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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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3)

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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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르주아적 권리

1930년대 중반의 소련은 승리와 단결의 정신이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뤘다.

소비에트 연방의 주요한 특징들은 국가권력이 노동자계급에 의해 확고히 통제되어 있었다는 것과, 당 내에서 대규모의 반대파 블록이 폭로됐고, 패배를 맞이했다는 사실, 당의 통일성이 강화됐고, 농업의 집산화를 통해 노동자-농민의 동맹이 확고하게 자리잡혔으며,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토대 위에서 거대한 진전을 일궈냈다는 데에 있었다.

1934년 17차 당 대회에 생기를 불어넣은 이러한 분위기는 역사적인 1936년 쏘련 헌법의 채택으로 이어졌고, 1937년 소비에트 정부 기관들의 광범위한 민주화와, 1939년 18차 당 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제의 강화를 위한 기반을 확립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지배적인 분위기의 기저에는 어떠한 거짓도, 위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이 오늘날 승리를 일궈냈듯이, 정치와 경제, 사회 및 문화의 영역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일궈낸 승리들은 명백하게도 진정성을 담지하고 있었다.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소비에트 권력이 거둔 승리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가질만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 사회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1936년 헌법 채택의 기념비적인 채택으로부터 약 20여 년 만에 전반적인 성격의 변화를 맞이했다. 국가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로 변질됐고, 당은 옛 성격을 잃었으며, 노동자-농민의 동맹은 중대한 상흔을 겪었다.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는 심각하게 훼손당했고, 기층부 대중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을 추동했던 본연의 위치로부터 괴리되어 갔다.

쏘련이 한때 사회주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단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소련이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대립물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자본주의화의 근원을 파악하며, 자잘한 양적 변화의 점진적인 축적이 사회성격의 급격한 전환으로 이어지는 지점을 이해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 복구의 문제를 다룬 중대한 논설이 최근 중국의 이론지 ≪홍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오늘날 중국 공산당의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고 해도, ≪홍기≫의 논설은 오늘날 세계 각국의 맑스-레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있어서도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명백한 귀감으로 되고 있다. ≪린뱌오 반당파의 사회적 기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쓰인 야오웬위안의 논설은 쏘련의 자본주의적 복고에 대한 편협하고, 관념론적이거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해석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오늘날의 맥락에서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핵심 인사이자 오랜 공산주의자였던 야오웬위안은 “린뱌오 반(反)당파가 타도된 지주와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무너뜨려 부르주아 독재를 복구시키기 위해 반동파들의 열망을 옹호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고 썼다.

“린뱌오 반당파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반대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제도를 향해 뿌리 깊은 증오심을 표출하면서, 이를 ‘봉건전제정’으로 폄하했다.”

흐루쇼프 역시 1956년에 소련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자마자 쓰딸린 시기 쏘련에서 실시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맞서 린뱌오와 사뭇 유사한 중상을 퍼부었다.

야오웬위안은 곧이어 1971년에 쏘련행 비행기로 급하게 탈출하던 도중 쿠데타 주도자의 생명을 앗아갔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냈던 군사쿠데타의 일환으로서 린뱌오 반당파의 당 내부의 음모와 모략을 재차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련의 모든 사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라는 거대한 두 적대계급의 생사를 건 투쟁을, 장기간 동안 지속될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타도된 반동적 계급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당 내부에서(그리고 사회 내부에서도) 자본주의로의 복고를 향한 갈망을 실천 속으로 옮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다했던 부르주아의 대변인들이 출현할 가능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스스로를 방어하며, 반동들의 음모들을 철저하게 분쇄하고, 기강의 문란함을 한 치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야오웬위안의 논설은 이내 익숙한 논제로 초점을 옮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설은 더욱 심도 있게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만 인식하는 것―즉, 옛 부르주아의 잔재들이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관점에만 시야를 가두는 것―”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린뱌오 반당파는 자본주의의 부활을 위해 타도된 지주들과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 수권을 찬탈하기 위해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던 부르주아적 요소들의 희망도 (마찬가지로) 대변했다. 반당파의 당여들은 새롭게 탄생한 부르주아적 요소들의 일정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실제로 그와 같은 요소들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이들의 표어들 중에서 상당수는 부르주아적 요소들과, 자본주의 노선을 채택하기를 원하는 이들의 증대하는 자본주의적 요구들을 모두 포괄했다. 자본주의 복고의 문제에 있어 추가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소생산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를 지속적으로, 쉴 새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배양시킨다’고 논했다. 이는 또한 일부 노동자들과 당원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내부에서도, 국가기구의 기관원들 사이에서도 부르주아적 생활 양식을 흠모하는 이들은 여전히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부르주아적 권리가 신흥 자본가들의 출현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다면, 부르주아 세력의 존재와 국제적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의 여파는 오늘날 부르주아적 분자들의 정치적, 사상적 토대가 되고 있다.”

