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사회주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개요
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주의 기획들에 대한 평가는 전세계 좌익들에게 있어 언제나 논쟁의 주제였다. 계승과 청산, 호교적 방어와 면피적 부정 사이에서 전세계 좌익들은 길항해왔으며, 한국 또한 다르지 않았다. 소련의 패망 이후 한국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므로’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자신들은 소련이라는 역사적 실험의 실패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련해체라는 역사적 파국에 대응해 특정한 종류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만듦으로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변명들을 지어냈다.
소위 “스탈린주의 비판”은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국제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논쟁과 시도, 성공과 실패들을 평가하고 지양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지 않고도, 쉽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방어기제였다. 스탈린주의를 “비판”함으로서 그들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비판 불가능한 성역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방어기제의 역사적 정당성을 트로츠키주의의 계보로부터 추출하였고, 이러한 유사-트로츠키주의의 범람은 기실 트로츠키주의의 실질적 내용보다는 그 역사적 서사를 일종의 장식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경쟁적이면서도 표면적인 수용으로 특징 지어졌다.
또는, 그 동안 자신들이 신봉해온 동구권 교과서들에 대한 신앙을 새로운 대상으로 이동시킨 자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호교론적으로 수호해온 맑스레닌주의는 그들을 80년대 내내 억압하고 짓눌러온 근대적 거대서사로 둔갑시켰다. 신도들에 의해 스스로 허물려진 성전 위에 새롭게 들어선 신들은 푸코, 들뢰즈, 바디우 등이었다. 새로운 우상들은 실천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생산하지 못하였지만, 적어도 정신 상으로는 그들에게 새로운 위안과 새로운 세계관을 부여하여. 맑스레닌주의의 부재가 만들어낸 거대한 결핍을 메워주는데 성공하였다. 유사트로츠키주의자들과 이들은 심리적인 근본에서 동일하다.
혹은 기존에 존재해온 맑스레닌주의를 강철로 된 법조문처럼 사수하며, 패배의 기억으로부터 발전과 지양의 계기를 찾아 나서려기 보다는 그저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철저히 수행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기존의 호교론적 태도를 고수하는 극소수의 집단 또한 존재했다. 이들은 앞선 두 부류에 비해 정치적 정직성을 관철하였으나, 결국은 과학의 현단계를 끊임없이 지양하고 발전시키는 맑스주의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린 자들이다.
그렇다면 현실사회주의의 경험과 이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의 역사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가장 먼저, 현실사회주의는 분명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 권력을 세웠으며 전시공산주의 시기와 NEP 시기를 거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은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을 후원했고, 파시즘과 나치즘을 격퇴했으며, 동유럽 파르티잔 전쟁을 지원해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몰아냈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허나, 결국 현실사회주의는 패배했다. 소련은 흐루쇼프 집권 이후 자본주의 복고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은 화궈펑과 덩샤오핑이 이끄는 주자파(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집단)에 의해 권력을 탈취 당했다.
이 모든 패배, 이 모든 실패는 어째서 벌어진 것일까? 누군가는 스탈린을 탓하고, 누군가는 흐루쇼프나 덩샤오핑 같은 수정주의 지도자들을 탓한다. 또한 누군가는 서구에서의 혁명이 실패한 이상 반혁명은 필연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들은 맑스주의의 패배를 맑스주의 외부로부터, 즉 우연이나 통제불가능한 요인으로부터 찾는 것에 불과하다. 맑스주의가 진정 과학이기 위해서는, 현실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실험을 통해 기존의 오류를 수정하고 성과를 계승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살펴본 후 주된 한계들을 범주들로 묶어 살펴보고 그 한계들을 넘어설 대안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사회주의란?
현실사회주의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주의 자체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거대한 과도기이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계급사회를 지양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이 필수적이며,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요구된다. 과도기 사회에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공존하며,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이 전복되는 순간 자본주의 복고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의 경제경영원리로 생각하는 집단소유, 협동소유, 독립채산 등은 개별집단의 소유에 기반하거나 상품생산에 기반하기에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요소이며 이러한 요소들은 언제든 복고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혁명 직후 소멸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사회주의 건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극좌적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자본주의적 요소들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감독받아야 하며,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사멸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사멸시키고 사회 내의 공산주의적 요소를 강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신노동과 물질노동 간의 분업을 철폐하고, 계획노동과 집행노동 간의 분업을 사멸시키며, 노동자들이 개별 생산단위의 관리와 운영에 있어 집단의지에 기초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개인의 욕구에 의한 생산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의해 확립된 정치적 목표를 위한 생산을 확립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목표는 과도기를 끝내 종결시키고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란 무엇이었나
사회주의에 관해서는 정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글의 구체적 주제인 현실사회주의는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현실사회주의 기획이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체제 변혁을 시도한 역사적 사례들을 총칭하며, 생산수단의 국유화·집단화, 계획경제,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 혹은 노동자당의 영도 등을 특징으로 한다.
