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M 기초학습과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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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M 기초학습과정 (4)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 코뮌의 교훈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이번호에 게재>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자본주의 운동 법칙에 관한 맑스의 분석은 수많은 자본주의적 생산자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 단계에 속한다. 맑스는 자본의 집중 과정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분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제국주의의 단계가 시작하는 걸 보기 전에 죽고 말았다. 제국주의의 발흥은 20세기 초에 일어났고, 레닌이 이 과정을 분석해야 했다. 레닌은 1897년과 1898년에 자본주의 세계 시장의 발전에 관한 초기적 분석을 일정하게 수행했으나, 제국주의라는 주제를 완전하게 분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이 전쟁의 경제적 토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갖는 정치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제국주의를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이는 1915년에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지도자 칼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에 관한 책을 써, 세계 경제 체제가 안정성이 있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 “초제국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하자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카우츠키의 주장은 오늘날 세계화를 분석하며, 다국적 그룹 및 기업들이 성장하여 그들의 자본이 모든 국가들로 확산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대로 세계대전의 위협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일각의 주장과 유사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제기된 이러한 이론은 제국주의를 잘못 묘사한 것이다. 주요한 맑스주의 이론가로 인정받아오던 카우츠키가 이런 그릇된 이론을 제기했기에, 이 이론을 반박하고 올바른 이해를 선보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제2인터내셔널주의자들이 초래한 혼란을 일소하고 국제 노동계급운동에 올바른 분석과 전술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레닌은 이를 위해 1916년에 방대한 연구를 하여, 명작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결실을 맺 었다. 레닌은 이 주저(主著) 외에도, 이상의 기초적 경제 분석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술과 연결하는 수많은 글을 썼다.

먼저 레닌은 제국주의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카우츠키 및 여타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초래 된 혼란을 일소하려 한다. 이를 위해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임을 지적한다. 제국주의의 특성은 세 가지, (1) 독점 자본주의, (2) 기생적인, 혹은 부패하는 자본 주의, (3) 빈사 상태의, 죽어가는 자본주의다. 자유 경쟁을 독점이 대체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경제적 특징이자 본질이다.

독점 자본주의는 다섯 가지 주요 양태로 나타난다. (1)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생산의 집중은 다른 경쟁자들을 분쇄하고자 힘을 합친 자본가들의 독점 연합이 태동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다른 이들이 시장에 들어와서 성공하는 걸 막고자 가격을 묶어두고, 자기들끼리 생산을 할당하며, 각종 합의와 협정을 맺는다. 이들은 경제생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 대형 은행들의 독점적 위치, 그리고 독점 산업 자본과 은행 자본의 합병을 통한 금융 자본의 탄생: 이는 이미 레닌 생전에 서너, 다섯 개 정도의 거대 은행이 주요 산업 국가의 경제생활 전체를 조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3) 특히 중요성이 늘고 있는 자본수출: 이 특징은 비독점 자본주의하의 상품 수출과 달리, 세계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분할과 긴밀하게 연관되 어 있다. (4) 국제 카르텔에 의한 세계의 경제적 분할: 이런 국제 카르텔은 레닌 생전에 이미 백 개가 넘었고, 세계 시장 전체를 주무르며 이를 자기들끼리 “친절하게” 나누어 가졌다. 물론 이 “친절”은 임시적일 뿐이며, 시장 재분할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지될 뿐이었다. (5) 거대 자본주의 열강 간 세계 (식민지) 영토의 (정치적) 분할: 세계 후진국 전체의 식민지화 과정은 사실상 제국주의의 여명기에 완료되었다. 이제 식민지는 전쟁을 통한 세계 재분할을 통해서만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의 특징을 기초로 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제국주의를 정의한다. “제국주의란 독점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형성되고, 자본수출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며, 국제 트러스트들에 의한 세계 분할이 시작되고, 가장 큰 자본주의 나라들에 의해 지구의 모든 영토 분할이 완료된 발전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다.”

제국주의가 기생적이고 부패하는 자본주의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체계하의 모든 독점에서 부패하는 경향이 특징적이라는 것에서 드러난다. 자유 경쟁하에서의 급속한 팽창과 비교할 때, 독점하에서는 전체 생산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 발전은 좌절되고 새로운 발명과 특허권은 계획적으로 억압된다. 둘째로, 자본주의의 부패는 노동하지 않고 단지 투자에서 얻은 이자나 배당금에 기초해 살아가는 금리 생활자, 자본가의 막대한 층이 탄생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셋째로, 자본 수출은 후진국 염가 노동의 공개적 착취라는 점에서 기생성이 확대된 것이다. 넷째로, 금융 자본은 자유가 아니라 지배를 위해 힘쓴다. 이 과정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정치적 반동은 제국주의의 특징이다. 대규모의 부패와 뇌물, 온갖 사기는 흔한 것이 된다. 다섯째로, 피억압 민족의 착취, 특히 한 줌의 “위대한” 열강에 의한 식민지 착취는 제국주의 세계를 점차 수억의 후진 민족의 시체를 빨아먹는 기생충으로 변화시킨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특권적인 상층 역시 식민지의 수억명을 희생시켜가며 살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 중인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빈사 상태의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를 뚫고 나오는 독점은 이미 죽어가는 자본주의이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작이다. 제국주 의에 의한 노동의 막대한 사회화는 같은 결과를 생산한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은 제국주의하에서 점차 심화될 뿐이다. 고로 레닌은 말한 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혁명의 전야다.”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4장에서 언급했듯, 1905년 혁명이 패배한 후의 시기는 차르의 총리 스톨리핀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극도의 억압과 반동의 시기였다. 공격의 주요한 표적은 노동계급이었다. 임금은 10%에서 15% 가량이 줄었고 근무시간은 10시간에서 12시간 가량이 늘어났다.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었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이들에게는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노동자에 대한 과징금 제도 또한 도입되었다.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모든 시도는 차르의 비밀요원들에 의해 고용된 범죄자들과 경찰들에 의해 야만적으로 탄압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지식인들과 쁘띠부르주아 분자들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적 진영에 합류하기도 했다.

