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J. Moufawad-Paul, Continuity and Rupture: Philosophy in the Maoist Terrain, 2016
편집자 서문
이 글은 캐나다 요크 대학의 교수이자 맑스주의 철학자 조슈와 무파와드 폴이 작성한 글이다. 무파와드 폴은 이 글을 통해 맑스주의가 맑스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로, 원칙의 연속과 시대의 변화로 인한 파열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러한 맑스주의의 새로운 파열이자 현대적 지평으로서 맑스-레닌-마오주의를 제시한다.
다만 이 글은 전문 번역이 아닌 요약번역임을 일러둔다.
서문: 마오주의와 철학
1988년 이전에 마오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직관적인 주장으로 저자는 서문을 시작한다. <공산주의의 필연성>에서 저자는 혁명정당의 개념의 ‘새로운 귀환’을 요청한 바 있었는데, 그에 대한 비판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귀환에 대한 비판과 오래된 것의 귀환에 대한 비판을 섞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마오주의는 낡은 맑스주의나, ‘맑스로의 귀환’ 따위가 아니라, 새로운 현대적 지평이다.
혁명적 공산주의 정당을 사고하는데 있어, 동구권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승리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거부 역시 교조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운동주의적 이해나, 제1세계 좌파들의 도그마, 그리고 레닌 이전의 맑스로의 복귀 따위가 그러한데, 이러한 이해는 맑스주의에 과학의 범주를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판을 반박하는데 있어 두 가지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운동주의 유토피아와 당일괴암주의(party monolithism)의 두 가지 정통(orthodox) 사이에 존재하는 이단(heterodox)의 전통에 충실하고 있음을 밝힌다. 두 번째로는 과학성의 범주를 기각하는 것이 역사적 유물론에 특권을 부여할 정당한 이유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마오주의라는 이름의 역사에 대해 제국주의 국가의 주류 좌파들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류 좌파의 담론이 아나키즘, 자율주의, 트로츠키주의, 포스트트로츠키주의이기 때문에, 마오주의는 중국혁명에 대한 모호한 이해와 결부될 뿐이며, 바로 과거의 것으로 격하된다. 시효가 지난 것으로 마오주의가 파악될 때,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 시기 역시 무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1960~80년대에 세계적으로 주류였던 새공산주의운동(New Communist Movement)에 대한 이해에도 빈틈이 존재한다.
새공산주의운동은 “마오주의”가 중소결렬의 맥락 속에서 처음으로 표준으로 격상되었던 시기였다. 이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는데, 캐나다의 노동자공산당과 앙 루테(En Lutte), 영국 혁명적공산주의동맹, 특히 프랑스의 반수정주의 ML운동은 특기할만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필리핀과 인도에서의 운동으로, 이들은 현대 마오주의 운동으로 전화하며 오늘날까지 지속, 발전되었다. 현대 맑스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새공산주의운동은 단지 현대 마오주의의 골격을 제시했을 뿐이다. 현대 마오주의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하던 시점에서도 갓 태어난 상태였을 뿐이다.
마오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앞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마오주의는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논쟁적인 것은, 1980년대 이전에도 자신을 마오주의로 정체화하는 단체나 개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이름과 개념을 구분해볼 수 있다. 이름의 발생과 개념의 발생은 별개다. 가령 현대적 원자론이 존재하기 전인 고대 그리스에도 atom이라는 이름은 존재하고 있었다. 1988년 이전의 ‘마오주의’는 일관성있는 개념적 내용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1980년대 후반 페루 인민전쟁에서 제출된 성명에 대한 분석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이 문건은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맑스주의의 세 번째 단계이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론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식화는 1988년 이전에 일관된 이론적 지형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열의 시점은 1988년이 아니라, 1993년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저자는 뒤에서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다룰 것을 예고한다.
마오주의의 배제
2012년에 저자는 <마오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라는 문건을 쓴 적이 있다. 이는 마오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적 이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토론의 지형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독자들이 트로츠키주의적 경향들에 영향을 받아 오해를 함으로서 허수아비를 때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러한 글을 쓴 동기에는 제1세계 맑스주의자들의 마오주의에 대한 무관심 역시 있다. 마오주의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침묵이다.
