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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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생산수단 (II)
소련의 학자 A. 루먄체프에 따르면, “개혁의 본질은 국민경제 발전의 가장 보편적인 지표들을 기획하고, 기업소들의 독자성을 확대하며, 생산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비용계산을 개선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물질적 자극을 제공하는 중앙계획에 있다.” (≪현대 소비에트 경제 관리의 근본 원칙들≫, 소련의 경제개혁, 16쪽) 이는 달리 말해, 경제의 개별 단위가 최대한의 이윤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동안, 중앙의 계획기구 당국자들에게 경제 전반의 균형 유지에 대한 임무를 부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1965년에 새로 채택된 기업소법은 이전에 거론됐듯이 상급 단위에 의한 계획의 목표치 변경에 대항하여 소련의 기업소 관리자들(콤비나트 및 “생산협동조합”의 관리자들도 포함)에게 명시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업소에 할당된 계획의 목표량이 상급단위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예외적인 사안들에 한해서이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는 기업소 책임자가 생산단위의 계획을 작성할 때 “계획”의 시작뿐만 아니라 끝도 기업소의 재량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 설성 중앙의 계획 당국자들이 “사회 전반의 이익”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단지 예외적인 경우들에 한하여, 어려움을 딛고서 기업소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계획과 대척점에 마주했던 이해관계를 내세울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개별 기업소들에 의해 창안되어 고스플란(중앙계획기구)에 제출된 1966~70년의 계획이 생산단위, 혹은 상위의 정부 “기관들”에조차 수정된 계획안의 형태로 재차 반환되지 않은 이유를 여실히 설명해준다.
소련의 문헌들에서 이는 비록 노동자 스스로에 의한 계획으로 등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계획”으로 정의된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되고,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모든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생산협동조합”의 지배인들과 추후에 살펴보게 될 신규 “부서들”―이윤 극대화의 원칙에 입각하여 경영되는 부서들을 지칭한다.―의 총책임자들에게서 보듯, 기업소 경영자들에게 “계획”은 중앙계획 “밑에” 있는 자신들만의 계획을 의미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가 샤를 베틀렘(Charles Bettelheim)이 옳바르게 관찰했듯이, 이러한 체계 하에서 중앙의 “계획”은 단순히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에 의해 채택된 방향에 따라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며 운영된다는 사실로 귀착된다. 베틀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관계의 발전은 극단적인 경우 ‘계획’ 기구들이 기업소들로 하여금 ‘계획’의 핵심적인 사안들을 ‘자유롭게’ 처리하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이와 같은 경우, ‘화폐의 구속력(controle par la monnaie)은 극대화의 단계에 다다르며, 계획은 한낮 상품관계의 ‘부속물’보다 못한 상태로 전락한다. 1965년의 개혁 이래 소련에서 채택된 노선도 바로 이에 기반하고 있다.” (Calcul economique et formes de propriete, Paris 1970, p. 89) 달리 표현하자면,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적 단위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 계획은 단지 부차적인 요소로서 취급될 뿐이다.
일상 속 실천에서 이러한 조치에 담긴 실제적인 양상은 1974년 6월에 수정주의 정당인 미국 공산당 산하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소련을 여행했던 미국의 한 급진적인 경제학자에 의해서도 설명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기업소 관리자들과의 대화에서 계획의 실행과정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이 도출됐다. 첫째, 모든 계획은 기업소 단위에서 시작되며, 이후 심사를 거치기 위해 차상위 기구에 제출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상급 기관들이 제시된 계획 중에서 중요한 모든 사항들을 다룰 때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다. 둘째, 기업소는 계획의 테두리 밖에서 재투자―예컨대, 경영자들은 이윤을 가장 많이 산출할만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의 가동량을 늘리거나, 동일한 공업 부문에 속한 타 공장들을 인수하는 데에 있어 이윤을 재량껏 투자해도 무관했다―를 위해 순이윤의 3분지 1을 보유할 수 있었다. 공장의 모든 시설들은 신설되거나 외부에서 들여오며, 이후 생산계획의 범위에 포섭되지만, 이러한 계획도 마찬가지로 차하위 기업소에서 연원한다.” (≪소련의 최신 근황에 대한 보고: 소련에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복원됐으며, 세계적 투쟁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레드 페이퍼스 제 7호, 혁명동맹, 시카고, 1974년, 141쪽. 강조는 원문 표시.)
이러한 실례는 앞서 언급된 “중앙집중화된 투자”의 허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시행된 진정한 중앙집중화된 투자와 동떨어져 있고, 국가의 기금 바깥에서 수행됐던 까닭에, 개별 기업의 기금에서 연원했던 “중앙집중적” 투자의 본질은 사실상 이전 시기 계획의 범주 밖에 있는 투자들의 동음이의어에 불과했다. 금년도의 이러한 탈(脫)계획과, 기업소에 의한 무계획적이고,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투자는 그 다음 년도에 “계획의 일부”로 재명명되어 이후 “중앙집중화”를 거친다. 이 천재적인 정식 하에서는 사회주의적 공공성에 가장 충실한 계획조차도 수 년도 채 되지 않아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기회주의의 산 증인으로 퇴락하게 될 터였다. 1929년에 스탈린이 당 내 우익 기회주의 분파에 의해 제시됐던 유사한 “계획” 제안서들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이는 “5개년 계획이 아니라 단지 5개년의 망설일 뿐이다.” (≪저작집≫, 12권, 84쪽. 강조는 저자의 표시.)
소비에트 경제의 실질적인 무계획성과, 추가적으로 나머지에 비할 때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기업소들과 콤비나트에 의한 “계획”의 활용은 소련의 생산수단 시장에 대해 세부적인 상을 제공한다. 모든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분배 방식은 경제발전의 추세를 반영하며, 이를 강력하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모리스 돕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사회주의 시기 소련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분배계획이 “전체 계획의 모든 상이한 부문들의 대동맥을 형성할 만큼”, 각별한 주목을 받은 원인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인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발전≫, 368쪽)
파벨 부니치(Pavel Bunich) 소련 과학원(Soviet Academy of Sciences) 후보회원의 시야에서 1965년의 ‘개혁’은 모든 기업소들이 (...) 도매점 및 상점에서 공급처와 세부적인 계약을 체결함으로서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평등한 권리를 차별 없이 보장받은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자체에 내재된 ‘통일성’ 내지 ‘방법론의 동일성’에서 여타 정책들에 비해 독보적이었다. (≪소련의 경제개혁에서 국가적 계획과 물질적 자극의 방식들≫, 36쪽)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개인적 차원의 소비품목에 대한 분배에 있어 사회주의 하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영역이 ‘개혁’으로 인해 생산수단에 대한 분배의 영역으로 확장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니치는 기업소들이 동등한 권리와 함께 생산수단에 대한 시장거래에 참여할 수 있어도, 똑같은 재원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략한다. 이제 한번 살펴보자.