새로운 정세에 직면하여, 볼셰비키는 공격 전술(1905년 혁명기에 사용된 총파업과 무장 봉기 등의)을 방어 전술로 변경했다. 방어 전술이란 역량을 결집하고, 간부들을 비밀리에 지하로 철수시키며, 지하에서 당의 업무를 수행하고, 불법적인 작업과 합법적인 노동계급 조직들의 작업을 결합하는 전술을 의미했다. 차르정에 대한 공개적인 혁명 투쟁은 우회적인 투쟁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살아남은 합법 조직은 당의 지하 조직을 가려주고 대중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대중과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노동조합과 자선 의료 단체, 노동자 협동조합, 클럽, 교육 공동체, 그리고 심지어 의회와 같은 다른 합법적인 조직들을 이용했다. 볼셰비키는 차르 정부의 정책과 자유주의 정당을 폭로하며,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가두마의 연단을 이용했다. 불법 정당 조직의 보존은 당이 올바른 노선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었고 혁명의 물결 속에서 새로이 부상하기 위해 힘을 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전술을 시행하는 동안, 볼셰비키는 운동 내부의 두 가지 일탈, 즉 청산파 (Liquidators)와 소환파(Otzovist)에 맞서 투쟁해야만 했다. 멘셰비키였던 청산파들은 비합법 정당 구조를 폐쇄하고 정부의 허가하에 합법적인 “노동자”당을 설립하기를 원했다. 볼셰비키 에 속해있던 소환파들은 두마의 모든 볼셰비키 당원들을 소환하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모든 합법 조직에서 이탈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오직 비합법적 형태의 조직만을 원했다. 이 두 가지 전술은 모두 혁명의 새로운 진전을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을 방해했다. 두 가지 일탈을 모두 거부한 볼셰비키는 합법적 방법과 불법적 방법을 결합하는 올바른 전술을 사용했고, 많은 노동자 조직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다수의 멘셰비키 노동자 조직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전술은 당을 강화시켰고 1912년부터 시작된 혁명 운동의 새로운 고조기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볼셰비키는 1912년 1월에 독자적인 당 대회를 개최했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RSDLP(B)]이라는 별도의 정당을 설립했다. 이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는 1911년 동안 파업 참가자의 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혁명 운동이 상승세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다. 1912년 1월의 당대회와 이후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새로운 정세에 발맞춘 새로운 전술이 결정되었다. 새로운 전술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시기 당 전술 중에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 조직을 강화하고 대중에게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간지, 『프라우다』의 창간이었다.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주간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반면 『프라우다』는 광범위한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대중적인 일간지였다. 『프라우다』는 1912년 5월 5일에 창간되었고 2년 반 동안 발간되었다. 『프라우다』는 이 기간 내내 정부의 검열로 인한 수많은 문제와 무거운 벌금에 직면했다. 『프라우다』는 8번 폐간당했지만, 매번 약간 바뀐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다. 『프라우다』는 매일 평균 4만부가 발행되었고, 5,600개의 노동자 조직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프라우다』를 통해,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까지 확산되었다. 혁명 운동의 상승기(1912-14) 동안, 『프라우다』는 대중적 볼셰비키 정당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스탈린이 말했듯이, “1912년의 『프라우다』는 1917년의 볼셰비즘 승리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었다.

1914년, 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혁명적 정세는 더욱 고조되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전쟁 반대와 차르정 전복을 외치는 광범위한 선전을 진행했다. 육군과 해군, 전방과 후방에서 세포와 조직이 결성됐고,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전단지가 배포되었다. 전선에서는 전쟁 중인 군인들 사이의 우정과 형제애를 호소하는 당의 집중적인 선동 이후, 1915년과 1916년에 육군 부대가 공세를 거부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들은 전쟁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와 농민들은 점점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이나 상처로 죽었다. 1917년 1월과 2월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고. 차르정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 계급도 차르를 경계했는데, 당시 차르의 고문은 독일과의 단독강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궁정 쿠데타를 통해 차르를 교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먼저 행동한 것은 인민이었다.

