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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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산화
1920년대 소련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비록 성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광활한 농민의 바다에 놓인 하나의 섬이었다.
국유산업에서 국가자본주의를 향한 후퇴가 중단되고, 사회주의를 향한 확고히 전진해나가던 1920년대 후반, 시골 지역에서는 자본주의가 만개했다.
농업 노동자들과 빈농들은 빈곤에 빠지게 되었고, 중농들은 쥐여짜졌으며,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적 농민인 쿨락만이 곡물과 권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쿨락들의 오만함은 스탈린이 1929년 4월 당중앙위원회에 보고한 일화로 가늠해볼 수 있다. 곡물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에서 “우리의 선전원 중 한 사람이 두 시간동안 곡물 보유자들을 설득하여 나라에 곡물을 공급하려 하니, 쿨락 하나가 파이프를 물고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말하기를, “젊은 친구, 춤을 좀 추어보게. 그럼 내가 몇 푸드[푸드는 소련의 무게 단위로, 16.38 kg를 말함]의 곡물을 주겠네.”” (저작집, 12권, 95쪽)
작황은 좋았다. 하지만 국가는 기근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벌어진 쿨락의 저항과 무장반란은 도시에서 이룩한 사회주의로의 진보를 역전시키고 국가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 위협했다.
이러한 비상상황에서, 그리고 당내의 “좌익” 및 우익 기회주의에 맞선 격렬한 투쟁 끝에, 스탈린이 이끄는 중앙위원회는 소련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인 농업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전면공세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이 전면공세는] 농업집산화 운동이었다. 그 목표는 수백만의 중소농민들의 소토지를 수만개의 집단농장(콜호즈)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집단농장에서 (가내소비를 위한 소토지를 제외한) 개별 토지는 농부들이 집단적으로 경작하는 큰 구역에 병합된다. 수확물의 일부는 세금으로 공제되지만, 나머지는 집단의 재산이 된다. [수확물들은] 집단에 의해 최대의 이익을 위해 판매되며, 그 수익금은 작업량에 비례하여 농부들에게 분배된다.
(반대로, 국영농장(소브호즈)에서는 전체 작물이 국가로 귀속되며, 농부들은 공장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미리 정해진 임금을 받는다. 당시 소련에는 몰수된 대지주의 토지에 기반한 국영농장이 이미 존재했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이러한 높은 단계의 형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농업집산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농촌 자본주의 세력의 가장 강력하고 주도적인 요소인 쿨락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당은 “계급으로서의 쿨락의 제거”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그들로부터 경제적 기반, 재산, 소농·중농·노동자를 착취할 가능성, 국가에 저항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1928년 말, 농업에서 시작된 투쟁은 약 5년간 지속되었고, 제2차 볼셰비키 혁명에 이르렀다. 이는 붉은군대를 포함하여, 국가에 의해 수행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지만, 동시에 농업노동자, 빈농·중농 대중에 의해 수행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기도 했다.
모든 진정한 혁명이 그러하듯, [농업에서의 투쟁 역시] “저녁의 연회나 글 쓰기, 그림 그리기”가 아니었다. “정제되고, 여유롭고 신사적인, 그리고 온화하고 친절하고 정중하며 차분하고 너그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1927년 후난성 농민운동을 묘사했던 것처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시키는 반란이자 폭력행위”였다. (선집, 1권, 28쪽) 따라서 농민들이 “도를 넘어” 쿨락을 (그리고 쿨락으로 오인된 일부 사람들을)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제거한 경우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혁명을 논했던 주요한 부르주아 비평가 중 하나인 M. 레빈(Moshe Lewi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탈쿨락화의 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백만의 베드냐크(bednyaks, 빈농)들이 비참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자주 굶주렸고, 신발이나 셔츠도, 다른 ‘사치품’도 없었다. 시골에 형성된 긴장과 쿨락을 몰아내고자 하는 열망은 대부분 베드냐크의 비참한 처지와, 기회가 될 때마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좀 더 운이 좋은 이웃들의 처지에 대해 느끼는 증오가 크게 작용했다.” (레빈, 『러시아 농민과 소비에트 정권』, 1968, 488쪽)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보타주를 펼치던 당내 반대파의 일원인 경우가 많았던, 지나치게 열성적인 당 지도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자행된 과잉행위도 있었다. 경험과 간부의 부족, 솔직한 실수들도 한 몫을 했다. 해외 부르주아 언론들에 공명하는 반대파들은 이러한 과잉과 오류에 초점을 맞추고 과도히 확대하여, 전술적 실수를 명목으로 혁명의 전체적 노선을 비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회주의적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고, 소비에트 정권의 대의에 헌신했던 반대파 일원들도 레빈 교수가 기록한 것처럼, 곧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전향한 스탈린 반대파들은 “[스탈린이] 일을 잘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레빈이 추정한 “가장 총명한 간부들”은–”좌익”과 우익 기회주의 분파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와 니콜라이 부하린의 보다 계몽된 추종자들–스탈린의 “철의 손”과 “압제적인 방법”에 대해 불평했지만, “이 남자의 불굴의 의지로 인해 러시아가 현대화되고 있다. 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곧 번영과 행복을 전방위적으로 증가시킬 것”을 인정했다.
