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M 기초학습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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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M 기초학습과정 (2)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코뮌의 교훈


<이번호에 게재>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앞에서 반복하여 보았던 것처럼, 맑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모든 철학이 실천적이어야 하며,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맑스의 유명한 말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에서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를 통해 맑스는 산에 앉아서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철학이 실제 세계와 연결되지 않는 한, 사고와 사색에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맑스의 기본적인 탐구는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따라서 어떻게 실제의 실천에 참여하고 오늘날의 세계와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실천에 적용될 수 있는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를 위해 맑스는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분리이라는, 모든 철학의 근본적인 분리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만 했다. 이러한 분리는 ‘정신과 자연 중 무엇이 일차적인가’라는 근본문제에 관한 것이다.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관념론의 진영에 속하고, 자연이 일차적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유물론의 진영에 속한다. 관념론은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 종교적 믿음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던 실천가였던 맑스와 엥겔스가 유물론의 진영 위에서 맑스주의 철학을 확고히 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 그들은 포이어바흐와 당대의 다른 유물론 철학자들의 저술에 분명하게 영향과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자연과 사회를 어떠한 발전이나 실제적인 변화 없이 계속 돌아가기만 하는 기계처럼 이해하는 기계적 유물론자들이었다. 맑스는 기계적 유물론이 역사적 변화와 발전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가져다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다.

이를 위해 맑스는 운동의 일반법칙의 과학이었던 변증법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변증법의 본질은 사물을 내적연관과 모순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은 맑스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발전에 대한 과학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당시 (맑스가 깊게 연구했던) 헤겔철학과 변증법의 법칙은 유럽에서 가장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의 철학적 법칙을 사고의 영역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관념론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관념론 진영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자연을 비롯하여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일차적이며 정신과 생각이 이차적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따라서 헤겔은 그의 사고 체계 자체가 특정한 단계에 있는 인간 사회 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헤겔은 그의 사고법칙이 자연과 사회의 법칙을 반영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맑스가 말했듯, 헤겔의 변증법은 그가 관념론자가 됨으로써 물구나무 서 있게 된다.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이라는 말이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의 기초 위에 세워놓음으로서 그것을 바로 세웠다. 즉, 그것을 합리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 법칙을 받아들여 유물론적 철학으로 접근하도록했다. 따라서 그는 헤겔의 사고법칙을 자연과 사회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그는 맑스주의 철학의 정수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식화했다.

변증법에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맑스는 변증법을 혁명의 철학으로 변화시켰다. 맑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와 역사 연구에 적용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는 사회와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새롭고,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사회적 변화와 정치혁명의 기초를 몇몇 뛰어난 사람들의 정신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혁명가들에게 사회적 변화의 길이 사회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생각을 정식화하는 것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공상적 사회주의는 맑스 이전 사회주의의 주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19세기의 전반기에 등장하여 두드러지게 된다. “유토피아”(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인 유토피아를 가정하는 유토피아 사상으로부터 유래된)와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830년대에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사용된다. 이 용어들은 사회를 변화시켜 더욱 평등한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일군의 사상가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그들은 인간 본성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심, 경쟁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상가들과 추종자들 중 많은 이들은, 모든 구성원들이 협동의 기반 위에서 함께 일하고 거주하며 노동의 결실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움으로서 그들의 이론을 실행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사회의 나머지가 따르게 될 본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사회의 실제적 과정들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계획과 발상 자체의 합리성만으로도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충분하다고 보았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 하의 노동계급이 겪었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노동자들은 봉건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격렬히 싸워왔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라는 부르주아지들의 슬로건은 단지 자본가 계급의 자유와 노동자의 강화된 착취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회주의 교리들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부상하는 계급모순의 결과이자, 착취에 대한 항의의 결과로서 등장했다. 그들은 임금노동자들에게 정의로운 체제를 건설 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질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이 나타나는 또 다른 원인이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류의 필요를 질서정연하고 조화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이성적인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사회주의 체제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며, 따라서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자본가들과 정부 관료들에게 설득하려 했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기획을 위해 부자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려 하기도 했다.