1917년 1월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바쿠와 다른 산업 중심지들에서 강력하고 혁명적인 파업이 시작되었다. 볼셰비키는 총파업을 지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파업이 탄력을 받으면서 3월 7일, 국제 노동 여성의 날에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요청을 받아 기아, 전쟁, 차르정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남성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지지했고, 3월 11일에 와서는 파업과 시위가 무장봉기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3월 11일에는 중앙위원회 사무국이 차르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지속하고 임시혁명정부를 건설 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을 냈다. 3월 12일, 6만 명의 병사들이 혁명의 편으로 넘어와 경찰과 싸웠고, 노동자들이 차르를 타도하는 것을 도왔다. 이 소식이 퍼지자, 모든 지역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차르의 관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하였다. (당시 러시아 달력은 다른 지역보다 13일 늦었고 러시아 달력으로 혁명이 승리한 날은 2월 27일이었다.)

차르정이 전복되자마자, 볼셰비키의 주도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들이 생겨났다. 반면 볼셰비키가 거리에서 대중들의 투쟁을 직접 주도하고 있는 동안, 타협적인 정당,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를 계승한 프티부르주아 정당)은 소비에트에서 의석을 차지하여, 다수를 확보했다. 따라서,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소비에트를 이끌었다. 한편, 두마의 진보적 부르주아들은 멘셰비키 및 사회혁명당과의 뒷거래를 통해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그 결과 두 개의 독재를 대표하는 두 개의 기구가 형성되었다: 임시 정부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 레닌은 이것을 이중 권력이라고 불렀다.

부르주아 혁명 직후, 아직 스위스에 있던 레닌은 유명한 저작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을 저술했고, 이 저작에서 레닌은 이중권력을 분석했다. 그는 소비에트가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에서 주도권을 잡고 승리를 거둘 노동자 정부의 맹아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동맹은 광범위한 준프롤레타리아 및 소농 대중, 그리고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였다.

1917년 4월 16일, 레닌은 오랜 망명 끝에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왔고, 바로 다음날에 열린 볼셰비키 회의에서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과반을 차지하도록 작업하고, 국가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평화, 토지, 빵을 보장하는 강령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으로 새로운 당 대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으며,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제3인터내셔널을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멘셰비키는 즉시 레닌의 테제를 공격했으며 “혁명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3주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열린 볼셰비키당 전러시아회의(제7차 회의)가 바로 그 『4월 테제』에 근거하여 레닌의 제안을 승인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결의되었다. 또한 회의에서는 스탈린이 발의한 매우 중요한 안건이 승인되었는데, 이는 분리독립권을 포함한 각 민족의 자결권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볼셰비키는 회의에서 정해진 노선에 따라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노동자, 병사, 농민 대중들에게 그들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1917년 8월, 10년의 공백 끝 에 제 6차 당대회가 열렸다. 임시정부의 습격 위험 때문에, 당대회는 레닌의 참석 없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어야 했다. 스탈린은 무장봉기의 준비를 요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당대회는 모든 정당 조직이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는 새로운 당규를 채택했으며, 트로츠키가 이끄는 그룹의 입당을 승인했다.

당대회 직후,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은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를 분쇄하기 위한 군사반란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단의 병사들은 볼셰비키에 의해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고 설득되었고 반란은 실패했다. 군사반란이 실패한 후, 대중들은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만이 그들의 긴급한 요구였던 평화, 토지, 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것을 깨닫 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급속히 볼셰비키화 되었고, 혁명의 파고가 높아짐에 따라 당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보안상의 이유로 전장에서 물러나 핀란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 에 머무는 동안, 그는 국가 문제에 관한 맑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국가 와 혁명』을 완성했다. 특히 카우츠키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국가 문제에 대해 보였던 왜곡을 폭로하는 레닌의 이 책은 당대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 엄청난 국제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레닌이 목격했듯이, 러시아 2월 부르주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일련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들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더는 단순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전쟁에 의해 조성된 혁명적 정세 하에서, 그것은 이제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였고,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과 대중들은 이 문제에 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받을 필요가 있었다.

혁명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레닌은 1917년 10월 20일 다시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왔다. 그가 도착한 지 3일 만에 열린 역사적인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며칠 안에 무장봉기를 시작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당의 대표자들은 즉시 전국 각지와, 특히 군부대로 파견되었다. 봉기 계획을 알게 된 임시정부는 1917년 11월 6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전날 볼셰비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적위대와 군 내의 혁명적 부대들은 반격하기 시작했고, 1917년 11월 7일, 국가 권력은 소비에트의 손에 넘어갔다.

