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니콜라우스, 1975
원글 링크
편집자 서문
이 글은 1975년 당시 미국의 맑스주의자 마틴 니콜라우스가 작성한 글이다. 마틴 니콜라우스는 이 글을 통해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정주의, 자본주의가 나타났고 소련 인민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다룬다. 소련이 붕괴되고도 약 30년이 더 지난 지금 사회주의의 조국에서 자본주의의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복기해보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판단해 이 글을 개제한다.
저자 서문
본 연구는 뉴욕의 주간지 <가디언>에 “소련은 자본주의인가?”라는 제목의 연재기사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연재물은 아래와 같이 좀 더 논리적으로 장(章)을 나눈 것을 제외하면, 수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재출간되었다.
이 연구는 소련에 관한 모든 중요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단지 소수민족과 여성이 처한 상황, 농업의 상태, 대외정책을 비롯한 몇 가지 다른 주제들만을 다룰 뿐이다. 조사는 원제[“소련은 자본주의인가?”]에서 제기된 질문에 답하기에 충분하고 필수적인 최소한의 정치경제학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계급이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가? 기본적인 생산관계는 무엇인가? 글은 이러한 주제에 집중한다.
연구의 전반부(2-15장)는 연대순으로 접근한다. 1917년 이래로 소련에서 벌어진 주요한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변화들이 1956-65년의 전환기에 중점을 두어 묘사된다. [연구의] 두 번째 부분은 1965년 이후의 생산관계, 특히 노동력, 생산수단, 재정, 계획, 서로 다른 계급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생산의 분업에 돋보기를 들이민다.
이 작업이 옹호하는 일반적 테제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적인 의견, 즉 지배계급들의 의견에 배치된다. 후자의 경우, 그곳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었다는 주장을 퍼트리는 것만으로도 반국가적 범죄로 규정되었다. 대부분의 미국과 서구의 소련 연구자들이 소련 사회주의라는 허구에 공모하도록 하는 동기는 더욱 미묘하고 다양하다. 반공주의, 기회주의, 무지, 형이상학 모두 역할을 한다. 그러한 요소들의 총합은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다른 사회체제간의 관계인 것처럼 보여줌으로서 양대 초강대국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복무한다. 두 초강대국이 모두 동의하는 다른 명제들처럼, 소련 사회주의론 역시 오늘날 거짓에 기초를 두고 있다.
경쟁적인 '기득권' 집단에서 이러한 견해를 옹호했다는 점은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절대 저자의 독단이 아니다.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었다는 일반적 테제는 오늘날 다수 국가들의 맑스-레닌주의자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룬 공통적 의견이다. 이 연구는 이 주제로 점점 늘어나고 있는 국제적 맑스-레닌주의 문헌의 일부이며, 이는 운동의 활력과 단결이 증대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맑스-레닌주의적 관점을 처음 접한 많은 이들은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 테제를 ‘중국적 관점’ 또는 ‘알바니아적 관점’이라 여기게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맞지만 기본적으로 오해다.
흐루쇼프가 시작한 수정주의 노선에 맞서 맑스-레닌주의를 가장 먼저, 가장 확고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옹호해온 것은 중국공산당과 알바니아노동당이었다. 가장 어려운 이론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 테제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을 수행한 것도 그들이었다. 모든 맑스-레닌주의자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들이 바쳐온 공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 복원 테제가 중국이나 알바니아의 “국가적” 경험에서 비롯되거나, 중국과 알바니아 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테제는 국제적 경험, 특히 소련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민족들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창한 이들과 별개로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전세계 맑스-레닌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자산이 되었다.
독자들은 ‘마오주의자’, ‘친중’이라는 딱지가 붙혀지는 이들이 모두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되었다는 견해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이 시기에 ‘러시아’의 길을 걸으며 ‘중국’의 겉옷을 입는 실험들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 연구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신문의 편집자들이 취한 입장이 단적인 예시다. ‘다른 초강대국’과 ‘소련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간헐적인 언급이 그들의 글에 간간히 섞여있지만, 그들은 연재기사의 맨 위에 실린 서문에서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이런 방식으로 편집자들은 매번 세계정세의 긴급한 문제들에 대해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입장을 변호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권위있는 ‘중국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활발한 사업을 벌였다.
