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쟁 - 유일한 해방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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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쟁 - 유일한 해방의 길

"원문 : Volkskrieg - Der einzige Weg zu Bereiung

 본문은 독일의 마오주의 언론인 Klassenstandpunkt에 게재된 문건 Volkskrieg - Der einzige Weg zu Bereiung을 번역한 것으로, 인민전쟁 전략의 보편성과 타당성을 논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특수한 군사적 표현을 수반할 것이며, 구체적이고 새로운 전쟁 방식을 탄생시킬 것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본 문건은 재건될 독일 공산당이 갖춰야 할 올바른 군사 노선에 관한 기고이다. 본 문건은 먼저 작금의 논쟁을 촉발한 <공산주의 건설(Kommunistischer Aufbau)>의 문건을 살펴본 다음, 이어서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전통과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 혁명의 군사적 노선 문제에 관한 몇 가지 측면을 대략적으로, 그리고 개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공산주의 건설”의 비판에 관하여

 “공산주의 건설”의 동지들은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1917-2017: 100년간의 혁명전략”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해당 문건은 “봉기, 도시 게릴라, 인민전쟁 - 또는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공산주의 건설>은 “레닌주의적 공산당의 건설”을 “작금의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과의 실질적인 논쟁이 독일 공산당 재건을 위한 투쟁 과정에 있어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인민전쟁에서의 게릴라 전쟁의 역할

 해당 문건의 인민전쟁에 관한 차례는 “인도공산당(마오주의)의 도시 관점”이라는 문건의 독일어 번역 출판사들이 붙인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해당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장기 인민전쟁은 한 편으로는 사회분석, 혁명기획, 그리고 정치-군사적 전략으로 구성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유격전, 기동전, 정규전으로 구성된다. 인민전쟁의 전략적 목표는 장기적인 투쟁을 통해 혁명을 확장하여 결과적으로 대도시 중심부를 포위하는 거점 지역을 건설하는 것이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곤잘로 의장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이는 <공산주의 건설> 또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과업은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유일한 지도적 이념인 맑스-레닌-마오주의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도입하는 것이다. 이 과업 속에서 비마오주의적 문건이 대표적으로 인용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직 얼마나 많은 정치적 작업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준다. 또한 <공산주의 건설>은 다음의 주장을 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개발한 '장기 인민전쟁'은 혁명을 위한 전략이다. 인민전쟁의 핵심적 요소는 군사력이지만, 일부 부르주아 저술가들의 주장처럼 인민전쟁을 단순한 게릴라전 전략으로 축소할 수는 없다. 인민전쟁은 군사적으로 게릴라전에 의존하지만 군사 외의 모든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전개됩니다.

게릴라전은 마오쩌둥의 발명품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게릴라전은 18세기 후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맞선 스페인 전쟁에서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의 독창적 요소는 게릴라의 발명이 아닌, 게릴라전에 대한 완전한 파악과 발전을 통해 처음으로 게릴라전의 잠재력을 완전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은 도서지역의 게릴라전을 기반으로 한다. 인민전쟁에서 게릴라전의 전략적 목표는 언제나 거점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위의 서술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부르주아 저술가들이 인민 전쟁의 전략을 게릴라전으로 축소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게릴라전의 역할과 거점지역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사 이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권력장악에 있어 거점지역의 역할을 불충분하게 이해했다.

또한 <공산주의 건설>은 인민 전쟁에서 게릴라전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게릴라전은 인민 전쟁에서 전략적 성격을 지닌다. 즉, 게릴라전은 군의 건설과 기동 및 정규전으로의 발전의 기반이 되는 토대이다. 인민전쟁 이전의 게릴라전은 정규전 내에서 기동전과 진지전을 보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이후 부분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인민전쟁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잘못 정의하고 있다:

“전쟁은 국가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맑스가 그의 저서 <프랑스 내전>에서 말했듯이 프롤레타리아는 낡은 국가를 인수할 수 없으며, 그것을 부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표현은 맑스-레닌-마오주의가 맑스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모든 혁명가들이 <프랑스 내전>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공산당 선언의 1872년 서문 또한 이 문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레닌이 <멀리서 보내는 편지>에서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국가와 혁명에서는> 더 이상 해당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산주의 건설>은 이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산, 하천, 원시림 등 지리적으로 적절한 외딴 지역을 먼저 정복한 후 적에게 영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을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첫째로, 인민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토가 아닌 대중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할 것이다. 전쟁의 기본 원칙은 아군을 보존하고 적군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혁명 세력이 한 지역에 머물러 있다가 포위되어 파괴되는 방식으로는 결코 아군을 보존할 수 없다. 특정한 영토에 안주하는 것은 주도권과 전술적 유연성을 적에게 넘겨주고 아군이 수동적 위치로 전락하는 사태를 조장할 뿐이다. 성공한 것은 정반대의 전력이다. 적이 거점 지역에 대한 종심 공격을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려 하면, 적의 병력이 모이는 동안에 개별 부대를 포위하고 주도권을 쥔 채 섬멸해야만 한다. <공산주의 건설>은 인민전쟁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아군의 병력을 집중시켜 적군을 하나씩 섬멸해야 한다는 원칙은 적의 유효 전력을 섬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공간을 점령하거나 정복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거나 아군의 주력 부대가 적의 집중 공격을 피하고 추가 전투를 위한 휴식과 집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특정 장소를 포기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 적의 유효 전력을 대규모로 전멸시킬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새로운 영토를 점령할 수 있다. 따라서 적의 유효 전력을 파괴하는데 성공한 모든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한다.”[1]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군사노선

<공산주의 건설>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군사전략이자 혁명전략으로서의 인민전쟁은 민족부르주아의 지도력 아래 수많은 반식민지 및 반제국주의 전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인민전쟁은 신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 문화 혁명을 위한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군사 이론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지 않으면 인민전쟁이 아니다. 민족부르주아는 인민전쟁을 이끌 수 없다. 부르주아는 특정한 상황에서 인민전쟁 전략에 포함된 특정 측면을 적용할 수는 있지만 인민전쟁을 주도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가 인민전쟁의 일부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 군사 이론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한 편, 다양한 마오주의 운동과 정당들은 인민전쟁을 ‘마을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붉은 권력’의 기지를 건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에 ‘측면 전투공간’으로서 다소 광범위한 보조 기능을 부여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순전히 합법적인 정치적 지원활동부터 인민전쟁의 병참 지원, 지역 민병대와 연계한 마오주의 도시 게릴라의 요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곤잘로 의장의 지도 하에 공산당이 행한 전술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단락은 페루 공산당의 대중노선과 군사노선, 그리고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허위진술이다. 이들은 페루 공산당 노선의 실질적 적용에 관해 서술된 다양한 문건에 대해 무지하며, 무엇보다도 페루 인민전쟁에 있어서 도시의 역할을 보완적인 것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 단락은 맑스레닌마오주의와, 그 반대 개념인 포코 이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들은 실질적 맥락을 수사학적 함정으로 대체했다. “보조 기능”이라는 표현은 도시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수사학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해당 판단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공산주의 건설>이 이 문건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제공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보여지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인민전쟁을 포코 이론의 도시 게릴라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문제적인 혼동이다. 더 나아가, <공산주의 건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모든 마오주의 운동은 궁극적으로 도시의 점령이라는 전략적 과제에 직면한다. 따라서 네팔의 마오주의당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년에 걸쳐 벌어진 인민전쟁에서 수도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 후, 전략균형 단계를 전략공세 단계로 전환하여 도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실패했다. 해당 실패는 곧 마오주의 게릴라 지도자 프라찬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새로 건립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의 총리가 되는 배신으로 이어졌다.”

첫 문장은 모호하다. 당연히 도서 지역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는 피억압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비록 도시에서도 사업을 벌였을지언정 결국은 도시를 점령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이고 이론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는 없다. 이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과 곤잘로 의장에 의해 근본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맑스-레닌-마오주의와 곤잘로 사상의 원칙을 구체적인 현실의 구체적인 조건에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네팔 동지들의 문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닌, 당의 수정주의 지도부가 노동자 계급과 민중을 배신했다는 차원의 문제이다. 이들은 구 국가와의 평화 협상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다당 경쟁”을 도입했고 적대 세력을 신권력 내에 통합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들이 인도를 통한 미제국주의의 임박한 개입 앞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를 마오주의자로 위장하고 있던 수정주의자들의 본질이 밝혀지는 과정의 하이라이트였다. ‘프라찬다주의’의 가면은 벗겨졌으며, 이들은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변장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이다. 또한 수정주의는 단순히 맑스-레닌-마오주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수정주의는 우리 내부의 부르주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수정주의는 공산주의자 역시 부르주아 사회에서 형성된 주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피억압 국가에서는 봉건 사회)를 자신들 내부에 지니고 있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착취적 사회 내부에 살고 있으며, 부르주아 사회를 먼저 파괴하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자아를 계급과 인민보다 우위에 두고 수정주의자가 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으며 앞으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가 수정주의의 발흥에 맞서 무자비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수정주의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다.

네팔의 상황은 일시적인 패배이자 우리의 앞길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굴곡일 뿐이다. 우리는 네팔의 동지들이 지금까지의 경험과 영웅적 기백,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이는 단지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네팔에서 인민전쟁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지난 11월 선거 기간 동안 네팔 전역에서 폭발물을 이용한 행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민전쟁의 보편성

 더 나아가, <공산주의 건설>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 문제에 대한 이론의 부족은 혁명전략의 측면에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벌어진 중국 국공내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보여진 역사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 마오쩌둥은 게릴라를 정규 홍군으로 전환하여 매우 고전적인 재래식 전쟁을 벌이고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1948년-49년 간의 기간에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상대였던 국민당이 정치적, 도덕적으로 완전히 붕괴되면서 잘 익은 과일처럼 ‘도시’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 문단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인민전쟁이 중국의 매우 희귀한 ‘역사적 특수성’ 하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민전쟁의 보편성을 공격한다. 이들은 마치 중국에서의 인민전쟁이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매우 터무니 없는 서술을 이어간다.

 “잘 익은 열매”에 대한 서술과 마오쩌둥이 ‘매우 고전적인 방식으로 재래식 전쟁을 벌였다’며 마치 부르주아 군사 노선을 사용했다는 듯이 주장하는 암묵적인 서술은 계급투쟁에서 피를 흘린 중국 인민의 위업에 대한 비방이며, 마오쩌둥이 발전시킨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이다.

 다음 문단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자신들이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다:

 “세계혁명 이론에 대한 문제, 즉 세계적 규모에서 ‘도시’를 점령하고 제국주의 중심부를 점령하는 주요 과업에 대한 방법론은 아직 공백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마오주의 혁명 이론의 결정적인 약점이다!”

