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M 기초학습과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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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M 기초학습과정(3)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 코뮌의 교훈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이번호에 게재>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파리 코뮌 이후의 시대는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적 공세의 시대였다. 이는 제 1인터내셔널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지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는데, 회원 대부분이 다른 나라의 난민 신세가 되었고 계파 갈등이 극심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 노동운동은 전쟁과 알자스-로렌 합병에 반대했던 주요 맑스주의 지도자들인 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오랫동안 구금되면서 후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중요한 두 지부가 장애 물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맑스가 취한 파리코뮌에 대한 전투적인 지지 입장에 반대하는 일부 지도자들이 인터내셔널을 떠나면서 영국 지부에서는 분열이 생겨났다. 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속임수와 함께 인터내셔널을 약화시켰다. 맑스와 엥겔스는 인터내셔널 본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72년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내려 졌다. 하지만 약화된 인터내셔널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1876년에 마침내 해산되었다.

그러나 제1인터내셔널의 해체는 맑스주의의 계속되는 전진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당들의 창당을 막지 못했다. 파리 코뮌 이후 유럽 대륙은 거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큰 전쟁 없이 35년간의 평화를 겪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에서의 노동운동은 급속히 성장했다. 프롤레타리아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정당들은 크고 정교한 구조를 구축했다. 그들의 지도하에 노동조합, 일간지, 노동자 협동조합 등이 성장했다. 그들은 종종 합법적 조건하에 서 활동하며 부르주아 의회에 꽤 성공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을 설립 하기 위해 모인 정당들 중 다수가 그러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형성은 세계 각지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정당들의 성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 계급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조직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성장하는 운동의 기초를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이론적 조언을 제공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에 관한 더욱 깊은 연구에 집중했다. 1867년에는 『자본론』 1권이 출간되었다. 그 후, 맑스는 이 책의 후반부를 완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심각하게 나쁜 건강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1883년 3월 14일, 그가 사망할 때 까지 자본론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엥겔스는 맑스의 노트를 모아 편집하고 마침내 『자본론』 2권과 3권을 출판하는 기념비적인 작업을 마쳤다. 엥겔스는 1869년 전업 저술가가 된 후부터 상당한 양의 이론적 작업을 해왔다. 그는 맑스와 더불어, 또는 혼자서 철학, 사회주의 이론, 진화, 사회 및 정치 제도의 기원 등에 관한 다양한 작품들을 출판했다. 맑스가 죽은 후, 그는 여러 나라에서 운동을 이끌고 건설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엥겔스는 정기적인 서신을 통해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895년 8 월 5일 사망하기 전까지 이 일을 맡았다.

맑스와 엥겔스의 많은 저작들은 운동의 성장과 함께 힘을 얻게 된 기회주의 경향과의 투쟁을 담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중요한 경향은 제1인터내셔널 시기에 발생하여 이후까지 지속된 라살레주의였다. 라살레주의의 창시자인 페르디난트 라살레는 1863년 독일에서 설립된 최초의 노동계급 사회주의 정당의 창시자였다. 라살레주의의 주된 기회주의적 측면은 임금 인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단념시키고, 노동자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국가에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었는데, 라살레는 이것이 사회를 개혁하고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불러오는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맑스는 임금투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항하기 위해 1865년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 『임금, 가격, 이윤』이라는 책을 제출했다. 라살레주의와의 싸움은 1875년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을 저술했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타강령은 독일의 라살레파와 맑스주의 프롤레타리아당이 단일 정당으로 통합될 때 초안으로 작성된 강령이다. 당시 맑스주의자들은 통합에 매우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 라살레주의 정치와 많은 타협을 했다. 맑스는 그의 비평에서 강령의 기회주의적 요소들에 대해 철저히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지도적인 맑스주의자들 몇 명에게만 전해졌다. 이 문건은 유포되지 않았고 극소수의 주장들만이 실제로 반영되었다. 1891년 새로운 당 강령초안이 작성되었을 때, 되었을 때, 엥겔스는 당의 몇몇 지도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문을 출판할 것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라살레주의적 측면이 새로운 강령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당대에 발생한 기회주의 경향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살아있는 한 단호히 거부되었다. 그러나 엥겔스가 사망한 후 맑스주의에 대한 가장 큰 공격 중 하나가 프롤레타리아 운 동 내부에서 나타났다. 당시엔 맑스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이 공격은 맑스주의를 ‘수정’하려는 시도로서 나타났다. 나중에 수정주의라고 불리게 된 이 경향은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부이자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부 중 한 명인 베른슈타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1898년부터 1899년 사이에 독일사회민주당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발표 했다. 베른슈타인은 정세가 변화했기 때문에 맑스가 만든 모든 기본적인 정식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폭력적인 혁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제도의 개혁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급 내에 기회주의가 확산되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곧 여러 정당에서 지지층을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진정한 혁명가들이 맑스주의를 지지하며 결집했다. 본격적인 논쟁은 1904년 제2인터내셔널의 회의가 열리기 전에 시작되었다. 총평의회는 12명의 기권과 25 대 5로 수정주의 를 강력히 비난했다. 21 대 21 동수로 통과된, 수정주의를 그렇게 강하게 비난하지 않은 또 다른 절충안도 있었다. 따라서 두 결의안에서 모두, 수정주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강한 입장을 취하길 원치 않는 매우 큰 집단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총평의회는 결국 수정주의를 비난했지만, 1904년 당시에 기회주의와 수정주의가 국제 노동계급운동의 높은 수준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은 꽤 분명했다. 그러나 기회주의에 대한 반대 역시 많은 나라에 서 강력했다. 특히 그러한 반대의 가장 강력한 중심지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 이미 러 시아의 다양한 기회주의에 맞서 수많은 투쟁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였다.