이 모든 주제는 오늘날 지평선에 모여든 세계대전의 구름들로부터 중대한 긴급성을 얻는다. 세계 곳곳에서 소련이 사회주의 대국인지, 미국처럼 제국주의 초강대국인지에 대한 질문이 화두가 되었다. 체코슬라바키아, 방글라데시, 전바오 섬과 같은 경우를 떠올려보기만 해도 된다. 또는 인도, 필리핀, 포르투갈을 비롯한 나라들의 친소 정당들에 의해 부추겨진, 맑스-레닌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이 모든, 그리고 여타 사건들은 그 준비의 규모로 판단해보았을 때, 소련 사회제국주의가 초강대국 경쟁자를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그 앞바다에서 몰아내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자 하는, 좀 더 일반적인 갈등의 전조일 뿐이다. 소련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회피하고, 최소화하거나 감추고, 이 힘을 미 제국주의보다 덜 사악하고 유혈적이며 반동적인 것으로 그리는 것은 과학적 사상을 버리고 다른 초강대국의 공세에 동참하는 것이다.
M. N.
1975년 11월
—
참고 : 본 연구는 신문 연재에서 28장이 아닌 24장으로 분류되었다. 18회차부터 신문 연재분은 종종 한 장의 중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경우 신문은 연속성을 위해 도입부에 해당하는 몇 문장을 삽입했다. 다른 경우, 신문은 새로운 장이 시작하는 부분을 이전 장의 끝부분에 중단없이 연결하여 실었다. 이는 자연히 일부 독자들의 보폭을 늘어지게 만들었다. 본판에서는 불필요한 각주 뿐만 아니라 신문에 의해 추가된 자료들도 삭제되었고, 장들은 원고를 따르게 되었다. 그외 본문은 수정하지 않았다.
1. 서론
오늘날의 소련은 친구인가, 적인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평화의 방어벽인가, 공격적인 제국주의 권력인가?
오늘날의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운동에서, 이 문제만큼이나 넓고 깊은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서로 다른 답변들은 세계 정세와 전략·전술, 그리고 기본적인 방법론과 철학에 대한 다른 관점을 암시한다. 좋든 싫든 간에, 오늘날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활동을 벌이는 어느 누구도 현대 소련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영영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반제국주의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소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공개적인 토론자리에 나온 것이든, 무언의 동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이든간에 불타오르는 주제였기는 매한가지였다.
20~3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련의 성격과 역할은 미국에서 좌익 활동을 하는 대다수에게 이미 답이 정해져 있던 문제였다. 대부분은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이며, 대부분의 지도부가 올바르고 혁명적인 노선을 따랐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온 세상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인민들이 이 위대한 땅을 해방의 등불로 여겨야 한다고 믿었다.
공공연히 그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지들과는 별개였던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의 여백이나 틈새에서 자신의 정치적 존재를 간신히 얻어낼 수 있었다. 소련의 승리와 성취는 그 한 해 동안, 좌익 대오에서 공공연한 반대를 표명하는 이들의 신용을 떨어뜨렸다. 소련 지도부를 방어하기 위한 단결은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광범위한 운동에서 난공불락의 세력이 되었다.
확실히 오늘날에는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대규모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소련을 대변하는 이들이 한 세대 전에 누렸던, 미국 반제국주의 운동 내부의 엄청난 위신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친소련 입장이 쟁취했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붕괴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친소련 입장이 갖던 위신과 영향력을 감소시켰을까? 왜 이 문제로 한때 강력히 단결했던 이들이 이제는 다른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을까? 답은 소련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은 소련을 방어하기 위한 좌익의 단결을 누가 산산조각 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상징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제국주의자들 사이에서 소련의 위신과 영향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벌어진 일제사격은 중국이나 알바니아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아니라, 소련공산당의 지도자 니키타 S. 흐루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 앞서 행한 매우 감정적인 연설에서–이전에 스탈린에게 아양과 아첨을 떨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는–흐루쇼프는 갑자기 30년간 당을 이끌어왔던 이의 지도력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악질적인 비난을 퍼부어댔다.