맑스 이전 사회주의 교리들의 주요한 결함은 사회에서 전개되는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발상 자체는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계급모순의 산물 이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계급투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사상은 실제로는 유아기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가진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불러오는데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이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단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과 사상들이 논의되는 다양한 혁명 조직들과 노동계급 조직들의 토론에 집중적으로 참여 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사회주의 이론에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 들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결함과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고, 사회주의를 맑스주의 계급투쟁론 의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맑스 스스로가 지적했던 것처럼, 계급투쟁 이론은 그가 발명한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심지어 부르주아 작가들까지 계급투쟁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고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맑스주의 계급투쟁 이론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이 어떻게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 다는 것이다.

첫째로, 맑스는 계급이 인류 사회에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계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긴 시대(즉, 원시공산주의)가 인류 역사에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미래에도 다시 계급이 사라지는 시대가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로, 맑스는 특히 현 시대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투쟁을 분석하여, 계급투쟁이 어떻게 불가피하게 노동자 들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 었다. 세 번째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체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이행기임을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지양함으로서만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데, 그러한 지양은 모든 계급을 철폐하고 계급 없는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맑스와 엥겔스가 평생에 걸쳐 개발하고, 선전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계급투쟁 이론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전화시킨 맑스주의 계급투쟁 이론으로, 과학적 사회 주의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는 더 이상 몇몇의 뛰어난 두뇌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된 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투쟁의 필연적 산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 덕분에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더 이상 공상적 사회주의가 하고자 했던 것처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우며 이상적인 사회체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임무는 사회를 분석하고, 계급모순의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토대를 분석하고, 이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모든 계급투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찾고 사회 주의와 공산주의를 가져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사회주의 이론의 과학적 명료성이 아주 뛰어났기에, 1840년대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조직들 중 가장 성실한 부류들은 곧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의 비계급적 변종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곧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념적 지도자가 되었다. 1847년 노동자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여러 나라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들을 통합하 는 새로운 국제조직이 결성되었을 때, 맑스와 엥겔스는 바로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동맹(Communist League)이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강령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명되었다. 이 강령이 바로 세계사적인 글,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은 단지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갖게 된 최초의 강령이자 보편적인 노선인 것만 은 아니다. 이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들과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규정하였다. 수많은 언어들로 빠르게 번역되면서 선언은 곧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 사상을 유럽과 전 세계에 퍼트렸다. 이 글에 개괄된 기본 원칙들은 15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확고한 본질로 남아있다.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맑스는 영국 경제학자들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연장으로서, 그리고 대립으로서 그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들을 발전시켰다. 맑스가 1844년에서 1859년 사이에 저술 한 대부분의 초기 경제학 저술들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체제라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싸웠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가 단지 제한된 시기에만 존속할 수 있고, 새롭고 더 높은 사회체제로 타도되고 대체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후기 경제 분석, 특히 여러 권에 걸친 그의 주저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을 발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그 기원, 발전과 쇠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은 언제나 사물 사이의 관계, 즉 한 상품의 다른 상품으로의 교환 이라는 형태로 분석했다. 그러나 맑스는 경제학이 사물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는 것을 보여주었고, 궁극적으로는 계급 관계를 다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상품 생산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맑스는 그의 분석을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했다. 그는 상품의 교환이 단순한 사물의 교환이 아니라, 시장과 연계된 사회의 개별 생산자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품 교환은 수천년간 존재해왔지만 화 폐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탄생을 통해 비로소 절정에 도달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수백만의 개 별 생산자들의 경제생활 전체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심지어 노동자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임금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의 소유자, 즉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일의 일부를 그의 임금의 등가물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하는데, 이때 임금은 그와 그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다. 그의 노동일의 다른 부분은 자본가의 유지와 성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비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를 위한 생산에 있어 절대적으로 어떤 대가도 받지 못한다. 모든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며, 임금을 벌고 스스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치 이상으로 생산해내는 이 추가적인 가치를 맑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잉여가치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과 부의 원천이다.

잉여가치 개념의 발견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의 본질을 폭로한다. 이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적대의 원천을 밝혀냈다. 이 계급적대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의 주요한 표현이다. 엥겔스는 잉여가치 의 발견을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의 발견 이후에 이루어진) 맑스의 두 번째 중요한 발견이라고 언급했다. 레닌은 잉여가치론을 맑스의 경제학 이론의 초석이라고 불렀다.