12장.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러시아는 맑스주의와 맑스주의 문헌이 아주 일찍 전파된 나라 중 하나였다. 사실, 맑스의 주요 저작인 『자본론』의 첫 번역본은 러시아어 번역이었다. 1872년(원본 독어판이 출간된지 고작 5년 후였다)에 출판된 러시아어판은 많은 판매를 거두고 명성 있는 잡지에 수많은 호평 이 실리는 등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어판 『자본론』의 출간이 끼친 영향은 굉장히 커서, 1873-74년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대도시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선전 문구에 인용되기 시작했다. 다른 맑스주의 저작들의 번역 역시 맑스주의에 이끌린 러시아 혁명가들에 의해 꽤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그러한 혁명가들 중 하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여성 혁명가 베라 자술리치였다. 그녀는 1881년부터 맑스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후일 그의 사후에도 엥겔스와 서신 교환을 지속했다. 1883년, 그녀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러 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의 일원이 되었다. 플레하노프는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엥겔스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 만남 이후에도 플레하노프는 엥겔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지도를 받았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에서 맑스주의를 확립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많은 저작들을 번역하고 대중화시켰다. 플레하노프는 아나키즘이나 나로드니키의 농민사회주의적 주장에 맞서 싸우는 한편, 이론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 러시아는 차르의 폭압 적인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수많은 혁명가들과 혁명 단체들이 이 차르에 맞서 활동을 시작했다. 허나 상술한 단체들 중 다수는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플레하노프와 노동해방단은 이들의 상당수를 맑스주의자로 전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일 노동해방단에 참여한 레닌은 맑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발전시킨 뛰어난 인물이었다.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심비르스크 주의 주도 심비르스크 시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일리히 울리야노프의 활동명이다. 심비르스크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강인 볼가 연안에 위치해 있었다. 비록 레닌이 태어난 심비르스크가 주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젊은 시절에는 외부와의 소통이 제한적이었다. 심비르스크에는 철도가 존재하지 않았고 교통수단이라곤 볼가강을 오르내리는 기선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중단되어 말을 타고 이동해야 만 했다.

레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이는 큰 형, 알렉산드르였다. 알렉산드르는 우등생이었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혁명적 청년들의 지하 혁명 학습서클의 일원이었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적 선 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이념적 위치는 나로드니키와 맑스주의의 사이에 존재했다. 1887 년, 알렉산드르는 그의 누이 안나,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조직의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르는 1887년 3월 8일, 네 명의 동료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겨우 17살이었던 레닌은 형의 순교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레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매우 체계적인 공부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모범생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는 마지막 순간에 급하게 과제물을 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최종안을 작성하기 전에 미리 개요와 초안을 준비해둔 다음 지속적으로 메모, 추가 및 변경 사항을 기록했다. 그는 집중력이 매우 높았고, 공부하는 동안 방해가 될만한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형의 열렬한 팬이었고, 어린 시절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알렉산드르를 흉내내려고 했다. 형이 교수형에 처해진 지 한 달 후, 레닌은 극심한 긴장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졸업 시험을 위해 시험장에 앉아야 했다. 그는 수석을 차지했다.