무덤에 3년째 머무르고 있던 스탈린 앞에 갑자기 가장 놀라운 종류의 욕지거리가 수북하게 쌓였다. 그는 “폭군”이었고, “차르보다 더욱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렀으며, 그의 “재위”는 “피와 테러”로 얼룩졌고, 세계대전에서의 지도력은 반역과 다름없는 것이었으며, 멍청이였고, 기타 등등. 20세기 맑스-레닌주의 정당의 당대회가 마치 갑자기 중세 퇴마의식으로 바뀐것 같았다.
이 유명한 “비밀연설”은 소련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고, 당지도부는 하급 당간부들이 이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CIA는 곧바로 사본을 입수하여 뉴욕타임즈와 전세계의 다른 부르주아 신문들에게 넘겨주었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대부분이 이를 통해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폭탄선언의 여파로 생겨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경악과 혼란, 분열은 엄청났다. 모든 당들이 한꺼번에 위기에 처했다. 이탈과 축출, 분리의 물결이 밀려왔다. 연설은 “전세계가 들을 수 있는 총성”이었고 오늘날까지도 반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왜 이 연설은 그렇게도 심한 분열을 초래했을까? 왜냐하면 소련 인민의 지도자로서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저 한가한, 명목상의 최고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 지도자로서의 모든 활동은 소련 발전의 전 과정에 걸친 성과와 결점, 그리고 국가의 모든 주요한 기관들에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반영되었다. 이러한 기관들을 처음 세우고 방어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리고 발전방향을 이리저리 전환하려는 투쟁들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스탈린은 중심에, 그리고 선두에 서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스탈린과 그가 이끈 당은 중요한 실수들을 저질렀다. 스탈린의 올바른 선택과 성취들이 그의 작업에서 주된 성격이었임을 강조하면서, 외과적 수술의 정밀함으로 [이러한 실수들을] 확인하고 비판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한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스탈린 지도부를 전체적으로 “오류와 중대한 왜곡, 가공할만한 범죄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당의 지도자인 스탈린 개인 뿐만 아니라, 당대 소련사회의 근본적 토대까지 공격한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와 나머지 상부구조, 그리고 소비에트의 경제적 토대나 기반시설은 자발적으로 발전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어진 조건의 토대 위에서, 소련 노동계급과 농민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노력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지도부인 당이 행할 수 있는 노력의 객관적인 한계 내에서 건설되어야 했다. 그러한 모든 노력은 소련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투쟁에서 여러 주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웠다. 예를 들면, 스탈린은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트로츠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농업집산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지만, 부하린은 그러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시대에는 이러한 전투를 되돌아보고 요약할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역사는 누가 옳았음을 증명했는가? 역사는 누구를 비난했는가?
흐루쇼프가 그랬듯이, 스탈린의 오류가 주요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난 30년 동안 소련공산당이 취해온 근본적인 정책적 노선을 암묵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스탈린이 소련의 모든 주요한 정책적 전환점에서 물리쳐온 주요 적들이 옳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소련 사회의 토대가, 그것이 건설되었을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그러한 공격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을 동요시키고 힘과 단결을 약화시켰으며,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련과 그 대변자들이 가졌던 정치적, 도덕적, 조직적 영향력이 끝이 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소련 지도부가 이후에 보여준 거의 모든 움직임들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서, 흐루쇼프주의 선언[역자주–비밀 연설을 공산당 선언에 빗댄 비유적 표현]의 암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비록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꼬리표 아래에 있었지만–선언과 행동으로서 읽힐 수 있었다.
이러한 논쟁의 포문이 열린지 거의 20여년이 지난 지금, 소련 당 지도부는 그야말로 수정과 변형의 파노라마 같은 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다 동원되었다.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에서, 소련 지도부는 국가를 계급의 억압기구로 바라보는 맑스주의적 관점을 내팽겨치고, 국가가 전인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견해를 옹호해왔다. 그들은 유사하게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핵심을 도려내버렸다.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을 왜곡하여 부르주아지의 평화적 타도에 대한 환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폐기하고 제국주의 세력과의 ‘불가역적 데탕트(detent)’ 신화를 지지해왔다. 이것은 단지 몇 가지 예시만을 언급한 것이다.