이러한 침묵은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로의 저자의 입문 역시 마오주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냉전 담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스탈린을 대량 학살자로, 마오를 스탈린의 메아리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저자는 주변부 국가들의 혁명적 전통과 운동과 조우함으로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트로츠키주의가 마오주의에 대한 무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과, MLM이 인민전쟁에 영향을 주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글을 통해 단순히 트로츠키주의를 넘어 마오주의를 왜 수용해야하는지에 대해 말하는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왜 마오주의가 혁명과학의 ‘새로운 단계’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 뒤에 존재하는 의미들을 정교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마오주의가 1980년대 후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혼란을 불러온다. 저자는 이전의 ‘마오주의들’이 비록 MLM의 맹아였다고는 할 지어도 일반적으로 비과학적인 가설이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일관되기보다는 모호한 주장들이었다. 그리고 1988년과 1993년의 인식론적 단절이 혁명과학의 한 단계로서의 마오주의를 시작시켰다. 명료성을 얻기 위해 맑스-레닌-마오주의에 있어 몇 가지 철학적 개입이 요구될 것이다. 저자의 책을 읽는 이들 중 맑스-레닌주의가 대체될 수 없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적 감각을 가진 이들은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철학적 명료함
<마오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를 둘러싼 논의를 통해 저자는 여전히 맑스-레닌-마오주의에 있어 명료한 철학적 조사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여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과학으로 스스로를 주장한 후에도 일관된 철학을 수십 년간 결여하고 있었고, 루이 알튀세르 같은 철학자들은 철학이 맑스주의 지형 내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어떠한 과학적 패러다임이 발생하면, 이에 대해 철학자들이 인식하는데는 시간이 소요된다.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철학적 정교화는 단지 명료함을 얻고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철학은 새로운 이론적 개념을 주어진 과학적 지형을 위해 만들어낼 수 없다. 수학이나 물리학이 존속하기 위해 철학을 요청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의 발전을 위해서 마오주의 역시 철학을 요하지 않는다. 철학의 유일한 임무는 주어진 것을 정교화하는 것을 통해 명료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철학적 개입이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지형에 있어 극도로 제한적인 활동임을 밝히고 있다. 맑스주의가 살아있는 과학이라면 철학은 실천과 혁명을 통해 생겨나는 개념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연속성과 파열로서의 마오주의
저자는 이후의 논의에서 MLM의 경계를 설정할 뿐만 아니라 이 경계 내에서, 맑스-레닌주의에 의해 그려진 경계와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무엇이 여전히 개념적 지형 내부에서 필요한지에 대한 토론을 그려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하게도 마오주의가 맑스-레닌주의의 연속이라면, 동시에 파열이라는 것을 밝혀내고자 한다. 마오주의는 단순히 맑스-레닌주의에 무언가를 추가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의 논의를 통해 급진적 철학 내부에 실제 세계의 공산주의의 발전에 대한 명료성을 제공하고자 한다.
1. 마오주의로서의 마오주의의 지형
일반적 공리들(General Axioms)
저자는 책에서 이루어질 논의들과 관련이 있는 핵심적인 공리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철학적 개입의 핵심은 이론의 지형을 아래의 공리들을 통해 규명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오주의를 명료화하는 것이지,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이론에 복무하는 것이다.
공리1 : ‘마오주의’라는 이름이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하였기 때문에, 저자는 현대 마오주의에 마오주의로서의 마오주의라는 명칭을 붙인다. 개념 이전에 이름이 존재하는 것은 레닌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레닌의 적들이 레닌주의라는 명칭 사용)
공리2 : 마오주의로서의 마오주의의 탄생은 1988년에 시작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1988년에 페루공산당이 마오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선언한 이후, 1993년 혁명적국제주의운동을 통해 국제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MLM조직들이 현재까지 공유하는 맑스-레닌-마오주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공리3 : 사적 유물론을 과학으로 상정한다. 사적유물론은 혁명과학이지만, 이론의 발전가능성을 폐쇄하는 ‘만학(sciences)의 여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공리4 : 마오이즘이 혁명과학의 세 번째 단계인 이유는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레닌주의의 연속이자 파열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레닌주의에서도 일어났다. 맑스주의의 연속이자 파열로서의 레닌주의.
