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니콜라우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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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트러스트화
러시아의 산업은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도 이미 세계에서 가장 집중화된 곳으로 손꼽혔다. 포드콜진은 “그 어떤 나라”도 “대규모 산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비율이 그토록 높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소련공산당 약사≫, 모스크바, 1968년, 59쪽.) 차르 치하 러시아에서 자본의 집중화에 따라 조성됐고, 자본의 집중화를 더욱 부추긴 이러한 정세는 의심의 여지 없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비록 막대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전위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노동자들의 밀집은 계급의식의 발달을 추동했고, 당 조직의 성장을 촉진했으며, 이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에 입각한 노동자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자본의 집중화는 소자본가의 입장에서 만성적인 위협이다. 대자본을 향한 소자본의 불만과 대(大)부르주아를 향한 소부르주아의 불만, 비독점자본의 독점자본을 향한 불만은 이러한 사회 질서의 오래된 쟁점이다. 소련에서 1965년 당시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복원과 함께, 이러한 쟁점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부상했다.
1965년의 “개혁”이 소련의 기업소 관리자들을 완전한 자본가로 탈바꿈시켰을 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기업소 관리자들에게 “자본주의 실행 자격증”을 부여했다. 그러나 기업소들의 규모는 천양지차이다.
드로기친스키가 말했듯이, 1960년대 후반에 소련의 전체 산업에서 50%가 넘는 기업소들은 예컨대 비교적 작은 규모로, 각각의 단위들은 200명보다 적은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이는 기업소 관리자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소자본가로 전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개혁의 실천≫, 소련의 경제개혁, 219쪽)
“개혁”의 기저에 깔린 법칙들은 초창기부터 약육강식의 원리에 입각하여 소자본가가 아닌 대자본가들에게 유리하게 짜여졌다. “새로운 제도”로의 변화가 수행된 방식은 가장 규모가 큰 대규모 기업소들과 연합기업소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신천지에 들어갈 수 있게 용인한 만큼이나, 소자본가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1967년 말엽에, 드로기친스키가 추산한 것처럼 규모가 가장 크고 생산성과 수익성이 높은 7200여개의 기업소들은 “새로운 방식”에 입각하여 운영됐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서는 총생산량과 총수익이 최초의 7200여개 기업소를 합한 것보다 다소 적은 19,650여 개의 기업소가 “새로운 제도로 이전”했다. 그 다음 해인 1969년 동안에는 전체 총생산량이 최초의 7200여 개 기업소보다 3배나 적고, 총수익이 4분의 1로 규모가 작은 9000여 개의 또다른 기업소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1970년에 마지막으로 이전된 기업소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1만여 개―매우 흥미롭게도, 드로기친스키는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않는다.―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공업의 전체 생산량과 전체 수익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할 뿐이다. (같은 글, 197쪽, 200쪽, 202쪽)
소련의 중, 소규모 기업소들이 새로운 경제적 여물통에 다다랐을 때, 이들 기업소들은 큰 돼지들이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광경을 포착했고, 남은 찌거기들로 여운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드로기친스키가 인정한 것처럼, 문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같은 글, 217쪽) 드로기친스키와 그 외의 저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생산의 물질적 대사”라는 표현―규모가 가장 큰 생산단위가 작업을 더욱 효율성 있게 한다는 말과, 그와 유사한 주장들―으로 치장하려 든다고 해도, 문제의 진정한 근원이 자본의 규모가 적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바로 그렇기에, 드로기친스키는 한 발 양보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소규모 기업소들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들 기업소들의 경제적 인센티브 기금이 그렇게 많지 않은 이상, 재원의 규모가 이들로 하여금 1년, 혹은 2년 내로 이를 추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수 년 넘게 재원을 축적해야 하며, 그 결과 고심 끝에 취한 조치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할 만큼의 결과를 안겨주기 때문에 문화시설 및 복지시설을 항상 지을 수도, 생산의 성장을 위한 조치에 착수할 수도 없다.” (217쪽)
이는 즉, 규모가 작은 기업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그보다 큰 공장의 노동자들보다 한층 더 열악한 주거와 적은 복지 혜택을, 문화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비교적 덜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들은 불운한 존재들이다. 자본을 아끼고, 절약해서 훗날 대자본가로 되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모두 어느 순간에 “의미를 상실”한다. 드로기친스키가 심사숙고하여 선별한 표현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독점자본과 나란히 존재하며, 그 산하에 있는 노동력 착취 공장과 여러 소규모 기업체들을 일컫는다.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영 기업소”에게 있어 파산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앞서 인용된 대로, 기업소들에 관한 1965년의 새로운 법률은 빌린 대금(타 기업소나 은행에게서 빌린 대금)을 상환할 수 없는 기업소들이 국가로부터 지원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시했다.
“국가는 기업소의 책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기업소는 국가의 책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9항)
이는 마치 이혼 선언과도 같고, 국가가 기업소의 주인이라는 공식 기조와는 도저히 합치되기 어렵다는 듯이 들린다. 그러나 이는 한 번 위기에 빠진 기업소가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말로도 등치될 수 있다. 1965년의 법은 한 기업소에서 다른 기업소로의 합병을 위한 절차들을, 혹은 기업소들의 정리를 위한 절차들을 제공한다. 후자의 경우, 모든 채권자들은 정식으로 통보받을 의무가 있으며, “청산 기업소에 대한 민법상 청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치러진다.” (110항) 이러한 절차는 공식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파산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다.
세간에 공개된 소련의 문헌들은 1965년 개혁과 그 이후에 존속했던 전체 기업들의 수치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자진해서 포함시키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생산단위들이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기업소로 변모됐고, 정리됐는지를 놓고 판별하는 것은 따라서 불가능하다. 그 숫자는 짐작컨대 수천에 달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1965년 이후 소련에서처럼 각종 독점체의 공공연한 성장과 보호를 그토록 추동하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독점자본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중적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독점자본의 범주는 독점자본주의의 특수한 형태가 시사하는 것처럼 나라에서 나라마다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 서방의 모든 국가들에서 독점(혹은 독점의 특수한 형태)은 불법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허상이 존재하며, 국가관료기구가 예컨대 통제기관을 통해 독점자본의 대항마를 이룬다는 환상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여기서 독자는 소련에서처럼 독점자본주의가 무소불위의 철권을 직접적으로, 절대적으로 휘두르는 나라에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이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5년 “개혁”의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은 “생산협동조합”과 둘째로, 기존과는 달리 이윤극대화의 원리에 입각한 중앙정부 산하 공업 “부처”들의 재확립에 있다. 사태의 이러한 발전 경과에 대해 앞서 지나가듯 논한 내용에 더해, 다음과 같은 말이 추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에서 “새로운” 유형의 “생산협동조합”의 창설은 우크라이나(흐루쇼프의 근거지)에서 1961년에 시범적으로 시작됐다. 이러한 생산협동조합의 발전 속도는 1970년 무렵 1400여 개의 생산협동조합이 1만 4천개보다 많은 공업 부문 기업소들을 합병하며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1973년 4월의 기념비적인 포고령은 생산협동조합에 모든 기업소들의 가입을 유도하는 것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했다. 현재의 소련에서는 도합 약 5천여 개의 “생산협동조합”들이 존재한다. (구빈, “효율의 성과적 향상을 위하여”, 86쪽)
소련의 경제학자 보리스 구빈(Boris Gubin)은 “협동조합”의 주요 유형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련의 ‘트러스트’형 협동조합은 대개의 경우 동일한 종류의 생산물을 제작하는 기업소들을 합병하며, 기업소들로부터 유리된 독자적인 관리 기구를 보유하고 있다. (...) ‘트러스트’형 협동조합의 틀 안에서 기업소들의 구성과 지역적 배치, 체계에 대한 조정은 가능하다. 생산과 관리의 집중화에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트러스트’형 협동조합들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서로 동일하다.”
