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편지와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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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편지와 답변

얼마 전 웹진 반란의 어느 독자께서 보내주신 의견으로, 글 안에서 담겨있는 논제들 중 다뤄볼만한 중요한 내용이 존재하며 해당 독자께서도 투고를 원한다고 덧붙이셨기에 편집부의 답변과 함께 게시합니다. 혁명 이론은 언제나 끊임없는 의문의 제기와 이에 대한 응답이 맺는 변증법적인 상호변형관계를 통해서 발전합니다. 독자 제현들께도, 아래의 문답이 나름의 유의미한 지양과 발전의 계기로 읽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자 편지와 답변

아래는 얼마 전 웹진 반란의 어느 독자께서 보내주신 의견으로, 글 안에서 담겨있는 논제들 중 다뤄볼만한 중요한 내용이 존재하며 해당 독자께서도 투고를 원한다고 덧붙이셨기에 편집부의 답변과 함께 게시합니다. 혁명 이론은 언제나 끊임없는 의문의 제기와 이에 대한 응답이 맺는 변증법적인 상호변형관계를 통해서 발전합니다. 독자 제현들께도, 아래의 문답이 나름의 유의미한 지양과 발전의 계기로 읽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웹진 반란께,

웹진 반란의 글들을 읽으며 많은 유익을 얻고 있으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웹진 반란의 이행노선에 대해, 신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에 관료자본주의 하에서 진보정권의 집권과 개량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하였습니다. 즉, 이행노선을 진보정권의 집권과 개량 -> 신민주주의 혁명 -> 사회주의 혁명 순으로 구체화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웹진 반란이 생각하는 “대중적 정치조직”의 가능한 행동에 집권이 있는지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조직론에서 대중정당론과 생산조직론을 보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웹진 반란이 말하는 “대중적 정치조직”에 속하는 대중정당의 경우 집권을 통해 국가 내부로 진입 가능하나, 소부르주아 계급과 연합하여 형성한 것이기에 요구되는 두 혁명인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방향성으로 갖지 못하고 개량 및 경제의 자주화에만 합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대중정당의 집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개량의 축적을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이 아니라, 대중의 조직화, 의식화, 및 신민주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인 경제의 자주화의 달성입니다. 웹진 반란이 말하는 “당”에 해당하는 정치조직의 경우 의식화된 노동계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방향성으로 갖을 것입니다. 정치조직은 궁극적 목표인 최대강령과 현 시점에서의 전략적 목표인 최소강령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웹진 반란의 “개입대상조직”에 속하는 생산조직의 경우 오픈소스나 협동조합 등의 자치적, 실험적 생산방식을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생산조직에 대한 구체화는 아직 웹진 반란에서 시도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정치조직과 대중정당간 조율에 대해 구체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조직과 대중정당은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기 위해 서로 합의하는 최소강령을 형성하고, 해당 강령의 준수를 공동으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 점검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서면으로 고정된 공동 강령, 공동 전략 위원회를 통한 상시적 조율, 그리고 상호 비판권 제도화일 것입니다.

넷째, 대중정당에게 가능한 타협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정당과 정치조직이 합의하는 최소강령을 형성하고, 해당 대중정당이 집권했을 경우를 가정합시다. 해당 대중정당이 자본주의적 한계 혹은 실리를 근거로 자본가들에게 타협하고자 하고, 정치조직은 해당 타협에 반대하는 경우를 가정합시다. 저는 타협이 대중의 조직화를 저지하지 않는 경우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및 참정권 등에 대한 타협은 불가), 집권한 대중정당이 타협의 내용과 한계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경우, 그리고 타협의 결정 과정이 대중정당 내의 민주적 토론에 기반한 경우,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치조직과 대중조직 간 (아마도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종결되었을) 협의과정이 있는 경우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 기준을 만족하지 않는 타협을 한 대중정당 정권은 정치조직에 의한 전복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 기준을 만족하는 타협을 한 경우, 대중정당 정권과 정치조직은 갈등을 부정하거나 은폐하지 않으며, 정치조직은 정권을 전복대상으로 보지 않으며, 정권은 정치조직을 불법화하거나 탄압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충돌을 통해 대중은 개혁의 한계와 혁명의 필요성을 경험하고, 정치조직은 원칙의 경직성과 전술의 유연성 사이의 균형을 배우고, 대중정당은 타협의 유혹과 대중의 압력 사이에서 위치설정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들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 올림.