“부르주아적 권리”라는 표어는 맑스의 ≪고타강령비판≫에서 비롯된 용어로, 형식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관계를 일컫는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노동량에 따라”에 입각한 사회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 상이한 노동량을 수행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평등을 양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본주의적 노동조합의 연공서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후임자 우선해고” 원칙도 공정과 기회의 형식적 평등을 강조하지만, 고용 절차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야오웬위안은 곧이어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서 부르주아적 관계들의 잔존 가능성에 대한 레닌과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한다. (이에 관해서는 본서의 제 5장을 보라). 여기서 중차대한 요소는 경제적 토대에 대한 강조이다. 신흥 부르주아지가 인민들의 사고에 남아있는 옛 사조의 기반 위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관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맑스는 인민의 의식이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지의 사실로 남아있다. 부르주아적 사상들이 단지 간신히 연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재생산되어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면, 이는 사회적 존재에 부르주아적 사상의 토대가 여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야오웬위안은 이렇게 말한다. “린뱌오 일당에 의해 제시된 강령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요, ‘초인’을 자처했던 이들의 사고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연원한 것도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었다.”

“레닌과 마오쩌둥 주석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장구한 과정 속에서 세 가지 차이들, 즉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와 도농격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서서히 줄어들고, [임금] 차등의 감소를 유발하며, 더 나아가 차등의 철폐를 위한 물질적, 사상적 기반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분배와 교환의 법칙이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남아있는 한 잔존할 수밖에 없는 부르주아적 권리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반대로, 만약 부르주아적 권리가 성장한다면, 양극화 등은 필연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고, 소수의 인자들이 분배의 과정 속에서 합법적 통로와 수많은 비합법적 절차를 가리지 않고 늘어나는 상품과 재화를 다수로부터 뜯어내며, 부의 축적과 ‘물질적 자극’에 의거한 개인적 명망, 성공과 연관된 자본주의적 사조들은 빠르게 확산되어 갈 것이다. 공공의 재산이 사적 소유로, 투기와 사기,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절도와 뇌물수수가 치솟을 것임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자본주의적 상품교환의 철칙은 정계로, 심지어는 당 내부로 파고들어 사회주의 경제를 전복하고, 자본으로의 상품과 화폐의 전화와, 노동력의 상품화와 같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있어 청신호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수정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상당한 단위들과 부서들에서 소유관계의 성격 변화가 일어나고, 부르주아적 권리가 강력해질수록, 근로인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다시 한 번 재현될 것이다.

“소수의 신흥 자본가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와 근로인민을 공공연하게 배반했던 출세분자들은 결과적으로 당원들과 노동자들, 부유한 농민들과 국가기구의 관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노동자 동지들은 시의적절한 언어로 이렇게 표현했다. “만약 부르주아적 권리가 제한되지 않는다면, 이는 사회주의의 발전을 후퇴시키고,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부르주아의 경제적 역량이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할 때, 이들의 첨병들은 정치권력을 요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타도,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의 완전한 변화를 촉구하며,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복구시켜 가꿔나가고자 할 것이다. (...)”