현실사회주의의 수많은 오류와 난관의 질곡들을 인정하더라도, 현실사회주의 기획이 성취하였던 몇 가지 성과만은 부정할 수 없다.
첫째로, 현실 사회주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최초의 노동계급 권력을 현실에 존재하게 하였으며 노동계급 혁명이란 것이 공상이 아닌 현실에서 가능한 것임을 증명하였다.
둘째로, 현실사회주의는 봉건,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영향력을 생산양식의 광범위한 변화를 통해 해체하며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잉여가치의 사적 축적을 금지하여 사회적 축적으로 전환하고 착취를 분쇄하였으며, 국가경제를 계획화하여 자본의 무정부적 생산을 해소하였다. 또한 소련/중국 등에서는 금융자본주의가 아닌 방법으로도 고도공업화에 필요한 초기 축적을 가능케 한 최초의 대안적 산업발전경로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현실사회주의는 이윤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인민대중이 실제로 필요로하는 산업을 육성하는 선례를 만들어냈고, 중공업 및 기초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냈으며, 교육·보건의 보편화, 사회적 서비스 지원, 빈곤·문맹 퇴치, 여성의 법적·사회적 지위 향상, 봉건·식민·후진적 사회의 악습 및 잔재 철폐를 통해 억압받던 다수 인민의 삶을 구조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하였다.
넷째로, 현실사회주의는 전세계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독립운동을 후원했으며 끊임없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투쟁을 벌였다. 현실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로디지아, 베트남, 알제리 등 수많은 국가들은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성과로부터 자기자신을 분리하고 단절 시키려는 경향이 좌익들 사이에서 사상적 지배력을 발휘하지만,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다. 파리 코뮌이 수많은 오류를 품고서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맑스와 엥겔스가 파리 코뮌을 부정했던가? 파리 코뮌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야 말로 맑스와 엥겔스의 후기 이론이 정립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하지 않았던가?
결국 현실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실체를 어떤 취향적, 정서적 이유나 정치적 알리바이를 위해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때때로 몇몇 청산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사회주의는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므로 자신들은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들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이는 이론의 발전과 경합을 가로막는 일종의 사고금지조치에 불과하며, 역사적 실험과 경험을 통해 강화 발전해가는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부정하는 자기파괴적 위안에 불과하다. 과학에서 ‘고전적 뉴턴주의’ 따위가 진지한 하나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듯이, ‘고전적 맑스주의’ 또한 무가치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평하던 부정적으로 평하던 이는 실존했던 유일한 사회주의의 형태이며 다른 모든 방법론은 실패하였다. ‘좌익 반대파’들은 단 한번도 혁명을 성공시키거나 유의미한 혁명운동을 만들어낸 적 없으며, 민주사회주의는 아옌데와 팔메의 실패를 통해 불가능한 기획임이 증명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는 현실사회주의라는 거인 위에서 그 거인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고 성공을 모방하여 구체적 지양(Aufheben)을 통해 오늘날의 노선, 오늘날의 구체적 방법론을 도출하는 수 밖에 없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진행
현실사회주의는 20세기에 존재한 두 차례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속에서 등장하였다. 1차 대전을 거치며 러시아 혁명이, 2차 대전을 거치며 중국 혁명이 성공하였다. 동시에, 이들 체제는 농촌사회 속에서, 후진적 생산력과 외부의 군사·경제적 압박, 그리고 내부 반혁명 위협 속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레닌이 지적한대로, 세계자본주의 내에서 가장 약한 고리, 즉 제국주의의 약점으로부터 노동계급의 승리가 도출된 사례들이다.