‘콤비나트’형 협동조합은 원자재를 추출하고 생산물을 제조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연계된 기업들을 하나로 묶은 형태이다. ‘기업’형 협동조합들은 ‘콤비나트’형 협동조합들과 다르게, 일반적으로 동종의 생산물을 제조하는 과정에서의 협력관계를 통해 연계된 특정 산업 부문의 기업소들을 규합한 형태이다. ‘기업’형 협동조합의 틀 안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중앙기업소의 경영진이 협동조합의 전체 생산을 책임지고 관리한다.
여러 공업협동조합들의 기본 유형들에 더해, 농공복합체와 과학-공업 복합체, 공업-상업 복합체들이 소련의 국민경제 내부에서 출현하고 있다.” (구빈, 90쪽)
이러한 각종 복합체들의 확립은 강조하자면 그 어떤 경우에서도 생산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건드리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이전처럼 고용되고 해고되며, 생산수단은 사고 팔리고,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착취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적과 함께 지속되고 있다. 트러스트형, 콤비나트형, 기업형 협동조합이 이룬 것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자, 보다 대규모로 이뤄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불과하다.
소련의 저자들이 한 발짝 물러설 준비를 갖춘 것처럼, 기업소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콤비나트로 변화됨으로써 몇몇 부분에서 독자성을 일정하게 상실한다. 그 정도는 각 기업소마다 극명하게 다를 수 있다. 개개 기업소의 관리자는 생산품의 판매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거나, 트러스트 본부에 대한 원자재 공급을 통제할 권한을 상실할 수 있어도, 투자결정에 대한 권한을 일정 부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개 기업소의 관리자직은 대개의 경우 경영진과 사무직과 함께 일괄적으로 폐지됐다. 이 경우, 이전에 자치를 향유했던 자본주의 기업은 한낱 공장에 지나지 않게 되며, 기업소 관리자는 고용 관리자 내지 고용 감독관으로 전락한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던져진다. 여러 사례들 중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사례에 대해 구빈은 다음과 같이 칭찬조로 말한다.
“예산의 막대한 절감에 따른 여파는 석유정제업에서 협동조합의 조직화를 통해 나타났다. ‘쿠이비셰프네프트’ 협동조합의 창설으로 인한 결과, 7개의 석유시추 기업소들과 11개의 유전, 51개의 석유생산, 시추 업종들이 폐지됐다. 이는 1000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연간 노동임금기금에서 130만 루블의 절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08쪽)
그러나 “협동조합” 내부에서 기업소들이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도 트러스트 본사는 전체 이윤 중 일부와 기업소 관리자들의 소유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감가상각기금의 일부를 지출한다. 모든 사례에서 “협동조합”의 장은 중앙정부의 기금을 재량에 따라 처리한다. (구빈, 104쪽) “협동조합”의 회원자격 그 자체로서는 기업소를 청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 쿨리코프가 지적한 대로 트러스트 본사는 은행이 그렇듯, 이윤을 가장 많이 창출하는 기업소들한테 유리하게 중앙정부의 기금을 빈번히 남용한다. (“장기신용의 몇 가지 문제들”, 61쪽)
기업소 관리자들의 잃어버린 모든 권한과 재원은 구빈이 지적한 대로 트러스트나 연합기업소, 혹은 “기업”형 협동조합의 본부로 인계된다. 이들 본부는 기존에 보통 특정 산업, 또는 한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단위를 형성한다. 중소자본가들의 권한과 재원―일부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상당히 크다고 해도―은 특정 산업 부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자본의 손아귀로 집중된다.
이러한 유형의 자본은 그 자체로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예외적인 관행으로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은 철강산업 전반이 규모가 사실상 가장 큰 회사로 비공식 철강 트러스트를 총괄하는 US스틸에게 오랫동안 귀속됐다. (블라리, ≪경제의 집중화≫, 500~505쪽 등을 보라.)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도 비슷하게도 자동차 트러스트를 사실상 책임지고 있으며, 석유 카르텔을 선도하는 엑슨(Exxon)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에서는 비록 비슷한 양상을 보이나, 대부분의 경우 덜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자본의 집중화가 진척된다.
그러나 특정 산업 부문에서 기업소들이 법적 강제로 인해 트러스트나 카르텔에 모두 합병되거나 하는 일은, 차상위 “지도부”의 지시를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미국에서 반항의 대명사로 US스틸의 “지도”에 불복할 용기를 가진 기업소는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모든 합법적 권리를 지니고 있다.
소련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상황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생산협동조합에 가맹한 이상, 기업소는 공식적으로(합법적으로) 기업소 총책임자에게 종속―일찍이 지적된 바대로, 모든 기업소들은 1973년 이래로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다.―되며, 모든 법적 재량권을 상실한다. 드로기친스키가 지적하듯이, 개별 기업소들은 상당한 권리와 규모를 빈번하게 유지하지만, “법적 재량권을 공식적으로 빼앗긴” 상태에서 단지 트러스트나 연합기업소의 자비에 기대어 행동의 자유를 행사할 뿐이다. (≪도매무역에 관하여≫,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74년, 4호, 1974년 10월, 107쪽.)
오늘날 소련에서 독점 카르텔―이윤을 관제고지로 삼아 운영되는―은 국가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며, 또한 소규모 기업소들을 산하의 연합기업소들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법적 강제를 동원한다.
이에 대한 선례로는 무엇이 있는가? 모든 나라들에서 독점카르텔들이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무기들 중 하나로 이용된다고 해도, 때와 장소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카르텔들에 속한 기업소들이 법적인 강제를 통해 결합하는 사례와, 대규모 기업소가 ‘집단’ 내부에서 경제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법적 권위를 행사하는 나라들의 사례를 탐구하고자 할 때, 자본주의의 역사 상에서 40년보다도 더욱 앞서 일어난 역사적 사례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31년 4월의 일본과 1932년 6월의 이탈리아, 1933년 7월 당시의 독일도 마찬가지로 의무 카르텔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란츠 노이만은 독일에서 시행된 정책들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르텔 의무화법은 카르텔에 어쩔 도리 없이 가입하여 콘체른의 강력한 권한에 완전히 짓눌린 중소상공인들을 최우선적으로 겨냥한 법이다.” (베헤모트, 266쪽) 반파시스트 성향의 또 다른 저자는 카르텔 의무화법이 이를 강제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망과 함께 “독점이윤의 완전한 관철을 위해 필요한 관련 기능을 보강하고 지원함으로써 대규모 연합기업소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데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브래디, 비즈니스 권력체계, 뉴욕, 1943년, 43쪽.)
나치 독일도 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가격통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노이만이 지적했듯이, 나치 독일의 가격통제는 “가격협상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공장에 충분한 이윤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307쪽) 이는 낯익은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코시긴 역시 “가격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각 기업소들에게 이윤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모든 카르텔 체계 내부에 천성적으로 타고난 차등이윤, 이른바 카르텔세에 대해서도, (노이만, 307쪽) 혹은 고스플란의 부위원장인 코토프의 말을 빌리자면 ‘수익성이 낮은’ 기업소들의 기준에 입각한 가격 확립의 필요성과 차등세를 지불할 필요성”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가격..”, 58쪽) 이러한 제도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강력한 회사들에게 막대한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온상이 된다.
소련에서 “생산협동조합”의 형성은 트러스트의 조직화와, 상이한 지역들 및 일부 산업 부문에서 출현한 각종 자본주의적 인수, 합병을 의미했다. 쿠이비셰프네프트 석유 연합기업소의 창립과 함께, 쿠이비셰프 지역에서 기존에는 서로 떨어져 있었던 석유 기업소들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단일한 독점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로즈니 지역에서 석유 기업소들을 한데 모아둔 그로즈네프트 협동조합과 바쉬네프트 협동조합, 그리고 그 외 협동조합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유 콤비나트(연합기업소)들의 소련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석유 트러스트로의 전국적인 인수-합병과 함께, 우리는 1965년 조치를 통해 “복원”된 중앙공업“부처”들의 진정한 경제적 전모를 알 수 있게 됐다.
