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Z세대 봉기’와 프라찬다 수정주의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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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Z세대 봉기’와 프라찬다 수정주의의 교훈

 서문

2025년 9월 8일부터 시작된 이른바 네팔 ‘Z세대 봉기’는 현재 네팔을 광풍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때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네팔은 어쩌다 군부에 권력을 탈취당했나? 이 글에서는 네팔혁명을 돌아보며 네팔혁명이 실패한 원인을 파악하고, 교훈을 얻고자 한다.

네팔왕국과 네팔혁명

17세기까지 히말라야 바로 아래 지역에선 통일되지 못한 체 비등비등한 여러 왕정국가가 서로 경쟁하고 연합하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1768년 구르카 왕국의 왕 프리트비 나리얀 샤가 이런 분열을 통합하고 네팔왕국이라고 명명하며 통일 왕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히말라야 아래서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하며 지내다가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진행된 영국-네팔 전쟁에서 패배해 전 국토의 3분의 1을 할양하고 사실상 영국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국제적으로는 영국의 보호 아래에서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고, 국내에서는 왕을 허수아비로 둔 섭정 가문인 라나 가문의 독재체제가 지속되었다. 인도의 독립 이후, 허수아비 신세를 벗어나고 싶던 트리부반 왕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협공으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나 약 10년 만에 트리부반 왕의 아들인 마힌드라 왕이 발표한 판차야트 정책으로 정당이 금지되며 전제군주제로 회귀한다. 한편 라나 가문이 실권하기 전에 맺은 인도-네팔 평화 우호조약은 상호간 국경개방, 산업 우선권, 이권 보호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조약은 인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이후 네팔의 경제를 인도의 지배하에 놓인다.

네팔 특유의 전제군주정 체제인 판차야트 체제는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유지되었다. 1990년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인 네팔 회의와 좌익 정당 연합체였던 통합좌파전선의 주도로 민주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인민운동이 벌어졌고, 당시 국왕인 비렌드라 왕은 강경 진압을 시도했지만, 연말에는 다수의 경찰마저 시위를 방관하거나 합류할 만큼 시류를 막을 수 없게 되자 결국 국왕의 역할이 제한되는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통합좌파전선에서 의회에 합류한 파벌들이 연합하여 오늘날 네팔공산당(통합 맑스레닌주의), 왕실 폐지를 주장하면서 지하 정당으로 남은 곳 중의 하나가 이후 인민전쟁을 주도하는 네팔공산당(추후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센터))가 된다. 이때부터 네팔공산당(마오주의)를 지도하던 인물이 바로 푸슈파 카말 다할, 즉 프라찬다라고 불리는 그 남자이다.

1996년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왕실 폐지, 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인민전쟁을 선포하고, 전국의 당원들과 농민들을 무장시키고 조직하면서 준비한다. 이후 2001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계시한다. 한편 네팔 왕정은 왕세자 디펜드라가 즉위 직후 마약중독 등 복잡한 정신상태를 이유로 네팔 왕실, 즉 자기 가족을 총으로 쏘아 살인하고, 직후 본인도 권총 자살을 하며 혼란에 빠지고, 결국 선왕 비펜드라의 동생 갸넨드라가 왕위를 승계하며 수습한다.

갸넨드라는 비펜드라의 유화책을 무로 돌리고, 미국, 영국, 인도의 지원을 받아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의 인민전쟁을 탄압하려 한다. 그러나 네팔의 여러 모순으로 인해 불만이 쌓여있던 대중들은 갸넨드라의 강경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갸넨드라는 계엄령과 의회 폐쇄, 왕실 친정이라는 극단적인 카드까지 꺼내 들며 인민전쟁을 저지하려 했지만, 네팔 민중들은 프라찬다와 네팔 공산당의 인민전쟁에 합류했고, 부르주아 야당 정치 세력들 또한 왕정의 강경책을 거부하며 왕실 폐지와 평화 협상을 지지했다.

