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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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사(1)

베이징대학 마르크스주의 학회 저

소개

본 지는 독자들에게 '문혁사' 라는 문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건은 문화대혁명이 있었던 중국에 위치한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주의 동아리에서 직접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연구하고 소개하는 글이다. 비록 중국어로 쓰여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역사를 처음 살펴보고자 할 때 유용한 글이기에 최대한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베이징대 마르크스주의 동아리는 베이징대 학생들이 직접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동아리다. 본 문건 문혁사를 비롯한 여러 연구를 진행하고, 학내, 외를 가리지 않고 중국 내부의 노동운동에 결합하는 실천을 진행했으나, 학교 당국의 억압에 의해 18~19년도 즈음에 해체를 당해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

번역의 어려움과 여러 일정으로 인해 이번에는 1권의 1장 1절 만을 싣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들의 너른 양해를 부탁한다.

제 1권 역사- 1장 현대 민족 국가

문명의 전제조건

우리가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이성적으로 정리할 때, 역사적 사건 간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몇몇 사람들은 소위 ‘전체주의 국가’의 역사를 해설할 때, 단 한두 명의 지도자가 손바닥 뒤집듯 세상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고 여기며, 이를 통해 ‘독재자’의 욕망과 민중이 ‘세뇌’되고 ‘이용’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국의 역사를 다룰 때는 이러한 비이성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전체주의든 민주주의든 간에 사회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놓친다면,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조직과 집단이 각자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이익을 위해 벌이는 경쟁과 투쟁이 없다면, 소위 역사 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의 방향성은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이익 집단이 현실 사회를 주도하고 이끌기 위해 벌이는 경쟁입니다. 또한, 모든 역사적 시대의 경제적 생산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사회 구조야말로, 그 시대의 정치와 시대 정신의 역사적 기초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는 명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중국에서 전통적인 사회·경제적 기초를 흔든 최초의 ‘총체적 혁명’은 1919년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1919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19년부터 1949년까지의 신민주주의 혁명 시대, 두 번째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의 사회주의 건설과 ‘계속혁명’ 시대, 세 번째는 1978년부터 1992년까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공존했던 개혁시대, 그리고 네 번째는 1992년부터 오늘날까지의 시장 개혁 시대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진행하려 하며, 따라서 1949년부터 1966년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부자가 된’ 자본주의 국가들은 19세기부터 전 세계 자본이 자국으로 유입되도록 설계된 경제·정치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서구 국가들은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나, 동시에 낙후된 국가들의 현대화 과정은 서구 독점자본주의와 자국의 낙후된 경제·정치 구조라는 이중적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중심 국가들은 강력한 자본 수출을 단행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 간 내부 경쟁이 완화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서구 자본의 확산이 본격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자본은 개발도상국의 자원과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여 생산 기반을 확장하였으며, 이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적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서구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착취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즉, 서구 국가들은 국내의 계급 갈등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서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속적인 투쟁과 자본세력의 성장으로 인해 국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과 향상된 복지제도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단순 노동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이전됨에 따라 국내 노동력은 관리직과 서비스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서구 국가들의 발전은 그들이 20세기 초부터 구축하고 지속적으로 강화해 온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덕분이었습니다. 이 질서 속에서 주변부 국가들의 내부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특히 공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강력한 해외 독점자본과 국내의 낙후된 체제가 결합하여 이중적 착취 구조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억압으로 인해 주변부 국가들의 사회·경제적 갈등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후진국들은 다음과 같은 운명 중 하나를 맞이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선진국들이 잉여 자본과 내부 모순을 전가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들은 현대적 의미의 민족 국가 체제를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기 쉬우며, 이로 인해 안정적인 생산력 발전이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 국내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거나,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독재 정치 체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두 번째는 현대 민족 정권 수립에는 성공했지만, 자본 축적 과정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는 경우입니다. 자본을 축적하는 작업에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고통이 따릅니다. 심지어 세계 시장을 통해 국내 모순을 해외로 전가할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조차, 내부적 자본 축적을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묘사한 아일랜드 인구의 1/8이 굶주림으로 사망하고 1/4이 해외로 망명하는 영국 산업혁명기의 아일랜드의 경제, 사회적 참상이 대표적입니다.


