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성과 파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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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성과 파열(6)

6. 새로운 반수정주의

연속성으로서의 파열과 파열로서의 연속성

앞서 저자는 반수정주의적 과거에 내재한 교조주의의 문제를 논의한 바 있다. 동시에 저자는 수정주의에 대한 전투적인 거부로 인해 반수정주의 시기가 끝날 무렵 등장한 급진적 문제들을 다루는데 실패했음을 짚는다. 혁명의 청산을 목표로 하는 이론적 흐름에 맞서 맑스-레닌주의를 옹호하는데 집착한 공산주의는 파열보다는 연속성의 관점에서 이론적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저자는 반수정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과거 반수정주의의 경험이 갖는 한계에 대해 비판하고 있음을 밝힌다. 무엇보다도 반수정주의는 신좌파 뿐만 아니라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필요했다. 둘째로, 반수정주의 시대의 혁명적 공산주의가 맑스-레닌주의 시대의 반수정주의 이상의 무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산주의의 필연성』에서 저자가 논한 바와 같이, 요점은 맑스-레닌-마오주의에서 이론적, 실천적 방향을 찾는 반수정주의로의 ‘새로운 복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장과 다음 장은 이제 마오주의적이지 않은 반수정주의적 공산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공리에 기반하여 ‘새로운 복귀’의 철학적 자격을 더욱 구체화할 것이다.

반수정주의적이었던 새공산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이러한 부정은 구체적인 사실의 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 기이하다. 전통적인 공산주의 정당들의 수정주의적 위축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는 혁명에 충실함을 선언하는 전투적인 조직들이 급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RU/RCP-USA는 FBI에 의해 주요 안보위협으로 분류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컸으며, 신좌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운동에 포함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변부의 반수정주의 운동이 비록 한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가장 중요한 마오주의 운동들에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최초의 낙살 인민전쟁 조직이자, 오늘날의 CPI(마오주의)의 기초가 되는 차루 마줌다르의 인도공산당(맑스-레닌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주변부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CmPA의 선구자격인 아프가니스탄 반수정주의 운동과, TKP/ML을 창립하고 인민전쟁을 시작한 터키의 공산주의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RIM 성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마오주의를 수용하지 않은 어떤 공산주의도 혁명과학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수정주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주의의 단계를 더함으로써 이 교리를 수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종류의 반수정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달리 말해, 이전의 반수정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맑스-레닌주의의 경계를 수호하는 정치로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마오주의의 개념들로 지형을 수정하는 새로운 반수정주의가 현실화될 수 있을까? 핵심은 파열의 순간이 연속성의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고, 양자를 변증법적 긴장관계의 일부로써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열은 연속성이고, 연속성은 파열이다.

혁명운동의 한복판에서 이론적 파열이 나타날 때, 이는 또한 연속성의 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저자가 분명히 밝혔듯, 맑스주의의 핵심은 계급혁명의 필연성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가 이론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계급투쟁의 도가니 속에 있다. 구체적으로 혁명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실천과의 연속성은 역사적 유물론의 주요 공리와 전혀 연속적이지 않다. 계급혁명은 역사의 원동력이다.

주어진 과학에서의 중요한 이론적 파열을 과학의 일반적인 연속성을 보존하는 파열로 이해해야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맑스-레닌-마오주의가 왜 스스로를 혁명적 공산주의의 현재적 종합으로 보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세계사적 혁명에 의해 파악된 이론적 파열의 연쇄는 이전의 보편적 개념들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연속성의 연쇄이기도 하다.