바로 다음 날,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통과시켰다.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레닌은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권력이 공고해지기까지는 오랜 싸움이 남아있었다. 우선,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야만 했다. 이는 마침내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허나 이마저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소비에트 국가에 대항한 내전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의 옛 지배계급에 대한 직간접적인 개입과 원조를 시작했다. 이 내전은 1920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결국 승리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 세계적으로 혁명적 고조기가 찾아왔다. 10월 혁명의 성공은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거의, 혹은 아예 없었던 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대전의 주된 전장이었던 유럽은 가장 심각한 혁명위기에 당면했다. 세계대전은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합스부르크), 터키 등 4대 제국의 붕괴와 황제의 축출을 초래했다. 국가 체계는 난장판이 되었고 대중들은 저항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대규모 시위들이 시작되었다. 1918년 1월, 대규모 정치 파업과 반전 시위가 중부 유럽을 휩쓸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구 제국들이 해체된 후 많은 신생 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질, 민족들의 고양기가 존재했다.

독일과 헝가리에서는 이러한 위기가 혁명으로 이어졌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해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즉시 독일 전역에서의 반란의 물결로 이어졌으며, 황제가 타도되었고, 사회민주당의 지도하에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를린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에서는 즉시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허나 소비에트들은 1919년 1월 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재편된 반동군대에 대항하여 2주간 시가전을 치룬 끝에 진압되었다. 1919년 4월, 독일 바이에른주에 소비에트 공 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이 또한 분쇄되었다.

1919년 3월,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 연합하여 헝가리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들은 협상국 정부들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5개월 만에 쫓겨났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최소 4년 이상 지속되었지만, 이 혁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물결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많은 나라들에서 공산주의 정당 건설로 이어졌다. 공산주의 정당들의 연합, 제3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위한 진정한 기반이 생겨난 것이다. 앞서 서술했듯 1914년, 레닌과 볼셰비키는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을 주장했다. 이제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19년 1월, 레닌은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곧이어 국제회의 초청장이 발송되었다.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각 국 공산당들의 제 1차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창립되었다. 해당 회의는 제3공산주의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를 설립했다.

제1차 대회가 끝난 지 한 달후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여러 국가에서 운동이 대중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시대를 나타낸다. 제3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의 결실을 거두었고, 기회주의자, 사회배외주의자,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 잔당을 쳐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제3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국가권력 장악에 성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는 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1920년 7월,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개최된 제2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41개국으로부터 다양한 대표단이 참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레닌은 이 대회와 관련하여 맑스주의 이론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공산당의 전략전술에 관한 지침서를 준비했고, 그것은 대회의 대표들에게 배포되었다.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라 불리운 지침서는 당시 인터내셔널의 많은 정당들에서 만연했던 “좌익적” 오류를 바로잡는데 집중했다. 레닌은 또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준비했고, 이는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이 문건은 당대에 모든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 추진력을 모으고 있던 민족해방투쟁을 이해하고 이끌기 위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획기적인 문건이었다. 또한 레닌은 이 대회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기본 과제와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했는데, 이 역시 대회 에서 채택되었다. 또한 대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조합운동에서의 공산당의 역할, 공산당과 의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가입에 관한 규정과 조건에 관한 테제를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규정에서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만이 존재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전통을 영원히 파괴한다”고 명시했다.

이론적 정식화 외에도, 인터내셔널은 집행위원회를 통해 다양한 회원국의 정당과 운동을 지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3년까지 지속된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후 혁명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주로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 신과 공산주의 정당들의 이념적, 조직적 약점으로 인해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 성 공적으로 완수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 새롭게 형성된 공산당의 설립, 발전, 지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에 이들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자 코민테른은 공산 주의 정당들을 지도하고 훈련시켜 이러한 운동에 지도력을 제공하고자 했다. 최초로 세계 후진국 인민들 사이에서 맑스주의가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이었다.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초기 민족 운동들은 서유럽에서 나타났다. 이 민족 운동들은 주로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민족 운동들의 주목적은 수많은 봉건 영주들의 지배하에 있는 넓은 영토를 하나 의 민족과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이 단일한 거대 시장을 확보하고 여러 봉건 영주들의 침략과 지배를 피하기 위해 필요했다. 따라서 봉건주의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단일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족 운동은 대개 하나로 결합하였다. 그로 인해 민족 운동은 보통 다른 민족에 의한 억압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서유럽 전체 에서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이 일어난 건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아일랜드의 투쟁뿐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시기, 민족 해방 투쟁이 아직 크게 일어나기 이전에 살았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그닥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러나 맑스는 영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아일랜드인들의 민족적 투쟁을 지지하고 아일랜드인들이 겪는 민족적 억압에 반대하라고 요청하여,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기본적 입장을 정식화하였다.