이들 부서들은 나중에 재차 논해지겠지만, 흐루쇼프에 의해 폐지됐다. (13장) 흐루쇼프의 이러한 행보는 1957년 6월경 그의 부하들로 구성된 정치국 소수파와 다수파 사이에 최종적인 결투를 야기한 수많은 단초들 중 하나였다. (본 책의 11장을 보라.) 코시긴에 의해 발표된 중앙부처의 재건을 골자로 한 1965년의 결정은 일부 관측자들에게 ‘스탈린주의에 대한 양보’로 비춰지거나, 심지어는 사회주의적 계획으로의 부분적 회귀로 인식되고 있다. 이토록 사실과 먼 주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코시긴은 그 자신의 언사에 담긴 전모가 한번 폭로된 이상,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냈다. “언틋 보기에는 기존 정부 부처들의 복원이 전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몇 가지 새로운 요소들을 간과하는 것을 의미하며, 실수를 자아낸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 만들어진 성(省)급 관청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산업에 대한 행정적 관리기능이 비용계산의 제반 방법론들과 경제적 인센티브의 보다 광범위한 적용을 통해 결합되며, 기업소들의 경제적 권리와 주도권이 실질적으로 확장되는 조건 하에서 운영될 것이다. 산업 부문들 내부에서는 비용계산에 기초하여 운영되는 기업연합이 결성되고 있으며, 앞으로 각 기업소들을 향해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정부 부서들은 비용계산에 기초하여 운영되는 기업연합에 업무의 전반을 의존하게 될 것이고, 많은 실질적 관리 기능을 양도하게 될 것이다. 추가적으로, 성(省)급 관청들에 속한 중앙행정기구들의 대다수도 역시 마찬가지로, 비용계산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아야 할 것이다. 부처들은 산하 각 부문들의 진보적 발전의 주된 동향에 모든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여기서 “비용계산에 기초하여 운영되는 기업연합”이라는 수사(修辭)는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트러스트나 연합기업소들을 뜻하며, 새로 신설된 “성(省)급 관청들”이 업무에 임하는 전혀 다른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제반 조건들을 일컫는다. 이들 트러스트들과 연합기업소들에게 중앙의 각 “관청”은 “수많은 관리 기능들”을 양도해야 할 의무를 지며,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이들 자체가 이윤 극대화의 원칙 등에 따라 반드시 굴러가지 않으면 안 되고, 자본주의적 트러스트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구절들이 보여주는 것은 쉽게 풀어쓰자면 대자본 기업연합체들에 의한 국가와 그 정권 기관들의 직접적인 장악을 의미한다. 이는 프란츠 노이만이 1930년대 도중 독일에서 주류를 이룬 경향을 두고 “정부 기관의 카르텔화”라고 부른 것과 동일하다. (“베헤모트, 270쪽)
소련의 경제학자들은 비록 그와 같은 용어를 쓰지 않지만, 소위 ‘중앙기구들’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명백한 어조로 알아서 실토하고 있다. 예컨대, L. M. 가토프스키는 투자계획을 짤 때 “이윤과 수익성의 증가”와 같은 요소들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중앙 관청들 역시 새로운 장비에 대한 투자를 기획할 때 이러한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토프스키에 따르면, “이러한 요소는 특히 중앙에서 기업소 차원의 비용계산으로의 이행과 함께, 방대한 규모의 비용계산을 수행하는 기관들로의 변화와 함께 특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경제개혁과 기술적 진보의 자극≫, 소련의 경제개혁, 173쪽.)
코민 국가가격위원회 부위원장은 “가격형성의 과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문제 중 하나는 이윤의 문제이다. 과거에 이윤 지수는 단지 기업소의 기준에 따라 평가될 뿐이었지만, 오늘날에 들어 이는 협동조합과 중앙의 각 성(省)급 부서들을 모두 포괄한다. 모든 성(省)들에게 이러한 원칙의 적용 범위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이윤표준량의 증대가 요구되며, 이는 공업도매가격표에 등재된 기준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경제학의 제문제”, 41쪽)
구빈은 1965년에 최초로 재건된 부서들 중 하나인 기계장비제작성의 사례를 들며, 성(省)급 부처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새로운 원리의 “효율성”을 설명하는 도표를 예시로서 거론한다. “1969~70년의 기간 동안 기계장비제작성은 1만 2천명보다도 많은 직원들을 경영진에서 해고시켰으며, 2450만 루블 가량의 연간 경영지출비를 절약했다.” 이윤은 상승했다. (효율성 증진을 위하여, 107쪽.)
소비재 시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공업의 경우, 두 가지 사례가 존재한다. 해당 부문에서 중앙의 각 “부서들”은 공화국 단위로 구성되며, 소련의 “연방 공화국들”은 저마다의 부서들을 거느리고 있다.
“타자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육류식품공업성은 기업소들의 높은 이윤을 향한 요구에 따라 1970년과 1971년에 민간인들 사이에서 안정적인 수요를 창출했던 값싼 제품들의 생산을 줄이고, 보다 값비싼 제품들의 생산량을 늘리는 불합리한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육류식품공업성의 기업소들은 계획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수백만 가량의 루블을 획득했다.” (스타로스틴, 엠딘, “5개년 계획과 소비에트의 생활 방식”, 플라브노예 하자이스트보, 1972년, 6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3년 6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RSFSR) “경공업성”의 행동은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지의 또 다른 저자가 증언한 것처럼 동일한 원리에 입각했다.
“무역 거래의 미달을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요소는 공업 부문의 기업소들에게 필요한 수익을 제공해주지 않는 주문된 제품에 대한 낮은 도매가격에 있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공업 부문의 기업소들은 비록 소비자들의 높은 수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제품들과 수익을 일체 창출하지 못하는 제품들의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다한다. 예컨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경공업 부문의 기업소들은 한정된 수요를 누리는 품목인 같은 재질의 사람 표준 우비보다 2.3배 더 많은 양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거래를 통해 제시된 외투의 주문량 중 70%만 만족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소비자 수요에 조응하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위하여“,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4호 1972년 10월.)
이러한 인용문과 설명을 몇배 더 늘리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장관급 부처들”은 자본의 집중화와 자본주의적 독점의 공고화가 보다 고도화된 수준으로, 보다 대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과는 1969년에 소련의 경제학자 마이젠베르크가 앞선 장에서 안이하게 관측했던(21장을 보라.) 기업소들과 연합기업소들에 의한 국가기구의 점진적인 침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는 자본주의적 독점체에 의한 국가행정기구의 철저하고, 완벽하며,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장악을, 독점자본주의적 방향성에 입각한 국가관료기구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1965년 중앙경제부처들의 복원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상상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국가적 “통제”를 향해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가장 긴박했던 역사적 비상사태의 시기에,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내몰렸을 때 부르주아지에 의해 보통 쓰이는 가장 반동적인 자본주의적 구상의 실현을, 즉 가장 강력한 독점자본 대기업들에게 종속된 국가의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규제를 의미했다.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체 국가와 산하의 제반 부서들은 독점자본가계급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모든 경제-규제기관들은 통제받아야 마땅한 이들의 지극히 “특수한 이해”에 궁극적으로 봉사한다. 이들 기관들은 침식되어 있거나, 부패에 절여져 있거나, 매수되어 있거나 셋 중 하나이다. 셋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는 이상, 이들의 기관들의 권한에는 제한이 가해질 것이 자명하며, 이들의 예산도 마찬가지로 감소할 것이다. (블레어, 372~402쪽 등을 보라.)
자본가들의 독점적 이해관계는 국가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거나, 국가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든다.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정부 기관들이 달리 행동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스운 발상일 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독점체들의 지배는 간접적으로 이뤄지며, 형평성을 가장한 외양도 여전하다. 독점자본은 국가를 활용하고, 법을 활용한다. 파시스트 국가들과 오늘날 소련 체제에서 이들은 곧 법이요, 국가이다.