맑스는 또한 자본주의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주기적 경제 공황에 대해 자세히 분석했다. 그는 자본주의 공황을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그 는 시장의 작동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므로 자본주의는 어떠한 위기도 마주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전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거짓을 폭로했다. 그들은 자본가들이 생산한 것은 무엇이든지 자동으로 시장에서 팔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주의의 작동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기로 불가피하게 이끌 수밖에 없음을 드러냈다. 그는 어떻게 자본가들이 더욱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야한다는 필사적인 충동으로 미친 듯이 생산을 증가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모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율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빈곤에 빠뜨림으로서 높은 이윤율을 유지하고자 했다. 노동계급은 사회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노동계급의 빈곤은 자연히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을 살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본계급은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생산을 증대시키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바로 같은 시장의, 다수 구매자들의 구매력을 감소시킨다. 이는 자연히 생산의 확대와 시장의 위축 사이의 극심한 모순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팔리지 않는 상품으로 시장이 넘쳐나는, 과잉생산공황이다. 수많은 자본가들이 파산하게 된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굶주림에 허덕일 때와 같은 시기에, 상점들은 구매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미사용인채로 남아있는 상품들로 가득 차있다.

나아가 맑스는 자본주의 공황의 무정부성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라는 자본주의 근본모순이 해결됨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생산수단의 소유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할 때 비로소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맑스는 이러한 혁명을 가져올 사회적 힘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현재의 착취와 사적소유 체제를 지속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만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관심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맑스는 모든 공황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심화시켰는지를 분석하였다. 그는 자본이 점점 소수의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집중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는 엄청난 노동자 대중들의 빈곤과 불만 속에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성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첨예해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더욱 강력한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결국 혁명, 자본가들의 자본 몰수,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조응하게 소유가 사회적 성격을 갖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맑스는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상품으로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경제법칙의 본질을 이끌어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위한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기초를 드러내어보였다.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앞서 살펴보았듯, 맑스와 엥겔스는 1840년대의 혁명적 공산주의 조직들에 깊이 관여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유럽 국가의 혁명가들을 통합하는 국제기구인 공산주의자 동맹을 이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이자 세계사적 중요성을 갖는 『공산당 선언을 작성했다. 허나 1848년 당시 맑스주의는 아직 노동계급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영향력은 주로 망명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에 제한되어있었다. 사실, 그 당시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수많은 경향 중 하나에 불과했다.

유럽 대륙 전역에 반란을 확산시킨 1848년 혁명은 맑스주의가 스스로를 실천 속에서 입증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프랑스에서 혁명이 처음 일어난 당시 브뤼셀에 있었다. 벨기에 정부는 혁명의 확산을 우려했다. 그러한 이유로 벨기에 정부는 맑스를 브뤼셀에서 즉각 추방하였으며, 파리로 떠나도록 강요했다. 파리에서 엥겔스는 곧 맑스와 합류했다. 하지만, 혁명의 물결이 독일로 확산되자, 그 둘은 혁명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즉시 독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독일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과 노동자 협회들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혁명적 노선을 선전하는 기관지 역할을 하는 일간지, 신(新) 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발행했다. 신 라인신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수가 당대 독일의 주요 과제였기 때문에 급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허나 이 신문은 동시에 독일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을 조직하는 역할 또한 맡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심지어 독일 각 지방의 노동자 협회들을 통합함으로써 대중적 노동계급 정당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신문은 1년 간 발행되었다. 독일과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의 혁명이 붕괴하게 되면서 신 라인신문은 강제로 폐간되었고 맑스는 프로이센 국왕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는 파리로 망명했지만 프랑스 당국의 박해로 곧 파리마저 떠나야 했다. 엥겔스는 끝까지 혁명군에 속한 채로 독일에서 싸웠다. 군사적으로 패배한 후에 탈출한 그는 1849년 말에 런던에 정착한 맑스와 합류했다. 그 후 영국은 그들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1848년 혁명의 패배는 유럽 전역의 혁명가들과 프롤레타리아 활동가들에게 혼란을 확산시켰다. 초기 사회주의의 지배적 경향 중 대부분은 혁명기에 일어난 사건과 과정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맑스는 혁명 초기의 승리와 이후의 패배의 배후에 놓여있는 사회적 힘을 설명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랑스가 혁명의 고양과 쇠퇴 모두의 중심이자 주요한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맑스는 그의 분석을 프랑스의 사건들에 집중시켰다. 이러한 분석은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뛰어난 저작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를 통해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맑스의 첫 시도였다. 그는 혁명의 주요한 전환점과 반전의 배후에 있던 계급적 힘을 완전히 명료하게 분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맑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술에 계급적 기초를 제공했다. 다양한 단계에서 다양한 계급의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그는 누가 혁명의 친구이고 누가 혁명의 적인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그들 각각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를 보여주었다.