저자는 연속성과 파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론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연속성을 희생하여 파열을 강조하는 것, 또는 그 반대의 경우는 역사적 유물론의 근본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만약 맑스주의가 정말로 과학이려면, 그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과학이 모든 진실을 해결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과학적인 평가가 아니다. 왜 주어진 과학적 패러다임이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왜 다른 패러다임이 그렇지 않은지에는 이유가 있다. 미래를 향해, 그리고 이론적 파열의 순간을 향해 열려있는 과학은 오직 파열의 의미를 한정하는 과학적 연속성의 개념에 따라서만 열려있다. 동시에 주어진 파열은 연속성의 의미를 밝힌다. 따라서 파열과 연속성 모두 맑스주의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하나에만 집중하고 다른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과학이 그리는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발전에 있어 지속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연속성 없는 파열을 말하는 것은 혁명과학을 발전시킬 수 없는 비과학적이고 모호한 이론이다. 연속성을 희생하여 파열을 강조하는 입장의 논리적 결과는, 혁명적 자격을 판단할 어떠한 연속적인 것도 없기 때문에, 모두 독특한 파열인 혁명적 순간들은 혁명적인 것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파열이 전개되는 과학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과학도 자신이 속한 역사를 절멸하는, 인지적 심연에서 분출되는 무자격적인 파열에 의해 발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열 없는 연속성을 말하는 것 역시 과학이 이론적 파열의 순간을 통해 발전한다는 점에서 동등하게 비과학적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성인들이 말하거나 했던 모든 것들을 보존하는 순수한 연속성을 요구하는 것은 가련한 정통성만을 낳을 뿐이다. 과학은 교조주의를 거부하고, 이단의 순간에 그것이 의존하는 기초를 보존하는 한 과학이다. 스스로에게 반수정주의의 이름표를 붙이더라도, 혁명적 연속성에 강박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교조적 수정주의(dogmato-revisionism)다. 여기서 이전의 혁명가들에 대한 교조적인 충실성은 혁명적 창의성을 약화시킨다.

창의성 역시 중요하지만, 창의성은 역사가 규정한 경계 내에서 발현되어야 한다. 즉, 과학의 제약에 따라 이해되는 창의성이다. 역사적 유물론이 요구하는 이러한 경계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론화하는 것은 창의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창의성은 예술에 속하며, 과학에서는 쓸모가 없다. 잘해봐야 이런 종류의 창조성은 상상력을 자극해서 과학적 사고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정도일 뿐이다. 나쁜 경우 이러한 창조성은 점성술과 같은, 초과학적 추측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반수정주의로의 새로운 복귀는 파열의 순간에 연속성을 포괄해야 한다. 수정주의는 연속성-파열에 대한 자체적인 변증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모든 ‘창의적인’ 수정주의적 발전은 수정주의의 합리적 핵심에 충실성을 선언한다.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 사이의 긴장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순이 다양한 교조주의적이고 절충적인 이론들을 양측에서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의 변증법

혁명과학은 따라서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의 주요 모순에 의해 규정된다. 맑스주의 이론들은 이 주요모순에 영향받는다. ‘마오주의’의 이름을 했던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는 이 모순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수정주의는 혁명운동에 있어 중대한 위험이며, 반수정주의는 운동의 기초를 끊임없이 재정립하는 내재적인 투쟁이다. 여기서 ‘수정’은 맑스주의를 올바른 맑스주의이게 만드는 기초, 즉 계급투쟁론에 대한 수정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계급투쟁이 더 이상 필연적이지 않으며, 계급혁명이 역사의 원동력이 아니며, 사회적 변화가 평화공존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맑스주의의 이론적 지형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지형에 놓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대립물의 통일을 발견한다. 반수정주의 정치를 내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심지어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수정주의의 내재성을 인지해야 한다. 수정주의 없이는 반수정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적 이론은 이 모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인 끊임없는 경계에 의해 발전한다.

마오주의 파열이 생산한 이론은 이 모순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보편적인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는 변증법적 긴장으로써 주목한다. 어떤 이론도 진공 속에서 생산되지 않으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생산된다. 또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이론 생산에 책임이 있는 개인들, 경향들, 조직들, 정당들에 낡은 습관들과 국제적인 수정주의 경향을 강요한다. 계급투쟁은 맑스주의에도 영향을 미치며, 지배계급의 사상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일부 맑스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마오는 종종 당 내부에서 벌어지는 기회주의와 혁명 사이의 ‘노선투쟁’에 대해 말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에는 언제나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 사이의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순의 두 극은 계급투쟁이 과거로 밀려날 때에만 해결될 적대적 투쟁에 갇혀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나타난 수정주의는 결국 자본주의를 부활시켰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물리치기 위한 용감한 투쟁인 문화대혁명을 벌였다. 반대로, 자본주의 중심부의 반수정주의는 수정주의적 경향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두 사례에서 수정주의적이던 반수정주의적이던간에 이론과 실천의 폭발이 일어났다. 두 사례 모두에서 수정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결과가 무엇이던간에 이 역사적 교훈은 분명하다. 부르주아 없이 프롤레타리아가 없듯, 수정주의적 왜곡 없이는 혁명과학이 없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반수정주의의 도전 없이는 수정주의적 합작이 있을 수 없다. 이 모순은 구체적 기반을 결여한 다양한 독단주의적이고 절충적인 이론적 반복, 엄격한 정통과 거친 이단을 만들어낼 것이다. 교조주의와 절충주의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 사이 모순의 특징적인 증상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교조적 절충주의와 절충적 교조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절충주의를 사실로 취급하는 이들과, 일관성없이 모든 정통성을 짜맞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마오주의는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 사이의 모순을 혁명의 중대한 장애물로 이론화했다. 마오주의에 따르면 어떠한 혁명운동에서도 가장 설득력있는 사상은 지배계급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상일 것이다.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타도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사회화되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혁명운동의 ‘두뇌의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타도하려는 사회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으로 무의식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남아있는 이데올로기는 설령 ‘사회주의적’ 형식을 지닌다고 하더라도(즉, ‘능력에 따라’에 기반한 부르주아적 노동분업에 대한 수호)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장애물이 된다,