야오웬위안은 또한 구시대 부르주아지의 잔재와는 별도의 층위로서, 새롭게 출현하고 있었던 부르주아적 요소들의 자본주의 복구를 향한 기도에 내재된 특징들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부르주아 사상과 부르주아적 권리들의 침식으로 인해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적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협잡꾼들과 출세주의자들의 정치적 특성을 함께 공유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자본주의적에 친화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이들은 사회주의적 표어들을 항시적으로 표방한다. 과거에 몰수됐던 모든 생산수단을 다시 회수한다는 목표를 내걸지 않는 이상, 기존에는 소유해보지 못했던 생산수단을 장악한다는 목표를 위해 활동하기 때문에, 이들은 누구보다도 탐욕에 가득 차 있으며, 국영 기업소(전인민적 소유: 주)나 집체단위(집단적 소유: 주)에 귀속되어 있는 단 한 뼘의 부(富)라도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사적 소유로 전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야오웬위안은 자본주의의 복구를 피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와 자본주의를 배양하는 토양을 없애는” 것이 실질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신흥 자본가들을 (...) ‘적기에 의식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역량’의 함양도 필수적이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야오웬위안은 스탈린이 지도자를 맡았던 당시 소련 공산당(CPSU)의 치명적인 실수가 사소한 곳들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했다. 소련 공산당은 신흥 자본가들을 육성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반”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했고, 당의 지도권이 신흥 자본가들에게 넘어간 시점까지도 부르주아적 권리가 지녔던 위험을 제때에 포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절실하게 요구된다.

8. 구시대의 지반

사회주의 소련 사회의 지반 내부에서 암약했던 신흥 자본가들의 점진적인 출현과 성장은 주로 조용하고도 은밀한 절차―오늘날 그 민낯까지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를 통해 비밀리에 진행됐다.

소련에서 이후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했던 공통의 경제적 조건과 물적 토대를 조명하는 유용한 자료들은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점차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체적인 조직을 결성하며, 권력을 향한 욕망에 앞서 집단적인 자기의식을 획득했던 일련의 절차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이상의 과정들은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건 하에서 잠재적 부르주아지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목표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와 목적의식적인 활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극도의 효율성을 발휘했던 비밀경찰은 극단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음모―역사적으로 부르주아 정보기구의 장기였던―조차 만들어낼 수 있었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억압받는 계급이면서도, 태동기에 있는 소비에트 자본가들의 사고를 관통했던 신빙성 있는 일체의 기록물들을 발굴하리라는 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지의 은폐된 사조들과 골방의 은밀한 대화는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 연설의 내용들과, 권력 장악 이후 취했던 조치들의 성격으로부터 단지 사후적으로(ex post facto)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실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옛 사회의 “잔재”들―1917년 이전에 존재했던 부르주아지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걸쳐 쓸려나간 네프맨, 부농들―이 1953년 스탈린 사후에 일어났던 변화들에서 일체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네프맨과 부농, 구시대의 자본가들 중에서 수많은 이들은 소련에 남아있는 한 생물학적으로 1950년대 중반에 정치적 중책을 맡기에는 여전히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상황은 옛 지배계급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적 출신 배경은 당원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했고, 당 지도부의 입장에서 자타공인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금기(禁忌)였다.

미국의 독점재벌이자 외교관인 윌리엄 애버렐 해리먼(W. Averell Harriman)은 1959년 소련 방문 도중 당과 정부의 지도급 인사들과의 대화를 회고한 책(≪러시아와 평화를?≫, 뉴욕, 1959년, 17쪽.)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는 흐루쇼프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본래 평범한 노동자였소. 목동으로 인생의 첫 순간을 보냈고, 소치기가 된 후에는 혁명 이전까지 머문 광산에서 끝네 직업을 구했소.”

아나스타스 미코얀 부수상도 이에 질세라 프롤 코즐로프 부수상과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성 장관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소.” 코즐로프 역시 “나도 한때는 집 없는 부랑자였소”라고 회고했다. 담화 내내 무뚝뚝한 침묵을 유지했던 그로미코조차도 “나도 빈곤한 가정에서 시간을 보냈었지”라고 말문을 열며 유년 시절을 회고했다. 나는 이에 흐루쇼프와 미코얀, 코즐로프, 그로미코한테 그들 모두가 오두막집 출신임을 호언장담하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방불케 한다고 말하며 운을 뗐다.

스탈린 사후 신흥 자본가들의 권력 찬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구시대에 타도당한 부르주아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사회주의 내부에 숙주처럼 성장했던 신흥 자본가들의 성장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러한 자본가들이 어떻게 성장하기 시작했는가?