예컨대, 철강공업을 관장하는 전권을 거머쥔 US스틸 사장을 철강공업성 장관에 임명했다고 치자. 콘 에디슨(Con Edison)사와 퍼시픽 가스(Pacific Gas)사, 일렉트릭(Electric)사, 그리고 규모가 가장 큰 독점체 2~3개의 회장들을 전기공업성의 요직에 앉혔다고 치자. 엑슨(Exxon) 사의 사장에게 가격을 수정하고, 할당량을 책정하고, 시장 등을 창출하는 법적 권한을 가진 석유공업성, 석유화학공업성, 석탄공업성, 원자력공업성의 장관직을 제공했다고 치자. 여러분은 이러한 정치-경제적 구조가 파시즘 체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소련 경제에도 충분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이만은 말한다. “공장지배인들에 의한 국가의 완전한 종속은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자치적 대중조직과 비판의 자유가 결여된 정치적 조직에서만이 오직 수행될 수 있었다. 이는 [산업자본가들의] 재산 보장을 위해 새롭게 채택된 여러 가지 보조적 수단들과 지령을 통해, 그리고 행정적 법령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고 말살하는 민족사회주의의 기능들 중 하나로서, 독일의 모든 경제활동을 산업 대자본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공업 부문 기업소들의 네트워크에 귀속시키도록 강제한다. (261쪽)
23. 누가 이익을 얻는가?
누가 이 “새로운 경제제도”에서 이익을 얻는가? 여태껏 이야기된 바대로라면 답변은 그렇게 놀랍지 않다. “새로운” 제도는 소수의 수중에 부의 극대화를 추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빈곤을 극도로 조장하는 거대한 기계밖에 더 되지 않으며, 그 이상으로는 될 수 없다.
소련의 저명한 수정주의 학자 바르가(E. Varga)는 사망 직전에 쓰여져 해외에 출판된 “유언장”에서 “지배층의 과도한 물질적 부와 노동자, 피고용자, 집단농장 농민 다수의 극도로 적은 저임금으로 대표되는 간극”을 개탄했다. 그는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때때로 관료들에 의한 범죄로 이어지는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국가의 자산을 헐값에 팔아넘기는[프랑스어로는 ‘brader’로, 직역하자면 바겐세일 내지 노점상에서의 할인 판매와 같은 의미이다.-역자] “관료귀족” 집단의 ‘오만’과 ‘자만’을 성토했다.
같은 시기에 바르가는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물질적 사정은 음주, 배우자 및 아동에 대한 학대, 부부다툼, 결근, 직무태만, 그리고 때때로는 열악한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들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부도덕한 현상들을 야기한다.” (≪르몽드≫, 9월 12~13일자 기사, 1971년. 앙드레 포미에르 저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 1974년 9월~10월, 56쪽, 77쪽에 인용됨.)
병상에서 도덕적 가책에 사로잡힌 이 수정주의자에게 노동계급은 오직 체제의 희생자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투쟁 정신을, 수많은 파업과 여러 봉기들을 보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상류층 관료들의 그칠 줄 모르는 욕망과 무제한적인 부패, 하류층의 고통과 불만, 절망의 방대한 광경으로 대표되는 옛 러시아, 차르 치하 러시아에 대한 부르주아 소설가들의 묘사를 연상시킬 만큼 소련에 대한 이미지를 재단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가의 임종 고백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체제를 향한 불만이 때때로 “좌파”적 형태를 취해도, 솔제니친의 경우처럼 극우반동적 양상을 더욱 자주 보이는 소부르주아 “반체제” 서클의 가장 저명한 인사들 중 하나인 로이 메드베데프의 추산에 따르면, 비록 그렇게까지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소련에는 은행 계좌의 자산이 일곱 자에 달하는 1만 3천여 명의 백만장자들과 최고위 사장들이 존재한다. (제프 카츠, “소련 경제에 대한 망명객들의 시각과 사회학적 연구”, 1970년대 소련의 경제적 전망, 미국 의회 경제합동위원회에 인용됨.
현재의 소련에서 빈부격차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증가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줄어들고 있는가?
미국의 부르주아 사회학자인 카츠는 사회학적 연구와 소련의 망명객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브레즈네프-코시긴 행정부는 (...) 개인 자동차와 수입 물품들, 해외여행과 집안의 각종 호화시설, 콘도미니엄, 현대적 고급 시설(식당, 호텔)들에 접근할 수 있는 (혹은 이러한 혜택들을 거머쥔) 이들에게 각종 다양한 물질적 자극을 제공한다. 오늘날 소수의 인사들에게 한정된 이러한 혜택들은 소련판 과시적 소비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경제개혁, 기술적 진보에 대한 인센티브의 부과, 경영관리의 개선 운동, 트러스트와 기업형 협동조합의 창설, 그리고 ‘셰키노 실험’과 같은 몇몇 조치들을 비롯하여, 새로운 농업 정책 역시 임금격차를 노골적으로 심화시키고 있으며, 높은 수입과 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갖춘 인원에게 혜택을 가장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실정이다.” (카츠, 앞의 글, 112쪽)
이는 물론, 출처가 출처인 만큼 악의에 가득 찬 나머지 쓰인 글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소련의 경제학자들 스스로―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보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하지만―도 카츠의 결론을 모든 면에서 뒷받침하고 확증시켜주고 있다. 소련 정부의 “진보적 평준화”에 대한 공식 발언에도 불구하고, 증거는 명백하게도, 압도적으로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서 양극화의 성장과 심화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예컨대, 경제학자 쇼스타인 베블런(Thorsten Veblen)이 수십년 전 벼락부자들의 특징으로 지목하며 풍자를 가했던 과시적 소비―부자들의 순전한 낭비―의 문제를 살펴보자.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모두 계급으로서, 의심의 여지 없이 이러한 특징을 보유했다. 이에 대해 소련의 경제학자 N. 부질랴코프는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오늘날 [소련의] 각 가구는 1인당 최대소득을 통해 정해진 표준 및 그보다 높은 기준에 의거하여, 특정 유형의 식료품과 그 외의 상품들을 소비한다. 소득의 추가적인 상승세와 더불어, 한 가구당 소비량도 향후 15년에 걸쳐 양적으로, 질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소비재와 관련 서비스의 숫자 역시 기존의 정해진 표준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뛰어넘을 것이라는 데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비이성적인 소비’에 대한 논의가 나올 여지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바람직한 장기소득 및 소비 기준에 대하여“, 플라브노예 하자이스트보, 1974년, 6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4년, 84쪽에 수록.)
부유층의 이기적인 삶이 합법적 출판물에서 얼마만큼 논의될 수 있는지, 없는지, 혹은 현대 소련에서 “합리적 기준에 따라 제시된 범위” 내에서 식료품과 그 외 제품들의 소비가 단지 “1인당 최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가구들”에 한해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심오한 질문란에서 어떤 문항이 보다 눈에 띄게 충격적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부유층을 제외한 나머지 인민들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도 ‘합리적’ 기준을 밑도는 소비에 제약되는 삶을 영위하는 데에 그친다.
빈부격차의 증가는 그 정도가 명실상부하게 드러나는 만큼, 소련 수정주의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 다루기 무거운 주제이다. 실업과 생산의 무정부성이 그렇듯, 이는 있어서도 안 되며, 따라서 합법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논의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기관들의 실질적인 연구 성과는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을 수도, 반영될 수도 없다. 이는 서방 국가들처럼 소련에서도 국가경제 상에서 국영은행의 의무로 됐던 화폐의 유통량과 유통속도에 대한 관리에 있어 특히 두드러진다. 빈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만큼 돈을 버는 즉시 빠르게 이를 소비한다. 부유층은 대개의 경우 수입 중 일부만 소비할 뿐이며, 향후에 쓸 용도로 나머지를 은행에 저축금으로 예치한다. 화폐유통의 속도는 부유층의 경우 빈곤층보다 느리다. 따라서 소득양극화가 상당한 규모에 도달한 모든 나라의 경제에서 화폐의 유통량을 관리하는 은행 당국은 공식 이데올로기가 무엇을 말하건 이러한 사실을 십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이는 소련의 은행 당국자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업무이다. 1964년부터 일찍이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수입의 차등화를 인지할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문들이 지면 상에 나타났다. (예컨대, O. 로고바의 “수입차등화가 화폐유통에 끼치는 영향”, 젠기 이 크레디트, 1965년 11호, 경제학의 제문제, 1965년 5월과, A. 렘메니크의 “가사의 물질적 조건”, 에코노미체스키 나우키, 1964년, 5호와 그 외의 논문들을 보라.)