민족 운동의 다음 단계는 동유럽에서, 자본주의의 확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러시아 제국의 약화와 함께 나타났다. 민족 운동 및 조직들은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전체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이 문제에 관해 알맞은 이해와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이 민족 문제에 관해 최초로 체계적인 맑스주의적 설명을 제시한 것이 바로 이 시기, 1913년이었다. 스탈린 본인은 조지아인이었는데, 조지아인은 러시아에서 억압받던 민족 중 하나로, 민족운동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민족이기 도 했다. 따라서 올바른 맑스주의적 이해를 제시하고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조지아에서 갑절로 필요한 일이었다. 스탈린이 자신의 선구적 저작, 「맑스주의와 민족문제」에서 하려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스탈린은 민족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자신의 글을 연다. 그는 민족을 “언어, 지역, 경제생활 그리고 문화로 표현되는 심리적 기질 등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발생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스탈린은 유대인들과 같은, 단지 종교나 문화에 기초한 민족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한 공동체가 민족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위의 특징을 모 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스탈린은 그러한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결권이라는 말은 당시 일부 다른 당들이 제안하던 바와 같이 자치나 연방제적 연합에 제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결권은 분리권, 즉 독립적인 국가로서 분리하고 탈퇴하는 것까지 포함해야만 한다. 다만 스탈린은 이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는지는 특정 시기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에 달렸다고 지적한다. 자결에 관한 민족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은 혁명가들에게 달린 것이었다. 혁명 정당의 결정은 자치, 연방제, 분리독립, 혹은 다른 방향이 피땀 흘리는 대중,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가장 이로운 것인지에 기초할 것이다.

스탈린의 설명은 많은 문제를 해소했음에도, 민족 문제를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와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는 레닌이 제국주의를 분석한 1916년 이후에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제국주의 분석의 기초 위에서, 레닌은 민족자결권의 문제를 식민국 내에서 벌어지는 민족 해방 투쟁과 연결하였다. 이로써 이 분석은 세계 인민의 압도적 다수를 다루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국경 안에서 민족들을 억압하는, 일부 국가의 국내 문제로 남지 않았다. 민족 문제는 세계적 문제, 제국주의의 짐에서 모든 종속국과 식민지의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레닌이 1916년에 「사회주의혁명과 민족자결권 테제」를 선보였을 때, 그는 자신의 분석에 전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시켰다. 그는 세계의 국가들을 세 개의 주요 유형으로 나누었다.

첫째로, 서유럽과 미국이라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있다. 이들은 식민지와 본국 내에서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억압국이다. 이 지배 민족들에 속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과업은 민족 억압에 반대하고 제국주의적 지배 계급에게 억압받는 이들의 민족적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다.

둘째로 동유럽, 특히 러시아가 있다. 이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과업은 민족들의 자결권을 관철하는 것이다. 이 연관 속에서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과업은 억압민족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피억압민족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결합하는 것이다.

셋째로, 중국, 페르시아, 터키와 같은 반식민지 국가와 도합 인구가 10억에 달하는 식민지들이 있다. 레닌은 이 식민지 국가들에 관해 사회주의자들이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 식민지 해방을 요구해야할 뿐 아니라, 이러한 국가들의 민족 해방 운동에 결연한 지지를 보내고 이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과 혁명전쟁을 원조해 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일정한 토론과 혼동이 벌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자결권과 민족 해방을 지지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반대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가 모든 민족의 합병을 목표로 한다고 논했다. 레닌은 사회주의의 목표가 작은 국가들로의 인류 분할을 철폐하고, 민족들을 서로 가까이 모으며, 합치기까지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들의 강제적 병합으로는 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민족들의 병합은 오직 억압받는 모든 민족들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이행기, 즉 분리 독립할 자유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1917년에 당 계획을 제시하면서, 레닌은 “우리는 자유로운 통일을 원하며, 이것이 우리가 분리권을 인정해야할 이유이다. 분리권이 없다면, 통일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의 민족 억압 및 합병 정책에 맞서는, 민족 문제에 대 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민주적 접근이었다.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10월 혁명 직후 처음 몇 년간, 레닌은 국가와 당의 업무를 직접 지도하였다. 1918년 8월, 사회혁명당 당원이 그를 살해하려 했고 그의 몸에 두 발의 총알을 남겼다. 레닌은 암살 시도 이후 쇠약해졌지만, 서너 시간만 자면서 엄격한 업무 일정을 계속해나갔다. 이러한 과로는 레닌의 건강, 특히 뇌에 중대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21년 말기부터 레닌은 극심한 두통과 지속적인 현기증(어지러움을 유발하는 병)을 겪기 시작했고, 이는 업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했다. 1922년 5월 레닌은 오른손과 오른발, 그리고 언어 사용 능력에 영향을 미친 뇌졸중을 겪었다. 빠르게 회복하여 업무에 복귀하고자 수차례 시도했지만, 레닌은 사망하기 전까지 영 향력 있는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1922년 4월 레닌의 뇌졸중 직전,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레닌의 병중, 그리고 1924년 1월 21의 임종 이후 당의 지도자 지위를 물려받은 것은 스탈린이었다.