1933년 말, 신경제정책의 긴 여정이 완수되었다. 국가자본주의를 향한 초기의 후퇴, 강화,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한 총공세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농민의 3분의 2가 집단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민간산업은 거의 사라졌다. 국유산업에서는 사회주의적 원칙이 우위를 점했고, 제1차 5개년 계획은 예정보다 일찍 성공리에 완수되었다. 실업은 폐지되었다. 16년간의 통치 이후,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은 물려받은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를 개조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토대, 즉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934년 1월 제17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사회주의적 경제구성체가 "이제 도전받지 않는 지배를 유지하며, 국가경제 전체에 유일한 지도력을 행사"한다는 획기적인 선언을 할 수 있었다. (저작집, 13권, 316쪽)
소련이 새로운 경제발전의 시대에 진입하던 당시,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은 대공황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1931년 10월 혁명 14주년을 맞아 『프라우다』의 1면에 실린 사설은 소비에트 권력의 업적과 자본주의 세계의 고통을 날카롭게 대조한다.
"프롤레타리아여! 만국의 노동자여! 오늘날 광장과 회의, 시위와 집회에서 그대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경제체제가 이룩한 결과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억하라 (...)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 수천만의 실업자가 있다. 세계공황은 심각해져가고 있다. 수천이 파산하고, 수만이 폐업했다. 빈곤과 굶주림, 식민지의 약탈은 증대해가고 있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준비되고 있다.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 산업이 강력하게 성장하고,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을 기반으로 대규모의 기계화 농업이 창출되고, 노동인민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고 있다. 볼셰비키당과 레닌주의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인민들이 결집하고 있다."(보리소바 등에서 인용. 『소련 노동계급사 개요』 , 1973)
이 새로운 시기에 소련 사회주의의 승리의 행진은 자본주의 세계의 암울함 가운데 나타난 등불과 같았다. 오늘날 부자연스럽고 진부해보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의기양양한, 찬란한, 눈부신" 같은 표현들이 소련에 살거나 소련을 직접 본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던 시기였다. 맑스가 예언한대로, 자본주의적 관계의 외피는 산산조각이 났고, 사회적 노동의 무릎에서 잠을 자고 있던 엄청난 잠재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이 수십년간 채찍질하며 살려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던 막대한 생산력이 갑자기 해방을 되찾았다. 마치 생산적인 에너지로 나라 전체가 폭발한 것만 같았다.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고 돌진하고, 날아올랐다. 소련은 신화 속의 투덜쟁이 난쟁이 같은 비판자들을 압도했고, 전세계 부르주아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는 억압받고 착취받는 인민들이 일단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펼쳐지게 되는 웅장한 미래를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내 보인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성과들은 서서히 잊혀질 위험에 처해있다.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 시기는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역전 속에서 사회주의 시기에 존재했던 것들을 가리고, 성취 뿐만 아니라 그 성격까지 의식에서 지워버리려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련은 정말 사회주의였던 적이 있었을까? 만약 소련이 사회주의였다면, 어떻게 이후에 자본주의로 전환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소련 사회주의를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사회주의 경제
1930년대 초, 소련공산당은 소련이 사회주의 경제 발전기에 접어들었음을 선언했다.
이제 소련은 레닌이 1921년에 말했던 것처럼, “소비에트 권력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성취할 것이라는 결정을 함축하는 것이지, 새로운 경제 체제가 사회주의적인 질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미래적인 의미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적이었다.