경제학자 V. 부다가린은 “소련에서 현재의 시장과 물질적-기술적 공급망 체계가 생산수단의 유통과정에서 상품-화폐 관계를 보다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준거들을 통해 확인된다”고 썼다. 부다가린은 “생산수단 시장”이 국가의 전체 도매무역의 회전율 중 2/3의 지분을 점유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가격체계와 생산수단의 유통≫, 에코노미체스키예 나우키, 1971년, 제 11호. 1972년 7월에 발간된 경제학의 제문제 78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모든 기업소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위한 공간은 사실상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다. 일부 기업들은 다른 기업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부다가린은 계속해서 말한다. “소비자는 현재의 상황에서 신제품 혹은 노동도구에 대한 가격상한의 확립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도, 생산수단의 판매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리려는 무수한 시도들에 반대할 수조차도 없다.”
“특히 새롭게 개발된 제품의 품목 또는 유형들에 관해 단기적이고 일시적으로 가격을 책정한다는 점에서 생산자는 가격을 결정하며, 소비자에게 압력을 부과하고자 기존에 존재했던 재원들의 유형, 혹은 품목들의 부족을 자주 남용한다.” (83쪽. 강조는 원문 표시.)
부다가린이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독점자본에 의한 시장지배력의 가장 초보적인 행사로, 이러한 현상은 서방 국가에서 거의 모든 대규모 도매업 시장의 주요한 특징으로 손꼽힐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1972년 뉴욕에서 출판된 존 블레어의 종합연구서 ≪경제의 집중화≫의 16~20장 등을 보라.) 해당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모든 실천들이 “불가역적인 계획의 기초 위에서”(같은 책, 78쪽) 발생한다는 부다가린의 비평은 마치 일말의 말장난처럼, 지배적 미사여구에 대한 한낱 공허한 아첨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아래의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이는 역설적인 차원에서 진실을 담고 있다. 부다가린에 따르면, “계획가들”은 “계획된”의 언어로 시장의 고압적인 전략에 개입하며 재재를 가한다.
부다가린은 용어들을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매무역의 발전에 있어, 가격체계의 적용 과정에서 특수한 지위는 생산수단에 대한 현재 수준의 시장지배력에 조응하는 연합기업들, 즉 경제협동조합들에게 귀속된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대규모 생산자들 및 소비자들과 마찬가지로, 가격의 전반적인 형성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연계성을 영구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 그리고 기존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이들 조합들은 상호간의 계약관계에 기초하며, 경제적으로 구체화된 가격계산체계에 입각하여 생산을 좌우하는 경제적 조건들을 수중에 지니고 있다.” (81쪽)
이러한 “경제협동조합들”(“생산협동조합”과 동의어로 쓰이며, 보다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소련의 학자들에 의해 트러스트, 콤비나트로도 불린다.)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을 독보적으로 보이게 하고, 특수한 지위에 놓는 것은 부다가린이 말한 것처럼, 여러 기업소들, 콤비나트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가일층적인 역량에서 나오며, “가격의 전체적인 형성과정에 영향을 주고”, 사회 전반적으로 “생산에 파급을 끼치는” 강제력에 있다.
따라서, 생산수단 시장에 대한 “평등한 권리”의 지배적 법칙은 부다가린이 말한 것처럼 "생산수단 시장의 현재적인 지배력에" 조응하는 규모와 포괄성의 측면에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거대 기업체들에 의한 "특수한 지위"로의 이전투구로 직결된다.
생산수단의 무정부적 분배에 대한 추가적인 징후―이윤증대의 법칙에 따른 개개 기업소와 기업소, 콤비나트와 콤비나트 사이에서의 분배―는 저명한 수정주의 사상가인 N. 페도렌코에 의해 연구됐다. 페도렌코는 “국민경제에서 생산수단의 전반적인 유통체계의 추가적인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설명하기” 위해 소련 전역의 경제학자들을 초청했다. “생산수단에 대한 기존의 분배방식은 인위적으로 조장된 재원의 부족과 경제의 일정 부문에서 과잉재고의 형성으로, 기타 품목들의 결핍으로 귀결되고 있으며, 생산의 질적 향상에 복무하지 않는다.” (≪경제학의 당면 과제≫,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4년. 경제학의 제문제 제 2호, 1974년 12월, 24쪽에 수록됨.)
생산수단에 대한 분배체계는 다르게 말하자면, 아무도 구매를 원하지 않거나 상품으로서 구매할 수 없는 “과잉재고들”의 형태로 생산수단이 “부패할 수 있는” 양상을 함께 동반한다. 같은 시기에 인위적으로 조장된 소비재의 고갈은 일찍이 지적됐듯, 생산재의 제작을 전담하는 기업소들이 이전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소들에게 압력을 부과함으로써 촉발된다. 부다가린과 페도렌코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이례적인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빈번한” 현상들로서 호명한다.
“우리의 경험은 인위적인 가격 상승으로 치닫는 위험한 경향의 존속을 일컫는다”고 경제학자 L. 마이젠베르크는 말한다. (≪도매가격체계의 개선안들≫,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0년, 제 6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1년 2월, 64쪽. 강조는 저자의 것.)
“신규 장비들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대폭 인상함으로써” 이윤을 증식시키는 기업소들에 대항하는 엄중한 강연은 경제학자인 루빈시테인(M. Rubinshtein)에 의해서도 개진됐다. 루빈시테인은 비교통계학의 기초 위에서 소련의 기계제조업 부문에서 “신제품들의 저조한 생산률”―소비에트 학계의 담론장에서 예의주시됐던 현상인―의 주요한 원인이 이러한 경향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과학기술적 진보와 가격체계의 계획화”, 젠기 이 크레디트, 1972년 제 9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3년 7월, 22쪽) 그러나 그는 기술의 현대화에 대한 저항과 신규 기계, 장비들의 저조한 도입률이 독점체가 포진하고 있었던 구미권 국가들의 산업 부문들에서 표준적인 특징들로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한테 증명할 수 있었겠지만, 끝내 서방 국가들과의 대조 및 비교로 확대하는 과정을 생략한다.
서방의 진보적 기술자들과 산업 컨설턴트들,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기존 생산수단 시장의 노후화와 후진성에 빈번히 주목한다. [예컨대, 블레어의 저서인 ≪경제집중화≫의 9~10장과 세이모어 멜먼의 펜타곤 자본주의(뉴욕, 1970년, 184~191쪽), 그리고 베란과 스위지의 ≪독점자본≫, 뉴욕, 1966년, 93~97쪽 등을 보라. 생산수단의 노후화와 후진성, 그리고 그 기원은 레닌의 ≪제국주의론≫ 제 8장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다.]
서방의 경우처럼, 현대 소련에서도 공식 이데올로기는 기술의 급속한 진보에 있지만, 생산수단의 생산에 기반한 실질적인 경제관계에 있어서는 독점체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산출된 상품들로서 이념을 배반하며, 생산력의 발달을 저해하는 데에 주효한 영향을 끼친다.