사회주의 하에서 계급으로 조직된 자본가계급의 산실은 농업에서, 특히 집단농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비록 소련의 집단농장은 레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를 지속적으로 쉴 틈을 주지 않고 대규모로 양성한다”고 지칭했던 소규모 생산의 온상으로 더 이상 규정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지반 위에 있는 집단농장은 여전히 위험성을 충분하리만큼 내포하고 있었다.

문제는 개인 텃밭에 국한되지 않았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집단농장의 집단적 소유에 자체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전체 농토와 집단농장 농민들에 의해 활용됐던 대규모 농기계(트랙터 · 콤바인과 같은 농기계들)를 소유했다는 시각에서 볼 때 집단적 소유는 사회주의적 소유에 해당됐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제한들과 부가적인 조치들(가격 통제 등)을 떠나서, 개별 집단농장은 서로 다른 집단농장들과, 그리고 국가와의 매개 속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사적 기업처럼 운영됐다. 그러나 수천 단위의 농민들이 단일한 집단농장에 결합했다고 해도, 개별 집단농장은 여전히 국영부문에서, 특히 공업 부문의 규모와, 생산의 통합 수준에 비해 소상품생산과 무정부적 생산을 상대적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집단농장과 집단적 소유와 연계된 상품-교환 관계에 대한 명백한 경고들은 스탈린의 생전 마지막 저작인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1952)≫에서 포괄적으로 다뤄졌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나라 생산력의 강력한 발전을 오래 전부터 방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전체 국민경제, 특히 농업에 대한 정부 차원에서의 계획의 극대화된 발전에 장애물을 만들어내는 만큼 용인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나라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할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당면적 임무는 집단농장의 소유관계를 공적 소유로 점진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상품의 유통을 대체하여 생산물의 교환을 서서히 도입함으로써 제반 모순들을 없애는 과제에 있다.” (북경, 외문어출판사 外, 70쪽).

우리는 소련과 공산당 내부에서 부르주아적 분자들이 스탈린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1953년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태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들은 (같은 책에서) 스탈린이 “자본주의의 복원”(같은 책, 96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기계와 트랙터를 집단농장에 팔자는 발상에 대한 엄중한 반대에도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않았다. (수년 후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들≫에서 상당한 지면을 별도로 할애하여 비판했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똑같은 제안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흐루쇼프도, 다른 고위급 당원들도 이 당시에는 사니나(Sanina)와 벤제르라는 무명의 경제학자들의 편지에서 스탈린에게 제시됐던 안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호적인 입장을 개진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저작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회가 개최됐고, 전당적인 토의에 부쳐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흐루쇼프가 1952년에 일찍이 사니나와 벤제르를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했다면 본연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흐루쇼프와 그 일당은 스탈린의 견해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바로 이것이 수면 위로 점차 부상하고 있었던 소비에트 부르주아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그 이후의 시대에서 농업발전의 막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중반 당시 일련의 사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지도세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명백한 산실이었던 농업 부문에 국한되지 않았다. 농업은 흐루쇼프의 전문적인 분야였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 권력을 장악했던 신흥 부르주아 지도세력의 다른 구성원들은 주로 농업보다 공업과 산업의 전문적인 분야들에서 당의 중책을 맡았다. 