수정주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으며, 반수정주의는 이러한 경향에 맞서 싸우기 위해 등장한다. 얼마나 급진적인지와 무관하게 모든 주어진 운동에는 항상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잔재를 털어내려는 이들과 이 잔재가 운동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사이의 투쟁이 존재할 것이다. 수정주의와 반수정주의 사이의 투쟁은 계급투쟁의 반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계급투쟁이 사회주의 내부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외부의 압력때문이 아니라고 감히 주장했다. 계급투쟁은 상부구조에 순화되어 있었고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도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끌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남아있었다. 사회주의 단계의 계급투쟁에서 ‘주자파’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본주의는 복원될 수 있었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중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약화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은 그 자체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피할 수 없는 수정주의적 경향에 맞서려는 투쟁은 너무나 작았고 늦었다.

중국혁명의 실패와 성공에 대한 평가에 기반한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이 더 철저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화하였다. 혁명운동의 시작부터, 노선투쟁을 포함한 의식적인 내적 혁명으로서의 문화혁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반수정주의로의 새로운 복귀가 있어야 한다. 수정주의의 가능성이 보편적인 것으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에 종종 덫에 걸리게 될 교조주의로부터 수정주의를 비틀어 떼어낼 수 있는 보다 철저하고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보편적 문제로서의 수정주의

반수정주의로의 새로운 복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수정주의적 공산주의 일반의 중요성에 대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교조적이거나 절충적이었던 실수에도 불구하고 반수정주의적 공산주의는 언제나 맑스의 이론의 합리적 핵심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했다. 따라서 혁명적 경향들이 교조주의적인 막다른 길에 도달하거나 혼란스러운 추측을 생산해내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수정주의에 대한 혁명적 거부는 언제나 중요하며, 저항할 것이라는 수정주의의 주요한 특징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공산주의의 역사가 수정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편적 적용가능성을 지닌다. 혁명과학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정주의 과학 역시 존재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 모두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의회주의가 수정주의라는 것을 인지했다. 공산주의는 이 경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맑스-레닌주의로 갱신되었다. 수정주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평화공존’이 선언되고 세계혁명이 비난받았던 흐루쇼프 시기에 그 진부한 문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러한 선언은 중국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레닌주의 만세』를 집필하게 하였고, 소련과의 ‘대논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평화공존론’은 자본주의적 규칙을 따르는 게임에서만 사회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본 수정주의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에 동의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더 나아가 흐루쇼프와 이전 시기의 수정주의 사이의 논리적 연관관계를 이끌어 낸다면 후자가 이론적 출발점으로서의 전자와 동일한 가정을 취했다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요점은 베른슈타인과 흐루쇼프 사이의 파열의 무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연속성이 혁명노선의 청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와의 단절의 필연성은 평화공존의 가능성과 의회적 수단을 통해 사회혁명을 생산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필요했다. 지배계급은 선거를 통해 압도당한다고 해서 역사적 무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파괴되어야 할 계급권력을 지니고 있다.

