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LM 기초학습과정(6)
MLM 기초학습과정(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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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M 기초학습과정(6)

목차

1. 서문
2. MLM(맑스-레닌-마오주의)이란 무엇인가?
3.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킨 사회경제적 조건들
4.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초기 생애
5.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6. 맑스주의 철학의 기본공식: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7.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립
8.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9. 노동계급과 결합한 맑스주의
10. 파리 코뮌의 교훈
11. 맑스주의의 전파와 기회주의의 태동
12. 러시아에서의 맑스주의: 레닌의 초기 생애
13. 레닌과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
14. 1905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전술의 발전
15. 제1차 세계 대전: 기회주의 대 혁명적 전술
16.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분석
17.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8. 제3인터내셔널의 형성
19. 민족 및 식민지 문제
20. 1917년 혁명까지 스탈린의 초기 생애와 혁명적 공헌
21. 사회주의 건설: 러시아의 경험
22. 트로츠키주의 및 기타 기회주의적 조류에 맞선 투쟁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술
24. 마오의 초기 생애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 혁명의 승리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27. 마오의 철학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이번 호에 게재>


29. 사회주의 건설: 중국의 경험
30. 대논쟁: 흐루쇼프의 현대 수정주의에 맞선 마오의 투쟁
31. 무산계급문화대혁명
32. 마오 사후

25. 우경 및 "좌익" 노선에 맞선 마오의 투쟁과 중국혁명의 승리

제1차 혁명 내전: 1924년부터 1926년 초까지, 중국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및 소농 계급이 크게 들고 일어나면서 급격히 진전하였다. 1925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영국 경찰의 5·30 시위자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모든 영역의 대중을 포함하는 반제국주의 민중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은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결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두 가지 편향이 중국 공산당을 좀먹고 있었다. 우세를 점한 우경 기회주의 파벌은 당시 당 총서기였던 천두슈(陈独秀)가 이끌고 있었다. 천두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계급이 이끌어야 하고, 혁명의 목적은 부르주아 공화국의 형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노선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은 유일하게 민주적인 세력이며 노동 계급이 연합해야 할 세력이다. 천두슈는 소농 계급과 동맹을 형성할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 “좌익” 기회주의자들은 중화전국총공회 위원장인 장궈타오(张国焘)가 대표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노동 계급 운동만을 보았다. 장궈타오는 노동 계급이 홀로 혁명을 수행할 만큼 강고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장궈타오의 파벌도 소농 계급을 무시하였다.

마오는 두 가지 편향에 맞서 싸우면서, 맑스주의 이론의 발전에 처음으로 주요한 공헌을 남겼다. 마오는 유명한 저작 「중국의 사회 각 계층 분석」을 1926년 3월에, 「호남농민운동 시 찰보고」를 1927년 3월에 발표하였다. 두 저작에서 마오는 중국 혁명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 에 답하려 하였다. 혁명의 친구와 적은 누구이며, 주력군과 든든한 동맹세력, 동요하는 동맹세력은 누구인가? 마오는 혁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 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홀로 싸워 이길 수 없다. 마오는 프롤레타리 아 계급의 가장 가깝고 가장 수가 많은 동맹인 소농 계급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 마오는 민족 부르주아 계급이 동요하는 동맹세력이며, 그 우익은 적이 되고 좌익은 혁명의 벗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나아가 마오는 대중이 어떻게 동원되어야 하고, 혁명 정부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며, 농민 군대가 어떻게 조직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는 혁명 세력이 취해야 할 방향에 관해 마오가 남긴 명확한 관점이었다.

당시는 북벌의 시기였다. 북벌은 중국 혁명의 첫 단계, 즉 제1차 혁명 내전의 중요한 부분으로, 혁명적민족연합전선(국공합작)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행군이었다. 1926년 7월에 화남 광둥성에서 시작한 북벌의 목표는 제국주의 세력이 지원하고 있는 북방 군벌들의 반동 정부를 혁명전쟁으로 쳐부수고, 중국의 독립과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화남 전체와 남부 군벌 대부분이 패배하거나 설복되어, 북벌은 초기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북벌의 영향 아래에서 소농 계급이 고조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혁명군의 진군에 맞춰 도시에서 여러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중국 최대의 공업 및 상업 도시인 상하이조차 1927년 3월, 세 번에 걸친 노동자 무장 봉기 시도 이후에 해방되었다.

하지만 (1925년 쑨원 사후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인) 장제스가 대표하는 부르주아 파벌은 몇 번의 대승을 거둔 뒤, 합작을 깨뜨렸다. 1927년 4월,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 간부 학살이 중국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그러나 우경기회주의적이었던 중국공산당의 천두슈 지도부는 국민당 반동들에게 맞서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하는 대신, 이들에게 투항하였다. 1927 년 7월, 국민당의 다른 파벌도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였다. 이는 합작 결렬과 제1차 혁명 내전의 패퇴로 귀결되었다.