소련 내 생산수단 시장의 “계획성”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애처로운 노력은 최근에 Y. N. 드로기친스키(Drogichinsky) 고스플란 신규계획부 부장에 의해 전개됐다. 드로기친스키는 “제조업자들과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드로기친스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현상임이 분명하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련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거래의 핵심이 “무제한적인 자유무역”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궂은 고통이란 고통을 무릅쓰고 있다.
드로기친스키는 서방 국가들에서도 “공급업체들과 소비자들의” 실질적인 “자유로운 선택”과 “자유무역”이 오래 전부터 제한되어 왔고, 상품-화폐 관계에 기반한 거대 독점체들에 의해 철저하게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한 것처럼 보인다. “인디펜던트” 가스 충전소의 사장은 가솔린 공급처 관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쉽게 획득할 수 없으며, 대부분의 생산재 시장들에서 소위 “자유무역”은 오래 전에 일찍이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
서방 국가들에서 독점자본에 반대하는 출판물은 거래에 대한 조정안과 상이한 부문들에서 공급자들과 소비자들의 어떠한 “자유로운 선택”도 배제되는, 거대 기업들간의 이른바 “상호유대적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 자료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1965년 당시 포츈지의 설문조사에서는 미국의 모든 대규모 중공업 회사들과, 대기업들의 78%는 최소한 공급자 및 소비자들의 일부분과, 대개의 경우 그들 자신들에게 가장 우선순위로 여겨졌던 공급자들, 혹은 소비자들과 ‘자유로운 선택’이 결여된 배타적인 관계를 이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핏치 & 오펜하이머, ≪누가 거대기업을 지배하는가 – III≫, 소셜리스트 레볼루션, 1970년 11~12월호, 84쪽. 블레어의 저서인 ≪경제의 집중화≫ 제 14장도 참고하라.) “자유무역”과 “공급자-소비자간 자유로운 선택”의 부재나, 이에 대한 평이한 수준의 규제는 사회주의적 계획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결코 등치되지 않는다.
생산수단 시장에 대한 “계획”을 읊조리는 드로기친스키의 기상천외한 말은 극동과 시베리아에 인위적으로 건립된 신규 산업 중심지들과 같이 독보적인 입지를 점하는 소련의 자동차 산업―국가의 예산에서 시초부터 직접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자본을 지원받는 신흥 산업으로서―으로부터 상당 부분 기원한다. 드로기친스키의 설명에서 공급자-소비자 관계의 총체적인 “계획성”은 자동자 콤비나트가 열연강판을 예를 들어, 어업 종사자들이나 보드카 판매업자들한테서 “자유롭게”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철강 콤비나트로부터 사들여야 한다는 심오함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드로기친스키의 설명은 기업소들의 이해가 걸린 “계획들”이 실행되지 않는 한 자동차-철강재의 공급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즉, 모든 기업소들의 이윤추구적인 목표들이 선행된 이후에야 “계획”이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상의 사례를 논함에 있어 보편적인 타당성을 강조하려고 애쓰는 드로기친스키의 시도는 실로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드로기친스키는 생산수당 시장의 70%가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치러지는 대규모 도매무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거래는 드로기친스키가 진중하게 강조한 것처럼 5개년 계획의 연간 목표량에 대한 분배와 더불어, 생산과 공급을 다루는 5개년 계획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광범위한 부연 설명과 함께 “신경제체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생산공정도를 구상한다. 그러나 다소간의 차질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1966~1970년 계획 당시의 경험은 불행하게도 몇몇 “문제들”은, 예컨대 “연간 목표량으로 분할되는 정부 부처와 협동조합, 기업소들의 5개년 계획이 어떤 경우에서도 관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생산수단에서의 도매무역,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4년, 4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4년 10월, 89~107쪽. 강조는 편집자.)
20. 가격
소련의 중앙 “계획가”들은 계획을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함에 대한 이유를 지목할 때, 가격의 불안정성을 공개적으로 성토한다.
국영 기업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과하는 가격은 1965년에 확립된 “신경제체제”의 조건들 하에서 더욱 빈번히 변화한다. 도매가격의 이와 같은 변동은 소매무역에서 가격의 등급에 영향을 끼칠 수도,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매가격의 변동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이는 소련 경제에서 실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으로, 다시 말해 “계획가”들의 노력에 치명타를 가하는 현상이다.
V. 코토프 고스플란 부의장은 앞의 글에서 “아무리 상대적으로 덜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해도, 가격의 변동은 과거에도 또한 존재했다”고 서술한다. 여기서 코토프가 논하는 것은, 사회주의 시기 소련 경제를 가리킨다. “하지만 행정의 전반적인 집중화와 덜 발달한 경제관계, 가격 안정화에 대한 견해와 더불어, 그리고 비용계산에 대한 의례적인 태도와 더불어, 이러한 [가격변동의] 문제는 비교적 덜 긴급한 문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진정한 중앙계획과 경제에 대한 방향성이 존재했을 때, 상품-화폐 관계가 제약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적 우선순위에 종속되었을 때, 기업소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았을 때 가격은 안정화됐으며, 드물게 변화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개혁’ 이래로 사정은 달라졌다.” 코토프는 계속해서 말한다. “기존에 비해 더욱 복잡해진 경영체계는 일정 부분 탈(脫)집중화됐고, 상품-화폐 관계(그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가격을 포함하여)의 역할은 경제적 인센티브의 차원으로 격상됐으며, 그 중요성[가격변동 문제의 중요성]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물론, 이는 놀랄 만한 사실이 결코 아니다. 개별 기업소나 연합기업소(콤비나트)에게 있어 목표나 “동기”는 이윤을 증식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한 기업소가 다른 기업소들로부터 사들인 판매가격을 높이거나, 혹은 낮추기 위해 각 기업소들에게 자체적으로 부과되는 압력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상품의 구매자, 판매자들이 그렇듯이, 국영 기업소들도 경제적 아귀다툼에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안달이 난 경쟁자들처럼 행동한다. 강력한 위치에 있는 기업소들은 상대적으로 영세한 기업소들에게 가격을 자의적으로 강제한다. 그러나 가격에서의 변동이 증명하듯이, 경쟁자들의 우위와 열세는 상대적이며, 계속해서 변화한다.
1965년 ‘개혁’ 초기에, 기업소들과 기업소들의 무역에서 가격이 5년마다 1번씩 변동될 것으로 보였다고 코토프는 서술한다. 물론, 이조차도 중앙 “계획가”들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잦은 현상으로, 코토프를 곤란하게 했다. 그러나 코토프는 도매가격이 “공식적으로” 해마다 변화하며, 실제 사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자주 변동되어 왔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반 조건 하에서 중앙 “계획”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 코토프는 말한다. “계획은 현재의 가격을 형성한다. 계획의 승인에 따른 신규 가격안의 채택과 함께, 가치량과 가격에 대한 계획의 목표치들 사이에서 간극은 증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계획의 완수에 필요한 객관적인 평가기준은 생겨날 수 없게 되며, 계획적 관리와 경제적 자극의 효율성은 감소한다.” (≪가격: 국가경제계획의 도구이자 계획적 가치량의 기초≫, 플라브노예 하쟈이스트보, 1972년 제 9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3년 5월호 61쪽에 수록. 강조는 인용자의 것.)