1930년대의 경제질서를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맑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옛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특정한 기본적인 추론들을 이끌어냈고, 이러한 추론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부터 맑스주의자들에게 일반적인 지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1930년대 소련에서 시작된 것은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극복된, 그리고 계급과 국가가 없는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당시의 소련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소련은 오히려 맑스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라 불렀던, 자본주의의 끝과 완전한 공산주의의 시작 사이의 긴 과도기였다. 따라서 소련에는 자본주의라는 가까운 과거의 흔적과 먼 미래의 씨앗이 모두 내포되어 있었다.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용법에서 이 첫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라 불렸고,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사용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은 이 문제를 다루는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 5장에 인용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타강령 비판』에 따르면 사회주의 시기의 노동계급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인 국가와, 옛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특정한 경제적, 법적 관계를 제거할 수 없다.
소비에트 국가는 당시에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남아있었다. 1917년[10월 혁명]과 내전, 네프와 농업집산화의 전투를 거치며, 그 사실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다. 싸움에서 패배하고 재산을 몰수당해 원통해하는 수십만의, 어쩌면 수백만 명의 전 쿨락들, 네프맨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구정권의 관료들, 관리자들, 특권을 누렸던 지식인들과 그 가족들, 자식들, 그리고 그 주위를 기웃거리는 이들에게는 소련공산당과 경쟁하는 정당을 조직할 '자유'를 해외 망명지에서 목소리 높여 말하는 트로츠키의 요구를 실행하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은 억압하는 권력으로서의 국가가 "시들어버리도록" 만들 의도가 전혀 없었다.
"대다수의 인민들을 위한 민주주의, 그리고 무력을 통한 억압, 즉 착취자들과 압제자들을 민주주의로부터의 배제하는 것" 이것이 바로 레닌이 맑스를 따라, 사회주의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역할로 제시한 것이었다. 당은 그러한 계획을 지지했지만 장기적으로 큰 비용이 드는 정치적 오류를 범했다.
경제적 관계에 관해 맑스와 레닌은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것이 아직 사회주의적 분배의 구호가 될 수 없다고, 앞서 언급한 문헌들에서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는 공산주의적 미래, 즉 생산력의 발전이 희소성을 폐지하고, 사회적 의식과 뿌리깊은 욕망, 순수한 습관의 힘이 모든 노동자로 하여금 능력에 따라 매일의 생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할 때, 그렇게 함으로서 물품의 소비가 필요에 따라 공공상점에서 자유롭게 가져다 쓰는 것이 될 때를 위한 구호였다.
[사회주의적 분배의] 구호는 차라리 “각자가 행하는 노동량에 따라”가 되어야 했다. 이는 상품을 자유롭게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지불하여 교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직장에서 급여를 받는 것 역시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생산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존재했었던 상품-화폐의 직접교환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직종과 직급에 따른, 그리고 같은 직종이라도 작업 속도에 따른 임금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최고임금과 최저임금 사이의 격차는 1930년도에도 증가했었는데, 이는 1929년과 1940년 사이에 농촌으로부터 전체 산업프롤레타리아트의 3배를 상회하는 막대한 수의 새로운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임금불평등이 증가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임금불평등 그 자체와, 그것이 기대고 있는 상품교환관계를 통한 소비재의 분배는 사회주의 이론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 있어 맑스와 레닌은 명확하게 말한 바 있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자들이 점유한다는 불공정을 끝낼 수 있지만, “”수행한 노동량에 따라”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소비수단을 분배한다는, 그 이상의 불공정까지 일거에 제거할 수는 없다.” 사회의 사회주의적 질서는 더 높은, 공산주의적 질서와 달리 “분배에서의 결함과 ‘부르주아적 권리’의 불평등을 제거하지 못하며, 생산물이 ‘수행된 노동량에 따라’ 분배되는 한 이 불평등이 계속 지배한다.” (『국가와 혁명』, 5장 3절, 157쪽-한국어판 재인용)
따라서 소비재의 분배에 관련하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진보는 임금 불평등을 철폐하는데에 있지 않다. 차라리 사회주의가 폐지하는 것은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소비자들의 계급으로, 이들은 임금이 아닌 이윤, 즉 자신의 노동이 아닌 다른 사람의 노동에서 오는 막대한 소득을 얻는다. 이러한 사회적 계층은 소련 사회주의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다시금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소련에는 광범위한 상품교환관계가 존재했고, 이는 국영 소비재 공장의 생산물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에서 생산되는 식료품의 대부분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맑스와 레닌이 “”부르주아적 권리의 협소한 한계”, 즉 다른 사람보다 반시간이라도 덜 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샤일록처럼 냉혹하게 계산하게 만드는 저 협소한 한계”(같은 책, 161쪽에서 재인용)라고 불렀던 것들이 자라나는 온상였다. 이는 과거가 남긴 흔적이자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길의 장애물, 자본주의 복원의 잠재적인 중핵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소련의 경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구체적인 특징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다른 생산의 역사적 형태를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전에도 화폐와 상품이 많은 형태의 사회에서 다각도로 존재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생긴다.”(자본 1권 상, 224쪽 김수행판에서 재인용)
