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혁명가들 2. 차루 마줌다르
편집부 profile image 편집부

금지된 혁명가들 2. 차루 마줌다르

목차
1. 차루 마줌다르의 생애
2. 인도 인민전쟁과 차루 마줌다르의 의의

*지난번에 업로드한 '금지된 혁명가들(1) 곤잘로 편'에서 우리는 곤잘로 의장이 이끈 페루공산당을 페루공산당-빛나는 길이라는 명칭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자료 조사와 내부 토의를 거쳐서 우리는 '빛나는 길'이라는 명칭이 페루공산당을 일반적 정치조직이 아닌 컬트집단으로 낙인 찍기 위해서 페루정부와 우익 언론이 일방적으로 붙인 명칭임을 확인했으며, 이를 정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추가적인 내용은 해당 링크의 19번 질문으로 가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eb.archive.org/web/20080225114240/http://www.blythe.org/peru-pcp/pcp_faq.htm#faq19

1. 차루 마줌다르의 생애

인도 혁명가 차루 마줌다르의 사진

차루 마줌다르는 1918년 5월 서벵골 지역 실리구리에서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에서 인도 국민의회 다르질링 지구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고 전해진다.

마줌다르는 1930년 인도 민족주의 청년단체인 전벵골 학생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한편,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937년 당시 같은 영국령 인도 소속이었던 파프나 지역(오늘날에는 방글라데시 소속이다)에 있는 에드워드 칼리지에 진학한다. 그러나 1년만인 1938년 인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서 대학을 자퇴하고 실리구리로 돌아와 진보사회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40년 고향 실리구리의 이웃한 지역인 잘파이구리에서 인도공산당 지부가 결성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줌다르는 잘파이구리로 넘어가 인도공산당에 가입하고, 인도공산당에서 주력하던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식민지 당국의 감시를 받게된 그는 이후 셀 수 없이 하게 될 지하생활을 하게 된다.

1942년이 되면서 인도공산당은 식민지 당국에 의해 금지되버린다. 마줌다르는 신경쓰지 않고 농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인도 공산당 잘파이구리 지구 위원회 위원으로 뽑히기도 한다. 위원으로서는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농민들의 생존을 위해 작물압수 운동을 이끌고, 46년에는 기존의 생산량의 절반을 가져가던 소작료 비율을 3분의 1로 줄이기 위한 농민항쟁인 테브하가 운동을 이끌었다. 이 때의 경험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항쟁 이후로는 차 밭에서 일하면서 농민들과 교류를 이어나간다.

인도가 영국 식민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 자와할랄 네루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탄생하지만 인도공산당은 투쟁을 이어간다. 48년에는 인도 정부가 다시한번 인도 정부가 인도공산당을 금지해버리고, 마줌다르는 곧 체포되어 3년동안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석방 후 52년에는 동료 혁명가와 결혼하고, 잘파이구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마줌다르는 부인과 함께 고향인 실라구리로 다시 돌아간다.

한편 인도공산당은 자와할랄 네루 정권을 어떻게 분석하고 대할지를 두고 분열하게 된다. 당시 소련은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네루 정권을 지원했지만, 네루 정권은 우익적인 민족주의 정권이었다. 이런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인도공산당 우파는 소련의 노선을 네루 정권과의 연정이나 협동을 주장한 반면, 좌파들은 인도 정부와 소련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중국 공산당의 대중 노선등을 수용했다. 분열이 지속되자 인도공산당 좌파들은 1964년 인도공산당(맑스주의)-cpi(m)-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독립했다. 마줌다르는 인도공산당(맑스주의)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곧 인도공산당(맑스주의) 중앙에서도 일부 정당들을 제외한 선거연합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가 되었고, 인도 국민회의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자 다시 당 내부에서 내홍이 생겼고, 마줌다르와 당 내 좌파들은 이에 반발하여 서벵골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저항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967년 처음 일어난 낙살라이트 봉기이다. 차루 마줌다르가 작성했던 역사적 8대 문서(마줌다르가 쓴 문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8가지 문서를 이르는 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낙살라이트 봉기 과정에서 마줌다르와 인도공산당(맑스주의) 좌파들은 독자적으로 정당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cpi(ml)-이다.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는 여러 정당들로 나뉘어지다가 오늘날에는 인도공산당(마오주의)-cpi(maoist)-로 이어지고 있다.

낙살라이트 봉기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마줌다르는 1972년 7월 16일 인도 정부에 의해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검거되다. 곧바로 구금된 마줌다르는 동년 7월 28일에 급사하게 되는데, 당시 인도 정부는 급작스런 심정지로 인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그를 본 여러 동료들은 인도 경찰들이 필수적으로 복용해야하는 약 조차 주지않고 폭행을 일삼다 그를 죽여버린것이라고 증언한다.

2. 인도 인민전쟁과 차루 마줌다르의 의의

인도의 인민전쟁은 서벵골과 차타스가르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차루 마줌다르와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의 주도로 시작된 인도의 인민전쟁은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으며 진행되고 있다. 비록 1967년과 2025년을 비교하자면 그 규모는 줄어들었고, 이제는 존립의 위기에 서있지만, 인도의 인민전쟁과 차루 마줌다르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차루 마줌다르와 인도 인민전쟁은 인도사회의 가장 극심한 분열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당시 인도의 사회는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임을 역사적 8대 문서를 통해 쉽게 제시하고, 인도 사회에서 가장 극심한 모순에 쳐해있는 농민계급을 통해 혁명을 이끌어 내야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에서 적용되어 소작제에서 신음하던 농민들을 지도해 무장봉기로 이끌어 낸 것은 중요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가장 차별받는 중부지역 원주민, 농민, 불가촉 천민들에게 전망을 제시하고 진보적인 운동에 이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두번째로는 의회 선거에 매몰되어서 원칙을 저버리는 수정주의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전쟁 이후 많은 진보적인 정당들이 의회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합법적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고, 인도의 진보정당들도 동일한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에서 선거는 결과적으로 민중들의 의도를 왜곡하고 진보적 경향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목표를 이룰수는 없다. 마줌다르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합법투쟁에만 머무르려는 기존 정당들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는 국제적으로 소련의 수정주의적 행보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각국의 공산당들에 대한 비판이 있다. 흐루쇼프의 집권 이래로 소련은 평화적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타국의 진보적 운동이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원을 줄이거나 선택적으로 지원하는 행보를 보였고, 각 국의 공산당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차루 마줌다르는 격렬히 비판하였고, 중국의 마오쩌둥 사상을 단순히 소련 맑스주의의 연장선이 아닌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편집부 profile image 편집부
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