소련의 또다른 수정주의 경제학자인 우사토프(I. Usatov)는 변명조로 “현재의 조건 하에서, 상품-화폐 관계와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가격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생산을 위한 경제적 자극에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계획의 질에 끼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은 현저하게 부각됐다. 가격에서 부분적인 변화를 촉진한 관행―지난 수 년간 확고히 굳혀진 관행―으로 인한 결과, 상층부 경제기관들은 계획을 정교하게 입안할 수 없게 됐고, 계획의 완수 여부를 놓고 효과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거나 산하의 기업소들에게 고강도의 요구들을 부과할 수 없게 됐다.” (≪경제계획의 고도화와 가격체계≫, 에코노미체스키예 나우키, 1972년, 제 9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3년 3호 54쪽에 수록. 강조는 인용자의 것.)
보다 쉽게 말하자면, 기업소들 사이에 상품-화폐관계가 지배적인 경제체제에서 중앙계획은 불가능하다. 코토프는 소련의 현 중앙가격체계가 “생산계획과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개탄할 때 같은 말을 다른 용어로 표현할 뿐이다. (같은 글, 65쪽) 코토프의 동료인 A. 코민(Komin) 국가가격위원회 부의장은 도매가격을 동시다발적으로 수정하고, 그 변동 양상을 결산해도 “5개년 계획을 현실적으로 입안할 수 없다”고 서술한다. 코민과 여러 학자들에게 문제는 더 이상 가격을 어떻게 책정하고, 응용할지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예측할지에 있었다. (≪계획적 가격형성의 방법론과 실천 상에서의 제문제≫, 플라브노예 하쟈이스트보, 1972년, 제 9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3년 5월호, 48쪽)
물론, 소련은 특히 국영 기업소들 사이에서의 거래를 포함하여 모든 유형의 가격을 통제할 광범위한 관료기구를 수중에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의 활동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는 소련에서 가격통제의 효과가 닉슨의 신경제정책 하에서 1971년에 창설된 “생계비위원회”의 그것보다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세기의 모든 대규모 자본주의 국가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 가격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지만, 그 중 어느 나라도 공식적으로 천명한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소련의 가격당국은 중앙계획과 가격통제의 원칙들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가격의 불안정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첫째, 소련의 가격당국은 통계학자 에이델만(Eidelman)이 보고한 것처럼, “다양한 부문들에 대한 생산으로 직결되는 공급품과 제품들에 대한 평균가격을 취득하기 위해” 국영 기업소들에게 전송될 설문표를 작성하는 업무에 열중한다. 가격 문제를 책임지는 중앙의 부처들은 다르게 말하자면, 경제 전반에 걸쳐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가격들을 알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중앙의 부처들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1959년(흐루쇼프가 중앙계획을 파괴한 1년 후) 이래로 중앙의 통계 부처들은 5개년 계획이 마감될 때마다 설문표를 교부해왔으며, 에이델만은 1972년에 사상 최초로 상당수의 공업 부문에 자리한 모든 기업소들이 설문표를 교부받을 예정에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중앙통계청(에이델만이 “국민경제균형청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부서)은 설문표의 배분을 통해 “9차 5개년 계획에서 경제의 발전을 결정하며, 경제에 대한 분석과 계획에 있어 막대한 중요성을 지니며, 국민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교환과 분배를 촉진시킬 것”을 고대하고 있다. (≪경제의 제 부문 사이에서 관찰되는 새로운 사후적 균형≫, 베스트니크 스타티스티키, 1972년. 경제학의 제문제 제 6호, 1973년 5월, 23쪽에 수록.)
물론, 중앙 당국의 계획가들이 모든 품목들의 가격과 판매된 수량에 대한 정보의 현황을 통제하거나, 심지어 이를 관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비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계획가”들의 무지는 지엽적인 영역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련 경제의 성장은 지엽적인 사안들뿐만 아니라 에이델만이 지적했듯이, 전체 경제에서 핵심이 되는 비례적 발전에 있어서도 계획 당국자들의 의지와 선험적인 지식과 독립적으로 이뤄진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는 아래의 글들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계획적인 분배가 “균형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 있다.
중앙의 가격통제기구들은 경제발전의 총노선을 좌우할 현행 가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가? 정답은 소련의 “계획가”들이 가격 책정의 “표준적 법칙”으로 일컫는 것에 있다. (중앙가격위원회의) 코민이 설명하듯이, 모든 가격은 변동하기 때문에 “가격의 책정에 들어가는 노동의 량도 해마다 가중된다.” 중앙의 부처들은 이를 제어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Komin)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가격책정의 정량화된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통합시키는 과제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핵심은 가격기구에 의한 기준가격과 기준가격의 표준책정량에 대한 중앙집중화의 확립에 있으며, 기준가격의 인상 내지 인하에, 그리고 기업소들과 협동조합들에 의한 구체적인 가격의 설정에 있다.” (위의 글, 47쪽)
가격통제의 “훌륭한” 방법론은 무릇 이와 같다! 중앙의 계획당국은 공리공담적으로 가격을 책정하며, 추상 속에서 가격을 확정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가격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은 자체적으로 기준을 설정한다. 이러한 방식은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지 판별하는 데에 있어 가격 “통제관”들의 역할을 단지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공식들을 배포하는 역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의 내용은 기업소들의 입장에서 좋게 인식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코민이 설명하는 것처럼, “생산에 대한 사회적 필요지출은 사회주의 경제 하에서 가격의 경제적 기초가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노동의 사회적 필요지출에 가격을 조응시키는 절차의 실질적인 내용은 화폐단위로 표현되는 가격과 사회적 생산비용의 일치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가격의 경제적 근거는 실제적 용어로서 기업소의 생산비용과 잉여생산물의 척도(수익, 거래세, 양도세)에 대한 확고한 정의로부터 기인한다.” (위의 글, 37쪽 및 39쪽)
코민이 여기서 실질적으로 규정한 것은 맑스의 “자본”과 기타 저작들에서 설명된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초보적인 가격론의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코민의 정의는 자본주의적 기업소들이 판매가격을 책정하기 위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할 때 쓰이는 초보적인 이론이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단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다.