“개혁”의 전면적인 도입과 함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계획” 체계에 대한 몇 가지 “개선안”에서 경제학자 P. 코룔로프와 M. 키스탸코프는 “최근까지 삶의 질을 판별하는 기준은 노동자·사무원과 집단농장 농민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짜여졌다.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소득수준에 기초하여 각 인구집단의 삶의 질 증대를 계산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국가적 경제계획의 방법론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 플라브노예 하쟈이스트보, 1972년, 1호, 경제하그이 제문제, 1972년 8월, 33쪽.) 이는 자본주의의 복원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인 소득 양극화를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며, 그에 대한 솔직한 반영이기도 하다.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의 증대된 격차에 대한 직접적인 시인―비록 에둘러 말했지만―은 다음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구 결과는 소득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인구 집단들에서 (소득 대비) 저축금의 기준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준은 가장 부유한 인구 집단들 사이에서 더욱 의의를 지닌다. 소련 경제의 성장 동향에 대한 분석은 인구 집단별 소득차등화의 점차적인 성격 변화를 나타낸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입을 올리는 이들 집단들의 지분은 불가피하게도 상승한다. 같은 시간에 비교적 적은 저축금을 내는 가구들의 지분의 감소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도 주시할 만한 대목이다.” (T. 이벤센, “화폐의 저축량을 예측하는 데에 있어 나타나는 문제들”, 에코노미체스키예 나우키, 1973년, 11호. 경제학의 제문제, 1974년 6월, 66쪽. 강조는 인용자.)
다르게 말해,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 부자와 빈자가 출현했고,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소련 노동자들의 경제적 상태에 관한 몇 가지 추가적인 사실들은 ≪북경평론(Peking Review≫ 최근 호에 엮인 소련의 문헌들에서 엿볼 수 있다.
“현재의 소련에서 수정주의 두목들과 언론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가구들’이 상당한 규모로 많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련의 잡지 ≪사회주의 노동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가구들’이라는 용어를 1인당 소득이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들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타스는 지난 11월에 이들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가구들’이 자그마치 ‘250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는 해당 수치가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으며, 소련의 현 상황이 그보다도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소련의 언론 보도는 그와 같은 가정이 전체 도시 인구의 5분의 1 남짓을 구성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집단농장 농민들 중 대다수의 살므이 질은 저음금 노동자들과 사무원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저조하다.”
“인플레이션과 물가의 상승은 저임금 수급자로 분류된 근로인민들에게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속내가 훤히 보일 정도로 숫자를 줄여 발표한 소련국민경제통계연보의 통계에 따르면, 고기와 돼지고기의 소매가격은 1960~73년 동안 29$ 상승했으며, 동물성 기름은 28%, 채소의 가격은 23%로 치솟았다. 같은 시기에 모스크바의 국영 상점들에서 밀가루의 소매가는 48%로, 고기류는 33%로, 양배추는 66%로 치솟았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식품들의 물가도 마찬가지로 치솟고 있다.
자유시장[비공식 시장: 역자]의 물가는 공식 시장의 물가보다도 더욱 급격히 치솟았다. 자유시장의 소매가격이 1960년 당시 국영시장보다 35% 더 높았다면, 1972년에는 63%로 치솟았다.
소련의 비러시아계 인민들 사이에서 삶의 질은 수정주의 배신자 도당에 의해 자행된 대러시아 국수주의적 민족억압 정책으로 인해 여전히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다. “1973년 소련과 연방 내 구성 공화국”들이라는 제목의 책자는 대부분의 비러시아계 공화국에서 노동자들과 사무원들의 한 달 평균 임금이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보다 낮다는 점을 폭로했다. 예컨대, 벨라루스에서 노동자 및 사무원들의 임금은 16%나 저조하며, 그루지야에서는 20%로, 몰도바에서는 21%나 낮다. 비러시아계 공화국들은 소비재 공급과 주거, 문화시설, 교육시설 및 보건시설에 대한 접근권에 있어서도 차별을 겪고 있다. 1973년에 쓰인 “소련국민경제통계연보”는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공화국에서 1인당 소비재 소매 판매량이 러시아 연방 공화국보다 60%나 더 낮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서 1만명 당 의사의 숫자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에 비해 3분의 1이나 적다. (“수정주의 하에서 소련 근로인민의 곤경”, 북경평론, 1975년 5월 16일, 19쪽.)
이러한 전말은 양극화 증대의 전반적인 경향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소련의 국가독점자본가 부르주아지는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오랜 격언에 따라 상이한 민족들 사이에서, 특히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대러시아 민족과 소수민족들의 단결에 균열을 내기 위해 수중에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했고, 후자에 맞서 러시아계 노동자들을 가장 가까운 민족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산하의 억압기구와 착취기구를 응집시켰다.
노동자와 노동자의 적대를 조장하는 “분할통치” 전술은 모든 “새로운” 관리 방법론에서 오히려 의식적으로 적용됐다. 이는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며, 승진시키고, 강등함으로써 갖가지 편애와 차별을 불러일으키는 기업소 총책임자의 독단적인 권한에서 단지 암묵적으로 드러날 뿐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기업소 책임자의 채찍을 대가로 받는 자잘한 ‘추가급여’를 분배하기 위한 소련의 정책에서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효율학(效率學) 전문가” 구빈은 아래와 같이 서술함으로써 모든 이론을 쓰레기통에 폐기했다.
“모든 인센티브 제도의 효율성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 간의 차등화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결정적인 요인은 유인기금의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노동자 1명당 유인기금의 상대적 크기에 있다.” (Raising the Efficiency..., p. 79)
쉽게 말하자면, “효율성”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1루블을 더 지불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10코페이카(센트)를, 7코페이카를, 제3자에게 3코페이카를 “추가급여”로 지급함으로써, 그리고 나머지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추가급여를 주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며, 이를 통해 상호 질투를 조장하고, 공동의 저항을 향한 노동자들의 단결을 저지함으로써 확립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견지에서 ‘효율’의 본질이다.
소련에서 증가 추세에 있는 빈부격차의 양극화가 주로 이러한 “추가급여”의 형태로부터, 혹은 노동자들의 등급과 숙련도에서 관찰되는 임금의 불평등을 통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오히려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임금 격차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非)근로자의 수입―임금의 형태를 띠지 않는―에 있다. 이 또한 “추가급여”라는 형태로 에둘러 말해지지만, 수정주의 소련의 학자들은 적어도 더 이상 기업소 총책임자들과 최측근 관리자들에게 지불되는 추가급여가 임금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임금이 수익의 지분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반복해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로, 코시긴의 1965년 연설에서 [주된] 원칙으로 선포된 바 있다.
그렇다면, 누가 “추가급여”를 받는가? 모든 자료들이 동의하듯이, 1965년 “개혁”의 가장 초창기부터 이러한 수입의 가장 큰 지분은 각 기업소, 연합기업소의 몇몇 고위급 인사들에게 향한다. 이미 모스크바 유통 실험(Moscow Transport Experiment) 도중 추가급여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불평등한 간극”이 “고위 경영진에 대한 거액의 급여 증대”와 함께 관찰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칼레디노바 & 톰스키, 보프로시 에코노미키, 1965년, 12호. 페이웰의 저서 243쪽에 인용됨.)