민족주의와 역사적 교훈에서 비롯된 이들 국가의 산업화 열망은 국내의 취약한 자본 축적 인프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런 약한 경제 기반 위에서 무정부적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 필연적으로 국내 계급 갈등이 첨예화되며, 결국 자주적 산업화 목표를 포기하고 선진국 중심의 세계 질서 에 편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빈부 격차로 인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감내해야 하죠. 이후 일부 국가는 첫 번째 유형으로 전락하지만, 일부는 세 번째 유형의 국가로 '진보'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종속 국가' 혹은 '반주변부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즉, 민족 국가로서의 독립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선진국의 막대한 시장과 군사적 보호를 기초로, 국가 정권의 힘으로 경공업을 발전시켜 원시적 축적을 이루고 점차 중공업과 첨단과학 분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속형 국가의 성공 모델은 천연자원이 없으며, 국력이 약하고 식민통치 시기 기초적인 공업 능력을 쌓은 국가들로 한정될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시장과 군사력에 극도로 의존하게 됩니다. 반면 국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하며 내부 시장이 큰 대국들에게 있어서, 종속 정책은 연해와 내륙, 도시와 농촌 간의 균형을 파괴하며 극단적 빈부격차를 고착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개발도상국에서도 볼 수 있는 연해와 내륙 사이의 격차,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 도시 내부의 빈부격차는 이러한 기형적인 발전의 결과물이며, 이는 현대화를 가로막은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레닌은 말년에 <우리의 혁명> 이라는 텍스트를 남기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절망적인 처지가 노동자와 농민의 역량을 10배로 키워, 우리에게 서유럽 국가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명의 기본 요건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어떨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일정 수준의 문명이 요구된다면, 왜 우리는 먼저 그 일정한 문화 수준의 전제 조건을 혁명적인 수단으로 달성한 뒤, 노동자와 농민 정부와 소비에트 체제의 기초 위에서 다른 국가들을 추월할 수 없겠는가?"


이처럼, 후발 현대 민족국가가 자본주의 열강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서 일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내 세력을 통해 봉건제도를 근절하고, 일원화된 관리감독과 계획적이고 통제된 자본의 내부 축적을 통해 독립적이며 완전한 현대식 산업 시스템과 국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며, 일정 수준의 자주적인 공업적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는 중국과 같은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국가에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반식민-반봉건 국가였던 중국이 제국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벌어진 10월 혁명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호응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10월 혁명의 첫 포성이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결론이다."

중국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사실 좀 더 복잡합니다. 중국은 고대부터 거대한 소농경제 기반 위에 성장해왔습니다. 명청 시대에 이르러 농촌의 기층 행정 권한은 지역 사족 계층에게 사실상 이양되었으며, 이들은 농민과 중앙정부를 연결하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족들은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재원을 수리시설 건설이나 마을 제사 등 지역 인프라 구축에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 속에도 심각한 위기 요인들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첫째, 청나라가 재정 절감을 위해 지방 행정과 감찰 기능을 통합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관리들의 부패가 심화되었고, 국가 행정 시스템이 점차 비효율적으로 변모해갔습니다. 이 같은 환경에서 화신(和珅)과 같은 초대형 부패 관료가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인두세 폐지로 인한 인구 과잉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청나라는 '성세자정(盛世滋丁)'과 '탄정입무(攤丁入畝)' 정책을 시행해 인두세를 폐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지만, 이는 중국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초래하여 농업 생산력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내향적 정교화' 방식으로, 즉 과도한 노동력 투입을 통해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식을 채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동력 투입에 의한 생산 증가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1인당 4무(4畝. 0.27헥타르)의 경작지가 필요했지만, 아편전쟁 전후 중국의 1인당 경작지 면적은 고작 2.5무(2.5畝. 0.16헥타르)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19세기 중국 인구 상당수가 기아 또는 그에 준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노동집약적 농업 운영으로 인해 생산성 향상 없이 노동력이 감소할 경우 바로 농업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규모 자연재해나 인재가 발생하면 광범위한 기근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며, 1870년대와 1920-40년대, 1960년대에 발생한 중국의 대기근들은 모두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상품 수출과 전쟁 배상금 요구는 이미 한계에 달한 중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서구 자본과 국내 지주계급의 이중적 착취 아래 중국 농촌은 급속도로 붕괴되었습니다. 전통 수공업의 몰락과 빈농들의 도시 유입이라는 '진보적' 변화 속에서도 농촌 경제는 심각한 침체를 겪었으며, 이 문제는 청나라 멸망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1870년대에 일어난 '정무기황(丁戊奇荒)' 이라 불려지는 대기근 이후, 중국은 끊임없는 기근과 심화되는 계급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영국 자본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른 일이 중국에서도 재현된 것입니다. 이후 청나라, 북양정부, 국민정부 모두 산업화에 몰두했으며, 특히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소위 '황금 10년' 에는 연평균 8% 이라는 산업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공업 위주의 불균형 발전이었고, 중공업 발달은 미미했으며 도시화 속도가 산업화를 압도하는 기형적 양상을 보였습니다. 산업화 보다 빨리 이루어진 도시화는 (마치 오늘날의 인도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농촌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이루지 못한 채 도시 내 빈부격차와 사회 혼란만을 초래했습니다.