소련에 도입된 자본주의의 이러한 초보적인 이론에 가해진 유일한 변화는 비효율적인 공업 기업소들의 생산원가와 생산이윤의 총합에 따른 독점자본주의적 가격책정의 방법론에 기초하며, 비용의 소모가 더욱 심각한 특정 상품들의 가격을 인상시키는 데에 있다. 코민의 동료인 코토프가 예시를 든 것처럼, "석유 및 가스에 대한 공업가격은, 해당 생산물들의 낮은 가격을 석탄의 보다 높은 가격으로 인상시키기 위해 책정됐다." 코토프는 더 나아가 "일정한 영역들에서 '영세한' 기업소들의 기준에 입각한 가격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양도세를 청구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서술한다. (위의 글, 52쪽 및 58쪽) 만약 이러한 방법론이 사회주의적 가격 책정의 원칙들로 된다면,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 US스틸, 엑슨(Exxon) 사도 마땅히 사회주의적인 기업소에 해당될 것이다.
소련에서 가격 “통제” 기구들의 역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특정 산업들에서, 특히 원자재 추출 부문들에서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독점가격을 최소한 강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통제되어야 할 요소들에 의해 가격통제기구가 침식되고 있었다고 1969년부터 일찍이 지적했던 경제학자 쿨리긴(Kuligin)의 관측에서 찾아볼 수 있다. 쿨리긴은 “물가 수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맺고 있었던 개별 경제적 요소들 내지 이들의 대표 기관들은 중앙집중화된 가격 형성과 연계된 업무에 더욱 자주 개입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경제개혁 하에서 가격형성의 개선≫, 에코노미체스키예 나우키, 1969년, 제 4호, 경제학의 제문제 1969년 10월호, 32쪽에 수록.) 이는 마치 여우들이 닭장을 굴리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막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쿨리긴은 이러한 경향의 존속이 “물가 폭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무정부적 요소들에 의한 가격통제기구의 점차적인 침식이 “신체제” 하에서 일시적인 탈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진난만한 믿음을 간직한다. 1965년 “개혁”의 기본 골자는 하단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바로 그러한 유형의 장악을 매우 큰 규모로 조장하는 데에 있다.
물론, 쿨리긴이 지칭하는 내용은 현대 미국 독점자본주의의 숱한 사례들과 평행선상에 있다. 미국에서의 반독점 정책은 연방 “조정 기구”들이 통제받아야 할 대상들인 산업자본의 대변인들로 줄줄이 구성되어 있는 곳에서 허례허식에 그칠 뿐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산하의 모든 기구들과 더불어, 자본가들 중 가장 강력한 부문들에 복무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소련에 1:1로 대입해도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소련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계획을 제대로 구상하며, 기업소와 콤비나트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심지어는 이들에 맞서 경제를 관리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실제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릇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기적 공황―경제의 “호황과 불황”이라는 자본주의적 패턴―은 수정주의 치하 소련의 특징으로서, 의도치 않게도 소련의 경제학자들 자신들에게서 밝혀지고 있다.
코토프(Kotov) 고스플란 부위원장은 소위 “8차 5개년 계획”(1966~70)의 이면에 진정한 계획의 부재를 촉발한 원인들을 살핀 후 1971년 가격에 기초하여 입안됐던 9차 5개년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암울한 관측을 내놓았다.
“새로 책정된 가격조차 신규 5개년 계획 동안에 안정을 거의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험이 보여주었듯이, 5개년 계획이 효력을 발휘한 기간 동안 가격의 광범위한 수정은 국민경제의 균형과 표준 노동량(노르마)에 변화를 일으키고, 계획과 계획의 연계와 지속성에 위해를 끼치며, 계획의 완수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바람직한 조치로 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5개년 계획은 가치량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의의를 상실한다.”
코토프가 예견했듯이, 소련 전역에 걸친 가격의 광범위한 수정 조치는 1973년 초순에 시행됐으며, 다시 한 번 기존의 예측들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다소 먼 미래에 대한 코토프의 예측은 심지어 암울하기까지 하며, 그러한 예측은 실제로 적중했다. 국가경제에서 핵심을 이루는 분배와 교환 관계를 총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계획가”들의 무능은 불안정하고, 불균형적인 경제발전의 국면을 나타낸다. 코토프는 바로 그 점을, 비록 우회적으로나마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80년 이전까지 국가경제의 성장 전망에 대한 구체화와, 기존 가격(가격의 책정 시기를 기준으로)에 입각한 5개년 계획의 정교화로부터 창출된 경험은 가격의 추가적인 변동이 가치량 뿐만 아니라 총가치분배량의 목표치에 있어서도, 장기적이면서, 동시에 현존하는 계획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68쪽, 강조는 인용자)
이는 즉, (예컨대) 생산수단의 생산 대 소비재 생산의 비율이나 소비재 생산 대비 소비재에 대한 유효수요와 같은 기초적인 경제적 요소들이 소련 경제에서 불규칙적으로, 무계획적으로, 무분별한 방식으로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총가치분배량에서 불균형의 증가는 모든 자본주의 경제에서 전반적 위기를 촉발시키는 원인이다. 호황과 파산, 다시 말해 이른바 “번영”과 전반적 불황에 가해지는 압력이 소련 경제의 근본적인 체계를 수놓고 있다는 결론은 불가피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서방 국가들처럼 소련이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근본적인 불균형의 여파를 일시적으로나마 은폐하거나, 억누르거나, 또는 해외에 이전시킬 수 있는지는 명백하게 지켜볼 일이다.
소련의 경제학자들은 소련 경제에서 경제적 주기의 문제를 상품으로서 노동력에 대해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것만큼 여태껏 직접적으로 논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저술들은 수정주의자들이 기후의 영향 내지 작황의 여파로 책임을 전가하곤 하는 소련의 경제성장률 변동에 대해 매우 각별한 주의를 내비친다.
경제적 “불확실성”을 주제로 한 논문들도 역시 비일비재하게 출판되고 있다. 예컨대, 경제학자 바비닌(Babynin)과 벨류소프(Belousov)는 소련의 가격 동향에 있어 불분명한 흐름들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론들의 탐구에 천착한다. (≪도매가격 예측≫,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2년, 4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2년 9월호에 수록.) 코민은 “가격을 예측하는 문제는 이론적 용어로도, 실천적 용어로도 온전히 풀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는 서구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찬동할 법한 악선동이다. (앞의 글, 49쪽) 수리경제학자인 베게르(Veger)는 예측할 수 없는 가격의 동향에 기초하여 이윤율을 측정하는 공식을 고안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불확실성의 조건들 하에서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계산≫,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2년 제 2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2년 8월호에 수록.)
류만체프는 순전무구한 학자적 어투로 끝내 입을 열며, “기업소들의 광범한 독립성에 입각한 조건들 하에서 중앙계획은 증대되는 불확실성과, 계획의 입안 과정 상에서 추계학적 이윤성으로 특징되는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방법론들을 제시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고 논한다. (≪현대 소련 경제의 관리 ― 근본적 원칙들≫, 소련의 경제개혁, 32쪽에 수록.)
불확실성과 이윤성, 추계학(Stochastics, 推計學). 이 모든 것은 현대의 소련 경제가 생산의 무정부성이 주된 특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회피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21. 재정
소련 경제의 “새로운” 관제고지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논의된 바대로라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한 관제고지가 소련의 중앙 “계획” 부서들의 최고위 직책에 있다고 보거나, 심지어는 해당 부서들에서 경제 권력의 주요한 기제들에 있다고 보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소련의 ‘계획가’들은 소련 경제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매우 희박하다.
