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건은 마오주의 인도공산당 (Communist Party of india(Maoist)) 에서 발행한 맑스-레닌-마오주의 기초학습과정 교재 Marxism-Leninism-Maoism Basic Course (Revised Edition) Foreign Languages Press를 번역한 것이다. 마오주의 인도공산당에서 간부 기초 교육을 위해 발행한 문건으로, 오늘날의 혁명과학인 맑스-레닌-마오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했는지를 입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이다. 공산주의라는 혁명의 대한 과학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이번 호에 게재>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 코뮌의 교훈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1. 서문
대부분의 우리 혁명가들은 '실천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왜 이념과 이론, 그리고 그러한 다른 것들에 왜 애를 쓰는가? 그런 것들은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을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느낀다. 낮은 위치의 활동가들이나 구성원들은 중앙위원회나 상급의 위원회가 학습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자주 상급 위원회의 많은 구성원들 또한 이론을 위해 많은 시간을 '허용'하기에 다른 일들이 지나 치게 긴급하다고 느낀다.
다른 한편, 몇몇 사람들은 '올바르게' 실행하기 위해선 위대한 스승들의 모든 작업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느낀다. 이들은 모든 것을 읽기 위해 많은 시간을 써버린다. 이들은 또한 자신이 읽은 모든 것들을 교리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공부에 있어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피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동지들은 우리의 이 념인 맑스-레닌-마오주의(MLM)의 정수를 파악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학습에 쏟아 야 한다. 수많은 책들을 그저 외우려하기보다는, 우리의 지도 이념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측 면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수행하고 일상의 업무에 적용하기 위해 학습한다면 우리는 전체 당 차원에서의 실천 뿐만 아니라 활동가 개인으로서의 실천 역 시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 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MLM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러한 오류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피상적인 이해는 당의 결정문과 입 장문의 본질과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따라만 가도록 이끌 수도 있다. 이러한 잘못 또한 MLM에 대해 더 깊은 파악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MLM에 대한 학습을 통해, 우리는 세계 혁명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경험들을 바탕으로 배움을 얻는다. 우리는 그 안의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배우며, 우리의 실천에 있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기 위해 배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모든 종류의 기회주의를 인지하고, 비판하며, 맞서 싸우기 위해 배운다. 요컨대, MLM은 이론의 빛 속에서 우리의 실천을 주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MLM 기초학습과정은 우리 이념의 원칙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활동가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첫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우리의 이념은 ‘실천적’ 이론으로, 실행될 의도를 지녔으며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론 그 자체는 수많은 계급투쟁들의 과정 속에 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가 발견하고 형성한 기본적 원칙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실천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MLM의 성장과 발전의 역사적 과정과 관련하여 제시된다. 요컨대 될 수 있는대로 기본 개념들은 그것을 낳은 사회경제적 조건들, 주요 정치적 사건들, 계급투쟁들과 연결지어 제시될 것이다. 세부적으로 특정한 측면을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수적일 것이다. 반면 기초학습과정은 우리 이념이 발전해온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어떤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서 특정한 입장들 과 이론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한다
자, 우리의 공부를 시작해보자.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혁명을 지도하는 정당은 공산당이다. 그리고 공산당의 사고와 실천을 지도하는 이념은 맑스 -레닌-마오주의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이들은 공산주의 이념이나 MLM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이것들의 다양한 부분 및 양상에 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적지 않은 이들은 MLM이 단순히 맑스, 레닌, 그리고 마오의 사상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며, 피상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MLM에 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 내부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MLM의 본질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맑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창안하고 선전하던 1847년, 엥겔스는『공산주의의 원리』(The Principles of Communism)라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여기서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공산주의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의 조건들에 관한 학설이다.” 즉, 엥겔스는 이 매우 짧은 정의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본 질은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의 궁극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노동계급의 궁극적 자유는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통해 비로소 쟁취될 것이다.
스탈린은 같은 방식으로 “맑스주의는 자연과 사회의 발전법칙에 관한 과학, 억압받고 착취 당한 대중의 혁명에 관한 과학, 전 세계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에 관한 과학, 공산주의 사회 의 건설에 관한 과학”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스탈린은 맑스주의를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첫째로, 맑스주의는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전체에 관한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과학이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종합과학이다. 둘째로, 맑스주의는 혁명의 과학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자본가 계급에 의한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들과 같은) 부자들의 혁명이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대중들의 혁명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맑스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과학이다.