제1차 혁명 내전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천두슈의 우경노선은 혁명을 실패로 이끈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마오는 이 우경노선에 맞서 투쟁하였으나, 당 내 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도리어 천두슈는 1927년 4월에 열린 제5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를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차 혁명 내전 시기: 1927년 8월 제2차 혁명 내전이 시작될 무렵, 천두슈는 우경 기회주 의에 대한 단호한 비판을 받고 총서기에서 파면되었다. 마오는 중앙위원회로 복권되었고, 신설된 임시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경 노선에 대한 비판은 1927년 11월, 중앙위원회 내 취추바이(瞿秋白) 지도하의 “좌익” 노선이 중앙위원회에서 우세를 점하게 해주었다. 취추바이는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좌익” 노선은 중국 혁명이 “지속적으로 고조”되고 있다는 그릇된 평가를 내렸고, 이에 따라 여러 도시에 무장봉기를 촉구하였다. 취추바이 지도부는 마오가 대도시에서 농민 봉기 및 반대 봉기를 옹호하고 지휘했다고 비판했다. 마오는 후난성위원회에서도 다시 축출되었다. “좌익” 노선은 수많은 인명 손실로 이어졌고, 1928년 4월에 폐기되었다.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6차 회의는 당초의 “좌익” 노선을 바로잡고 우경 및 “좌익적” 입장을 모두 거부하는, 기본적으로 옳은 이해가 채택되었다. 마오는 6차 회의 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많은 점에서 마오의 입장을 인정하였다. 마오는 부재중에도 중앙위원회에 재선출되었다. 북벌과 도시 봉기의 실패 이후, 마오는 이러한 올바른 이해방식을 받아들이고 홍군을 키워내면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발전에 추가적인 공헌을 하였다. 마오는 1928년 10월에 「중국의 홍색정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1928년 11월에 「정강산 투쟁」을 저술하였다. 두 역사적인 저작은 홍군의 건설 및 발전이라는,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과정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규모의 노동자, 농민 투사들의 조직으로 시작한 마오 는 1927년 농민 봉기의 실패 이후, 1928년 10월 징강산에 첫 본거지를 차렸다. 1927년부 터 1930년 초에 이르는 시기에,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지역과 지방에 건설되는 혁명 기지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공산당 지도하의 많은 전투 부대가 마오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홍군은 6만 명으로, 곧 10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좌익적” 견해가 다시금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1930년부터는 당 지도부를 장악 하였다. 1930년 리리싼(李立三)과 1931~34년 왕밍(王明)이 이끈 두 “좌익” 노선은 당을 지배 하였고, 당에 막대한 위해를 가하였다. 1930년 6월, 리리싼은 중국 전역의 대도시에서 무장봉기를 조직하고 이 대도시들에 홍군 전 부대를 집중시키는 계획을 짰다. 1930년 6월과 9월 사 이에 이 계획을 실행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손실을 낳았고, 간부들은 계획을 수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마오는 이 시기에 창사 공격을 지휘하였으나, 제국주의 및 국민당 세력으로부터 중대한 손실을 입는 것을 막기 위해 퇴각하였다. 후퇴 이후 창사에서 잔혹한 탄압이 벌어졌고, 이 가운데 지하 사업을 수행하고 있던 마오의 부인 양카이후이는 처형되었다. 리리싼은 1930년 9월에 열린 총회에서 자아비판을 하고, 요직에서 실각하였다. 마오쩌둥과 홍군의 지휘관이었 던 주더(朱德)가 신설된 정치국에 영입되었다.

그러나 정치국은 1931년 1월 왕밍이 소집한 총회에 의해 무시되었다. 왕밍은 소련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온 28인의 자칭 “볼셰비키”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마오쩌둥이나 주더를 총회에 부르지 않았고, 둘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을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하였다. 1932년 8월, 마오는 전선위원회 서기 및 홍군 정치위원 직위에서도 해임되었다. 당과 홍군을 완전히 장악한 왕밍 파벌은 수많은 오류를 일으켰고, 극심한 손해를 불러왔다. 이들의 주된 공격은 시종일관 마오를 향했다. 이들에 따르면, 마오는 우경기회주의자였고, 당내의 주요한 위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마오의 올바른 노선에는 “부농 노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좌익” 노선의 지도부는 종파적이고 파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마오뿐 아니라 리리싼, 취추바이 같은 이전의 “좌익” 노선 지도자들까지 공격하였다. 왕밍 파벌이 당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동안, 장제스는 홍군의 본거지에 대한 초공작전을 다시 준비했다. 처음 네 번의 초공작전은 마오의 지휘, 그리고 “좌익” 지도부가 당과 근거지에 있는 홍군의 전권을 쥐기 전 마오가 세운 전략 원칙의 영향으로 격퇴되었다. 그러나 “좌익” 지도부가 근거지에 실제로 들어왔을 때, 이들의 직접적 인지도는 중대한 오류를 일으켰고 제5차 초공작전에서 국민당 부대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장제스의 포위를 뚫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홍군은 1934년 10월부터 대장정으로 알려진 획기적인 수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마오와 동행한 것은 후처 허쯔전(賀子珍)이었다. 허쯔전은 장시성 근거지 소속 당 간부로, 장시성 소농 가정 출신이었다. 둘은 마오의 전 부인인 양카이후이 사후, 1931년에 결혼하였다. 둘은 두 아이를 두었고, 대장정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장시성 근거지의 소농들에게 맡겨두었다.