공리5 : 마오이즘의 필연성은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적 한계에서 도출된다.
‘마오이즘으로서의 마오이즘’
저자는 이 책에서 ‘마오이즘’을 마오이즘으로서의 마오이즘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이제 이 개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1988년과 1993년 이전에 마오이즘이라 불리던 것은 현재의 국제적 마오이즘 운동에 선행하는 것으로, 마오쩌둥 사상(Mao Zedong Thought)이라 불리기도 한다. 당시 마오이즘이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흐루쇼프의 소련 노선에 반대하는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캐나다 공산주의자 동맹(맑스-레닌주의)가 그 사례였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마오이즘은 단지 맑스-레닌주의의 ‘올바른 사고’ 내지는 충실성을 의미할 뿐이었다.
당시 반수정주의 흐름이 생겨나게 된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을 이야기하는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존재했고, 레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신좌파가 존재했다. 새공산주의운동(New Communist Movement)은 두 조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중국혁명에 충실하고 자본주의를 향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한 NCM의 ‘마오주의’에는 이론적으로 명확한 노선을 결여하고 있었다.
마오주의 조직들간에 여러 논쟁이 벌어졌고 차이가 생겨났지만 그 어떤 논의도 마오주의를 일관성있는 독자적인 이론으로 만드는데 불충분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필리핀의 호세 마리아 시손(Jose Maria Sison)과 인도의 차루 마줌다르(Charu Mazumdar)와 같은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이들마저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것을 처음으로 이루어낸 것이 1988년의 페루공산당이었고, 현대의 마오주의 조직들의 대부분이 페루공산당의 업적을 인정한다. 반수정주의 운동 역시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며, NCM은 결국 무너지게 된다.
낡은 ‘마오주의’는 레닌주의를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로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는 비과학적인 것이며 단지 교조적인 이미지만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이 정식화의 첫 번째 문제는 레닌주의의 빈곤화다. 레닌주의의 주목할 이유가 그것이 생산하는 이론화가 아니라, 단지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으로서의 레닌주의에서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가 극복하고자 했던 무의식적 헤겔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레닌 이전에도 제국주의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물론 레닌이 이론화 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전화로서의 제국주의를 다룬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 자체는 레닌 이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레닌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종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에, 만일 레닌이 옳다면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 이상으로 맑스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레닌주의에 대한 이러한 규정대로라면, 혁명 과학은 레닌주의에서 완성되었고 레닌 이후의 이론들은 단지 그에 대한 추가일 뿐이다. 이렇게 된다면 마오주의는 진정한 주의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헤겔 논리학과 유사한 체계를 세움으로서 과학의 최종적 체계화가 이루어지는데, 만약 어떤 과학이 더 이상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사과학일 뿐이다.
교조주의적 사고의 해채를 위해 우리는 모든 과학적 지형에 적용되는 연속성과 파열의 변증법을 이해해야 한다. 레닌주의를 발생시킨 것이 제국주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레닌이 분석한 것처럼 현실사회주의가 제국주의의 의미를 변형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마오주의는 사회주의 시대의 공산주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의는 불충분하다. 먼저 과학을 추상적인 시대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혁명적 과학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데, 계급투쟁의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공리에서 본다면 역사과학의 다음 단계의 가능성은 세계사적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커다란 붓질
1988년 인민전쟁의 최고점에서 페루공산당은 ‘주의’이자, 혁명 과학의 세 번째 단계로서의 마오주의를 선언하였고, 1993년 RIM은 이를 국제적으로 결정화하였다. 이러한 마오주의의 개념화의 중요성 때문에,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 인민전쟁(인도공산당(마오주의)의 전신)과 같은, RIM이 아닌 다른 혁명 조직들도 이 개념을 받아들였다. 마오주의 진영에서 이론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 이 개념화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이전에 존재하던 경계들이다. 이는 책이 두고 있는 포커스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마오주의의 이름과 개념사이의 거리인데, 이 격차를 빠르고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마오주의가 혁명과학의 세 번째 단계가 되었다는 것은 레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적 통찰을 담고있다는 뜻이자, 레닌주의와 동등한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회적 맥락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이제 저자는 혁명과학의 발전 경로를 큰 붓으로 그릴 것이다. 이는 정교화(elaboration)를 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인데, 이미 존재하는 이론을 과도하게 재생산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① 맑스주의
- 보편적 적용가능성 : 자본주의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분석, 역사를 규정하는 계급투쟁, 역사의 주체이자 자본주의를 끝낼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개념들 :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해 설명되는 생산양식 이론, 정치적, 법적, 사회적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경제적 토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기원에 대한 정교한 설명, 역사와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
② 레닌주의
- 보편적 적용가능성 : 혁명정당을 통해서만 가능한 사회주의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가가 부르주아지를 억압하여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것(프롤레타리아 독재), 현재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라는 것.