근본적인 수정주의는 모든 시기에 재차 발생하며,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에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근본적 통찰은 계급혁명의 필연성이다. 따라서 수정주의는 혁명과학의 기초를 약화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수정주의가 남아있다

수정주의는 계급혁명이 지속되는 모든 시기에 문제로 남아있게 된다. 일종의 규범이 된 지배계급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평화로운 투쟁이 혁명보다 우월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정주의는 특히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기본 이념으로 남아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 조직과 개인들이 선거민주주의의 평화적 수단으로 계급혁명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리고 직업에 얽매인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권리가 결국 전체적인 혁명운동을 추구할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노동운동의 경제주의를 통해서 공산주의 운동에 스며들어왔다. 우리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그어진 경계선들이 영원하며, 그것을 넘는 것은 위험하다고 사회화되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혁명을 말할 때에도 개량주의적인 기회주의적 실천에 초점을 두게 만드는 경향성이 존재한다.

높은 수준의 경제적, 사회적 특권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는 세계 제국주의의 중심부에 더 널리 퍼져있다. 게다가, 앞서 클라크가 지적했듯, 특히 중심부에서의 운동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수정주의 전략을 실천상 옹호하면서도 이론상 혁명적 정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데 많은 것이 들지 않았다.

수정주의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 자세히 증명하는 것은 저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저자는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의 존재와 지속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주의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수정주의가 문제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맑스-레닌-마오주의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어떤 이론적 경향들보다 정치하게 설명하고 있냐는 것이다.

반수정주의적 등장

혁명과학의 한 단계로서의 마오주의는 인민전쟁의 중심에서 발생했다. 이는 마오주의가 공산주의로의 수정주의적인 길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 속에서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페루공산당은 선거를 보이콧하고, 계급혁명의 길에 착수했다. 마오주의는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파열이기도 했지만, 레닌과 마오를 따라 어떠한 평화공존도 거부하는 전통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연속성의 순간이기도 했다. 페루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수정주의적 전략을 거부했다.

군중은 반란을 조직하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당, 지도부, 간부, 그리고 투사들은 절대적인 의무,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군중들의 무질서한 권력을 조직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손에 무기를 든 채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인민들이 총동원될 때까지, 조금씩 군중을 무장시켜야 한다. 이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지구 상 어디에도 착취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위의 진술에서 폭력에 대한 명백한 물신화를 비판할 수 있는데, 이는 이 혁명조직의 타락을 이끌었을 수도 있는 문제다. 저자는 페루공산당이 결국 끝맺게 된 입장이나(수많은 폭력, 숙청, 군중노선의 붕괴를 초래한 비극적 실패) 페루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비판(기껏해야 의심스러운 조직인 진실화해위원회의 비판)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위의 진술이 혁명적 군중이 무장하는 순간 군중노선이 달성되고 착취가 근절된다고 주장함으로써 폭력을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명은 마오주의를 채택하면서 수정주의를 명백히 거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루공산당은 같은 성명에서 이어서 말한다.

혁명적 폭력을 권력의 정복을 위한 보편적 법칙으로 일반화하였고, 투쟁의 주요형태가 무장투쟁이고 조직의 주요형태가 무장투쟁이며,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모든 투쟁들과 조직들이 그것을 준비하는데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마오쩌둥 주석을 근거로 하여, 곤잘로 의장은 우리에게 군중사업에 있어 권력을 위한 투쟁과 재산의 회복(revindication)을 위한 투쟁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가르치며, 권력을 위한 투쟁이 군중의 최우선적인 요구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군중들이 기존의 법질서가 허용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여 낡은 질서를 유지하지 않고 파괴하도록 하기 위해 군중을 조직하라. 이는 혁명의 세 가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달성된다. 소수가 모이는 당, 더 많은 참여자들이 모이는 [혁명/인민]군대, 그리고 비약적으로 군중을 점진적으로 축적하는 기반인 새로운 국가/전선이 그것이다. (...) 이러한 방식으로 수정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빈농들의 투쟁을 유도하고 도시의 군중들이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전환하는 선거 전선의 전통은 파괴되었다.