맑스는 이후 같은 저작[자본 I]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폐와 상품 그 자체가 결코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듯이, 생산수단과 생활수단도 결코 처음부터 자본은 아니다. 그것들은 자본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전환 자체는 일정한 사정 아래에서만 가능한데, 그 사정은 요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상품소유자들이 서로 마주하고 접촉해야 한다. 한편은 화폐·생산수단·생활수단의 소유자들인데, 그들은 그들은 타인 노동력의 매입을 통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가치액을 증식시키기를 열망한다. 다른 한편은 자유로운 노동자,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 따라서 노동의 판매자들이다. (...) 상품시장의 이와 같은 양극분화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 조건들이 주어진다. 자본주의체제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의 소유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자기 발로 서게 되면, 자본주의체제는 이 분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확대되는 규모에서 재생산한다.” (자본 I하 978-979 김수행판 재인용)
레닌도 비슷하게,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즉 몰수는 단순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에 필요한 조건을 구성한다.) (...) 국내시장은 (...) 상품생산이 생산품에서 노동력으로 확장됨에 따라 확산되었고, 후자[노동력]가 상품으로 변형되는 것에 비례해서만 자본주의가 국가 전체의 생산을 포괄할 수 있게 되며, 이는 주로 생산수단에 기반하여 발전된다” (선집, 3권, 68-69쪽)
따라서 특정 사회가 과학적 의미에서 자본주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소비재가 상품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뿐만 아니라 (이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직접생산자의 착취에 기반하는 상품교환이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근본적으로 아우르고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직접생산자들인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생산수단이나 노동력 모두가 상품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적 권리”가 살아남았거나 불평등과 불공정이 아무리 심해도 그러한 사회를 자본주의라 규정할 수 없다.
반대로, 만약 직접생산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결과적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상품으로서 교환된다면 사회복지 혜택이나 국유화, 과도한 폭리에 대한 법적 제한, 개선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감추거나 수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발전의 좌우전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적이지만 필요충분적인 자본주의의 특징을 확고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자본주의며 사회주의인지를 다루는 문헌들에서는 피상적인 정의나 반쪽짜리 진실, 관련 없는 개념들이 과도하게 존재하는데, 모든 것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역사의 과정이나 현재의 상황을 신비화하거나 왜곡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6. 새싹
1920년대와 1930년대 소련의 역사는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에 다시 결합시키기 위한 긴 행군과도 같았다.
이는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생겨난 농민과 토지, 직조공과 베틀 사이의 거대한 역사적 분리를 철회하기 위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질서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보편화되는 이러한 균열은 수백만의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과 상대적으로 한줌에 불과한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창조하고 재창조했다. 이러한 분리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특징짓고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구분될 수 있도록 하는, 한 쌍의 상품 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노동력 시장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판매자이고, 자본가는 구매자의 역할을 한다. 생산수단 시장에서는 자본가들끼리 서로 사고 파는 역할을 한다. 일단 이러한 근본적인 균열이 멈추게 되면, 이 시장들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버리며, 단계적으로 사회적 재산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향한, 그리고 사회주의 시기 소련의 대략적인 발전 경로였다.
소련 정권은 노동계급과 생산수단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을까? 분명히, 노동자 국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전 과정에 있어 정치적인 토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국유화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서류상의 “사회주의”일 뿐이다. 사실 많은 경우, 국유화 법령은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공장 압류만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연이어 몰아치는 대중의 주도력과 운동의 파도는 소련 사회의 사회주의적 변혁에 박차를 가했고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소련 노동계급이 선도한 초기의 혁신적인 대중운동 중 하나는 수보트니키(Subbotniks), 또는 “공산주의 토요일”이었다. 1919년 5월 모스크바-카잔 철도의 주요 수리소에서 노동자들의 주도로 조직된 것이 그 처음이었다. 정규근무를 마친 후 자발적으로 그리고 무보수로 일했던 노동자들은,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적들에 맞서 소련 정권을 구하고자 정치적 영감 하나만으로 고군분투했다. 주말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보여준 수보트니키 기간동안의 생산력은 정규 근무시간때보다 두세배 가량이나 높았다.