오늘날 이 과학에는 그것의 확립과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세 스승인 맑스와 레닌, 마오 쩌둥의 이름을 딴 맑스-레닌-마오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 사람 외에도 우리는 엄청난 역할을 한 다른 두 위대한 스승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이오시프 스탈린을 인정한다. 엥겔스는 맑스 사후 맑스주의를 더욱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맑스의 동지로서 맑스주의의 기초를 닦는 공동작업을 함께 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사후에 맑스-레닌주의를 방어하고 더욱 발전시켰다.
맑스주의는 150년도 더 전에 맑스에 의해, 그리고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처음 고안되었다. 맑스주의의 원리는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과,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 또는 역사적 유물론의 발견,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모순과 착취의 근원을 드러내는 잉여가치론을 발견한 맑스주의 정치 경제학, 계급투쟁론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전략의 원칙들에 기초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기의 맑스주의다. 이는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에 맞서 싸우고 제3인터내셔널을 통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을 발전시켰으며,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던 세기의 전환기에 처음으로 창안되었다. 레닌주의는 맑스주의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공헌을 했다. 첫째로, 제국주의 하에서의 자본주의 운동 법칙은 어떠한지 규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제국주의 세력들을 전쟁으로 이끌 것인가를 논증했다. 둘째로, 사회주의 혁명기에서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기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실천 또한 질적으로 발전시켰다. 셋째로,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제1원칙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정립했다. 넷째로, 민족해방운동과 식민지에 서의 투쟁에 관한 이론과 지도를 제공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세계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시켰다. 다섯째로, 레닌주의당, 즉 새로운 유형의 정당의 조직원칙을 개발했다.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옹호하고 발전시켰고, 특히 사회주의 건설 시대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의 정립에 기여했다.
마오주의는 맑스-레닌주의가 현 시대에 적용될 수 있도록 확장, 발전된 형태이다. 마오주의는 중국혁명기, 사회주의 건설기,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과 특히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마오에 의해 개발되었다. 모순론, 인식론의 발전, “인민으로부터 인민에게”라는 군중노 선의 정식화, 신민주주의론,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혁명노선의 정식화, 혁명을 위한 세 가지 도 구인 당, 인민군, 통일전선의 정식화, 장기화된 인민전쟁 이론과 군사적 원칙의 발전, 정풍운 동과 자아비판, 그리고 두 가지 노선 투쟁의 이해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당 조직론의 발전, 또 한 소련과 중국의 경험에 기초한 사회주의 정치경제의 발전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는 마오주의가 만들어 낸 기여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여는 사회주의를 더욱 견고히 하고, 현대 수정주의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 복원을 막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혁명을 이어나가는 이론과 실천이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서 이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맑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는 분리된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의 동일한 이데올로기의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이다. 우리는 다음 챕터에서 맑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의 발전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위에 열거된 다양한 부분과 측면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위에 열거된 목록은 길고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각 측면의 본질에 집중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 맑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곧 보게 되겠지만, 맑스주의는 우리에게 모든 아이디어와 이론이 항상 어떠한 물질적 조건 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새로운 물적 조건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 도 등장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진리는 맑스주의 자체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맑스주의를 더 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적 조건, 즉 맑스와 엥겔스가 맑스주의를 창시하게 된 사회경제적 조건을 알아야만 한다.
맑스주의는 150년 전, 즉 1840년대에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유럽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세계지배는 인도, 중국, 페르시아 등의 초기 선진문명을 모두 종속 시키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맑스주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동안 유럽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에서 태어나고 살아갔다. 그들은 그 당시의 모든 주요한 정치적 사건을 관찰하고 거기에 참여했으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맑스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유럽을 살펴보고 사회경제적 상황의 주요 요인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1760년부터 1830년 까지 지속된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이 혁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상술한 70년 동안 전 세계가 산업 발전의 폭발적이고도 혁명적인 성장을 처음으로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동안 현 대적인 대형 공장이 처음 세워졌으며 특히 영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동시에 이루 어진 것은 영국의 공산품을 전 세계로 보냈던 세계시장의 막대한 팽창이었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및 아메리카의 일부와 같은 다른 국가들도 대규모 공장을 세웠지만 이 시기에는 영 국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영국은 전 세계 각국에 공산품을 공급하는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정도였다.
산업 혁명은 자본가 계급을 변화시켰다. 이 계급은 이전에는 경제적으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중간계급에 해당하였다. (프랑스어로 ‘부르주아’가 중간계급을 의미했기 때문 에 이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렸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이 중간계급은 산업 백만장자 계급, 즉 현대 산업 부르주아 계급으로 변모했다. 이 새로운 계급의 엄청난 부는 그들이 여전히 지배 계급이었던 봉건계급에게 강력하게 도전할 힘을 가져다주었다.
