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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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4)

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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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몰수

국가권력을 두고 벌어진 싸움(1956-57)에서 흐루쇼프 집단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소련에서는 전례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새롭게 발생한 부르주아 세력을 대표하는 지배집단이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적 생산관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소련 사회의 상부구조는 적어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부르주아 세력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반시설이나 토대의 중심지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소련 사회의 기초적 소유관계에 관한 한, 흐루쇼프 세력의 국가장악은 이미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의 몰수와, 소련 역사에 있어서 사회주의 시대의 종언을 이루어낸다. 주요 생산수단은 국유재산으로 남아있었지만, 국가 자체가 더 이상 노동계급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세력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빼앗아왔다.

흐루쇼프 집단은 레닌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공산당이 끊임없이 극복하고 제거하고자 했던, 노동계급과 생산수단 사이의 거대한 분리를 다시 불러왔다. 사회주의 시기에 성취한, 노동계급과 [생산]도구 사이의 거대한 화해와 통일은 다시 한번 파괴되었다.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는 소련 부르주아지의 “원시적 축적”이었는데, 칼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자본주의체제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가 소유하던 노동조건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른바 시초축적은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자본론> 1권 [하], 979쪽)    

맑스가 논했던, 봉건제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토대로부터 벗어나는 러시아의 새로운(또는 “두 번째의”) 자본주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과정이었다. 부르주아화된 소련군 지도부가 [권력]장악에서 수행했던 역할이 시사하듯 (11장을 참고하라), “시초축적의 방법들은 사실상 전혀 목가적인 것이 아니”었고, 맑스는 이를 정확히 지적했다. 폭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자본론>1권 [하], 978쪽)

요컨대 소련은 1956-57년에 이미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몰수를 행함으로써, 완전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국가이기를 그만두었다. 같은 차원에서 소련은 1917년의 탄생 직후, 토지와 은행, 주요 산업을 지배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공식적으로 몰수함으로써 완전한 자본주의이기를 멈추었다.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차지했다. 

(1917년의 몰수가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도전적으로 선포된 반면, 40년 후의 반전은 너무나 은밀하게 이루어져 수년이 지나 결과가 표면화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전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규명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연히 문제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달리, 부르주아지는 역사적으로–다시 맑스를 보라–거대한 강도질을 다양한 외피로 감추어왔는데, 이는 봉건세력으로부터 몰수할 때도 그러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몰수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은 1917년의 경우와 1950년대 중반에 일어난 그 반대의 경우에서 모두, 경제적 토대에서 작동하는 실제 생산관계에 그 자체로 어떠한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이 연재물의 2, 3, 4장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1917년 소련의 경제적 토대는 대개 자본주의적, 소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남아있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은 경제적 토대를 변혁하고 사회주의적 경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우여곡절로 가득찬 기나긴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자본주의적 원칙이 만연한 경제생활의 핵심 영역을 고립·제한시키며, 공격하고 파괴해야 했으며, 그 자리에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흐루쇼프 집단에게는 반대의 문제가 있었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얻었다. 그러나 기반시설에서의 실제의 생산관계를 변화시키는 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주요 요새들을 고립·파괴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대체하는 일은 여전히 앞에 놓여있었다.

중앙계획부서들을 폐지하고 집단농장에 기계-트랙터사업소(MTS)를 매각하는 등, 흐루쇼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경제 영역에 가한 주요한 타격을 앞서 다루었다.(8, 11, 12장) 이제 이에 관한 몇 가지 세부사항들이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제시될 것이다.

당시 몇몇 저자들이 논했듯,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산업 부서들의 폐지는 부분적으로 소위 ‘반당집단’과의 파벌싸움에서의 즉각적 필요성이 동기가 된, 순수히 전략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지도부의 주요한 적수들이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그리고 그 이하의 인물들. 또한 1956년 6월 외무장관직을 사임한 이후의 몰로토프) 그러한 부서들에서 강력한 위치에 있거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들을 폐지함으로써 흐루쇼프는 핵심 권력기반을 반대파들로부터 빼앗아올 수 있었다. (피스트락, <흐루쇼프, 위대한 책략가>, 뉴욕, 1959, 247쪽; 크랜쇼, <흐루쇼프–이력>, 246쪽을 보라)

