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는 『자연변증법』 및 『반뒤링론』에서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을 헤겔의 논리학 체계를 준거로 하여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양질전환’, ‘부정의 부정’으로 도출하였다. 엥겔스의 정리 이래로 변증법의 세 법칙은 후대 맑스주의자들이 변증법을 이해하는데 있어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 세 법칙을 자구 그대로 도식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있어서 몇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첫째로, 헤겔 논리학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 가지 법칙은 굉장히 일반화된 법칙이다. 즉, 헤겔 논리학에서 전개되는 개별 범주들은 경우에 따라 다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고 있다. 흔히 양질전환은 1부 존재론에, 대립물의 상호침투는 2부 본질론에, 부정의 부정은 전체 체계(미타, 2020)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이 법칙들을 기준으로 헤겔 논리학을 ‘규정’하는 것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헤겔 논리학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범주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엥겔스가 경계하고 있듯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주체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라는 유명한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엥겔스는 변증법의 범주들이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재구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방법(methode)으로 재해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의 법칙들을 달달 암기하기만 하면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항상 맑스주의 운동 역사에서 존재해왔다.
세 번째로, 변증법의 세 법칙이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가 존재한다. 마오쩌둥은 세 법칙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명하는 것이 결국 삼원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마오쩌둥은 양질전환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계기로 포함시키고, 부정의 부정을 기각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부정의 부정을 마오쩌둥이 부정하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흔히 나선형의 발전구조로 해석된다. 가정된 동일성으로 시작하여 그것에 대한 부정이 제시되고,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면서 다시 동일성으로 복귀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복귀는 동일한 것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가일층 발전된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내장한 복귀는 낡은 것에 대한 폐기와 보존을 포함한 ‘지양’(aufheben)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복귀라는 구도는 발전의 폐쇄적인 방향을 지시하고 즉각적 통일성을 가정한다. 사실 여기에서 은폐되어있는 요소는 헤겔 철학의 ‘절대정신’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기본적으로 자기소외된 절대정신이 다시 자신으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중심점을 기준으로 외화-자기복귀의 과정을 반복하며 질적인 발전을 이루어가는 것이 헤겔 철학의 기본적인 구도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밝히고 있듯, 유물론자에게 사물과 인류의 역사는 무한하다. 심지어 공산주의 마저도 질적인 발전을 지니고 있는 사회다. 따라서 헤겔식의, 폐쇄된 역사적 발전의 체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재구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부정의 부정은 즉각적 통일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의 잔재다. 만약 부정의 부정의 논리를 따른다면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종합은 나누어져있던 것의 통일로, 불가역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는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밝히듯, 모든 것은 나뉜다. 마오쩌둥은 “한쪽이 다른 쪽을 먹어치우는 것,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 이것이 종합”이라고 말한다(마오쩌둥, 2009). 이렇게 마오쩌둥이 이해한 종합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이라는 헤겔식의 종합과는 다른 이해다.
마오쩌둥은 『모순론』에서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을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한 모순의 주요한 측면과 부차적 측면이다. 프랑스 혁명기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는 모순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 모순에서 주요한 측면은 부르주아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부차적 측면이었다. 그러나 이 모순이 역전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요한 측면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치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어치우듯 부르주아지를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렬한 계급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완전한 종합이 이루어진는 것이다. 그러나 대립물의 통일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므로, 통일된 것은 결국 새롭게 다시 나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종합을 “한쪽이 다른 쪽을 먹어치우는 것”이고 한 의미다.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발전관을 통해 비로소 역사는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Althusser)이, 그리고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영원한 과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