 <공산주의 건설>은 또다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마오주의 혁명 이론이 제국주의 중심부에서 적용될 수 없다는 이들의 주장은 우익 기회주의자 린뱌오로부터 기인한다. 맑스-레닌-마오주의와 곤잘로 사상이 아직 제국주의 국가의 구체적인 조건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책임이 아닌 각국 공산주의자들의 책임이다. 이론은 실천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으며, 실천을 통해 개발되지 않은 이론은 관념론에 불과하다. 따라서 관념론자만이 마오쩌둥과 곤잘로가 마오주의 혁명이론을 제국주의 국가의 구체적인 조건에 적용시키지 않았노라고 비난할 수 있다. <공산주의 건설>은 인민전쟁의 보편성에 반대되는 논거를 제시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마오쩌둥을 인용하여,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대신하여 말하게 하기로 했다:

 “그것(인민전쟁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마오쩌둥 자신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는 거점 지역의 출현과 존재의 원인이 중국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1928년 당시 작성된 마오쩌둥의 문건에 대한 긴 인용문이 제시되는데, 해당 인용에서 마오쩌둥은 홍군의 영역점유가 다른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중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1928년은 중국에서 최초의 국공전쟁이 시작된 해이다. 이는 항일전쟁과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다. 1928년은 혁명이 승리하기 21년 전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도 마오쩌둥은 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으며 맑스-레닌-마오주의는 관념론이 아니다. 따라서 혁명적 실천을 아직 거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혁명에 관한 문제를 이론으로 종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가 혁명적 실천을 완수하기 전에 인민전쟁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햐하면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이며, 이론이 실천을 통해 발전하고 실천은 이론을 통해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며 다시금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전쟁 이론이 그렇듯이, 그 어떤 이론도 실천과 분리된 채로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공산주의 건설> 친구들은 스스로의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관념론의 관점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덧붙이자면, 우리는 마오 주석의 저작에서도 해당 서술에 대한 2차 세계대전 중의 경험이 반영된 정정 사항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과의 유격전에 있어서 전략의 문제”라는 문서가 예시가 될 수 있다. 마오쩌둥 선집 제2권의 제6장 제3절에서는 “[…] 벨기에와 같은 작은 국가는 이러한 조건이 부족하여 그러한 가능성이 없거나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쓰여진 영어판의 8번째 각주는 “즉, 영토가 크지 않은 나라에서도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고 쓰여져 있다.

 이후, <공산주의 건설>은 다시금 국제노선으로 주제를 변경한다.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전략에 대한 질문에 있어, 이 대답은 세계 ‘농촌’을 통해 세계 ‘도시’를 둘러싸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전망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국가들에서 볼 수 있다. 이들 국가가 ‘몰락’해야만 제국주의 중심지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으며, 초과 이윤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매수할 가능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레닌-마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서술이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그의 저작인 “모순론”에서 내부모순이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관념론적 세계관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은 사물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사물을 사물의 내부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사물의 발전은 사물의 내부적이고 필수적인 자기운동으로 파악해야 하며, 그 운동의 각 측면은 주변의 사물과 상호 관련되어 상호작용을 한다. 사물의 발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이는 곧 사물의 내부 모순이다. 모든 사물에는 내부모순이 존재하며, 사물은 이에 따라 운동하고 발전한다. 사물 내부의 모순은 사물이 발전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다른 사물과의 상호 관계와 상호작용은 부차적인 원인이다.”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국제노선은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 간의 모순을 현재 세계적 차원에서의 주요 모순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각 국가의 내부 모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외부 조건을 구성한다. 이러한 모순이 심화될수록 피억압 국가의 인민들은 점점 더 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피억압 국가의 공산당들은 맑스-레닌-마오주의에 기초하여 이러한 반란들을 주도하고 가능한 한 빨리 모든 곳에서 인민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제국주의 국가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원인은 피억압 국가에 대한 자본 수출과 약탈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피억압 국가에서의 인민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의 프로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 피억압 국가에서의 인민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에서의 인민전쟁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산주의자들이 D-Day가 찾아올 때까지 수동적인 ‘국제연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 하나, 단 하나의 국제주의만이 진정한 국제주의이다. 그것은 바로 자국의 혁명운동과 혁명투쟁의 발전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일하고 모든 나라에서 예외없이 이 투쟁, 이 노선, 이 전선만을 지지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기만이다 […]”[2]

 인민전쟁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인민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인민전쟁의 시작을 위해 봉사하고, 인민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모든 것이 인민전쟁의 발전을 위해 봉사한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맑스-레닌-마오주의자들은 유태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듯 피억압 국가에서 인민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맑스-레닌-마오주의자들은 세계 혁명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항상 최우선에 두고 자국의 인민전쟁의 관점에서 혁명적 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일국에서의 인민전쟁

 “이러한 혁명 전략에 따라 억압받는 국가들이 해방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심스럽지만, 세계 규모의 사회주의가 출현할 수는 없다. 제국주의가 단순히 도서지역이 중심부를 포위하는 것을 한가로이 지켜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국주의가 중심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제국주의는 필요하다면 ‘도서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인류 역사는 제국주의가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든 심각한 궁지에 몰리면 파괴적 옵션을 선택하는 데 잠시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유엔 총회장에서 핵전쟁으로 북한 인민을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미 제국주의의 노골적 위협은 이를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맑스-레닌-마오주의가 일방적으로 피억압 국가에서만 인민전쟁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공산주의 건설>은 사회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전세계적으로 권력을 얻을 수도 없다. <공산주의 건설>의 동지들은 닫힌 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같은 논리로 제국주의자들의 우월한 무기고를 고려할 때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친구들은 난색을 표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역사가 다른 것을 보여줬다고, 사회주의는 해외에서 군사적으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실패한게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복고와 반복고의 문제를 순전히 군사적인 문제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고와 반복고 사이의 투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투쟁에 임한다면 해당 투쟁은 군사적, 그리고 외부적 요인에 지배받게 된다. 대무산계급문화대혁명 당시, 마오 주석의 영도 하에 이루어진 중국 인민들의 실천은 그 반대 예시를 확고하게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반대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렸듯이 <공산주의 건설>의 주장 또한 틀린 것이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 사이의 모순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제국주의는 여전히 모순의 지배적인 측면이지만, 제국주의의 힘은 반식민지적 약탈에 의존하며 이러한 약탈 없이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는 민족적 억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분명히 제국주의의 군사력은 경제력을 담보하지만, 그 경제력의 기반은 군사력에 있다. 제국주의가 인민전쟁으로 반식민지를 빼앗기면 제국주의는 약화된다. 또한 군사적 측면만을 분리하여 고려하더라도 <공산주의 건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역사는 제국주의자들이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잔인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그들의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베트남, 체첸,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이라크, 시리아, 말리의 최근 역사는 그들이 국민을 영구적으로 “조용하고 질서 있게”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오히려 그들은 연속적인 패배를 겪었다..

 혹자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핵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며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부채질한다. 하지만 이는 제국주의가 반식민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제국주의자들의 목표는 반식민지의 파괴가 아닌 이용에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사용하고자 하는 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제국주의는 “근거지를 파괴”하는 전술을 기껏해야 본보기 정도로 삼아 산발적으로 사용하지만 이는 전략적 목표와 모순되기 때문에 포괄적인 전술로는 사용될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순,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 사이의 모순을 첨예하게하는 데 원자탄 사용이 갖는 의미에 대해 무지하다. 반식민지를 파괴하려는 목적에 따라 원자탄을 사용한다면 원자탄이 배치된 국가와 지역에서의 전투는 더욱 어려워진다. 일본에 대항하여 원자탄이 사용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원자탄이 타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자탄 사용으로 인한 모순의 첨예화는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우 큰 문제가 되었다. 생화학 무기의 사용조차도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응우옌반렘 폭격 사진은 전세계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은 9살 소녀의 사진이 공개되기도 전에 시위대가 미국 방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 후 미제국주의의 베트남 전쟁은 도덕적 패배를 넘어 전체적 패배를 겪게 되었다. 결국 마오쩌둥 주석의 말이 옳았다:

 “원자폭탄은 미국 반동들이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사용하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원자폭탄은 매우 끔찍해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원자폭탄은 대량학살병기이지만 전쟁의 결과는 한두 가지 새로운 무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 진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오해와, 지난 수십년 동안 부르주아 언론들이 ‘과잉 살육’을 운운하며 만들어낸 히스테리가 <공산주의 건설>의 입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경고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혁명을 가로막으며, 평화이행과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흐루쇼프 수정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 건설>의 동지들은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논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렸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밖에 없다. 혁명가의 태도는 언제나 “감히” 투쟁하고 “감히” 승리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 간의 모순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는 혁명이론으로 둔갑한 변형된 형태의 ‘백인의 짐’으로 귀결될 것이다. 제국주의와 피억압 국가 간의 형이상학적 이해에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쇼비니즘이라는 혁명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깔려 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피억압 민족이 스스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 중심부에서 백인 메시아를 희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건설>이 이 잘못된 사고를 포기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포코 이론[3]이냐 마오주의냐

 우리는 포코 이론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포코 이론의 전략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포코 이론에 따라 싸운 수많은 혁명가들이 우리 계급과 세계 민중의 가장 훌륭한 자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포코 이론과 이에 상응하는 모험주의는 대중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며 프롤레타리아의 대의가 아닌 소부르주아의 군사 노선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건설>의 포코 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포코 이론과 인민전쟁 간의 혼동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도시 게릴라는 혁명적 민중지도자와 지역적 반란전통을 바탕으로 체게바라의 삶과 투쟁, 마오주의 인민전쟁으로 대표되는 포코 이론의 요소를 결합한다. 군사적 측면에서, 도시 게릴라 국면에서는 장기 인민전쟁의 파르타진들이 도시로 이식된다. 정치적 측면에서, 대중과 분리된 혁명적 중핵(포코)의 결정적 행위가 ‘온 들판을 태우는’ 불씨를 지피고 모든 전략의 중심이 된다.”

 가장 먼저, 포코 이론은 이론일 뿐 체게바라의 전략이 아니다. 또한 대중과 분리된 소부르주아 혁명가들에 의한 무장투쟁이 마치 인민전쟁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매우 무지한 태도이다. 일부 도시 게릴라 그룹들은 수사적으로 인민전쟁을 언급했지만, 공산당이 주도하지 않는 군대는 결코 인민전쟁을 이끌 수 없다.

 “우리의 원칙은 당이 총을 지도해야 하며, 총이 당을 지도하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민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공산당 없이 어떻게 인민전쟁을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인민전쟁의 핵심은 철저히 인민대중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수에게 의존하는 포코 이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원칙이다. <공산주의 건설>은 처음에는 도시 게릴라 개념이 제국주의 국가에 인민전쟁을 적용하려는 시도라는 주장에 대해 부르주아 작가들의 음해라고 주장했지만, 다음 문단에서 이들은 다시금 인민전쟁을 게릴라 전쟁으로 환원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도시 게릴라는 포괄적인 혁명 전략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유격전)을 제국주의 중심부로 옮길 뿐이었다. 그들은 내전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정복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대중의 정복과 조직화에 대해 무정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론인 포코 이론으로 잘못 대답하거나 아예 대답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건설>이 맑스와 레닌으로부터 기원하는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군중노선을 무시하는 것은 매우 유감적인 일이다. 군중노선은 마오쩌둥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고 곤잘로 의장이 ‘당 단결의 기초’ 문건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공산주의 건설>이 군중노선에 대해 알아 보았다면, 그들은 ‘대중의 정복과 조직화’에 대한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군중노선에 대한 비판적인 통찰을 우리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공산주의 건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터키의 DHKP-C는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많이 거론되고 있으며 제국주의 중심부, 특히 유럽의 일부 신흥 그룹과 서클도 지향하는 도시 게릴라 이론의 대표자들이다.”

 분명 <공산주의 건설>은 도시 게릴라 개념을 포코 이론과 인민 전쟁의 제국주의 중심부에 대한 혼합적 적용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면서, 이번에는 도시 게릴라 전술이 반식민지반봉건 국가에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공산주의 건설>이 터키를 반식민지반봉건 국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해당 토론에서, 우리는 얼마 전 MKP 제3차 대회를 비판한 ‘파르티잔’의 기사를 번역하였다. 이 문제의 핵심은 제국주의가 사회 발전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맑스주의의 제국주의에 대한 원칙이 올바른지의 여부이다. 우리는 이것이 제국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건설>의 잘못된 관점에 의한 증세라고 생각하며, <공산주의 건설>의 관점이 스테판 엥겔의 MLPD와 다를 바 없다고 확신한다.