수석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와 모스크바 대학교 중 어느 곳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유명한 혁명가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은 규모의 카잔 대학에서 마침내 입학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의 자율성과 학생들의 자유를 제한하 는 새로운 규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카잔 시에서 3개월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시 경계선까지 그를 호위했던 경찰관은 젊은 레닌에게 그가 무모하게 벽에 맞서고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레닌은 그 벽은 단 한 번의 발길질로 무너질 정도로 낡은 벽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듬해인 1888년, 레닌은 카잔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가받았지만 재입학 허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때부터 레닌은 지하 맑스주의 학습서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레닌의 가족이 사마라 주로 이주했던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독서와 공부에 할애했다. 18세의 레닌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저작 외에도 맑스와 플레하노프의 저작을 많이 읽었다. 처음에 그는 맏누이 안나에게, 이후에는 소규모 토론 그룹을 통해 친구들에게 맑스주의에 관한 지식을 전파했다. 또한 그는 수영, 스케이트, 등산,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레닌의 어머니는 그를 대학에 재입학시키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카잔대학에서 레닌은 다시 한번 거절당했고, 심지어는 유학을 위한 출국여권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1890년 레닌은 비로소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의 법학 교외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는 강의를 듣지 않고도 바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카잔 대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기들과 같은 해에 학업을 마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4년 과정을 1년 안에 마쳤다. 1891년에 실시된 학위 시험에서, 그는 모든 과목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최우수등급 학위를 얻었다. 1892년 1월,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사마라 지방 법원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닌은 법률 업무에 관심이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레닌은 그곳의 맑스주의자들과 접촉하고 맑스주의 저작들을 접했다. 사마라에서 레닌은 많은 시간을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불법 학습서클에서 강연하는 것에 할애했다. 또한 그는 사마라 최초의 맑스주의 학습 서클을 결성했다. 사마라는 나로드니키의 중심지였고 레닌은 자유주의로 이끌려갔던 나로드니키의 이념에 맞서 싸우는 데 힘을 쏟았다. 동시에, 그는 1870년대의 용감하고 사심없는 나로드니키 혁명가들을 대단히 존경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정치에서 은퇴 한 후 사마라에 거주하고 있었다. 레닌은 항상 그들에게서 혁명활동, 비밀유지기술, 그리고 심문과 재판을 받은 동안 혁명가들이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레닌이 처음으로 저술 작업을 시작한 것도 사마라에서였고, 그렇게 쓰여진 그의 첫 저작은 학습서클에 배포되었다. 또한 그는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레닌의 활동과 영향력은 사마라를 넘어 볼 가 인근의 다른 주들로 퍼지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체계적인 견해를 발전시킨 후, 레닌은 이제 혁명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그는 1893년 8월 수많은 노동계급이 거주하고 있는 산업 중심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그는 일단 상트페테르부르크 상급 법관의 보조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혁명 활동에만 집중했다. 레닌은 곧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비밀 학습서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지도자격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한 모스크바의 서클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서클에서 강연하는 것 외에도, 레닌은 항상 노동자들의 삶을 상세하게 배우고자 했다. 레닌은 많은 서클의 혁명가들에게, 소규모 서클에서의 선별적인 선전(당시 선전은 현재 우리가 정치 교육 강좌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었다)에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 내의 대규모 선동으로 나아갈 것을 설득했다.

레닌이 미래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를 만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녀는 이미 맑스주의를 접하여 노동자를 위한 야간학교에서 무보수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많은 학생들은 레닌이 주도하는 학습서클의 일원이기도 했다.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그녀에게 항상 배우고자 했다. 레닌이 병에 걸렸을 때, 크룹스카야는 그를 찾아왔다. 우정은 점차 사랑으로 변해갔다.

한편, 레닌은 계속해서 더 많은 러시아의 도시들로 접촉면을 넓혀갔다. 1895년 2월, 주요 도시의 조직들은 회의를 거쳐 레닌과 모스크바의 또 다른 대표를 해외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노동해방단과 접촉하기 위함이었다. 레닌의 첫 유럽 방문은 1895년 4월부터 그해 9월 간 에 이루어졌다. 이 시간 동안 그는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와 악셀로드, 그리고 독일과 프랑 스의 노동계급조직들의 여러 지도자를 만났다. 그는 엥겔스를 꼭 만나고 싶어했지만, 엥겔스 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기에 만날 수 없었다.

러시아로 돌아오자마자,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맑스주의 서클들을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정치 조직으로 통합했다. 동맹은 즉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규모 공장들에서 선동과 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위한 불법 잡지를 발간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잡지는 발행될 수 없었다. 레닌을 예의주시하던 비밀경찰은 결국 제보자의 도움으로 증거와 함께 그를 체포했다. 그는 1895년 12월, 불법 잡지의 창간호 원고 를 압수당하며 체포되었고, 곧 수감되었다.

감옥에서도 레닌은 밖에 있는 동지들과 가까운 연락을 유지했다. 레닌의 어머니와 누이 안나는 그에게 수많은 책들을 가져다주었고, 레닌은 여동생에게 가르쳐준 암호로 쓴 편지를 책에 넣어 보냈다. 그는 우유로 쓴 편지를 보냈는데, 우유로 쓴 편지는 처음에는 글씨가 보이지 않지만 가열하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교도관이 근처에 왔을 때 바로 삼켜버릴 수 있는 검은 빵을 잉크병으로 사용했다. 그런 이유로 레닌은 감옥에서 팜플렛을 저술할 수 있었고 1896년 동안 러시아 전역에서 고조되던 파업을 지휘할 수 있었다. 레닌은 동맹의 진정한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시에 레닌은 그의 첫 번째 주요 이론 저작인 『러시아 자본 주의의 발달』을 집필하기 위해 집중적인 연구와 조사를 시작했다. 레닌은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연구작업을 하면서도 매일 취침 전에 했던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했다.