대외정책에서 소련 지도부는 흐루쇼프를 필두로 사회주의 중국에 대항하는 인도의 팽창주의와, 사회주의 알바니아에 대항하는 유고슬라비아 배외주의와 동맹을 맺음으로서 사회주의 진영의 결속을 파괴했다. [소련 지도부는] 형제국에 대한 원조에 부당한 조건들을 부과하였고, 그들이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을 때 갑자기 원조를 중단해버렸다.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의 독립성은 침해받았고,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주권을 “제한”당해 대부분이 소련의 의존국과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이 또한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소련 지도부가 소련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가져온 변화들이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권력을 이용해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살아남은 자본주의의 흔적들을 길러내고 강화하며 지휘하였고,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10년 전의 경제개혁에서 그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 유형의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철저하게 구축했다. 그것은 오늘날 통합경제체제(consolidated economic system)라 불리우는 것으로, 레닌의 고전적인 제국주의 분석에서 나타나는 모든 본질적인 특징에 일치한다.
흐루쇼프를 시작으로 소련 지도부가 행했던 이론적, 정치적 수정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분석까지는 못하더라도 연대기화하기만 해도 많은 분량의 책이 나올 것이다. 특히 1950년대에 일어났었던 소련 상부구조의 변화와 그에 뒤이어 1960년대에 일어난 경제적 관계에서의 변화가 그 핵심요소다.
현대 소련의 역할과 성격에 관한 오늘날의 투쟁에서, 소련 수정주의자들과 맑스-레닌주의자들 사이에 그려진 선들이 주요 전선을 구성한다. 한편, 소련공산당은 중국과 알바니아 공산당이 선도적으로 견지해온 소련에 대한 진정한 맑스주의적 견해를 새로운 형태의 트로츠키주의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엄청난 아이러니는 선지자[트로츠키]가 꿈꾼 것 이상으로 트로츠키주의가 부활하고 부흥할 토대를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마련한 것이 소련 수정주의자들 장본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본래의 [트로츠키주의적] 비관론이 옳았다는 패배주의 노선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도출하고 확산시킨 것은 소련공산당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정확히 이러한 트로츠키주의의 현대적 부활 때문에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소련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는데 있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하며,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소련공산당 수정주의자들이 세계관에서뿐만 아니라 소련 역사에 대한 개관에 있어서도 서로를 회유하고 은폐하는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소련에 대한 분석은 1956년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으며, 소련의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 혁명
917년 10월 25일은 러시아와 세계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날이었다.
소비에트 권력의 시대가 열렸고, 이는 약 40여년 후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 권력이 부상함으로서 끝을 맺었다. 초기 소련의 주요한 발전 양상을 추적해보는 것은 현재 [소련] 정권을 더욱 명확하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반란, 겨울궁전 습격, 옛 [임시]정부 장관들의 체포, 소비에트 공화국의 선포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 중 하나에서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국가 권력은 옛 착취계급의 손에서 빼앗겨졌다. 거의 중세와 다름없는 지주들과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공장들의 소유주들과 재정적 후원자들, 해외의 동맹국들은 인민들로부터 수익을 쥐어짜내고, 피착취계급을 억압하며 정복과 합병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중앙집권화된 정부기관을 한번에 빼앗겼다.