물론 실수를 비판하는 것은 옳으며 우리의 경험은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포코 이론 지지자들(수정주의의 논리를 갖춘)에 대한 투쟁이 상당히 적대적인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했고(예를 들어 MRTA의 경우) 이러한 투쟁이 포코 이론 지지자들의 파멸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포코 이론을 따르던 많은 동지들과 일부 대중들이 상당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에 대한 열망과 필요성을 표현하는 그들의 행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영원한 영웅 서사시에 흡수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결코 이 동지들을 적에게 팔아넘길 수 없다. 

<공산주의 건설>의 청사진에 대하여

 본문 말미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몇 가지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주관적 인식이라는 약점으로 인해 객관적인 사회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한다. 반혁명이 이토록 강력하고 그 지배 방식이 끊임없이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변증법적으로 공산주의와 혁명 운동의 과제가 이론적, 실천적 약점, 즉 제국주의 중심부에 대한 혁명적 전략의 부재를 극복하는 정치적 투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당 섹션의 제목은 실천이 이론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지만, 오히려 위의 문단은 이론이 실천에 뒤처지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공산주의 건설>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완전히 불분명하다. 이들은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윽고, <공산주의 건설>은 원래의 주제인 인민전쟁으로 돌아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난을 겪고 있는 모든 마오주의 정당은 ‘성장 차단’이라는 전략적 딜레마에 대처해야만 한다. 인민전쟁은 농민 대중의 유격전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힘을 축적하며 적의 힘을 전술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전략이다. 이 모든 것은 ‘생존하여 성장한다’는 전략적 규정을 따른다. 하지만 유격대가 전략적 주도권을 잃고 전쟁 전체가 전략적 교착 상태에 빠져 어느 쪽도 가까운 미래에 이길 수 없는 ‘참호전’으로 전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제국주의 군대가 손실 및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한 수십년도 넘게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은 인민 전쟁의 첫 번째 전략적 함정이다.”

 첫째, 싸우지 않는 마오주의 정당은 없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마오주의자가 아니라 ‘자칭’ 마오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민 전쟁은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혹은 노농동맹에 기초한 혁명군중의 독재를 통해 공산당이 실현시킬,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지도력 하의 신민주주의 혁명권력)가 권력을 정복하고 방어하기 위한 군사 이론이다.

 셋째, 인민 전쟁에서 혁명군은 적의 살아있는 권력을 파괴하고, 적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장소에서 혁명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건설하여 구 권력을 소멸시킨다. ‘생존하여 성장한다’는 요약은 파괴와 건설의 변증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전쟁의 기본 원칙은 적을 파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군을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에 있다. 아군의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적의 병력을 파괴해야 한다. 하지만 적을 파괴하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곤잘로 의장은 우리에게 언제나 최고의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대가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도부는 모든 종류의 계획에 있어 이러한 모순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열등성에서 벗어나 주체의 힘을 키우고 새로운 힘을 건설해야만 한다. (새로운 권력의) 건설과 (낡은 국가에 대한) 파괴 간의 모순에서 주된 측면은 건설이다. 따라서 인민 전쟁의 핵심은 신권력의 건설이다. 이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한다면 객관적인 조건은 언제나 인민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인민 전쟁은 무적이다.

 이 전략은 필요하다면 수십년도 넘게 싸워나가 궁극적 승리를 위해 우월한 적에 대비되는 열등성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장기’ 인민전쟁이다. 일반적으로 ‘장기’라는 단어는 ‘인민 전쟁’이라는 단어에 주어지는 대표적 술어라는 점을 <공산주의 건설>은 확실히 놓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인민 전쟁의 장기적인 성격이 대부분의 문건에서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유감은, <공산주의 건설>이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해답을 다루는 대신, 이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해버렸다는 것이다. 다음 부분에서, 이들은 맑스-레닌-마오주의의 대안으로서 다른 긍정적 참조 대상을 제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호자주의’ 전통에 있는 정당들은 공산당의 핵심부위로서 단계론의 수렁에 빠져있지 않으며 도시 게릴라와 함께 지상 게릴라를 건설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MLKP 터키/쿠르디스탄은 자당의 민병대와 수년간 전략적 동맹을 맺어온 쿠르드 해방 운동과 함께 군사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로자바에서 시작했지만, 2016년부터는 HBDH(할클라린 비를레식 데브림 하레케티, 터키연합민족혁명운동)와도 협력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도시 게릴라 운동의 지평에서 <공산주의 날개>를 주목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은 도시 게릴라의 군사 전략을 대중 투쟁 및 노동자 운동과 연결하려는 시도의 가장 잘 알려진 예일 것이다.”

 <공산주의 건설>의 믿음은 상당히 흥미롭다. PKK와 MLKP의 동맹은 과연 어느 쪽이 이끌고 있는가? 더 강한 PKK인가, 더 약한 MLKP인가, 그도 아니라면 로자바를 자신들의 군사 캠프로 바꾸고 시리아민주군을 지상군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키 제국주의인가? 우리가 볼 때 이들의 ‘전략적 동맹’이란 곧 당의 전면적 해산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우익 청산주의이다. 우리는 도무지 이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으며, 공산당이 어떻게 두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책임을 이토록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공산당은 한 나라 국민의 당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당이다. 이 사실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문건인 공산당 선언에서 매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형식상으로는 우선 일국적이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먼저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지를 쓸어 버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여 민족적 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며 스스로 민족으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록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스스로 또한 민족적이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은 또한 ‘분트’ 문제를 처리해야만 했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에서 분트는 유태인 프롤레타리아를 소비에트 혁명을 위해 동원하는 임무를 볼셰비키당에 맡기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유태인 프롤레타리아의 유일한 대표임을 주장했다. 즉, 분트는 자신들을 지역적 경계가 없는 정당으로 규정했고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스탈린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분트는 분리주의로 향하고 있다. 또한 실제로 이들에게 분리주의 외의 다른 길은 없다. ‘영역없는 조직’이라는 성격 자체가 분트를 분리주의로 이끌고 있다. 분트는 자신들의 명확한 활동 영역을 규정하지 않고 ‘외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반면, 인접한 폴란드와 러시아의 사회민주당은 국제적인 영역의 집단체이다. 즉, 이러한 집단기구의 모든 확장은 분트에게 ‘손실’과 행동영역의 제한을 의미한다.”

 레닌은 분트의 분리주의 열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슬로건(러시아에서 모든 부르주아 유태 민족주의 정당들이 옹호하는)은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주의와 모순된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어느 민족에 대한 억압에도, 어느 민족에 대한 특권에도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정치적 의미에서 민족 자결권, 즉 국가 탈퇴의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국가 내의 모든 민족에게 무조건적인 평등과 모든 소수 민족의 권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를 요구한다. 우리는 지역들에 대한 광범위한 자치와 자율성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에 관련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 모든 요구는 사회주의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일관적인 민주주의자에게 의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일반민주주의적 요구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모든 가능한 표현과 싸우며, 그것이 조잡하든 세련되든 상환하지 않는다. ‘민족적-문화적 자율성’은 바로 이러한 유형의 표현으로, 한 민족 내의 프롤레타리아를 해당 민족의 부르주아와 결합시키고 다른 민족의 프롤레타리아와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항상 국제주의적 관점을 견지해왔으며 지금도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는 농노 소유주와 경찰 국가에 맞서 모든 민족의 평등을 보호하면서도 ‘민족 문화’가 아니라 각 민족 문화의 일부만을 포함하는 민족 간 문화, 즉 각 민족 문화의 일관적으로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내용만을 지지한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지주, 부르주아 또는 소부르주아 ‘문화’가 지배적인 반면, ‘민족문화적 자율’이라는 슬로건은 민족의 문화적 통일이라는 유령으로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슬로건 중 하나인 민족 문화에 반대한다. 우리는 완전히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아의 국제 문화를 지지한다.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 간의 단결, 모든 민족 간의 완전한 평등과 가장 일관적으로 민주적인 국가 체제,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며 국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슬로건이다. 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민족적’ 단결이라는 거짓 환상과 망상을 만들어내지 않는 반면, ‘민족문화적 자율’이라는 슬로건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노동대중에게 주입시킨다.”

 오늘날 MLKP를 움직이고 있는 분리주의적 야망은 100년 전 분트의 야망과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터키 국가에 맞선 민주 혁명을 위해 터키 내 쿠르드족을 동원하는 대신  자신들이 쿠르드족만의 정당임을 선언하며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붉은 여단이 제국주의 국가에서 혁명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해당 측면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언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이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주장을 이어나간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파르티잔이 수행한 역할과 25년간의 내전 끝에 1949년에 얻어낸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엄청난 일이었다. 약자가 우세한 상대를 이기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규군의 뛰어난 화력과 선진적인 현대 전쟁 기술에 의존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전쟁 방식은 겉으로나마 마오쩌둥의 장기화된 인민전쟁이라는 혁명적 전략에 의해 무시된 것처럼 보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공산주의 건설>이 장기화된 인민 전쟁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인 인민들이 적을 파괴하는 현상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들은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실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공산주의 건설>은 여기서도 결함을 드러낸다. 이들이 부르주아 군대와 그들의 세련된 기술력에 감탄하고, 기술적 우월성의 무의미함을 ‘겉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며 궁극적으로는 군사주의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총이 아니라 대중이다. 대중을 동원하는데 성공하면 총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이어서, <공산주의 건설>은 정치와 전쟁의 새로운 변증법을 발견한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수단과 자원이 전쟁의 군사적 목표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총체적인 전쟁이다. 이는 혁명세력과의 전쟁 뿐만이 아니라 경쟁 국가와의 제국주의 내부투쟁에도 적용된다.”

 아쉽게도, 이는 전혀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1832년,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정치와 전쟁의 변증법은 최소 200년 전부터 계급의 적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물론, ‘혁명적 세력’은 이에 관해 더욱 잘 알고 있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정치이고 전쟁 행위는 정치적 행위이며, 고대부터 정치적 성격이 없는 전쟁은 없어왔다. … 그러나 전쟁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으며 그렇기에 전쟁을 일반적인 정치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정치가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진행할 수 없는 특정 단계로 나아가게 되면 전쟁이 발발하여 장애물을 쓸어버린다. …. 장애물이 제거되면 정치적 목표가 달성되고 전쟁이 종결된다. 그러나 장애물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으면 전쟁은 목표를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며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결론에 관하여

 문건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더욱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은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열려있다. 사회적 모순은 경직된 단계들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우리는 결코 이들의 역사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 미래는 필연적이며, 전혀 열려있지 않다.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

필연적인 역사가 존재하듯이 맑스-레닌-마오주의라는 필연적인 진리도 존재하며,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원칙들은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발전된 세 번째 이데올로기인 마오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혁명의 필연성을 충분히 다루지 않아 위와 같은 오류가 운동사회 내에서 발생하게 한 것은 우리의 분명한 실수이다. 이후의 단락에서, <공산주의 건설>은 더욱 노골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나 ‘볼셰비키 당사’, 코뮌테른의 ‘봉기 교과서(Lehrbuch der KI zum Aufstand)’, 마오의 군사적 저술이나 개별 인민전쟁의 경험들을 오늘날에 적용해야 하는 구체적 ‘요리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10월 혁명과 맑스-레닌주의 일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혁명 전략이 통일된 예술적 종합이라는, 부르주아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 진리이다. 우리는 정치권력 창출의 방법론을 개별 단계와 분리된 영역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글에서 혁명 전략의 몇 가지 기본적 특성들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준에서 논의했다. 실천 지향적인 동지들은 이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독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선대 혁명가들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한 책들은 우리에게 몇 가지 전략적 도구만을 제공할 뿐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보여주었듯, 오늘날의 상황에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방법론은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한다. 우리의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표어를 통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정치란 우리가 일생 동안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전쟁을 수행할 것임을 의미한다.”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레닌이 1905년에 제시한 “변증법적 표어”를 <공산주의 건설>의 주장에 대한 답변으로서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맑스, 레닌, 마오 주석 등을 비롯한 거장들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구체적 실천 속에서 발전시킨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원칙들에 대해 ‘요리법’이라는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뻔뻔한 언행이다. 공산주의자가 해야 할 일들은 이념적 원칙을 구체적인 실천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을 실천에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공산주의 건설>은 도대체 무엇을 할 계획이란 말인가? 이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예술적 종합’으로 지칭하고, 이를 형이상학적 진리로 추상화 하면서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들은 외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문건 전체가 “실천 지향적인 동지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다. 이들의 비판에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 실천을 목표로 하지 않는 비판은 행동 지침이 아니라 지적 속임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천에 관한 마지막 두 단락에서의 언급은 실질적 내용을 지니는 진술이 아닌 알리바이에 불과하며 이들이 제시한 “표어”는 그 스스로를 풍자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 건설>은 자신들의 태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레닌은 이미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이 이론과 실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제시한 바 있다:

"혁명이론 없는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기회주의의 설교가 실천 활동의 가장 협소한 형태에 대한 심취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첫 번째로 우리 당은 형성 과정에 있을 뿐이고 그 특징들은 지금 규정되고 있는 중이다. 이 때문에 우리 운동을 올바른 길에서 이탈시키려는 다른 경향들과 정치투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아직 우리의 임무로 남아있다....두 번째로 사회주의운동은 그 본성상 국제적 운동이다. 국수주의를 배격해야할 뿐 아니라 운동의 초기 단계에 있는 나이 어린 운동은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활용해야만 자신의 임무를 달성할 수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경험들을 비판적으로 소화하여 독자적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시키고 시험하는 것이다. … 세 번째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다. … 가장 선진적 이론으로 인도되는 당에 의해서만 전위 투사들의 임무는 달성될 수 있다. … 끊임없이 이 점을 기억해야한다: 사회주의는 과학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연구되기를 요구한다." 

2. 혁명전쟁에 관하여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쟁의 법칙은 전쟁을 지휘하는 누구든 반드시 연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혁명전쟁의 법칙 역시 혁명전쟁을 지휘하는 누구든 반드시 연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 그 어떤 주제든 간에 그것의 실제 상황, 그것의 본질,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없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알 수 없으며, 잘 해낼 수도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의 일반적인 법칙과 혁명전쟁의 구체적인 법칙을 모두 연구해야 하며, 제국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전쟁, 더 정확히는 제국주의 독일연방공화국에서의 혁명전쟁의 특수성까지도 검토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때 모순의 이론에 따라 금지되는 것은, 교조적으로 복사한 틀을 그대로 적용해 우리나라의 구체적 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그렇게 하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

우리는 마르크스 이래 모든 공산주의자들처럼 혁명전쟁의 전능함을 지지한다:

“무력은 새 사회를 잉태한 낡은 사회의 산파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역시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 표현을 갖게 될 것이며, 이는 특정하고 새로운 전쟁 방식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페루의 공산주의자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os Mariátegui)가 말한 바에 동의한다:

“혁명이 폭력, 권위, 규율을 요구한다면, 나는 폭력, 권위, 규율을 지지한다. 나는 그 모든 공포를 비겁한 유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우리는 마오 주석의 전쟁 일반 법칙에 대한 발언을 인용하고자 하며, 정치와 비판의 관계에 대해 앞서 인용한 「지구전론」의 구절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 이미 읽은 것으로 전제한다:

“전쟁은 계급, 민족, 국가 또는 정치 집단 사이의 모순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최고 형태의 투쟁이며, 이는 사유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후로 언제나 존재해왔다.”

“계급사회에서 혁명과 혁명전쟁은 필연적이다. 혁명전쟁 없이는 사회 발전 도상의 그 어떤 비약도 이룰 수 없고, 반동적 지배계급을 타도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인민이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혁명전쟁은 적의 독을 제거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의 더러움까지 정화해주는 해독제이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혁명의 중심 과제이자 최고 형태이다. 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 원칙은 중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또한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을 위해 혁명적 폭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했다:

“노동자 계급은 해방되기 위한 권리를 전쟁터에서 쟁취해야 한다.” 

실천을 통한 군사이론의 발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군사이론의 정립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정세와 봉기의 과정을 분석했고, 당대의 최고의 방법론을 수용하여 발전시켰다. 이들이 수용한 방법론은 바로 도시 내 봉기였고, 정확히 말하자면 바리케이드 전투였다. 도시 내에서 봉기가 일어나면 거리마다 전투가 벌어진다. 예를 들어 1871년 파리코뮌에서 그랬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기의 주요 무장투쟁 형태는 바리케이드 전투였다. 그러나 군사 이론의 발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48~1850』 서문에서, 생애 마지막 해인 1895년에 “옛 방식의 봉기”는 절망적으로 시대에 뒤처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무장투쟁 자체를 포기하기보다는, 변화된 조건 속에서 새로운 투쟁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 역시 과거의 관점이 환상이었음을 역사에 의해 증명당했다. 역사는 단지 우리의 오류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싸워야 할 조건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848년의 투쟁 방식은 오늘날 모든 관점에서 구식이며, 이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히 검토될 가치가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거리에서의 전투가 더 이상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단지 1848년 이래로 도시 내전에 불리한 조건이 훨씬 더 증가했고, 야전에는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거리 전투는 이러한 불리함을 다른 요인으로 상쇄할 수 있을 때에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며,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와 달리 정치적 운동이 더 진행된 시점에서 더 큰 세력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극적인 바리케이드 전술보다는, 1870년 9월 4일과 10월 31일 프랑스 대혁명 당시처럼 공개적인 공격을 지향해야만 한다.” 

반면, 그 시기에도 수정주의자들은 필연적인 군사 이론의 적용이나 발전을 방해하려 했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무장투쟁을 의회주의적 헛짓거리로 대체하려 했고, 예를 들어 위에서 인용한 엥겔스의 주장도 베를린 당 집행부의 "소심한 우려" 때문에 초기에 검열되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군사이론 발전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두 가지 핵심 기여를 했다:

레닌의 첫 번째 핵심적 기여는 전투 부문에 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독립적인 군사 행동

2. 대중의 지도

전투조는 2~3명의 소규모로 시작해 어떤 규모로든 구성될 수 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스스로 무장해야 하며(소총, 권총, 폭탄, 칼, 너클, 곤봉, 등유에 적신 걸레(방화용), 밧줄이나 로프 사다리, 바리케이드 구축용 삽, 피로크실린 탄약, 철조망, 말(기병대)을 막기 위한 못 등) 절대로 외부, 상부, 혹은 다른 출처의 지원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전투조는 서로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나 일정한 시간에 자주 만나던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봉기로 인해 정기적 모임이 중단될 수 있으므로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다). 전투조는 가장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라도 함께 모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조는 공동행동을 위한 방법과 수단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창문에 특정 표시를 해 서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고, 군중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사전 합의된 신호나 휘파람 등을 정해두며, 야간 집결 시를 위한 신호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두세 명의 동료와 함께 이런 규칙과 방법들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것들은 사전에 작성, 학습, 훈련되어야 한다. 높은 확률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그 조건은 매우 혹독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기가 없더라도, 전투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 대중을 지도

2. 기회가 닿을 때마다 경찰이나 흩어진 코사크 병력(모스크바에서와 같이)을 공격하고 그들의 무기를 탈취

3. 주변에 경찰이 적을 때 체포되거나 부상당한 동지를 구출

4. 지붕이나 건물 고층에 올라가 군대에게 돌을 던지거나 끓는 물을 붓기

충분한 결의만 있다면, 잘 조직되고 긴밀히 연결된 전투조는 막대한 힘을 발휘한다. 무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조의 결성을 포기하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전투조 구성원들에게 사전에 임무를 할당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조장이나 지휘자를 선정할 수도 있다. 물론 이는 계급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며, 통일된 지휘와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의 중요성을 위한 것이다. 성공의 4분의 3은 결단력과 추진력이 담당한다.

전투조가 구성되는 즉시, 즉 지금 바로, 그들은 이론적인 작업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작업에도 착수해야 한다.

이론적 작업이란 군사학을 공부하고, 군사 문제에 대한 지식을 쌓고, 군사 주제에 대한 강연회와 토론회를 조직하고, 장교·하사관·군 복무 경험이 있는 노동자 등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거리 전투에 관한 불법 소책자와 신문 기사를 읽고, 토론하고, 소화하는 일이다.

실천적 작업은 지금 즉시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준비 작업과 실제 군사 작전으로 나뉜다.

준비 작업에는 모든 형태의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는 것, 거리 전투에 유리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위에서 공격하기 좋은 장소, 폭탄이나 돌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 경찰에게 산성 액체를 투척할 수 있는 공간, 본부로 쓸 수 있는 공간, 정보 수집처, 도피자 은신처, 병원 용도 공간 등)이 포함된다.

또한 준비 활동에는 정찰과 정보 수집이 포함되며, 예컨대 감옥, 경찰서, 정부청사 등의 도면 확보, 관공서나 은행의 업무 일정과 경비 상태 파악, 경찰·법원·우체국·전신국·은행·교도소 등의 내부 협조자 확보, 무기고 위치와 도시 내 모든 총포상 조사 등이 있다. 이 같은 작업은 방대한 양이며, 더 중요한 것은 전투에 직접 나설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예컨대 체력적으로 약한 사람, 여성, 청소년, 노인들까지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봉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설령 무장이 안 되어 있고 전투 능력이 없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전투조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지금 즉시 흡수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혁명군 조직은 결코 준비 작업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빨리 군사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군사 행동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실전을 통한 전투력의 함양

2. 적의 약점에 대한 정찰

3. 적에 대한 부분적 타격

4. 체포된 동지에 대한 구출

5. 무기의 탈취

6. 봉기자금의 확보

전투조는 지금 당장부터 적극적인 활동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총봉기"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실전 속에서 훈련하지 않고서는 결코 봉기에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닌의 두 번째 핵심적 기여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에 관한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정한 인민 민병대, 즉 첫째로 남녀 모든 성인 시민들로 구성되며, 둘째로 인민 군대의 기능과 경찰의 기능, 공공질서와 공공행정의 최고 및 기초 기관의 기능을 결합한 민병대”

“여성이 공직에, 민병대에, 정치 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성이 집과 부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성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며, 사회주의는 물론 민주주의조차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

코민테른은 이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특히 파르티잔 전쟁 과정에서 발전의 단초가 존재했었지만 말이다. 이를 넘어선 발전은 마오 주석의 지도 아래 중국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좌파 내에는 중국 혁명에 대해 종종 인종차별적이고 사회제국주의적이며 쇼비니즘적인 태도가 존재한다. 이는 대체로 마치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이 단순한 농민 전쟁일 뿐이고,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일이므로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중국 혁명에 관하여: 북부의 군벌(봉건 영주)들과 싸우고 민족적 통일을 건설하려는 투쟁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무장봉기 이론을 실천에 옮기려 했고, 상하이에서 세 차례, 광저우에서 한 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네 차례의 봉기는 모두 진압되었다. 따라서 실천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 조건에서는 이 이론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는 비록 당대 중국의 대도시들에 노동자 계급이 존재했음에도 그러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지도부를 장악한 후 소비에트연방 및 공산당과의 동맹을 종결시켰다. 그의 지도 하에 파시즘 체제가 수립되었고, 대도시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1927년 가을 추수철 이후, 중국에서 유격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도시를 중심지로 설정했지만, 마오쩌둥은 광부들과 함께 농민들에게 다가가 농촌으로 갔고, 그곳에서 노동자 운동과 농민 운동 간의 연결을 만들어냈다. 마오 주석은 당시 공산당 중앙의 공식 승인된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해당 지역에서는 실질적 지도자였다.