이러한 단기적인 전술적 동기는 왜 흐루쇼프 본인이 1962년과 1963년에, 그리고 심지어 1965년에 그의 후임자가 방향을 전환하여 중앙 산업 부서들을 어느 정도 다시 세울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앞으로 보여주겠지만, 다시 세워진 부서들은 기존과 다른 인원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한 일종의 ‘계획’은 사회주의와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논할 것이다. 한편, 중앙집권화된 사회주의적 계획부서들에 가한 흐루쇼프의 타격은–그 부서들의 기능은 105개의 지역간경제협의회(Sovnarkhozy)에 인계되었다–상품-화폐의 교환관계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부활시키고 확장시키는 효과를 즉시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의 한 부르주아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기록했다. “모스크바의 부서는 편협한 관료적 형식주의(departmentalism)로 왜곡된 시야를 가질 수 있었어도, 최소한 국가적 규모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옴스크의 ‘소브나르호즈’ 의장은 옴스크 지방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최선의 의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선택을 해야 할때  국가적 이득을 올바르게 고려할 수 없다.” (알렉 노브, <경제적 합리성과 소련 정치>, 뉴욕, 1964, 59쪽) 따라서 이 부서들을 폐지한 즉각적 결과는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각 소규모 지역마다 협소한 지역주의라는 강력한 요소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100개의 조각으로 쪼개질 수 있었지만, 원료 제조공정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발전된 대규모 공업은 전국 각지에서 원자재를 얻고, 다시 전국 각지로 생산물을 보낸다. 새로운 시스템 하에서 필수적인 원재료와 비축량을 확보하고 생산품을 가까운 계획지역 외부으로 분배하는데 있어 소련의 지역 계획자들 그리고 기업 관리자들은 더더욱, 엄청난 골칫거리에 시달리게 되었다.  조정과 예측을 담당하는 중앙기관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언론에 실린 수많은 불만들이 증명하듯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노브, 104쪽) 그들은 자신의 ‘진취성’과 ‘독창성’에 의존하도록 강요받았다.

따라서 또 다른 저자가 “기업간 관계의 비공식적 네트워크”라고 묘사한 것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서 ‘블라트’(blat, 개인적 영향)과 ‘톨카치’(tolkachi, 브로커, ‘해결사’)가 이전의 중앙 계획이 제공했던 전국적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원자재가 필요한 기업 관리자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다른 지역의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어디에서 원자재를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브로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이 모든 거래 시스템은 ‘장부 밖’에서 비공식적으로, 다양한 위장 아래에서 일대일 협상을 통해 작동되었다. "‘톨카치’의 진정한 군대는 (...) 경영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인 물자확보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전문 중개인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자유시장’의 어디에서 어떤 종류의 장비와 원료를 얻을 수 있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사업으로 만들었다. (M. Miller, Rise of the Russian Consumer, London 1965, p. 33)

아직은 실질적으로 자유시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용부호가 붙었다. 이는 불법 시장이었고, 관리자와 전문 브로커 모두 계획 외부에서 거래를 하다 적발될 경우 기존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큰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스템 아래에서 암시장(black market)은 필수적이었고 기소당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 차라리 ‘회색’시장이라 불리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역자주–암시장은 영어로 검은시장(black market)이다.]

‘톨카치’의 모습에서 1920년대 네프맨의 환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연재물의 3장을 보라) 마찬가지로, 계획 외부에서 진행되는 관리자들의 기업간 거래는 기업들이 서로 사고팔 수 있었던 레닌의 신경제정책의 초기 단계에서 합법적이었던 관계를 되살려냈다.  (모리스 돕, <소련의 경제발전>, 뉴욕, 1966, 131-148쪽을 보라)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로의 제한된 후퇴의 일환으로서 초기 네프에서 일시적으로 합법적이었던 것은 불법화되었고 1920년대가 끝나면서 소멸되었다. 흐루쇼프 치하에서는 정반대였다. 기업 관리자의 권리와 권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계는 계획을 이행하지 않은 관리자들에게 형사 고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 사보타주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라닉(Granick)은 새로운 규정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덜 엄격"해졌다고 적었다. 소련 경영진들의 학생이었던 흐루쇼프는 "소련 경영진들에게 내재되었던 트라우마를 제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붉은 경영진>, 43쪽, 136쪽) 흐루쇼프는 생산을 조직하는데 있어 더 큰 책임을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대신, 기업 관리자들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그들이 행한 수많은 불법적 관행들을 합법화하였다. 1961년 제22차 소련공산당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한 보고는 1980년까지 소련이 공산주의로 나아갈 것을 계획한 문서였는데, "관리자 권한의 점진적 확대"를 당 강령에 의심의 여지 없이 포함하고 있었다. (문서들, 11권, 뉴욕, 1961, 98쪽) 