이상의 네 가지 의견은 모두 본 웹진에 게재된 바 있는 <당의 동심원적 건설에 대하여>에 서술된 조직론에 대한 첨언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첫번째 의견에 대해 답변하자면 말씀해주신 경로, 즉 의회에서의 집권을 매개하는 변혁의 경로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어떤 구체적 전략 내지 청사진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과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세의 특수성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권리가 고도로 발전하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상황이라면 구조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변혁지향적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하여 국가권력의 일부나 전체를 변혁지향적 세력이 손에 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권력의 실질적 집행을 맡는 관료기구, 그리고 국가권력의 물리적 보증책인 군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통제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옌데, 팔메 등의 실패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권력을 인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거에서 변혁적 세력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가 강력한 다수파의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알리고, 반동세력에 대한 선전과 폭로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기회일 순 있으나 체제이행을 가능케 하는 기점이라고 볼 순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매우 특수한 정세 속에서, 제도를 통한 집권이라는 성취를 얻는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민대중의 힘으로 새로운 권력을 건설하고 기존의 권력을 파괴, 분쇄하는 과정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제도를 통한 집권이라는 특수하고 이례적인 사건을 거치지 않고도 전위당이 건설되고, 전위당이 인민대중 내에서의 영도력을 확립하며, 구 사회 속에서 새로운 권력을 건설하고, 기존 권력에 맞선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나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변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술한 글에서 언급한 대중적 정치조직 또한, 집권 자체를 목표로 한다기 보다는 당의 최소강령을 전체 사회에 대중의 언어로 선전하고, 당이 전개할 수 없는 공개적인 활동을 주도하며, 전체 근로대중계급들과의 통일전선을 건설하고, 선거투쟁과 의회투쟁 과정에서 적대세력을 폭로 및 비판하여 대중을 점차 혁명 대오로 이끌기 위한 중간단계적 활동을 개진하는 기구로 사고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의견에 관해서는, 가장 먼저 대중적 정치조직은 지적해주신 바처럼 그 자체로 계급연합적 성격을 지니며 사회주의적 지향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대중적 정치조직이 지니는 강령은 당의 최소강령, 즉 당면한 상황에서 제시할 수 있는 선에서의 요구들일 것입니다. 대중적 정치조직 내에서는 여러가지 정견을 지닌 사람들이 혼재할 것이고, 대중적 정치조직 내에서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 동의하는 인자는 소수일 것입니다. 다만 대중적 정치조직의 역할은 이러한 혼재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집권하여 일정한 정책적 개량을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최소강령을 요구하고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과 정치운동 속에서 점차 대중적 정치조직에 속한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기구의 계급적 본질을 자각시키고, 대오 안에 위치한 각 계급 간의 단결을 강화하며, 기존 정치세력의 반인민적 실체를 폭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중적 정치조직의 성격은 정태적으로 사고할 수 없으며, 변혁에 동의하지 않는 다수대중의 전선조직으로 시작하되 점차 이념적 고양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 대중적 정치조직 자체를 혁명대오로 강화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말씀 주신 오픈소스나 협동조합 등의 대안적 생산조직의 경우에도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규모 집적과 독점, 집약적 자본투입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장기적으로 유의미한 형태의 생산양식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재생산 가능한 형태의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간부와 활동가들 간의 생활공동체, 상호부조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과업은 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며 협동조합 형태의 대안적 생산조직은 생활공동체나 상호부조네트워크를 조직함에 있어 유의미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번째 의견에 있어서는 저희 편집부 일동 또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전위세력이 대중조직을 지도하는 방식은 결코 음모적이거나 비선적인 작풍을 띄어서는 안 됩니다. 명령이나 관료적 지도체계로는 대중을 장기적으로 지도할 수 없습니다. 전위세력은 대중을 떠나서 활동할 수 없지만, 대중은 언제든 전위세력과 그 휘하조직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측의 동의 하에 수립된 공동의 강령, 정기적인 조율과 대담, 그리고 상호 간의 비판은 언제나 필요한 제도일 것입니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당의 조직과 성원들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키지 않고, 운동의 민주성과 보안성을 함께 성취해나갈 방도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 의견에 대해서는 타협의 문제를 보다 명확하게 계급정치의 관점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맑스레닌주의 정치에서 타협 자체는 결코 배격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레닌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 지적하였듯이, 계급투쟁에서 타협은 불가피하게 발생하며 혁명적 정치의 문제는 타협의 유무가 아니라 어떠한 타협을, 누구와, 어떠한 목적과 조건 아래에서 수행하는가에 있습니다. 