혁명전략의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 공산당은 도시에서는 패배하고, 농촌에서는 승리했다. 그 결과, 중앙위원회는 농촌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이 농촌 근거지를 분쇄하려 했다. 이를 위해 포위섬멸작전 형태의 공격을 감행했다. 허나 남부 근거지에 대한 네 차례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 시기 코민테른은 중국에 고문관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다시금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 전략을 강조하며 유격전을 과소평가했다. 이번엔 농촌 근거지에서조차 그랬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국의 동지 28명을 소련에서 교육시켰다. 이들이 바로 '28인의 볼셰비키'다. 이들은 당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그 이후 다섯 번째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당중앙이 마오쩌둥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0만 명의 공산주의자, 전투원, 민중이 옌안으로 향하는 장정을 시작해야 했다. 이들은 12,000km를 행군하면서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

이후 제국주의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북중국을 점령하고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1936년,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은 통일전선을 제안했고, 장제스는 자신 소속 장군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위협을 받은 후 이 제안에 서명하게 되었다.

혁명 세력은 주력 부대인 제8로군과 유격부대인 신사군으로 나뉘었다. 공산당은 통일전선을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시도에 맞서 싸우는 작업도 주도하였다. 일본이 1945년에 패전한 이후, 공산당은 국민민주정부 수립 제안을 내놓고 국민당에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과 관료자본의 꼭두각시였던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1949년, 혁명적 중국 민중은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규모 자원병을 파병했다. 미국과 그 하수인들은, 중국군에 맞서기 위해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났다. 또한 1962년 인도와의 국경 전쟁이 있었는데, 이는 네루 정권에 의해 유발되었으며, 이후 소련과의 국경에서도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소련은 사회제국주의 국가였다.

전쟁의 형태는 다양했다. 소규모 전투(예: 창사 지역), 중규모 및 대규모 전역(예: 랴오선 전역), 초대도시에서의 전투(예: 베이징-톈진 전역), 정글, 산악, 평지에서의 전투, 봉기(예: 난창 봉기), 유격전, 기동전 및 진지전(예: 화이하이 전역), 현대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적과의 전쟁(예: 한국전쟁), 국내 반동세력(군벌, 국민당)과의 전쟁, 제국주의의 침략(예: 미국과 일본의 침략)까지—즉, 현대전의 거의 모든 상상 가능한 형태가 중국 혁명의 경험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사실들을 아는 것은, 어째서 혁명전략의 발전이 중국에서 일어났는지, 발전이 어떤 조건과 어떤 기반 위에서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페루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민전쟁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사 이론이다. 인민전쟁 전략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역사적으로 벌여온 투쟁, 군사 행동, 해방 전쟁의 이론적·실천적 경험과, 특히 중국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인민 무장투쟁의 오랜 경험이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완전한 형태로 요약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마오 주석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군사이론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혼란과 오해가 존재한다. 그 문제 중 대부분은 중국에서의 인민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의 인민전쟁은 단순한 유격전으로 격하되거나 중요성이 간과되고는 한다. 중국의 인민전쟁에 대한 간과는 곧 중국혁명의 실질적 내용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다. 물론 마오 주석은 유격전이 전략적 특징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격전의 본질적인 유동성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기동성과 기동전, 진지전으로 발전하며, 전략적 공세의 거대한 계획을 전개하고, 수백만 인구의 소·중·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봉기를 결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 혁명의 네 시기—특히 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민해방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항일전쟁을 포함한—은 20년 넘게 수많은 인구와 대중의 광범위한 동원과 참여 속에서 벌어진 혁명전쟁의 다양한 양상과 복합성을 보여준다. 그 전쟁 안에는 모든 형태의 사례들이 존재하며, 그 핵심적인 부분은 탁월하게 연구되었고, 그 원칙들, 법칙들, 전략, 전술, 규칙 등이 뛰어나게 정립되었다. 따라서, 바로 이 위대한 실천의 경험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세운 토대 위에서 마오 주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사 이론인 ‘인민전쟁’을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후 마오 주석 자신이 원자폭탄과 미사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중국이 이미 그것들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인민전쟁을 새로운 조건—즉, 원자무기 하에서의 전쟁, 강대국 및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수행하기 위한 형태로 지속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인민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의 무기이며, 핵전쟁에 맞서기 위한 무기이다.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는 인민전쟁의 보편적 타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각기 다른 유형의 혁명과 각 혁명의 구체적 조건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다. 이 중대한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페트로그라드의 봉기, 반파시스트 저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파르티잔 투쟁들의 경험과, 현재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장투쟁들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10월 혁명은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수년간 지속된 혁명전쟁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의 혁명은 오직 혁명전쟁으로만 사유될 수 있으며, 오늘날 그것은 곧 인민전쟁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우리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혁명전쟁의 전능함을 믿는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이다.” 이는 곧 인민전쟁의 무적성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적용에 관하여

 우리는 인민전쟁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인민전쟁 전략의 구체화란 군사 노선에 대한 접근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재건될 공산당은 해당 작업을 주도해야만 한다. 군사 노선은 인민전쟁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작동하는 법칙이다. 이 노선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1. 인민전쟁 — 우리의 구체적인 경우에는 통일된 인민전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 권력은 도시에서만 구축될 것이며, 농촌에서는 작전 거점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2. 혁명적 무장세력의 건설 — 우리가 건설할 파르티잔 병력은 단순한 도시 게릴라와 달리 인민 민병대와의 통합을 통해 무장한 대중의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3. 전략과 전술 — 우리의 전략은 적의 포위 및 섬멸 작전과, 그것에 대응하는 우리의 포위 및 섬멸에 대한 반공격전으로 표현되며, 이는 정치 및 군사 계획의 적용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계획은 정치 전략과 군사 전략을 포함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일련의 전역으로 실현된다.

인민전쟁은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민전쟁의 ‘보편성’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인민전쟁의 핵심, 본질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페루 공산당은 인민전쟁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정리했다:

1)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주의가 인민전쟁의 지도 사상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며, 우리는 따라서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와 곤살로 사상을 기초로 삼는다.

2) 인민전쟁은 페루공산당에 의해 지도된다.

3) 페루에서의 인민전쟁은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방식의 농민전쟁으로 구체화된다.

4) 거점지역과 신권력을 건설한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를 독일연방공화국의 현실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1. 마오주의 적용 – 맑스-레닌-마오주의, 주로 마오주의(오늘날에는 곤살로 사상의 기여를 포함하여)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며, 특정 국가에 맞는 구체적 사상을 발전시킨다.

2. 공산당의 지도 – 군사화된 공산당의 필요성.

3. 인민전쟁은 대중의 전쟁이다.

4. 신권력의 수립 – 혁명전쟁의 핵심 요소이다. 우리는 허무주의자가 아니기에 적을 파괴함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 현실의 핵심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생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우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이데올로기, 즉 오늘날에는 마오주의의 일관된 적용을 통해서만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 중요한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해당 국가의 구체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독일의 조건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피억압 민족의 당들에게는 민주주의 혁명이 당면 과제인 반면, 제국주의 국가에 있는 우리에게는 사회주의 혁명이 당면 과제이다. 허나 이것이 피억압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에 각각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세계적 계급이며, 따라서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가진다. 어떤 유형의 혁명이 적합한가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의 적용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은 또한, 설령 반동세력이 지도부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더라도,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적용을 통해 새로운 지도부가 생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지도부의 지속적 창출은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며, 특히 도시에서 활동하기에 반동세력과 매우 가까이 접해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마오 주석은 세계에는 단 하나의 근본 법칙, 즉 모순의 법칙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다른 법칙들도 존재하지만, 모순의 법칙이 가장 근본적이다. 곤살로 주석은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모든 모순에는 항상 하나의 주된 측면이 있으며, 항상 어떤 측면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진리는 항상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며, 오늘날 우리는 맑스-레닌-마오주의, 그중에서도 모순의 주된 측면을 마오주의가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주로 마오주의’**라고 말한다. 진리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더 높은 진리로 도약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진리와 더 낮은 수준의 진리 간의  모순을 생산하며, 오늘날 그 모순의 주된 측면은, 맑스주의가 닫힌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마오주의인 것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독일 사민당의 합법화와 선거 참여가 ‘질서의 당들’에 의해 압도될 것이나, 우리는 ‘그 합법성 하에서 튼튼한 근육과 건강한 안색’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그 이해를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주장이 모두 옳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다. 레닌은 더 높은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마오 주석은 통일전선 문제 등에서 레닌의 문제를 해결했고, 이를 통해 더 높은 진리를 도달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맑스주의라는 모순의 주된 요소는 마오주의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맑스는 레닌에 반대하고, 레닌은 마오에 반대하는 식이 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그 계급의 가장 우수한 자식들에 의해 적용되고, 새로운 경험으로 지속적으로 풍부해진다.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의 새로운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은 맑스주의에 대한 기여이다. 사상과 실천의 거장들은 우리에게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남겨주었으며, 이는 전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진리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마오주의는 매일 수백만 명의 실천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실천의 기초 위에서만 이론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명백한 결론은,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계급투쟁에 적용함으로써만, 즉 이 나라에서의 실천을 통해서만 한 나라의 계급투쟁의 법칙들을 체계화하는 지도사상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훌륭한 프로그램과 일반 정치노선, 혁명의 발전을 위한 훌륭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일반적인 형식에 머물러 해당 국가의 구체적 혁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들이 많다. 독일의 경우,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산당이 있었고, 자체의 비밀 조직과 고도로 발전된 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일반 방침을 넘어서지 못했고,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혁명적 무장투쟁을 시작하고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의 문제는 우리 계급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당은 우리 계급의 가장 우수한 자식들을 묶어세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은 항상 총을 들어야 하며, 이를 결코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실패한다. 우리가 말하는 당의 군사화란 모든 공산주의자가 람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공산당원은 전투원이 되어야 하며, 혁명전쟁을 실천과 이론 양면에서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의 군사화란 인민전쟁을 어떤 조건에서도 지도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수행해야 할 모든 조정과 개편을 의미한다. 페루의 동지들은 당의 군사화를 통해서 비로소 인민전쟁을 개시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세 가지 도구(당, 인민군, 통일전선)의 건설은 곧 당의 군사화의 유기적 성취이며, 이는 곤살로 주석이 가르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당은 모든 것의 축이며, 세 가지 도구의 건설을 전면적으로 지도한다. 당은 스스로를 건설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독재권력으로서 군대와 새로운 국가를 절대적으로 지도한다.”” 

인민전쟁은 대중의 전쟁이다

인민전쟁은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혁명적 폭력의 구체화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적용의 문제이다.