현대 산업 부르주아 계급과 더불어 산업 혁명은 현대 산업 노동자 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또 다른 계급을 탄생시켰다. 이 계급은 대규모 공장에서 수천 명이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규모 작업장에서 소규모 그룹으로 일하던 초기 노동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 외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고, 이전 세대의 노동자와 일꾼들에게는 부재했던 강인함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힘은 현대 산업과의 접촉, 공장체계로부터 배운 규율, 그리고 한 지붕 아래의 단일한 공장에서 많은 수가 함께 모여 형 성된 우수한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사회 내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그들을 역사상 잠재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는 당대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던, 신흥 자본가 계급이 이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확산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도 불러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군대는 거의 전 유럽을 정복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봉건제도를 폐지하는 부르주아 개혁을 도입했다. 그들은 군주들과 옛 봉건 계급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비록 프랑스 군대는 후에 패배하게 되지만, 옛 지배 계급은 예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없었다. 현대 부르주아 계급은 수많은 다른 부르주아 혁명들을 통해 혁명의 물결을 이어갔고, 이는 봉건계급의 결정적 패배와 세계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승리를 가져왔다.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맑스주의가 탄생한 시대는 자본가 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지배적인 국가들에 대한 통치를 확정적으로 확립해가던 커다란 진보와 승리의 시기였다.
이 시대는 부르주아 계급이 크게 발전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맑스주의의 탄생을 낳은 가장 주된 요인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 부상과 프롤레타리아 조직 및 운동의 출현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독립적이고 의식적인 세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렸다.
계급의식적인 노동계급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부상했다. 두 나라에서 현대적 산업이 일찍이 확산된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현대적 산업의 확산은 비록 부르주아 계급에게 큰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에게는 가장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생활환경을 불러왔다. 더 저렴하고 통제하기 쉬웠기 때문에 노동인력의 거의 4분의 3은 여성과 어린이들로 구성되었다. 여섯 살부터 아이들은 방직 공장에서 14시간에서 16시간가량을 일해야 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할수록 노동자들은 점점 더 큰 고통에 빠졌다. 직물 공장 주인들은 자본금을 몇 배로 늘렸지만, 직조 노동자들의 임금은 산업혁명 이전에 받았던 것의 8분의 1로 감소하였다.
그렇기에 프롤레타리아가 놓인 상황에서 저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거의 강제적인 것이었다. 최초의 저항은 자발적이었고 명확한 방향성이 부재했다. 1810-1811년의 기계 파괴 운동 [러다이트 운동]이 그 예시다. 직조공 무리들은 직물 공장을 습격하여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기계를 파괴했다. 이는 그들의 생계를 파괴하던 근대 산업에 항의하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뚜렷한 방향도 없었으며 거센 탄압을 받은 탓에 운동은 금세 사그라졌다.
허나 뒤이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해답과 방향을 제공한 노동운동과 노동조직이 확산되고 성장했다. 숙련된 노동자에게만 허용되던 초기의 노조들은 1818년부터 모든 노동자들을 일반노동조합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이러한 조합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이윽고 전국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전국적 노동조합은 형성되었고, 1833-34년에 이르러서는 5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은 협동적이고 상호 호혜적인 공동체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이 대부분 금지되었던 다른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조합들이 노동계급이 조직되는 주된 형태였으며, 이러한 조직들은 점차 그 수와 힘을 증대해갔다.
노동자 조직들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1837년,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선거권을 는 차티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최초로 광범위하고 진정으로 대규모이며 정치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이었다. 이들은 의회에 대량 탄원서를 제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의 조직적인 서명운동과 다소 유사했다. 이 탄원서에는 5백만 명이 서명했고 일부 시위에는 35만 명이 참여해 노동계급의 조직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티스트 운동의 힘과 전투성이 강해지면서 운동은 심각한 탄압에 직면했고, 1850년까지 억압 되었다. 1840년대 초 엥겔스가 맨체스터에 머무는 동안, 그는 주간지인 『북극성』(The Northern Star) 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차티스트 지도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고, 차티스트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노동운동의 전투성이 강해지면서 최초의 노동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는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 예로는 1816년 런던과 1819년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봉기, 1831 년과 1834년의 (프랑스) 리옹에서 벌어진 실크 직조공들의 봉기, 그리고 1844년 프로이센의 실레시아(오늘날 폴란드의 일부)에서 일어난 린넨 방직공들의 봉기들이 존재한다. 그 중 마지막 투쟁은 젊은 맑스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1840년대까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그 힘과 강도에 있어 많은 공업 국가들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여전히 취약했고 지배적인 거대 부르주아 계급이나 오래된 봉건 지배계급에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가 독립된 계급 세력으로 확립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물질적 실재를 지니게 된 것은 또한 동시에 이 새롭고 혁명적인 계급을 대 표하는 사상의 탄생을 의미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상과 이론이 생겨났다. 1840년대에 처음으로 정식화되었을 때 맑스주의는 그 사상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수많은 이론들이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생겨났지만 당대의 물적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 것은 맑스주의뿐이었다. 그렇기에 그 후 몇 년 을 거치며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상임이 증명된 것은 오직 맑스주의뿐이었다.