따라서 마오주의는 이론화되던 순간부터 혁명과학의 새로운 단계로, 수정주의적 실천에 대한 거부로 이해되었다. 페루공산당을 따라, 혁명적국제주의운동은 개량주의 전략보다 실제로 혁명을 일으키는 전략을 우선시하는 반수정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고, 이에 이어 네팔공산당(마오주의)와 인도공산당(마오주의)와 같은 조직들이 인민전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핵심은 마오주의를 혁명의 필연성으로 복귀하고, 과거의 세계사적 혁명에 연속성을 선언하는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계급혁명이 목표라는 것에 동의하고, 따라서 개량주의의 수정주의적 관행에 공개적으로 기반을 두지 않는 여러 맑스주의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나 혁명의 필연성이 예측 가능한 미래의 지평선 너머로 밀려나 환상으로 바뀔 때 종종 이론과 실천 사이의 틈이 생겨난다. 많은 조직들은 “모든 것이 올바를 때 혁명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혁명을 추구할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는 동안 이 조직들은 개량주의적 전략에 참여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수정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혁명적 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자본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전략이라면, 이는 이 전략이 맑스주의 좌파들에 의해 과소 이론화되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혁명운동의 과정에서 이론화되었기 때문에, 마오주의는 적극적으로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경향들보다 혁명을 만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수정주의적 실천을 거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스스로를 마오주의로 명명하는 조직들을 위한 이론적인 척도가 존재한다. 만약 이들이 적극적으로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특정한 맥락에 기반한 방법을 전략화하지 않는다면, 개념상 마오주의라는 이름이 논리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잘해봐야 이들은 반제국주의자들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마오주의가 요구하는 필요성을 해결하기를 거부한다.

반수정주의적 수정

공산주의 과학의 혁명적 핵심과의 연속성에 대한 필연성은 파열의 순간을 설명한다. 맑스주의의 교조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경향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혁명과학의 이전의 한계들로부터의 인식론적 단절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의 혁명적 핵심에 대해 충실성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이전 시대의 먼지를 쓸어내고, 혁명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신선한 방식으로 다시 강조하는 새로운 단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계급투쟁을 통해, 공산주의 과학의 혁명적인 수정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동시에 반수정주의이기도 하다. 한 수준에서의 수정은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의 반수정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과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은 한때 뉴턴의 패러다임이 지배했던 지형을 수정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반수정주의적 물리학에 충실함을 선언했다. 왜냐하면 뉴턴의 세계관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있어 진퇴양난이 존재했고, 정신적이거나 신비화된 범주에 따라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모든 시도는 살아있는 과학의 핵심 원리를 버린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수정주의를 보여주는 시도였다. 아인슈타인 패러다임에 의해 생산된 파열은 뉴턴 패러다임의 경계에서 생산된 문제들로부터 물리학의 근본을 지켜냈다. 이는 과거의 지형을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는 한편, 과학의 기초를 지켜냈다.

살아있는 과학의 전개에서 파열의 순간은 동시에 연속이다. 때로 과학의 핵심 원리에 충실하기 위해서 파열이 필요하다. 한 차원의 이론은 재구성되고 수정되며, 모든 독단주의는 포기된다. 만약 주어진 과학 안에서 일련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면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과학의 궤적을 버리고 핵심 전제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특정한 과학적 패러다임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이론적 지형에서 핵심 전제들을 재가동하는 것이다.

동시에 파열의 순간은 과학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발전하는 과학은 수정주의를 피하기 위해 이 과학의 핵심논리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것을 다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이 충족되지 못하면, 수정주의가 따라온다. 따라서 만약 아인슈타인 패러다임 내에서 문제를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뉴턴 패러다임의 오류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과학과 불연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파열의 문제틀은 혁명과학에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론적 파열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능할 때, 계급투쟁의 우선성이라는 과학의 기초에 충실성을 선언하기 위해 필요하다. 레닌주의는 당대 맑스주의의 파열이었는데, 처음에는 이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맑스와 엥겔스의 작업에서 그들의 수정주의의 선례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이들보다 맑스주의의 기초에 더 일치하는 것이었다. 파열은 과학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파열에 의해 생성되는 개방을 추구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과학의 핵심원칙과의 연속성을 달성하는것의 실패를 초래할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한 이론적 파열로 혁명과학이 갱신된 이후에는, 반레닌주의자가 되는 것은 반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혁명의 경험이 평가된 오늘날, 반마오주의자가 되는 것은 수정주의와 다름없는 것이다.