이 무렵에도 소련의 많은 지역에서 관리자들이 불법해고를 했다고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소송이 빗발쳤다. (컨퀘스트, 산업노동자들, 20쪽) 당시 대다수는 복직되었다. 관리자들이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다. 나중에 흐루쇼프 이후의 관리자들은 마음대로 해고할 권한을 사실상 얻게 되었고 이들의 사적인 거래는 앞으로 보여지겠지만, 합법화되었다.

이와 같이 산업조직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흐루쇼프 '개혁들'은 뚜렷한 전체적인 패턴을 보여주었다. 상품-화폐 교환관계가 경제행위를 좌우하는 지역을 점차 넓혀간다. 이는 자본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지가 된다. 처음에는 그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확장은 점차 합법화되었고, 추가적인 확장에 대한 요구가 당 강령에 적히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중심지에 대한 흐루쇼프의 공격은, 공업에서보다 농업에서 더욱 직접적이고 완전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957년과 1958년 사이 흐루쇼프 치하의 소비에트 국가는 기계-트랙터사업소(MTS)를 집단농장에 매각했다. 이는 집단농장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스스로의 재산을 몰수한 것으로 흐루쇼프와 그의 후계자들이 유일하게 관여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공공연한 개입이었다. 스탈린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조치는 집단농장에게 생산의 기본적인 도구들을 소유하게 하는 "예외적인 지위 (...) 우리 나라의 다른 어떤 기업체들도 공유할 수 없는" 지위를 가져다주는 것이었지만,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들, 95쪽) 이러한 분석은 자본주의의 재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스탈린의 경고와 함께, 흐루쇼프에게 "개인숭배"와 연결된 "교조주의"로 공격받고 폐지되었다. (린든, <흐루쇼프와 소련 지도부>, 볼티모어, 1966, 61쪽).

매각과 함께 흐루쇼프는 집단농장에 적용되었던 계획목표(생산할당량)를 폐지했다. [집단]농장들은 다른 어떤 종류의 기업체들보다 더 "독자적"이었고, 도시와 연결된 상품교환관계 이외에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기계 유지비와 [집단]농장들을 장악한 이윤추구의 정신으로 인해, 국가가 집단농장에 지불하는 통제가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생산라인에서 인상되어야 했다. 1962년에는 새로운 제도의 직접적인 결과로, 육류와 유제품의 소비자 가격이 각각 30%와 20% 인상되었다. (밀러, 앞의 책, 235쪽.)

매각이 몰고온 정치적인 영향도 상당했다. MTS는 집단농장의 기계적 중추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트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국가정책을 실행하는 그들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집단농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각 MTS 노동자들 사이에는 집단농장의 지도부에 참여하고 그들을 프롤레타리아트적인 방향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당 지부가 있었다. 사업소의 매각과 함께, 이러한 역할은 붕괴되었고 집단농장에 있었던 수많은 당의 세포조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노브, 앞의 책, 65쪽.)

그러나 이 모든, 그리고 다른 흐루쇼프주의적 조치들은 아직 자본주의의 복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 무렵에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천이 매우 얇게 늘어나서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리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주요한 가닥들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이 끊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부르주아적 공세가–4년간의 대중선동과 파괴, 숙청 등–필요했다.

14. 논쟁

만약 역사가 20세기의 엄청난 위선들, 특히 정치에서 영속화된 위선들에 관해 쓰인다면, 그 역사의 한 장은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제22차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내세운 ‘공산주의로의 발전’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소련은 특히 경제 분야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이전에 흐루쇼프가 파괴하고 부분적으로 매각해버린 옛 시스템은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대체할 것의 윤곽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어두컴컴한 과도기에 감각과 방향을 제시하듯, 흐루쇼프는 1980년까지 소련이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없는 사회가 될 것이며,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대신 ‘전인민국가’를 지지)와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트적 성격(대신 ‘전인민의 당’을 지지)의 폐지라는 흐루쇼프의 정치적 테제에 일관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공산주의가 코 앞에 와있고 계급적 구분이 거의 모두 사라졌고, 모든 이들이 프롤레타리아라면, “어떤 계급에 대한 독재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흐루쇼프가 주장했다. (제22차 소련공산당 당대회 문서, 뉴욕, 1961, 2권, 157쪽.)     