소련의 “새로운” 경제가 어떻게 조직화되어 있는지 전체적인 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련 국립은행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역할을 보다 심도있게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소련의 국영은행 제도는 사회주의 시대 이래로 외적으로는 미미하게 변화한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방에서는 적어도 외형상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산하의 다양한 부처들의 서로 다른 업무적 기능들이 결합한 형태, 즉 단일한 국가독점적 은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소련 은행의 작동 원리와 그 본질―특히 공업 기업소 및 콤비나트와의 관계에서 보여지듯―은 1965년 “개혁”으로 인해 현저하게 변화했다. 보조금에 대한 무이자 제공을 축소하는 대신 이자의 대출―예컨대 신용의 비중―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을 때, 코시긴은 이러한 변화의 주요한 특징들을 노골적으로 지적했다. (이에 관해서는 본 책의 제16장을 보라.) 공업 기업소들이 국영은행의 여러 부처들로부터 생산수단(“투자자본”)의 확장에 필요한 재원을 무이자, 무상환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개혁” 이전에 일반적으로 통용됐던 법칙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유토피아가 구현됐다는 것을, 은행이 화폐를 공짜로 퍼주는 형태의 경제가 됐다는 것을 한사코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기에는 기업소의 예산에서 유휴기금이 기업소가 아니라 은행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 측면과, 일찍이 지적이 이뤄졌듯이 기업소의 전체 이윤 중 사실상 100%가 국가의 직할하에 중앙집중화됐다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했다. 무이자, 무상환 기금제는 기업소에게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단 한 방울의 이윤도 내주지 않았다. 고스방크(Gosbank, 국영은행으로, 단기기금을 지원하는 부서로도 알려져 있다.)도, 스트로이방크(장기기금을 지원하는 부서)도, 그 어떤 부서도 시장조작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지 않았다.
소련의 사회주의 은행제도의 또 다른 특징은 자본주의적 은행제도와 본질적으로 상이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소련의 국영은행은 산하의 모든 부처들과 함께, 볼셰비키당에 의해 지도받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경제적 정책을 반영하는 중앙계획에 법적으로도,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종속되어 있었다.
은행은 기금을 배분하고, 계획에서 확립한 내용대로 기업소들과 기업소들 사이에서 이를 이전시킴으로써, 국가재정을 보전하고,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할당된 기금을 기업소들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회계조사를 수행함으로써 중앙계획에 복무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은행이 경제계획의 “파발수” 내지는 “전령사”로 빈번하게 불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와 같은 은행제도는 명실상부하게도 1965년의 조치들을 통해 형성됐고, 고착화된 경제적 조건들 하에서 변화를 거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첫째, 총체적으로 운동하는 중앙지령계획의 부재 하에서 그 어떤 변화도 가해지지 않았다면 은행은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채,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둘째, 이자 없이 기금을 계속해서 제공했다면, 은행은 모든 자산을 빠르게 소진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소들이 “그들” 자신의 수익에서 상당 부분을 보존할 수 있게 됐고, 기업소 관리자들이 이윤 극대화를 위한 사적 인센티브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은, 은행에서 “공짜돈”을 구하는 것보다 기업소 관리자들의 관점을 쫓는 것만큼 간단한 방편이 달리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즉, 기금이 헐값으로 제공되는 이상 “무이자”, 무제한적인 이윤도 마찬가지로 창출될 것임을 의미했다. 옛적 돌팔이 의사가 그랬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오랜 경제적 처방은 맑스 시기에 이미 프루동에 의해, 그리고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소부르주아 사상을 통해 제시된 “신용화폐”(무이자)와 함께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실현될 터였다.
짧게 말해, 기업소의 수중에서 이전된 기금이 자본의 사회적 성격을 획득한 이상, 은행의 손아귀에서 이전된 기금도 그와 유사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생산단위의 자본주의적 기업소로의 전화는 사회주의 국가의 독점은행에서 국가자본주의적 은행으로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의 기준금리는 명목 2~3%로 시작해서 1967년 이후에는 시중금리인 6% 가까이 상승했다. ≪런던 파이낸셜 타임즈≫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서방의 부르주아 논평가는 1971년에 이러한 양상에 대해, 다른 나라들보다 여전히 완만하지만, “수년 전의 무이자 신용화폐나 재앙적인 국가보조금 정책과 비교한다면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의미한다”고 논평했다. (A. H. 헤르만, “동-서방 금융”. ≪뱅커≫, 1971년, 872쪽.)
이러한 정서에 부응하게도, 서방 자본주의 은행계의 찬사에 힘입어 소련의 경제학계는 이자가 기존보다 더욱 인상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막중한 지면을 할애했다. (I. 마모노바흐, ≪금리와 그 차이≫, 젠기 이 크레디트, 제 3호, 1972년, 경제학의 제문제, 1972년 11월호에 수록.) 이자의 인상은 이미 현실 속에서 실현됐을지도 모른다.
이자 상환의 원리를 맑스주의의 원칙과 조화시키려는 소련 수정주의 경제 “이론가”들의 이데올로기적 묘기는 한 편의 희극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비록 이 장에서 상세히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긴 내용이다고 해도, 소련의 경제담론에서 관찰되는 추한 면모를 더욱 빈번하게 드러낸다. “자본의 사용료가 자본자산의 상품적 성격을 고착화시키고, 이 모든 것이 ‘좋은’ 현상”이라고 말했던 초극단 수정주의자 레온티예프의 노골적인 발언처럼 얼굴에 철판을 깐 극히 드문 주장들을 차치하더라도, 논쟁은 맑스의 ≪자본론≫에서 발견되는 이윤에 대한 명백하고 총체적인 분석을 다룰 때도(≪자본론≫ 3권, 21~26장), “ 사회화된 생산이 이루어진 사회에서 화폐자본이 소멸된다”는 맑스의 명백한 선언에 대해 논할 때도(≪자본론≫ 2권, 358쪽) 마치 사전에 합의라도 된 것처럼 전반적인 침묵조로 일관됐다. (페이웰에 의해 인용된 레온티예프의 발언에 대해서는 앞의 책, 223쪽을 보라.)
이윤 범주를 둘러싼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당시 논쟁에 참가한 소련의 학자들은 확고한 유물론적 토대―역병처럼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를 결여한 채, 단지 당의 포고령에 따라 일도양단된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데에 한하여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이는 E. G. 예피모바가 아래의 글에서 옳바르게 지적한 대로였다.