대장정 중이던 1935년 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쭌이회의(遵義会議)는 당 지도권을 마오와 마오의 정책에 넘겨주었다. 쭌이회의는 대장정은 물론 중국 혁명 자체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잘 조직화할 수 있도록 북부로 대장정을 지속할 것 역시 이때 결정되었다. 1931년 일본의 동북 지역 공격 및 점령 이래, 항일운동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당은 대장정 과정에서 국민당 부대의 거듭되는 공격뿐만 아니라, 장궈타오의 도피주의 및 군벌주의 노선과도 마주해야 했다. 대장정 중 열린 두 번의 중앙위원회 회의는 신장성, 티베트 등지의 소수 민족 지역으로 후퇴하자는 장궈타오의 제안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당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당 중앙을 새로 건설하려 하였다. 장궈타오는 홍군 일부를 다른 방 향으로 이끌었고, 국민당 세력에게 공격을 받아 병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 장궈타오는 배반하 여 국민당에 가담하였다. 홍군 본대는 1935년 10월, 화북 산시성에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대장정 시작 1년만이었다. 제5차 초공작전 직전에 30만 명이었던 홍군은 이제 2만 명을 간신히 넘겼다. 이들은 홍군의 중핵으로서 (화북 세 성의 접경지역에) 산시-간쑤-닝샤 근거지를 차렸다. 이 근거지는 중심지의 이름인 옌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오가 1945년에 당과 홍군을 항일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기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마오와 허쯔전은 1938년에 이혼하였다. 1939년 4월, 마오는 장칭(江青)과 결혼하였다. 장칭은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였던 란핑(藍蘋)이 당에서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1933년에 입당하였고 1937년 옌안으로 이주하여 루쉰문예학원에서 연극을 가르쳤으며, 소농 계급 사이에서 활동했던 선전부에 참여하였다. 예술과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마오는 선전 사업 도중 장칭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일전쟁 시기: 대장정을 마친 직후, 마오는 내전을 끝내고 항일 전쟁에 최대한의 병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술적 방향을 채택하고 도입하는 데 집중하였다. 마오가 「일본제국 주의에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에서 제시한 설명은 맑스-레닌주의적 통일 전선 전술에 있 어 크나큰 발전이었다. 이는 이후 마오가 1937년 5월에 제출한 보고서, 「항일시기에 있어서 중국공산당의 임무」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중국 내외에 존재하는 모순의 발전 단계에 관해 빼어난 설명을 개진하면서, 마오는 주요모순이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변화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통일전선 전술이 필요하다고 논하였다. 마오는 일본의 침략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당과의 합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과 국민당 내부의 특정 파벌의 압박을 받기까지는 합작에 반대하였다. 장제스는 1936년 12월에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이 필요함을 강조한 휘하의 장군 둘이 자신을 체포하자, 결국 합작에 동의하였다. 1937년 8월, 항일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항일 전쟁 중에는 그릇된 경향들이 당과 투쟁의 지휘권을 장악할 정도로 자라지는 않았으나, 마오는 이러한 경향들에 다시금 맞서 싸워야만 했다. 한쪽에는 합작 내 국민당 일부 당파 가 민족의 예속에 대하여 보여준 비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몇 번 패배하자, 중국이 일본 및 여러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고 지배당할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당파는 심지어 항복할 준비까지 하였다. 다른 한쪽에는 합작이 성립되었으니 일본을 금방 이겨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중국 공산당 내 일부 당파가 있었다. 이 동지들은 합작의 힘을 과대평가하였고, 장제스 파벌의 반동적 측면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 잘못된 이론들을 교정하고 전쟁의 올바른 경로를 제시하기 위해, 마오는 1938년 5월에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에서 마오는 전쟁은 결국 끝날 것이나, 승리는 빠르게 오지 않을 것이라 지적하였다. 또, 마오는 이외의 여러 저작에서 전쟁의 군사적 원리를 규정하였다.