(강철의 사내라는 뜻의) 스탈린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가 당에서 사용한 수 많은 이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름이다. 그는 1849년 12월 21일 조지아의 작은 마을 고리에 서, 억압받는 민족인 조지아인으로 태어났다. (현재 조지아는 독립국이다.) 스탈린의 부모는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며 농노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지주의 예속으로부터 풀려나고 나서 몇 년 뒤인 1875년, (조지아와 다른 억압된 민족들의 고향이자 낙후된 지역인) 캅카스의 수도 인 트빌리시 근교의 마을에서 이주하였다. 스탈린의 아버지는 지역 소도시 규모의 고리에 작은 제화점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없었고, 고리에 있는 아내와 자식을 떠나 트빌리시의 신발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그는 1890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스탈린의 아버지가 가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돌보고 기른 건 어머니 에카테리네였다. 에카테리네는 오랜 시간 세탁부로 일하고 그 수입으로 가계의 모든 지출을 충당하였다. 스탈린 이전에 낳은 세 아이는 모두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고 죽었다.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 스탈린이었기에, 에카테리네는 아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자 힘썼다. 에카테리네는 가난했음에도 아들을 평범하게 일터로 보내지 않았다. 에카테리네는 아홉 살의 스탈린을 지역 교회 학교에 보냈다. 에카테리네 본인도 이후 노령에 많은 노력을 해 읽 고 쓰는 법을 익혔다. 실로 에카테리네는 노동 대중의 기개와 결단력의 뛰어난 예시다.

스탈린은 한창 어릴 때부터 가난을 직접 경험하였다. 스탈린이 살았던 주택은 가게, 작업장, 집을 겸하는 엄청나게 작은 방 두 개였다. 스탈린은 강건했음에도 예닐곱 살에 천연두가 발병 해 얼굴에 평생 가는 마맛자국이 남았다. 그는 또한 패혈증을 겪으며 죽기 직전까지 갔었고 왼팔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스탈린은 가난으로 인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장과 지역 사제는 스탈린을 “최고의 학생”으로 장학금에 추천하였다. 이는 스탈린이 1894년 10월부터 캅카스의 일류 고등 교육 기관, 트빌리시의 신학교(기독교 사제 훈련을 위한 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이 보낸 5년은 스탈린이 맑스주의자가 된, 중대한 성장의 시기였다.

스탈린의 유년시절, 조지아는 지속적인 불안에 처해 있었다. 불안의 한 원인은 러시아에서 이미 이루어진 농노제 철폐가 지연되고 있는 소작농 계급의 반역적 분위기였다. 다른 원인은 러시아로부터 혁명적 견해들이 지속적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차르 정부가 오랫동안 반역자들과 부르주아 혁명가들을 캅카스로 추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추방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소련의 초대 국가원수가 되는 칼리닌,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이후 스탈린의 장인이 되는 알릴루예프 같은 맑스주의 혁명가들도 포함되었다.

트빌리시 신학교는 이러한 불안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는 지식인들의 양성소였으며 차르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였다. 스탈린이 신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1893 년에는 파업이 일어나 87명의 학생이 퇴학당했다. 이 파업의 중심 지도자들은 이후 저명한 맑 스주의자와 혁명가들이 되었다. 지도자 중 한 명인 커츠코벨리 역시 스탈린이 다녔던 고리 학교 출신으로, 스탈린의 삼 년 선배였다. 그는 곧 스탈린의 첫 번째 정치적 멘토가 되었다.

스탈린은 입학 첫 해에 온갖 종류의 급진적 문학을 읽는 데 몰두하였다. 비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의 책 대부분이 신학교에서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비밀리에 해야 했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스탈린의 시는 조지아의 일류 잡지에 가명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15세의 스탈린이 처음으로 맑스주의 비밀 연구회와 마주친 것도 이 시기였다. 곧 스탈린은 신학교 당국의 경계를 받게 되었고, 금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처벌용 독방에 가둬지기도 하였다. 이즈음 스탈린은 신학교 내 비밀 토론회에 들었고, 이로 인한 여러 활동으로 신학교 당 국과 더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1898년 8월 열여덟의 나이에, 스탈린은 조지아의 첫 번째 사회주의 단체이자 지도자들이 이후 저명한 멘셰비키가 되는 (‘제3단체’이라는 뜻의) ‘메사메 다시’(Messame Dassy)에 합류 하였다. 후일 스탈린은 “내가 맑스주의자가 된 건 내 사회적 위치(아버지는 제화공장의 노동자였고 어머니 역시 여성 노동자였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 신학교에서 나를 무자비하게 짓이긴 예수회 규율의 심한 옹졸함 때문이다. (…) 내가 들이마신 공기는 제정의 탄압에 대한 증오에 젖어있었다.” 당시 신학교 밖의 트빌리시 시에서는 노동자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캅카스의 첫 파업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스탈린이 메사메 다시에 합류하자마자, 노동자 공부 모임 몇 군데를 운영하는 과업이 그에게 주어졌다. 스탈린은 신학교에서 받은 짧은 자유시간 동안,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에서 비밀스럽게 모임을 진행했다. 한편 신학교 당국은 스탈린을 처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스탈린은 1899년 5월에 시험 결석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신학교 퇴학은 스탈린의 혁명 활동을 크게 뒤바꿨다. 고리에서 잠시 어머니와 지낸 뒤, 스탈린은 트빌리시에 돌아와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조직화와 교육을 해나갔다. 1899년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지구 물리학 관측소의 사무원 자리를 구했다. 박봉이었지만, 적은 시간만 일했고 제정 비밀경찰을 따돌릴 이상적인 위장이 되었다.

