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레닌마오주의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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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레닌마오주의 입문

목차

서문
1강.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와 마오주의로의 파열
2강.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역사와 전망
3강. 트로츠키주의의 오류
4강. 모순론
5강. 인민전쟁론
6강. 신민주주의론

서문

현실사회주의의 패배에 대한 남한 좌파들의 대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청산주의입니다. 기존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며 현실사회주의와 무관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사회주의의 패배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지 않은 대다수의 남한 좌익은 청산주의의 길을 택했습니다. 청산주의의 길을 택한 이들 중에는 소위 고전적인 맑스주의로의 회귀를 바라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아예 맑스주의의 기본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적 본질은 하나입니다.

청산주의의 본질은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므로 사회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책임 회피에 있습니다. 이는 매우 쉽고 간편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결정적으로 비생산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청산주의자들은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 하에 현실사회주의를 맑스주의로부터 이탈한 이단으로 규정하고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축적에 대한 반추를 원칙적으로 거부합니다.

혁명의 실패를 초래한 문제를 맑스주의 내부에서 찾아내어 해당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닌,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맑스주의의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곧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사고금지조치일 뿐입니다. 맑스주의는 반증 가능한 과학입니다. 맑스주의 운동이 역사에 의해 반증 되었다면 그 반증의 원인이 맑스주의 그 자체에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극복의 지점을 모색해야 합니다.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맑스주의의 역사적 패배를 인정하고 현실사회주의의 성공과 실패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대응은 거대 이념의 포기와 의제운동으로의 산개입니다. 사회변혁이라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당장의 현실에 와닿는 실질적 목표들에 집중하자는 태도는 이념적 공백의 시대에 가장 쉽게 취할 수 있는 자세였습니다. 각개각층의 의제운동으로 산개한 운동세력은 시민사회 내에 진지를 차리고, 기존의 사회운동에서 배제되었던 새로운 의제들을 공론장 위에 올리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허나, 의제운동은 의제운동 자체로서 승리할 수 없음이 지금까지의 운동 경험을 통해 증명 되었습니다. 의제운동이 내세우는 의제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의제들을 포괄하는 정치운동을 통해 정치권력을 탈취해야만 합니다. 정치운동은 총체적 세계관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과 억압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설명하고, 그 모든 피억압자들을 하나의 정치기획을 묶어세울 수 있는 총체적 세계관 없이는 그 어떤 운동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의 복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요구되며, 총체적 세계관 없는 무제한적 산개는 더 이상 운동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대응은 교조주의입니다. 기존의 현실사회주의 역사 상에 존재하는 특정 시대의 맑스주의를 그대로 복권하여 현실에 재적용하는 것으로 사회운동 내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 사고입니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발전하는 과학입니다. 역사에 의해 증명된 오류들을 애써 무시하고 그저 이미 한 번 패배한 이념을 무비판적으로 복권시키고자 하는 정치기획은 다시 한번, 일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교조주의와 청산주의, 탈이념적 산개를 넘어 이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대안이 필요합니다. 그 대안은 바로 맑스레닌마오주의입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해가던 80년대 말, 페루 공산당은 혁명을 시작했으며 국제 혁명좌익들을 결집시켜 기존의 오류들을 극복한 맑스주의의 세 번째 단계로서의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정립을 선언했습니다. 필리핀과 인도, 그리고 터키에서는 오늘날에도 맑스레닌마오주의에 입각한 인민전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작금의 시대 사실상 유일하게 ‘혁명’의 지도이념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이념임과 동시에, 맑스레닌주의의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도 더 높은 단계로의 역사적 발전을 추구하는 혁명과학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혁명과학인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기초적인 테제들을 제시하고, 맑스레닌마오주의를 심화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초석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 짧은 문건이, 독자 분들에게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대안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와 마오주의로의 파열

1.    맑스레닌주의의 형성

 맑스레닌주의는 기존 맑스주의의 한계로부터 등장했습니다. 맑스주의는 네 가지 공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 혁명의 방법론에 관한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궁핍화 될수록 정치적으로 성숙해져 권력을 탈취할 새로운 주체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것인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조직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답변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2) 프롤레타리아의 의식화에 관한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스스로 갖추고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개심과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을 체득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은 조합의 틀 안에 갇혀 그 바깥의 정치적 투쟁과 타 부문의 투쟁을 외면하는 조합주의와 경제주의로 빠져들었습니다.

3) 수많은 억압과 이에 맞선 사회운동을 어떻게 결집시킬 것인가에 관한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는 전체 피억압 인민을 영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운동과의 유기적 연대에 실패한 결과 정치적 기획을 노동조합운동의 틀 안에 협소하게 가두고 말았습니다.

4) 고도화된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의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맑스와 엥겔스는 제국주의가 고도화되기 이전의 시대에 살아왔고, 그렇기에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명줄을 연장시키는지에 관해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공백은 맑스주의 정치기획의 실패를 불러왔습니다. 혁명의 방법론에 관한 공백은 조직의 공백을 가져왔고, 의식화에 관한 공백은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자연적으로 각성하여 혁명에 나설 것이라는 대기론을 불러왔으며, 억압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 부재는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노동운동의 틀에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의 공백은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1세계에서의 노동운동에만 집중하게끔, 그리고 식민지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경시하게끔 만들었습니다.

 허나, 기존 맑스주의의 공백을 엄밀하게 탐구하고, 여태껏 축적된 맑스주의 운동의 경험들을 새로운 노선을 확립한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 그리고 후대 소련의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공백을 메꾸는데 성공했습니다. 기존의 공백을 메꾼 두 번째 단계의 맑스주의이자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를 우리는 맑스레닌주의라고 부릅니다.

 

2.    맑스레닌주의의 의의

두 번째 단계의 맑스주의인 맑스레닌주의는 상술한 네 가지 공백을 극복해냈습니다. 공백의 극복은 곧 새로운 이론의 정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맑스레닌주의 단계에서 새롭게 정립된 이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위당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 중 계급의식을 각성하고 자본가 계급과의 적대적 모순을 인식한 선진적 프롤레타리아는 소수인 상황에서, 레닌은 선진적 프롤레타리아가 계급 전체의 전위로서 기능하기 위해 강력한 규율에 입각한 정당을 형성해야 하며. 그렇게 형성된 전위정당은 후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통해 후진 프롤레타리아를 선진 프롤레타리아의 위치로 끌어 올리는 기능을 맡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념과 강령으로 무장한 전위당이 공장을 비롯해 프롤레타리아가 생활하고 있는 모든 공간에 세포조직을 뿌리내려 기존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 정치적으로 개입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운동을 혁명적, 반체제적 방향으로 견인한다는 ‘외부로부터의 주입’ 전술 또한 전위당론의 확립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2)    통일전선

 통일전선은 특정한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포함한 여러 계급과 여러 운동을 전위정당 중심의 동맹으로 묶어 세우는 전술로, 레닌의 후계 이론가이자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맑스레닌주의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불가리아의 혁명가 디미트로프에 의해 창안되었습니다. 최초의 통일전선은 전간기 나치즘과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결성되었던 반파시즘 통일전선으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하고도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인민대중을 공산당을 중심으로 집결시키는 막대한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통일전선의 목표는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통일전선이 성취하고자 하는 공식적인 목표를 위해 사회의 전역량을 집중시키고 단결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통일전선에 참여한 제반 세력들을 좌익적으로 견인하는 동시에, 통일전선에 참여한 비-공산주의적 세력의 지도부를 폭로하고 비판하여 비-공산주의적 세력의 지도 하에 있는 대중들을 전위정당의 영도 하에 집결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즉, 통일전선의 핵심은 연대와 폭로의 이중적인 전술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전선전략은 후일 중국 혁명에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맞서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민족자본가와 지식인, 소부르주아들을 단결시킨 반제반봉건 통일전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극히 다원화 되고 다양한 의제들이 연립 되어있는 오늘날의 사회운동을 단결시키고 급진화 시키기 위해서는, 기후 의제, 여성 의제, 퀴어 의제 등에 대응하기 위한 기초적인 전술로서의 통일전선을 더욱 강고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    제국주의론

 레닌은 제국주의론을 통해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제국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전술을 제공했습니다.