또한, 마오는 당 간부들을 교육하고 이전의 우경 및 “좌익” 노선들의 해로운 영향을 씻어낼 다양한 철학적 저술도 남겼다. 1941년부터 1944년에 남긴 이러한 저술들을 바탕으로 당의 주요한 오류에 맞서 싸우고자 기나긴 정풍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의 역사를 톺아보는 심층적 토론이 정풍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기 당을 지도하는 동지였던 저우언라이는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정풍운동은 결국 이전의 그릇된 노선들에 대한 공개적이고 전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해는 1945년 4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총회에서 「약간의 역사문제 에 관한 결정」로 채택된다.

올바른 노선과 올바른 전술로 무장한 중국 공산당은 처음엔 항일 전쟁에서, 그 뒤엔 장제스의 반동세력에 맞선 전쟁에서 중국 인민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장정이 끝날 무렵 고작 2만 명을 넘는 병력이었던 홍군은 1945년 항일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백만 명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45년 4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는 「연합정부에 대해」를 통해 항일전쟁에 대한 정리와 당시의 국제 및 국내 정세 분석을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마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후 국민당과의 연합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제3차 혁명내전 시기: 하지만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후, 장제스는 미 제국주의의 지지와 우월한 군사력에 힘입어 어떤 합리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연합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당시에는 스탈린조차 내전을 그만두고 장제스와 협력하지 않는다면 중국이라는 나라가 허물어질 것이라며, 중국 공산당이 합의를 볼 것을 원했다. 그럼에도 마오 지도하의 중국 공산당은 나아가, 후일 제3차 혁명 내전으로 알려질 투쟁을 시작하였다. 대중, 특히 소농 계급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홍군은 군사력의 대국을 뒤바꾸고 1947년 7월부터는 전략적 수세에서 전략적 공세로 전환하였다. 1949년 10월에 이르자,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을 상대로 4년 만에 전국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이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인류 1/3을 아우르는 무적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 형성된 것에 대한 희열과 긍지로 충만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앞으로 있을 난관과 다가올 시기의 위험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창립 28주년인 1949년에 한 연설 「인민민주주의 독재에 대하여」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당 28년의 역사는 단 한 가지를 이룬 기나긴 역사입니다. 우리는 혁명전쟁에서 기초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인민의 승리이고, 중국만큼 커다란 나라의 승리이니 축하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린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여정을 비유로 들자면, 우리가 과거에 한 일은 1만 보의 행진에서 첫 한 걸음에 불과합니다.”

26. 식민지 및 반식민지 혁명의 길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직후,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혁명을 향한 중국의 길이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 갖는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1950년 1월 27일, 코민포름 기관지에 실린 사설 「영구평화를 위하여, 인민 민주주의를 위하여」는 “중국인들이 택한 길은 (…) 수많은 피 식민 국가 및 종속국의 인민이 민족 해방과 인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취해야 할 길이다.”

“중국 인민이 민족 해방 투쟁에서 거둔 승리의 경험은 노동계급이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와 싸우고 드넓고 전국적인 통일 전선을 꾸릴 의향이 있는 모든 계급, 당, 단체, 조직과 단결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이 통일 전선은 노동 계급과 그 전위인 공산당이 이끌 것이다.”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한 결정적 조건은 필수적인 내부적 조건이 허용할 때, 공산당의 지도하에 인민해방군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오가 발전시킨 맑스-레닌주의 이론, 즉 마오주의는 그 보편적 적용성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특히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 진정한 혁명가들의 지침으로 채택되기 시작되었다.

마오가 혁명을 향한 중국의 길로 정식화한 것은 혁명의 전개 도중 남긴 수많은 저작에서 발전되었다. 레닌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 끄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임을 지적한 바 있었다. 마오는 자신의 글 「신민주주의론」에서 이러한 이해를 확장하여, 이 시기에는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에서 제국주의에 맞서는 어떤 혁명도 이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계 혁명의 오래된 범주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범주에 조응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반제국주의 혁명은 이제 오래된 부르주아 혹은 자본주의 세계 혁명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혁명,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세계 혁명의 일부이다. 이러한 혁명적 식민지 및 반식민지는 이제 세계 자본주의 반혁명 전선의 동맹으로 이해될 수 없다. 혁명적 식민지 및 반식민지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전선의 동맹이 되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이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차별화하여, 민족주의 및 신민족주의에서의 혁명을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마오는 신민주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를 정교화하였다.