게다가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유재산을 단기간에 몰수당했다. 모든 토지는 즉시 국유화되었다.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외채는 지불거절되었다. 주요 산업들 역시 그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새로운 정부를 사보타주하기 위해 문을 닫은 기업들로부터 시작하여, 소련 당국은 1917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800개 이상의 기업을 몰수했다. 1918년 6월, 모든 대규모 산업과 광업이 주요 운송시설과 창고와 함께 국유 재산이 되었다. 모든 해외무역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수행되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지 단 몇 달만에, 새로운 국가는 거의 모든 주요한 국내 생산수단의 간판과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경제생활의 감제고지(Commanding heights)가 [새로운 국가의] 손에 놓였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막대한 재산 이전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작가 링컨 스테펀스(Lincoln Steffens)는 1918년 소련을 방문한 후 돌아와, “나는 미래에 다녀왔고, 그것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주 인용되는 이 문구와, 당시의 다른 방문객들이 남긴 유사한 발언들은 소련 노동계급의 승리가 발산하는 엄청난 영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이 미래에 해방될 것을 알리는 전조였다. 그러나 1918년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들 중 “잘 돌아가고 있다”는 스테펀스의 판단에 문자 그대로 동의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거의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우선 경제는 4년 간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되어있었다. 산업은 원자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백만의 노동 연령의 농민들이 전선에 나가있었다. 심각한 기근이 도시들을 위협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는 새로 취득한 재산들을 사회주의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환하는 작업을 거의 시작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이 장악된 상태에서 기업을 민간에서 국가의 손으로 넘겨받는 것은 몰수령을 내리고, 노동자들이 공장과 설비를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아직 그러지 않았다면 무장한 노동자들의 분견대를 파견하는, 상대적으로 복잡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생산을 지속하거나 되살려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1918년 5월, 레닌은 이렇게 썼다. “어제의 주요 과제는 가능한 한 단호하게 국유화와 몰수를 수행하며, 부르주아 계급을 타격하고 분쇄하며, 사보타주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을 지닌 것보다 더 많이 국유화하고 몰수하고, 타격하고 깔아뭉갰다는 것을 보지 못할 이는 장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화와 단순한 몰수의 차이점은 올바르게 계산하고 분배할 능력 없이 ‘결정’만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몰수라면, 사회화는 그러한 능력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선집, 27권, 333쪽)
만약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이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몰수되었는지 추적할 수조차 없다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는 훨씬 적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917년 말에 설립된 중앙국가경제위원회는 경제문제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통제만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21년 5월, 레닌은 “아직도 통합된 국가경제계획의 운영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선집, 32권, 371쪽)고 썼다. 단지 사회주의 경제의 배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정치적 상부구조의 주요 위치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소련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개조해야 한다는 막대한 과제가 여전히 그 앞에 놓여 있었다. 1918년 5월에 레닌이 말했고, 3년 뒤에 다시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권력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성취할 것이라는 결정을 함축하는 것이지, 새로운 경제 체제가 사회주의적인 질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선집, 27권, 335쪽, 32권, 330쪽)
소비에트 권력의 요람을 분쇄하기 위한 3년간의 내전과 14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소련은 생존을 위한 임무들에 이 젊은 국가를 종속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개입은 쫓겨난 지주들과 부르주아지들이 주도한 무장 반혁명에 연계되어, 1918~21년 사이 소련 노동계급에게 더욱 끔찍한 희생을 강요했다. 반혁명군은 소비에트 정권의 도시 중심부를 연료, 원자재, 그리고 무엇보다 곡물의 공급원으로부터 차단했다. 징용, 잉여곡물의 강제징발, 긴급배급 등 사회주의 경제로의 평화적 발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비상경제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세계 부르주아들의 모든 예측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국가는 맹렬한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국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현대 소련 역사가들은 1917년 소련에 300만명 미만의 공장노동자들이 존재했다고 추산한다. 그들 중 80만여명이 내전에 참전했고, 18만명 가까이 전사했다. 전체 공업프롤레타리아트의 10~15%가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 결과 소비에트 정권이 추산한 공장 노동자의 수는 반혁명군의 주력이 격퇴당한 1920년 8월경 170만명에 불과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물리적 손실보다 더 위험했던 것은 산업의 마비로 인한 경제적 퇴보였다.
1921년 5월 레닌은 “현재 우리의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은, 대규모 산업과 연계되지 않은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농산품과 물물교환하기 위해, 그들은 상품을 도둑질하거나 공공소유의 공장에서 자신의 상품을 만듦으로서 이득을 취하는 프티부르주아적 이윤추구의 방법을 통해 물건을 어렵게 구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이 소비에트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주요한 경제적 위험이다.”(선집, 32권, 411쪽)
1921년 10월 레닌은 이렇게 썼다. “대규모 산업의 붕괴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일반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탈계급화, 즉 계급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대규모 산업에서 물질적 가치를 생산하는 계급이다. 대규모 자본주의 공업이 파괴되면서, 그리고 공장이 멈추어서면서 프롤레타리아는 사라졌다. 그것은 때때로 통계에서 측정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선집, 33권, 65쪽)
이러한 상황은 프롤레타리아가 노동하는 계급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정권에게 있어 특별히 위험한 것이었다. 산업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정권은 설 자리를 잃고 전복될 것이었다. 1921년 초 레닌이 당과 국가에 신경제정책(NEP)을 제안했을 때 소련은 내전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이 일어났을 때보다 더 중대한 비상사태의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레닌의 표현처럼,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권력을 잡았을때, “우리는 구식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에 적응하는 예비기간 없이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국가적 생산과 국가적 분배를 도입함으로서 이전의 생산과 분배체제와는 다른 것을 구축했다고 여겼다.” (선집, 33권, 88쪽)
3년 후의 경험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사회주의적 생산과 분배원리를 ‘직접적인 공격’, 즉 가장 짧고 빠르며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도입하려는 시도”는 패배를 겪어야만 했다.