4. 맑스주의가 되기 전까지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분명하게도, 어느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맑스주의자 일 수는 없다. 그건 맑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상과 관점이 발전되고 형성되며, 이데올로기라 불릴 수 있는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맑스와 엥겔스 역시 오늘날 맑스주의로 알려진 것의 기본을 이루는 진리들을 발견하고 파악하기까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 사유의 과정은 대개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이다. 이것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두 위대한 스승들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경험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칼 맑스는 1818년 5월 5일 현재는 독일의 일부인, 당시 라인 프로이센(Rhenish Prussia) 이라 불렸던 지역의 트리어(Trier)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맑스는 시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 중 하나였다. 가족들은 부유했고 교양 있었지만, 혁명적이진 않았다. 맑스의 양 친은 대대로 유대교 사제를 해왔던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부유했지만, 프로 이센의 반유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차별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프로이센 정 부가 유대인들이 변호사 일을 할 수 없도록 막는 법안을 제정하였기 때문에, 맑스의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비슷하게, 1824년에는 비기독교인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도록 하는 또 다른 프로이센 법령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하인리히 맑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들 칼에게도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와 같이 맑스의 아버지는 조직화된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단지 직업에 종사하고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맑스의 고향인 트리어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수세기동안 로마 황제들의 거주지였다. 이후에는 시와 주변 지역의 종교적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가톨릭 주교들의 소재지가 되었다. 1794년 8월, 트리어시를 함락시킨 프랑스 군대는 민정을 수립하고 프랑스 혁명의 사상과 제도를 가져다주었다. 시는 1815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프로이센 왕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맑스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에도 트리어 시는 21년간 영향을 받아온 프랑스 혁명 사상으로부터 여전히 분명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트리어는 우리의 작은 탈루카[taluka, 인도의 작은 자치구]의 규모와 비슷한, 인구 12,000명 규모의 작은 도시였다. 그곳은 인근 지역의 주요한 시장도시로, 수 세기동안 유명한 포도주 산지였다. 주민들은 공무원, 성직자, 소상인, 수공업자 등 ‘서비스’산업 도시에 일반적인 직업 들을 가지고 있었다. 트리어는 산업혁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맑스의 어린 시절에는 빈곤도 심했다. 1830 년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실업률은 4명 중 1명꼴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높았을 것이다. 거지나 매춘부들은 흔히 보였고 절도와 같은 사소한 범죄는 매우 많이 일어났다. 따라서 맑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가난한 노동계급의 비참함을 목격해왔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맑스는 1831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835년에 졸업했다. 3주 후 그는 더 깊은 공부를 위해 트리어에서 40마일 떨어진 본(Bonn, 오늘날 독일의 공동수도이기도 한 중심지)에 있는 법학대학으로 갔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려는 열망으로 맑스는 즉시 시학, 문학, 예술 등 법학 이외의 아홉 가지 수업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업에 정기적으로 참여했지만 점점 수업에 관심을 잃어갔다. 무미건조 하고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했던 법학 수업에서 특히 그러했다. 그는 처음에 신청했던 수업과정들을 여섯 개로 줄였고, 후에는 네 개로 줄이게 된다.