1935년,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의 강철 생산량은 고작 5만 톤에 불과했으며, 그 마저도 80% 이상이 외국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만주국의 강철 생산량은 76만 톤에 달했습니다. 1936년 기준 국민정부 지역의 기계 채굴 석탄의 66%, 발전량의 55%가 외국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석탄 총생산량은 2,000만 톤 미만이었던 반면, 만주국은 1,100만 톤, 일본 본토는 4,300만 톤을 생산했습니다. 1949년 이전 국민정부 통치 지역의 석유 생산량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동북과 대만을 제외한 전국 철도는 1만 km, 도로는 2만 km에 불과했던 반면, 동북 지역만 해도 1945년을 기준으로 철도 11,400km, 도로 6만 km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1945년에는 대만을 제외한 국민정부 지역의 공업 생산량은 만주국의 5%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중국은 경공업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소비시장이 도시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고,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으며, 중공업 기반이 취약해 민족 산업의 자립성이 극히 낮았습니다. 이러한 산업화의 정체와 불균형 발전에는 외국 자본의 압박, 정부의 부정 부패, 지속된 전쟁 등의 요인 외에도 더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촌지역의 질서를 유지하던 기존 체제였습니다. 전통적 농촌 사회에서는 지주와 사족들이 징수한 지대와 세금 중 상당 부분이 지역 개발과 공공 질서 유지에 재투자되었으며, 자영농의 비율도 사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외국 자본의 유입은 중국 농촌의 전통 경제 구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전통적인 농가 부업으로서의 방직업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소농들은 생계 수단을 상실했고, 그 결과 세 가지 길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고, 일부는 지주에게 토지를 빼앗겨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나머지는 극도로 빈곤한 상태에서 겨우 남은 빈약한 수입에 의존하여 간신히 생존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토지 소유권은 급속히 수많은 중소 지주들에게 (사실 대지주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집중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자경농들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기에, 소작농이 생겨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지만, 이 시기 정부는 그러한 개입 의지나 능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으며, 오히려 많은 정부 관료들이 바로 그 지주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이 시기부터 지주와 사족들이 더 이상 고향 발전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점이었습니다. 아무도 침체된 농촌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소지주들은 단순히 지대 수입에 만족하며 현대화를 위한 투자에는 소극적이었고, 공공 행정과 건설에 투자할 능력도, 자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양산된 소지주들은 중국의 자본 축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일부 부유한 지주와 사족들이 공업과 상업 발전에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고향의 부동산은 단순한 자본 조달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결국 농촌 경제는 점차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원래 농촌 질서를 유지하던 지주와 사족들이 사라진 자리는 토호와 악덕 마름들이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토지 소유자들이 더 이상 지역 발전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대리인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겼고,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대지주들은 무관심했고, 소지주들은 무력했으며, 이로 인한 행정 공백이 발생하자 도적과 자연재해, 역병, 아편 등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각종 재난이 닥칠 때마다 이미 취약해진 농촌 사회는 더욱 큰 충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저서 <심오조사(寻乌调查)>에서 중국 농촌이 다층적인 착취 속에서 농사를 지어도 거의 이익을 얻지 못하는 상태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굶주리지 않기 위해 여전히 농업에 대량의 노동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으며, 농촌의 취약함은 다시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농촌은 여러 겹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외국 자본의 수탈이 있었고, 둘째, 자국의 부패한 관리들이 존재했으며, 셋째, 지주와 사족들의 지대 착취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토호, 부패한 사족, 그리고 도적들의 강탈이 더해졌습니다. 그 결과, 산업이 발전할수록 농촌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제공하기는 커녕 오히려 산업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어, 산업화 시도는 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느 국가 든 산업화를 이루려면 반드시 불가피한 자본 축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낙후된 봉건적 토지 제도는 축적에 들어가는 모든 대가를 농민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여기에 외국 자본의 수탈까지 겹치면서, 다층적인 착취 구조 속에서 취약한 농촌 경제는 쉽게 붕괴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또 역으로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거의 모든 후발 국가들이 마주하는 난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통치 계층이 대부분 지주 계급이었기 때문에 토지 개혁은 더욱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이에 비해, 과거 유럽 국가들은 자본가 계급이 해외 식민지에 대한 약탈을 통해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본국의 봉건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애초에 이런 문제를 겪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반면, 한국이나 대만처럼 토지 개혁에 성공한 후발 국가와 지역들은 대부분 외부적 요인에 힘입은 경우였으며, 그곳의 통치 세력은 지역 내 토지 이해관계와 얽혀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경우, 내부적으로는 더 강력한 힘을 동원해 전통적인 봉건 제도와 그 상부 구조를 철저히 파괴해야 했으며, 외부적으로는 서구 자본의 침입을, 적어도 가장 취약한 자본 축적 단계에서는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농촌에서 자본을 추출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지만, 적어도 원시 자본 축적 단계에서는 국가의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아래 단일한 경로로만 자본이 추출되는 방식만이 허용되어야 했습니다.