그러나 한편 정치경제적 재편의 영역에 관한 한, 흐루쇼프의 제안은 얄팍한 외견상의 일관성마저 사라졌다. 흐루쇼프의 일반적인 수사들의 수프에서 경제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이라는 고기를 조심스럽게 골라 든 사람들은 맛들이 이상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대중들의 창조적인 주도력을 이끌어내어, 그 어느 때보다 더 넓은 관점을 주어야 한다”는 수사적인 제목 아래에는 “이는 경영권의 점진적 확대와, 지방기구와 기업의 책임을 요구한다”(<문서들>, 2권, 98쪽)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이는 그야말로 사실을 호도하기 위한 말(doubletalk)로, ‘대중’은 실제로 경영자들과 관리자들을 의미하고, ‘창조적인 주도력’을 해방한다는 것은 실제로 관리자들의 억압적 권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억지쓰기는 경제적 범주들에 대한 흐루쇼프의 접근방식을 특징짓는다.

“공산주의 건설과정에서 우리의 임무는 신용과 금융 지렛대, 금융통제, 가격과 이윤을 더 잘 활용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익과 수익성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야 한다.” (같은 책, 99쪽.)

다른 말로,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는 경제행위를 규제하는 동력으로서의 수익과 수익성의 중요성을 낮추고 점진적으로 제거해나감으로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연장하고 강화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 말의 뜻을 더욱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최고의 자본주의 모델로부터 새로운 사업의 건설속도를 높이며, 개시하고 운영하는 법을 배운다면 해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유용한 외국의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자금의 회전율을 높이고 자본투자로부터 더 높은 수익을 얻는 분야를 비롯하여 서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술적이며 조직적으로 가치있는 모든 지점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96쪽, 강조는 저자)

흐루쇼프는 기술 뿐만 아니라, 최대의 속도로 최대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기업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조직의 비밀 역시 서구로부터 빌려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구절들은 확실히 많은 ‘공산주의적’인 확신과 약속의 층들로 감싸져 있어, 부주의한 독자들은 그 중요성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흐루쇼프의 계획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껍데기일 뿐이었고, 이는 당대회 직후에 시작되어 흐루쇼프가 축출되기 직전인 1964년 초까지 지속된 거대한 “경제 논쟁”의 과정에서 명료해졌다.

‘논쟁’은 본질적으로–적어도 보이는 부분에서–경제지와 프라우다(당 기관지)의 지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소련 사회 내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 세력 내의 두가지 주요한 진영 사이에서 행해진 파벌 다툼이었다. 아주 폭넓게 말하자면, 한 쪽은 기업 임원들과 관리자들의 권력에 대항하여 경제 계획 관료체제 또는 그것의 잔존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였고, 다른 한 쪽은 경제 계획구조의 잔재를 놓고 기업의 패권을 다투었다.

어느 쪽도 ‘대항계획’의 부활이나 계획과정에 대한 대중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것–또는 당이 통제하는 수정주의적 언론의 지면에 나올 수 있게 허가하도록 하거나–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항계획에 관해서는 이 연재물의 6장을 보라.) 맑스-레닌주의 관점이 때때로 논쟁에 개입되는 한, 그들은 ‘계획자들’의 편에 섰지만, 이 계획 기구는 노동계급의 활동는 너무나도 멀어졌기 때문에 그것에 해당하는 생산의 시점과 논쟁의 시점에는 이미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계획’의 신봉자들은 NVP라고 알려진, 투하노동량 책정과정(Normative Value of Processing)에 대한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는 기업의 회계를 유지하고 계획하에서 그들의 성과를 평가하는 약간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오래된 기구의 사소한 개조였다. 그리고 이는 관리자들이 원자재나 비축품의 사용에 있어 좀 더 경제적이도록 강제했다고 말해진다. 이 새로운 주름이 기존의 계획 양식을 근본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NVP주의자들은 토론에서 ‘보수파’로 불렸다.