소련의 전문가들과 경영진들, 특히 기업소 관리자들의 입지는 사회주의 하에서 극도로 양면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영자들보다도 막중한 책임을 지녔지만,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영자들에 비해 더 많은 권한을 결정적으로 보유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하에서 소련의 기업소 관리자(공장장)는 부기명부의 영역들에서 생산과정의 인간적, 기술적 조직화를 개인적으로 책임졌고 관리했다. 경영의 권한은 레닌에 의해, 1920년대 초반 네프의 첫 번째 단계를 구성했던 여러 조치들과 함께 제시됐던 “일인경영”의 원칙에 의거하여 개인에게 집중됐다. 일인경영은 공장의 동시다발적인 점거와 원시적인 노동자 “자주관리” 하에서 지극히 빈번하게 일어났던 경영의 혼란과 책임의 회피, 생산의 난맥을 극복하기 위해 설계된 원리였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소 관리자의 책임은 소련의 기업소 관리자들이 품목의 생산과 생산의 시기를 세부적인 사항을 통해 규정한 경제계획에 의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법적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사실상 자본주의 하에서 일개 공장장의 책임보다 더욱 막중한 것이었다. 스탈린이 1927년 15차 당 대회 연설에서 강조했듯이 “우리의 계획은 일기예보적인 계획도, 추측이 난무하는 계획이 아니라, 지도기관들이 단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지령적 계획이다.” (≪저작집≫ 10권, 335쪽) 이는 계획의 목표치를 완수하지 못했던 공장장이 법정에 회부될 수 있었고, 의도적인 범죄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생산의 파괴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소련의 기업소 관리자들은 같은 무렵 막중하고 엄중한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장장들에 비해 괄목할 정도로 협소한 권한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소련에서 공장의 관리자들은 노동의 내부적 분업의 상이한 역할들에 노동자들을 배치하고, 지각과 결근을 처벌하며, 결근에 벌금을 물리거나, “노동의 강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공장 관리자들의 결정에 대한 이의를 성공적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를 늘릴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장 관리자들이 보유했던 권한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 즉 노동자들을 자의적으로 해고할 권한을 지니지 않았다. 소련에서 기업소의 관리자들은 실업과 가난으로 노동자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노동력이 다른 품목들처럼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더 이상 취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의 구체적인 의미는 바로 이와 같았다. 노동력의 가격(임금)은 더 이상 산업예비군의 존재로 인해 수축되지 않았고, 상품구매자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됐던 고용하지 않을 권리와 해고할 권리도 마찬가지로 용납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전쟁 시기[제 2차 세계대전을 지칭한다: 역자]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서 직장을 자유롭게 퇴사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공장장들은 제대로 된 사유를 입증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기업소의 관리자들에게는 채찍이 없었으며, 오히려 해고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더군다나, 노동자들은 직권을 남용했던 공장장들을 폭로하기 위한 용도로서 다양한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영국의 부르주아 학자인 메리 맥올리가 ≪소련에서의 노동분쟁(1969)≫에서 밝혔듯, 산업분쟁을 전담했고 노동자들만 유일하게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법정이 곳곳에 들어섰다. 공장장은 피고의 자격으로만 출두할 수 있었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로 심의와 판결의 절차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소련에서의 노동분쟁(1969)≫, 54~55쪽) 노동분쟁의 사례가 재판장으로 상정되기에 앞서, 노동자들이 심지어 작업장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던 지배인에게 누가 진정한 생산의 주인인지 알 수 있도록 만드는 여러 가지 방편들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노동자들이 항의할 수 있는 방편들 중 하나인 생산회의는, 부르주아 학자인 데이비드 그래닉(David Granick)의 저서인 “붉은 행정가들(The Red Executive)”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생산단위의 경영은 노동자의 비판을 억압하기 위한 술책을 향해 훼방을 놓았던 엄격한 이념적, 현실적 장애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한 공장장은 생산회의가 그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심판으로 다가왔다고 (...) 넌저시 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비판을 공개적으로 개진하는 문제에서, 비판을 억압했던 공장장들은 모두 엄중하게 처벌받았다. 공장장은 직책에서 면직될 뿐만 아니라 재판까지 받기 일쑤였다.” (뉴욕, 1960년. 230쪽)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업소의 관리자들에게 부가된 막중한 책임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장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협소한 범위에 국한됐던 권한의 조합은 장기적으로 볼 때 건강한 조치는 아니었다. 공장장들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더 많이 이전시키고,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방편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상술한 문제들에 대한 당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소의 관리자들은 자체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권력을 탈취했고, 동시에 경제계획을 통해 강제됐던 책임과 모든 소임을 벗어던졌다. 기업소 관리자들의 이러한 경향성은 스탈린 생전에 저지됐고 억제됐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적인 지반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새로운 지도부가 당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진 무렵, 유명무실한 권한과 경제계획의 번거로운 업무들을 향한 기업소 관리자들의 억눌린 불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언론에서 일파만파로 유포되기 시작했고, 불평과 불만의 한복판에서 은연 중에 폭발적으로 분출됐던 신흥 자본가들의 요구들도 마찬가지로 전폭적인 지원을 획득했다.

9. 균형의 한복판에서

2차 세계대전의 종전부터 1953년 스탈린의 사망까지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는 강력했고, 이전과 다르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변화가 진행될수록, 견고하게 보였던 외양의 이면에는 반(反)맑스주의 · 반(反)레닌주의적 반혁명 강령을 체화한 일군의 지도자들에 의해, 사회주의의 보루―이 당시 맑스레닌주의가 지지했던 모든 것의 상징―를 별다른 피해 없이 장악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존재했다.