내전 중이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탄생과 동시에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산업 국유화, 계획경제 도입, 농민들로부터 식량 강제징발 등의 조치로 대표된다. 전시공산주의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효율적이었지만, 여러 부작용과 불복종을 낳았다. 결국 1921년 러시아는 신경제정책(NEP)이라는 시장정책을 시행하며 농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였고, 신경제정책은 1914년부터 시작된 대전쟁과 직후 벌어진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에 활력을 돌게 하였다.
중국은 내전 승리 이후 당면 과제를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노동자계급과 농민, 소부르주아, 민족자본가 등이 노동계급의 영도력 하에서 공동감독하는 국가자본주의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로 점차 이행할 것을 천명하였다. 중국은 1937년부터 지속된 전쟁피해를 회복해야 했기에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즉시 철폐하지 않았으며 총노선 발표 이전까지 매판자본의 분쇄와 토지개혁에 집중하였다.
소련은 1928년에, 중국은 1953년에 5개년계획을 실시하며 사적소유 관계를 집단화함과 동시에,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업발전을 통해 기존 생산관계의 해체, 새로운 생산관계의 건설, 제국주의·반혁명 세력에 맞선 무장력 건설, 문맹·질병·기아의 급속한 감소가 이뤄졌다. 국가와 당의 중앙집중적이고 집약적인 역량투입으로 인해 이것들이 가능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소련과 중국의 체제는 영원토록 유지되지 못하였는가?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 사회이다. 계급은 소멸하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존속한다. 이는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탈취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새로운 모순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서 생산관계는 사회주의적이나 사상·의식·생활양식은 봉건 사회나 자본주의의 잔재가 유지된다.
소련은 1936년, 생산관계 내에서의 사적 관계 소멸로 인해 자본계급의 철폐가 완수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렇기에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당이나 국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생기는 것을 필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수정주의의 위협을 대중을 동원한 비판과 투쟁을 통해서 해소한다는 발상을 할 수 없었고, 이를 단순히 ‘오염된 부위’에 대한 제명과 배제, 행정적 조치 등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소련에서는 상부구조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과업이 방치되고 말았다. 반면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과도기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다 보았고, 그 일환으로 대중들을 동원한 삼반오반 운동과 반우파운동 등을 통해 사회 내 부르주아 및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을 벌였다.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소련에서는 30년대에 양성된, 현장노동자 출신이면서 동시에 간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며, 경제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선진 노동자층이 대부분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대중과 당을 연결할 중간집단이 소실되었고, 전시체제 하에서 당과 국가가 더욱 밀착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기구의 관료주의가 당으로 전염되었다. 이러한 당과 대중 간의 유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당에 더욱 잘 침투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말년의 스탈린은 테크노크라트 집단과, 협동농장에서 기인한 신흥 자본을 충분히 견제하지 못하였다. 결국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흐루쇼프 쿠데타에 의해 노동계급 권력이 분쇄 되었고, 소브나르호즈 개혁을 거치며 자본주의 복고가 이뤄지게 되었다. 흐루쇼프 반혁명세력은 이미 소련 내에는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인민국가론을 당의 교조로 내세워 모든 종류의 계급투쟁을 막아섰고, 소련 내 노동계급 지배가 철폐된 상황에서 흐루쇼프는 기업소 관리인들의 자율성을 극도로 확대시켜 개별 관리인들이 자본축적 및 부르주아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소련의 흐루쇼프는 평화공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말 그대로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가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의 지도 하에서 전세계적인 계급간 전쟁과 투쟁을 멈추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이 이루어진다는 퇴행적 주장 또한 내세워졌다. 또한 수정주의 소련은 제 3세계에서의 민족해방운동 또한 소위 소련에 의해 ‘민족민주정권’이라고 이름 붙여진 반미 성향의 군부정권이나 소부르주아 정권에 의해 비폭력적으로 사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공산당의 역할을 극도로 축소시켰다.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과 평화이행론은 전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후일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구조개혁론과 유로코뮤니즘이라는 투항주의적 노선으로 계승된다.