“경제개혁의 제반 원칙들에 관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의 1965년 9월의 포고령은 생산자본에 대한 사용료의 도입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더 이상 사용료를 둘러싼 실제적인 원리가 사회주의적 관리의 원칙들과 조응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아니라, 자본 사용료라는 범주의 특수한 경제적 내용을 이끌어내고, 이러한 기초 위에서 사용료의 규모와, 자본 사용료를 거두기 위한 규범들을 확립하는 절차의 상정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자본사용료의 경제적 내용에 관하여≫, 세리야 옵셰스트벤니흐 나우크, 1971년, 제 1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2년 4월호, 49쪽에 수록.) 다르게 말해, 문제는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전화(轉化)가 어떠한 미사여구로 인해 가려지는지, 전화의 비율이 얼마나 높게 나타날 것인지에 따라 좌우된다. 근본적인 원칙들에 대한 논의는 금지되어 있다.
소련의 이론가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기업소와 국가간의 경제적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있다.
기업소는 국영은행에 이자를 상환하며, 더 나아가 “자본사용료”를 국가의 예산에 헌납한다. 두 가지 지불형태는 종래에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됐다. 이자와 “자본사용료”의 차이는 단기대금에 대한 이자와 장기대금에 대한 이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처럼 넓게는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개혁”이 진척될수록, 기존에 존재했던 기업소의 가동량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신규 장기투자는 더 이상 국가의 예산에서 실질적으로 지출되지 않았다. “자본사용료가 빌린 자본에 대한 상환금”이라는 논변의 물질적 토대는 증발했다. 그러나 기업소들은 여전히 이윤율에 조응하는 전체 “고정“ 자본에 대한 기본금리로 환산되는 상환금을 지불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이론가”들 사이에서 미사여구로 개념을 대체하는 행위는 어떠한 도움을 결코 주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보다 일관성을 갖춘 수정주의자들은 지난 수 년에 걸쳐 기업소의 이윤으로부터 국가의 각종 세금과 더불어 상환금에 대한 지불이 소득세라는 단일한 항목으로 묶여야 하며, 그렇게 수집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왔다. (E. 마네비치, ≪노동력 활용의 개선을 위한 방편들≫,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3년, 제 12호. 1974년 6월호 “경제학의 제문제” 11쪽에 수록.) 이러한 범주가 어떤 궤변을 통해 국가가 기업소를 소유한다는 원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여전히 두고 볼 문제이다.
소련의 국영은행은 이른바 “개혁”을 통해, 특히 국영공업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적 방향성에 따라 가동하는 은행으로 변모했다. 오늘날 은행이 대금―물론, 이러한 이자는 기업소의 수익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에 이자를 붙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의 자체적인 수익은 기업소의 수익성에 직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은행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많은 품을 들이며, 기업소 책임자에게 채찍질을 휘두르는 보조적인 역할로 된다.
이러한 관계에 깔린 정서는 런던의 은행 평론지인 ≪뱅커(The Banker)≫지에 게재된 M. 스베쉬니코프 소련 국영은행 의장의 기고문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스베쉬니코프는 이렇게 썼다. “은행의 임무는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증대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데에 있다. 기업소들과 경제 조직들에게 이자를 제공할 때 자본의 효율을 개선하고, 생산비용을 줄이며, 생산의 수익성을 높이고, 이윤의 손실을 없애는 과제는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소련 국립은행, 50년 이후”, ≪뱅커≫, 1971년 12월, 1479쪽.) 은행 정책의 이러한 원리는 날강도 록펠러나 모건이 지껄일 법한 말과 하등의 차이도 없다.
그러나 현대 소련의 국영 은행이 은행자본에 대한 통제를 통해 국영공업 기업소들과 콤비나트들을 향해 전일적인 독재를 일정히 행사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먼 심각한 몰이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산업 전반을 지배하는 거대한 문어를 연상케 하는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은행의 상(狀)은 실질적인 조사보다 환상의 산물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현대 소련의 자본주의적 구조와 나치 당시 독일의 자본주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주된 유사점들 중 하나가 “산업자본을 겨냥한 국영은행의 소위 ‘독재’라는 우스꽝스러운 주장도 간혹 출현한다. 이러한 유사점들은 물론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상상 속 관계와는 다르게 상극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산업에 대한 자본주의 은행의 우위는 공업 기업소가 자본의 원천인 은행에 의존하는 정도에 따라 일반적으로 합의된 사안이다. 소련에서 이러한 의존의 비중은 어느 정도로 큰가? (본 책의 18장에서) 일찍이 설명된 것처럼, 소련의 기존 공업 기업소와 콤비나트들은 은행신용에, 특히 은행에게 가장 많은 차입금을 안겨주는 장기자본투자에 대한 은행신용에 의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1972년 당시 소련 공업의 전체 장기투자기금에서 소련의 경제학자들 스스로도 “유의미하지 않다”고 올바르게 평가한 오직 3.3%만이 은행신용으로 제공됐다. “노동자본”에 대한 단기대금―운송, 고용, 재고 및 기타 항목을 포괄하는 30 ~ 90일치 대금―에 있어 은행은 1970년에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비중에 해당되는 공업수요의 약 44%를 공급했다. (V. N. 쿨리코프, ≪장기신용의 몇 가지 문제들≫, 파이난시 SSR, 1974년, 제 4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5년 2월호, 61쪽과 I. U. 슈르, ≪이자 모델의 확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들≫, 젠기 이 크레디트, 3호, 같은 책, 1972년 11월, 73쪽을 보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소련에서 공업 부문 기업소들에 대한 “은행자본의 독재”를 대변하는 물질적 토대는 찾아보기 힘들며, 적어도 기업소가 노동자들로부터 평균이윤율을 착취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른바 “생산협동조합”이나 콤비나트에 대한 국영은행의 각종 폭압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더더욱 희박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재정자립의 원칙에 기초하여 관리된다. 기업소들의 이러한 내막에 대해 앞서 인용된 저자들은 물론, 경제학자 보리스 구빈(Boris Gubin)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산물의 판매로부터 오는 수입은 산업협동조합들의 구조와는 무관하게도, 현재의 생산비용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기술진보와 연계된 연구비, 제작비 및 기타 작업들에 들어가는 비용과도 조응을 이룬다. 이는 또한 생산의 확장에 필수적인 자본투자를 상당한 규모로 포괄한다. (...) 협동조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은 재정자립의 원칙을 비용계산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적 경제관리의 효율성 증진을 위하여≫, 모스크바, 1973년, 105쪽.)
물론, 이상적으로 사뭇 좋게 들리는 재정 “자립”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각 콤비나트가 노동자들의 착취로부터 그토록 높은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뜻하며, 착취의 규모를 확장시키기 마련인 은행이나 국가의 예산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소련만큼 거대 독점체를 비롯하여, 공업 부문 기업소들이 은행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서유럽 국가들에서 은행에 대한 의존도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일본에서는 70% 이상을 점한다면,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대기업들은 은행으로부터 투자자본의 약 3분의 1을 취득했으며, 이러한 의존의 정도는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오늘날 소련에서 일반적인 법칙으로 자리잡았듯이, 산업 콤비나트의 이토록 극에 달한 재정자립의 사례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관념 속의 은행독재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소련 자본주의 체제와 나치 치하 독일의 자본주의 체제 사이에 유사점이 존재한다. 나치의 권력 장악 이전에 독일의 산업독점자본 중 대부분은 은행에 대한 압도적인 빛더미를 놓고 불평할 명분을 지녔으나, 나치의 정책인 이 모든 문제를 “해결”지었다. 정치적, 경제적 조치들을 통해 나치당은 콤비나트가 은행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지점까지 독점산업의 이윤율 증진을 획책했다.
