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문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국내에 체류중인 이주노동자가 110만 명을 넘었다. 이 중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노동자만 28만 명 이상으로 집계된다. 소위 ‘다문화 사회’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막연한 먼 미래가 아닌 당면한 현재이며, 이는 특히 농어촌과 지방 산업단지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국내의 농어업은 이주노동자 없이는 존속 자체가 힘들어진 상황이며, 재벌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대부분인 지방의 중소기업들은 생산단가 절감을 위해 저임금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확대는 또한 이들에 대한 배외주의와 인종주의의 심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증오선동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급격히 확산되고, 대중은 소위 ‘불법체류자’에 대한 단속에 환호한다. 중국인, 무슬림 노동자에 대한 적개심은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그 강도는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진보진영 내의 입장은 크게 아래의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인권담론적 접근이다. 이는 운동 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주된 입장이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들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인 사회적 소수자로 규정하며, 문화적 층위에서 혐오에 맞선 존중과 포용을 선전하고, 제도적 층위에서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내국인 노동자에 대한 위협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는 주로 공장노동자, 건설노동자 등에 기초한 노동운동 내에서 주로 보여진다. 이들은 이주노동자의 증가가 내국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노동시장에 노동력을 과잉공급하여 임금하방압력을 유발하는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과학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확대를 파업을 무력화하고 임금과 노동조건의 악화를 추동하기 위한 자본의 계획적인 사보타주라는 설명을 내놓기도 한다.
이 두 입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인권담론적 접근의 가장 주된 문제는 현상을 피상적으로 파악할 뿐,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규명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데 있다. 어째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외주의와 인종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대중의 후진적인 의식을, 누군가는 파시스트 세력의 배외선동을 그 이유로 꼽는다. 대중의 후진성이 어째서 인종주의로 이어지는가? 파시스트들은 어째서 이주노동자를 표적으로 삼는가? 원인이 그것이라면 어떻게 이를 타파할 수 있는가? 인권담론을 내세우는 이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묻지도,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도 않는다. 역으로 질문을 묻는 이들을 계급환원주의자나 인종주의자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다.
내국인 위협론은 노동자가 경험하는 불안과 분노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인권담론보다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관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 역시 이주노동자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내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분노를 어떤 정치적 목표를 위해 조직하고 활용할 것인가? 사회의 어디에 적대선을 긋고, 어떠한 강령을 내세우며, 누구를 폭로하고 타격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경우 이들에게 대중의 분노나 공포는 개입해야 할 현실의 문제가 아닌, 앞선 입장의 사람들을 꾸짖으며 자신의 지혜를 과시하기 위한 악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되고 국내이주노동이 본격화된지 30년, 고용허가제가 시행된지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진보진영은 꾸준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과 역량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떠했는가? 인권과 포용, 존중이라는 메세지는 오늘날 대중에게 아무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나날이 과격해지고 있는 이주노동자, 이민자 및 외국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대중을 묶어세우는 대신 그 정념에 편승할 뿐인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것이 ‘대중의 뜻’이라며 배외선동을 정당화하거나, 작업현장의 이주노동자를 적대하고, 당국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추방을 요구하는 등의 내국인 이기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백만을 넘어가건만 민주노총의 이주노동자 조합원은 4천여 명에 그친다. 내국인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들은 조합원들의 협소한 이익만을 방어하는 소집단주의에 경도된다. 이주노동 확대의 배후에 있는 자본의 의도를 지목하는 사람들도 적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대중과 괴리된 반자본총파업 따위의 공상적 구호를 낼 뿐이거나, 이주노동자를 자본의 편으로 규정하고 배외주의를 조장, 방조하는 태도에 그칠 뿐이다.
맑스주의는 유물론이다. 당면한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맑스주의 방법론은 행위주체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째서 이주노동자들이 국내로 들어오는가? 자본이 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은 왜 자국민이 아닌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산업은 식민모국 미국에의 종속과 산업 자체의 기형적 구조에 의해 만성적인 저이윤에 시달리고 있다. 재벌대자본은 이윤확보를 위해 하청업체에 터무니없는 단가 후려치기를 감행하고, 중소하청자본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는 것이 한국 산업의 구조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주노동자는 이러한 피라미드식 착취구조 하에서 내국인 노동자보다 훨씬 취약한 위치에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용허가제이다. 고용허가제란 E-9 비자를 통해 고용허가와 체류자격을 연계하여 이주노동자의 국내 취업을 관리하는 제도이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는 스스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이직의 자유가 박탈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는 임금체불, 폭행, 장시간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린다. 더 임금이 높은 사업장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하기에 이주노동자들은 저임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는 전체 노동자에 대한 임금압박으로 이어진다.