“공산주의 수보트니키는 공산주의의 실질적인 시작으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적은 레닌은, 궁극적 목표인 무계급사회를 향한 사회적 발전과정의 현재적 단계를 앞서나가는 “새싹” 중 하나로 수보트니키를 규정했다. 지역에서 주도한 최초의 시도에 이어, 당은 내전기 내내 전국적인 수보트니키를 훌륭한 성과로 조직해냈고, 그러한 실천은 계속하여 되살아났다. 192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형태의 수보트니키인 보스크레스니키(Voskresnik)가 생겨났는데, 이는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계획된 대규모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행된 자발적인 초과노동이었다. 수보트니키처럼 이러한 계획은 당과 정부언론에 의해 빠르게 대중화되었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돌격반”(udarnik) 운동은 1926년 수보트니키 운동이 시작된 곳과 같은 철도작업장에서 시작된것으로, 수보트니키 정신을 정규 근무시간에 도입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는 동시에 노동을 재조직하고,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분업 방식을 폐기하고, 생산성을 크게 증대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콤소몰(청년공산주의자동맹)의 활동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이끄는 이 운동은 생산량 증가 뿐만 아니라 생산회의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열의까지 이끌어냈는데, 이 생산회의는 기존 작업방식의 모든 측면을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주도권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작업방식을] 재구성하였다. (보리소바 등. 『소련 노동계급사 개요』 , 121-124쪽)
1935년에 시작된 스타하노프 운동은 돌격반 운동의 후신이었다. 돌격반과 마찬가지로 스타하노프 운동은 더 높은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한 분업의 재조직과 협동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스타하노프 운동은 생산의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방식과 기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노동자 스스로 기계와 기계화공정을 재설계하고 혁신한 것이–스탈린이 보수적인 공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1952, 28쪽)에서 여러차례 지적했듯이–이 운동의 주안점이었다. 미국의 부르주아 학자인 데이비드 그래닉(David Granick)은 자신의 저서 <붉은 집행부>(1960)에서 스타하노프 운동이 능률촉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서방의 비난에 맞서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주로 이는 노동자들이 개선된 기술을 사용하고 새롭게 혁신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운동의 강조점은 철저히 현대적이었고, 땀 흘리기보다는 합리화에 강조점을 두었다.”(213쪽) 공학자들과 경영자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스타하노프 운동 역시 당에 의해 대중화되어 산업, 광업, 운송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주도성은 노동생산성을 극도로 빠르게 증가시켰다. 1929년에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노동생산성은 41% 증가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동안 노동생산성은 82% 증가했다. 제3차 5개년 계획 동안에는 이 높은 지반 위에서 33%나 더 성장했다. (보리소바, 206쪽)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이 더 많은 노력(속도 상승)을 하도록 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 하의 기술 “합리화”가 낳은 주요한 결과이기도 한 실업은 소련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생겨난 기발하고 효과적인 형태의 대중적 주도성은 “사회적 예인선”(obshchestvennyi buksir)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보리소바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도네츠크 분지에서 아르템 광산 노동자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한 생산 회의에서, 계획에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이웃 광산의 노동자들에 대한 것으로 논의가 옮겨졌다. 베테랑 노동자이자 혁신가였던 한 사람이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냈다. 한 때 해군에서 복무했었던 그는 때로 자신의 힘으로 항해할 수 없는 배들에게 예인선과 바지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이웃 광산의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해 보는걸 제안했다. (...)”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번째 “예인선 팀”이 뒤쳐진 광산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적대적인 인사말을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당신들이 할 일은 없소. 도움 없이도 잘 할 수 있으니 집으로 되돌아가시오.””
“아르템 광부들은 “우리는 잡담이나 나누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라, 동지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온 것이오. 우리는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여기 머무를 것이오”라고 응수했다.”