 레닌에 따르면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지속적인 공황과 생산의 집적, 독점의 심화로 인해 이윤율이 저하되고 국내의 자본과잉 현상이 심화됩니다. 이로 인해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독점자본들에게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자본을 수출하여 자본과잉 현상을 해소할 필요성, 그리고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 고도의 이윤을 수탈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즉,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분할과 약소국가의 식민지화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의 추동에 의해 생겨난 식민지들은 과잉된 자본의 수용처 역할을 해주며 쇠락해가는 자본주의를 지탱합니다. 그렇기에 자본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지원 및 연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이러한 통찰 하에, 맑스레닌주의 단계의 맑스주의는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기존 맑스주의자들이 외면했었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연대와 공동투쟁을 시작했습니다.

 

3. 맑스레닌주의의 한계

 하지만 맑스레닌주의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적인 한계를 맞이했습니다. 소련의 수정주의화와 수많은 혁명들의 실패, 그리고 동구권의 몰락 속에서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점들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의 한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봉기 이론

 맑스레닌주의의 보편적 혁명전술은 일명 ‘봉기 이론’이었습니다. 봉기 이론이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결정적인 순간에 전국 각지에서 총봉기 하여 일회의 봉기로 정권을 장악한다는 전술입니다. 허나, 이러한 형태의 혁명은 지구 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한 노동계급이 백군과의 수년 간의 내전을 치러 성취되었고, 중국 혁명은 십수년이 넘는 지구전을 통해 완수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내에서도 선진부위와 후진부위에 따라, 지역과 직군에 따라 의식적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기에 전 프롤레타리아의 전국적인 일회적 총봉기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이러한 봉기 이론을 혁명전술로 채택한 채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모든 종류의 혁명적 행동을 유보하는 대기론에 빠져들었고, 이는 수많은 나라의 공산당들이 그저 의회 내의 좌익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수정주의의 필연성

 인류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 수정주의 침식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수정주의 침식은 단지 흐루쇼프라는 한 사람의 일탈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거대한 과도기이기에,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아직 자본주의의 복원 가능성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수정주의란 이러한 복원의 가능성의 반영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잔존하는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인자들의 사상과 문화는 공산당 내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로 필연적으로 침투하게 됩니다. 이는 지속적인 계급투쟁과 혁명의 지속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허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이러한 수정주의의 발생을 계급투쟁의 반영으로서의 필연적인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개인적 일탈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스탈린 정권은 당내의 수정주의를 대중의 동원을 통해 타격하거나 계급투쟁을 고도화 하는 방식으로 해소하지 않고 수정주의적 분자들을 ‘행정적으로  조치’ 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러한 행정적 조치는 당연히 일회적인 효과에 그칠 뿐이었고,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수정주의라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4. 맑스레닌마오주의로의 파열

 맑스주의의 한계가 기존의 이론적 연속성을 깨고 맑스레닌주의로의 파열의 계기를 제공했듯이, 맑스레닌주의의 한계 또한 새로운 단계의 맑스주의로의 발전의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중국 혁명의 성공 및 승리에서 얻은 교훈과 마오쩌둥의 이론적 공헌, 그리고 인도공산당/필리핀공산당/페루공산당 등의 투쟁의 경험은 1984년 마오주의 국제조직 Revolutionary Internationalist Movement(이하 RIM)의 출범을 통해 종합되어 세 번째 단계의 맑스주의인 맑스레닌마오주의를 완성시켰습니다.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성립은 기존 맑스레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의 한계에 대한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극복을 통해 새롭게 정립된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민전쟁론

 중국혁명의 경험과 필리핀, 인도, 페루의 혁명 경험을 통해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봉기이론을 대체할 새로운 혁명전술, 인민전쟁론을 정립했습니다. 인민전쟁이란 체제의 약한 고리로부터 기존 정부권력에 대항하는 이중권력을 세우고, 이중권력을 해방구와 인민무력으로 발전시켜 장기적 내전을 통해 혁명을 이뤄낸다는 전술입니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합법투쟁으로 일궈놓은 역량을 한 순간에 폭발시켜 단번의 봉기로 혁명을 이룩하겠다는 봉기이론과 다를 뿐만 아니라, 소수의 게릴라 부대로 유격전을 펼쳐 정권을 장악한다는 군사맹동주의와도 다릅니다.

 인민전쟁론의 핵심은 당이 끊임없이 체제의 약한 고리로 인자를 침투시켜, 대중들 속에서 새로운 권력과 해방구역을 건설하고, 이러한 이중권력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나가 끝내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해내는 것입니다.

2)    문화대혁명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수정주의의 필연적 발생에 맞서고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술로 문화대혁명을 정립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으며,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부구조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당 또한 결코 계급투쟁의 반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입니다.

 그렇기에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수정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순한 행정적 조치나 당내 기율의 강화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당내에 수정주의적 경향과 부르주아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당연한 현상으로 바라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잔존하는 부르주아 사상에 맞서, 대중을 직접적으로 동원해 당내의 수정주의적인 인자들을 타격하는 것, 즉 문화대혁명을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대중에 의하여 당내 수정주의적 부위를 분쇄하고, 대중의 민주적 동원을 통해 필연적으로 관료화/수정주의화 되는 당을 정화하는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구권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맞이했던 수정주의적 오류와 관료주의적 오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3)    신민주주의론

 국제혁명전략에 관해 단순히 자본주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한 세계적 혁명의 전망을 말하는 것으로 답했을 뿐인 맑스레닌주의와는 다르게,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명확한 국제혁명전략, 바로 신민주주의론을 확고하게 정립했습니다.

 신민주주의론의 핵심 전제는 현대의 수많은 식민지 반봉건 국가들의 부르주아들은 대부분 반봉건 제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매판자본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봉건제를 철폐하기 위한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킬 역량이 존재하지 않으며, 식민지 국가에서는 오히려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혁명을 영도해야 한다는 관점에 있습니다.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필연적으로 반봉건 체제를 지탱하는 제국주의에 맞설 수 밖에 없으며, 제국주의와 맞서는 것은 곧 제국주의 자본수출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자본주의에 맞서는 것입니다. 현재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식민지 없이 경제를 지탱할 수 없고, 식민지의 해방은 곧 자본주의 체제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을 위한 노동계급 주도 하의 민주혁명, 즉 신민주주의 혁명을 세계혁명의 선두이자 주요 역량으로 바라봅니다.