네프는 이러한 패배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반한 전략의 변화를 의미했다. 사회주의 경제로의 즉각적인 전환 대신에 상당히 긴 과도기가–레닌의 추산에 따르면 5년에서 10년 가량–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신중하게 마련하는 동안 존속될 것이다. 전면적인 공격 대신에 전략적 후퇴와 재편성, 통합의 기간이 있을 것이다. 자본가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대신, 소비에트 정권은 경제가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명확한 한계 내에서 그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을 독려할 것이다.
레닌이 1920년에 분명하게 표현한 것처럼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가 더 확고”했다. (선집, 31권, 516쪽) 국민의 약 80%가 농민이었고, 이들 중 대다수가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개인 소유의 작은 토지에서 일하는 소규모 [토지]소유주들이었다. 소규모 사업장들과 제조업자들의 넓은 계층 역시 소자본주의적 생산과 교환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장 발전된 부문인 대규모 공업부문–당시 러시아의 대규모 공업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되어 있었다–에서도 사회주의적 토대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 문화적, 기술적 능력은 옛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서 [경제를] 운영하기에도 불충분했고, 공동의, 계획적인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기에는 더더욱 부족했다. 자본가들과 전문가들의 지도 아래에서 “학습”을 하는 기간은 국유부문의 핵심영역에서도 요구되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그것이 채택된 상황에 대한 분석은 수십년 후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코시긴에 의해 행해진 소련 생산양식의 변화에 조명을 비춘다. 두 일련의 조치들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이익에 부여된 명령적 기능, 관리자들이 상품 교환에 참여할 자유 등 많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많은 측면에서 후자는 의식적으로 전자를 베끼기 까지 했고,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레닌의 당대 연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조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흐루쇼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공산주의를 향한 불가역적인 진보로 묘사했다면, 레닌은 볼셰비키의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네프가 국가자본주의로의 일시적인 후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는 것이다.
3. 신경제정책
1918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에서 제국주의적 개입과 내전이 있었던 기간은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이 불의 세례를 받은 기간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노동자들과 농민 다수에게 충성을 명령했는가? 그러한 국가기구는 응집력 있고 효과적이었는가? 지도부의 정책은 전방위적 공격에 대처하기에 적절했는가?
1921년이 되자 더 이상 많은 의심이 제기되지 않았다. 소비에트 권력은 당시 다른 모든 나라들을 무너뜨렸을법한 도전들을 견뎌냈다.
레닌은 1920년 12월 제8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정치를 배웠다”고 말했다. “여기 우리는 돌처럼 강고히 서있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앞으로는 더 적은 정치가 최고의 정치가 될 것이다.” (선집, 31권, 514쪽)
나라의 무너진 경제의 복원이 정치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1921년 초 신경제정책의 이름으로 채택된 조치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도시와 농촌간의 상업적 관계의 회복.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징발하는 전시 비상 체제는 중단되어야만 했다. 그 대신 레닌은 ‘현물세’를 제안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를 채택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곡물 잉여분의 전체를 국가에 내어주지 않아도 되었고, 미리 알려진, 고정된 비율만을 내어주면 되었다. 따라서 이는 식량을 증산하는 물질적 유인이 되었다. 농민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에서 공업 생산품과 교환할 수 있는 곡물의 잉여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소매거래의 회복. 소비에트 정권은 도매 수준의 곡물 거래를 국가독점으로 유지했고, 전국적 규모로 생산되는 대규모 공업 생산품의 도매 거래를 대부분 통제했다. 그러나 민간 소매 거래와 현지의, 지역 규모의 도매 거래가 다시 합법화 되었다. 민간 상인들은 영업을 장려받았다.