흐루쇼프 집권 이래로 사회주의 우클라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파괴되었다. 소련은 필요에 기반하여 생산량을 하달하는 중앙계획경제를 포기했으며, 기업의 자율적인 계획에 따라 생산된 상품을 분배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자율적 계획의 결과로 얻은 기업의 이윤은 실질적으로 기업소 관리인에게 돌아갔으며, 자본주의적-무정부적 생산을 가장 잘 달성한 기업에게는 인센티브가 제공되었다. 생산 효율성을 늘리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외견적 목적 하에 실시된 소브나르호즈 개혁은 생산 비용의 급격한 상승, 각 기업소의 허위 보고, 기업들 간의 상품거래 등의 부작용을 발생시켰고, 특히 필수적 산업 부문을 담당하는 기업에게 향해야 할 국가적 지원을 끊어 필수재 생산부문의 파산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고는 소련의 생산력과 경제적 역량을 급속도로 감퇴시켰고 성장 동력을 파괴하였다. 이후 흐루쇼프의 노골적 대서방 투항주의에도 불구하고 소련 사회제국주의를 파괴하고 소련의 부를 나눠 가지기 위한 서방 제국주의의 총공세는 계속되었다. 후일, 장기적 경제위기 속에서 소련 내 각 민족의 분리독립 시도가 고조되는 와중 고르바초프는 울리가르히들 및 서방 금융자본과 손을 잡고 기존 소련의 국가통제적이고 복지국가적인 자본주의를 노골적 신자유주의로 대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해체되어 더욱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한 편, 소련에서의 흐루쇼프 쿠데타를 틈 타 중국에서도 자본주의로의 복고를 추구하는 세력이 실권을 쥐고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당관료들이 부르주아 세력과 손을 잡고 자산계급권력을 복고하려 시도하자 마오쩌둥은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 당과 국가 내의 우익세력 및 자본주의 복고 세력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문혁은 대중을 단순한 동원대상이 아닌 정치권력의 감시자이자 인민민주주의의 주체로 끌어올렸다. 문혁은 사회주의 하 계급투쟁 문제를 최초로 체계화했으며, 문혁을 기점으로 당은 무오하지 않고, 당이 타락할 때에는 언제든 대중들에 의해 타격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막대한 대중을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정치적 주체로 각성 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동시에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문화대혁명에 있어 명확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지도와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마오쩌둥 사후, 보신주의에 찌든 군부와 자본주의 복귀세력이 손을 잡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들의 불법적 쿠데타의 결과로 마오쩌둥 노선을 지지하던 4인방 세력은 체포 및 실각 당했다. 새 집권세력은 생산력의 강화발전이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로 이어진다는 미명 아래 일련의 ‘개혁’을 시작했다. 그들은 생산력을 늘려야 한다는 핑계로 공장과 사업장에서 노동계급의 권력을 박탈했으며 상품생산을 장려했고, 인민공사를 해체하였다. 협동토지의 공동 소유자였던 농민들은 도급제라는 새로운 제도 하에서 국가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양산되었고 자본가들이 당내로 인입되어 당을 장악하였다. 주자파 쿠데타 이후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정치조직이 아닌 부르주아 통치기구의 핵심으로 타락하였고, 이에 맞선 북경노동자자치연맹의 천안문 항쟁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현실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
현실사회주의 기획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으니, 이 단락에서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겪은 구체적인 경제적 난관과 문제들을 살펴보자.
소련의 경우, 흐루쇼프 시기 경제의 탈중앙화로 인한 계획경제의 붕괴와 제2경제부문의 고도성장. 소생산자 및 자생적 자본가들의 권력 탈취가 일어났다. 레닌은 사회주의 경제에 관해 ‘소생산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를 지속적으로, 쉴 새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배양시킨다’고 논한 바 있으며, 이는 소련과 중국에서 실존한 문제이다. 소련 지도부는 소생산을 집체생산으로 전환시키는 사업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고, 중국에게는 소생산을 집체생산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준비 시간과 집약적 자본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세력의 문제, 곧 계급투쟁의 문제로 이어졌다.
또한, 스탈린 체제 하에서 소련공산당은 각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 국가 내에서의 자체적 중공업개발에 근거한 경제개발정책을 옹호했으나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 국제분업체계라는 이름 하에 우방국들의 산업고도화 및 중공업개발을 가로막고 소련 중공업 및 첨단공업의 하청기지로 전락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쿠바의 사례가 가장 노골적인데, 소련은 쿠바에게 의도적으로 사탕수수 농업 위주의 산업건설을 권유하고, 쿠바에서 수입한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정제하여 우방국들에게 더욱 비싸게 되파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국 소련 우방국들의 소련에게의 식민지적 종속을 불러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우방국들의 자립경제건설을 크게 저해하였다. 결국 동유럽 대다수 국가들은 경제를 위해 서구 외채에 의존하거나 서방 산업을 유치해야만 했으며, 이는 결국 체제 자체의 침습과 붕괴로 이어졌다.