스탈린은 이런 위장 아래서 자신의 활동 범위를 계속해서 넓혔다. 다음 해인 1900년에는 캅카스 최초의 노동절 행사를 조직하고, 그곳에서 연설하였다. 5백 명이 참가한 이 모임은 제정의 탄압으로 인해 도시 안이 아니라 트빌리시 인근 산악에서 열렸다. 이 모임은 몇 달간 공장과 철도에서의 파업으로 이어진 고무적인 행사였다. 스탈린은 주요 조직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트빌리시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노동절 데모를 할 것이 다음 해에 결정되었으나, 주요 지도자들은 1901년 3월에 체포되었다. 스탈린의 방 역시 급습을 당했으나, 스탈린은 도망쳤다. 그날부터 1917년 혁명의 성공까지, 스탈린은 직업적 지하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주요 지도자들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지도권을 물려받아 노동절 행사를 계속하여 조직하는 것이 그의 첫째 과업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경찰의 체포와 잔혹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2천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한 처음 몇 년은 경제주의 및 기타 문제에 관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시기였다. 조지아 조직 내에서 스탈린은 기회주의자들에 반대해 좌익의 편에 섰다. 『이스크라』가 창간하자, 스탈린이 속한 집단은 열성 지지자가 되어 이를 트빌리시에 가장 먼저 배포하였다. 이들은 곧 1901년 9월, 조지아어로 된 불법 신문인 (‘투쟁’이라는 의미의) 『브루쩔라』(Brdzola)를 창간했다. 스탈린은 주요 저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사실상 『이스크 라』의 입장을 옹호하는 수많은 기사를 썼다. 이 가운데 1901년 12월에 나온 「러시아 사회민주당과 그 당면과제」가 특히나 중요하다.

1901년 11월, 스탈린은 당시 캅카스에서 선도적인 조직이었던 사회민주노동당 트빌리시위 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즉시 바투미로 가게 되었다. 이곳은 2만 5천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더 크고 오래된 석유 도시 바쿠와 석유 수송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석유 산업 의 신흥 중심지였다. 스탈린은 얼마 뒤 신년회로 위장한 도시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스탈린은 또 자신이 머물던 단칸방에 비밀 인쇄소를 차렸다. 얼마 안 가 노동자들의 투쟁들로 이어질 수많은 전단지가 발행되었다. 투쟁 가운데 하나는 경찰이 집회에 발포해 노동자 열다섯을 죽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활동은 훗날 멘셰비키가 되는 지역 사회주의자들의 반대하에서 이루어졌다. 바투미에서 네 달 반을 보내고 나서야, 스탈린은 1902년 4월에 바투미위원회 비밀 회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비밀 인쇄소는 발각되지 않았다. 스탈린이 당 활동에 사용한 많은 이름 가운데, 캅카스에서 일한 오랜 기간에 유명세를 얻은 이름을 취한 건 이 바투미 시기의 일이었다. 그는 ‘코바’라고 불렸는데, 터키어로는 불굴이나 무적이라는 뜻이며, 스탈린이 유년기에 가장 좋아한 작가의 시에서 나오는 인민 영웅의 이름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감옥에서 일 년 반을 보냈다. 감옥에서 엄격한 규율을 유지했던 그는 일찍 기상했으며, 근면하게 일하고 많은 것을 읽었다. 또한, 그는 감옥 내 공동체의 논객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참을성 있고 섬세하며 다른 이들의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돕는 동료로 알려졌다. 제기된 혐의 가운데 어느 것도 입증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복역을 마친 1903년 11월에 시베리아 동부로 유형(流刑)을 당했다. 그는 1903년 3월, 수감 중에 새로 발족한 전캅카스사회민주단체연합의 간부로 선출되었다. 수감된 동료가 위원회에 선출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이 사건으로 우리는 캅카스 조직에서 스탈린이 갖는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의 시베리아 유형은 러일전쟁의 고조와 동시에 일어났다. 스탈린과 동료 들은 시베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전쟁의] 혼란을 틈타 그대로 탈출했다. 1904년 말, 그는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스탈린은 돌아오자마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로 이어진 문제에 관해 입장을 취해야 했다. 캅카스 사회주의자들의 다수는 멘셰비키였고, 볼셰비키 중 다수도 타협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의 이 압도적 우세에도, 스탈린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편에 섰다. 그는 조지아의 당 기관지에 볼셰비키 노선을 정력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글에서는 당이 “전투적인 지도 집단”이며 “결집되고 중앙화된 조직이어야만 한다”고 적었다. 그의 강경한 정치적 입장은 외국에서 스탈린의 글의 사본을 요청했던 레닌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멘셰비키와의 이념 대결과 함께, 스탈린은 같은 시기에 1905년 혁명의 일부로 이어지는 지역 내 혁명적 투쟁에 깊이 관여했다. 스탈린의 중심지는 캅카스였다.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는 것 이외에도,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촉구했던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캅카스 군사 조직을 조직하고 고무하며 지도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효율적 인 비밀 폭발물 제조소도 설치되었다. 투쟁을 거쳐 전투 분대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이들은 지배 계급의 폭력배들을 공격하는 수많은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소작농 유격대와도 계속 접촉 했다. 이후 혁명의 퇴조기에 당이 심각한 자금난을 마주했을 때, 전투 분대 가운데 가장 뛰어 난 이들 일부는 중대하고 위험천만한 자금 조달 작전에 투입되었다. 스탈린은 당의 이러한 비 밀스럽고 기술적인 부문을 세우고 지휘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그는 이 시기에 반란 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을 설명하는 글을 썼다.