- 다른 통찰들 : 프롤레타리아 독재=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로의 이행기. 사회주의로의 계급투쟁의 이론화, ‘기회주의’에 대한 이론화, ‘민족문제’의 개념화
③ 마오주의
보편적 적용가능성 :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계급투쟁의 지속(사회주의는 계급사회다), 혁명정당은 반드시 대중정당이 되어야 하며, 대중이 책임을 추궁하면 쇄신해야 한다는 것(군중노선), 혁명의 전략은 봉기가 아니라 인민전쟁이라는 것.
다른 통찰들 : 토대-상부구조 이론에 대한 정교화, 즉 경제적 토대가 최종 심급이지만, 최종심급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알튀세르가 설명한 부분), 따라서 상부구조가 토대를 결정하거나 방해할 수 있다는 것, 주변부 지역에서 신민주주의혁명론의 보편적 적용가능성, 자본주의 시스템에 포위되어있는 지역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 민족문제의 반식민주의적 발전. 이러한 발전은 마리아테기나 파농을 통해 굴절되기는 했지만, 마오주의 인민전쟁의 실천에 의해 근본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다수의 억압받는 민족들을 동원할 것을 주장함.
총론은 혁명적 이론이 계급 혁명, 특히 세계사적 혁명(world-historical revolution)을 통해서만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리코뮌,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혁명적 투쟁은 앞을 향해 열려 있고, 따라서 살아있는 과학으로서의 이론은 다시 세워질 수 있다. 따라서 중국 혁명 이후에도 다른 혁명이 존재할 수 있으며, 마오이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적 운동이 생겨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세계사적 혁명
앞서 다룬 내용은 실패에 관련된, 세계사적 혁명(사미르 아민에게서 빌려온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저자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은 혁명을 개별 사례로 다루는 것으로, 혁명의 실패 역시 개별 사례로 다루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에 대해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앞서 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논증한 바 있지만, 이는 반대되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불충분하다. 마오주의 전통에서는 과학적 궤적에 기반하지 않는 다른 혁명적 가능성에 대해, 세계사적 혁명에 의해 도출된 것들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논증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랍의 봄은 중요성을 지니지만, 혁명정당의 조직화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다른 반혁명 세력들은 조직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실패는 세 가지 세계사적 혁명에서 도출된 조건에 부합한다. 다른 예시로 칠레 아옌데 정권의 실패의 원인을 혁명이 아니라 선거에 의한 것이라는 점과, 부르주아 헌법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건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당시에 중국과 러시아 모두 수정주의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혁명들의 경험에 기반하여 분석을 해야하는가? 이러한 반대 입장 역시도 실패를 생산하였는데 어떻게 그것이 논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적 혁명과, 그 혁명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혁명들을 구분해야 한다. 파리코뮌, 러시아, 중국혁명을 세계사적 혁명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파리코뮌은 최초로 자본주의를 파괴한 혁명이었고, 러시아 혁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고, 그것은 최초로 제국주의 진영의 적의 위치에 올라섰다. 중국혁명은 최초로 비유럽국가로서 유럽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탈식민주의 운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세 가지 혁명의 예시에 필적할 만한 다른 사례는 없다.
여기에 혁명과학의 진리를 생산하는 사건이 있다. 반대로 세계사적이지 않은 혁명은 그것이 인류 전체에게 새로운 보편적 통찰을 주었는가의 여부로 판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은 그 자코뱅적 요소가 산토 도밍고 노예혁명에서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등의 사례를 통해 미루어볼 수 있듯이 세계사적인 부르주아 혁명이다. 반면 노예주들의 반란에 불과한 미국혁명은 어떠한 보편적 통찰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사적 혁명이 아니다.
