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만화 『내 아내는 발달장애』를 읽고: 신경다양성과 반자본주의는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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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만화 『내 아내는 발달장애』를 읽고: 신경다양성과 반자본주의는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글에 들어가기 앞서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글을 쓰는 것이 무색하게, 필자는 신경다양성 운동을 접해 본 적이 없고, 그렇게 많은 신경다양인을 만나 본 적도 없다. 필자 자신이 신경다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다수의 경험을 추상화해 보편적 이론을 구성하는 과학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래전 어느 회의에서 우리는 이제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신경다양성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신경다양성 운동을 해 봐야 대중에게 '일을 못할 권리를 요구한다'고 비춰지는 것 아니냐”며 농담조로 비판을 했다. 이 글을 그 발언자가 보고 있다면, 글의 시작이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는 직후 그러한 인식이 신경다양성 운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그를 포함해서—심지어 당사자인 나조차도 그 ‘대중적 인식’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매우 높은 기준에, 대다수의 신경다양인은 객관적으로 일을 못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측하자면, 그렇기에 오히려 신경다양인야말로 일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비교적 감당할 수 있는 수고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신경전형인과 달리, 신경다양인에게 임금노동이란 사력을 다해도 해고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을 잘하고 싶은 인정 욕구란 생존을 위해 발동되는 식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경다양인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주자고 말한다. 이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그 외 신경다양한 사람들을 온정적으로 보는 이들 사이에 좌우를 가리지 않고 퍼져 있기도 하다. 노태우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며 한예종 설립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故 이어령 교수의 발언이 이를 시사한다. “지금 예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엘리트가 아니고, 사실은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여기 못 들어오면 은행원,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거죠. 하나님이 실수해서 잘못 만든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도저히 그대로 내려보낼 수 없어서 하나님의 눈곱 하나 떼어 줘서 그림 그리게 하고, 귀지 하나 후벼 넣어 줘서 음악가가 되게 한 겁니다.”

하지만 나는 신경다양인의 노동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멈춰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경다양인이 자신의 능력과 거리가 먼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능력을 살려 일할 수 있지만, 그 일이 항상 돈으로 보상되지는 않는다. 아니면, 그 일과 관련된 다른 일을 반드시 병행해야 할 수도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든, 그 외의 이유에서든 제 능력만으로 자본주의라는 세계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사회’라는 구호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당장 실현 가능한, 이른바 ‘최소 강령적 요구’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 카메야마 사토시 작가의 자전적 만화 『내 아내는 발달장애』를 마주한 것은 기쁘면서도 절망적인 일이다. 이 만화를 통해 ‘나처럼 사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다. 동시에 ‘저런 만화 같은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는 좌절도 함께 느꼈다. 혹자는 제목만 보고 장애 여성을 착취하는 사악한 남성의 자기합리화를 연상하는 것 같지만 그런 내용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주인공 치카에게는 학습장애가 있다. 제도적으로는 발달장애인으로 인정된다. 남편 사토루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만화는 치카가 발달장애인으로서 겪는 고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 입장에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보기만 해도 거북할 정도였다. 직장 동료에게 눈치 없이 말실수를 하고, 남들이 금방 끝낼 일을 한참 헤매며 그르치고, 집안일에도 오랜 시간이 걸려 탈진해 버리기도 한다. 영업직을 좋아하지만, 여러 매장에서 짧게 일하다가 해고당하길 반복한다. 자존감은 당연히 바닥을 친다. 치카는 “나는 민폐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사회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다. 결국 전 직장의 점장 카가를 찾아가 사과를 하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묻는다. (이런 걸 굳이 사과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나와 비슷하다.) 카가는 처음엔 “부모가 밉지 않느냐”며 모진 말만 하다가, 집에 돌아가 천식으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는 치카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심한다.

이 만화가 내게 그저 만화의 이야기로 느껴진 것이 바로 카가라는 인물 때문이다. 치카의 실제 모델이 된 작가의 아내가 정말 그런 상사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에 기반해있다면, 내가 보기엔 카가는 말 그대로 만나면 행운인 유능한 상사다. 그는 치카를 특매장에 배치한다. 치카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주도하는 사원에게는 치카의 높은 실적을 제시하며, 그것조차 넘기지 못한다면 그만두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로써 갈등을 해결함과 동시에 매장의 실적도 올린다. 알바생인 나를 챙겨주던 고깃집 사장은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해 청춘 멘토링질이나 해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치카라는 인물을 꿰뚫어 보고, 그에 맞게 업무를 재배치하고 조정하는 카가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경영인의 표상'이라 해도 좋다.

이 만화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치카가 매장에 사과하러 가서 카가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치카는 자신이 왜 해고당했는지 궁금해한다. 카가는 그가 다른 직원들의 단골손님을 빼앗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회성이 부족한 치카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 시점에서 카가는 치카의 학습장애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그를 단념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치카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경다양인이 어떤 일을 안 하고 있다면 그것이 꼭 하기 싫어서 안하거나 할 능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업무 환경 자체가 신경전형인에게 맞춰져 있기에, 신경다양인이 그에 적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로 대충 알아차리는 것을 모르거나,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맡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 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 환경을 신경다양인이 적응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일을 맡기면 잘하겠지 하고 기대했다가 혼자 배신당하기보다는, 누가 들어와도 적당히 해낼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게 반자본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서 어느 조직의 기관지에서 시사만평을 그리던, 그러나 그 자신이 딱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던 지인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어느 날, 그에게 그 조직의 정책담당자가 물었다.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 높은 성과를 이룬 사람, 근속연수가 오래된 사람,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 중 누가 가장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할까요?” 지인이 머뭇거리는 사이, 정책담당자는 “당연히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지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마르크스의 격언은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원칙이지만 세계관이 다른 그에게 그것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월급을 주면 누가 열심히 일하나?”

“모두가 똑같은 돈을 받으면 누가 열심히 일하냐”는 사회주의에 대한 해묵은 반문에 이미 많은 이들이 제 나름의 답을 냈다. 그 모든 답에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 정세로 증명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많이 기여한 자가 많은 몫을 챙긴다”는 자본주의의 간단명료하기 짝이 없는 생산성 담보 논리에 대해 사회주의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은 신경다양인처럼 체제의 생산에 많이 기여하지 못하는 이들의 경험에서 도출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단지 이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가 아니라, 해방 이론이 현실의 모순과 맞닿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신경다양인의 권리와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철폐가 필연적이다. 자본주의가 줄세우는 생산성의 위계에서, 이들의 권리를 아무리 '보장'해준다 해봤자 위선적인 시혜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신경다양인의 일반화된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의 삶은 체제의 모순이 가장 날 것으로 드러나는 자리이며, 기존 마르크스주의 담론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두 운동은 선택적인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가능성과 한계를 구성하는 필연적 관계에 있다. 해방은 주변에서 출발할 때 그 이름에 걸맞는 결과를 낳는다.

  1. “이어령의 한달전 마지막 인터뷰…그가 밝힌 30년 전의 비화, 중앙일보, 김호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2788
  2. 한국은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발달장애의 종류를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로 한정하지만, 일본의 『발달장애인지원법』은 이 외에 학습장애, ADHD 등을 발달장애로 인정한다. 모두 신경다양성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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