문제로 되는 것은 원칙 없는 타협이며,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타협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인 정치적 역량을 훼손하고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중조직이 자본가계급과 일정한 타협을 하는 상황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배신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신민주주의적 성격을 갖는 통일전선에서는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 등 서로 다른 계급의 이해가 결합하기 때문에 각 계급 사이의 모순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계급들과 동맹하기 위해서는 동맹 내부에서의 투쟁과 타협을 동시에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오쩌둥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일전선 내부에서도 단결과 투쟁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투쟁 없는 단결은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상실하게 만들며, 단결 없는 투쟁은 통일전선을 파괴하여 고립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대중정당이 통일전선의 한 부분으로서 일정한 타협을 수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며, 그 타협이 어떠한 계급의 정치적 주도권을 강화하는가가 핵심적인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자께서 제시하신 조건들은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중의 조직화 능력을 침해하는 타협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 집회·결사의 자유, 대중의 정치적 조직화와 선전·선동의 가능성 등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고 조직할 수 있는 기본적인 투쟁조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조직을 언제나 정면으로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투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을 합법화하는 대신 노동조합 관료층을 매수할 수도 있고, 노동자에게 임금인상을 제공하는 대신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도 있으며, 선거권을 확대하는 대신 노동계급의 정치적 투쟁을 선거와 의회 내부의 활동으로 한정시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타협의 가불가는 ‘대중조직을 탄압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기준은 그 타협이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를 약화시키는가, 아니면 그것을 강화시키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최대강령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노동계급은 임금, 노동시간, 토지, 주거, 정치적 권리 등의 구체적인 요구를 둘러싼 투쟁을 통해 계급투쟁을 학습하고 조직을 확대하며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개량의 축적만을 목적으로 진행된다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더 나은 조건을 얻어내는 것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혁명적 정치조직은 대중정당이 최소강령을 둘러싸고 타협할 때조차 그 타협이 노동계급의 장기적인 계급적 이해와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끊임없이 제기해야 합니다. 오늘의 양보가 내일의 투쟁을 위한 전진적 조건을 만드는가, 아니면 내일의 투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자께서 제시하신 ‘공개성’과 ‘민주적 결정’이라는 조건도 그 자체로 타당하지만, 이를 부르주아적 형식민주주의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다수결의 절차를 거쳤는가가 아니라 그 결정이 어떠한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며, 대중이 그 결정의 내용을 실제로 검증하고 투쟁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대중정당의 지도부가 자본가계급과의 타협을 당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승인받았다고 합시다. 그 사실만으로 그 타협이 노동계급에게 올바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내 민주주의 역시 계급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조직의 역할은 당내 다수의 결정을 무조건 복종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며 투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과 대중정당의 관계를 더욱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위당은 대중정당의 하위기관도 아니며 대중정당의 상급기관도 아닙니다. 양자는 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기능에서 구별됩니다. 전위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을 결집하여 혁명의 전략적 목표를 견지하고, 대중정당은 보다 광범한 계급연합을 조직하여 당면한 정치적 투쟁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양자가 언제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통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대중조직이 자본가계급과 타협하고자 한다면 정치조직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어떠한 계급적 대가를 요구하는지, 그 타협이 향후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공개적으로 제기해야 합니다. 대중조직 역시 정치조직의 비판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양자의 견해가 끝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차이는 차이대로 남겨두되, 공동의 최소강령과 공동의 투쟁에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계속해서 함께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공동의 투쟁 속에서도 정치조직은 끊임없이 대중조직을 비판하고 그 성원들을 설득하며 실질적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혁명적 정치에서 후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양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적과의 협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퇴와 양보와 협정이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력을 보존하고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혁명적 전술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부 참여나 집권 유지를 이유로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해체하고, 대중을 수동적인 지지자로 만들며, 부르주아 국가의 관리자로 스스로를 전락시킨다면 그것은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다 하더라도 혁명적 노선과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제도권 내에서의 활동은 혁명을 준비하고 건설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대중조직에 요구해야 할 태도능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타협하더라도 계급적 독립성을 잃지 않는 것, 후퇴하더라도 다음 투쟁을 준비하는 것, 권력을 획득하더라도 그 권력을 기존 국가기구의 관리에 소진하지 않는 것이 진정 전위당이 자신의 지도를 받는 대중조직에 요구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리고 정치조직의 임무 역시 대중정당의 모든 행동을 사전에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정치노선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대중 속에서 투쟁하고, 대중의 경험을 혁명적 의식으로 전화시키며, 통일전선 내부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지도력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께서 말씀하신 타협의 한계선은 법조항처럼 형식적으로, 명시적으로 그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전선에서의 단결과 투쟁, 전략적 원칙과 전술적 유연성,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성과 계급동맹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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