인민전쟁은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기계적인 복제하는 것으로 성공할 수 없다. 다양한 수정주의자들이 인민전쟁을 마치 농민전쟁이나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쟁”인 것처럼 묘사하기 좋아하지만(결국은 같은 왜곡 시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것들은 인민전쟁의 본질적 측면이 아니다. 인민전쟁은 대중의 전쟁이며, 제국주의 국가들에도 대중은 존재한다. 피억압 국가들에서는, 주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 아래 가난한 농민들이 혁명의 주력이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우리의 조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특히 그 중 가장 깊고 넓은 대중이 혁명의 주력이며, 우리가 의존해야 할 계급이다. 여기서는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도시, 중소도시 간의 차이를 고려한 도시 작업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수정주의자들은 인민전쟁을 실제가 아닌 어떤 것으로 신성화하려 하며, 그 후에는 그것이 독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발전”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전쟁 수행의 원칙을 변증법적으로 적용하는 것, 즉 우리가 활동을 전개하는 그 나라의 조건에 따른 적용이 우리의 문제다. 인민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며, 맑스-레닌-마오주의, 특히 마오주의로 무장한 동지들이 있다면 무기의 문제는 아주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다. “대중이 역사의 창조자이다”라는 말은 공허한 주문이 아니며, 혁명 전쟁 속에서 그것은 매우 명확히 현실이 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혁명 전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대중의 정치화, 동원, 조직화 및 무장화의 문제이다. 오직 대중의 지지를 통해서만 당이 지도하는 군대가 혁명 전쟁을 수행하고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와 도시 지역에서 혁명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도시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무장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와 세계 인민들의 충분한 증거와 경험이 존재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모든 무장 해방 투쟁들—스페인에서든, 아일랜드에서든, 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르티잔(유격대)들이든—은 그것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 시기와 그 장소에서 존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IRA는 30년 넘게 무장 투쟁을 수행하면서 군사적으로 패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인구가 200만도 되지 않는 독일 연방 주 하나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군대 중 하나를 상대로 투쟁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자신들의 권력 구조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에 저항하여 파리 한복판에서 무장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1941년 8월 23일, 전설적인 프랑스 애국자 피에르 조르주(그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파비앙 대령으로 알려졌으며, 파리의 바르베스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나치 장교 한 명을 사살했다. 7월 한 달 동안 공식적으로 기록된 철도 노선에 대한 작전은 21건에 달했다.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FTPF(프랑스 투쟁 전선)는 총 107건의 사보타주(파괴공작) 기록을 남겼으며, 41건의 폭발 방해와 8건의 열차 탈선 사고가 그들의 성과로 집계되었다. 한 파시스트 보고서에 따르면, 12월 한 달 동안 파리 지역에서만 221건의 공격이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보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독일 병사들은 파리 외곽 지역에서 밤이 되면 거리로 나서는 것을 거의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파르티잔들이 싸우고 있었다.”

2005년 프랑스 교외에서의 봉기 당시, 경찰은 매복에 유인되었고, 격렬하게 돌을 맞았으며, 때때로 엽총으로까지 공격당했다.

이것은 2016년 10월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태이다.

파리 남부의 악명 높은 교외 라 그랑드 보른(La Grande Borne) 인근 교차로에서, 주말 동안 두 대의 경찰 차량이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 교차로는 마약 및 총기 거래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며, CCTV로 감시되고 있다. 범죄자들은 반복적으로 이 감시카메라를 파괴하려 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경찰 순찰이 정기적으로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순찰대는 토요일 밤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가해자들은 경찰차에 인화 물질을 던졌고, 차량에 타고 있던 경찰관들—한 차량당 두 명—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네 명의 경찰관, 그 중 두 명은 여성, 모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한 명은 여전히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부상당한 한 경찰은 화요일 RTL 라디오 방송에서 말했다. 그는 공격자들이 “몇 초 만에” 차량을 에워싸 창문을 깨고 몰로토프 칵테일을 차 안에 던졌다고 묘사했다. “내 뒤 차량에 타고 있던 내 동료는 불타고 있었고, 나는 그 위로 뛰어들어 그의 셔츠를 찢어냈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이런 일을 겪게 되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벨기에의 사례는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마오 주석도 인용한 바 있다. 여기서는 파시스트 독일 국방군(베어마흐트)에 의해 정규군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던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어떤 구체적 경험들이 있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벨기에에서는 공산당의 주도로 1940년 말까지 이미 벨기에 파르티잔 군대가 조직되었다. 이는 많은 부르주아 저자들이 게릴라전의 발달 원인이 지리적 조건, 인종적 혹은 민족적 특수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다. 벨기에는 유고슬라비아나 알바니아와 비교했을 때 지리 조건이 확실히 훨씬 불리하다. 국토는 대체로 평탄하고, 숲도 거의 없으며, 고산 지대도 없다. 인구 밀도는 높기 때문에, 파르티잔 부대나 소조의 형성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벨기에 저항 운동은 그러한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강력한 파르티잔 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상황에 맞춰, 벨기에 게릴라 군대 조직을 위한 비합법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며, 이 시스템은 세 개 소조를 하나의 그룹으로, 세 개 그룹을 하나의 중대로, 세 개 중대를 하나의 대대로, 대대들을 하나의 파르티잔 군단으로 묶어, 각 군단은 지휘관과 참모진이 이끄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또 자동차로 가능한 한 기동성을 유지한 기동 그룹들도 존재했다. 이렇게 조직된 게릴라 전투 체계는 지하 군대를 형성할 수 있게 했다. 파르티잔들은 비합법적이지 않은 한, 대체로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머물렀다. 전국은 다섯 개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안에서 16개의 파르티잔 군단이 활동했다.”

“그들은 [벨기에 저항운동은] 열차를 탈선시키고, 열차 충돌을 유발하며, 철도 노선을 교란시키고, 중요한 전쟁 작전의 생산을 방해하며, 점령군과 그 벨기에인 하수인들을 공격하고, 다리와 수문을 폭파하며, 전화 및 전신선들을 파괴했다. 1941년과 1942년 동안, 벨기에 파르티잔들은 총 1,757건의 작전을 수행했으며, 이 중 246건은 폭발과 열차 탈선이었다. 1941년 겨울철 몇 달 동안에만 125대의 열차가 탈선되었다.”

“벨기에 해방을 위한 최종 전투에서, 파르티잔들은 연합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수천 명의 점령군을 포로로 잡았다. 1944년 9월 3일부터 12일까지, 벨기에 파르티잔 군대는 보리나주 지역에서 나치 저항군의 병사 및 장교 23,000명을 포로로 붙잡았고, 포병 장비 6문, 차량 100대 이상, 수백 정의 소총을 노획했으며, 오직 85명의 전사만을 잃었다.”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무장부대들은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골 지역에서는 가리발디 여단이 싸웠고, 도시에서는 GAP(애국행동집단)가 활동했다—둘 다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있었다. 후자는 단순한 병참 활동이나 보고 업무 같은 뒷받침만 한 것이 아니라, 시골의 파르티잔 투쟁을 지원하면서도 도시에서 자체적인 무장 투쟁을 수행했다. 로마, 피렌체, 볼로냐, 제노바, 토리노, 밀라노 등지에서는 GAP의 다수 세포로 구성된 개별 부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파시스트 정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들의 활동에는 병력 매복, 철도 및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 고문관과 장교에 대한 응징 작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예를 들어 파업과 그것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포함되었다. GAP는 거의 전원이 공산당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후 SAP라는 조직이 그것을 보완하게 되었는데, 이는 GAP를 보다 광범위하게 지원하고, 도시의 무장 투쟁에 대중을 더 깊이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쿠네오 주와 란초 계곡에서는, 파르티잔 투쟁이 특히 강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가리발디 여단의 ‘쿠네오’ 부대들은 도시와 토리노 주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통제하던 지역들에서도 전면적으로 기여했다. 알프스 계곡에서 토리노로 향하던 모든 열차는 정지되었고, 특히 피네롤로 일대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피난 노동자들이 타고 있던 열차는 계속 운행하지 못하도록 저지되었다. 역에서는 파르티잔 부대의 지휘관들이 즉석에서 집회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파업에 대한 큰 지지를 이끌어냈다. ‘살로 공화국’ 민병대원들은 억류되어 인질로 붙잡혔다.

란초 계곡에서는 게릴라 소조들이 열차를 정지시키고 승객을 점검했으며, 전단지를 배포하고 벽에 붙이는 한편, 각 부대의 간부들은 파업의 목적에 대해 주민들과 대화하며 지지와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트램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가리발디 전사들은 사보타주를 감행했고, 주요 차고지(레온바칼로, 비토리아 등)의 운행을 폭파시켰다.”

“파르티잔들은 공장이 문을 닫는 일요일을 이용해 다시금 노면전차 노선을 차단했다. 실제로 이용 가능한 노선은 몇 개 되지 않았으며, 경영진은 손상을 복구하느라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육상 노선에 대한 사보타주 시도가 있었고, 청소년들로 구성된 한 집단이 전차 전선 절단을 시도했다. 이들 중 일부는 철로를 제거하다가 파시스트들에게 붙잡혔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파르티잔들은 ‘공화군’ 민병대의 순찰대를 공격했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언론이 철저히 함구했다.”

“피에베 지역의 광산 노동자들과 시멘트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파르티잔들은 공장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원자재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공중 케이블카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북이탈리아에서의 GAP 활동에 대해 보고했다.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집약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베네토, 에밀리아, 토스카나에서는 주요 철도 및 보조 철도 노선이 차단되었다. 파드로에서는 폭약을 실은 열차가 폭파되었고, 비첸차와 베로나 주의 고압 전력선 세 기둥과 벨루노 및 그 인근 지역의 수많은 전기선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독일군 사령부는 파르티잔을 밀고하는 자에게 10만 리라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러한 투쟁 형태, 즉 무장 파업—다시 말해 파업과 그 외 다양한 게릴라 행동의 결합—은 인민전쟁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며, 이는 인도와 페루에서의 인민전쟁에서도 발전되고 있는 방식이다.

도시들에서는 무장 행동들이 대중 시위와는 별개로 수행되었고, 그 중 일부는 독일 및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애국행동집단(Patriotic Action Groups)의 공격은 결코 더디지 않았다. 한 독일 포병 부대가 도시 중심(9월 20일 거리)에서 공격받았고, 기마장교 2명이 폭탄으로 살해되었다. 항구 앞에서는 독일 순찰대가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스트리에서는 블랙셔츠 2명이 심판을 받았고, 노동자 1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도시 민병대 병영에 폭탄이 투척되었다. 그러나 애국행동집단의 개입뿐만 아니라, 노동자 집단들도 프로레타리아 거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싸움에 공세적 성격을 부여했다. 이들은 비조직 노동자들을 일부 공격적 행동에 끌어들였으며, 여러 지역에서는 노면전차 체계가 파괴되었고, 일부 전차는 폭탄으로 파괴되거나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두 경우에는 전차에 경찰관이 탑승해 있었으며, 노동자 집단은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복도에 억류했다.”

“12월 23일 밤, 파시스트들은 독일군과 함께 연회를 열었다. 그들은 빵을 얻었지만, 납도 얻었다. 한 발의 폭탄이 연회를 끝내버렸고, 7명이 죽고 15명이 부상당했다.”

 “동시에,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당은 애국행동집단(GAP)을 조직했으며, 이는 민족해방전쟁의 돌격부대였다. 이 집단들은 가장 우수한 동지들과 동조자들—가장 용감하고 헌신적이며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일군과 파시스트 반역자들을 즉시 추격하기 시작했다. 작년 9월 26일, 플로렌스-볼로냐 구간에서 독일군 군용열차가 탈선되었고, 27일에는 아레초 GAP가 휘발유를 실은 열차에 불을 질렀으며, 29일에는 독일군의 고사포 진지와 탄약고가 폭파되었다. 10월 15일, 밀라노의 리보르노 거리에서 독일 병사들이 공격받았고, 10월 20일에는 삼피에르다레나에서 파시스트 병영이 공격당했다. 이런 식으로 한 해 전체에 걸쳐 하나의 공격이 또 다른 공격을 이어갔다.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볼로냐, 피렌체, 파도바, 트리에스테에서 독일 사령부는 낮에도 공격받았고, 경찰서장들은 총살되었으며, 독일 장교들이 제거되었고, 배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동지들은 지하 감옥에서 해방되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조반니 로베다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은 단지 파시스트를 반복적으로 타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록 명확히 그렇게 부르진 않았지만, 파시스트들이 타격당한 곳에서 스스로의 권력을 구축하려 했다. 그 권력은 원칙 없는 여러 당들의 연합이 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대중에 기초하고 공산당의 지도 하에 있는 구조 위에 세워졌다.