그는 스스로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곧 그는 학생들의 지도자로서 그들의 폭풍 같은 삶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시를 쓰는 데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혁명적인 학생들에 의 해 설립된 젊은 작가 모임인 시인동맹(Poetenbund)에도 가입했다. 봉건귀족들의 자식들과 부르주아 계급의 자식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그는 곧 부르주아 세력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종종 주먹다툼을 했고 때때로는 칼싸움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는 단검(stiletto)을 소지하고 다녔는데, 이로 인해 한번은 체포되어 경찰에게 기소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밤마다 시끄럽게 평화를 깨뜨리고 술에 취한” 혐의로 대학교의 학생교도소에서의 1일 형을 선고받았다. 맑스는 한 번의 칼싸움에서 오른쪽 눈썹에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이 일은 1836 년 8월 맑스의 아버지로 하여금 맑스에게 본 대학을 그만두고 트리어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맑스는 귀족이자 프로이센 정부의 고위 관리였던 폰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이었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비밀리에 약혼했다. 맑스와 그보다 4살 위였던 예니는 학창시절에 이미 결혼을 결심했던, 어린 시절의 연인이었다. 그들은 이제 맑스의 부모님의 허락 아래에서 약혼했지만 예니의 부모님의 허락은 받지 못했고, 1837년이 되어서야 허락받을 수 있게 된다.
1836년 10월 맑스는 프로이센의 수도에 위치한 베를린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대학교는 본에서보다 훨씬 컸고 배움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다. 대학과정에 등록한 후, 맑스 는 곧바로 작업의 폭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매일 밤을 지세우고, 불규칙적인 식사를 하며, 많은 담배를 피우고, 무거운 책들을 읽으며 공책을 채워나갔다. 정규수업 대신에 맑스는 스스로의 공부를 추구했다. 엄청난 속도로 작업하면서 그는 법학에서 철학으로, 시학에서 예술로 넘어갔다가 희곡과 이야기를 쓰고, 또 다시 철학과 시학으로 되돌아왔다. 무리한 공부는 건강 에 나쁜 영향을 미쳤고, 특히 흡연은 폐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과도한 공부 습관으로 되돌아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고대부터 가장 최신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맑스는 철학에 소질이 있었다. 그는 항상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원칙, 정의, 개념에 있 어 절대적인 것을 추구했다.
대학에서 두 번째 해를 보내는 동안, 그는 청년 헤겔학파(Young Hegelians)라고 불리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과 강사들의 모임에 가입하게 된다. 이들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고 1830년에 사망한 유명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추종자였다. 헤겔 철학을 급진적으로 해석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들은 종종 헤겔 좌파라고 불리었다. 맑스의 친구이자 모임의 지적인 지도자였던 교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는 교회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공격해온 전투적 무신론자였다. 이러한 공격들은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와 더불어 그들을 프로이센 당국의 표적이 되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따라서 박사 논문을 완성했을 때, 맑스는 프로이센 정부가 임명한 반동적인 이들이 지배하고 있던 베를린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할 수 없었다. 베를린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는 1841년 4월 프로이센의 통제 밖에 있었던 자유주의적 성향의 예나 대학에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1839년 브루노 바우어가 옮겨온 본 대학의 강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바우어 본인은 그의 반종교적 강의가 야기한 학생들의 소란들로 인해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왕이 직접 바우어를 본 대학에서 해고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교직에 대한 맑스의 희망은 물론, 바우어의 교사 경력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맑스는 대학을 마치자마자 시작했었던 저널리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급성장하고 있었던 급진적인 민주적 반대운동에 그가 더욱 철저히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고, 운동은 라인란트 주와 이웃하고 있었던 베스트팔렌 주에서도 발전하게 된다. 프랑스의 반봉건 개혁의 해방적인 영향력을 경험한 이 주들은 프로이센 왕에 대한 주요한 반대의 중심지였다. 또한 산업화는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이는 라인란트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쾰른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는 봉건세력의 지나친 통제에 신물이 난 산업가들이 이 급진적 반대운동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1842년 10월에는 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이 되었다. 라인신문은 산업가들의 지지를 받았던 일간지였다. 맑스의 손을 거치며 신문은 곧 급진적인 민주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맑스로 하여금 매우 억압적이었던 프로이센 검열관들과 끊임없이 갈등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신문이 러시아 차르의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을 싣자, 차르는 직접 프로이센 왕에게 행동을 취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신문은 금지되었고 1843년 3월에 폐간되었다. 이후 맑스는 독불연보(The German-French Yearbooks)라는 새로운 저널을 발간하는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1841년부터 1843년까지, 맑스는 당대의 폭풍 같은 정치 생활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급진적 민주주의자였고 당시에는 공산주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시기 철학의 수준에 있어 중대한 변화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종교를 비판한 루트비히 포이 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을 읽은 후였던 1841년에 일어났다. 이 책은 맑스의 신념을 청년 헤겔학파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전환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역 할을 하였다. 맑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1841년의 또 다른 철학적 작업은(『유럽의 삼두제』, The European Triarchy) 그의 친구 모제스 헤스에 의한 것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와 헤겔 좌파 사상을 결합하여 공산주의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당시 맑스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에 대해 아직 제한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들과 처음으로 접촉했던 것은 1842년의 일로, 그가 흥미를 가지고 많은 대표적인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작업을 읽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독서를 통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전향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계급 공산주의자 그룹 과의 접촉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두 가지 모두 1843년 말 파리로 이주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약혼한 지 7년째가 되는 1843년 6월에 맑스와 예니는 결혼했다. 그들은 스위스에서 짧은 신혼여행을 즐겼고, 그 기간 동안 그는 헤겔에 대한 초기적 비판을 보여주는 작은 책자를 집필하였다. 신혼여행이 끝난 후 그는 연구를 시작했고 앞에서 언급했던 『독불연보』가 출간될 예정이었던 파리로 이사할 준비를 하였다. 파리로의 이주는 프로이센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저널은 월간지로 기획된 것이었지만 1844년 2월의 단 한 번의 발행 이후 무산되었다.