레닌은 감옥에서 1년 넘게 복역하다가 풀려났지만 곧바로 다시 3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기 시베리아에 도착한 것은 1897년 5월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크룹스카야도 체포됐다. 레닌은 시베리아에서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내가 아내가 되는거라면 그렇게 해”라고 간단히 답했다. 그녀는 1898년 5월에 도착한 시베리아에서 레닌과 함께하는 것 이 허가되었다. 레닌은 시베리아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이론적 작업에 할애했다. 크룹스카야의 도움으로 그는 영어로 된 『산업 민주주의』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을 집필하는 작업을 마쳤고, 책은 1899년에 합법적으로 출간되게 된다. 레닌은 앞에서 언급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연관된 기회주의적 경향인, 경제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 혁명의 강령과 시급한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저술 활동 을 벌였다. 1900년 초 유형에서 풀려나오자마자 그는 즉시 그러한 작업들을 이어나갔다.

13장.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레닌이 유배지에서 나왔을 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P)은 1898년 9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당대회에서 공식 창당되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당의 기치는 세웠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조직을 통합하고 단일 정당 조직 구조를 구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1900 년에는 아직 이러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유형 생활을 하는 동안, 레닌은 당 건설 계획을 상세하게 수립했다. 레닌은 당 건설의 열쇠가 전국적인 정치신문을 창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은 흩어져 있는 맑스주의 학습서클, 단체, 조직들을 정치신문을 통해서만 정치적, 조직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신문은 올바른 노선을 제시하고 모든 기회주의적 일탈과 싸움으로써 러시아 전역의 여러 세포조직들을 정치적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동시에 불법 신문을 비밀리에 배포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은 그 자체로 억압적인 러시아 비밀경찰에 맞서는 훈련이 된 지하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레닌은 먼저 이 계획을 당대회 소집 전에 실행에 옮기고자 했는데, 이는 지 난 몇 년간 운동에 손을 뻗치던 기회주의 및 수정주의 경향을 타파하는 것이 우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계획은 러시아 여러 도시에서 투쟁동맹과 함께 처음 논의되고 승인되었으며, 그가 이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사회민주노동당의 대회에서 받아들여졌다. 이 계획의 주요한 협력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중앙에 소속되어있던 마르토프와 포트레소프였는데, 이들은 레닌과 함께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던 이들이었다. 정치신문을 러시아 내에서 발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국외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미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과 결합하려 했다. 편집국은 국외 노동해방단에서 3명, 러시아에서 온 레닌, 마르토프, 포레소프의 3명, 총 6명으로 구성될 예정 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1900년 12월 레닌이 구상한 정치신문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정치신문은 불꽃이라는 뜻의 『이스크라』라고 불렸다. 『이스크라』의 1면에는 1825년에 러시아 최초로 부르주아 혁명을 기도했던 이들의 말이 실려있었다. “불꽃은 화염을 일으킬 것이다.” 『이스크라』는 독일, 영국, 스위스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인쇄되었다. 러시아에 절대 바로 보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비밀로 운영된 이스크라 위원회에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전달되어야 했다. 배급자들은 비밀경찰의 눈을 피하는 매우 어려운 임무를 맡았고, 운송자들은 붙잡힐 시 바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스크라』는 학습 서클의 수업에서 노동계급을 교육하는 주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는데, 이러한 수업은 보통 기사 읽기로 구성되었다. 『이스크라』의 담당자들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신문과 비밀 전단을 배포했다. 『이스크라』는 공장뿐만 아니라 거리, 극장, 병영에도 배포되었고, 그리고 우편을 통해서도 전달되었다. 대도시에서는 거리나 극장의 발코니를 통해 널리 흩뿌려지곤 했다. 노동자 거주지에서는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배포되었는데, 주로 공장의 뜰이나 물펌프 근처에 두어 아침에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씨 뿌리기라고 불리는 배포 작업이 끝나면 인근 벽에 특정한 표시를 해놓아 그날 밤의 배포 작업을 아침에 모두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는 장이 열리는 날에 농민들의 수레로 『이스크라』 팜플렛을 운반한 후 벽에 붙여두었다. 이 모든 것은 발각될 시 즉각 체포되고 시베리아로 유배당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 작업에 참여한 동지들은 레닌이 건설하고자 했던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기초가 될 직업 혁명가들로 서서히 조직되기 시작했다.

