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시즘의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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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시즘의 벗이다

AfD의 약진은 AfD 혼자 만들지 않았다. 기성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 자칭 ‘온건’ 세력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보수우익 정당인 기독민주연합은 오랫동안 AfD와의 협력과 연립을 거부하는 이른바 방화벽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AfD가 우익 극단주의 세력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징하게 밝혀진 후에도 기독민주연합은 AfD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며 AfD의 호위무사 노릇을 해주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시즘의 벗이다 :

AfD의 약진과 방어적 민주주의의 실체

개요

2025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20.8%를 획득하며 득표율 2위를 기록했다. 2021년의 10.4%에서 정확히 두 배가 된 수치다. 그리고 올해 2026년 9월, 작센안할트 주선거에서 AfD는 제1당으로 올라섰고 과반에 근접했다. 전후 독일 정치가 오랫동안 주변부에 가두어두었다고 믿었던 파시스트 세력은 이제 연방의회의 최대 야당이며, 일부 동부 지역에서는 집권을 현실적으로 논할 정도의 세력이 되었다. 세계전역의 반파시스트 투쟁과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에 의해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추방 당했던 나치 세력이 다시금 독일에서 수권을 노리고 있다.

적지 않은 부르주아 논자들은 극우의 위협을 인정하면서도 AfD는 나치가 아니라는 신중한 의견을 펼친다. “AfD는 나치가 아니다.” 과연 그런가? 나치 SA의 구호를 사용해 유죄판결을 받은 회케는 당에서 축출되지 않았다. 그의 세력인 플뤼겔은 공식적으로는 해산 절차를 밟았지만 오히려 이후 당내에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네오나치 집단으로 분류된 당의 청년조직은 간판을 바꿨지만 그 인맥은 이어졌다. 비교적 온건한 행세를 하는 AfD 대표 알리스 바이델은 실질적으로 비요른 회케와 함께 당을 이끌고 있다.

이는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누가 당내투쟁에서 승리했는가를 보자. AfD 내의 소위 ‘온건파’는 밀려났으며 회케의 측근들이 당의 주요 조직을 장악했다. AfD가 1933년의 NSDAP와 똑같지 않다고? 당연하다. 파시즘은 박물관의 전시품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사회 내의 불만을 억제하고 민주적 제권리를 파괴하여 노동계급을 제압하기 위한 실천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분명 독일연방공화국이 소위 방어적 민주주의, 즉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극단주의로부터 헌정과 공화국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형태의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당장 80년 전에 수백만을 도살한 정치세력과 유사한 집단의 성장을 방관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AfD의 해산조치는 도무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인가?

이 글에서는 독일이 표방하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실체와, 파시즘을 격퇴하기 위한 실천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길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방어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독일의 방어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관은 헌법수호청이다. 헌법수호청은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세력을 감시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보기관이다.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기관을 바이마르의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이라고 설명한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적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자유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헌법수호청과 독일연방공화국은 AfD 파시스트 집단에게 독일을 파괴할 자유를 적극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 독일연방공화국은 조금도 유약하지 않았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건국되었을 때 독일의 지배계급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었다.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 있었고 유럽 곳곳에는 강력한 공산당들이 존재했다. 독일 노동운동에는 혁명적 전통이 아직 살아 있었다. 서독의 새로운 국가기구가 건설되는 바로 그 순간, 반공주의는 국가질서의 중요한 구성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국가는 놀라울 정도로 결단력이 있었다. 서독정부는 1951년에 자유독일청년단을 금지하였다. 1956년 독일공산당(KPD)을 금지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수사와 탄압이 벌어졌다. KPD는 서독정부에 맞선 무장봉기나 반란을 계획한 적 조차 없었다. 1972년에는 소위 급진주의자 결의가 채택된 뒤 수많은 공직지원자들의 정치활동이 감시 당했다. 헌법수호기관은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자, 급진좌파, 혁명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감시했다. 이것이 독일 ‘방어적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다.