반증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 혁명은 세계사적 측면을 지님으로서 보편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세계사적 혁명은 네 가지 종류의 실패에 대해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a) 이전의 혁명들에서 마주치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로부터 도출되는 종류의 실패
b) 가장 최근의 세계사적 혁명에서 마주쳤으나 해결되지 못한 종류의 실패
c) 가장 최근의 세계사적 혁명에서 마주쳤으나 해결된 종류의 실패
d) 그보다 더 이전의 세계사적 혁명들에서 해결된 종류의 실패
앞의 두 실패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살아있는 실패’(live failures)이지만, 뒤의 두 실패는 이미 해결된 ‘죽은 실패’(dead failure)다. 죽은 실패의 범주에 포함된 잠재적 혁명들은 이전 혁명단계의 실패와 성공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혁명적 잠재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상이한 여러 종류의 혁명의 실패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1973년 칠레의 실패는 죽은 실패로, 스탈린과 옐친 사이에 존재한 러시아의 살아있는 실패와는 구분된다. 그리고 이 러시아의 실패는 이전에 칠레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구분은 이미 역사에서 한번 마주쳤던 실패들이 오늘날의 모든 반란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실패에 대해 알지 못하면 다시 한번 동일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실패에 대한 인식이 세 가지 세계사적 혁명을 통해 어떻게 발전되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 파리코뮌 : “자본과의 평화공존”이라는 수정주의적 테제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한다. 혁명적 사건들은 반란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맞지 않는 어떤 반란도 분명하게 죽은 실패다. 이 실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맑스와 엥겔스가 파악한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건설하는 것의 실패, 국가를 인수받고 부르주아 기구들을 파괴하고 계급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의 실패.
2. 러시아 혁명 : 앞서 성공에 대해서는 설명한 바 있다. 러시아 혁명의 실패로는 어떻게, 그리고 왜 계급투쟁이 사회주의 기간동안 지속되는지를 인지하는데 실패한 것과, 어떻게 대중노선을 견고히 할 것인가를 인지하는데 실패한 것이 있다.
3. 중국혁명 : 마찬가지로 성공에 대해서는 설명한 바 있다. 오늘날에도 설명되어야 하는 실패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문화혁명을 강화하여 계급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혁명전략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혁명 이래로 모든 반란은 중국혁명이 실패한 지점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이미 파리코뮌과 러시아 혁명에서 이미 해결된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이것이 왜 네 가지 범주의 실패가 우리에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지에 대한 답변이다.
전체적으로 만약 우리가 이 단계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실패와 실패의 조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단계는 당연히 귀납적이므로, 우리는 가능성만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은 혁명의 가능성이 위의 조건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높은 가능성으로 실패할 뿐이다. 더 중요하게도 위의 단계들은 아주 높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추게 된다. 즉, 세 가지 세계사적 사례를 전제하지 않는 설명보다 더 실패의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예를들어 네팔에서의 혁명의 실패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세계사적 혁명의 실패에서 도출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당내의 우파적 노선이 좌파적 노선에 맞서 승리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스탈린주의적’이었거나 ‘레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식의 설명보다 훨씬 더 높은 설명력을 갖춘다.
이처럼 실패를 통해 혁명적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은 칼 포퍼가 역사적 유물론에 부재하다고 여겼던 반증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포퍼가 가정했던 것과 달리 역사적 유물론에서 공산주의의 반증가능성은 절대 과학적으로 시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론은 역사의 운동, 즉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유물론자들은 우리의 이론이 거짓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는 반증가능성을 인정하는 길을 택한다.
파열의 과정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레닌주의가 레닌의 작업의 총합이 아닌 것처럼 마오의 작업의 총합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존 지형 내부에서의 이론적 노동이 어떻게 파열의 계기가 되는가? 이는 레닌주의가 이론적 지형이 된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10월 혁명의 주요 이론가는 레닌이었지만, 혁명이 소급적으로 이론적 작업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러시아 혁명이 없었다면 레닌의 작업은 흥미롭고 유용한 것이었겠지만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계사적 혁명은 이론가에 의한 이론적 작업을 전제하지만, 세계사적 실천은 동시에 레닌의 이론적 실천으로 하여금 현대의 맑스주의자들과의 연속성에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파열을 전제하도록 한다.