2006년 11월 네팔공산당(마오주의)는 부르주아 야당들의 연합인 7당 연합(네팔의 왕정독재를 종식시키려는 7개 정당 연합. 네팔 의회당, 네팔 의회당(민주파), 네팔공산당(통일 맑스-레닌주의), 네팔 노동자 농민당, 네팔 친선당(아난디 데비), 통일 좌파전선, 인민전선 등이 구성됨.)과 교섭한다. 이 교섭에서 최종적으로 왕실 존치 여부 국민투표, 다당제 민주주의 전환, 인민군 무장해제 후 네팔군에 합류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2007년 왕실 폐지 국민투표에서 폐지 측이 승리하면서 네팔의 왕정은 폐지된다. 추후 다룰 것이지만 2005년의 합의가 네팔혁명의 수정주의화를 만들어 낸 최악의 회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프라찬다의 집권과 실각, 그리고 오늘

프라찬다의 집권과 실각, 그리고 오늘날

이후 네팔공산당(마오주의)는 2008년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하게 되지만, 네팔 인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수정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프라찬다 1기의 가장 큰 이슈는 앞에서 언급된 인도-네팔 평화 우호조약의 폐지 여부였다. 앞서서 말했듯이 인도 자본의 네팔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고, 네팔에서 인도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던 가장 큰 법적 근거로 작동했던 이 조약은 당시 많은 네팔 인민이 지지했었다. 그러나 프라찬다는 시민들의 요구를 뭉개면서 무시하고, 이후 반대파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채 실각했다. 그러나 반대파들 또한 네팔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건 둘째 치고, 자본주의적인 경제개발계획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체, 타국으로부터의 지원이나 차관, 노동자 수출과 송금경제, 히말라야 관광에만 의존할 뿐이었다.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센터)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여러 행적을 보이지만 오래 된 인도 자본의 새로운 대변자로서 자리매김했다.

한때 네팔 회의에 대항해 17년경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센터)과 합당을 하기도 했던 네팔공산당(통합 맑스레닌주의)은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센터)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 중국의 안보,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은 그들은 프라찬다와 차별화하기 위해, 인도와의 국경분쟁 지역에 대한 강경한 주장을 쏟아내며 인도와 대립각을 세우는 방식으로 지지를 얻었다. 물론 네팔의 고질적인 저개발과 관광,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송금에 의존하는 방식의 경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네팔의 수정주의 세력들이 부패하는 사이에 대중들은 다시 분노하기 시작했다. 네팔 정부에서는 SNS에서 반정부 선동을 일삼는 인도 AI 가계정들에 대한 차단을 이유로 각종 SNS에 대한 차단을 발표했지만, 시민들은 수정주의 당 고위직들의 자녀들이 호화롭게 사는 사진들이 네팔 SNS에 유포되기 시작했고, 정부가 이 때문에 대규모로 검열을 지시했다고 판단했다. 대규모 검열 사태에 분노한 대중들은 Z세대라 불리우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진압의 약 50여명의 시민이 죽었다. 이후 더욱 격양된 시위는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에 불을 지를 정도가 되었고, 올리는 결국 사퇴를 발표하게 되었다.

총리는 이미 사퇴했지만, 네팔은 제대로 된 선거조차 진행할 수 없을 정도의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기존 수정주의 세력을 대체할 전위가 만들어지지 못한 상태로 대중들이 혼란스럽게 떠도는 사이에 네팔 군부가 직접 치안유지에 나선다는 명목으로 정권을 인수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군부는 대통령과 이른 바 “Z세대 시위대 대표단”과 논의 끝에 여성 최초로 대법원장을 역임했던 전 대법원장 수실라 키르키를 임시 총리로 선출하고 하원 해산 후 재선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급작스레 정부를 인수한 군부와, 역시나 그 실체가 없이 군부의 협상 상대로 나선 “대표단”의 등장에 대해 네팔과 세계의 진보진영에선 인도(와 서방)에 포섭된 인사들이라는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프라찬다 수정주의의 교훈

네팔혁명은 패배했다. 네팔의 기성정당들과 프라찬다 수정주의 모두 네팔의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네팔혁명은 어디서 좌초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2006년에 진행된 평화협상에서 발표한 인민군 무장해제와 다당제 민주주의 채택이었다. 프라찬다와 그 일파는 공산당의 무력과 영도를 포기한 것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라는 말을 남겼다. 파리 코뮌은 프랑스 지배계급과 프로이센의 군대에 패배했고, 살바도르 아옌데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동 피노체트와 군부에 밀려 좌절했다. 반면 레닌은 10월 혁명과 그 이후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반동 계급과 국제 자본주의 군대에 대항하여 적군을 조직해 승리하였고, 모택동은 항일 전쟁과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을 통해 중국 해방을 쟁취해냈다. 무산계급이 고조될수록 지배계급의 억압은 거세지고, 혁명의 순간은 전쟁을 수반한다.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은 지배계급의 선전포고에 대항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승리하였기에 혁명에 성공했다.