–느슨한 국가 감독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토대하에 작동하는 중소규모 민간 공업의 복원
–원자재 추출과 공업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성에 기반한 혜택을 제공함으로서, 소련경제에 대한 해외 투자를 제한적으로 재개하기
–국영화된 대량판매(mass-market)산업의 재편. 이 산업들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직접적인 감시 및 통제 하에서 자본주의 기반 위에 놓였다.
이 모든 조치 중 마지막이 가장 대담하고 과감했다. 대중 소비시장을 위한 대규모 국영 공업들은 중장비 제조산업만큼이나 소비에트 국가의 주요한 경제적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주의의 보루로서, 가장 먼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된 곳이자, [그러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경제의 나머지 부문들로 발전해나가는 곳이었다.
1921년 5월 레닌은 "사회주의 공장에서 생산되어 농민들이 생산한 식료품과 교환되는 공산품은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상품이 아니며, 좌우간 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상품이 아니며, 상품이기를 그만둔다"고 말했다. (선집, 32권, 384쪽)
다시 말해 이 부문에서는, 그리고 이 부문에서만 (맑스가 자본에서 분석한 것처럼) 상품생산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억압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관계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부분적인 후퇴는 필요했다. 같은 해 11월에 이미 공산품과 식료품의 직접교환(물물거래)이 무너져내렸다. 금전적 이득을 위한 "일상적인 사고팔기"가 자리를 되찾으면서 도농간의 연결은 다시 고도로 자본주의화 되었다. (전집, 33권, 96쪽)
국유산업과 민간농업의 관계에서 그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유산업의 내부 구조에서도 후퇴가 요구되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테제 초안』(1921년 12월~1922년 1월)에서 "국가적 통제의 대상인 자유시장과 자본주의 양자는 허용되었고 발전하고 있다. 다른 한편, 국영기업들은 이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사실상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노선으로 광범위하게 재편성되고 있다 (...) 자유시장이 허용되고 발전함에 따라 대부분의 국영기업들은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선집, 42권, 375-376쪽)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편은 (중공업을 제외한) 모든 국영기업이 "경비를 충당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의 글, 376쪽) 이는 "공장의 모든 권한이 경영진의 손으로 집중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1인 책임의 원칙에 따라 공장 경영진은 임금을 결정 및 지급할 권한과, 식량과 작업복, 그리고 다른 모든 물품들을 분배할 권한을 독립적으로 가져야 한다.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작전상의 자유를 누리고, 생산성 증대에 따른 실제적인 성과를 엄격히 통제해야 하며, 공장이 경비를 충당하고 수익을 낼 수 있도록 가장 재능있고 유능한 행정인력 등을 신중하게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위의 글, 379쪽, 또한 33권 184-196쪽을 보라)
게다가 물질적인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 공장과 트러스트의 이사진들은 부분적으로 수당 기반의 임금을 지급받았고, 그들의 수입은 기업의 수익성에 좌우되었다. 노동자의 임금을 기업의 수익성과 연결시키는 실험 역시 존재했다.
이 모든 것들과, 이보다 더한 것들이 40년 후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소련 정책의 이러한 전환을 되돌아볼때 주목할만한 것은 그러한 정책을 레닌이 발전시키고 특징지을 때 보여준 완전한 솔직함이다. "교환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말하고 강조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숨기고자 한다면 모든 것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선집, 32권, 490쪽)
40여년 후 완전히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완전히 다른 소련 당지도부가 거래의 자유를 훨씬 더 전면적으로 복원하고, 훨씬 더 심오한 국영기업 재편을 "상업자본주의의 토대"위에서 단행했을 때, 이러한 솔직함은 사라졌고, 어리석고 참담한 위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네프의 중요성에 대한 레닌의 명확성과 솔직함은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제한적이고 일시적으로 복원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증명한다. 네프가 일시적으로 조성한 국가자본주의는 경제권력의 소유자인 부르주아지가 국가와 국유재산을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부르주아 경제학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국가자본주의가 아니었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은 부르주아지들을 자신[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에 종속시켰다. 경제문제에서 부르주아지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크던간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항상 고삐를 쥐고 있었고, 자신의 정치·경제 정책에 따라 [고삐를] 느슨하게 하거나 조였다.