레닌은 당의 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A) 선두적인 당원들, 주로 직업혁명가인 정규 간부진으로 긴밀하게 구성된 서클. 이들은 당의 업무를 제외한 모든 직업에 서 자유로운 당원들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경험, 조직적 실천, 차르의 경찰에 맞서 싸우기 위한 기술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B) 수십만 노동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지역 당조직과 수많은 당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이러한 구조의 당을 건설하는 과정이 『이스크라』의 도움으로 진행되어가자 레닌은 기사와 책을 통해 당 건설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 중 특별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조직적 임무에 관하여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저작들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이념적, 조직적 기초를 확립했다.

조직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도, 레닌은 경제주의자들과 큰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사회 민주주의 정당의 정치적 영역을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으로 국한하고자 했다. 경제주의자들 은 레닌이 유형 생활을 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강대하게 성장했고 레닌은 당 대회가 열리기 전에 경제주의를 이념적으로 패배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레닌은 그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경제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이 어떻게 노동계급의 자발성에 굴종하고 의식성과 당의 주도적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무시하는 가를 폭로했다. 또한,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의 노선이 결국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경제주의자들은 겉으론 맑스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은 혁명 정당을 사회개량정당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따라서 레닌은 경제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는 베른슈타인적 수정주의의 기회주의적 경향을 러시아에서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에 널리 보급된 레닌의 책은 결정적으로 경제주의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며, 향후 볼셰비키의 이념적 토대가 될 원칙들을 제시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 볼셰비키 분파의 실질적 탄생은 1903년 7~8월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제2차 당 대회에서의 주요한 논쟁은 당의 성격과 당원의 자격 규정에 관한 것이었다. 레닌은 엄격하고, 능률적이며, 전문적인 혁명가 기반의 정당을 염두에 두고 모든 당 원들이 당 조직 중 하나에 소속되어 일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르토프는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느슨하게 기능하는 합법 정당들을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당의 지향에 동의하고 재정적으로 당을 지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원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낮은 기준을 제안하였다. 즉 그는 당의 모든 지지자들에게 당적을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투표에서 과반수가 마르토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당대회에서 퇴장한 후에는, 다수가 레닌의 편에 섰다. 이러한 경향은 레닌의 제안에 따라 진행된 중앙위원회와 『이스크라』 편집국 선거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두 집단의 이견은 여전히 확고했고 당 대회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당 대회에서 다수의 득표를 얻은 레닌의 추종자들은 이때부 터 볼셰비키(러시아어로 다수파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고, 소수표를 얻은 레닌의 반대파들은 멘셰비키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대회가 끝나자마자 멘셰비키들은 협잡과 분열적 행동을 시작했고, 이는 큰 혼란을 초래했다.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1904년 5월 레닌은 그의 유명한 저작인 『일보전진 이보후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문건은 당대회와 그 이후의 기간을 두고 벌어진 당내의 투쟁을 상세하게 분석했고, 분석을 토대로 후일 볼셰비키의 조직 기반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조직 원칙을 제시했다. 이 문건은 널리 퍼져나가 당의 지역 조직 대다수가 볼셰비키의 편을 들게 했다. 그러나 중앙 기구, 당 기관지,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에서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기를 작정한 멘셰비키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볼셰비키들은 그들만의 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들만의 기관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 파벌은 결국 자체적 당 대회와 회의를 구 성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당은 1905년에 분열되었다. 허나 이 분열은 진정한 혁명 정당, 즉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14장.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분열은 세계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 발생하였다. 유럽 내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있던 35년간의 기나긴 평화는 일련의 전쟁으로 깨어졌다. 제국주의의 시대가 떠오르고 있었고,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은 시장을 확보하고 확장 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여러 국지전에 돌입하였다. 이 가운데 중요한 전쟁으로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벌어진 러일 전쟁이 있다. 이러한 국지전들은 제국주의 열강이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무참한 제1차 세계 대전과 세계의 재분할을 준비하는 한 가 지 방식일 뿐이었다.

이 시기는 혁명이 새롭게 고조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의 주요한 원천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이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는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터키, 페르시아, 중국의 부르주아 혁명이 뒤따랐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할과 맑스주의 혁명 전술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혁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러일 전쟁이었다.

1904년 2월 8일에 시작된 러일 전쟁은 1905년 8월 23일에 차르의 패배와 수치스러운 강화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볼셰비키는 자신의 정부에 반대하고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같은 어떠한 허구적 개념에도 반대하는 명확한 혁명적 입장을 채택하였다. 차르의 패배가 제정을 약화시키고 혁명에 힘을 실어주리라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관점이었다. 이러한 일이 실 제로 일어났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의 경제 위기는 대중들이 겪는 고난을 이미 가중시키고 있었다. 전쟁은 고난을 심화시켰다. 전쟁이 계속되고 러시아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차르에 대한 인민의 반감은 늘어났다. 이들은 1905년 대혁명으로 대응하였다.