비록 10월 혁명이 레닌의 이론적 작업의 근원이라 할지어도, 10월 혁명만으로는 레닌주의의 지형을 찾는데 충분치 않다. 레닌주의의 탄생에 필요한 것은 사건의 의미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meaning)이다. 선언 이후에는 이론적 데이터들을 조직하는 것이 뒤따른다. 이를 이론적 조작화(operation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는 레닌주의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이론적 조작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적 시도에는 이론적 투쟁이 따르기 마련이다. (트로츠키 및 다른 이들) 이러한 고통스러운 이론적 투쟁의 과정은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 만세>를 통해 완수되어지는데, 이 문건에서 레닌주의의 보편적 요소들은 충분하게 요약되어진다.
러시아 혁명이 최초의 맑스주의적 세계사적 혁명이었고, 볼셰비키당이 맑스주의를 조작화하였다고 한다면, 중국혁명은 최초의 맑스-레닌주의적 혁명이었다. 중국공산당과 마오가 레닌주의를 조작화, 이론화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레닌주의의 발생에 대한 평가는 마오주의를 이론적 지형으로서 정당화하는데 핵심적인 통찰이 된다, 이 통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세계사적 혁명은 중요하며 파열적인 이론적 발전의 기점이 된다. 중국혁명은 최초의 세계사적 혁명과 그 실패를 체계화하고, 새로운 실패와 맞닥뜨렸다는 점에서 두 번째 공산주의적 세계사적 혁명이다. 중국혁명에서 생겨난 이론들은 새로운 보편적 통찰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실현되는데에는 여전히 시간과 투쟁이 필요하다.
2. 세계사적 혁명 이면의 이론적 실천에 대한 평가는 이론적 지형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시작한다. 이는 혁명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이론적 통찰들에 기반한다. 중국혁명의 승리에 따라 우리는 마오쩌둥의 이론적 작업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론의 어떤 측면이 보편적인지를 판단하는 어려운 과제에 마주하게 된다. 지형의 초기적 형태가 최초의 명확한 표현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조류들을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수많은 그룹들이 잘못된 제3세계 이론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도 마오쩌둥 사상에 충실한 여러 이론적 조류들이 생겨났다.
3. 새로운 이론적 지형은 평가와 종합, 보편성에 대한 판단을 통해 투쟁이 기존의 지형의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투쟁의 단계를 생산해냈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레닌주의의 경계가 완전히 이해된 것은 혁명이 수정주의로 이행했을 때였고, 기존의 지형을 넘어선 중국혁명이 이론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중국혁명은 레닌주의적 이론적 지형의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의 일부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 한계들은 중국이 수정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새공산주의운동이 쇠락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오주의라 하는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광(曙光, Glimmers)
이러한 논의는 과거의 마오주의자들에게 오늘날의 마오주의의 서광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파열 이전에, 그 존재의 빛은 다양한 혁명적 조직들의 이론과 실천에서 나타났다. 인민전쟁을 수행했던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 필리핀 공산당, 터키공산당 맑스-레닌주의는 맑스-레닌-마오주의에 반영되는 초기적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이들 이외에도 토대가 되는 이론적 개념들을 제공하고 마오주의를 말한 정치경제학자들이 있다. 사미르 아민의 초기 주장이 이 점에서 그러한데, 그는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이 세계사적인 것임을 방어하였고, 맑스주의를 레닌주의와 마오주의라는 ‘이단’을 통해 이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중국혁명을 넘어서는 것이나 반수정주의 운동에 대한 것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우리는 역시 마오주의의 지형에 대한 철학적 개입의 서광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마오주의 철학자들은 미래의 마오주의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것을 발생시키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 알랭 바디우가 그러한데, 마오주의자를 자처했던 바디우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을 철학적으로 발굴하고자 했다.