급진주의자 결의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급진주의자 결의의 형식적 내용은 공무원이나 공무직을 수행하고 있는 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당 결의는 겉으로는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광범위한 국가적 반공테러를 위해 사용되었다. 공산주의자와 급진좌파들의 공직채용이 금지되었고, 어느 집회에 언제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명이 직장에서 추방 당했다. 교사가 되려는 공산주의자, 철도에서 일하려는 공산주의자, 우편물을 배달하려는 공산주의자, 급진좌익정당을 지지하는 하급공무원, 국가는 그들을 청소하고 추방했다.

이것이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찬양해 마지않은 ‘방어적 민주주의’다. 우리는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여줄 생각이 없다. 그것은 계급지배를 위한 적극적 테러였다. 모든 국가는 특정한 계급의 국가이며, 모든 헌법질서는 특정한 사회적 소유관계 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국가가 말하는 ‘헌법에 대한 충성’은 추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한 충성이다. 그 질서를 폐지하려는 자는 위험한 극단주의자가 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외국인과 노동조합과 좌익과 여성과 소수자를 공격하는 자는? 국가는 갑자기 관용의 원칙을 운운하며 복잡한 고민을 시작한다.

독일 국가는 방어적 민주주의 철퇴를 항상 좌익들에게만 무자비하게 휘둘러왔다. 그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테러라도 저질러서? 인민군대를 건설해서? 집권 가능성이 있어서? 모두 아니다. 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질서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독일 ‘방어적 민주주의’의 비밀이 있다. 민주주의를 ‘무엇으로부터’ 방어해야 하는가의 기준은 폭력성이나 반민주주의성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서독 국가와 공안기관이 진정 ‘방어’를 위한 철퇴를 휘두르려는 대상은 언제나 사적 소유와 독점을 공격하는 자들, 노동력의 상품화를 위협하는 자들,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자들이었다.

헌법수호청은 변질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변명을 거부해야 한다. 헌법수호청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 당뇨에 걸리고 싶지 않으므로 그 거짓의 솜사탕 속에 얼굴을 처박고 설탕 조각들을 혀로 핥아대지 않겠다. 애초에 헌법수호청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가? 그 기관의 역사적 실천을 보자. 공산주의자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동독과 연결된 사회단체들을 해산하고 급진좌파를 상대로 공작을 벌였다. 혁명적 노동운동을 와해시키는 데 언제나 일조해왔고, 오늘날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부정하는 좌익은 당연히 헌법수호청의 적극적인 감시대상이다.

헌법수호청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헌법수호청의 목적은 오늘날 일어나고 잇는 계급투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헌법질서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독일국가의 구성원리, 즉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독점자본에 의한 계급지배를 수호한다.

따라서 헌법수호청은 관료적으로 변질된 기관도, 단순히 게으르거나 보수편향적일 뿐인 기관도, 어쩌다가 반공주의적으로 타락한 기관도 아니다. 그들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기능을 합목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가 침략과 반란진압을 위해 존재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경찰이 노동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존재하듯이, 헌법수호청 또한 부르주아 국가의 자기보존을 위해 존재한다.

NSU 사건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이다. NSU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활동한 네오나치 지하조직이다. 그들은 이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활동을 펼쳤으며, 폭탄투척과 은행강도, 연쇄살인 등의 무장행동을 펼쳐왔다. 이런 종류의 무장단체가 7년 간 검거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꽤나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네오나치들이 레닌을 읽고 철의 규율이라도 학습한 것일까? 물론 그럴 리 없다. 위대한 독일 자유민주주의 공안기관은 이들의 존재를 파악하고도 이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애초에 NSU 내부에는 헌법수호청의 정보원들이 침투되어 있었다. 휴민트들을 대량으로 심을 수 있을 정도로 헌법수호청은 해당 조직에 대한 광범위한 개입이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헌법수호청은 NSU가 이주민들을 도살하는 동안 정보원에게 돈을 지급하여 정보를 수집했고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NSU는 또다시 헌법수호청에 받은 돈으로 폭탄을 만들어 이주민들에게 던졌다. 사건이 폭로된 뒤에는 헌법수호청 내부의 관련 문서가 파기된 사실까지 드러났다.