 즉 식민지 반봉건 체제 하에서 막대한 착취를 경험하고 있는 주변부 노동계급은 신민주주의 혁명 세계혁명의 주요 역량이며, 1세계 중심부 노동계급은 이를 옹위하고 방어하는 동시에 자국에서의 혁명을 준비하는 보조적 역량이라는 것이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세계혁명전략이자 신민주주의론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해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세계혁명에 있어서의 주요역량과 보조역량을 구분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각 지방과 국가의 노동계급이 각각 세계혁명을 위해 어떠한 역사적 책무와 당면한 과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규명할 수 있습니다.

2.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역사와 전망

1. 대논쟁과 문화대혁명

 모택동 사상이 기존의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진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으로 알려진 것은 중소 간의 대논쟁을 기점으로 합니다. 대논쟁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중국공산당이 이를 비판하면서 시작됩니다. 중국공산당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대해 여러 결점은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라고 평가하는 논평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견을 드러내지만, 1957년 발표한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소련과 중국의 이견 사이에서 합의점을 도출하여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합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테른 미가입 선언과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현대 수정주의의 문제’가 제시되었고, 유고슬라비아의 레닌주의에서의 이탈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소련과도 이견을 드러내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은 서로의 이견을 좁히려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고 공개서한을 게재하는 등 노력했지만 63년 이후로는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고 서로 간에 공격적인 논쟁을 주고받게 됩니다.

 중국공산당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론, 대국주의적 행보를 비판했습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내부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 것 등의 일부 과오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인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가 지구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평화공존,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환상으로 민족해방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벗어남을 지적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소련이 가진 입지를 이용해 주변 국가들과 공산당들에게 이러한 수정주의를 강요하는 소련과 흐루쇼프의 대국주의를 비판하며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에게 서기장 자리를 내어주면서 논쟁 자체는 사그라들지만 브레즈네프는 노선을 바꿀 생각은 없었고 중-소 관계는 완전히 갈라지게 됩니다.

 중-소 대논쟁은 소련이 흐루쇼프 집권 이후 수정주의로 향해 가는 가운데,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수호하고자 하는 중국의 문제의식을 통해 소련의 지도와 대립되는 새로운 사상적 방향성을 제시하게 되는 기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내부에서도 계급투쟁이 나타남을 알게되었고 이것이 명문화 된 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인 것입니다.

 대논쟁에서 이야기된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의 길 사이의 투쟁이 중국 내부에서 실행된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약진운동 이후 류사오치가 당 사업의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류샤오치는 대약진 운동의 후폭풍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데 성공했지만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모순, 도시와 시골의 모순, 관료와 기층 인민의 모순을 심화시켰습니다. 마오쩌둥이 이런 모순들을 지적하면서 류사오치 등을 비판하고, 해서파관 사건이 터지면서,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학생들이 홍위병이란 조직을 구성해 지주, 반사회주의자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에 미온적인 학자들을 당 관료의 통제 아래 공격하는 정도였지만, 홍위병 내부의 급진파들이 당의 통제에 반대하고 마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비판의 범위가 당 중앙의 소위 주자파들로까지 번지고 기존 당 관료 조직을 홍위병들의 혁명위원회로 대체하는 탈권 운동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홍위병들과 이에 호응하던 노동자들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급진파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군의 개입과, 그 과정에서 급진파 조직들과 충돌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점차 마오쩌둥도 급진파들과 멀리하고 보수파-당 간부-군조직에 힘을 실어주면서 운동은 다시 당이 주도하는 캠페인으로 변하였습니다.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화궈펑-덩샤오핑이 당을 장악하고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문화대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당내 자본주의자들의 복권을 막지는 못했지만, 마오 사상의 군중 노선의 실천과 사회주의 건설 이후의 모순과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면서 전 세계의 맑스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2. 마오주의 이전의 마오쩌둥 사상

 중-소 대논쟁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해외의 공산주의 운동들은 소련의 수정주의와 중국의 반수정주의 사이에서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공산당이 소련을 따라 수정주의로 향하는 것에 반발하는 여러 공산주의자는 자국의 지도적인 공산당에서 벗어나 대안 정당을 건설해 새로운 전위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논쟁과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차루 마줌다르와 인도 공산당(마르크스 레닌주의)-이하 CPI(ml)-이 있습니다. 1918년 5월 15일에 태어난 그는 1937년부터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40년에는 인도 공산당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가담했습니다. 다행히 인도는 독립에 성공했지만, 인도는 신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미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 지도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의 네루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인도 공산주의 운동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네루 정권 아래서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차루 마줌다르는 이에 맞서서 1967년 전인도 공산혁명 조정위원회를 설립하고, 서벵골 지역에서 낙살바리 봉기를 지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8대 문서를 작성해 인민 전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1969년 4월 22일 CPI(ml)을 창당해 기존 인도 공산주의 정당에서 분리해 나와 인민 전쟁을 지도했으며, 투쟁을 인도 중부 지역까지 퍼트렸습니다.

 하지만 1972년, 차루 마줌다르는 콜카타 지역에서 경찰에게 발각되어 구금되었고, 그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마줌다르 사후 CPI(ml)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고 그 중 일부는 투쟁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후신 정당들이 인민 전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사례 말고 많이 알려진 마오주의 공산당은 필리핀 공산당(CPP)이 있습니다. 이 당은 호세 마리아 시손이 건설했는데, 그는 처음에는 기존의 필리핀 공산당-1930(PKP)[1]에 가입했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 무장투쟁을 포기하자 시손과 그를 따르던 청년 조직이 제1차 대정치운동을 일으켜 당을 비판하고, 곧이어 탈당에 1969년 새로운 당을 창당한 것이 시초입니다. 이후 80년대에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92년에는 제2차 대정치 운동을 벌여 당의 노선을 확실히 하였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미국과 자본주의 정권과 투쟁하면서 오늘날까지 투쟁을 가열차게 벌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시로는 튀르키예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이하 TK-ml-을 건설한 이브라힘 카이파카야가 있습니다. 1949년생인 그는 이스탄불 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에 입문하고 터키 혁명 노동자 농민당에 가입해 미국 제6함대의 튀르키예 입항을 반대하는 운동을 준비하다가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존 공산주의 조직들은 케말주의에 대해 온정적인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케말주의와 협동해 민족민주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에 대응해 카이파카야는 케말주의는 반봉건적 군사독재임을 규명하고, 투쟁의 대상임을 주장하면서 1972년에 TKP-ml을 조직하고, 곧이어 시골 지역에서 인민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러다가 1973년 이브라힘 카이파키야는 터키 경찰에게 검거, 수일간의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 조직의 공통점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공산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마오쩌둥 사상을 채택하고, 신민주주의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신식민 사회에서 농민과 적극적인 계급연대를 조직해 인민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시로 든 조직들은 개발도상국 내지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국가들뿐이지만 선진국에서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받아 대안 공산주의 운동이 조직되었는데, 미국의 새공산주의운동이나,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 연합, 프롤레타리아 좌파 등의 조직이 대표적입니다.


[1] 두 필리핀 공산당은 한국어로 번역하면 명칭이 같으나, 기존의 공산당은 타갈로그어로 이름을 지었고, 시손이 창당한 공산당은 영어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둘 다 같은 언어로 부를 때는 기존 공산당의 창당 년도인 1930이라는 숫자를 붙여 구분합니다.