바디우의 <주체의 이론>은 마오이즘의 보편성의 등장을 예측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내부에서의 계급투쟁과 군중노선이 그것이다. <주체의 이론>은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절단’을 논하면서 연속성이 동시에 파열임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론을 생산하는 혁명적 운동과 분리된 철학적 기획이 단지 미래를 기다리는 통찰로 그치고 만다는 것을 바디우가 후에 저술한 <존재와 사건>이 보여준다. 그 책에서 바디우는 자신의 마오주의적 입장을 포기한다. 또한 바디우는 ‘시대구분’(periodization)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맑스와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마오주의의 파열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마오주의적 개정에 불과하다. 철학자로서 바디우는 결국 당시의 맑스-레닌주의라 불리우는 지형에 대해서만 조사할 수 있었고, 아직 탄생하지 않은 지형에 놓여있을 수 없었다. 바디우의 작업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굴할 수 있는 예측들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아직 도달하지 않은 지형에 누군가를 넣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오주의의 파열을 이해하기 위해, 바디우가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을 빌려오는 것은 유의미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주 ‘사건적 장소’(evental sites)를 논하는데, 이는 주체가 생산되는 장소이며, 모든 사건은 장소를 지닌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바디우가 사용한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사건’을 파열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마오주의적 주체는 마오주의가 맑스-레닌주의로부터 파열하는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생산된다. 그리고 장소는 사건에 의해 소급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사건적’이다. 사건은 ‘진리 생산’의 결과로서 의미의 강제를 필요로 한다. 마오주의의 최초의 사건적 장소는 중국의 세계사적 혁명, 특히 문화대혁명이지만 이것만으로 마오주의 이론을 창출하는데는 충분치 않다. 두 번째 사건적 장소는 페루의 인민전쟁이다. 의미의 강제는 1993년 페루의 인민전쟁이라는 사건에 충실함을 선언한 RIM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디우의 신비로운 언어로부터 벗어나 역사유물론의 공통된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역사적 현상은 소급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역사적 필연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운명’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역사는 그 순간에는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마오주의의 서광을 발견하였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사물은 그 발생 이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어진 역사적 현상의 서광, 예시(豫示)는 그 존재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그 발생 이전에는 자본주의가 탄생한 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바디우는 이에 대해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본주의적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오주의 이전에는 마오주의적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 비록 마오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마오주의적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사건’ 알랭 바디우는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 가운데 하나로, 68혁명 당시 마오주의 좌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다. 다른 제자들(에티엔 발리바르 등)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그렇게 돌아섰지만, 바디우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지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바디우의 특이한 입장은 그의 독특한 진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책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예컨대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 68년 5월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진 사건에의 충실성을 사고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1966년에서 1976년 사이의 프랑스 마오주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바디우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의 68혁명을 진리적 사건이라고 보며, 그 사건들에 대한 충실성(fidélité)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 사건들이 이후 역사 속에서 어떤 실패를 경험했든지 간에 그것들이 당시 정치 상황 내에 어떤 “내재적 단절”을 가져온 한에서 여전히 배반되어선 안 되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기존의 체계 및 그 체계를 다소간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지식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백을 명명하는 ‘사건’으로 발발하며, 그런 사건이 일단 발발하면 그것은 진리과정의 담지자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출처 : 최원, <바디우와 중국의 문화대혁명> |
보편성과 특수성
마오주의가 혁명과학의 세 번째 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맥락에 그것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마오 역시 중국의 맥락에 맞게 맑스주의를 적용했다.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기반하여 혁명 이론의 보편적 측면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10월 혁명이나 파리코뮌과 같은 혁명을 그대로 동일하게 복제하려 하는 것은 교조적이다. 따라서 보편과 특수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마오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중심부 좌파들의 비판을 반박하는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인민전쟁의 경험이 제3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현대 마오주의 이전의 마오쩌둥 사상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던 오랜 비판이다. 이전의 마오주의가 주의가 아니었던 이유 역시 중국의 반식민지반봉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되었던 것이었고,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마오주의를 단지 소련에 반대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마오주의는 제3세계와만 관련이 있고, 중심부에서의 혁명전략은 여전히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맑스나 레닌을 기각하는 논리로도 사용될 수 있다. 현재의 정세는 1917년 러시아나 19세기 중후반의 유럽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후기구조주의자들이나 탈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이론의 유럽적 특수성에 직면했을 때 맑스주의자들은 무엇이라 주장해야하는가? 어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유럽중심주의에 방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맑스주의의 측면들과 창시자들의 지역적 빈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초월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교조적 분석은 마오주의의 보편성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을 불러온다. 유럽이나 그 식민지, 서구의 혁명운동은 왜 제3세계의 혁명을 넘어선 보편성을 지닐 권리를 지니는가? 자본주의 중심부에 살고 있다면, 현재의 정세에서는 인민전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동시에 제3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은 다른 맑스주의자들에게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보편성을 자신들의 맥락에 적용할 권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레닌이 말했던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는 이제 제3세계보다 혁명에 더 적대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제국주의적 초과착취의 이윤을 공유하고 있다.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혁명이 제국주의 중심부에서의 더 중요한 혁명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이론은 이러한 쇼비니즘의 전형이다.
