좌파-사이버 마오주의자들이 공동 선언을 한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그들은 '이탈리아 마오주의 공산당'를 공격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적은 네팔 혁명을 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혁명을 실현하는 정당 및 조직과 함께 진정한 국제적 mlm 조직을 재건하는 것이다."

2012년 6월 19일: 모한 바이드야 "키란"이 이끄는 네팔 공산당-혁명적 마오주의[26] 창당.

2012년 7월 1일 : 모한 바이디아 "키란"이 기자 회견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RIM에 있다. RIM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있다(…). 우리는 예전에 RIM의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RIM은 현재 사실상 활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프라찬다와 바부람을 떠난 것이 아닌, 그들이 우리를 떠난 것이다. 우리는 당과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당의 정치적 이념 노선을 버리고 스스로 분열했다. 따라서 이제 그들의 계급 분류 문제는 정말 기괴하다. 프라찬다와 바부람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이 막을 내렸다. 외국 반동주의자들과 팽창주의의 꼭두각시인 자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꼭두각시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우리는 인민 전쟁을 선택할지 인민 반란을 선택할지에 대해 모호하지 않다. 먼저, 우리는 의회주의에 맞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의회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 공화국, 모든 정당이 민주주의의 레트로 장르 노래를 부르는 낡고 쇠퇴한 의회주의라는 민주주의는 완전히 실패했고 제헌의회도 실패했다. 따라서 대안으로, 국가와 민중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봉건주의, 제국주의, 신식민지주의에 맞서 네팔에 신민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것이 우리의 핵심 의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합법적이든 지하조직이든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혁명 정당은 모든 필수적인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정직하게 평화 협상에 임했다. 우리가 성공했을 때는 마오주의자들만 모든 타협을 해야 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 정도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인민전쟁이나 인민반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핵심 문제이다."

2012년 8월 31일 : 인도 공산당(마오주의)가 "네팔-마오주의 공산당 결성 만세"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CPI(마오주의) 중앙위원회는 네팔 혁명을 배신하고 그들과 경계를 정하고 결별한 당내 기회주의적이고 신수정주의적인 지도부에 맞서 장기간의 내부 이념적·정치적 투쟁 끝에 네팔에서 새로운 혁명 정당을 창당하게 된 것을 축하하며, 여러분과 모든 중앙위원회 당원, 그리고 CPN-마오주의자의 모든 구성원에게 따뜻한 혁명적 인사를 전한다.
네팔 혁명이 전략적 공격의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UCPN(마오주의) 지도부는 국내외 상황을 주관적으로 평가하고 잘못된 전술을 취하여 2005년 말 이후 끊임없이 항복주의와 함께 의회주의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
혁명가들은 여전히 당의 신수정주의자 프라찬다-바타라이 파벌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당대회가 열릴 때까지 내부 투쟁을 계속하고 문을 열어두겠다는 입장은 옳다 (…).
우리는 이 편지를 마치며, CPN-마오주의가 네팔의 억압받는 대규모 대중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유지하고 네팔 혁명의 위대한 순교자 수천 명의 꿈을 이루기를 큰 희망으로 바란다."

2012년 10월 : 튀르키예의 TKP/ML이 "개혁주의와 수정주의의 덫에 걸린 네팔 혁명"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UCPN(M)은 네팔에서 인민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현재 혁명을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당 내에서 지배적인 수정주의 노선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동지, 특히 지도부 직책의 이들은 당분간 열린 마음으로, 심지어 공공연히 자신들의 의견과 비판을 표명하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행동 방침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변호되는 « 평화적 이행 » 이론은 사실 기존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시스템은 유지되고 있으며, 이번만 « 혁명적 » 또는 « 사회주의자 » 가면을 쓴 지배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선거나 유사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잡거나 사회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일어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대중주의적»이나 «혁명적»인 정부는 지배 계급의 통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은 « 평화적 이행»이라는 환상의 기초가 되는 추상적 개념인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초계급적 개념, 즉 계급과 분리된 공통된 체제로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관해서 «친절하다는» 평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인류를 보다 발전된 수준으로 집단적으로 이끌고 생산력을 최적으로 발전시키는 제국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수립했거나 수립을 지원했던 «민주적» 체제의 미덕 덕분에 체제를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합법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13년 1월 4일: 캐나다 혁명 공산당이 모한 바이디야 "키란"이 이끄는 네팔공산당-혁명적 마오주의의 제7차 대회를 축하한다.

2013년 1월 4일 몬트리올
모한 바이디야 '키란' 회장
람 바하두르 타파 '바달', 사무총장
조직중앙위원회
네팔 공산당 – 마오이스트
친애하는 동지들께,
캐나다 혁명공산당의 중앙위원회와 모든 지지자들을 대표하여, 귀 당의 역사적인 제7차 전국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동지들께 가장 따뜻한 혁명적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란다. 비록 우리가 물리적으로 참석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우리의 연대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
1996년부터 우리 당과 그 이전의 단체들은 항상 네팔의 프롤레타리아와 혁명 대중, 그리고 마오주의 전위당을 지지해 왔다. 2005년 가을 롤파 지역에서 열린 첫 번째 국제 여단 도로 건설 현장에 참여하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네팔 인민 전쟁의 사례로 인해 우리는 혁명적 국제주의 운동(RIM)과의 작업 단위를 수행하도록 이끌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조직이 사라지기 전에는 완료할 수 없었다."