결과적으로, 프란츠 노이만이 나치의 경제정책을 다룬 1944년의 논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독일의 산업은 “더 이상 은행에 빛을 지지 않는”다. “내부금융에 의한 자본조달의 은행대출에 대한 승리”가 달성됨으로써, “대출에 대한 재정자립의 선차성”이 확립됐다. 노이만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재정자립의 원칙이 “국가의 혈세를 도둑질하고, 종합적인 투자에 대한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베헤모스, 국가사회주의의 제도와 실천≫, 뉴욕, 1944년, 318~319쪽.) 노이만이 짚어낸 것처럼, 독일의 거대 은행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산업 콤비나트가 충분한 이윤의 부족으로 파산에 이르는 사태 속에서 자신들의 앞길에 놓인 폐허로부터 구출됐다.
자본주의 하에서 “재정자립”은 대규모 산업 콤비나트가 자체적인 투자은행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은행자본은 비록 번창하기도 하지만, 기존 콤비나트들의 조력자이자 동력자로서 되지, 주인으로 되지 않는다. 이러한 금융 제도의 물질적 토대는 공업 부문의 매우 높은 독점이윤율에 있다.
독일의 산업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초과이윤을 창출하거나, 은행 의존도를 피하거나, 이를 지연시키게 만드는 광범위한 대외적 투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65년 이전 소련의 산업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치의 정책은 전쟁과 외국의 국부 탈취를 목표로 삼으면서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수시장에 대한 조치들을 통해 이윤을 우선적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일례로, 나치는 공업 부문의 대기업들이 이윤의 대부분을 보존할 수 있게 한 면세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공업 독점체들의 다양한 형태들의 형성과 공고화를 적극적으로 촉진했으며, 규모가 보다 큰 대기업들의 중소규모 기업들에 대한 합병을 방조했다.
물론, 나치의 모든 정책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조치는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한 폭력적인 부정에 있었다. 파시스트 국가 산하의 노동조합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모든 노동조합이 금지된 만큼, 파업 역시 불법화됐다. 모든 노동자들의 저항을, 출신과 계급을 불문하고, 특히 맑스-레닌주의적 성격에서 기인할 경우 일체의 모든 시위를 짓밟기 위한 일환으로서 공개적인 테러가 자행됐다.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 대기업들은 “재정자립”을 달성했다.
사회주의 경제에 복무하는 사회주의적 은행으로서 기능했을 때, 소련 국영은행의 역할들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생산에 종사해도, 수익성이 없는 업종들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며 운영되는 기업소 및 생산 부문들에게서 재원을 재분배하는 데에 있었다. “새로운 경제제도” 하에서 소련의 국영은행은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를 거머쥔 기업들에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재꼈다.
드로기친스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생산과정의 새로운 조건 하에서 일부 기업소들과, 때때로는 정부의 부처들조차 기업소가 그토록 방대한 규모의 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노동할당량에 따라 책정되는 생산발전기금이 합리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문제제기를 매우 빈번하게 던진다.” (경제개혁의 실천, 소련의 경제개혁, 218쪽.) 이는 수익성이 단순히 높다는 말이 아니다. 일부 기업소들과 여러 부문들에서의 수익은 이윤 극대화의 원리로 인해 투자의 기회가 감소될 정도로 매우 높게 나타난다.
물론, 현재의 소련 사회에서 농업의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거나, 무상 공공복지제도의 쇠퇴를 저지함으로써 인민복리에 복무하는 방향으로 기금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예산을 투자하는 것으로는 기업소들의 수익을 어떤 경우에서도 증진시킬 수 없다. “신경제체제”의 논리에 의하면, 그러한 지출은 “비이성”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과잉(기존의 실질 이윤율이나 그보다 많은 율에 따라 투자할 기회와 연관)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압박과, 그에 따른 자본의 해외수출을 향한 압력은 소련의 “새로운” 경제제도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레닌의 ≪제국주의론: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북경, 73쪽을 보라.)
한편, 드로기친스키가 지적하는 것처럼, 적정 기준에 충실하더라도 수익을 충분히 내지 못하는 여타 기업소들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소련 국영은행은 이 경우 기업소들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경제학자 쿨리코프는 앞선 논문에서 “상대적으로 이윤을 내지 못하는 기존 기업소들을 대상으로 한 신용제공상한제”의 존재여부에 주의를 기울인다. 은행전문가 슈르(Shur)는 이윤을 상대적으로 내지 못하는 기업소들이 은행에 이자를 갚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 “재구성”의 의미는 기업소들을 보다 규모가 큰 기업소들과 합병시키는 것을 뜻한다. (≪자본의 구성에 따른 재정적 제문제≫, 파이난시 SSR, 1972년, 제 2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2년 10월, 75쪽에 수록.)
경제학자 페셀(Pessel)은 “선별적 원칙에 따라 부실한 실적을 낸 기업소들과 견실한 실적을 낸 기업소들에게 대금을 빌려주는 특별 절차”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지만, 여전히 결과에 대해 만족스러워 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부실한 실적을 낸 기업소들은 업무 상에서 나타난 결점을 전보다 신속하게 제거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용과 그 발전 추이≫, 에코노미체스키예 나우키, 1972년, 9호. 경제하그이 제문제 1973년 3월호 90쪽에 수록.)
이들 저자들은 경영진의 무능으로 인해 부실하게 관리됐다고 말해질 수 있는 기업소들과, 아무리 잘 굴러간다고 해도 경제적 여건이 평균 수익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업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국가보조금(마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전체 생산량의 3%보다 적은 양이다.)을 지원받는 일부 기업소들의 사례를 제외할 때, 표준보다 낮은 수익을 달성한 기업소들이 “부실한 실적을 낸” 기업소로 규정되기 쉽다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은행신용을 가장 덜 필요로 하며, 이윤을 가장 많이 창출하는 대규모 기업소들이 선별적 원리에 따라 대금을 수취하는 동안, “부실한” 기업소들은 대금을 구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대금을 상환할 때 보다 높은 이자율이 붙는다. 그런즉,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지적했고(39쪽), 레닌 이전에 맑스가 ≪자본론≫에서 논했듯이(≪자본≫ 3권, 439쪽), 소련의 국영은행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은행들처럼 “자본의 집중화 과정을 심화시키고 촉진”하는 데에 복무한다. 소규모 기업으로부터 갈취한 자본을 거대기업에게 바치는 것 ― 이 또한 소련 은행의 철학적 신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