이후 맑스는 전 세계의 모든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써내려갔다. 모든 글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시점에서 명확한 전망을 보여주었다. 그의 관점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제공할 수 없었던 다른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와 구분되었다. 맑스주의는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실용적인 도구로서 사회주의의 다른 조류들에 대한 우월성을 분명히 확립했다.

같은 시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약하고 분열된 노동자 계급의 조직들을 통합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독일에 중심을 두고 있던 공산주의자 동맹은 프로이센 경찰의 심한 탄압에 직면했다. 독일에 있는 많은 회원들이 투옥되었고 1852년 11월에는 조직 자체도 해산되었다.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오래 지속된 반동기 동안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 계급 운동을 재정비하고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광범위하게 저작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것 외에도, 그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나라의 노동자 계급 조직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유지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노동자 계급의 국제기구를 만들고 산업 선진국에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에 있어 주요한 작업들은 대부분 맑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 맑스는 내내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했다. 맑스는 여러 나라의 정부들에 의해 추방되고 나서 런던에 정착한 후에도, 비밀경찰, 특히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정치적 억압 외에도, 맑스의 경제적 상황은 항상 매우 나빴다. 그 당시 혁명적 노동자 계급 운동은 빈곤하고 무질서했기에 맑스는 상근자로서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뉴욕 트리뷴이라 미국 대형 신문에 기고하면서 받은 소액의 원고료뿐이었다. 물론 이는 맑스의 대가족에게 불충분한 액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는 가난, 빚, 심지어 굶주림에 직면했다. 많은 가구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전당포에 맡겨져야 했다. 맑스는 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어린 시절을 넘기고 살아남은 아이는 단 세 명뿐이었다. 맑스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그는 장례 비용이 모일 때까지 며칠 동안 매장을 미뤄야 했다. 맑스 본인 역시 자신의 저작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끊임없는 심각한 질병들에 직면했다.

이 모든 경제적 고난들을 겪는 동안 맑스의 가족을 주로 지원했던 것은 엥겔스였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엥겔스는 멘체스터에 위치한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20년간 그 곳에서 근무했는데, 처음에는 사무원으로 일했지만 1869년까지 마지막 5년은 동업자로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상당한 수입을 얻었고, 이를 통해 정기적으로 맑스를 도왔다.

엥겔스의 도움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비록 엥겔스는 직업 탓에 많은 여유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는 연구를 지속했고, 맑스를 돕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매우 규칙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했다. 맑스는 중요한 문제는 항상 엥겔스와 상의했는데, 특히 국제 노동자 계급 운동에 관한 결정에 있어 그러했다.

그들의 노력은 1864년, 마침내 국제노동자동맹, 즉 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맑스는 곧 국제노동자동맹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첫 강령과 규약의 작성을 책임졌다. 하지만 제1인터내셔널의 강령은 『공산당 선언』에서 사용된 강경한 주장들을 포함하지 않았다. 제1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자 동맹과는 달리 소규모 혁명가 집단에 국한된 조직이 아니었다. 실제로 인터내셔널의 많은 지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지부들은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조직들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의 대부분은 명확하고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조직은 대개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자 동맹의 선별된 혁명가들보다 의식 수준이 낮았다. 그러므로 강령과 규악은 이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어야 했고, 올바른 노선을 인터내셔널의 가맹 조직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대단한 이념적 깊이와 실천적인 조직적 경험을 지닌 맑스는 당시 이러한 문건을 작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가 강령과 규약의 작성을 맡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제1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대다수 문서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도 그였다.