소련 역사에서 네프 시기는 세 가지 커다란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본주의를 향한 후퇴, 강화,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공세. 후퇴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 단계가 네프 계획의 일부였다. 전체적으로 볼때, 네프는 소련의 자본주의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전자본주의적인) 경제적 토대를 사회주의적 토대로 전환시키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국가의 정치적 이득을 위한 경제적 기반"(선집, 33권, 73쪽) 위에 놓인 정책이자, "자본주의는 파괴되었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기 동안의 과도적 정책이었다. 레닌이 1922년 11월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네프의 러시아는 사회주의 러시아가 될 것이다." (선집, 33권, 443쪽)
1922년 3월, 레닌 자신이 네프의 첫 단계인 "후퇴"의 중단을 명했다. 어떻게 [경제를] 강화하고, 또 어떻게 자본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총공세로 넘어가게 될지는 후계자들의 몫이었다.
네프의 2단계 및 3단계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모든 면에서 가장 쉬운 것은 민간 상인과 소규모 제조업자들을 무대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국가의 전체 거래에서 민간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하는 한편, 국가의 비중은 증대했다. 1932년, 네프맨이라 불리우는, 많은 미움을 받았던 민간 거래업자들은 거의 사라졌다. 제조업에서는, 1923년 전국 노동자들의 1/8 가량이 민간 기업에 고용되어 있었지만, 1932년에는 민간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 미만으로 감소했다. (스탈린이 당대회에서 발표한 『소련국가계획위원회의 정기 보고』(저작집, 12, 13권)와 현대 수정주의의 관점에서 쓰여진 『소련 노동계급사 개요』 Y. S. 보리소바, 1973을 참고할 것)
외국인 투자와 임대는 생산량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청산하는데 있어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대한 레닌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인 자본가들은 거의 없었다.
더 어렵고 오랫동안 지속된 투쟁은 네프의 첫 단계 동안 국유산업 부문에 도입된 자본주의적 조치들을 뒤엎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필요가 진보를 좌우했다. 국유산업 트러스트의 관리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이용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이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가격을 인상하였다. 1923년과 1924년, 국가는 트러스트를 엄격히 단속하여, 처음에는 엄격한 신용 통제를 가했고, 경영진의 행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가격통제를 가했다. 1924년 봄, 국유산업 전 부문에 대한 장기적인 종합경제계획을 설계하는 최초의 진지한 출발이 이루어졌다. 한편 사회주의 계획 원칙은 한 부문씩 점진적인 진보를 만들어냈다. (E. H. 카, 『공백기』를 참조) 1927년, 스탈린은 국가가 "단일 산업기업으로서, 계획된 방식으로 국유산업을 지휘할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작집, 10권, 309쪽) 1929년에는 국유부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너무나 억압되어있었기 때문에, 제1차 5개년 계획의 채택으로 이러한 가능성이 처음 현실화 될 수 있었다.
네프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서 가장 어려운 전투는 공업이 아니라 농업부문에서 벌어졌다. 네프의 첫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진 자유시장의 복원은 그 의도대로 농업생산의 부활로 이어졌다. 그리고 계급투쟁으로도 이어졌다. 1922년 소련 정부는 예전처럼 기근에 시달리는 대신에 곡물을 수출할 수 있게 되었고, 식량 사정이 긍정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농업 생산의 부활은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부활을 의미했다. 부농(쿨락)들의 손에 토지와 잉여곡물, 자본이 집중되었고, 가난한 농민들과 땅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의 빈곤이 증대되었다. 그들은 도시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이주는 도시의] 실업문제를 악화시키게 된다. 1928-29년 사이에 일련의 풍작이 든 후, 쿨락들은 소련 정부를 조롱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해졌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곡물세 납부를 거부했고, 날강도 같은 가격이 아니거나, 공공연한 사보타주와 무장반란을 벌이는 지역이 아닌 경우라면 곡물 판매를 거부했다. 레닌의 지시에 따라 네프의 일부로서 시작된 농업협동조합은 거의 사문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비상사태는 소련 정부로 하여금 다시 한번 기근과 내전의 망령에 마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