다른 한편,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로 불렀던 이들은 경제학자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가장 잘 알려진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의 경영학 연구소의 예브세이 리베르만 교수였다. 그들 사이에서 많은 이견이 있었고, 토론의 바람이 불면서 강조점을 자주 옮겨갔지만 그들의 경우, 요점은 이윤의 역할과 계획으로부터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윤과 관련하여, ‘자유주의’ 학파는 흐루쇼프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주의와 기업 운용에 있어서의 이윤 극대화의 강화된 역할 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모순도 부정했다. 결국, 리베르만은 사회 전체가 '이윤'을--그리고 소비를 넘어선 생산과잉을--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사회에게 좋은 것은 모든 기업에게 좋다'고 주장했다.(E. 잘레스키, 소비에트 연방의  계획 개혁, 채플 힐, 79쪽)

이윤의 역할이 논쟁의 핵심이었지만, 리베르만과 그의 동조자들은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님을 강조했다. 리베르만은 “우리는 사람들이 표준처리비용[NVP]과, 예를 들면 이윤 중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를 논쟁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베르만이 강조한대로 그들이 제의한 것은 단순히 “지수(index)의 수정이 아니라 (...) 국가경제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개혁”이었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그가 말한대로 “전체 관계 체계”였다. (Felker, Soviet Economic Controversies, Cambridge, 1966, p. 87)

리베르만 학파의 제안이–양 진영이 모두 동의한 것처럼–노동자들에 대한 권력 뿐만 아니라 계획자들과 관련된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했던 기업 이사진과 관리자들의 견해에 공명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유주의’ 신봉자들이 다양하게[ 암시하거나 글로 쓴 것은 기업 경영이 최대 이윤을 위해 위로부터 부과되는 제한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어디서 물자를 구매하고 생산품을 어디에 판매할지, 그리고 어떤 가격에 판매할지를 정하도록 허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의 1957~1958년 ‘개혁’이후 그들은 상당부분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불법의 그늘 아래에 놓여있었다. (이 연재물의 12장을 보라) “기업과 국가경제 사이의 새로운 관계”라는 표어는 그것을 합법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근본적으로, 이 관리자들과 임원들은 스스로를 고전적 자본주의 사업가로 세우고 싶어했다. 애덤 스미스로부터 궤변론을 빌려온 리베르만은–“사회에 좋은 것은 모든 기업에 좋다”는 말은 거의 말 그대로 애덤 스미스에 가깝다–그들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여러 설명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은 논쟁의 첫 2년간 언론에서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낡은 기구(machinery)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NVP 신봉자들은 습관과 익숙함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새로운 주름, NVP 지수 자체는 타타르, 도네츠크,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실험되었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되었다. 대조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한 것은 순수하고 검증되지 않은 이론적 추측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이론 자체도 많은 이들에게 수상쩍게 느껴졌는데, 이윤에 대한 강조에서 자본주의의 냄새가 났고, 분명히 계획의 중요성을 격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64년이 시작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고, 점차 침묵하게 되었다. 승리의 분위기가 NPV 신봉자들의 선언에 슬금슬금 다가왔다. 1964년 초 흐루쇼프는 직접 개입하여 이윤에 찬성하는 강한 공식성명을 발표했고, 이는 당지도부의 무게를 리베르만 학파에 싣는 것이었다. 

여름에 NPV주의자들에 대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프라우다에 실린 여러 기사에서 학자 L. 레온티예프(그보다 이전 인물인 맑스-레닌주의자 A. 레온티예프와 혼동하지 말라)가 이끄는 저명한 흐루쇼프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학파의 ‘반이윤’을 비난했다.

레온티예프는 “이윤이 기업활동을 판단할 때의 기본 지표로 쓰여야하는지를 판단하는데 있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스탈린시대에 생겨난 불변의 경제건설 법칙에 대한 검토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한다. 이 불변의 법칙은 그것이 운영되는 시스템과 무관하게 보편적이다. 경제는 생산에서 확대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무시되었던 이 원칙은 오늘날 소련에서 이윤을 수용하는 토대를 이론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Quoted in Felker, pp. 77-78)