따라서 맑스주의만이 제1인터내셔널에 이념적, 정치적, 조직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구현한다는 것은 즉 운동 내부의 다양한 무정부주의 및 기회주의 경향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을 의미했다. 무엇보다도, 무정부주의자들은 강력한 조직에 반대했고 기회주의자들은 단호한 투쟁에 반대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두 가지 일탈과 싸움과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인터내셔널을 거대한 대중적인 투쟁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동시에 그들은 세계의 많은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1871년의 파리 코뮌 당시 맑스주의는 1848년 혁명기에 취했던 관점에 비해 크게 발전해있었다. 맑스주의는 더 이상 사회주의 경향 중 하나로 남아 있지 않았다.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초기 경향들은 역사에 의해 휩쓸려갔고 실천적인 중요성을 완전히 유지한 것은 맑스주의뿐이었다. 또한 맑스주의는 더 이상 소규모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적인 현상이 되어있었다. 맑스주의의 영향은 여러 산업화된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전파되었다. 이는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에게 이념적인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부르주아 계급에 도전하기 시작한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끌어냈다. 맑스주의는 방대한 노동계급 대중과의 연계를 강화시켜나갔다.

10. 파리 코뮌의 교훈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사상 최초로 권력을 잡고 자신의 지배를 수립하려 한 사건이 었다. 파리 코뮌은 지배를 공고히 하지 못하고 72일 만에 진압당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의 경험은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파리 코뮌은 새로운 사회의 실마리를 짧게나마 보 여주었다. 파리 코뮌은 긍정적인 사례에서나 실책에 있어서나, 세계 노동 계급에게 대단히 값진 교훈을 남겼다. 맑스는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위대한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정리하였다.

파리 코뮌의 맥락은 1870년부터 1871년까지 벌어진 보불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보불 전 쟁은 반동적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다른 군소 지방들과 함께 1871년 1월에 독일을 형성하게 되는) 프러시아가 약할 것이라고 오판하여, 1870년 7월에 프러시아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군대는 빠르게 격파당했고, 1870년 9월에 나폴레옹 3세 는 항복하여 프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은 아돌프 티에르라는 정치인을 필두로 공화국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1871년 3월, 티에르는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870년 9월부터 프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있었던 파리는 티에르를 따르지 않았다. 파리 는 대부분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대의 통제 하에 놓였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국민방위대의 무장 해제를 위해 자신의 군대를 보냈다.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군 장성 둘이 총을 맞아 죽었고, 프랑스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국민방위대의 손으로 이양되어, 한 주만에 선거를 해 평의원 92명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세웠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한 평의회는 통치기관이 되었다 평의회는 사회적 삶과 시정(市政)을 개편하기 위한 수많은 진보적 조치들을 도입하여 노동 인민 전체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억압자들은 노동 계급 의 힘을 두려워하여,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자 손을 잡았다. 독일은 1870년에 항복해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의 상당수를 석방하면서까지 티에르 정부를 직접적으로 도왔다. 티에르 정부는 지원군으로 세를 늘리자, 파리를 정복하기 위해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노동자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좋은 장비를 갖춘 직업 군인들의 상대가 되지는 않았다. 수일간의 영웅적 투쟁 끝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파리 코뮌은 1871년 5월 28일에 진압되었다. 찬탈 이후에도 파리 코뮌의 지지자는 3만 명이 넘게 학살당했다. 4만5천 명이 넘는 이들이 군사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은 처형당했으며 다른 이들은 투옥당하거나 추방당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걸 다시는 꿈꾸지 못하도록 호되게 훈계할 각오인 듯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이 일어나던 시기에 대중적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 사이에 넓은 기반을 두고 있었고, 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정기적으로 지도를 제공하였다.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맑스는 즉시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명의로 문서 하나를 출간하였다. 이는 전쟁에 관한 맑스주의적 전술 원칙을 처음으로 적용한 문서였다. 맑스는 전쟁의 책임을 프랑스와 프러시아 양국 지배자들에게 두면서,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요청하였다. 제1인터내셔널의 선전으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의 노동자들 사이에는 강한 국제주의 정신이 존재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의 의원이자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의 지도자이며 인터내셔널 내 맑스주의자였던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의회에서 전쟁 채권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고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다.

전쟁 초기에 맑스는 호전적인 나폴레옹 3세 정권의 반동적 성격 탓에 전쟁을 독일의 일부 에서 벌어지는 방어전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동 지배자가 몰락할 것을 예견하였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자, 맑스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정복 전쟁이 되어버린 전쟁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는 문건을 바로 발행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화친하고 새로 수립된 공화국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특징을 금융귀족 및 대부르주아 계급의 지도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맑스가 보기에 공화국을 전복하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오히려 맑스는 파리 내 어떤 반란 시도에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이는 적국 독일의 군대가 이미 파리를 포위한 상황에서, 어떤 반란 시도도 살아남을 가능 성이 없다시피 한데서 기인하였다.