이 역사적인 운동은 1904년 12월 볼셰비키가 주도한 바쿠 유전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시작 되었다. 바쿠 파업은 러시아 전역을 파도처럼 휩쓴 파업과 혁명적 행동의 “신호탄”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혁명의 폭풍은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비무장 노동자들의 시위에 가해진 무차별 발포 및 학살로 인해 촉발되었다. 차르는 노동자들을 박살 내어 피투성이로 만들려 했지만, 이는 더욱 맹렬한 대중의 반응을 촉발했을 뿐이었다. 1905년 한 해는 노동자들의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파업, 소농들에 의한 지주의 곡물과 토지의 장악, 심지어 전함 포템킨의 러시아 수병 반란까지 이어지는, 불어나는 물결의 시기였다. 차르는 투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두 번이나, 처음에는 “고문 역할”이었다가 그 뒤 “입법 역할”을 맡는 두마(러시아 의회)를 제안하였다. 볼셰비키는 두 번의 두마를 모두 거부한 반면, 멘셰비키 는 참여하였다. 혁명의 만조는 1905년의 10월과 12월 사이에 왔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모든 제분소와 공장의 대표단으로 구성된 의회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세계 최초로 설립하였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혁명적 권력의 싹이 되었고,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 권력의 모범이 되었다. 혁명적 투쟁은 10월에 일어난 전러시아 정치 파업에 서 시작하여, 12월에 볼셰비키가 주도한 모스크바 봉기와 러시아 전역의 여러 도시 및 민족의 무장봉기가 무참히 짓밟혀 혁명의 파도가 잦아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혁명 은 아직 분쇄되지 않았고, 노동자들과 혁명적 소농들은 천천히 후퇴하면서도 항전하였다. 1906년에는 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1907년에는 74만 명 이상이 파업에 가담하였다. 소농 운동은 1906년 전반에 제정 러시아의 지역들 가운데 절반 정도를, 후반에는 오분의 일을 포섭하였다. 하지만 혁명의 절정은 지나가고 말았다. 1907년 6월 3일, 차르는 쿠데타를 사주 하여 자신이 만든 두마를 해산하고, 혁명기에 승인해줘야 했던 제한적 권리들마저 회수하였 다. 제정의 총리 스톨리핀 치하에서 극심한 탄압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스톨리핀 반동은 파업 과 정치적 투쟁의 새로운 물결이 1912년에 밀려오기까지 계속되었다.

1905년 혁명은 진압되었으나, 제정의 근간까지 흔들어놓았다. 또한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노동 계급과 소농 계급에게 풍부한 정치 교육을 제공하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략· 전술에 관한 볼셰비키의 혁명적 이해가 기본적으로 옳았음이 실천을 통해 입증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혁명의 친구와 적, 투쟁의 형태, 조직의 형태에 관한 볼셰비키의 이해는 1905년 혁명의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이상의 모든 문제에서 반대되는 이해를 지녔다. 멘셰비키의 이해는 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많은 정당들에서 일반적이었던 개량주의적이고 합법주의적 이해였다. 이러한 이해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에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이끌어야 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겁주어서 혁명을 차르의 손에 내주게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서는 안된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었다. 반면 볼셰비키의 이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을 이끄는 데 있어 부르주아 계급에 의존할 수 없고, 스스로 혁명의 지도권을 차지해야 한다는 혁명적 이해였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혁명적 기초에서 혁명의 다른 중요한 문제들, 전략·전술적 문제들 전부에 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고로 볼셰비키는 혁명의 확대와 무장봉기를 통한 차르 타도를 요청하였다. 멘셰비키는 평화 의 틀 속에서 혁명을 통제하고, 제정을 개혁하고 개선시키고자 하였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 의 영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의 고립, 소농 계급과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힘썼다. 멘셰비키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와 동맹을 받아들이고, 소농 계급을 동맹해야 할 혁명적 계급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성공적인 인민 봉기에 기초해 세워질 임시 혁명 정부에 참여할 준비를 마쳤고, 차르가 제안한 두마를 거부할 것을 요청하였다. 멘셰비키는 두마에 참여할 준비를 마쳤고, 두마를 전국 “혁명 세력”의 중심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멘셰비키의 이해는 개량주의적 경향에 있어 하나의 고립된 이해방식이 아니다. 사실상 멘셰 비키의 이해는 당시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던 주요 정당들의 이해를 전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멘셰비키의 입장은 사실상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의 개량주의하고만 싸운 게 아니라, 당시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맑 스주의 정당에서 지배적이었던 개량주의적 이해하고도 싸운 것이다. 레닌의 정식화는 맑스와 엥겔스의 혁명적 이해를 잇고 발전시킨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인 제국주의로 성장하여 초래된 새로운 조건들에 적용한 것이었다. 레닌이 혁명 속에서 다양한 저술에 담아낸 이 전술들은 그의 책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 특히 잘 녹아있다. 이 책은 1905년 7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별도의 대회를 연 뒤 쓰인 것으로, 두 세력이 제안한 전략·전술의 본질적 차이를 폭로하였다.