마오주의에 보편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맥락에 이 경험들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험의 보편적 측면들은 구체적인 맥락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연속성과 파열의 과정 역시 내적으로 보편과 특수의 과정이다. 이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회조사를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의 적대가 주어진 사회구성체에서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다른 모순들을 통해 어떻게 분열되고 구성되는지, 어떤 대중이 착취를 경험하고 혁명의 필연성을 이해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마오주의가 보편성을 가진 것은 군중노선과 ‘지역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과 실천이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마오주의를 탄생시킨 역사적 과정은 공산주의의 후퇴에 의해 많은 문제를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마오주의는 지난 몇 십년 동안 다른 경향들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두고 싸워왔다. 한때는 맑스-레닌주의가 이론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적이 있었다. 레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트로츠키주의나, 수정주의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맑스-레닌주의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맑스-레닌주의와 동일한 이론적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저자는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람시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다음의 목적을 위해 ‘상식’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a) ‘선진적 의식’을 지닌 이들은 선동과 조직을 위해서 혁명적 이론을 필요로 한다.
b) 혁명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헤게모니는 자본주의 헤게모니에 맞서기 위해 자라나야만 한다.
c) 대항헤게모니의 과정은 특정한 혁명 이론이 처음으로 ‘선진적’ 의식을 지닌 이들에게 승인됨으로서 가능해진다.
현대 마오주의 조직들이 인민전쟁의 맥락 속에서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지만,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세계적으로 일관된 대항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있지는 못하다. 아나키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심지어는 대안적 마오주의까지 여러 경향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총체성을 지닌 맑스-레닌주의에 대항하여 그 체계에 구멍을 내고자 했던 경향들이다.
맑스주의와 맑스-레닌주의가 보편적 총체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노선투쟁 덕분이다. 맑스와 레닌 모두 노선투쟁을 벌였고, 이 노선투쟁은 레닌에게 있어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산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보편적 적용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 지형은 중국혁명에 의해, 소련 수정주의 앞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가 마주했던 이데올로기적 분열은 현재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 과학적 총체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 철학적 문제다. 요점은, 마오주의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세우고자 했던 장소는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총체성의 한복판이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가정된 실패와 자본주의의 승리는 모든 종류의 이론적 총체성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만들어냈다.
혁명적 궤적의 올바름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질문이 던져진다. 왜 이러한 궤적은 다른 궤적보다 더 올바른가. 왜 헤게모니적 총체성은 다른 궤적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존재해야 하는가. 마오주의자들은 이념의 올바름은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혁명적 이념만이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세계사적 혁명을 통해 증명된 통찰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앞서 저자가 말한대로 이론은 발전을 위해 철학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적 개입의 차원에서, 총체성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는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둘러싼 싸움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문제는 왜 마오주의가 맑스-레닌주의보다 국제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더 오래걸렸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맑스-레닌주의는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사이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철학적 개입들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개입들은 헤게모니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역사적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반혁명이 파괴적으로 일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까지 하게 하였다. 그리고 뒤따른 시기에 바로 이 총체성이 혁명적 사상의 일탈을 낳았다.
두 번째로,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총체성에 맞선 투쟁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이전에 마오주의에 헌신했던 이들의 시도에 대해 주의를 준다. 그러나 마오주의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세계사적 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마오주의자였던 이들은 지금 포스트마오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오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마오주의에 잘못된 이론적 노선이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두 문제는 이후에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마오주의가 혁명과학의 현 단계라면 이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오주의는 개념으로서 발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름과 개념을 구분하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