현재 우리의 당면 임무는 공산당의 노선 전환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개별 사건들의 진상을 밝혀줄 중요한 문건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접근할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사건들은 비밀리에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시야에서 사태의 추이를 직시함으로써 수정주의라는 역사적 전복을 야기했던 네 가지 원인을 진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수정주의화의 첫 번째 국면은 본서의 전반부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과 정부의 상층부 파벌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사회의 내부에 근본적으로 존재했던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유산들, 즉 옛 사회의 모반에서 기인했다. 집단농장의 구조에서는 앞서 지적했듯,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동시에 이윤지향적인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무정부성의 객관적 토대가 잔존했다. 마찬가지로, 공업생산의 측면에서 개별 공장장들과 전문 기술자에게 부가된 책임의 지나친 집중은 후자로 하여금 일종의 우월감과 권력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을 발동시켰다. 사회적 생산의 두 가지 주요 부문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했던 인자들은 손가락 한 마디를, 심지어는 발가락을 움직여도 자본주의, 또는 준(準)자본주의적 기반 위에서 근본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더욱 나아가고자 했던 열망은 이들의 생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적, 준(準)자본주의적 발상의 대다수―적어도 표면적인 측면에서―는 빠르게 진압됐지만, 모습을 감춘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고, 소수의 의중 속에서 마침내 지배적인 풍조로 변모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나왔기 때문에, 구시대의 사조들 뿐만 아니라 옛 지반의 상당수를 포괄했던 사회주의 사회에서 피해갈 수 없는 불가피한 수순이다. 노동계급조차도 심지어 사회주의 사회에서 맑스가 “부르주아적 권리”라고 말했던 잔재들에 의해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소련에서 노동자 개개인의 추가급여와 갖은 특전들로 과도하게 지탱됐던 임금 규모의 차등은 집단적 열정의 훌륭한 정신과, 소련의 노동계급이 탁월한 기지를 발휘하여 보여준 새로운 노동관에 이반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그러한 잔재들이 당과 정부의 상층부는 물론, 여러 기관들로도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층에 대한 연계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은 상층부 당 지도부의 임무였다. 다양한 층위의 소비에트 기관원들이 현실의 후진적인 특징과 그 기저에 깔린 사상과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무수히 많은 회합과 시찰, 회의들은 진보적인 요소들과 함께 상향적으로 전화되어야 했던 것으로 인식됐다. 집단농장 관리자의 근본적인 동기는 부농(쿨라크)의 그것과 많은 차이도 없었고, 노동자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심혈을 다했던 공장 관리자들과, 천재적 기만성을 심화시킨 전문 기술자들, 그리고 특권을 원했던 하급 당 기관원들은 모두 짧은 시간 안에 상급 당 기관의 환심을 사거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숨길 줄 알고 개진할 줄도 알았던 지도자에게 부응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협잡꾼과 출세주의자들, 흐루쇼프와 같은 찬탈자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그늘진 측면에 대한 자연스러운 산물로서 진면모를 드러냈다면, 스탈린처럼 사회주의의 위대한 설계자들과 노동계급의, 맑스-레닌주의의 교사들은 사회주의의 밝게 빛났던 자연발생적인 산물이었다. 

당 기관의 상층부와 소비에트 정부의 파벌들 내부에서 출세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이중적인 면모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이었고, 연례행사처럼 끊임없이 재발되던 문제였다. 사회가 사회주의적 발전단계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한 출세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산당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명성을 얻고, 획득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일부 출세주의자, 기회주의자에 대한 폭로와 축출은 이들의 사기를 꺾는 대신 오히려 더욱 영악하게 만들 뿐이다. 소련에서 부르주아적 찬탈이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처럼, 거의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국면에 더해, 쏘련에서 특수한 시기 당 기구의 내부에서 암세포들의 침식을 보다 수월하게 만들었고, 이들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운신의 폭을 확장시켰던 객관적, 주관적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나타난 일시적인 조건은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 