이 숨막히는 뻔뻔함과–마치 스탈린 지도하의 소련에서는 어떠한 경제성장도 없었다는 것처럼!–형이상학(“불변의 법칙”)은 NPV 옹호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계속된다면 소위 ‘반당파’의 길을 잊게 될 것이라는 경고신호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득의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소비자 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경공업 기업체들에서 그들의 아이디어 중 일부를 시험해볼 수 있도록 허가받았고(볼셰비치카-마야크 시험), 반대파들의 실험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신이 뿌린 것의 열매를 볼 만큼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을 필두로 한 그의 동료들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계획, 당을 농업지역과 공업지역으로 분리하는 등 전술의 실행불가능성, 유고슬라비아, 쿠바, 중국, 알바니아와의 외교에 있어 어리석은 실수들, 그리고 상당부분 그의 저속한 방식–UN 연단에 신발을 내리친 것이 유명하다–에 기인한 수확의 실패는 흐루쇼프를 그가 대표하는 계급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수 있는 위협을 지닌 경멸과 조롱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후임자들은 ‘주관주의’와 ‘지나치게 빠르게 나아가는 것’을 비판했고, 소련 국내외 정책에 있어 내용과 형식에서 많은 사소한 조정을 거쳤다. 그러나 그들은 11월 초에 경제개편은 계속될 것이며 동일한 기본노선을 통해 확산될 것이라고 재빨리 발표했다. (Linden, Khrushchev and the Soviet Leadership, Baltimore 1966, p. 225) 연말에 그들은 볼셰비치카-마야크 실험의 범위를 확장시켰고, 처음으로 중공업에도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펠커, 51쪽)

그 후 상황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제도의 합리성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시작”할 때임을 선언했다. 6월에는 소련 각지에서 온 경제학자, 기업 임원, 계획자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대책을 마련’하는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프라우다의 보고에 따르면, 회의에서 합의된 것은 “위로부터의 상세한 계획을 축소하고 기업에 할당된 지수의 양을 감축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운영상의 독립성과 기업 측의 건강한 경제적 이니셔티브 개발을 위한 조건을 제공”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ㄷ

또한 “기업운영을 평가하는 이윤의 역할이 일련의 지표들 사이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로 올라갈 수 있고 이윤 자체가 기업의 자금을 형성하기 위한 주요한 원천을 제공해야” 할 때가 왔다. 또한 ‘시장 문제’라고 불리우는 것과 맞붙을 때가 왔다는 합의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 프라우다는 “소비재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에도 존재한다.이 영역에서는 작업의 끝이란 없다” (Quoted in Felker, pp. 91-92) 

1965년 9월 말 중앙위원회는 다시 한번 회의를 가졌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코시긴 총리는 긴 연설을 통해 일련의 경제’개혁’을 발표했는데, 이에 관하여 한 저자는 “1928년 네프를 종식시킨” “스탈린의 개혁 이래 경제 영역에서 확실히 가장 두드러지는 [조치]”라고 올바르게 일컬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명백하게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기업체를 계획에 종속시키는 대신, 그들은 사실상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히) 계획을 기업에 종속시켰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시장을 제거하는 대신, 그것을 합법화하고 강화하였다. 부당이득을 제거하는 대신, 그들은 원칙으로 상승시켰다. 즉,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대신, 코시긴 개혁은 자본주의를 복원시켰다.

15. 둔화

1965년 소련 당 지도부가 경제를 재편하는 속도는 주로 산업 생산량의 우려스러울 정도의 둔화에 의해 좌우되었다.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그해 11월 당의 제안을 발표하면서 신중하게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는 막 끝난 7개년 계획기간 동안의 생산량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를 나열했다. 

그러나 한 줄기 햇살에도 구름은 존재한다며, 그는 이것이 그를 제안에 적절한 주제로 이끌었다고 첨언했다.

“최근 몇 년간 고정자산 1루블당 국민소득과 산업생산량이 다소 감소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효율성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공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의 증가율이 최근 몇년간 다소 둔화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모호한 암시 이상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경기 둔화의 가능성있는 원인을 더 깊게 조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꽤 상세한 통계는 5년 후에 마침내 공개되었다, 그리고 코시긴의 제안을 살펴보기 전에 소련 지도부가 스스로 찾아낸 곤경에 대해 명확히 알기 위해 이 자료는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소위 ‘투자효율성’의 문제에 있어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는 학자 티그란 하차투로프(Tigran Khachaturov)였다. 하차투로프에 따르면 “국가경제 전체에서 투자효율성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지표”는 고정자산과 유통자산(circulating asset)의 합과 국민소득 사이의 비율이었다. 이 비율은 자산 1루블당 수익을 코페이카로 나타냄으로서 표현된다. (100코페이카=1루블) 자산 1루블당 실현되는 소득의 코페이카의 양이 늘어난다면, 경제의 ‘효율성’이 증대되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하차투로프의 관점에서, 그 반대 역시 사실이다. 따라서 단일 비율로 “계획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수립되고 가용자원이 얼마나 완전히 활용되는가”를 추정할 수 있었다. 