또, 마오는 레닌과 스탈린이 제시한 통일전선론을 발전시켰다. 마오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부르주아 계급이 매판 부르주아 계급과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두 갈래로 나뉨을 일러주었다. 매판부르주아 계급은 존재와 성장에 있어 제국주의에 의존하며, 언제나 혁명의 적이다. 민족부르주아 계급은 때로는 혁명을 돕고 때로는 적에 가담하는 동요하는 동맹군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 아래에서 통일 전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농민 계급, 도시 소부르 주아 계급, 민족부르주아 계급의 4계급 연합으로 구성된다. 혁명의 적은 제국주의, 매판 부르주아 계급, 지주들이다.

마오에 따르면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의 혁명은 러시아 혁명처럼 먼저 주요 도시가 점거되고 이후 지방이 장악되는 반란의 길을 따르지 않을 터였다. 마오는 시골의 지역 단위 권력 장악, 유격 지역과 근거지 건설, 도시에 대한 최종적인 포위와 장악으로 구성되는 ‘인민지구전’ 이 중국의 길이었음을 보였다. 마오는 이를 성취할 혁명전쟁의 군사적 원리를 설명하였다. 마오는 혁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인 홍군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마오는 유격전에서 시작해 다음에는 기동전으로 마지막에는 국지전으로 나아감으로써, 어떻게 적은 병력이 압도적인 대중에 기대 막대한 적을 격퇴할 군대를 길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마오는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이해에 기초하여, 식민지 혁명에서의 국가 형태에 관한 이론을 정교화하였다. 마오는 신민주주의론에 기초 해 ‘신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한 이해를 정식화하였다.

마오는 신민주주의 공화국이 부르주아 지배하의 낡은 구미(歐美)식 자본주의 공화국의 형태와는 다를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자본주의 공화국은 민주주의의 낡은 형태로, 이미 시대에 뒤쳐진 것이다. 한편, 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아래에 놓여있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공화국과도 다를 것이다. 이 형태 역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모든 식민지 및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에서 제3의 국가 형태가 채택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여러 반제국주의 계급의 공동 독재 아래 놓인 신민주주의 공화국이 필요한 것이다. 이 형태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적합한 것이기에, 과도기적 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마오에 따르면 필수적이고 생략될 수 없는 형태이다.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중국 혁명의 승리 후, 인민민주독재의 형태로 수립되었다. 마오는 인민민주독재의 본질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와 반동파에 대한 독재라는 두 측면의 결합으로 설명하였다. 인민은 노동 계급, 농민 계급,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민족 부르주아 계급이다. 노동 계급과 공산당이 이끄는 이 계급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수립하고 자신들의 정부를 선출하기 위해 단결한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주구인 지주 계급과 관료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그 대표 자들에 대한 독재를 시행한다.

나아가, 마오는 인민민주독재가 사회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공산당이 지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영도하고 노농 동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는 공산당이 노동 계급 전체, 소농 계급 및 광범한 혁명적 지식인 대중 전체를 단결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들이 인민민주독재의 선두와 기초를 이루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인민민주독재는 이상의 단결 없이 공고화 될 수 없다. 또, 공산당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및 민족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자들 가운데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 지식인들 및 정치 단체들과 최대한 많이 연합해야만 한다. 이는 반혁명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혁명의 승리 이후 이것만 가능하다면, 생산을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며, 제국주의 외세에 대항해 낙후된 반식민 농업 경제를 공업국으로 점차 변형시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7. 마오의 철학

마오의 철학 저술은 당 간부들과 대중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교육하여, 사고방식과 실천방식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마오 본인은 열정적인 철학도였다. 철학책을 한번 손에 들면 그는 집중적인 독서로 그것을 전부 읽어버렸다. 당시 소련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교조주의자들은 현실에 자신의 지식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들 교조주의자들이 초기에 끼쳤던 영향 때문에, 마오는 끊임없이 당의 연구와 가르침을 실천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는 맑스주의 철학, 특히 맑스주의 변증법이 모든 당 간부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대중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고자 했다.

인식론 : 마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론이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저작에는 「실천론—인식과 실천과의 관계: 지(知)와 행(行)과의 관계에 대하여」가 있다. 마오는 「실천론」을 강의하는 데에는 단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집필하는데에는 몇 주가 걸렸다고 말한 바 있다. 「실천론」에서 마오가 설명하는 핵심은 지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서 오며, 또 사회적 실천에서만 온다는 것이다. 참된 지식 혹은 올바른 발상은 생산을 위한 투쟁, 계급투쟁, 그리고 과학적 실험이라는 세 종류의 사회적 실천에서 나온다.