3. MLM의 정식화, 빛나는 길과 RIM

 여러 조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마오쩌둥 사상은 단순히 반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의 실천이나, 신식민지 지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전술로 인식됐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 사상은 어떻게 맑스주의의 세 번째 단계인인 마오’주의’로 받아 들여지고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요?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과 조직은 아바미엘 구스만과 페루공산당-빛나는 길입니다. 흔히 곤살로 의장으로 알려진 아바미엘 구스만은 1934년생으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9년 11명의 동료와 함께 페루공산당 빛나는 길을 창당했습니다. 빛나는 길은 70년대에는 단순히 대학가 근처에서만 영향력을 가졌을 뿐이지만, 1980년 페루 중남부 지역에서 선거방해를 시작한 이래로 게릴라 조직으로 성장합니다. 80년대에는 적극적으로 활동해 페루 국토의 절반 정도를 통제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페루 정부의 적극적인 진압 작전으로 92년에 구스만이 체포되고, 그 과정에서 조직이 분열되어 오늘날에는 소규모의 무장 조직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88년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에 대하여”라는 문건을 통해 마오쩌둥 사상을 제3세계 지역의 혁명론이 아닌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잇는 맑스주의의 세 번째 단계인 맑스레닌마오주의를 정식화한 것입니다. 이 문서에서 빛나는 길은 마오주의의 신민주주의 이론을 통한 기존 부르주아 독재, 소련의 수정주의에 맞선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했고, 인민 전쟁을 통해 부르주아에 맞설 무산자계급의 전술이 생겨났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빛나는 길은 마오주의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지속과, 그 계급투쟁의 수단인 문화대혁명을 제시함으로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까지 제시했던 기존의 혁명사상에 더해 건설 이후의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규정합니다.

 빛나는 길에 의해 규정된 맑스레닌마오주의는 혁명적 국제주의 운동-RIM을 통해 세계적 영향력을 체득합니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1984년 설립된 RIM은 빛나는 길, 미국 혁명 공산당, 인도 공산당(ml) 등이 참여했으며, 국제적 차원에서의 마오주의 운동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1993년에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만세”라는 문건을 작성해 국제적 단위에서 맑스레닌마오주의를 규정하고 정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맑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규명한 후 공산당선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을 밝히며 맑스주의가 시작되었고, 레닌이 이를 계승해 제국주의를 규정하고 10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과 pt 독재를 실행, 전 세계로 공산주의를 널리 퍼트리면서 두 번째 도약을 이루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도약인 마오주의의 경우 군중노선의 확립과 혁명 이후의 계급투쟁에 대한 보편적 지식의 발전, 소련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이루졌다고 규정합니다. 해당 문건은 마오쩌둥이 맑스-레닌 다음 세 번째 도약을 이루어낸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보편적인 혁명이론이라는 결론으로 끝납니다.

 이 문건을 기점으로 기존의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조직들 중 다수가 맑스레닌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적 정립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맑스레닌주의는 전 세계의 그 자신이 공산주의의 세 번째 도약이자 보편적 혁명이론임을 알리게 됩니다.

 

4. 맑스레닌마오주의의 오늘날

  이렇듯, 마오주의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빛나는 길과 RIM을 통해 국제적 영향력을 체득했습니다.

 적지 않은 1세계 좌파들이 마오주의를 부정했으나, 현시대 혁명이론으로서의 마오주의의 실효성은 네팔혁명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네팔 혁명은 1996년,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이 네팔 왕정을 향해 인민 전쟁을 선포한 이래로 시작되었습니다. 왕정은 미국과 인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서 저지하려고 했으나 네팔 인민들은 점차 왕정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고, 결과적으로 2006년에 왕정이 사실상 항복하며 공화정이 수립되었습니다.

주목해 볼 만한 다른 마오주의 운동으로는 국제공산주의동맹(약어로는 ICL)이 있습니다. ICL은주로 유럽과 남미의 정당과 정치단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스로들의 사상을 MLMpM(맑스-레닌-마오, 주로 마오주의)라 규정합니다..

 MLMpM 노선의 가장 눈 여겨볼 점은 이들이 아바미엘 구스만, 즉 곤살로 전 페루 공산당 의장을 맑스-레닌-마오쩌둥을 계승하는 ‘공산주의의 제4의 검’으로 규정하고, 곤살로의 이념적 공헌이 맑스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렸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마오주의에 대한 곤살로의 기여는 결코 부정할 수 없으나, 그의 기여가 마오주의의 한계를 넘어 혁명과학의 새로운 단계를 확립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MLMpM주의자들은 곤살로의 이념적 공헌 중 페루 혁명의 특수성에서 만들어진 제파투라 노선, 동심원 원리 등의 개념들을 무리하게 보편적인 층위로 끌어 올리는 오류가 존재합니다.

 이 외에도 제1세계에서의 변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제3세계의 혁명운동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오주의-제3세계주의자들이나, 한때 미국 반수정주의 운동에 큰 영향력을 지녔지만, 운동의 쇠퇴 이후 당수인 아바키안을 숭배하는 컬트 집단으로 변질된 미국 혁명 공산당 등, 마오주의의 이단적 분파들은 수도 없이 존재합니다. 이런 조직들의 영향을 받은 적지 않은 집단들이 수정주의적 경향으로 변질되는 사태도 일어난 바 있으나 인도, 필리핀 등에서는 여전히 마오주의를 중심으로 삼고 투쟁을 지속하는 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형성 중에 있는 이념이며 발전 중에 있는 과학입니다. 그렇기에 마오주의는 항상 수많은 논쟁과 내부투쟁, 분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맑스레닌마오주의는 공산주의 운동의 전세계적 퇴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민 전쟁을 이어 나가고 각국의 부르주아 정부의 공세를 이겨내고 있는 유일한 노선이기도 합니다. 현대 수정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도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의문 및 과제들에 끊임없이 대답하고 대응한다는 점에서, 맑스레닌마오주의는 오늘날 사회의 변혁과 공산주의의 건설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정확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3. 트로츠키주의의 오류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 혁명 시기의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의 주장과 작성 문건들에 기반한 혁명 이론입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반감을 무기로 서구 좌익운동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확립한 트로츠키주의는 소련 해체 이후, 남한의 사회운동 내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확보했습니다. 소련이 ‘스탈린주의’의 오류로 인해 패망 하였으니, 기존의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남한에 트로츠키주의를 수입해온 초기 논자들의 주장은 남한의 좌익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안티테제이자,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이념이라는 지점에서 각광 받았을 뿐, 막상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념의 내용에 대한 검증은 사실상 이루어진 적 없습니다.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소련에 대한 관점을 비롯한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히 지엽적이게 된 문제에 집중하거나, 혹은 트로츠키 자체의 행보를 비판하는 식으로 트로츠키주의에 대응했을 뿐 트로츠키주의의 핵심적 문제의식에 대한 제대로된 비판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파트에서는 남한의 급진적 좌익세력들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이념노선인 트로츠키주의의 내용적 측면을 맑스레닌마오주의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합니다.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은 영구혁명론입니다. 영구혁명론은 부르주아 혁명의 정치적 맥락과 충분한 생산력이 부재한 주변부 국가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습니다. 물론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하고,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은 반드시 이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나, 트로츠키주의는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영구혁명론의 핵심은, 선진자본주의 중심부에 속하지 않은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며, 주변부 국가에서 혁명이 발생하더라도 필연적으로 혁명정권이 전복될 수 밖에 없기에 세계 혁명운동이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자체적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스탈린과 다르게 러시아에서의 자체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서방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만 소련의 혁명을 수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서방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실패한다면 소련은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하려는 순간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소련 정권이 전복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즉 트로츠키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혁명을 수호할 힘이 부재하다고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필연적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반동적 집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트로츠키의 이론을 바탕으로 1920년대 당시 이미 수많은 농민봉기를 일으키며 혁명적인 행동을 이어가고 있었던 농민운동과의 제휴를 거부했으며, 당이 농민들 속으로 스며 들어가야 한다는 한다는 마오의 주장을 배격하고 국민당에 남아 노동계급에 대한 조직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의 혁명적 투쟁에 참여하기로 선택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을 재건하는데 성공했으나 농민은 반동적인 존재이기에 노동자들의 조직화에만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27년 국민당에서 숙청 당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와 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여러 정치적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영구혁명론의 본질은 농민은 반동적이고 봉건적인 존재이기에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을 일으킬 수 없으며, 따라서 산업 노동자 계급이 혁명적 힘을 가지지 못한 주변부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타 계급과의 연대연합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면서 교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도식에 현실을 끼워 맞추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거부로 이어지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 통일전선 경향은 트로츠키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수많은 좌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주변부 국가에서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주변부에서의 혁명이 서구 혁명에 대한 인위적 모방에 불과하며, 주변부 국가에서의 혁명은 서구에서의 혁명을 위한 마중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덧붙입니다.