같은 출처에 따르면, 일찍이 “새로운 제도”로 인계된 일군의 기업소들에서 “물질적 유인기금”의 46.6%는 관리자들의 월당 상여금으로, 15.5%는 노동자들의 월당 상여금으로, 나머지 급여는 연말 “추가급여”로서 분배됐다. 기업소 책임자들과 휘하의 최측근 관리자들은 “물질적 유인기금”으로부터 기본급여의 22.7%에 달하는 양을 추가급여로 지급받는다.
해당 자료는 또한 이러한 기금으로부터 오는 추가급여의 크기가 기본급여와 비례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기본급여가 높을수록, 추가급여도 더욱 증가한다.
결론적으로, 노동강도 증대를 위한 새로운 생산기법의 여파로 나타난 노동생산성의 상승과 비교했을 때, 가장 먼저 “새로운 시스템”으로 옮겨간 기업소들과 같은 경우 산업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4.7%로 소폭 증가했을 뿐이었다. 반면에, “물질적 유인기금”에서 경영자들의 추가급여는 35% 가량 상승했다. (페이웰, 298, 300, 313쪽)
다음의 수치들은 1966년에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전한 모든 기업소들에 관한 드로기친스키의 통계이다. 물질적 유인기금은 노동자들과 ‘엔지니어와 기술자, 기타 사무원들’로 분류된 이들 사이에서 거의 정확히 ‘평등하게’ 분배되며, 전자는 50.7%를, 후자는 해당 기금의 49.3%를 취득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업소에서 적어도 85%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 유인기금의 ‘평등한’ 분배는 실질적으로 막대한 불평등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야를 “현임추가급여”로, 주급과 월급 등에 기초한 여분의 보수로 좁힌다면, 그 분배량은 무릇 이렇다. 1570만 루블은 노동자들에게, 7270만 루블은 엔지니어와 기술자 및 “기타” 계층에게로 향한다. 다르게 말해, 추가급여 중 18%가 과반수 이상을 점하는 85%의 노동자들에게 향한다면, 15%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고위 관리자들과 기업소 총책임자들은 전체 자금의 82%를 가져간다. ("Economic Reform in Action," in Soviet Economic Reform..., p. 194.)
그러나 추가급여의 역할을 둘러싼 논의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유인기금이 1965년 “코시긴 개혁”의 결과로 기업소 책임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다양한 추가급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셰키노 실험의 참여자로서 관련 주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마네비치에 따르면, 물적 유인기금은 추가급여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1973년의 논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기업소들에서 30개 이상의 추가급여제가 동시에 운영되고 있는 이상, 물질적 유인기금은 여전히 1인당 추가급여의 근원으로 되지 않는다. 이른바 ‘특별추가급여’는 기업소의 평균 일과로 노동자 개인이 물질적 유인기금으로부터 취득하는 전체 추가급여보다도 현저하게 높다.” (Ways of Improving..“, p. 13)
불행하게도,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이행의 첫 번째 단계가 개시된 이후, 소련의 공식 경제학 담론은 누가 기업소들과 연합기업소들에게 남겨진 이윤을 얼마나 많이 착복하는지를 다룬 통계가 정확한지, 덜 정확한지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단순히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마네비치의 연구처럼 총체적인 추산을 내놓은 경우는 매우 보기 드물다. 아마도 국가안보를 위해서이겠지만, 이는 마치 검열도장의 낙인이 찍히기라도 한 것과도 같은 형국이다. 자본의 집중화와 트러스트화의 연이은 물결과 함께, 각기 다양한 산업-금융자본 제국의 수장들에 의해 최고위 인사들의 호주머니에 은닉된 ‘추가급여’는 폭로되는 즉시 무장 봉기의 촉발제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자본의 추잡한 양상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단계로 올라섰을 것이다.
“새로운 경제 시스템” 하에서 소득 분배에 대한 이상의 간략한 조사를 더욱 풍부하게 채우기 위해서는 사회복지 영역에서의 주된 경향들을 개별적으로 소비하기보다, 집단적으로 소비되는 소득유형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며, 이를 주시할 필요성도 생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통계적 비교는 예컨대, 소련과 현대 미국에서 병원의 이용도를 대조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소련에서 기존에 존재했던 공공 복지시설의 수준과 범위는 그 대다수가 소련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넘어가기 오래 전인 옛적 사회주의 시대의 유산이자, 볼셰비키당의 지도로 소련의 노동자계급이 세계에서 당대에 가장 훌륭하며 전 국적인 공공복지시설을 손수 건설했던 시대의 유산이다.
정적인 비교는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역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포괄적인 무상 의료 시스템의 존재가 한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현대 영국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영국의 공공 의료 시스템이 미국보다 훨씬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명백히 사회주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공공 서비스 수준과 범위는 주로 그 나라의 조직화된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반영하며, 그 투쟁의 결실이다. 물론 항상 목표로 삼았던 결실은 아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장악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동계급에 던져진 "뼈"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통계적 비교는 이를 강조했던 부류에게 항상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단초를 제공한다. 예컨대, 전국적 무상복지 시스템의 존재가 사회주의 국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현대의 영국도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앉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비해 영국의 공공의료복지체계의 엄청난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될 수 있어도 이는 단지 아무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공복지의 수준과 적용범위는 주로 해당 국가 내에서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투쟁의 역사를 반영하며, 실로 그러한 투쟁의 산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언제나 노동계급을 진정 방조할 목적으로 주어지는 과실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향한 일보 전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운동에 부과된 “장애물”에 더욱 가깝다.
소련의 신흥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찬탈한 사회복지제도의 막대한 유산으로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가?
이 주제에 대해 소련 학계에서 공공연하게 흘러나오는 담론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다. 이들 경향들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이윤을 만들어내는 “의료복지시설”들이 가일층적으로 강화되어가고 있다. 둘째: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무상시설은 배제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수정주의 소련의 학자들은 ‘유상’ 복지와, 이용자가 의료비를 직접적으로 지불하지 않는 형태를 포함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무상’ 복지를 언제나 구분짓는다. ‘무상’ 복지 서비스 중에는 교육시설과 문화시설ㅡ그러나 반동적 사상교육의 무기로서, 소련의 지배계급을 위해 복무하는ㅡ이 있고, 보건시설과 의료시설, 체육시설이 존재하며, 주택건설 및 유지를 위한 보조금도 존재한다.
소련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중점적으로 논해지는 “무상” 복지의 상대적 중요성은 드로기친스키의 1966~70년 기업소 기금의 성장 추세를 다룬 아래의 통계에서 명실공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소의 “생산발전기금”ㅡ자본투자기금,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증대시키기 위한 기금 등ㅡ은 여섯 배로 증가했다. “물질적 유인기금”ㅡ기업소 총책임자들과 휘하 관리자들의 사적 치부를 위한 기본기금 등ㅡ은 4배로 뛰어올랐다. 무상복지기금(공장 부설 병원과 아동복시설, 그 외 비슷한 종류의 복지시설은 단지 2배로 늘었을 뿐이었다.) “사회문화정책 · 주택기금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됐다. ("The Economic Reform in Action," in Soviet Economic Reform..., p. 207.)
기업소 수입의 분배구조는 다르게 말해, 무상복지를 현저하게 침해하는 뚜렸한 불균등 발전의 효시로 된다. 기업소의 이윤 중에서 보다 큰 몫은 총책임자들과 고위급 관리자들의 호주머니를 채워놓기 위해, 그러한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가는 이윤의 흐름을 넓히기 위해 이용된다. 기업소의 이윤에서 보다 작은 몫은 노동자들의 필요에 따라 활용된다.
무상복지 서비스의 낙후성은 소련의 문헌에서 명실공히 인정되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B. Khomelianskii, "The Sphere of Social and Economic Services and the Reproduction of Aggregate Labor Power," Ekonomicheskie nauki, 1972, No. 4, Problems of Economics, June 1973, p. 55.) 경제학자 코마로프의 완곡한 어법에 따르면, 1972~75년 ‘계획’은 “유상복지 서비스의 보다 급격한 증가율을 요구하고 있다.”
