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혁명가들 1. 아비마엘 구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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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혁명가들 1. 아비마엘 구즈만

목차
1. 구즈만, 그는 누구인가
2. 구즈만과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의 의의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의 지도자이자 오늘의 주인공 아비마엘 구즈만

지난 12월 3일은 페루의 혁명가 아비마엘 구즈만의 생일 90주기였다. 각국의 진보적, 혁명적 단체와 공산당은 그를 기념하는 성명을 내고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그는 누구이고 왜 그의 생일을 90년이 지나서도 기념하는 것일까? 아비마엘 구즈만(Abimael Guzman)은 필명 곤잘로(Gonzalo) 회장으로 알려져 있는 페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구즈만과 그가 이끈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은 페루의 군사정권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워 한때 페루 국토의 절반 정도를 통제하였으나, 후지모리 정권의 강력한 탄압과, 92년에 절대적 리더였던 구즈만의 검거 이후 그 힘이 급격히 줄었다.

1934년 페루 아레키파에서 태어난 구스만은, 부유한 사업가의 사생아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버리고 그가 5살일 때 사망했다. 구즈만은 어린 시절을 아레키파에서 보내며 학교생활을 하며 철학 학위를 딴 그는 10대 후반까지는 정치활동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스탈린을 존경하던 화가 카를로스 데라 리바의 제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50년대 후반 페루 공산당의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1962년 아야쿠초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우이망가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대학에서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1965년부터 67년 사이 구즈만은 당시 한창 문화대혁명 중에 있던 중국을 자주 방문했는데, 이 때의 경험이 중소분열로 인한 페루 공산당의 이론적 분열에서 친중 노선을 선택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구즈만은 페루 공산당의 사상적 분열에서 친중노선을 선택했고, 그는 중국에서처럼 농촌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일으켜 점차 도시를 점령하는 혁명을 시도하려 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든 것이 바로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인 것이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조직이었지만 페루지역의 혼란상과 거점 삼았던 아야쿠초 지역의 낙후로 인한 불만을 흡수해 성장하고, 여러 시위 현장에 참여하다가 1980년 5월 17일 민중들에게 대선 불참을 종용하며 아야쿠초 지역에서 선거 방해 행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곤잘로라는 그의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길 군인들의 모습

1980년대 초반에는 주로 근거지이자 페루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던 아야쿠초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그 행동반경을 넓혀 80년대 후반에는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포위하고, 페루 전역 절반을 통제했다. 마오쩌둥이 제시한대로 농촌지역부터 장악하기 시작해, 도시 빈민들에게도 다가가며 확장하던 것이다. 90년대 후지모리 정권이 집권하면서, 농민 민병대를 합법화한 다음 무장시키고, 군대를 적극적으로 투입했다. 무력을 적극적으로 투입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92년 리마에서 구즈만이 검거된다. 후지모리 정권이 구즈만의 꼬리를 잡게되면서 점차 그의 거주지를 특정하게 된 것이다. 9월 12일 특수부대가 그의 거처를 급습해 구즈만과 빛나는 길의 주요간부 8명을 체포하게 된다. 당시 헌법을 사실상 정지시킨 후지모리 정권은 그를 3일동안 재판한 후 종신형을 선고한다. 재판 이후 후지모리 정권은 구즈만이 항복선언을 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알 수 없던 잔존 게릴라들은 일방적인 항복선언에 분열되어 급속히 그 힘을 잃었다.

후지모리 정권 퇴진과 민주화 이후, 구즈만과 페루공산당-빛나는 길 간부들을 2004년이 되어서야 재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첫 공판 당시 모든 간부들이 혁명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고 돌아앉는 재판 거부 투쟁을 벌이고, 당황한 페루 정부는 다음부터 언론의 출입조차 거부하고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했다. 2006년 10월 13일 최종적으로 구즈만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8년 또 한번 종신형을 선고받고 칼라오 해군기지에 감금되었다. 2021년 구즈만은 이상증세를 겪다가 해군기지 안에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화장 후 비공개된 장소에서 뿌려졌다.

2. 구즈만과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의 의의

우리는 구즈만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빛나는 길의 행적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오주의, 정확히는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정립을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중소분열 이후, 소련의 이론적, 실제적 후퇴를 극복하고, 이를 넘어설 새로운 혁명과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대논쟁과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이러한 이론들의 종합이 시도되었고, 중국을 벗어나 각지에서 대안 공산당의 결성과 투쟁의 생성으로 이어졌다(주요한 지역과 인물로는 인도의 차루 마줌다르, 필리핀의 호세 마리아 시손 등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과학의 발전을 하나로 묶어내는 이론의 정식화를 처음 이루어 낸 곳은 페루 공산당-빛나는 길이었다. 1988년 [맑스-레닌-마오주의 만세!]라는 문건을 발간한 페루공산당은 해당 문건을 통해 단순히 맑스레닌주의 이론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던 마오쩌둥을 맑스, 레닌을 잇는 세번째 공산주의 사상가로 재평가했다. 특히 마오가 새로 제시한 인민전쟁론과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현대시대의 혁명과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또한 페루 공산당의 게릴라 활동은 소련과 중국, 동구권 이후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가장 몰아붙이고 위협했던 활동이었다. 더욱 더 첨예해지고 정교해지는 자본의 압박을 넘어서, 한때 페루 국토의 절반을 통제하고 수도를 위협하는 대안 세력으로 성장했던 모습에서 그들이 이론을 단순히 외는 것이 아닌 페루의 실정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했고 이것이 성공적이었다. 특히나 소련의 수정주의화 이후 각국의 공산당들이 혁명을 포기하고 대기론으로 접어들며 지하활동을 포기할 때, 자체적으로 이중권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무장투쟁을 진행한 것은 현시대의 혁명가들이 배워야 할 혁명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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