트로츠키주의는 중심부 혁명 없이 주변부 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영구혁명론에 입각하여 혁명운동의 국제화, 즉 국제적인 사회주의 전위정당의 건설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맹점은 모든 국가에는 고유한 계급 구성과 생산 양식의 특수성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서유럽과 미국에서 발전된 계급투쟁과 분석을 다양한 지역에 단순히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국제 전위당’은 ‘더 진보된 요소’, 즉 중심부의 당원들이 주변부 국가의 당원들에게 이론적 분석과 행동을 지시하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변부 국가의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한 분석이 아닌, 중심부 국가에서의 시혜적이고 대리주의적인 분석으로는 주변부 국가에서의 혁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어떤 트로츠키주의 조직도 혁명을 완수하거나 혁명의 초기 단계로 나아간 적이 없으며, 자신들의 수가 다른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많았던 호치민 이전의 베트남에서조차 혁명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영구혁명론의 핵심적 오류는 전 세계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혁명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강박 관념입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의 실패를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 실패가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실패한 적이 없으며 자신들의 이론만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적 정세에 돌입해야만 혁명을 시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들은 오늘날까지 ‘동시다발적 세계혁명’만을 기다리며 그 어떠한 유의미한 혁명적 시도를 한 바 없습니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다릅니다. 맑스레닌마오주의는 혁명이 언제나 실패할 수 있고,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만 그 대안을 ‘언젠가 일어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동시다발적 혁명’에서 찾지 않고 당 내에서의 끊임없는 노선투쟁과 군중노선에서 찾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오주의자들은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혁명을 원한다면, 또한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원한다면 맑스레닌마오주의에 입각한 혁명운동을 추진해야만 합니다.

4. 모순론

1. 모순이란?

모순이란 무엇일까요? 모순론을 이해하기 앞서, 모순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설명이 가장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사전적인 뜻은 “모순의 사전적인 뜻은 두 명제가 서로 충돌하여 논리가 맞지 않는 것” 입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말 하는 모순은 같은 단어지만 그 뜻이 살짝 다릅니다. 마오쩌둥이 저술한 모순론에서, 모순은 한 통일체 안에 존재하는 대립물 간의 투쟁으로 정의됩니다. 즉 모순이란 레닌이 제시한 대립물의 통일 법칙을 확장하고 심화한 철학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모순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모순의 보편성이란, 세상 그 무엇을 보아도 모순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수학에서는 더하기와 빼기, 미분과 적분 등이 존재하고,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등이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는 모순의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모순은 여러 운동의 기초가 되고, 또 한 운동의 시작과 끝에 모두 존재합니다. 만약 낡은 운동과 그 안의 모순이 새로운 운동으로 대체되면, 새로운 모순 안에서도 다시 모순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순에는 특수성 또한 존재합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모순이 생겨나지만 각각의 모순은 각각의 방식대로 존재하고 움직이며, 따라서 그 해결 방법을 각각 다르게 가져가야 합니다. 곡물의 절대적인 생산량이 부족해 음식을 굶는 것과, 곡물이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아 굶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해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모순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모순의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당 모순의 특수한 성질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3. 근본모순과 주요모순, 모순의 주요측면

단순한 운동에는 모순이 하나만, 혹은 소수만이 존재하지만, 복잡한 운동, 예를 들자면 인간사회 같은 경우에는 많은 모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근본모순은 한 통일체의 여러 모순들과 그 형태를 근본에서 결정짓는 모순을 의미합니다. 인간사회를 예시로 들면 사회의 본질적인 성격, 즉 봉건제,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 내부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경제의 모순, 다시 말하면 그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바로 근본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모순은 그 모습 그대로만 나타나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 사회의 근본모순이 노동쟁의 현장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으로,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와 피착취민족 간의 모순으로,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와 여성 및 성소수자의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예시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로 존재하는 모순들 중, 현재의 정세를 규정하고 대표하는 모순을 주요모순이라고 합니다. 이 주요모순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근본모순과 주요모순이 서로 다른 상황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한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주요모순이 고정되어 있다고 인식한다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모순의 내적 운동과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4. 모순의 각 측면의 동일성과 투쟁성, 그리고 적대

모순의 각 측면, 대립물들은 서로에 대해 투쟁성과 동일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우선 각 측면의 동일성은 각각의 측면들이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전쟁과 평화, 위쪽과 아래쪽, 생명과 죽음, 진보와 퇴보 등 대립물들은 서로가 존재할 때 그 존재가 확인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은 그 두 측면이 아예 연관이 없을 때가 아닌, 일정한 조건이 갖춰질 때여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투쟁 끝에 모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면 두 대립물은 서로의 위치, 즉 주도권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은 서로 동일성을 지닐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순의 이러한 투쟁은 처음에는 양적 변화로 시작되어 질적 변화로 이어지고, 곧 형식적 통일로 이어지지만 다시 그 안에서 새로운 모순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오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대립물의 통일은 일시적이지만, 투쟁은 영원하다고 요약했습니다.

 한편 모순의 두 측면이 투쟁할 때 그 관계가 항상 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두 대립물은 하나의 통일체로 함께 존재하고 있다가, 새로운 조건이 나타날 때에 비로소 필연적 적대성이 드러나고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특히나 혁명 이후에도 사화에는 농민과 노동자의 모순,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모순 등 인민 내부의 모순들이 발생하였고, 마오는 이것들이 비적대적 모순임을 파악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강제력을 사용하기 보단 토론과 우리가 비적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과 그렇지 않은 모순을 잘 구별하고, 만약 전자라면 평화적인 해결책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슬기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모순론의 교훈과 적용