셋째로, 파열의 이름으로 자신을 숨기는 이들의 모든 수정주의적 순간들은 그들이 대표하지 못하는 바로 그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마치 비유럽 세계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결함있는 통찰이 그들의 방법론의 논리에 따라 비판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매우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철학적인 추측 그 이상이다. 오늘날 마오주의 운동 중 일부는 마오주의 파열에 대한 거부로 인해 비틀거리고 있으며,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는 동시에 혁명적 연속성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마오주의로 스스로를 감춘, 실패한 인민전쟁은 마오주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마오주의를 추구하는 것의 실패는 과학의 핵심원칙들과 연속성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것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네팔의 마오주의 운동의 실패는 비극적으로 수많은 수정주의자들을 기쁘게 했다. 이 실패는 마오주의자라고 스스로 이름붙였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마오주의를 추구하고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인가? 마오주의는 제국주의와의 협력은 있을 수 없고 공산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없으며, 당내의 노선투쟁이 평화공존을 위해 혁명을 거부하는 기회주의 정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네팔에서의 인민전쟁의 실패는 따라서 마오주의를 추구하는데 실패한 것이었고, 수정주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마오주의는 그 이름을 채택한 이들의 실패 역시 설명할 수 있다. 마오주의는 수정주의의 용어를 설명해주며, 역사적 평가를 포기한 이들은 혁명적 연속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회주의를 넘어서 사고하기

당연히, 수정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초좌파’라는 이름 아래에서 수정주의자들에게 무시될 수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있어 주요한 죄악이 기회주의가 아닌, ‘유아적인 초좌익주의’에 있다고 믿는데, 이는 레닌의 초좌익주의 분석에 대한 선별적인 독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수정주의적 실천에 대한 비판, 즉 혁명정치의 전투적 실천을 생산해내는 모든 종류의 공개적 요구를 두고 좌파를 위협하는 초좌익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더 만연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모험주의, 군중을 위험에 빠뜨리는 실천, 무정부주의가 맑스주의 좌익의 가장 중요한 장애물로 간주된다.

비록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이 기회주의를 혁명적인 함정 속에 감추려는 현대수정주의자들의 성경이 되었지만, 레닌조차도 ‘초좌익주의’를 기회주의의 죄 탓으로 돌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레닌은 초좌익주의를 사회주의가 직면한 주요한 문제가 아니라, 수정주의/기회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응적 증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은 ‘초좌익주의’가 아니라 초좌익주의를 생산하는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의 실천이다.

혁명적 실천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들보다 왼쪽에 있는 혁명적 실천에 대해 ‘초좌파’의 딱지를 붙인다. 수정주의적 노선이 혁명적인 노선으로 잘못 인식되면, 이 노선의 왼쪽에 있는 어떤 것도 초좌파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마오주의의 중요성은 개량주의적 실천을 거부하는 동시에 공개적으로 혁명을 말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일반적인 수정주의적 불안에 의해 증폭된다. 성공적인 전투적 선동의 모든 순간은 초좌익적인 것으로 치부될 것이고, 실패의 모든 순간은 마오주의의 한계에 대한 증거로 사용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속성의 순간이기도 한 파열의 순간을 발견한다. 혁명적 실천의 결여로 발전해 온 낡은 실천과 과거의 문건들을 인용하는 교조주의적 방법과의 단절이자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연속성.

혁명적 연속성에 대한 충실성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특정 국면에서의 이론적 파열이 필요하다. 전 세계의 마오주의 정당들에 의해 통일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혁명의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다른 맑스주의 경향들의 혁명적 실천의 비활동적인 상태에서 파열하는 방식으로 마오주의를 살아있는 선택지로 만든다. 전투적 공산주의를 추구하려는 모든 시도가 초좌파적인 것으로 비난받는 상황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파열이다. 이러한 비난은 주류적인 맑스주의가 스스로를 기회주의로 더 이상 인식할 수 없는 기회주의에 갇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회주의는 레닌과 다른 과거의 혁명가들을 인용하고, 이전의 맑스주의 패러다임의 경계에 의존함으로써 올바른 실천으로 옹호된다.

마오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맑스주의에 잠입한 기회주의를 넘어 사고하도록 도전시킨다. 마오주의는 맑스주의의 핵심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도전은 자본주의의 소위 ‘역사의 종말’에 의해 그려진 한계에 의해 조건화된 맑스주의 전통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심지어 스스로를 마오주의자라고 정의할 많은 이들도 이 도전에서 위축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 마오주의자들은 그들이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이론에 의해 책임을 추궁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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