1905년 12월, 스탈린은 전러볼셰비키당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였고, 여기서 멘셰비키와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레닌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1906년 4월 통합 대회에 도 캅카스 대표 11인 가운데 유일한 볼셰비키로 참석하였다. 다른 이들은 전부 멘셰비키였다. 그는 1907년 대회에 참석한 유일한 캅카스 출신 볼셰비키이기도했다. 두 대회에서 모두 무력행사와 자금압류의 금지를 요청하는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결의안이 논의의 요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캅카스는 이러한 행동의 중심지로 계속 남았고, 1905년부터 1908년 사이에 1150건이 발생했다고 추산된다.

1907년 말엽에 스탈린은 바쿠위원회에 선출되었다. 5만 노동자가 있는 이 석유 도시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노동자들이 극심한 착취를 겪고 있었다. 스탈린은 곧 노동자들을 규합해 스톨리핀 반동의 암흑기를 헤쳐나가는 고독한 투쟁의 중심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신분으로 위장해, 그는 시내 무슬림 거주 지역에 거처와 비밀 인쇄소를 차렸다. 이 시기에 스탈린은 처 음으로 글을 러시아어로 쓰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1908년에 체포되었으나, 감옥 안에서 계속 글을 쓰고 당 활동을 지휘하였다. 1909년에는 다시 유형을 당했지만, 이번에도 넉 달 만에 탈출하였다.

스탈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돌아왔고, 수도 당 지도부의 체계적이지 못한 상태를 목격했다. 바쿠로 돌아오면서 그는 정세를 뚜렷하게 기술하는 글을 작성하였고,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전러시아 신문의 창간을 요청하였다. 이후에는 실질적인 중앙을 러시아로 옮길 것까지 요청하였다. 여러 달에 걸쳐 바쿠에서 강도 높은 업무를 수행했고, 해외 당 기관지에 보내기 위한 여러 글을 썼던 스탈린은 1910년 3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뒤 그는 또 시베리아 유형을 당했고, 1911년 6월까지 거기 있었다. 이번에는 캅카스 및 어떤 대 도시로의 귀환도 금지되었기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근처의 한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또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뒤 다시 석방되었으나, 대도시 밖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 시기에 1912년 1월 볼셰비키 대회에서 선출된 초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첫 회의에서 스탈린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스탈린의 우선적 과업 가운데 하나는 볼셰비키의 일간지, 『프라우다』의 창간호를 출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임명이 되자 마자 다시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세 달, 시베리아 유형에서 두 달을 보낸 뒤, 그는 다시 도주하였다. 두마 선거 운동을 지휘하는 데 맞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볼셰비키는 오직 6석을 얻었지만, 이는 산업노동자의 8%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1912년 말과 1913년 초에, 스탈린은 외국에서 몇 주를 보내며 레닌과 다른 동지들을 만나 세밀한 논의를 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민족 문제에 관한 이론적 명저를 썼다. 그는 1913년 2 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으나, 한 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중앙위원회의 위원이자 제정 비밀경찰의 요원인 말리노프스키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말리노프스키는 스베르들로프라는 다른 위원도 배신하였다.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는 시베리아에서도 탈출이 가장 어려운, 가장 외딴 지역으로 유형을 당했다. 레닌은 이들의 탈출을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웠으나, 탈출 계획조차 말리노프스키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탈출을 주선하는 대신, 말리노프스키는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를 면밀히 감시하도록 주선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제정을 타도한 1917년 2월 부르주아 혁명까지 4년이라는 긴 시간을 유형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도착한 날은 1917년 3월 12일 이었다. 4월에 레닌이 도착할 때까지, 그가 당 중앙을 이끌었다.

혁명 이전 스탈린의 정치적인 삶 20여 년을 돌아보면, 혁명의 대의를 향한 용기, 자기희생, 전념, 헌신의 모범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감옥과 유형지에서의 오랜 세월을 빼놓더라도, 스탈린은 거의 항상 민중과 긴밀하고 생생한 접촉을 취하며 지하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면서 스탈린이 “사적인 삶”을 취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 트빌리시 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사회주의자 동지의 누나인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와 처음으로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1905년 혁명 시기에 에카테리나가 죽은 뒤, 에카테리나의 부모가 키웠다. 스탈린은 가까운 노동자 동지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두 번째로 결혼 하였다. 스탈린은 알릴루예바가(家)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고, 이들은 스탈린이 유형을 당했을 때 항상 음식, 옷, 책 등의 소포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둘 모두 (이 후 스탈린그라드로 이름을 바꾸는) 차리친에 배속되었을 때, 즉 10월 혁명 이후 내전 동안에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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