이론은 실천에 의존한다. 마오는 실천을 통해 측정되고 점검되지 않는 이론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론은 실천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사업방식과 사고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의 변화와 획득이 이루어진다. 지혜롭게 태어나거나 멍청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 지식은 물질적 경험에 앞서 올 수 없다. 누구도 어떤 일을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마오는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 과정은 감각지각과 인상의 단계인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사물의 독립된 측면들, 외적 관계만을 보게 된다. 사회적 실천이 반복됨에 따라, 감각지각과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그러다 두뇌의 이해 과정에서 갑작스런 변화(도약)가 일어나고, 개념들이 형성된다. 개념은 더 이상 사물의 현상, 독립된 측면들, 외적 관계가 아니다. 개념은 사물의 본질과 전체, 내적 관 계를 파악한다. 개념과 감각지각 사이에는 양적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 차이도 존재한다. 개념적이거나 논리적 또는 이성적 인식은 감성적 인식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이성적 인식이 감성적 인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이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감성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 없이 이성적 인식이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두 번째 측면은 감성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된다는 점이다. 이는 감성적 인식이 이성적 인식의 단계까지 심화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적 인식의 획득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맑스주의가 늘 고수하듯, 모든 지식의 본질은 실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또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실증하고 진리를 발전시킨다.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성적 인식으로부터 혁명적 실천을 능동 적으로 지도하여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개조한다. 실천, 인식, 재실천, 재인식 이러한 형식이 무한히 순환, 반복되며 모든 순환과정에서의 실천과 인식의 내용은 매번 이전보다는 한 급 높은 정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인식론의 전체이며,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지행통일관(知行統一觀)이다.”

모순론 :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마오쩌둥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변증법, 특히 모순의 이 해와 적용에 관련된 것이었다. 모순의 이해와 사용은 마오의 분석과 저술 전반의 다양한, 그 리고 대부분의 지점에서 나타난다. 주요 저작인 「모순론」은 「실천론」이 쓰여진 이후인 1937 년 8월에 작성된 것으로, 당내의 교조주의적 사고가 불러오는 심각한 오류를 극복한다는 동일 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모순론」은 옌안의 항일군사정치대학의 두 번의 강의로 발표 된 것이었다.

마오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에 대해 특별히 깊게 연구했던 레닌의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모순을 ‘변증법의 소금’이라고 부르며,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 변증법의 본질”이라 하였다. 「철학노트」에서 레닌은 더 나아가 ‘간단히 말해서 변증법이란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이로써 변증법의 핵심이 이해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해명과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 했다.

이러한 ‘설명과 발전’은 20여년 후 마오쩌둥에 의해 수행되었다. 마오의 작업은 모순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도약이었다. 그는 모순의 문제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했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고 사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규명했다.

먼저, 그는 대립물의 통일이 자연과 사회의 근본 법칙이며, 따라서 사유의 근본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부터 그는 모순의 보편성과 절대성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 원리에 따르면, 모순은 모든 사물과 사고의 전 과정에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과정에 존재한다.

다음으로 그는 모순의 특수성과 상대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각 모순과 각 측면들은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오가 매우 중요히 다룬 개념은 모순 속에서의 대립물간의 통일과 투쟁이었다. 마오는 대립물의 통일이나 유사성은 조건부이며,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립물 사이의 투쟁은 영원한 것이다. 이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마오의 분석에서 자주 제시되고 사용되는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주요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의 이해다. 이 원칙에 따르면 복잡한 것의 발전 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있는데, 그중 하나 는 필연적으로 주요모순일 수밖에 없다. 주요모순의 존재와 발전은 다른 모순들의 존재와 발전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과정에서든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중 하나는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주요모순일 것이며 나머지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따라서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모순이 존재하는 어떤 복잡한 과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우리는 주요모순을 찾는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주요모순이 파악될 때,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모순에서든 모순되는 측면의 발전은 불균등하다. 때때로 모순되는 측면은 균형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상태다. 기본적인 상태는 불균등함이다. 두 가지 모순적인 측면에서 하나는 주요한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부차적인 측면일 것 이다. 주요한 측면은 모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사물의 본질은 주로 모순의 주요한 측면, 즉 지배적 위치를 얻은 측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마오는 언제나 주요모순의 이해에 중추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따라서 중국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언제나 주요모순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한 나라나 한 혁명에서의 주요모순을 특별히 분석하려 하지는 않았던 이전의 맑스-레닌주의적 분석보다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하나의 과정에서의 주요모순과 주요하지 않은 모순,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주요하지 않은 측면을 검토하지 않으면 추상화에 빠지게 되어 모순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모순을 해결할 올바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요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모순 속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등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주요한 모순과 주요하지 않은 모순,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주요하지 않은 측면의 위치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혁명정당은 불균등성의 여러 단계와 모순의 변화과정을 이해해야만 정치와 군사문제 모두에서 전략과 전술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오는 모순에서의 적대의 문제를 명료히 하였다. 마오에 따르면 적대는 대립물의 투쟁에 있어서 하나의 형태이지만,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그러므로 적대의 공식은 어디에나 임의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모순들은 공공연한 적대로 특징지어지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사물의 구체적인 발전에 따라, 원래 적대적이지 않았던 몇몇 모순들은 적대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한편, 원래 적대적이었던 모순은 적대적이지 않은 모순으로 발전한다. 투쟁의 형태는 모순의 본질에 따라 다르다. 적대적이지 않은 모순들은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적대적인 모순들은 평화적이지 않은 수단을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 건설기와 문화대혁명 동안 마오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의 문제로 되돌아 온다. 그는 혁명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회에 모순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적아(敵我)간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는 두 가지의 다른 모순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적아간의 모순은 적대적이며 억압을 통해 처리되어야 한다. 반면 비적대적 모순인 인민 내부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으로 전화되지 는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했다. 마오는 언제나 모순을 올바르게 다룰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모순이 올바르게 이해되고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나 자본주의가 복원될 위험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28. 당에 관한 마오의 견해