유상복지 서비스는 대중교통과 통신, 여가시설, 휴양시설, 여행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와 같은 서비스의 “발달”이 급격하게 이뤄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쩌면 “유상복지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영역들은 (..) 대체로 수익을 높게 창출하며, 투자에 대한 조기상환이 아무런 차질없이 진행된다”는 코마로프의 관측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상복지 서비스는 국가에게, 그리고 기업소 지배인들에게 추가적인 수입원으로서 기능한다. ("The Service Sphere and Its Structure," Voprosy ekonomiki, 1973, No. 3, in Problems of Economics, July 1973, p. 9.)
다르게 말해, 복지 ‘서비스’의 영역에서도 “이윤이 모든 것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비스’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한 부가적인 수단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단지 부르주아지를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서비스들’에 불과하다.
복지 서비스 영역에서 근래의 변화는 쇠퇴일로에 있는 무상복지 영역과 나란히 선 새로운 “유료” 시설들의 출현했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에 관해 경제학자 루트가이저는 “비용계산에 기초하여 운영되는 유상종합병원”의 성장에 주목한다. 쉽게 말하자면 진료비를 지불하며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윤을 만들어내는 병원들의 성장에 주목하는 것이다. 루트가이저는 세부적인 내막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유로종합병원들이 부르주아 환자들에 한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병원들을 이용할 수 없다. ("A Comprehensive Plan for the Development of the Service Sector." Planovoe khoziaistvo, 1973, No. 2, in Problems of Economics, Sept. 1973, p. 49.)
부르주아지를 위한 보건체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보건체계를 모두 일컫는 “계급의료”는 소련에서 보다 현저히 출현하고 있다. 의사와 전문 의료진, 의료장비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만의 전용 병원은 일반 인민들을 위한 의료시설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질을 자랑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는 노동계급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1965년에 채택된 “새로운 시스템” 하에서 소련 전역에서 복지 서비스의 변화를 반영하는 이러한 추세를 지켜보면서, 루트가이저는 [“1965년 체제”가] 대표하는 불평등에 충격받은 나머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상복지 영역의 축소와 유상복지의 형태를 띤, 인민의 필요에 대한 가일층적인 충족은 오직 일정한 한도 내에서만이 가능하며, 그 이상으로는 각 가정마다 상이한 자본소득의 등급에 따라 복지 혜택의 차등화가 적용될 수도,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p. 49.)
“실행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불합리한 임금 차등화”에 대한 이 갸날프고도 병적인 불안증―차등화가 실시되고, 나날이 그 세기를 더해가며 가일층적으로 나타나는―은 소련의 공식 이론의 앙상한 틀 안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위대한 원리들 속에 남은 전부이다.
24. 결론
최근 소련에서의 사태의 전개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이제는 이 지난한 연재물에 대해 종합하고, 결론을 내릴 시간이다.
한 가지 결론은 분명하다. 진보적인 것에서 반동적인 것으로의 퇴보는 개개인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들의 사회제도에서도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피억압 계급과 민족의 해방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지만,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굴곡과 퇴보를 거칠 수밖에 없다.
중세 말 독일에 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통찰력은 이 점에서 많은 교훈을 제공한다. 엥겔스는 13세기와 14세기에 독일의 소작농들이 예속과 농노의 신분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 ‘자유민’으로 됐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이후로 소작농들은 완전히 정반대의 처지로 전락했다. 어느 순간부터 “제 2의 농노제”가 도래했다. 엥겔스는 “두 번째로 출현한 농노제”에 대해, 이 “새로운 농노제”가 기존의 농노제보다 전혀 온건하지 않다는 서술을 덧붙였다. 소작농들이 다시 한 번 속박의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Letters to Marx, Dec. 15 & 16, 1882, quoted in Pre-Capitalist Economic Formations, E. J. Hobsbawm, ed., pp. 145-147.)
엥겔스는 이와 관련해서 “중세 이래로 더 나은 삶을 위한 꾸준한 진보가 틀림없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는 그로 하여금 현존하는 진보의 적대적 성격 뿐만 아니라 개별적 후퇴조차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부르주아 역사학자 마우러(Maurer)를 비판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에도 1917년 이래 소련의 역사가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 꾸준한 성장을 보였다―근래의 퇴행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각―는 관점 역시 과학적 판단으로서가 아니라, 검증을 거치지 않은 한낱 편견으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앞선 장들에서 제시된 증거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소련의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사회주의가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차르 치하와 유사한 제2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치하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물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소련 당국에게서 화려한 예복을 입은 채, 향으로 그윽한 분위기에서 재판을 열 것이라는 기대를 결코 품지 말아야 한다. 복장과 형태는 변화했을지라도, 단지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그랬던 것보다 숫적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상대적으로 우세하며, 집중화의 비율과 문화적 수준도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차이들이 균등하게 다루어지고, 좁혀질 때 핵심적인 공통점은 명백해진다.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시 한 번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도 그랬듯이,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의 소유를 박탈당한 처지로 전락했다. 노동의 과실은 다시 한 번 사회에 기생하는 공무원들과 관료들의 군대―그 주력군은 맑스가 말한 “자본의 인격화”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를 주로 살찌우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는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40년에 가까운 기간이 단지 시행착오로 점철됐거나, 모든 것이 부질없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일정하게 있었다. 하지만 이를 거치지 않고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인미답의 길에 감히 내딛을 수 있었겠는가? 이 시기의 투쟁은 소련 인민에게 헤아릴 수 없는 진보를 선사했으며, 제국주의와 모든 종류의 반동세력에 대항하는 전 세계적 투쟁에 막대한 공헌을 남겼다. 소련의 노동자, 농민들은 공산당의 지도로 세계 만방의 피억압, 피착취계급에게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이는 결코 폄하되거나 망각될 수 없다.
오늘날 소련 당국은 소비에트 인민이 수행한 혁명적 실천의 계승자이자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세부적으로 다룬 모든 검증된 문헌들은 혁명의 연속성이 단지 수정주의자들이 반복하는 몇 가지 단어와 어구들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줄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사실상 혁명적 노선과 완전히 결별했으며, 이론적 성과와 성취들을 하나둘씩 공격했다. 스탈린 지도부에 대한 악의적인 중상모략부터 시작해서, 수정주의자들은 소련의 국유 자산을 경매장에 팔아넘겼고, 공업 부문을 관장했던 중앙계획부처를 파괴했으며, 맑스-레닌주의자들을 출당시켰고, 맑스주의의 핵심 교리와 결별을 선언했으며,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파괴했고, 반사회주의적, 반공주의적 성격을 지닌 폭거들을 자행했다. 흐루쇼프의와 브레즈네프의 진정한 정치적 뿌리는 스탈린과 레닌이 아니라 당이 오래 전에 분쇄했고, 배신자들로, 내통자들로 전락한 우익 기회주의 및 “좌익” 기회주의 분파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진정한 계급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들 스스로 소련 경제에서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도입한 조치들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그동안 수정주의 지도자들이 위선적으로 ‘공산주의를 향한 전진’이라는 표어에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같다붙이고 있는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레닌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묵도했다.” (16장)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특징은 실제로 무엇인가? 소련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다시 상품으로 바뀌었다. 실업의 망령은 되살아났다. 무제한적인 노동강도와 속도전은 현실이 됐다. 실업예비군으로 ‘해고’됐을 때, 노동자들은 생산의 고지에서 모든 권리를, 모든 지지수단을 상실했다.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산주의를 향한 전진은 없다. 이는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생산관계의 복원을 의미하며, 임금노예제적, 착취적 성격을 그 속에 부여할 뿐이다.