모순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구체적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운동사에서는 이론을 현실에 의거하여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닌,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문제가 된 사례가 여럿 존재합니다. 마오쩌둥은 선대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책 문구 몇 줄 외워서 줄줄 읊는 것이 아닌,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그에 대한 철학적 논거를 전개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오류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만큼 모순론은 여전히 현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모순론을 통해 현실 정치를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1957년 집필한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를 통해 그 예시를 볼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먼저 노동자-농민연합이 주도하는 인민민주독재에 대해 규율과 자유, 독재와 민주의 모순을 파악하며, 적대적 모순에는 전자를, 비적대적 모순에는 후자를 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후자를 적용해야 하는 비적대적 모순, 농민문제, 지식인문제, 민족자본가 문제, 지식인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중국내전에서 외세와 반동세력에 맞서서 노동자가 영도하는 인민에 편입되었지만, 이들의 사상적, 경제적 차이는 인민 내부에서 비적대적 모순을 만들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과의 문제는 토론과 회의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임을 밝히며 강제력의 행사나 숙청 같은 적대적 방법으로 이를 해소하려 시도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주장은 ‘인민에 대해서는 민주의 방법론을, 인민 외부에 대해서는 독재의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그의 테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모순론의 역사적 영향

 모순론에서 제시된 논리는 이후 소련과 동구권의 수정주의와 자본주의 회복을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논리였습니다. 통일은 일시적이고 모순은 보편적이라는 마오의 분석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실시한 이른 바 시장사회주의 개혁과 소련의 흐루쇼프 수정주의를 시발탄으로 이루어진 동구권의 자본주의화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소련과 동구권 사회의 공산당들이 내부모순을 파악하지 못한 체 수정주의의 발흥을 막지 못했다는 점은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의 이런 분석은 사회주의 사회 내부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들’ 이른바 주자파의 대한 경계와, 이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부구조(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안겨주었고, 당 내부의 주자파인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대한 비판이 전개됨에 따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벌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실패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권력은 주자파에게 넘어갔지만, 이는 오히려 중국 내부의 주자파들의 등장을 예견한 홍위병과 마오의 통찰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모순론의 정립을 통해서 맑스주의 철학은 한 단계 발전했습니다. 스탈린까지의 맑스레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제국주의의 억압을 밝혀내고, 그 대항자인 노동자를 각성시키고 그들을 혁명의 주요계급으로 격상시켰지만, 혁명 이후에도 지속되는 모순과 그 해결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고, 자본주의로의 역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오의 모순론을 통해 맑스주의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도 모순이 존재함을 밝히고 이러한 모순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를 제시하면서, 철학적, 전술적 발전과 진보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5. 인민전쟁론

 1. 인민전쟁이란 무엇인가?

 인민전쟁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군사노선이며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그리고 인도와 페루, 필리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된, 맑스주의의 세 번째 단계에서 구체화 된 혁명 방법론입니다. 인민전쟁의 핵심적 요소는 바로 하나의 국가 내에서 국가권력과 별도로 존재하는 정치적 권력, 이중권력을 창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중권력의 형태는 근로 인민 대중의 보편성을 띤 프롤레타리아 권력이어야 하며,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수많은 피억압자를 대변할 수 있는 대안적 권력 기구여야 할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혁명전쟁’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혁명전쟁은 단순히 정규군에 의한 군사행동이 아니라 현존하는 정부를 전복, 대체한 후 새로운 정치체제, 즉 대안 권력으로의 완전한 대체를 창출하기 위한 전쟁 형태입니다. 혁명전쟁을 진행하는 집단은 특성상 힘의 비대칭성에 의해 불리한 형국에 처해 있고, 장기전의 속성을 지니기에, 마오쩌둥은 혁명전쟁을 3단계로 나눴습니다. 혁명전쟁의 첫 번째 단계는 정치적 조직화, 두 번째 단계는 유격전,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운동전입니다.

 첫 번째인 정치적 조직화 단계에서는 사회구조의 완전한 변혁을 목표로 설정하여 군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집단을 건설하고, 전위정당을 조직하여 준비 단계에 들어섭니다. 즉 사회 내 계급구조의 모순을 부각하는 동시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군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혁명조직을 형성시키는데 중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인 유격전 단계에서 건설된 전위정당은 본격적으로 유격전을 개시하고, 당 세력을 확대하고, 군사 조직을 건설하며, 기존 권력의 정규군, 경찰을 비롯한 이른바 ‘공권력’을 무력화 시켜야 합니다. 유격전의 목표는 군중에게서 기존 권력을 분립하게 시키는데 중점이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기존 권력과 혁명집단 측의 역량이 균형을 이룰 때 시작됩니다. 세 번째 단계부터 전쟁은 정규전으로 전환됩니다. 혁명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분쇄하고 승리가 달성될 때까지 완전히 공개된 전쟁을 수행하게 됩니다.

 페루 공산당은 이러한 마오쩌둥의 혁명전쟁 개념을 계승해 더욱 구체화하고, 세분화하기 위해 ‘인민전쟁’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그것을 시행하는 기간에 4가지 단계를 두었습니다. 바로 정의, 준비, 개시, 전개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정의는 인민전쟁의 성격과 기반을 규정하는 단계입니다. 페루 공산당은 1979년에 무장투쟁을 결의하기 전에 이미 도시에서 빈민과 학생, 그리고 농민을 비롯한 전선체를 조직하고, 기반을 조성한 형태였습니다. 즉 정의 단계는 조사를 통해 인민전쟁의 구체적 성격을 정의하고 피억압 근로인민을 전선체로 끌어들이며 전위당의 주도 하에 이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화 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준비는 이중권력을 창출하고, 인민군대를 건설하는 단계입니다. 페루 공산당은 당, 군, 전선체를 인민전쟁의 단기적 전망, 즉 인민군대를 진정으로 건설한다는 목표를 위해 단결시켰고, 그리고 무장투쟁의 개시를 위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페루 공산당은 농촌과 도시빈민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중권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출된 이중권력은 기존 부르주아 권력에 대항해 선거를 보이콧하고, 동시 행동을 취하면서 무장투쟁을 촉진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건설되기 시작한 인민군대는 단순한 무력으로 기능할 뿐만이 아니라, 이중권력에 동참하게 될 군중을 군대라는 형식 하에 조직하기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개시에서, 당과 전선체, 인민군은 본격적인 인민전쟁에 돌입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페루 공산당은 한 선거 유권자 등록 사무소에 침투하며 유권자 등록부와 투표함을 불태우는 것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인민전쟁이 벌어지는 무대는 피억압 근로 인민대중이 가장 첨예한 모순을 체감하고 있던 농촌이었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전개는 부르주아 국가권력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전면전입니다. 이 단계에서 페루 공산당은 무기와 전쟁 수단을 탈취했고, 무장 행동으로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으며, 부르주아를 지원하는 모든 수단에 대한 파업을 선동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말살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종국적으로는 전 사회에서 부르주아 권력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2. 인민전쟁은 어째서 필요한가?

 인민전쟁이라는 개념이 구체화 되기 전, 맑스주의의 혁명 방법론은 크게 봉기 이론과 체 게바라가 주장했던 포코 이론으로 나뉩니다. 이 두 가지의 노선들은 각각의 한계를 지닙니다.

 대다수의 레닌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봉기 이론은 ‘결정적이고 전국적인’ 총봉기의 순간이 올 때까지 합법적 틀 내에서의 선전을 지속해서 행하고 대기를 꾀하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혁명도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국적’ 총봉기를 통해 성취된 적 없습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에서도 지역적, 직군적, 계층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일회성 총봉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봉기 이론에는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비롯한 과거 혁명에서 발생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장기전 양상에 관한 고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봉기 이론은 아직 구체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며 수많은 ‘레닌주의’ 조직들이 혁명적 행동을 끊임없이 유예하게 되는 결과를 창출했습니다.