“이러한 기구들이 바로 민족해방위원회, 농민위원회, 마을위원회, 파르티잔과 애국형성체 등이다. 우리는 이들이 단순한 당 간의 연정기구에 불과한 현재의 그것들과는 분명히 다른 위원회들이며, 직접적으로 기업, 지역, 마을, 도시에서 대중을 조직하여 그들의 염원과 의지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대중 위원회들임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위로부터 의지를 강요하는 정부의 도구가 아니라, 인민의 정부, 가장 넓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조직이다. 이러한 민족해방위원회들에서는 다양한 정당들과 반파시스트 흐름들이 당이 아닌 대중들과 함께, 이미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정신으로 단결하고 투쟁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을 관할하고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은 투쟁위원회들, 노동조합 위원회, 공산당 지구 지도부이다. [...] 파업 주간의 경험은 대중들이 싸우고자 하며, 싸울 줄 알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노동조합 위원회, 공산당, 해방위원회가 결정하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무장 투쟁은 단지 북부 이탈리아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수도 로마에서도 공산당의 무장 조직들에 의해 무장 행동이 수행되었다.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붉은 여단(Red Brigades)은 이와 같은 경험들을 계승했다. 붉은 여단의 경험은 우리가 학습하고 습득해야 할 중요한 교훈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야 할 과제이다. 예컨대 1980년대 초 밀라노에서는 알파 로메오 공장에서 ‘발터 알라시아 지부’라는 붉은 여단 부서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장 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79~80년 탄압의 큰 물결 속에서도 조직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다. 조직 구성원의 80%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었고, 대다수는 합법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1981년 3월, 붉은 여단은 노동쟁의에 개입한다.

“1981년 6월, 붉은 여단은 공장의 작업조직 책임자인 산드루치를 납치했다. 동시에 다른 세 명을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포르토 마르게라 석유화학 공장의 고위 간부, 나폴리의 기독민주당 핵심 인사, 그리고 반역자 페치의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전의 결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발터 알라시아 지부’는 이 행동을 통해 노동조합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광범위했다. 그것은 무장 노동조합 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납치 결과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9월에는 ‘카사 인테그라티’(단축 근로제)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러나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무장 투쟁의 경험을 얻기 위해 외국의 사례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이미 많은 자체적 경험을 축적해왔다. 예를 들어, 루르 적군(Rote Ruhr Armee)과 1923년의 함부르크 봉기(Hamburger Aufstand) 같은 사례가 있다.

RAF(붉은 군대 분파) 같은 조직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적지 않은 대중의 동정을 얻었지만, 대중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대중이 어떻게 승리하는가, 대중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이다. 이는 곧 ‘삼거(三與)’ 문제로 이어진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깊고 넓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대중과 연결되고, 그들의 투쟁에 참여하며, 그 투쟁에 방향과 지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든 대중의 주도성을 고무해야 한다.

‘삼거’를 실천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생애를 혁명에 바친다는 원칙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사람은, 가장 깊고 넓은 대중이 동네에서 핏불을 데리고 다니는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외곽 지역의 싱글맘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은, 남성적인 자세로 찍은 랩 뮤직비디오보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대중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삼거를 실현하는 사람은 청소년 갱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과 군대, 전선을 건설한다. 공산주의자는 대중에게 ‘정상적인 존재’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대중에게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낫과 망치가 빛나는 모습이 ‘당연한 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당연함이 바로 공산주의 선전의 전략적 측면이다. 왜냐하면 대중이 투쟁에 나설 때, 공산주의자들은 함께 싸우고—붉은 깃발과 낫과 망치를 들고 싸우며—그것이 ‘정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삼거’를 실현할 때만 가능하다. ‘삼거’를 실현한다는 것은 소부르주아 동지들을 프롤레타리아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흥미로운 체험활동이나 간부들을 위한 인턴십이 아니라, 하나의 인생 경로이다. 가장 깊고 넓은 대중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며, 그들의 문제와 필요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 매 달 말이면 돈이 모자라고, 노동은 몸을 병들게 하며, 제대로된 의료를 받지 못하고, 아이들은 형편없는 학교에 다니는 것—그것이 바로 인생을 혁명에 바친다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동지들은 올바른 계급 입장을 취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는 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며, 전위가 진정으로 어떤 일이든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고,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진리를, 설령 그것이 부르주아 자아에게 고통스러울지라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다음과 같다:

“종합하자면, 재건 과정 속 당의 모든 대중 활동은 인민전쟁의 개시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 주석께서 우리에게 가르쳤듯이, 전쟁이 개시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것을 준비하는 데 복무하며, 전쟁이 개시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그것의 발전에 복무해야 한다. 곤살로 의장은 이 원칙을 적용하고 견고하게 발전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의 전쟁 수행 원칙에 관한 문제에서, 곤살로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계급은 항상 자신만의 전쟁 수행 방식과 전략을 낳아왔다. 그리고 항상, 우월한 전략이 열등한 전략을 타도해왔다. 새로운 계급은 항상 우월한 전략을 가지며, 그것이 바로 인민전쟁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다. 어떤 군사 분석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원칙을 적용했을 때는 전쟁에서 결코 패배한 적이 없다.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오직 자기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을 때뿐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페루에서의 경험이다. 거기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인민전쟁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전쟁이 단지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쟁이라는 오해를 페루 공산당이 완전히 반박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새로운 권력의 건설

 이로써 우리는 인민전쟁 문제를 적어도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다루었다. 다음 주제는 새로운 권력 또는 근거지 문제이다. 새로운 권력은 국가 권력, 즉 새로운 국가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독일연방공화국(FRG)의 경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도시들에서 새로운 권력의 건설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혁명 속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경험들을 활용한다. 어떤 경험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지도 없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북아일랜드가 그러하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해, “그것은 의회적 기구가 아닌 실행하는 기구, 입법과 행정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구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페루의 인민위원회들은 발전 중인 신민주주의 국가의 정부 체계이며, 따라서 피억압 국가 인민 내부 혁명적 계급들의 상호 독재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사회주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국가 체계는 어떤 계급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정치의 내용이다. 정부 체계는 그 계급이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정치의 형식이다. 페루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곤살로)는 인민위원회가 새로운 국가의 구체적 구현이라는 점을 확립했다. 그것들은 통일전선의 위원회이며, 당이 지명한 위원장들이 이끌고, 이들은 대표자 총회에서 선출되며 소환 대상이 된다(비판과 자기비판이 전제됨—작성자 주). 그것들은 현재까지는 비밀리에 운영되며, 각종 위원회(Commission)와 함께 전진한다. 이 위원회들은 당이 이끄는 가운데 ‘삼분법’ 원칙을 적용한다. 즉, 3분의 1은 공산주의자, 3분의 1은 농민, 3분의 1은 진보세력으로 구성되며, 인민군에 의해 지지된다. 그들은 인민독재, 집행과 치안 기능을 수행하며, 새로운 권력을 적으로부터 방어하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고 확고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새로운 권력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가, 또는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는가에 관한 문제에 있어 우리는 페루의 경험을 참고한다:

“이 위원회들은 다섯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대중에 의해 위임되었기에 ‘위원(commissar)’이라 불리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 그들은 대표자 총회에 의해 선출되며, 이 총회는 가능할 경우 해당 마을의 모든 대중이 참여하는 인민총회에 의해 선출된다. 위원회는 당의 지도 아래 있으며, 공산주의자, 평범한 농민, 그리고 지역의 다른 진보적 세력들로 구성된다. 이들의 임무는 국가 전역 차원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농촌에서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 명의 위원 중 서기는 당과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농촌에서는 주로 당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한다). 보안 위원은 마찬가지로 PCP(페루 공산당) 당원이자, 새로운 정치 권력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며, 이는 지역 주민 전체가 민병대로 조직되고, 지역 게릴라 부대 및 인민게릴라군의 주력부대와 함께 방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필요할 경우 마을 주민들의 조직적 철수를 준비하는 것을 포함한다. 보안 위원은 또한 경찰 기능을 담당하며, 새로운 정치 권력을 공격하는 반혁명분자나 대중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들에 대해 조치를 취한다. 절도, 마약, 상습 음주, 매춘, 도박, 아내와 자녀에 대한 폭행, 강간 및 기타 악행들은, 이전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묵인되며 번성해왔으나, 이제는 억제되고 있다. 생산 및 경제 담당 위원은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의 발전을 조직하고 조율한다.”

“공공 업무 위원은 사법을 담당한다. 이는 인민 재판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사 역할을 맡은 이가 인민위원회의 입장에서 사건을 제기하고, 피고인은 자기 변호를 하고 증거를 제시할 권리가 있으며, 대중은 그 재판을 듣고 판결을 내린다. 또 다른 예로는 피해보상위원회의 설치가 있다 […] 이 위원은 또한 결혼을 주관한다. 결혼을 원하는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할 두 명의 증인을 동반해야 하며, 이것이 유일한 요건이다. 공공 업무에는 또한 출생 등록, 인민 약국의 보급(적에게서 압수한 약품과 약초 치료 포함), 신혼 부부 및 기타 대상의 건강 검진도 포함된다. 교육은 공산주의 세계관에 따라 지도되며 노동과 연결되어 있다. […] 이 위원은 스포츠와 문화를 포함한 오락도 조직한다 […] 또한, 당이 지도하는 대중조직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계획하는 책임을 지는 위원도 있다.”

 새로운 권력 지역 또는 근거지(base areas)는, 반동 세력이 더 이상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해방구역’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는 인민전쟁의 유동성(fluidity)에 관한 문제이며, 영토를 정복하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삶을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권력의 형태들을 수립하는 것이 핵심이다. 독일연방공화국(FRG)의 경우, 무엇보다도 이 작업은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거주 지역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지역에서 이러한 작업이 발전하여 그 구역의 생활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대중의 삶을 가능한 한 개선하기 시작했더라도 그것이 곧 구(舊)국가가 파괴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 국가의 파괴에 있어서는 대중을 동원하고 운동을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권력은 구국가의 보완물로 전락하거나 사회사업으로 전개될 위험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투쟁에서도 이와 관련된 귀중한 경험이 축적되었다. 공산당은 도시에서 작업반(cell) 외에도 거리 세포(street cells)를 조직하였고, 폭격 피해자들에게 빈집을 분배하거나 땔감을 조달 및 배급하는 그룹들도 형성되었다.

“전투위원회들의 조직 하에, 브레다(Breda), 팔크(Falk), 그리고 다른 공장의 노동자 집단들이 가로수들을 벌목하기 시작했고, 벌목한 나무는 작전에 협력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배급되었다. SAP 및 GAP 부대들은 독일군 및 파시스트 앞잡이들의 개입으로부터 이 노동자 집단들을 방어하기 위해 경계에 나섰다.”

“ 전투위원회들과 해방위원회들은 벌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식량 문제 해결에도 직접적으로 나서려 했다. 당시의 구호는 ‘식량, 땔감, 석탄은 그것들이 있는 곳에서 확보하자’였으며, 이는 독일군과 파시스트 진영으로부터 확보하자는 의미였고, 동시에 ‘도시와 농촌 간의 직접 교환’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천적 조치를 통해, 지역 해방위원회들은 발전하여 투쟁과 인민권력의 통합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파시스트 점령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따라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도시 안에서도 주어져 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과들 외에도,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매우 경고적인 부정적 경험들과 한계 또한 있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우리가 언제나 먼저이고, 항상 우리여야만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연합에 이르기 위해 양보하는 편이 더 낫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적으로 비판된다:
 “많은 파르티잔 부대들, 많은 해방지역들에서는 인사를 주먹을 쥔 인사(clenched fist)로 하고 있으며, CLN(민족해방위원회)의 상징 대신 낫과 망치를 포함한 온갖 공산주의 상징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밀라노 파업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되었다:
 “‘당’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계획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당은 공산당, 즉 노동자의 당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투쟁 중 모든 것을 전선(통일전선)에 종속시키고,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는 위험이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주도하고 수많은 훌륭한 동지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른 투쟁을 통해 세워진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아닌 부르주아 공화국이었다.