고용허가제의 작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폭행이나 임금체불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를 입증해 고용센터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입증책임은 전적으로 이주노동자에게 있다. 퇴사 후에는 3개월 이내에 새 직장을 찾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출국 대상이 된다. 언어장벽과 이로 인한 법률, 취업시장에의 접근성 문제를 생각할 때, 이는 실질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이직가능성을 봉쇄하는 제도이다.
고용허가제가 초래하는 결과는 참혹하다. 2025년 2월 영암의 돼지농장에서는 상습적인 폭언·폭행에 시달리던 네팔 출신 청년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달 나주의 벽돌공장에서는 스리랑카 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조롱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해당 노동자는 지난 6개월 가량 이러한 괴롭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사업장 이전이 불가능했기에 이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주노동자의 확대는 또한 산업예비군의 확대라는 성격도 지닌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대체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은 노동자로 하여금 경제투쟁에 나서는 것을 막아세우고, 더 낮은 임금조건, 더 열악한 노동환경을 수용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결의한다 하더라도 즉각 대체인력을 투입해 파업을 무력화하는 것 역시 산업예비군의 존재로 인해 가능하다.
맑스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 수 있지만, 노동력 외에는 팔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조차 없는 존재이다. 내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써 그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이주노동자의 계급적 성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분석이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전술은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노동계급은 고용허가제를 비롯해 이주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를 조장하는 법과 제도를 집중적으로 타격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화하여 사업주의 횡포에 집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노동자의 동등한 권리가 보장될 때, 따라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경제적 유인이 사라질 때, 이주노동자를 통해 내국인 노동자를 타격한다는 자본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노동계급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외주의와 국가기구의 비인륜적인 단속행위에 단결해 맞서 싸워야 한다. 이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짓일 뿐만 아니라, 해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주노동자로 하여금 더더욱 열악한 조건과 저임금을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전체 노동계급의 임금과 노동환경을 저해시키는 자해행위일 뿐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주노동자의 계급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 이주노동자를 단지 외모나 문화의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을 뿐인 존재로 분석하는 것도, 노동계급 외부의 적으로 두는 것도 모두 그릇된 관점이다. 이주노동자는 노동계급의 일원이며, 그 안에서도 가장 큰 억압과 박해를 받고 있는 집단이다.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억압과 차별, 폭력은 그 뿌리를 경제적 토대에 두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자신들의 이윤을 확보하는 관료대자본, 그리고 그 주인인 미 제국주의 금융자본이야말로,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노동자의 진실된 공통의 적이다. 좌익세력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고 관료자본과 미제국주의에 맞선 전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의 생계를 위협하는 외세’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정당하다. 좌파의 의무는 그 분노에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진짜 외세, 진짜 적을 폭로하는 것이다. 대중의 정당한 분노를 ‘혐오정서’ 따위로 치부하고 비난하는 것도, 즉자적인 분노를 모두 긍정하는 것도, 결코 좌파의 자세는 될 수 없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외주의는 단호하게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하듯 대중의 후진적 인식을 탓하며 공허한 포용과 존중의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는 배외주의에 맞서싸울 수 없다. 배외주의는 무지나 악의의 소산이 아니라, 대중이 삶 속에서 감각하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즉자적이고 근시안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살아있는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단절된 선전은 결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마오 주석은 “대중으로부터 나와 대중으로 돌아간다”는 군중노선의 원칙을 확립했다. 대중의 파편화되고 체계화되지 않은 의견을 수렴하여, 과학적 이론을 통해 이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지식과 노선으로 정제해 선전선동으로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는 것, 이같은 군중노선의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는 대중의 경험을 반영하여 올바른 인식을 획득할 수 있고, 대중은 우리의 노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중의 인식과 유리된 채 허공 속의 가치들만을 좇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약한 분출구를 향해 맹목적으로 터져나올 뿐인 정념에 집어삼켜지지도 않기 위해서는 군중노선에 기초한 전략전술이 요구된다. 그리고 군중노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대중 속에 잠겨 그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배우고, 과학적 이론에 기초해 일관된 노선을 추출하여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할 주체가 요구된다. 즉, 공산당의 건설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방법론이다. 배외주의에 맞서되 대중을 버리지 않고, 노동자의 분노를 받아들이되 그 즉자성에 굴복하지 않는 것. 대중 속에 들어가고, 대중으로부터 배우며, 그 경험을 혁명적 이론으로 종합하고, 그것을 다시 대중에게 강령으로 돌려주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조직적 주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현장에서부터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계급적 단결의 기반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노동자를 갈라놓는 모든 제도와 정치공작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성장시키며, 마침내 자신을 하나의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조직하는 것. 이주노동자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바로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투쟁을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대중의 자생적인 움직임을 하나의 혁명적 방향으로 조직하며, 현장의 경제투쟁들을 전체 사회의 변혁이라는 목표와 결합시킬 정치적 중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이다. 이주노동자 문제의 해결은 노동계급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바로 대중 속에서 배우고 대중과 함께 투쟁하며 대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당을 만들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