헌법수호청이 NSU에게 구체적으로 살인을 명령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파시스트 조직을 감시한다는 국가기관이 파시스트 조직과 지원-피지원 관계를 맺었고, 그 조직환경에 국가의 돈이 흘러들어갔으며, 검거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검거를 실행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네오나치 테러리스트들은 테러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NSU가 네오나치 지하조직이 아니라 공산주의 지하조직이었다면, 그들이 이주민이 아니라 자본가들을 죽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공주의 국가장치와 극우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상황에서 이들은 한 몸이었다.

늑대에게 양을 더 공정하게 감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헌법수호청이라는 이름의 늑대는 양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뿐, 주인이 양들을 도살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다. 도살 당하고 싶지 않은 양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인을 죽이고 늑대를 솥에 삶는 것 뿐이다.

AfD는 어떻게 성장했는가

AfD의 약진은 AfD 혼자 만들지 않았다. 기성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 자칭 ‘온건’ 세력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보수우익 정당인 기독민주연합은 오랫동안 AfD와의 협력과 연립을 거부하는 이른바 방화벽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AfD가 우익 극단주의 세력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징하게 밝혀진 후에도 기독민주연합은 AfD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며 AfD의 호위무사 노릇을 해주었다.

논리는 언제나 같았다. 법적으로 어렵다, 정치적으로 신중해야 한다, 금지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수백만 유권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등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에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우익들의 섬세하고 여리여리한 양심이 파시스트 앞에서만 갑자기 발견되지 않는가? 마치 유색인종만 보이면 발작적으로 납탄을 발사하는 미국 경찰들이 중산층 백인 앞에서만 절차를 지키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그리고 결국 독일의 우익들은 작년에 본색을 드러냈다. 2025년 1월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이끄는 기독민주연합이 자신들이 발의한 이민제한 결의안을 AfD과의 협력을 통해서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기민련은 파시스트가 설정한 의제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표로 의회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자신들이 파시스트들과 결코 연립정권을 세우지 않는 고결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AfD가 국경과 이주민을 문제 삼으면 기민련은 더욱 강경한 이민정책을 들고나오며, AfD가 복지 수급자들을 악마화 하면 기민련은 그것을 정상정치의 언어로 번역하며 긴축안을 들고 나온다. 기민련은 AfD에 대한 방화벽을 친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일관적인 태도로 AfD를 옹위해왔으며, 그들의 성장을 도왔다. 파시즘을 정부에 넣지 않으면서 파시즘의 정치적 언어를 정부정책으로 옮기는 것, 파시스트를 장관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파시스트가 설정한 의제에 국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날 독일의 제도권 우익들이 지배계급의 명령을 따라 수행하고 역할이다.

반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좌파당은 어떠한가?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반파시스트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단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재군비, 재무장, 재군국주의화를 의회에서 열성적으로 추진하며 독일 사회 전체를 우경화 시키는 데 부역하고 있다. 원내의 최좌익을 표방하는 좌파당 또한 군국주의와 세계전쟁에 반대하는 원칙적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병기 지원을 지지하는 전형적인 사회배외주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독일 원내의 그 어떤 정당도, 파시즘에 맞서 투쟁할 의지와 역량을 지니고 있지 않다.

파시즘을 끝내려면 파시즘을을 낳는 세계를 끝내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 부르주아 의회, 군대, 경찰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헌법수호청은 더더욱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위에서 존재하고 그 사회관계의 재생산을 보증하는 국가장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법수호청에게 파시즘을 물리쳐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 헌법수호청 자체가 파시즘의 벗이며, 모든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들의 투쟁대상이다.

기독민주연합이 더 높은 방화벽을 쌓기를 기대하는 방식으로도 파시즘에 맞설 수 없다. AfD의 의제를 받아들이고 AfD의 표를 이용한 바로 그 보수주의가 파시즘에 맞설 보루라는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수십년 전에 이미 반파쇼봉기를 거부하고 나치에 굴복했던 사민당에게 특정한 역할을 기대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다. 독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부역하고 있는 좌파당이 노동계급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 믿는 것 또한 심각한 수준의 정치적 오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을까? 파시즘을 물리치려면 파시스트만 물리쳐서는 안 된다. 파시즘을 요구하는 제국주의 금융자본을 분쇄하지 않는 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파시즘에 이끌리도록 만드는 실업과 공황을 멈춰 세우지 않는 한, 파시즘에 부역하고 협조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파괴하지 않는 한,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계급 지배를 멈춰 세우고 노동계급의 독재권력을 수립하지 않는 한 파시즘은 영구적으로 격퇴될 수 없다.