레닌이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과 다른 저작들에서 선보인 기초적 전술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레닌의 모든 저술을 관통하는 주요 전술 원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 다. 첫째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제정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데 관심이 있고, 프롤 레타리아 계급의 영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동맹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레닌은 소농 계 급을 이러한 동맹으로 생각하였다. 둘째로, 혁명의 지도권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싸우 며 혁명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려고 드는 계급은 지도권을 둘러싼 경기장에서 쫓겨나 고립될 필요가 있다. 레닌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이런 계급이라고 생각이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영도에 관한 레닌의 주요 전술 원칙은 소농 계급과의 동맹 정책, 그리고 동시 에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고립 정책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2) 투쟁과 조직의 형태에 있어, 레닌은 인민의 성공적인 무장봉기가 제정을 전복하고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일으키기 위해 레닌은 대중의 정치적 파업과 노동자들의 무장을 요청했다. 또한, 당국과 법을 무시하여 8시간 노동일 등 노동 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혁명적으로 성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토지 장악과 같은 변화를 혁명 적으로 일으키기 위한 혁명적인 소농위원회의 형성도 비슷한 이유로 요청되었다. 당국을 무시 하는 이러한 전술은 제정의 국가 기구를 마비시키고 대중의 자주성을 해방시켰다. 이로 인해 소도시에서는 혁명적 파업위원회들이, 지방에서는 혁명적 소농위원회들이 생겨났고, 이는 이 후에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농민 대표 소비에트로 발전되었다.

3) 레닌은 더 나아가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승리와 민주 공화국의 달성 이후에 멈추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혁명 정당의 의무라는 의견을 전개하였다. 즉, 레닌은 맑스의 계속되는 혁명 개념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였다.

이상의 전술적 원칙은 뒤따른 시대에 볼셰비키의 실천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기초는 결국 1917년 10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로 이어졌고,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5. 제 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세기의 전환기에 찾아온 제국주의의 여명은 식민지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을 동 반했다. 앞 장에서 언급된 러일 전쟁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러일 전쟁은 양국 모두가 중국 북부의 만주 지방과 조선에 통제력을 행사하고 싶어했기에 발발하였다.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정복하거나 탈환하려는 전쟁이 세계 각지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국제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제국주의와 전쟁의 문제에 올바른 혁명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극히 중요해졌다. 이로 인해 제국주의와 전쟁의 문제는 제2인터내셔널 대회 전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기회주의는 당시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 내에 꽤 널리 퍼져있었다. 제국주의 국가 내 정당들의 지도부 다수는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들에서 사실상 부르주아의 입장을 취하기 시작 했다. 이는 식민주의와 전쟁의 문제가 처음 떠오른 1907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매우 확실하게 드러났다.

식민주의 문제에 있어, 대회의 지도부(대회위원회)는 식민 정책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전원회의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 결의안은 부르주아 식민 정책을 명목상으로는 비판하면서 도, 식민지 정복이라는 원칙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결의안은 식민지를 정복 하는 것이 사회주의 정권하에서는 “문명에 있어 이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맑스주의자라는 이들의 이와 같은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입장은 전원회의에서 혁명가들의 강한 반발을 마주했다. 결의안은 끝내 부결되었지만, 반대 127표 대 찬성 108표라는 근소한 차이일 뿐이었다.

이와 유사한 지도부의 기회주의는 전쟁 문제에 관한 입장에서도 드러났다. 결의안을 준비한 건 저명한 지도자이자 맑스와 엥겔스의 가까운 추종자며 동료인 베벨이었다. 그러나 결의안은 전쟁 발발 시 회원들이 행할 특정한 노선이나 방침이 하나도 없이, 모호하게 남아있었다. 이 역시 혁명가들, 특히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강한 반발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 회원들이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싸우고, 전쟁이 시작된 경우 빨리 끝내기 위해 싸우며, 인민을 각성시키고 혁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명쾌한 방향성의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이는 맑스가 전쟁에 관해 이미 분명하게 정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잇는 것이었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이해에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기에, 대회는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쟁의 위협이 점차 커지자, 1910년 및 1912년 인터내셔널 대회는 전쟁에 관해 다시금 논의를 거쳐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대회는 의회 내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전쟁 공채에 반대하는 표를 던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또, 이 결의는 1907년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안한 수정안의 표현을 반복했다.