소비에트의 당과 정부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엽에 이르러 더 이상 아무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내외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전쟁 당시 독일군에 맞서 사회주의의 보루를 지켜냈고, 침략자들을 격퇴했으며, 파시스트 독일의 침략을 무찌른 쏘련은 1950년 무렵에 이르러, 더 이상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유라시아 대륙의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사회주의 진영의 주축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내부적인 측면에서도, 전시경제의 급격한 전환과 파괴된 경제의 재건, 기술의 현대화,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전후복구의 특징과도 같았던 실업의 고통이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일 이내로 전쟁 이전의 생산량을 능가함으로써 생산의 증진으로 이어진 유의미한 설비규모의 확장이 전개됐다. 비록 장래에 풀어야 할 과제들이 수도 없이 남아있었다고 해도, 소비에트의 당과 정부는 충분히 축하할 이유가 있었다. 소비에트 당과 정부의 업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지도기관의 요원들 중에서 불가피하게도 일련의 과업들에 관여했던 많은 이들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자만심을 불러일으켰다. 한 치의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행동했던 당원들 사이에서도 직위를 유지하면서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내렸다. 스탈린 말기의 이러한 현상은 알바니아 노동당 기관지 ≪인민의 목소리(Zeri i Popullit)≫의 1968년 기사에서 상세하게 묘사됐다.

레닌과 스탈린의 전설적인 전투들을 수행했던 볼셰비키당의 당원들은 계급성과 혁명적 열성으로, 혁명 속에서, 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 속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분파주의자들, 배신자들과의 무수한 전투 속에서 단련됐다. 이들은 정치사상적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볼셰비키당의 영광스러운 족적과 레닌과 스탈린에 대해, 자체적으로 일궈낸 올바른 노선과 규범에 대하여 확고하고 적법한 자긍심을 지녔다. 

볼셰비키당의 당원들에게 당은 모든 것이었다. 당은 심장이자, 뇌수이며, 눈과 귀와도 같았기 때문에, 볼셰비키당의 당원들은 당을 수호했고, 당의 품 안에서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교육받았다. 하지만, 당과 스탈린의 올바른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의 기관원들 모두가 이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으며, 혁명적 시야에 입각하여 명확한 노선을 따르는 대신, 안정에 대한 추구로 말미암아 서서히 침식되어 갔다. (...) 성공은 자만심을 길러냈고, 소비에트의 기관원들은 성취감에 젖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적 직관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당을 위해 싸우고 투쟁한 만큼 이른바 ‘정치적으로 적법’하다고 여겼던 불합리한 주장들을 내세웠다. 이들의 출세와 함께 안락과 자기만족에 안주하는 경향이 모습을 드러냈고, 관료주의와 지적 오만, 기술관료 본위주의에 더욱 침식되어 갔다. (...) 수많은 당원들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더 이상 군중들의 요구를 경청하지 않았다. 만사를 깨우쳤다는 풍조와 모든 영역의 전문가라는 인식, 군중보다, 노동계급보다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고, 노동계급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췄다는 발상은 이들 사이에서 주된 견해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과 스탈린이 소련의 노동계급과 인민들 사이에서 누렸던 권위와 위신은 기관원들에 의해, 당원들의 개인적 권위와 위신의 대두와 함께 침몰했다. 이러한 모든 반(反)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은 볼셰비키당의 당원들 사이에서 혁명적 사상을 퇴조시켰다. 당의 노선과 실천, 외형상 혁명적인 당의 기풍과 활동, 조직적 구성과 더 나아가 소비에트의 전체 국가기구가 경직화되는 과정 속에서 반(反)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는 소련 사회를 오염시켰다. (≪현대 수정주의에 대한 알바니아 노동당의 투쟁≫, 티라나, 1972년, 419~421쪽)

소비에트 당 내부의 문제들은 일부 기회주의자들의 존재로만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기회주의자들을 폭로했고, 이들의 몰락을 낳았던 혁명적 민첩함의 정교한 칼날은 점차 무뎌졌다. 성실하고 헌신적인 프롤레타리아의 기간요원들은 당원들 사이에서 부르주아적 분자들의 본질을 폭로하는 데에 실패했고, 부르주아적 사조들에 함몰된 나머지 잠재적인 자본가들과 상당수 뜻을 같이하는 수준으로도 치달았다.