 체 게바라가 주장했던 포코 이론(focoism)은 봉기 이론이 혁명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양상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과, 쿠바 혁명전쟁의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이 종합되어 창출된 이론입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혁명가들은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격대가 전위가 되고, 유격 거점(foco)을 통해 조직을 창출하고 나아가 민중의 총봉기를 추동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포코 이론 또한 이중권력의 창출과 대중의 동원을 도외시 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민전쟁은 이러한 봉기 이론의 우경적 패배주의와 포코주의의 좌경적 모험주의로 인한 오류를 모두 지양하고 당, 전선체, 인민군의 유기적 결합에 기초한 이중권력의 창출을 통해 광범위한 대중을 인민전쟁에 동원해내야 한다는 과업을 제시합니다. 페루 공산당이 발견하고 심화시킨 인민전쟁 이론의 보편성을 더욱 확립하고, 나아가 이를 실행시킬 전략과 전술을 구체화하는 것이 맑스레닌마오주의자들의 과업입니다.

6. 신민주주의론

1. 개요

신민주주의론은 마오쩌둥이 중국혁명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정립한 이론으로, 마오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는 신민주주의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방법론이며, 동시에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혁명이론이고, 동시에 세계혁명을 위한 마오주의의 국제전략이기 때문입니다.

2. 당대 중국의 역사적 상황

맑스와 엥겔스는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부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긍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무산계급 혁명을 사회주의 변혁의 기본적 형태로 구상했습니다. 허나, 당대 중국은 결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농업 부문에서는 지주 소작제로 대표되는 봉건적 소유관계가 유지되어 있었으며, 산업과 상공업은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중국의 사회에 관해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재의 중국은, 일본점령지구는 식민지 사회이고 국민당통치구는 기본적으로 반식민지 사회인데, 일본 점령지와 국민당통치구를 가리지 않고 모두 봉건, 반봉건제도가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이다.”[1]

 마오의 말마따나, 중국 사회는 군벌과 관료, 제국주의 자본이 지배하는 식민지-반봉건 사회였으며, 생산력 또한 매우 후진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산계급 혁명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며 중국 사회는 후진적 식민지 봉건사회이므로 중국에서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성장할 때까지 혁명이 유예되어야 했거나, 혹은 자본가계급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일어나 사회의 봉건적 잔재가 파괴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이 대기해야 했을까요? 마오는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일축합니다.

 “현재의 국제적 환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투쟁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는 몰락하여 가고 사회주의가 상승/성장하고 있다. 중국에 자산계급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면 먼저 국제자본주의, 즉 제국주의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근대사는 바로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국의 독립을 반대하고 중국자본주의의 발전을 반대해온 역사였다.....(중략) 제국주의는 사멸해가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곧 숨을 거둘 지경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더욱 식민지/반식민지에 의존해 생존하고자 하면서 어떠한 식민지/반식민지 사회에서도 자산계급독재의 자본주의사회의 건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주의는.... (중략) 중국을 공격하여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 했고, 중국에서 자산계급독재의 건립과 민족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끊어버리려 하는 것이다.”[2]

 말인 즉슨, 중국에서는 자산계급 독재(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말합니다)와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판단에 대한 마오의 근거는 간단합니다. 서구에서 독점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됨에 따라 제국주의 자본은 그 자신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 식민지들을 착취하고 예속시킬 수밖에 없으며, 중국을 비롯한 식민지 국가들은 경제적 종속과 침탈로 인해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이 봉쇄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국주의 자본의 경제 침탈로 인해 피해를 입는 민족자산계급, 즉 민족자본가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주도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마오는 민족자산계급의 혁명성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자산 계급이므로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시기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외국의 제국주의와 본국의 관료/군벌정부에 반대하는 혁명성을 가짐으로써 무산계급 및 소자산계급과 함께 연합 궐기하여 그들이 물리치고자 하는 적에 대항한다....(중략) 그러므로 중국 무산계급의 임무는 민족자산계급의 이러한 혁명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제국주의와 관료/군정부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것이다.”[3]

 “중국 민족자산계급은 혁명을 진행할 때에도 제국주의와 완전히 손을 끊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농촌 토지지주의 착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그들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이 철저히 붕괴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철저히 붕괴시킬 능력도 없는 것이다....(중략) 한편으로는 혁명에 참가할 수 있는 혁명성,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적에 대한 타협성, 이것이 중국의 자산계급이 갖는 ‘하나의 몸에 두 임무를 띈’ 양면성이다.”[4]

 즉, 민족자산계급은 제국주의의 압박에 따라 일정한 혁명성을 지니지만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혁명성과 타협성을 동시에 지니며, 혁명을 이끄는 것은 무산계급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오는 그와 동시에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에 있어서 민족자산계급의 혁명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들을 통일전선을 통해 견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도 합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영도하는 계급은 무산계급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이 중국 사회에서 정확히 어떤 혁명을 이끌고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사고했을까요?

3. 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마오는 중국에서의 당면한 혁명과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 합니다.

 “중국혁명의 역사적 과정은 반드시 두 단계의 발걸음으로 나뉘어 나아가야 한다. 그 첫째 단계는 민주주의혁명이고, 그 둘째 단계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것은 질적으로 다룬 두 단계의 혁명과정이다. 이른바 지금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구 범주의 민주주의, 즉 구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 범주의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이다.”  [5]

 “이러한 식민지/반식민지혁명의 제1단계, 제1보는 그 사회적 성격에 있어서는 아직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이며 그의 객관적인 요구도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장애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이미 옛날의, 자산계급 영도 아 자본주의 사회와 자산계급 독재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무산계급 영도 아래 제1단계에서 신민주주의 사회와 각 혁명계급이 연합한 독재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삼는 혁명이다.”[6]

 즉, 마오에 따르면 당대 중국의 혁명과제는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이되, 민족자산계급이 혁명을 주도할 역량이 존재하지 않기에 무산계급이 민주주의혁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민주주의란 곧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 하에 실시되는 민주주의 독재(구 민주주의의 자산계급 독재와 대비되는)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산계급이 자산계급 민주혁명을 영도한다는 것은 일견 모순된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는 볼셰비키 또한 제정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두고 취했던 전술이기도 합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 합니다.

 “우리의 강령은 낡은 것이 아니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새로운 최소강령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아남아 민주주의 혁명의 현실적 승리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또한 완전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분투하는 노동계급 당의 본성과 목표와 일치하는 새로운 행동의 방법도 가지게 될 것이다.”[7]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본가들이 민주주의혁명을 영도한 후,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후에 노동계급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 멘셰비키나, 혁명에 있어서 단계를 나눌 필요없이 무산계급이 연속혁명을 통해 곧장 사회주의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트로츠키파와는 다르게 무산계급과 농민이 직접 민주주의혁명을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오의 경우 식민지 국가였던 중국의 특성에 맞게, 레닌의 민주혁명론을 신민주주의론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계급동맹의 대상을 소자본가와 민족자산계급까지 확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주주의혁명은 사회주의와 관련 없는,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만을 지향하는 혁명일까요? 혹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한 일각의 주장처럼 마오가 단순히 민족자산계급을 대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가였을까요?

 맑스와 엥겔스는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으로의 고양,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것을 살펴보았다.”[8]

 민주주의의 쟁취가 단순히 민주주의 그 자체를 넘어 노동자 혁명의 초기 단계로서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마오 또한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합니다.