네팔 인민군의 무장해제는 혁명의 전례들을 완전히 거스른 결정이었다. 프라찬다와 그 일파는 인민과 그 군대를 신뢰하는 것이 아닌, 인도와 서방 제국주의의 위협에 겁을 먹어 매판 부르주아 일파들과 손을 잡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인민의 의지를 관철하고 인민 자신을 보호할 무력을 포기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또한 그들은 인민공화국과 신민주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자산계급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두번째 중대한 배신을 한다. 모택동 주석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는 더 이상 기존의 자산계급 민주주의가 아닌, 무산계급이 영도하고 그 이외 계급이 따라오는 무산계급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1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 이후, 자산계급 민주주의는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해방에 더 이상 이바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 이상 자립적인 자산계급 민주주의 국가들을 용납하는 대신, 그들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유지하고자 하며, 식민지, 내부의 대다수 자본가 또한 매판자본, 관료자본으로서 제국주의의 봉사하고 이윤을 착취하고 있다. 더 이상 자산계급은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에는 무산계급이 영도하고 그 외 반제세력이 결합하는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만이 진정한 해방이며 민주주의이다. 중국 혁명을 비롯한 많은 혁명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를 타파했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도의 반식민지였던 네팔에서 자산계급 민주주의는 불가능했다. 인도 자본은 인도-네팔 평화우호조약을 기반으로 네팔 시장에 침투했고, 때로는 군주정, 때로는 자산계급 민주주의를 지원하며 매판자본을 키웠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매판자본을 배제하는 신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프라찬다 일파는 인도-네팔 평화 우호조약의 파기를 거부하는 등 인도 자본의 새로운 대변인으로 나서는 것을 선택했다. 당연히 자립적,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프라찬다 수정주의의 교훈은 결국 원칙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혁명을 위한 군사력과 권력을 스스로 포기했다. 하지만 과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검토하는 것으로도 원칙을 다시 확인할 수 있지만, 결정 뒤에 숨어있는 의도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프라찬다 일파는 제국주의의 겁박을 받고 있었고, 결국 인민을 믿기보다 겁박에 고개 숙이는 것을 선택했다. 인민을 믿지 못한 프라찬다 수정주의는 인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결국 인민에게 버림받았다. 당이 물고기라면 인민은 물이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 수 없고 프라찬다 수정주의는 인민을 떠난 대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참조 자료

Kingdom of Nepal - Wikipedia

반란 역 <네팔 공산당사 연표>
https://uprising.kr/nepal-communist-party-history-timeline/

Maoist Outlook - Revolutionary Communist Party of Nepal - 2023
https://www.bannedthought.net/Nepal/CPN-Maoist/MaoistOutlook/2023/MaoistOutlook-V6N1.pdf

Protests in Nepal: Important to Know
The protests in Nepal began after the government imposed a ban on major social media platf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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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anti-imperialist movement
Revolutionary Students’ Front – Context Nepal: Imperialist Plot vs. Revolutionary Potential – The Red H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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काठमाडौं । ३६ वर्षदेखि नेपालमा संसदीय व्यवस्था छ । यस बिचमा देशलाई भ्रष्टाचारको आहालमा डुबाउने र २८ खर्बको ऋणको चङ्गुलमा फसाउन संसदवादी पार्टीहरु नै मुख्य रुपले जिम्मेवार छन् । बहुदलपश्चात कृष्णप्रसाद भट्टराई (नेपाली काङ्ग्रेस) दुई पटक (सन् १९९०–१९९१, १९९९–१९९९) प्रधानमन्त्री भए । गिरिजाप्रसाद कोइराला (नेपाली काङ्ग्रेस) पाँच पटक (१९९१–१९९४, १९९७–१९९८, १९९८–१९९९, १९९९–२००१, २००६–२००८), मनमोहन अधिका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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