그러나 상술한 두 가지 조건들로는, 대개의 경우 일관성을 유지했던 형세와, 일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기인한 상황만으로는 수정주의적 전복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스탈린의 당 지도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론적인 차원에서 발생했던 중대한 오류들이 아니었다면, 흐루쇼프가 득세하기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어 이후로 정정되는 일이 없었던 오류가 아니었다면 수정주의적 전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련이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가 됐다는 명제는 스탈린에 의해 1936년부터 공식적으로 개진됐다. (≪소련공산당 소사(1939)≫, 뉴욕, 329쪽.) 스탈린은 소련이 “(...)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유롭다”(≪18차 당 대회 보고(1939)≫)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유지했고, 따라서 소련 사회 내부에서 부르주아 세력의 재생산과 자본주의 복귀의 가능성과 위험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마지막 저작인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들≫에서도 스탈린은 “사회주의 하에서도 생산관계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후진적, 반동적 층위가 나타날 것이다”는 측면을 언급하며 종래의 입장을 정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는 (...) 저항할 잠재력을 지닌 기존의 계급들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유의미한 일체의 위험요소가 발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했다. (북경, 1972년, 72쪽)

스탈린의 분석에서 나타난 근본적인 결함으로 인해, 장기적인 일련의 교육사업과 문화정화운동, 종전 이후 그 자신의 주최로 열린 전당적 차원에서의 이론적 논쟁은 당과 인민을 충분히 일깨울 수 없었고, 조직화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심리에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일련의 사업들은 대부분 문제의 본질을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적이면서, 실제 삶과 괴리된 운동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이론적 발달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운동의 실질적 요구를 따라가지 못했고, 당대에 긴급하게 요구됐던 혁명적 지도부를 양산하지 못했다. 이것이 수정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세 번째로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측근들 중에서, 스탈린에 견줄만한 능력과 재능을 갖춘 지도자가 출현했더라면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수정주의의 승리를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탈린이 오랫동안 살아있는 한, 소련 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부르주아 세력과 당과 정부 내부에서 서서히 대두하고 있었던 이들의 비공식인 대변인들은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이들은 한 걸음씩 서서히 전진했다. 이들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던 여러 가지 자잘한 수법들을 동원하여 자체적인 강령을 관철할 만한 만한 잠재력을 지녔으며녔으며, 당장은 아무것도 없이 초라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랐지만, 동시에 지엽적인 영역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각종 특권들을 주장했고, 쟁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제한이 걸려있었다. 스탈린이 스스로의 이론에서 상승하는 신흥 부르주아지를 인정할 수 없었거나,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는 실천 속에서 스탈린 자신이 부르주아적 강령과 그 설계자들에 맞서 가장 강력한 반격을 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한 가지 예시를 단적으로 살펴보자. 1949년 초반에 강력한 권한을 보유했던 니콜라이 보즈네셴스키(N. A. Vozhnesensky) 고스플란 의장은 비록 온건했지만 동시에 중요한 의의를 지녔던 계획기구의 재조직화와 국영부문에서 가격의 상향조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훗날에 추진했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조치였으며, 이전에 비해 상품-화폐 교환관계와 가치법칙의 작용에 막대한 비중을 실어주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즈네센스키는 오래지 않아 후폭풍을 맞았다. 보즈네셴스키는 신속하게 체포됐고, 사보타주의 주동자로서 법정에 회부됐으며, 재판을 통해 총살당했다. (관련 주제로는 펠커의 ≪소비에트 경제논쟁(1966)≫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사 초판과, 동일한 표제로 캐서 & 코메컨 등에 의해 집필된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2판(1967)을 보라.)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가 유사한 결말을 맞이한 이들은 단지 보즈네셴스키에 국한되지 않았다.

물론, 부르주아지의 갈망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이러한 방식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이는 대규모로 광범위하게 적용됐을 때 위험한 방식이었고, 보다 온건한 조치가 더욱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측근들에 의해 지나치게 남발됐다. 그러나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 한 가지는 분명했다.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와 주자파들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들은 일정한 지위와 변변치 않은 물질적 혜택을 획득할 수 있었고, 완수한 과업에 대해 당의 찬사로 주요 행사들에서 명성을 떨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무엇보다도 중대한 요소인 정치적 권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쟁취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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