그러나 맑스의 파리 시기는 아주 중요한 새로운 경험들로 특징지어졌다. 가장 중요했던 경험은 다양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단체들과 직접 접촉했던 것으로, 파리는 이러한 단체들의 뜨거운 중심지였다. 많은 이론가들과 혁명가들을 만나는 것 이외에도 맑스는 파리의 많은 노동계급 혁명가들과의 정기적인 접촉을 통해 큰 도움을 얻었다. 동시에, 맑스는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유명한 영국 경제학자들의 저술들을 대부분 읽었다. 혁명적인 접촉과 연구 의 심화는 맑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저술에 반영되었다.
독불연보 한 부의 발행은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는 최초의 광범위한 일반화를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이러한 내용은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글에 담겨있었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식화를 만들어낸 것도 이 글에서였다. 그는 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공식도 이 글에서 만들어냈다. 같은 호에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엥겔스의 글 역시 실려 있었는데, 이 글 또한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844년 8월 28일과 9월 6일 사이에 파리에서 그들을 만나게 한 것은 엥겔스의 저술에 대한 맑스의 관심이었다. 이는 두 위대한 사상가들이 그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맑스주의의 첫 토대를 마련하게 하는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독자적으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지만, 이 만남은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이론적 합의를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만남을 통 해 그들은 맑스주의 이론의 초석인,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더욱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20년 11월 28일 프로이센 라인주의 섬유산업도시 바르멘(Barmen)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면 방적공장의 부유한 소유주였고 반동적인 정치관을 지닌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바르멘은 맑스의 트리어와 마찬가지로 20년 동안 프랑스의 정복을 겪은 지역이었고, 프로이센의 일부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정복은 바르멘에도 진보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바르멘 의 가장 주된 특징은 그곳이 라인 주에서 가장 큰 산업 중심지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동계급의 극심한 빈곤과 착취를 목격할 수 있었다. 공장들 간의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장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야만 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슬픔을 음주로 달래곤 했다. 아동 노동과 작업으로 인한 폐 질환이 만연했다.
엥겔스는 14세까지 바르멘 시의 학교를 다녔다. 이후 그는 이웃 도시 엘버펠트의 고등학교로 보내졌다. (오늘날 바르멘과 엘버펠트는 하나의 시로 통합되었다.) 이 학교는 프로이센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 중의 하나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언어를 배우는데 소질이 있었던 총명한 학생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시를 쓰는 모임의 일원이었고 시와 단편소설들을 썼다. 그는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아버지는 그의 장남이 가업을 배우게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7세의 나이에 그는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엥겔스의 공식적인 학업은 이로써 끝나게 되지만, 그는 자유 시간을 활용하여 역사, 철학, 문학, 언어학 공부와 시를 쓰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 중 시 쓰기는 특히 엥겔스가 매료되었던 일이다. 이듬해 1838년 7월, 엥겔스는 커다란 항구도시 브레멘의 큰 무역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대도시의 분위기는 엥겔스가 외국 문학과 언론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여가 시간에 그는 소설과 정치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계속하여 학습했고, 독일어 이외에도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등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언어를 배우는 이러한 능력은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를 포함하여 20개 이상의 언어를 꽤 유창하게 배웠던 엥겔스의 생애에 걸쳐 지속되었다. 브레 멘에서 엥겔스는 훌륭한 승마인, 수영선수, 검객, 아이스 스케이팅 선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엥겔스는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투사였다. 이제 성인이 된 젊은이인 그는 후에 독일에서 구체화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에 매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매료되었던 집단은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내세웠던 청년독일파 문학 집단(Young German literary group)이었다. 그는 곧 브레멘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출간되는 저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 지역의 상황에 대한 두 편의 글을 작성했다. 그는 바르멘과 엘버펠트 노동자들의 극심한 착취와 그들이 겪는 질병들, 그리고 절반 가까이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특히 (그의 아버지를 포함한) 착취적인 산업가들이 가졌던 신앙의 공허함을 비판했다.