“그들은 당조직의 도움을 받아 주변의 선진 노동자들을 끌어모았고, 사회주의적 경쟁을 계속해나갔다. 뒤쳐졌었던 광산이 단기간에 계획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5개년 계획이 끝날때쯤 사회적 ‘예인선’은 많은 산업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48쪽)
그보다 더 철저한 형태의 대중적 주도성은 5개년 계획을 비판하고 직접 수정안을 작성하는데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항계획’(counterplan, Встречный план)이라 불렸다. 보리소바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30년 여름에 처음으로 레닌그라드의 칼 맑스 작업장의 돌격반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레닌그라드 즈나미야 트루다(Znamya Truda) 공장의 돌격반원들이 낸 성명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성명은 1930년 4월 9일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에 ‘즈나미야 트루다 공장의 돌격반원들이 산업 및 재정에 관한 확장된 대항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의 엘렉트로자보트 공장의 노동자들은 기업 전체와 상점 및 선반에 대한 대항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대항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하면서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생산의 조직과 관리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계획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해 이 분야의 전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47쪽)
대항계획은 스타하노프 운동보다 더 자주 공학자들과 관리자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들은 부르주아적 관점을 기본적으로 유지하거나 습득하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자본주의 국가로 망명했고, 정보기관과 학자들은 소련의 상황에 대한 내부적 정보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런 학자 중 한명인 요제프 베를리너는 (1957년의 연구 <소련의 공장 및 관리자>에서) 변절한 공장 관리자들이 대항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노동자들은 생산회의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소위 ‘대항계획’이라 불리우는 것이 시작되었는데, 매우 조잡한 형태였고 빠르게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들은 계획을 읊어댔다. 여기, 최고관리자는 이런저런 정보와 지표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를 충족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것들이 완수되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선동은 계속된다. 우리가 이걸 해야하며, 목표를 달성하고 초과달성해야 한다. “저는 노동자들이–몇몇 공학자들이나 당조직의 대표자들이 말한 것이다–대항계획을 제시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모든 이들이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어떤 ‘경박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탈린 동지께 100%를 초과달성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원료나 공급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은 일어나서 “우리는 모두 100%를 달성할 것을 약속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150%를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목표는] 점점 더 높게 쌓여갔고 공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머리를 긁적거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항계획’이라 불렸고, 새로운 사회주의 도덕이자 더 높은 사회주의적 열정이라 불렸다. 이 모든 것들은 상부로 올라갔고, 당신도 알겠지만, 순전한 당혹과 완전한 혼란이었다.” (275쪽)
우월주의(chauvinism)와 경멸, 비아냥이 넘쳐나는 설명을 제공한 이 공장 관리자는 노동자들의 열정이 ‘효율성’이나 ‘합리성’에 당연스럽게도 모순된다고 보았다. 원료에 대해서는, 공급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노동자들의 열정이 원료와 자재를 공급하는 다른 공장들로 확산되었을 때, 연쇄 반응이 일어나 생산에서의 도약이 전면적으로 성취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협소한 관료적 정신은 부르주아 소련학자 M. 레빈이 1968년의 연구 <러시아 농민과 소비에트 권력>에서 말했듯, 중앙국가계획위원회 고스플란(Gosplan)의 사무실에 자신의 신봉자들을 두고 있었다. 레빈은 “처음부터 고스플란은 비합리적 요구들의 홍수를 저지하기 위한 기구였다”고 적었는데, 이러한 요구들은 생산량을 크게 증대시켜야 한다는 기층 공장들의 요구가 중앙위원회에 도달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이러한 지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고스플란 내부에서 어떤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레빈은 “계획자들이 제동을 걸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민적 용기’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 계획자들은 지나친 논쟁이나, 기술적 또는 다른 지반에서 반대를 제기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들은 “온건한 이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는 것보다 급격한 성장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사적으로 말했다.” (346쪽)
당 지도부는 고스플란의 ‘제동수’들 중 가장 노골적인 이들을 숙청하면서, 생산의 지점에서 대항계획에 관여하고 있는 소위 ‘경박한 여자들’과 ‘우유 짜는 여자들’의 편을 들었다. 루간스크 공장의 돌격반이 경제 전반에 대한 대항계획의 함의를 이끌어내며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 완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중앙위원회는 재빨리 움직여 이를 전국에 송출했다.
이처럼 당이 보편화하고 대중화한 노동자들의 주도성 덕분에, 제1차 5개년 계획을 통한 생산력의 경이로운 발전은 4년 3개월 안에 이루어졌다. 이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어리둥절해 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승리였고, 그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화려한 발전이 뒤이어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에 불가사의한 것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노동계급과 생산수단 사이의 재결합이 낳은 결실이었다. 대중적 주도성과 대중운동들은 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생산관계를 반영하고 심화하는 것이었고, 그 정치적 전제조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그러나 소련 사회의 모든 이들이 대다수의 근로인민과 당 간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의 승리에 환호하고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