하차투로프는 이 일반적인 지수에서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추세를 보여준다. 

1959:

1960:

1961:

 

62.6

61.6

60.5

 

1962:

1963:

1964:

1965:

58.2

55.0

54.7

53.2

(T. Khachaturov, "The Economic Reform and Efficiency of Investments," in Soviet Economic Reform: Progress and Problems, Moscow 1972, p. 159)

따라서 ‘경제효율성’의 전반적인 지표는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되었고, 시작점에서 거의 루블당 10코페이카가 줄어든  상태로 [7개년 계획]기간을 마쳤다. 하차투로프가 말했던 것처럼 “7개년 계획(1959-1965) 기간동안 이루어진 지표의 감소는 소련 경제에 좋지 않은 현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상은 더 정확히 어떤 것이었을까? 직전에 인용한 논문에서 하차투로프는 “계획과 관리의 단점에 의존했다는 주체적 이유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지역경제위원회(13장을 보라)를 통해 이루어지는 흐루쇼프의 계획 시스템에 대한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언급인데, 이는 1965년 개혁 하에서 오류로 폐기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드는 이후의 논문에서 하차투로프는 어떠한 대체물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러한 설명을 암묵적으로 철회한다. 여기서 그는 산업근로자 1인당 자본금 증가율과 산업근로자 1인당 생산량증가율을 비교한다.


Increase

1950-1955

Increase

1955-1960

Increase

1960-1965

Capital per

worker


50%


44%


43%

Output per

worker


49%


37%


26%

Difference

-1%

-7%

-17%

(T. Khachaturov, "Improving the Methods of Determining the Effectiveness of Capital Investments," Voprosy Ekonomiki 1973, No. 3; translated in Problems of Economics, September 1973, p. 21.) 

표의 맨 윗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근로자당 자본금의 증가율은 둔화되었다. 계획과 생산조정에서의 결점이 이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적 계획에 내재한 지역주의에 의해 방해받았기 때문에, 경영진은 이전 시기에서의 엄청난 속도로 추가적인 생산수단과 원료를 공장에 투입할 수 없었다. 왜 근로자당 생산(표의 두번째 줄) 역시 감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동일한 추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후자가 전자에 비해 더욱 가파르게 감속했는지를 설명하는데에는 난점이 생겨난다.

1950-1955년 기간동안, 근로자 1인당 자본이 50% 증가하면 근로자 1인당 생산량은 실질적으로  동등하게(49%) 증가했다. 이는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기계를 주고, 그에 상응하게 더 많은 생산물을 얻는다. 그러나 그 다음 5년 동안 근로자 1인당 생산량은 근로자 1인당 자본에 비해 7% 적게 증가했다. 그리고 1960~65년 동안 코시긴 ‘개혁’ 계획에 이르기까지의 몇년동안 자본 성장과 생산 증가 사이의 격차는 다소 놀라운 17%로 벌어졌다.  

점점 더 많은 생산수단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지고 있었지만, 그에 비례하여 점점 더 적게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차투로프는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자료를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기계가 이전의 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라는 반박가능한 가설과 별개로, 이 자료는 소련 노동계급이 더 이상 생산성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곧바로 가리킨다. 

흐루쇼프가 전국적으로 산업 일자리의 근무시간을 조정할 것을 명하여, 기계작업자에게 훨씬 더 높은 생산목표를 설정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건설기에 눈부신 영웅적 결과를 보여준 만큼의 에너지와 열정을 그들의 노동에 쏟지 않았다. (6장을 참고하라) (흐루쇼프의 시간조정과 관련해서는 Mary McAuley, Labour Disputes in Soviet Russia 1957-65, Oxford. 1969, p. 89를 참고하라)

산업노동자들은 더 많이, 더 낫게,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대신, 생산투쟁에서의 전략을 수동적 저항으로 바꾸어버렸다.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생산수단의 생산능력은 계속하여 증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능력을 발전시키는데 에너지와 창조력을 적용하는 대신에, 그것을 좌절시키는데 사용했다.

흐루쇼프 시대의 통계들에서 드러나는 노동에 대한 이러한 새롭고 부정적인 태도는 주로 이 연재물의 13장의 도입부에서 다루었던, 1956~57년 수정주의자들의 국가권력 탈취에 따른 노동계급에 대한 몰수에서 비롯되었다.