수정주의자들은 공업의 기초적인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에서 상품으로 다시 한 번 변모시켰다. 노동계급과 그 동맹세력의 정치적 우선권에 입각한, 생산수단에 대한 계획적 투자를 대신하여, 구매자와 판매자의 협소하고,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에 따른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생산수단에 대한 상거래가 존재한다. 이는 레닌이 1899년경에 레닌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최초로 분석한 바 있는 요점을 재반복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각 기업소 경영진이 “기업소”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을 아무런 제약 없이 터주는 계기를 제공했다. 소련의 수정주의 통치배들은 사회주의적 동기와 사회주의적 인센티브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으며, 생산과 분배, 투자와 복지혜택의 분배에 있어 이윤의 극대화를 주된 동인으로, 궁극적인 목표로 치켜세웠다.
수정주의자들의 “신경제체제”가 위기로 인해 허우적대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래가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시인해야 했을 정도로 경제 ‘계획’이 사문화된 종잇조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이제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본주의적 독점체들이 경제 전반을 모두 장악한다고 한들, 자본주의 국가가 이들 독점체들과 얼마나 결합되어 있다고 한들, 소련만큼 흠잡을 데 없이 발달한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시간과 세월이 지나도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로 남을 뿐이며, 단지 보다 큰 규모의 혼란을 재생산하기만 할 뿐, 생산의 무정부성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
수정주의자들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의 첫 번째 단계와 같은 경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황에 따라 요구됐던 일시적 전략적 후퇴로 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오히려 영구적인 후퇴를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는 경제생활의 협소한 “호주머니”에 철저하게 구속되어 있거나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이 “새로운” 관계는 소련 전역에 목적의식적으로,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도입된 전체적인 시스템의 주요한 골간을 이루고 있으며, 일찍이 1968년(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정확히 같은 해이다.) 말엽에는 70% 이상의 기업소들에 도입됐다. 자본주의는 완전히 복원됐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의문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체제가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만들어낸 소련의 신흥 부르주아지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유산들-부르주아적 권리-의 영향에 힘입어 성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이는 일정한 형태를 지녔으며, 주위 환경에 표면상으로는 완전히 동화된 것처럼 보였다. 수십년 동안 부르주아지는 권력도, 재산도 없었지만, 바로 그랬기에 굶주림에 허덕일수록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욱 잔인하게 행동했다. 상이한 부르주아적 분자들이 서로 어떻게 접선했고, 조직되어 공통의 의식과 강령을 갖추게 됐는지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혁명정부에 대한 음모의 자세한 내막에 굳이 천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계급으로서 이들의 역사 속 주요한 특징들에 관해 몇 가지 통찰을 취득할 수 있다.
만국의 부르주아는 거짓을 일삼고, 기만하며, 속이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두 번째 본성”이다. 그러나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계급으로서 스스로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있어서도 거짓말을 일삼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들의 지배계급을 뛰어넘는다. 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그에 반해 평소대로 자신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굴리는 자본가들이라는 것을 최소한 솔직하게 인정한기라도 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건 하에서 성장한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시작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했다.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40여년 전에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자본가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인 척 했던 독일과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의 가장 반동적 분파에 의해 채택된 최후의 속임수를 모방한다.
이러한 참주선동은 현대 소비에트 부르주아지의 “후천적 특징”일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성질의 것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어문학 사전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수정주의는 ‘레닌주의’로 불리며, 제국주의적 침략은 ‘연대’로, 착취는 ‘원조’로, 주권침해는 “평화유지”로, 아첨꾼들과 매판 자본가들은 “독립적 정책”을 추종하는 “애국자”들로 윤색되고, 우익은 “좌익”으로, 파시즘은 ‘민주주의“로, 반동은 ”진보“로 불리어진다. 세계의 모든 곳을 둘러보아도 맑스-레닌주의의 근본 원칙에 대한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체계적인 전복행위만큼 악랄한 행태는 그 어디에서에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두 번째 요점은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다. 흐루쇼프를 필두로 한 소련의 수정주의자들이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도입한 근본적인 수정안들은 모두 유연하고, 조화로운 하나의 연결 고리를 품고 있다. 계급사회가 하나의 행복한 대가정으로 될 수 있기라도 하듯, “전인민국가”와 “전 인민의 당”이 있고, 첫 단어가 “평화”로 시작하는 흐루쇼프의 세 가지 정책(평화적 공존, 평화적 경쟁, 평화적 이행)은 서로 조화로운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는 1964년 6월에 “전인민의 당” 지도부의 과반수 이상이 흐루쇼프를 실각시켰을 때, 그 흐루쇼프로 하여금 군사적 개입이라는 고전적인 게릴라 전술에 기대는 것을 예방하지 못했다. 수정주의적 통치는 본래 무력을 통해 공고화되며, 무력을 통해 유지된다. 소련의 “새로운” 국가론과 국제관계에 대한 이론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고, 반(反) 맑스주의적이며, 사회평화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동전의 일면만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조화로운” 거짓말, “평화”의 탈을 쓴 감언이설은 국내외에서 타국의 지배계급이 그렇듯이, 반동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구사하는 계급을 위한 위장막에 그칠 뿐이다. 소련 수정주의는 스스로를 보다 효과적으로 감추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 제국주의 패권 경쟁의 무대에 올라선 만큼,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에 비해 살인광적인 이미지를 비교적 덜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금융자본 부르주아는 비록 제국주의 단계에 새롭게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순수한 혁명정신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의 보다 “젊은” 계급으로 되지 않는다. 말로는 사회주의를 외치는 소련의 제국주의자들(줄여서 ‘사회제국주의자들’)은 미국 제국주의가 약화되고 쇠퇴할수록 세계 각지에서 지반과 영향력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가 약화일로를 걷는 동안, 소련 사회제국주의는 전략적 공세에 모든 전력을 투사한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매서운 채찍질은 임종을 앞둔 오랜 경력의 집단살해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련의 현 지배자들은 70여년 전 혁명적 소련 인민들에 의해 일찍이 매장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계급을 대표하며, 살아있는 생명체들에 맞서 제 2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마땅히 잠자코 있어야 할 무덤에서 부활한 계급을 대변한다.
과거에 반동적인 계급에 대한 반란을 통해 정권을 획득했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현재 군림하고 있는 부르주아지와 다르게, 오늘날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일말의 진보적 성격도 가지지 않고 않다. 진보적인 계급―세계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계급이기도 했던―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오늘날 소련의 부르주아지는 진보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중대한 역사적 반동이라는 대후퇴를 의미했다. 이들의 통치는 오직 소멸 직전에 놓인 전 세계 부르주아지의 일정한 층위들, 제 2의 삶을 언젠가 얻기 위해 약육강식적 사냥과 음모를 마다치 않는 층위들한테 희망을 불어넣는 데에 그친다. 소련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제국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보다 ‘선진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부후화와 생존을 향한 절박한 열망을 대표했던 것처럼, 오직 극우반동적 의미에서 미국 제국주의보다도 더욱 “선진적”이다.
소련에서의 역사적 후퇴의 결과가 세계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시간이나 지면을 할애해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에 대해 역사가 교훈을 제공한다면 한 가지는 명백하다. 어떤 형태로든, 조만간 소련에서 고착화된 임금노예제와 제국주의적 폭압의 광포한 부활이 제 2의 10월 대혁명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쓸려나가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러한 시대에서 자본주의적 질서의 복원은 독일에서 “천년왕국”[원문 표현은 thousand-year Reich이다.]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공고하지도, 영구적이지도 않다.
인터내셔널가 후렴의 첫 번째 소절은 “들어라, 최후 결전의 외침을”으로 시작된다. 만약 해당 소절이 문자적 의미에서 협소하게 해석된다면, 이번 세기에 프롤레타리아의 국가권력 장악에 적용됐던 사상은 치기어린 발로로 된다. 소련의 경험이 엄연하게,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주의의 전 시기 동안 두 적대계급 사이에서 투쟁은 지속되며, 오랜 기간동안 최종적으로 종결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비극도, 모든 퇴행도, 자본주의 복원의 모든 순간들도 노동계급에 대한 유진 포티에르의 장중한 소절들에 담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위력을 완전히 사장시킬 수 없다.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국제노동계급은 역사의 참 주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