1839년 말 엥겔스는 헤겔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헤겔의 사상과 급진적인 민주주의적 신념 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1841년 브레멘에서 사무일을 마치고 몇 달의 공백을 가진 후에 베를린으로 건너가 1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마친 후에야 그러한 시도에서 진전을 이 룰 수 있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엥겔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외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였고, 철학을 수강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맑스가 일원으로 속해있었던 청년 헤겔학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맑스와 마찬가지로 엥겔스 역시 역시 그 해에 출간되었던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적 관점 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엥겔스의 글들은 이제 유물론적인 측면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가 늘 강조했던 핵심은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는 초기 청년독일파가 공허한 문학 논쟁들에 스스 로를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1842년 초기 청년독일파와 결별하게 된 이유였다. 반면 그는 청년헤겔학파, 특히 브루노 바우어와 그의 동생과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 했다.
1842년 11월에 처음으로 만난 맑스와 친분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이 이러한 바우어 와의 가까움이었다. 엥겔스는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아버지가 잉글랜드 맨체스터에서 하던 사업에 사무원으로 합류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도중에 그는 쾰른의 신문사 사무실 에 있던 맑스를 방문했는데, 그 신문사는 맑스가 편집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 무렵 맑스는청년헤겔학파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특히 바우어가 정치보다 종교에 대한 선전에 지나치게 집중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다른 정치적 연계를 가졌던 맑스와 엥겔스는 이 첫 번째의 만남 에서 가까워질 수 없었다.
엥겔스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것은 영국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차티스트 운동을 벌였던 혁명적 노동자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맨체스터의 노동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나갔다. 맨체스터는 세계 섬유산업의 중심지였고 곧 엥겔스는 그곳의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환경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직접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노동계급이 살던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아일랜드인 공장 노동자이고, 후에 엥겔스의 동반자 이자 아내가 되는 메리 번즈(Mary Burns)와의 사랑이 싹텄다. 엥겔스는 미래에 쓸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한 책의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에 대한 정기적인 참여는 엥겔스로 하여금 노동계급이 단순히 고통 받는 계급이 아니라 그들의 혁명적 행동이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투쟁적인 계급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였다.
노동계급과의 접촉하는 것 이외에도 엥겔스는 다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들을 깊이 있게 연구했고, 심지어는 그러한 이론들을 정식화한 많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자와 작가들을 만나기까지 했다. 비록 그러한 이론들 중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러한 이론들의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에 대해 분석했다. 동시에 엥겔스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이 모든 사회적 변화의 기초라고 느끼기 시작했고, 이러한 작업은 그러한 경제적 관계들에 대해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엥겔스 는 연구의 초기 결과들을 글로 적었는데, 이는 파리에서 출간되는 맑스의 저널에 실렸다. 앞 서 언급했듯이 이는 맑스와 엥겔스의 서신교환과 1844년의 역사적 만남으로 이어졌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맑스를 만나기 위해 잠시 여정을 멈추었을 때 엥겔스는 멘체스터에서 고향 바르멘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논의는 맑스로 하여금, 두 사람 모두가 받아들이기 시작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더 잘 정식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또한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은 첫 공동저서에 대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는 두 사람 모두가 이 전에 속해있었던 청년 헤겔학파와 브루노 바우어를 공격하는 작업이었다.
엥겔스는 이후 8개월 동안 독일에서 공산주의 선전과 조직 활동에 집중했다. 이 기간 동안 엥겔스는 그의 공산주의 활동에 반대하고 그를 공장에서 일하게 하려 했던 아버지에 맞서 끊임없이 반항했다.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지낸지 불과 2주 만에 엥겔스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 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했고, 맑스와 합류하기 위해 바르멘을 떠났다. 그 무렵 맑스는 다시 봉건적인 당국의 표적이 되었다. 프로이센 왕은 프랑스 왕에게 압력을 가했고, 프랑스 왕은 맑 스를 파리에서 추방했다. 맑스는 그의 아내와 생후 8개월 된 아이와 함께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엥겔스 역시 브뤼셀로 와서 맑스의 집 옆에 자신의 집을 마련했다.