2013년 1월 16일: 맑스 레닌 마오주의 국가연락위원회(USA)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연대와 인사의 편지를 보낸다.

"우리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동지들이 프라찬다-바타라이 수정주의 파벌에 맞서 수년간의 투쟁 끝에 네팔에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강철같은 정당을 창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가장 신나고 기쁘다.
프라찬다-바타라이 수정주의 파벌은 실제로 네팔에서 일어난 혁명적 인민 전쟁을 탈선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산주의적 배신으로 혁명 운동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네팔에서 이 파벌은 인민해방군을 적에게 항복시키려 했고, 싸우는 동지들을 감금하고 무기를 압수했으며, 반동 국가와 자신들의 청산을 두고 협상을 벌였다"

2013년 2월 15일 : 아프가니스탄 노동자 조직(맑스-레닌-마오주의, 주로 마오주의)은 "프라찬다 또는 모한 바이드야(키란)는 둘 중 하나는 더 많은 수정주의를 의미한다!"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2001년 2차 전국 회의에서 CPN(M)이 내세운 두 가지 서로 다른 전략의 융합 이론은 매우 일탈적인 노선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이 정당은 2005년-2006년에 혁명을 배신했지만, 이를 위해 이론적, 이념적 뿌리를 생각해야 한다.
프라찬다에 따르면 "융합 모델"이라고도 불리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전략에 대한 이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당화된다:
"과학기술, 특히 전자 분야의 급속한 발전은 위의 분석을 바탕으로 장기 인민 전쟁과 일반 무장 반란 전략의 융합 형태로 각국과 세계에서 혁명을 추진하는 것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을 가져왔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정주의는 장기인민전쟁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전략적 충분성을 부정했다.
무장 반란 모델을 '부활'하는 것은 네팔 수정주의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기인민전쟁의 전략을 전복시키기 위한 가면이었다. 그들은 인민 전쟁 전략을 폐기하기 위해 반란 신화를 되살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융합 모델"은 단지 절충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MLM 세력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전략인 장기인민전쟁 뿐이다. 장기인민전쟁을 부정하는 것은 마오주의를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과 같다. 마오주의를 버리는 것은 공산주의와 세계의 미래를 버리는 것과 같다.
 

2013년 4월 13일 : 다양한 분리 독립 단체들로 구성된 네팔 공산당(연합)[27]이 네팔 통일공산당(마오주의)에 합류한다.

2013년 7월 14일 : 아프가니스탄 공산당(마오주의)는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대한 다큐멘터리 요약 분석’에서 네팔 상황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다.

"키란의 지도 아래의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UCPN-M] --2012년 6월 "네팔 통일 공산당-마오주의 혁명적 파벌 전국 대회" 이후, 프라찬다-바라타이 수정주의에 맞서 네팔 공산당-마오주의[CPN-M]로 알려졌다– 파벌이 깊이 있고 포괄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는 초기 낙관론은 근거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CPN-M 총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총회에서 작성된 문서를 수령하거나 연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당에 대한 최종적이고 세부적인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PN-M의 총회 이전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더라도 UCPN-M의 일탈이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반복되는 특정한 이념적, 정치적 입장을 찾을 수 있다."

2013년 11월 19일: 제2회 네팔 제헌의회 선거. 네팔 의회는 29,8%의 득표율(2,694,983표), 네팔 공산당(UML)는 27,55%(2,492,090표), 네팔 통일공산당(마오주의)는 17,79%(1,609,145표)를 득표했다.

2014년 11월 29일: 서기장 네트라 비크람 찬드가 탈당하여 네팔 공산당(마오주의)[28]을 창당하면서 네팔 공산당(혁명적 마오주의)[29]가 분열되었다.

2016년 5월 19일: UCPN-M, 다수의 CPN-RM(키란 파벌 제외), CPN-M 내 한 분파(네트라 비크람 찬드 파벌 제외) 및 기타 7개 조직이 합당했다. 명칭은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중앙[30]로 정해졌으며, 프라찬다가 의장으로 취임했다.

2016년 7월 12일: 2015년 9월에 UCPN-마오주의를 떠난 바부람 바타라이가 "좋은 통치" 노선에 따라 새로운 힘, 네팔[31]을 창당한다.

2016년 6월 16일: 헤만타 프라카시 올리가 이끄는 공산주의 핵 네팔당과 부펜드라 노이판이 이끄는 CPN 마오주의(혁명적)이 공산주의 핵 네팔로 합병됨.