그러나 기회주의가 제2인터내셔널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여, 이 결의안들을 통과시킨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이런 결정을 지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이는 1914년 7, 8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실제로 터지면서 드러났다. 명실공히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 정당이던 독일사회민주당이 이에 앞장섰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노동자들을 각성시켜 전쟁에 반대하고 혁명에 찬성하게끔 하는 대신, 즉시 고용주들과 무파업 합의를 맺었다. 전쟁 공채에 관한 의회 표결 전에 열린 당 간부회의에서, 대다수는 전쟁을 지지하는 표를 던졌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소수의 혁명가들만이 반대하였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서 주요한 이념적 지도자였던 칼 카우츠키는 기권표를 던졌다. 이로써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전 대회들의 결의안을 모두 내던지고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는 표를 던졌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제2인터내셔널은 이날 소멸하였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및 다른 국가들의 사회주의자 다수가 즉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뒤를 따랐다. 제2인터내셔널은 서로 각축을 벌이는 사회배외주의 정당들로 쪼개졌다.

볼셰비키는 반전 결의를 지킨 유일한 정당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기회주의에 완전히 빠져드는 가운데, 레닌과 볼셰비키만이 세계 대전에 대한 올바른 맑스주의적 입장을 수호하고 이행할 수 있었다. 레닌은 즉시 이러한 올바른 이해를 보여주는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고 제2 인터내셔널의 자리에 새로이 제3인터내셔널을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 레닌은 좌파 반전 세력 을 전부 규합하여 제3인터내셔널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세력들은 1915년부터 회의를 열기 시작했음에도, 수많은 혼란이 지속되었다. 레닌은 이런 혼란을 일소할 역할을 맡아, 전쟁에 관한 사회주의 원칙은 물론 국제적 차원과 러시아적 차원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에 관해서도 올바른 혁명적 입장을 세워야 했다. 레닌은 러시아 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선전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이를 행했다.

레닌이 개괄한 원칙과 임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수립을 목표로 하며, 이는 모든 착취를 절멸시켜 전쟁의 가능성 자체를 절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를 달성하기 위한 싸움에서 전쟁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고, 이는 필요하며 혁명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다.

둘째로, 사회주의자들이 특정한 전쟁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는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며, 어떤 계급이 등장하고 지도하는가?’이다. 이에 따라 레닌은 맑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에 부르주아가 봉건제 및 반동적인 왕들과 벌인 전쟁을 지지했음을 적시한다. 이러한 전쟁은 봉건제 철폐와 자본주의의 수립 및 강화에 목적을 두었기에, 진보적이거나 정당한 전쟁이었다. 레닌은 비슷한 기준을 취하여,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 및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에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전쟁을 지지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레닌은 이런 이해에 따라 정당하거나 진보적인 전쟁이라 부를 수 있는 전쟁 유형의 사례로 1) 식민지 국가 혹은 반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착취자에 대항해 벌이는 민족 전쟁, 2) 프롤레타리아 및 여타 피억압 계급이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지배 계급에 대항해 벌이는 내전, 3) 사회주의 조국 방어를 위해 벌이는 사회주의 전쟁을 제시한다.

셋째로, 레닌은 이상의 이해에 기초하면 제1차 세계 대전에 정당하거나 진보적인 건 하나도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제국주의 전쟁을, 노예 100명을 지닌 노예 소유자와 노예 200명을 지닌 노예 소유자 사이에서 노예의 더 “정당한” 재분배를 위해 벌어진 전쟁에 비교한다. 제1 차 세계 대전의 근본적인 목적은 식민지 노예의 재분배였다. 따라서 이 전쟁에 진보적이라거나 방어적이라거나 정당한 것은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부당하고 반동적인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는 것만이 이 전쟁을 대하는 유일한 입장일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쟁의 유일한 쓸모는 혁명을 창출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는 데 있다. 레닌은 이를 위해 자국이 전쟁에서 지는 게 유리하다고 지적하였다. 패전은 지배 계급을 약화시키고 혁명의 승리를 촉진시킬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주의 혁명가라 도 자신의 정부가 전쟁에서 패배하도록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평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라고 지적하였다. 물론 평화 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진정하고 지속되는 평화는 혁명 운동 없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다. 사실,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원하는 이는 누구라도 정부와 부르주아 계급에 맞선 내전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원칙과 전술이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 사이에 선전되었음에도, 이를 실제로 이행 한 것은 오직 볼셰비키뿐이었다. 전쟁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볼셰비키가 전쟁이 불러온 혁명적 위기 상황을 이용하고, 삼 년이 지나기 전에 1917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의 승리를 성취 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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