중국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자마자, 마오는 당을 진정으로 레닌주의적인 노선으로 발전 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전의 그릇된 노선, 특히 왕밍의 세 번째 “좌익” 노선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당의 기능에 수많은 일탈이 발생하였다. 종파주의적인 이해로 인해 민주집중제의 구실에는 합당한 규범이 없었고, 두 가지 노선의 투쟁에 대한 전적으로 잘못된 접근만이 있었다. 결정은 협의나 당간부단의 참여 없이, 총회 및 기타 회의의 의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두 가지 노선의 투쟁은 공개적으로 수행되지 않았고, 다른 관점을 지닌 대표자들은 공격과 처벌을 마주하였다. 게다가 군중노선은 교조주의로 인해 실행될 수 없었다. 마오는 이러한 일탈을 교정하고, 적절한 토론장와 기구를 확립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마오는 이 과정을 통해 수많은 조직론적 개념들을 명료히 하고 발전시켰다. 이외에도 마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스탈린 지도하의 소련 공산당 내에서 자라난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고자 하였다.

민주집중제: 종파적이고 관료적인 일탈을 교정하려는 마오의 시도는 민주집중제에 관한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마오는 민주집중제를 분명히 “민주주의 먼저, 그 다음이 집중제”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마오는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민주주의가 없다면 어떤 집중제도 있을 수 없다.” “집중제는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지어진다. 프롤레타리아 집중제는 더 넓은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 지어지는 것이다.”

마오의 이러한 관점은 집중제가 무엇보다도 올바른 발상을 집중화한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동지들이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속에 담아두지 않고 표현해야 만 했다. 이는 오직 동지들이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고 분노까지도 토로할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의 민주주의가 보장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없이는 여러 경험을 올바르게 취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없이, 그리고 대중들으로부터 여러 견해가 제기되지 않고서, 좋은 노선, 원칙, 정책, 방법을 구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통해, 옳은 견해들을 집중시킨다는 기조 하에 이해, 정책, 계획, 지휘, 행동의 단결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집중제를 통한 단결이다. 마오는 민주집중제를 당의 기능에 제한하지 않았다.

마오는 민주집중제에 대한 이해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문제에까지 확장하였다. 마오는 민주집중제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민을 위한 폭넓은 민주주의 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하거나 권력을 안정화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민주주의 없이, 군중의 각성과 감독 없이, 반동 세력과 불량분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독재를 행사하거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오는 소련에서 현대 수정주의가 발흥한 뒤 이러한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사하는 데 군중이 동원되지 않음을 목격했다. 또, 마오는 중국 공산당 최고위층 내에서 수정주의적 조류의 발흥을 포착하고, 이러한 조류를 막을 유일한 수단이 하층 간부와 대중들의 진취성과 경계임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마오는 1962년 1월 담화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민 민주주의와 당내 민주주의를 완전히 고취시키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도입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집중제를 이룩하는 것은 불가할 것입니다. 고도의 민주주의가 없이는 고도의 집중제가 불가할 것이고, 고도의 집중제 없이는 사회주의 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불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사회주의 경제를 구축하는데 실패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나라 는 수정주의 국가, 다름 아닌 부르주아 국가로 변모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 재는 부르주아 계급 독재, 그것도 반동 파쇼 독재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경계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고, 우리 동지들이 여기에 많은 생각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두 가지 노선의 투쟁은 마오가 발전시킨 맑스주의 이해와 이론에 관련된, 당 조직 원칙의 다른 측면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한 마오의 접근은 공산당 내 그릇된 의견들을 사회 내 이질적 계급의 반영으로 보았다. 따라서 계급투쟁이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한, 당내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그 반영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들에 대한 마오의 접근도 달랐다. 마오는 이러한 모순들을 처음에는 비적대적 모순인 것으로 보아, 스스로의 “중대한 투쟁”을 통해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모순들에는 교정할 기회를 풍부하게 주어야 하며, 오류를 범하는 이들이 “집요하게 계속”하거나 [모순을]“더욱 악화시킬 때”에만 모순이 적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에서 제시한 이해를 정정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당내 투쟁을 통해 그릇된 조류를 교정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였다. 스탈린은 이러한 시도를 “당내 사상투쟁으로 기회주의적 분자들을 “타도하는” 이론”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르면 “이 이론은 당을 활동불능과 만성적인 질병에 빠지게 하”는 “근거가 불충분하고 위험”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비적대적 모순의 가능성을 거부하였고,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을 처음부터 적대적인 모순으로 취급하였다.