그동안 맑스는 심도 있는 작업을 수행했고, 이전의 만남에서 논의했던 새로운 세계관의 주 요한 특징을 발전시켰다. 브뤼셀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함께 집중적인 공동 작업에 착수했다.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거의 100년 후에나 출간될 수 있었던 역사책 『독일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이 책이 제공한 주요한 목적은 두 위대한 사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오래된 이해를 명료하게 하고, 새로운 세계관의 기둥을 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후에 맑스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드디어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 모두가 비범하고 뛰어난 이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이러한 뛰어난 두뇌의 사고에서 갑자기 발생한 발명품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당대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발생하게 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의 실제 내용과 형식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의 영역에서 발생했던 투쟁들의 산물이었다. 깊이 있는 지식인이었던 맑스와 엥겔스는 당대 가장 발전한 나라들의, 가장 최신의 사상적 발전을 넓고 깊게 이해했다. 그러므로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 앞에 서있던 위대한 사상가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좋은 것은 흡수하고 잘못된 것은 거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맑스주의의 구조와 내용을 세웠다.
그들의 생각이 기반을 두고 있던 주요한 사상의 영역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이를 통해 우리는 맑스주의의 주요 원천을 이해할 수 있다.
1) 맑스주의 사상의 첫 번째 원천은 독일 고전철학이다. 무슨 이념이든지 간에 어떠한 철학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으며, 맑스와 엥겔스 모두 우리가 봐왔던 것과 같이 독일 고전 철학에 강력한 토대를 두고 있었다.
독일 철학은 1760년부터 1830년 사이에 성장하여 유럽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조가 되었다. 독일 철학은 독일 중간 계급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 계급은 지성적으로 매우 진보 했지만, 혁명을 일으킬 정치적 힘이나 산업혁명을 일으킬 경제적 자원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 것이 아마 그들을 정교한 사고의 체계로 기울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관료들이 속해있었던 이 계급은 많은 모순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계급 은 때로는 산업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때로는 봉건계급에게 기울었다. 이러한 반동적인 면과 진보적인 면은 독일 철학에도 반영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맑스와 엥겔스가 광범위하게 기반하고 있던 헤겔의 철학에서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존의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반동적인 측면들을 거부하였으며,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부분을 발전시켜 맑스주의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2)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맑스주의의 두 번째 중요한 원천이다. 산업혁명의 중심이었던 영국 에서 경제와 그 법칙에 대한 연구가 정점에 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치경제 학은 현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근본적으로 시작된 새로운 학문 영역이었다. 정치경제학은 현대 산업 부르주아 계급에 확고한 기반을 지니고 있었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역 할을 수행하였다. 정치경제학은 또한 봉건세력과의 투쟁 속에서 부상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 에게 지적인 논거를 제공하였다.
영국에서 정치경제학의 시대는 1776년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쓴,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 『국부론』의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부여받는다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봉건세력의 모든 종류의 통제를 축소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또 다른 유명한 고전경제학자로 부르주아와 지주의 투쟁에서 중대 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자본가들의 평균이윤율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아주 중요한 발견은 모든 경제적 가치가 노동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노동가치론의 발전이다. 이후의 다른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산업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 로 정치경제학은 봉건계급에 대해서는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학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해를 끼치기 시작하는 지점을 넘어서는 방향 으로 분석을 진전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리카도는 노동가치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 착취를 폭로하지 않았다. 이는 맑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는 자본가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국 경제학자들의 작업을 받아들였고,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인 혁명적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맑스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 바로 이것이다.
3) 맑스주의의 세 번째 원천은 주로 프랑스에서 기원한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들이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새롭게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희망과 목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러 한 이론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반영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 유럽에 영감을 주었던 혁명적 조직들과 이론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이론들이 주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이론들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중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론들은 부르주아 혁명 이론의 개인주의, 사리사욕, 경쟁에 대한 거부를 상징했다. 또한 이러한 이론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나아가야 할 길을 가리켰다. 따라서 맑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맑스주의적 원리들을 정식화하기 전에 이러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들을 연구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맑스는 프랑스의 수많은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조직들의 지도자 및 구성원들과 함께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맑스는 사회주의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계급투쟁의 원칙이라는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이는 어떻게 맑스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들의, 세 가지 위대한 사상적 원천으로 부터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인 독일의 철학, 영국의 정치 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는 새로운 이념의 세 가지 주요한 구성물에 상응하는 것이 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의 맑스주의 철학,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 한 맑스주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 장에서부터 우리는 각 부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