결국 대안은 기업소 관리인과 관료들의 자율권을 최대한 제한하고 노동계급의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길 뿐이었다. 분권화라는 미명 하에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체제 내로 인입시키려는 시도는 차단되어야만 했다.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잔존하는 소생산은 인민대중에 의해 철저히 감독되어야 했으며, 협동소유는 빠르게 전인민적 소유로 전환되어야 했다. 상호호혜무역은 사회주의 국가 간의 경제적 결함을 메꾸고 발전을 고도화 시키는 도구여야 했지, 분업이라는 미명 하에 각국의 자주적 경제건설을 가로막는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현실사회주의의 정치적 문제
그렇다면, 정치적 부문에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그 어떤 투철한 혁명가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이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주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언제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사고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된 표현이기에 사회 내에 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이 잔존하는 한 그 어떤 혁명적인 전위당이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이념이 스며드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또한 가부장제의 잔재와 자유주의적 습속 등, 구 사회의 문화와 규범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한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적, 도덕적 패권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잔존하며 이는 언제나 퇴보와 반혁명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당 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노선, 즉 프롤레타리아 노선과 부르주아 노선 간의 두 노선 투쟁을 간과하거나 행정적 숙청으로 처리하려 한 것은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중대한 오류 중 하나였다.
중국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군중을 직접적으로 동원하여 대중운동을 통해 당 내를 타격하고 당 내의 부르주아 노선 추종세력들을 타도, 사회 전반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개조를 추구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실행하였다. 허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명확하고 합목적적이며 구체적인 계획의 추진에 실패하였고 일관된 이론적 지도력을 부여하지 못하였기에 복고세력의 반격을 가능케 하였다. 소련의 경우 이러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단순숙청과 같은 행정조치를 통해 복고세력을 막을 수 있다고 오판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결국 중국의 경우, 생산력주의자들의 핵심 논리, 즉 생산력을 양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정치적/문화적 개조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자본주의 복고의 핵심 무기로 쓰여졌고, 화궈펑 집권 이후에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전면적인 해방이 농업부문으로부터 시작되어 전체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장쩌민의 삼개대표론에 의해 대량의 자본가들이 당당히 공산당 조직 내에 인입되었고, 이들이 당 핵심조직을 장악하며 노동계급권력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다.
상술한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내의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이러한 투쟁을 단순한 행정적 조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동원을 통해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문화대혁명 전략의 강화발전, 심도있는 연구와 재정립이 요구된다. 중국의 교훈을 살펴볼 때, 문혁에 참여한 대중들에게는 군중노선에 기반한 명확한 정치적 지도와 목표가 제공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퇴보의 명분이 된 생산력 만능주의는 배격되어야 하며, 당은 대중의 의식의 상승과 생산관계의 진보를 주된 목표로 삼아야 한다.
현실사회주의의 국가론적 문제
다시 한번 마오쩌둥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대과도기’이며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이 잔존하는 사회이다.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왔듯이,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의 계급투쟁을 부인하고 전인민국가를 운운하거나 사회주의 내부에 내부에 모순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부르주아 노선에 대한 완전한 투항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소련공산당 18차 당대회 보고 도중 스탈린이 소련 국가가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발언을 한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일종의 준遵 국가, 즉 Semi-State이다. 즉 사회주의 사회는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와 국가가 사멸된 사회 간의 중간지점인 것이다. 국가는 계급억압의 도구이기에 준 국가에서도 국가조직은 본질적으로 반동적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당은 국가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허나 소련의 경우 전쟁과 급속한 산업건설 등 불가피한 상황들을 거치며 어떻게든 당의 결정을 전 사회에 하달하기 위한 급조책으로 당조직이 국가기구와 과도하게 밀착 및 결합되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도 필연적으로 공산당원으로의 정체성보다 국가관료로의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었고 국가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료주의적, 반동적 기풍이 당내로 전염되고 말았다. 중국 또한 고속경제건설의 과정에서 당의 선두지휘가 주된 방법로능로 부상하면서 이러한 기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회주의를 ‘완전한 사회’ 혹은 ‘적대적 모순이 없는 사회’, ‘계급투쟁이 없는 사회’, ‘모든 인민의 사회’로 규정하는 일련의 오류는 지양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이기에 언제든 자본주의로 후퇴하거나 복고될 수 있으며, 혁명세력과 복고세력 간의 치열한 모순이 잔존하고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사회이기에 결코 국가에 속한 ‘모든 인민’의 국가가 될 수 없다. 사회주의 사회는 노농동맹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여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일 수 밖에 없다. 당과 국가의 과도한 결합 및 당원들의 겸직은 제한되어야 하며 당은 언제나 국가를 감시감독하고 국가관료집단의 타락과 만행을 규제할 수 있는 외부적 존재로 남아야만 제대로 된 역능을 발휘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혁명론적 문제
현실사회주의 기획의 패배에는 그 내부적 문제 뿐만이 아니라, 세계혁명을 추동하기 위한 전략전술 상의 문제 또한 존재했다.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공산당은 각국 공산당들에게 PT독재나 인민민주독재의 수립이 아닌 기존 국가 내에서의 노동자정부 수립이나 통일전선의 우경적 해석에 근거한 반독점정부 수립을 지령하였고, 이는 각국 공산당의 실질적 개량주의화와 대기론의 흥성을 불러오며 국제공산주의운동을 후퇴시켰다.