“중국혁명 제1단계의 사회적 성격은 새로운 형태의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이지 무산계급 사회주의혁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산계급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일부분이 되었으며.....(중략) 이 혁명의 제1보, 제1단계에서는 결코 중국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건립되지 못할 것이며, 중국 무산계급의 영도 아래 각 혁명계급 연합독재 방식의 신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제1단계 혁명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제2단계 혁명으로 발전시켜 중국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9]

 즉, 신민주주의혁명은 자산계급의 독재를 막기 위한 혁명적 계급들의 통제 하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이는 노동계급의 통제 하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던 러시아 혁명에서의 NEP(신경제정책)과 비견될 수 있는데, 레닌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의 소농 및 빈농들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농민층의 보증된 지도력, 등―이것이, 이전에는 행상인으로 경멸되었고 그리고 신경제정책(NEP)하에서 어느 정도는 우리가 지금 그렇게 경멸할 권리가 있는 협동조합들로부터, 협동조합들만으로부터,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것이다.”[10]

 즉, 노농동맹에 입각한 민주독재와 무산계급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사회주의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기본적으로 마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오의 신민주주의는 과정 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의 단계에 있었지만, 동시에 정치와 경제에서의 무산계급의 영도를 철저히 강조한 만큼, 정치적 차원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했습니다. 신민주주의 체제는 농민과 소자본가, 지식분자, 민족자산계급을 포괄하는 혁명계급의 민주독재였으나, 이러한 혁명계급들을 통솔하고 지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그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한 형태인 중국공산당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이러한, 무산계급 주도의 계급동맹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계급의 정권은 오직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들의 근로대중, 우선 근로농민 대중과 특수한 형태의 동맹을 맺어야만 튼튼해질 수 있으며, 철저히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특수한 형태의 동맹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것인가? 非프롤레타리아 계급인 다른 계급의 근로대중과 동맹하는 것이 도대체 한 계급의 독재 사상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특수한 형태의 동맹이라는 것은 이 동맹의 지도적 역량이 노동계급이라는 점에 있다. 이 것이 특수한 형태의 동맹이라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내의 지도자가 다른 당들과 영도권을 나누지 않으며 또한 나눌 수도 없는 하나의 당, 노동 계급의 당, 공산주의자들의 당이라는 점에 있다.”[11]

 즉,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농민 및 소부르주아 계급과의 동맹 및 제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 당이 지도적 역량을 차지하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에서 노농동맹의 형식 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었듯이,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신민주주의라는 구체적 형태로 수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전간기의 반 파시즘 인민전선을 계승하여, 노동자계급의 영도 하에 파시즘에 반대하는 여러 계급계층이 참여한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비록 마오는 신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고 규정했지만,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각 사회의 구체적 상황과 계급구성에 따라 여러가지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민주주의가 맑스가 주창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피착취 국가에서의 특수 형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 신민주주의의 구체적 형태

 그렇다면, 신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통해 실현되며, 어떤 형태를 지닐까요?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 합니다.

 "무산계급 영도 하의 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국영경제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띄며, 이는 국민경제를 지도하는 역량을 갖는다. 그렇지만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국민생계를 마음대로 뒤흔들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금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 경제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농촌에서의 봉건적 토지관계를 일소시키고 토지를 농민의 사유로 만든다. 농촌에 부농경제가 존재하는 것도 용인된다. 이 방침의 정확한 구호는 ‘경자유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농업을 건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자유전’이라는 기반 위에서 발전시킨 여러 합작경제에는 또한 사회주의적 요소가 담겨있다.”  [13]

 즉, 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혁명적 계급의 민주독재를 통해 운영되는 정부는 자본주의를 자신들의 목표에 맞게 통제하기 위해서 경제에서 지도적 성격을 지니는 주요 산업을 국영화 하되 사적 소유를 허용하고, 봉건적 지주소작제를 철폐하여 영농 기반의 농업경제를 건설하되, 이후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합작사업을 통해서 사회주의의 맹아적 요소를 함양한다는 것입니다. 신민주주의의 경제체제는 어디까지나 무산계급의 통제 하에 있는 자본주의 경제이지만,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라 속이며 국내에서 자본주의 경제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후일의 덩샤오핑, 흐루쇼프 등과는 다르게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에 입각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즉, 어디까지나 작금의 경제체제가 언젠가 철폐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당과 대중에게 각인 시킨 것입니다.

 실제로, 마오와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제도가 실시된 직후부터 점진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부문을 철폐하고 민족자산계급의 영향력을 줄여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는 대표적으로 삼반오반 운동이 존재합니다. 삼반오반 운동은 1951년에 시작된 전국적인 반부패 대중 운동으로, 이 과정에서 대중의 반부패 열성이 당시 기업소의 관리자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민족자산계급을 향하며 그들의 경제구조에 대한 영향력과 경제에서의 사적 부문이 대폭 축소되기도 하였습니다. 삼반오반 운동은 계급투쟁의 일종이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혁명 계급 간의 연합 내부에서도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은 억압되거나 유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958년에 들어서는 마오가 직접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을 내세우며 자본주의의 철폐와 사회주의의 건설에 시동을 걸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총노선” 에 입각하여 농업은 <인민공사>의 형태로 점진적으로 집산화 되었으며, 본격적인 공업화와 초기적 형태의 중앙계획경제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총노선” 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작업은 결과적으로 수정주의화 된 소련의 원조 중단과 각종 자연재해, 덩샤오핑을 비롯한 자본주의자들의 권력탈취 시도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총노선 기간 동안 농업 생산성과 농지의 면적이 증가하고 기반기술이나 해외원조 없이 다칭유전의 개발에 성공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덩샤오핑의 권력탈취 이후로, 사회주의 건설은 중단되고 중국은 자본주의와 수정주의의 길로 나아갔으나 이에 반발한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들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관료주의와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하고 마오쩌둥이 일시적으로 복권되는 등 중국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수정주의,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5. 신민주주의 혁명론의 국제적 의미

 신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모택동은 중국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라고 선언합니다.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제국주의 투쟁은 세계 자본주의와의 투쟁입니다. 중국은 식민지이자 반식민지이고, 반봉건 사회입니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중국에서의 민주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에 맞서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일지라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입니다. 즉, 피착취 국가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은 세계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것입니다.

 페루공산당은 이러한 마오의 시각을 더욱 정교화 합니다. 페루공산당은 자신들의 국제노선에서 세계 혁명은 피착취 국가에서의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피착취 국가들로 제국주의 중심부를 포위하고, 최종적으로는 식민지의 상실로 인해 파국으로 이어질 중심부 자본주의를 파괴한다는 세계 혁명의 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산업화 현상으로 인해 대다수의 제조업 생산단지가 피착취 국가로 이전되고 있는 오늘날의 정세에 더욱 유효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1] <신민주주의론> 본문

[2] <신민주주의론> 본문

 

[3] <신민주주의론> 본문

[4] <신민주주의론> 본문

[5] <신민주주의론> 본문

[6] <신민주주의론> 본문

[7]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Progress Publishers, 모스크바, pp. 54-56

[8] MEW, Bd. 4, SS. 481-482; <<저작선집>> 제1권, pp. 420-421

[9] <신민주주의론> 본문

[10] 레닌, <<전집>> 제27권, p. 392

[11] 레닌주의의 제문제에 대하여, 1926, 스탈린선집 제2권, 학우서방, 동경, 1966, pp.14〜15

[12] <신민주주의론> 본문

[13] 신민주주의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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