  • 스탈린 치하에서, 공산당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 공장 관리자들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무기였다. (8장을 참고하라)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당이 계급적 입장을 바꾸고, 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관리자들을 강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당은 피할 수 있었을까?(13장, 14장 참고)

  •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고, 작업의 속도, 조직, 환경과 관련한 규정을 위반한 관리자들이 흐루쇼프 정권 하에서 거의 처벌받거나, 직위해제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McAuley, 83쪽)

  • 노동자들은 그러한 관리자들이 공장 내 노동조합의 조합원일 뿐만 아니라, 종종 간부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할 수 있었을까? (McAuley, 67쪽)

많은 수의 노동자들에게 인식될 수 있었던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권력이동은 새로운 재산관계의 본질을 전달하는데, 그리고 그에 따라 맑스가 한 세기 전에 묘사했던 것과 같은 생산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자라나는데 충분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수단을 자기와는 독립해 존재하는 타인의 소유로 상대하며, 이리하여 노동수단 사용상의 절약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김수행 <자본> 1 상, 442쪽)

소련 노동자들의 감속에 대한 아주 놀라운 사실이자, 1965년 당 지도부의 관점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우려스러웠던 지점은 노동자들이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소련 사회의 기이한 과도기적 상황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몰수당했다. 그들은 더 이상 국가권력을 쥐고 있거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생산의 지점에서 속도를 늦춤으로써 저항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국가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과거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에 손이 묶여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생산속도를 높이도록 만들, 가득 차있는 무기고를 손에 쥐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기들 중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앞서 언급한 것(8장)과 같이 “경제적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 힘은 노동력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고 팔리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는 반대로 말하면, 노동력이 상품의 성격을 지니는 곳이라면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된다. 

이 권리에 필요한 짝꿍이자 동반자는 생산수단을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판매(또는 구매)할 수 있는 소유자의 권리로, 예를 들면 수익이 적은 부문을 폐쇄하거나 다른 유형의 생산을 위해 한 유형의 생산을 중단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잠시 생각해보면, 이 두 힘이 서로 분리되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쪽의 작용은 다른 쪽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5장의 결론부에서 지적했듯이,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자본가로 전환되는 것이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 두 힘의 행사이다. (가디언 3월 19일자 참고)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소련 노동자들은 그들이 했던 것처럼 감속을 오래, 효과적으로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투자와 생산성 사이의 격차가 흐루쇼프 시절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투자는 중단되었을 것이고, 해고의 소용돌이는 공장에 남아있는 이들이 더 많은 노력을 하도록 ‘자극’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자극’ 효과는 현재와 같은, 경제 위기의 발전된 단계들에서 발견된다. 실업자들의 줄이 공장 밖의 지평선을 향해 뻗어가면서, 가속과 고된 노동, 모욕의 체제는 가장 잔인한 극단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투자 효율성”이 생겨나고, 노동자 1인당 자본과 노동자 1인당 생산량 사이의 긴밀한 관계와 짧은 지연이 생겨나는데, 이는 학자 하차투로프와 흐루쇼프가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기본적이고 지배적인 생산관계에 있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후퇴에 매우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 가정하는 것은 오류다. 부르주아지의 국가권력 탈취와, 이에 따른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몰수는 필연적으로 생산 증가에 대한 저항 운동을 발생시킨다. 이 운동의 발전은 오히려 몰수자들을 지탱할 수 없는 경제적 위치와 일반적인 과소생산공황으로 빠르게 내몰게 되는데, 이는 은폐되었다한들 명확하게 나타난다.

파업, 반란, 폭동과 같은 더 적극적인 형태의 저항은 총으로 진압되고 처리될 수 있다. 그중 몇 가지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총검은 매일의 산업생산을 촉구하는데 있어서는 효율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한 것으로 악명높다. 부르주아지는 공개적인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모든 공장의 노동자 세명당 한 명의 병사를 뒤에 배치할 수 없다. 생산에 있어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는 다른 방식의 무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내재되어있는 무기들이다. 부르주아지들은 그것들을 적용하는데 꾸물거릴 수 없다. 생산수단과 생산력을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그것에 따른 결과들에 아무리 주저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이겨내고 자본주의 질서를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산업에서 경영과 계획, 자극의 존재하는 형태는 이제 더이상 현대의 기술-경제적 조건과 생산력의 현재적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1965년 9월의 “개혁”제안을 골자로 하는 알렉세이 코시긴의 선언의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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