흐루쇼프 집권 이후 소련공산당은 식민지에서의 민족민주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영도 필요성과 공산당 조직의 필요를 부정 및 각하하였고 민족자본가나 군부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정권들을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평화적이고 비자본주의적 경로’로 포장하며 식민지에서의 민주혁명전선을 교란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자본가와 계급동맹을 맺을 수는 있으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평화적이고 비자본주의적 경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협은 결코 환상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경로’는 무솔리니나 히틀러 등이 사용하던 파시즘적 구호에 불과하다.
반면, 마오쩌둥 시기 중국공산당의 경우 마술적인 ‘비자본주의 경로’를 내세우지 않고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농민, 소상공인, 민족자본가, 지식인 등이 연합하여 무력혁명을 통해 노동계급 주도의 부르주아 혁명을 이룩한 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신민주주의 혁명론을 내세웠다. 중국의 경우 신민주주의 혁명에 있어 소련과 반대로 공산당의 주도력 및 노동계급의 독자무력인 인민군의 필요성을 확고히 정의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론은 이후 제3세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단 한번의 정치적 총파업이나 인민의 총봉기를 기다리며 혁명을 무기한적으로 미래 어느지점의 ‘메시아적 지점’으로 상정하는 기존 대기론, 그리고 대중적 기반없는 무장봉기만을 주장하는 포코이론을 동시에 지양하고 대체할 새로운 전술로서의 인민전쟁론으로 강화 발전되기도 하였다.
총론
역사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옛 일들의 기록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취미나 개인적 도락의 주제일 것이요, 또한 누군가에게는 훈고학적 탐색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맑스주의자에게 있어서 역사는 그런 식으로 규정될 수 없는 대상이다. 맑스주의자에게 역사는 실천의 결과를 검증하고, 검증에 따라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거울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부인과 호교론적 숭배는 역사를 거울로 삼지 못하는 기능부전에 빠진 속류 맑스주의의 양쪽 면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논함에 있어 그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문제의 각 항들을 검토하지 않고 특정한 당파의 자기서사를 따라 원천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비과학이며, 현실사회주의의 성과를 논함에 있어 그러한 성과들이 가능했던 역사적 조건과, 성과가 영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 이유에 대한 탐색을 탈각 시키는 태도 또한 같은 종류의 비과학이다.
러시아 혁명을 위해 몇명의 볼셰비키가 죽었던가? 중국공산당이 대륙의 유일한 수권세력으로 자리잡기 위해 몇명의 홍군 병사들이 죽었던가? 우리는 그 시체들의 산 위에 서 있다. 우리의 선배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다하여 우리에게 역사를 남겨주었다. 그 역사 위에 올라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그리고, 그리하여 비로소,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새로운 사회주의 기획을 추진하고 달성하는 것만이 그들의 희생에 보답할 방법이다. 역사를 장식물로 삼지 말자. 물신의 대상으로 삼지도 말자. 그들의 생산적 패배를 거름삼아 우리의 승리를 만들자. 사회주의라는 말이 흘러가는 옛 이야기로 남지 않게 하자.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를 공정히 논하고 계승과 지양을 동시에 행하여 선배 혁명가의 무덤들에 남겨진 잔해들을 지양의 용광로로 보내 오늘날 우리가 휘두를 혁명과학의 전능한 검을 벼려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