오늘날 터키의 여러 조직들, 예컨대 이스탄불의 일부 구역들에서의 활동은 도시에서도 새로운 권력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도시에서 새로운 권력을 건설한 가장 위대한 경험은 페루 공산당에서 비롯된다.페루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거주하는 리마에서는 원래 인민혁명방위운동(MRDP)을 통해 저항 거점을 구축할 계획만 있었고, 새로운 권력 자체를 건설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이 활동이 매우 성공적으로 발전하면서, 당은 결국 이곳에서도 새로운 권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해 페루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약 3년 전, 리마의 인민혁명방위운동(MRDP) 회의에서, 우리는 노동자 투쟁과 신흥 도시 및 다른 지역(바리오)에서의 투쟁을 연결할 새로운 투쟁 형태들을 관리할 조직 형식의 명칭에 대해 논의했다: 인민위원회, 인민투쟁위원회 혹은 간단히 투쟁위원회. 우리는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이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으로 인해 우리가 농촌에서만 조직하는 인민위원회와 혼동될 수 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후 우리는 도시에서 권력 형태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국적 차원에서 권력을 정복하려 한다면, 도시를 지하에서부터 조직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최종 봉기의 시기가 올 때까지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쟁위원회가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도시에서 구국가를 약화시키고 대중이 조직된 방향을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을 관리할 수 있게 해주는 초기 단계의 기반이다. 핵심은 당의 지도 하에 통일된 행동 수단을 창출하거나 권력 행사의 실천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공동 행동을 창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민권력의 여섯 번째 형태, 즉 도시에서만 존재하는 추가적인 전쟁 형태로서, 투쟁의 또 하나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투쟁위원회는 권력의 여섯 번째 형태이며 도시에서의 최초의 싹트는 형태로 여겨진다.

투쟁위원회는 세 개의 이정표를 갖는다. MRDP 제88차 회의는 당 대회 제2차 회기의 적용에 해당하며, 이는 투쟁위원회가 노동자와 지역(및 신흥 도시) 대중을 조정하고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1990년 10~11월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 예비 회의: 투쟁위원회는 단결, 조직, 권위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오늘, 1991년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투쟁위원회는 여섯 번째 형태이자 도시에서의 첫 번째 초기 형태로 자리 잡았다. 왜 하필 오늘인가? 그것은 물질적 현실의 전개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실이다. 인민전쟁을 위한 우리의 대중 활동의 성장 자체가 그러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칙을 적용하고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상은 실천에서 나온다. 우리가 1988년에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지금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는 논의하는 것이 옳았고, 우리는 그때 일반적인 노선을 설정했다. 이제는 그 실천의 순간이 왔고, 현실이 그것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권력의 여섯 번째이자 최초의 형태이며, 도시 내 새로운 권력의 초기 형식을 조직하기 위한 모델이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농촌에서 창출한 권력의 형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임을 강조한다. 그 방향성과 목적을 명심하자:

제1 투쟁위원회: 노동자와 지역 대중(신흥 도시 포함)의 조정.

제2 투쟁위원회: 단결 – 조직 – 권위.

제3 투쟁위원회: 여섯 번째 형태이자 도시에서의 최초의 초기 형태. 이것은 농촌에서의 새로운 권력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농촌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저지해야 한다. 이것은 도시에서 새롭게 나타난 여섯 번째 형태이자 초기 형태로서, 봉기를 준비하고 전국적인 권력 정복을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도시에서 권력 정복을 구축하는 성과이며, 구국가가 시도하는 조치들의 보완물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며, 그것을 부정하고,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파괴하여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제1 투쟁위원회는 지역들(quartiers)의 대중을 조정한다. 제2 투쟁위원회는 해당 지역 내 여러 대중조직의 통일된 행동을 조직하며, 대중의 삶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권력 행사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 국가 권력을 건설하는 것이다. 제3 투쟁위원회는 도시에서 행사되는 새로운 권력의 첫 번째 형태이며, 그 목표는 구국가와 그 지배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확장되며, 지하로부터 새로운 권력이 행사된다. 이 작업은 리마의 일부 지역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발전하여, 당이 공개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으나, 이후에는 그것이 너무 나아갔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는 예를 들어 네팔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이해이자 매우 다른 실천이다:

“CPN(M)[네팔 공산당(마오주의자); 작성자 주]는 고위급 협상단을 파견했으며... 카트만두에는 사무소까지 개설되었고, 기자회견이 열렸으며, 다른 정당들과 시민사회 인사들과의 회담도 진행되었고, 대중 집회들도 조직되었다. …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마오주의자들은 이미 국가의 80%를 통제하고 있었다. 목표는 도시를 포위함과 동시에, 왕에 맞서는 통일전선을 구성하여 도시에서 봉기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농촌에서는 인민전쟁을 벌이지만 도시에서는 주로 합법적 민주주의 활동을 진행하며, 왕정을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것이 바로 네팔 인민전쟁의 일시적 패배의 기초였다. 이러한 네 가지 원칙은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실천적으로 적용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세계 혁명의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적용 가능한 방식이다. 

인민전쟁의 원칙들

 마지막으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마오 주석의 열 가지 군사적 원칙을 인용하고자 한다:

“(1)흩어져 있고 고립된 적을 먼저 공격하고, 집중되어 있고 강력한 적은 나중에 공격하라.

(2)소도시와 중간 규모 도시 및 광범위한 농촌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대도시는 나중에 점령하라.

(3)적의 실질적인 전투력을 소멸시키는 것을 우리의 주요 목표로 삼되, 도시나 특정 지역을 점령 혹은방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지 말라. 도시나 특정 지역을 점령하거나 보유하는 것은 적의 실질 전력을 소멸시킨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종종 한 도시나 지역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후에야 비로소 확고히 점령할 수 있게 된다.

(4)모든 전투에서 절대적인 우세 병력(적의 병력 대비 두 배, 세 배, 네 배, 때로는 다섯 배, 여섯 배)을 집중시켜 적을 완전히 포위하고, 철저히 섬멸하며, 단 한 명도 포위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특별한 상황에서는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하라. 즉, 전 병력을 집중시켜 정면 공격과 측면(한쪽 또는 양쪽) 공격을 가하여 적의 일부는 섬멸하고 다른 일부는 와해시켜, 우리의 부대가 신속히 다른 적 부대를 타격할 수 있도록 하라. 우리가 얻는 것보다 더 많은 손실을 입거나, 겨우 손익이 비기는 소모전은 피하라. 이렇게 하면, 전체적으로는 열세일지라도(병력 면에서), 개별 전투나 작전에서는 우세를 점할 수 있고, 이는 작전의 승리를 보장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전체적으로 우세하게 되어 결국 적을 전면적으로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5)준비되지 않은 전투는 하지 말고, 승산이 없는 전투는 벌이지 말라. 모든 전투에 철저히 준비하고, 주어진 조건 하에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

(6)우리의 전투 방식—전투에서의 용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음,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음, 연속 전투(짧은 시간 내에 연달아 전투를 수행하며 휴식 없이 싸움)—을 최대한 발휘하라.

(7)적이 이동 중일 때 적을 섬멸하기 위해 힘쓰되, 동시에 진지 공격 전술에도 주의를 기울여 적의 요새화된 거점과 도시들을 점령하라.

(8)도시 공격에 관해서는, 방어가 약한 모든 적의 요새화된 거점과 도시들을 단호히 점령하라. 적절한 시기에는, 조건이 허락되는 한, 중간 수준의 병력으로 방어되고 있는 모든 적의 거점과 도시들을 점령하라. 방어가 강한 모든 적의 요새화된 거점과 도시에 대해서는, 조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점령하라.

(9)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와 인력 대부분으로 우리 병력을 보충하라. 우리 군대의 주요 병력과 물자는 전선에서 조달된다.

(10)작전과 작전 사이의 틈을 이용해 부대를 휴식시키고, 훈련시키며, 정비하라. 휴식, 훈련, 정비의 기간은 일반적으로 너무 길어서는 안 되며, 적에게는 가능한 한 숨 돌릴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민해방군이 장제스를 격파할 때 사용한 주요 방법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이 오랜 세월 동안 국내외 적들과의 싸움 속에서 단련된 결과이며, 현재 우리의 조건에 완전히 부합한다. … 우리의 전략과 전술은 인민전쟁에 기초한 것이다. 인민에 맞서는 군대는 결코 우리의 전략과 전술을 사용할 수 없다.”

인민전쟁은 장기전이다. 독일은 프롤레타리아의 착취와 억압받는 피억압 국가들로부터 얻는 초과이윤 위에 번영을 구축한 제국주의 국가이다. 우리의 적인 독일 제국주의는 강력하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약하며, 독일 공산당이 재건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약할 것이다. 독일 공산당은 맑스-레닌-마오주의를 기초로 하여 자신을 재건하고, 독일 혁명을 위한 지도 사상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독일 제국주의는 독일 인민들과 갈등하고 있으며, 이 모순은 점점 더 격화되고 있고,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인민전쟁의 물결 속에서 그 격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재건될 독일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며, 그것은 진리이고 그러므로 전능하다. 따라서 독일에서의 인민전쟁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 제국주의는 여전히 강력하고, 혁명의 역량은 약하다. 이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단기간에 승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민전쟁은 장기적이지만, 동시에 무적이다. 장기적인 인민전쟁은 전략적 방어, 전략적 균형, 전략적 공세의 세 가지 시기로 나뉜다. 페루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은 적의 병력과 우리의 병력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약한 위치에서 강한 위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적의 결점은 드러나고, 우리의 강점은 발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군대는 약해 보이지만 본질은 강하며, 적의 군대는 강해 보이지만 본질은 약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약한 위치에서 강한 위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장기전을 수행해야 하며, 이것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는 적의 전략적 공세와 우리의 전략적 방어 시기이다. 두 번째는 적의 전략적 공고화 시기이자 우리의 반격 준비 시기이다. 세 번째는 우리의 전략적 반격 시기이자 적의 전략적 후퇴 시기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전략적으로 ‘1 대 10’의 열세를 감당해야 한다는 문제는, 전술적으로는 ‘10 대 1’의 방식으로 해결된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주의의 원칙이며, 리쭈오펑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하나씩 섬멸하는 방법은 전략적으로 적을 멸시한다는 사상을 구현한다. 왜냐하면 전략적으로 적을 멸시하고,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정신—‘1 대 10’을 감내하는 정신—을 발휘해야만, 적을 마주했을 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고, 적의 호전성에 겁먹거나 복잡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감히 병력을 집중시키고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반면, 이 방법을 통해 연속적인 작전과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대중과 군대를 교육시켜, 그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적이 패배할 수 있다는 것과, 전략적으로 적을 멸시하는 것이 완전히 옳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할 것이다. 이는 결국 인민과 군대의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증대시키고, 더 큰 승리를 향해 싸우도록 격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작업을 통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독일 공산당을 올바른 토대 위에서, 올바른 전망을 갖고 재건하는 데에 작지만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었기를 바란다.

  1. 마오쩌둥 “우월한 병력을 집중시켜 적의 병력을 하나하나 섬멸하라” 1946년 9월 16일
  2. 레닌, “우리의 혁명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과제”
  3. 쿠바 혁명의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장투쟁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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