2016년 8월 3일: 중국에 우호적인 네팔 공산당(UML) 소속 총리가 사임한 후, 프라찬다가 인도와 네팔 의회당의 지원을 받아 후임으로 취임한다.


[1] Communist Party of Nepal (Mashal),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मशाल) | 1984년 네팔 공산당 (등불)에서 분당.

[2] 네팔의 수도

[3] 네팔의 8대 왕

[4] Communist Party of Nepal (Fourth Convention),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चौथो महाधिवेशन) | CPN(Amatya)에서 분당.

[5] Proletarian Workers Organisation, सर्वहारा मजदुर सङ्घ

[6] Communist Party of Nepal (Janamukhi),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जनमुखी)

[7] Communist Party of Nepal (Unity Centre),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एकता केन्द्र) | 약칭 CPN(UC)

[8] United People's Front Nepal, संयुक्त जनामोर्चा नेपाल | 줄여서 SJM

[9] Communist Party of Nepal (Unified Marxist–Leninist),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एकीकृत मार्क्सवादी-लेनिनवादी) | 약칭 CPN(UML)

[10] Nepal Congress, नेपाली कांग्रेस| 네팔 의회당은 네팔 국민의회당와 네팔 민주의회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당이다. 1990년의 네팔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

[11] 당은 쪼개지지만,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당명을 유지함. 네팔 통일인민전선도 둘로 갈라짐

[12] Communist Party of Nepal (Maoist), नेपाल कम्युनिस्ट पार्टी (माओवादी) | 1994년 네팔 중간선거를 보이콧한 이유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두 SJM이 동시에 정당등록을 추진했으나, 선관위가 니르말 라마 파벌만을 인정했기 때문.

[13] 네팔의 왕정독재를 종식시키려는 7개 정당 연합. 네팔 의회당, 네팔 의회당(민주파), 네팔공산당(통일 맑스-레닌주의), 네팔 노동자 농민당, 네팔 친선당(아난디 데비), 통일 좌파전선, 인민전선 등이 구성됨.

[14] Communist Party of Nepal (Marxist–Leninist–Maoist), नेपाल कम्युनिस्ट पार्टी (मार्क्सवादी–लेनिनवादी–माओवादी)

[15] Nepal Samyabadi Party (Marksbadi–Leninbadi–Maobadi). | 줄여서 네팔 삼야바디 당. 삼야바디는 네팔어로 공산주의라는 뜻이다. 즉, 네팔 공산당(맑스-레닌-마오주의)를 네팔어로 부른 것.

[16] Communist Party of India (Maoist) | 인도 공산당(마오주의)

[17] la Unión Obrera Comunista (marxista-leninista-maoísta) de Colombia

[18] Unión de Revolucionarios Comunistas (Marxista-Leninista-Maoísta) de Chile

[19] 모택동 선집 5권, marxist.org의 pdf 기준 599p

[20] 당시 한화로 140만원

[21] Communist Party of Nepal (Unity Centre–Masal),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एकता केन्द्र–मसाल) | 2001년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과 네팔 공산당(등불)의 합당을 통해 탄생

[22]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등불)은 2006년에서 2009년까지 4개의 정당으로 분열된다.
(1) 네팔 공산당(2006) - 창당 직후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흡수 합당
(2)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등불) - 이후 네팔 공산당(등불)로 이름 변경
(3) 국가 인민전선[Rastriya Janamorcha, राष्ट्रिय जनमोर्चा]
(4) 네팔 공산당(연합 중앙-등불) - 2009년 네팔 공산당(마오주의)에 흡수 합당

[23] Unified Communist Party of Nepal (Maoist)

[24] Organisation communiste marxiste-léniniste – Voie prolétarienne

[25] Young Communist League, 청년 공산주의 동맹. 1981년에 여러 청년조직들이 합쳐져 결성된 Akhil Nepal Yuba Sangathan(전 네팔 청년 조직)에 기원을 둔다. 전 네팔 청년 조직은 1991년 청년 공산주의 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전쟁 기간 중 협력한다. 2006년에 공개적으로 전환하며 지하조직으로서 YCL은 해산되었다.

[26] Communist Party of Nepal (Revolutionary Maoist),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क्रान्तिकारी माओवादी) | 2012년 창당, 이후 2017년 합법화됨

[27] Communist Party of Nepal (Unified), नेपाल कम्युनिष्ट पार्टी (एकिकृत)

[28] Communist Party of Nepal (Maoist). 기존 정당과 동명.

[29] 당시는 Communist Party of Nepal (Maoist), 2015년 11월 8일에 CPN (Unified)과 합당해 Communist Party of Nepal (Revolutionary Maoist)-CPN(RM)로 이름을 바꿈

[30] Communist Party of Nepal (Revolutionary Maoist), नेपाल कम्युनिस्ट पार्टी (माओवादी केन्द्र)

[31] Naya Shakti Party, Nepal, नयाँ शक्ति पार्टी, नेपा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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