현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은 단순히 봉건제도와 그 상부구조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의 산업화를 완수하는 과정까지 포함됩니다. 중국은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취약한 경제 기반으로 인해 충분히 광범위한 내수 시장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농촌의 낙후된 인프라와 낮은 인구 자질은 경공업 발전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강력한 구매력을 지닌 신사 계층(gentry)의 존재와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문제의 핵심은 중국의 광활한 국토가 지역 간 발전 불균형을 초래하기 쉬웠으며, 일단 불균형이 발생하면 빈부격차 문제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경공업 발전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이룬 국가들은 대체로 발달된 해외 시장과 강력한 군사적 후원을 바탕으로 했으며, 대부분 국토 면적이 작은 국가들이었습니다.


경공업이든 중공업이든, 자주적인 민족 국가 건설의 핵심 과제는 자본 축적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서구 국가들은 이 비용을 타국에 전가할 수 있었지만, 중국은 스스로 그 부담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용을 전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에게 전가한다면, 관료·상인·지식인 등 엘리트 계층과 도시 주민들이 과도한 사회 자원을 소비하게 되어 사회 불평등을 심화 시키고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산업화를 추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엘리트 계층이 일반 대중과 함께 자본의 원시 축적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지위를 -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나마 - 제고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엘리트 계층이 점점 더 많은 사회 자원을 독점하고 이를 영구화 하는 한편, 나아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 하려고 할 때, 노동자·농민은 이에 맞서 싸울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으로부터 자본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었지만, 이것이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어 농촌의 경제 기반이 붕괴되는 일은 반드시 방지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은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를 최종적으로 완수하겠다고 나선 것은 바로 공산당원들 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그 저서 <신민주주의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해 동안 중국의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위하여 투쟁해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혁명을 위해서도 투쟁해왔다. 이 모든 것은 중화민족의 새 사회와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새 사회와 새 국가에는 새 정치, 새 경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 문화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중국을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경제적으로 번영한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낡은 문화의 지배로 인하여 우매하고 낙후된 중국을 새 문화에 의한 지배를 통하여 문명되고 선진적인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농촌 문제와 농민 문제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농촌 기층 사회의 무정부적 상태와 다층적인 착취가 중국이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면, 강력하고 조직된 힘으로 농촌 깊숙이 침투하여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농민을 조직하여 혁명을 일으켜야만 이 체제를 깨부수고 현대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를 세울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학자 황런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중국 농촌을 개혁하여 농업 잉여를 상업과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하부 구조를 만들었다. 훗날 중국의 발전 역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목적은 최종적으로 실업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함 이였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재정과 통화 제도, 충분한 권위를 갖춘 기층 통치 체제, 그리고 새로운 문화적 이데올로기라는 현대 민족국가의 필수 요소들이 갖춰진 이후 에야, 중국의 현대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전면적인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마오가 내놓은 해답은 일종의 ‘총체적 혁명’이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역사적 특징과 세계 정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전 영역에서 혁명을 일으켜 중국의 심각하게 경직된 전통적인 사회·정치·경제·문화 조직 구조를 타파하고, 공평하고 공정한 사회를, 적어도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 축적의 대가가 무한정 노동자와 농민에게 집중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외국과 협력하는 한편,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모순을 후진국으로 전이 시켜 이중적 착취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 계급 모순이 격화되어 민생이 피폐해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중에서, 문화 전선과 계급 의식에 대한 마오의 강조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작가들 사이에서도 드문 것이었으며, 오히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 패권’ 개념과 맞닿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마오는 <신민주주의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민족적· 과학적· 대중적 문화가 바로 인민대중의 반제, 반봉건적 문화이며 신민주주의적 문화이며 중화민족의 새 문화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논의들은 마르크스가 말년에 제시한 ‘카우디움 협곡을 뛰어넘기’ 란 구상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계승한 것이며, 동시에 통일전선 전략에 대한 마오 스스로의 독특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담겨 있었습니다.


<신민주주의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호방하게 선언합니다.

“신민주주의적 정치, 신민주주의적 경제, 신민주주의적 문화의 결합이 바로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며, 이것 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화민국이고, 우리가 이룩하려는 새로운 중국입니다. 새로운 중국이 모두의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 함께 맞이합시다. 새로운 중국이라는 항선의 돛대가 수평선 저편에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다 함께 박수로 환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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