맑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어느 정도 추종자를 거느린 아나키즘 및 음모주의적 조류의 여러 활동가들이 봉기를 조직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실제로 반란이 일어나자, 맑스는 이전까지 반대를 했음에도 파리 코뮌에 전적이고 전투적인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는 파리 코뮌의 역사적 중요성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지지를 모으고자 세계 전역에 수백 통의 편 지를 보냈다. 그는 연락책을 통해 파리 코뮌과 연락을 취했고, 코뮌 내 인터내셔널 회원들에 게 조언을 건넸다. 또 맑스는 군사 문제의 전문가였던 엥겔스에게 자문을 구해, 파리 코뮌의 군사적 방어에 관한 조언도 전했다. 파리 코뮌의 지도권이 다른 단체와 조류의 구성원들 손에 있었음에도, 코뮌 내 맑스주의자들은 코뮌의 활동과 방어를 증강하는 데 총력을 쏟았다. 파리 코뮌의 진압 이후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잔혹한 탄압으로부터 도망친 코뮌 지지자들에게 쉼 터를 마련하고 일자리를 얻도록 도운 주요 기관 역시 인터내셔널이었다.

역사적 중요성이 풍부한 사건으로서 파리 코뮌을 곧바로 극찬한 맑스는 코뮌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도출하고자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다루는 『프랑스 내전』은 파리 코뮌이 아직 있을 때 쓰였으나, 코뮌 진압 이틀 뒤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프랑스 내전』은 파리 코뮌의 성취를 선전하고, 세계의 혁명가 및 노동자들 사이에 파리 코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맑스는 먼저 파리 코뮌이 취한 긍정적이고 혁명적인 주요 조치들을 강조하고, 이러한 조치 들이 새로운 사회를 배양하고 있음을 묘사하였다. 그는 정교분리, 종교 보조금 철폐, 상비군에 서 민병대로의 대체, 모든 법관의 선출 및 통제, 모든 공무원의 임금 최대치 제한 및 선거구 에 대한 엄격한 책임 확충 등, 파리 코뮌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정치적 결정들에 주목하였다. 주요한 사회 경제적 조치로는 무상 보통 교육, 제빵소 야간작업 철폐, 작업장 사용자 부담금 폐지, 전당포 폐쇄, 폐쇄된 작업장의 장악 및 노동조합의 운영, 실업자 구제, 주택 배급 및 채 무자 지원이 있었다. 이상의 모든 조치는 비록 파리 코뮌에 명백한 방향성이 없을지라도, 코뮌의 모든 결정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명백한 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파리 코뮌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항상 직면했음에도, 다가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러올 사회의 첫 번째 단면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처음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경험, 맑스와 엥겔스가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칭한 것을 보여주었다.

파리 코뮌은 자신의 약점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미래에 겪을 투쟁에 관한 값진 교훈 도 남겨주었다. 이 교훈을 도출한 것은 맑스였다. 단일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당의 명백하고 중앙화된 지도가 없었다는 게 파리 코뮌의 중대한 결함이었다. 이로부터 맑스는 강력하고 통 찰력 있으며 규율이 잡힌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당의 지도가 혁명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맑스가 거듭 강조한 다른 요점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노동자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이전 사회 질서의 보존에 전념하는 공무원들이 들어찬 부르주아 국가 기구에 기댈 수는 없다. 오히려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선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관련된 고위 공직자들을 전부 제거할 필요가 있다.

파리 코뮌에 이은 반동과 탄압의 시기, 혁명 세력 내에서는 코뮌의 경험을 헤아리고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어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파리 코뮌에 상당수가 참여한 무정부주의자 들은 특히나 어쩔 줄을 몰랐다. 맑스의 분석은 모든 종류의 혼란을 해소할 명쾌한 입장을 내 주었다. 또, 맑스는 파리 코뮌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전 세계에 선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파리 코뮌 이후 부르주아 계급은 맑스를 코뮌의 실질적 지도자로 묘사하였고, 이로 인해 전 세 계의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맑스는 이러한 인터뷰들을 통해 여러 국가에 올바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었다. 맑스주의가 다시금 올바른 답을 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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