마오는 바로 이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도출하여, 당내 투쟁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모든 당 지도부는 당내 민주주의를 촉진하여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계는 어디 둘 것인가? 한 가지 한계는 당규를 준수해야 하고, 소수가 다수와 중앙위원회 전원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계는 비밀 종파가 조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개된 적이 두렵지 않으며, 오직 비밀스러운 적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들은 우리 면전에 진실을 고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거짓말과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내비치지 않는다. 규율을 어기고 비밀 종파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라도 거리낌 없이 말하게 하고 틀린 말을 한다고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틀린 말을 한다면 비판을 제기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성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러고도 사람들이 설득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이 다수가 내린 결의와 결정을 따르는 한, 소수는 자신의 견해를 유보해둘 수 있다.”

따라서 마오의 이해는 사회에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두 가지 노선의 투쟁과 같은 당내 계급투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분명하게 기초하고 있었다. 즉, 이 투쟁이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공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올바를 수밖에 없다. 고로 마오는 두 가지 노선의 투쟁이라는 개념의 이해와 도입을 통해, 계급, 계급투쟁, 당내 투쟁에 대한 올바르고 변증법적인 접근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군중노선: 마오가 맑스주의를 발전시킨 다른 영역은 군중노선에 관한 영역이다. 당이 군중 과 최대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맑스-레닌주의의 기초적 이해에서 시작하여, 마오는 군중노선이라는 개념을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철학적 차원에서, 마오는 왜 군중노선이 맑스주의 인식론의 본질적인 요소인지를 보여주었다. 정치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마오는 군중노선이 어째서 올바른 정치 노선의 기초인지, 또 당내 관계에 관한 필수적인 조직 노선인지를 입증하였다.

마오는 당의 실무에 관련하여, 올바른 지도력은 전부 “군중에게서 나와, 군중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는 군중의 생각(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생각)을 받아, 이를 집중 (연구를 통해 집중되고 체계적인 개념으로 전환)시키고, 군중에게 나아가 군중들이 이 개념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선전하고 설명하며, 이 개념을 붙들고 행동으로 옮겨 정확성을 검증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 뒤 다시금 군중의 생각을 집중시키고, 다시금 군중들에게 나아가 군중들이 이 개념들을 유지하고 이행하도록 한다. 계속해서, 거듭하여, 끝없는 나선 속에서, 개념들은 매번 더욱 옳고, 더욱 생기 있고, 더욱 풍부하게 거듭난다. 마오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맑스주의 인식론이다.

마오는 “군중에서 나와, 군중으로 향하는”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이나 투쟁에서 지도 집단과 군중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당이 활동가들을 한 데 모아 지도부의 중핵을 구성하고, 이 지도부 중핵을 군중과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 지도부는 관료적으로 변하고 군중과 괴리된다. 지도부가 단순히 전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전체적인 결정이 적절히 시행되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지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군중의 생각을 받아 집중시켜, 군중으로 나아가 이 개념들을 유지하고 이행해, 올바른 지도 개념을 형성하도록 한다. 이것이 지도의 기본 방법이다.” 이렇게 마오는 군중에 대한 당 지도의 기초적 방법으로 군중노선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마오는 군중노선을 군중에 대한 당의 지도라는 맥락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마오는 당내 관계에서 군중노선을 응용할 것을 강조한다. 즉, 마오는 군중 노선을 조직적 노선으로도 여겼다. 마오는 노선이 정말로 군중으로부터 오고, 정말로 군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당과 당 밖의 군중 사이(계급과 인민 사이)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의 지도부와 당내 군중 사이(간부와 일반 구성원 사이)에도 긴밀한 연결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마오는 당의 상층과 하층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함을 제시하였다. 당내 관계의 분열은 어떤 것이든 당 지도부와 군중 사이의 관계에 균열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균열은 군중노선의 시행에 불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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