물론, 혁명적 노동계급은 파시스트를 격퇴하기 위해 사회민주당과, 좌파당과 일시적으로 연합하고 통일전선에서 공동투쟁을 기획할 수 있다. 특정한 상황이라면 기독민주연합과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공배수의 강령을 내걸고 일반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유약하고 내걸어 파시스트 세력을 포위하는 것은 필요한 전술이다. 나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 기회주의 세력을 노동계급의 지도력 아래 두고 그들을 폭로 및 비판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근로대중들의 지지를 끌어오는 것 또한 전세계에서 혁명적 노동계급 당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취해왔던 전략노선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통일전선을 기획하고, 통일전선 내에서 영도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수행하고, 동맹들에 대한 지원과 비판, 폭로를 동시에 진행할 정치적 주체이자 노동계급의 최고사령부인 공산당의 건설이 선행 되어야만 한다.

그 어떤 기회주의, 의회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직장에서, 거리에서, 인민대중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에서 파시스트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친파시스트 국가기관에 대한 분쇄와 타격을 일관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혁명적 노동계급의 당인 공산당 뿐이며,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의 올바른 구성은 총체적이고 전 사회적인 강령을 지닌 공산당이 그 통일전선 안에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독일 인민들이 파시즘을 이겨낼 수 있을까? 독일의 노동자들이 독일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타격하여 세계혁명과업에 유의미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오직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만이 파시즘을, 군국주의를, 제국주의를 격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독일의 이야기는 독일에서 끝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익히 기억하듯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국회에 군대와 경찰을 투입했다. 계엄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고 대통령은 이듬해 파면되었다. 헌법재판소는 계엄선포와 군경의 국회 투입 등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에게 이 사건의 결론은 명백하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국회가 계엄을 해제했고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했으며 선거가 다시 실시되었으니 헌정질서는 승리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계급이 정말로 여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윤석열은 파면되었다. 그러나 윤석열이 지휘하던 군대와, 윤석열을 옹위하던 파시스트 국민의힘, 윤석열의 계엄에 동조한 경찰 및 검찰조직, 국정원, 파시스트 공안통치의 수단인 국가보안법 중 그 어느 것도 청산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사라졌지만 그에게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할 권력을 부여했던 국가기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국가기구가 수호하는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체제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독일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국가의 구성원리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 통일운동과 학생운동, 혁명적 좌익은 오랫동안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은 ‘반국가활동’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한다. 미제국주의 부역자와 파시스트들이 미군의 보호 아래 반식민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후로 1987년까지 한국은 일시적인 단절을 제외하고는 항상 파시스트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였으며, 87년 이후에도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요소와 파쇼적 요소가 혼합된 기형적 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노동계급의 가장 믿음직한 반파시스트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KPD를 금지한 기관과 AfD에 부역하는 기관은 서로 다른 기관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민주노총의 시위를 무력진압하는 경찰과 극우시위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경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 아니다. 문제는 국가기구를 어느 선량한 정치인이 지휘하느냐가 아니라 그 국가기구가 어떠한 생산관계 위에 서 있으며 어느 계급의 지배를 재생산하느냐에 있다.

그렇기에 2024년의 계엄을 단순히 ‘민주주의 대 독재’의 대립으로만 기억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노동계급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과 조직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 권리를 파시스트에게 순순히 내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반민주주의적 권리를 방어하는 것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노동계급의 최종적인 정치적 전망으로 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파시스트의 계엄에 반대하기 위해 자유주의자와 같은 거리에 설 수는 있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자의 국가관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파시스트가 노동조합을 파괴하려 한다면 그것을 저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을 합법화한 부르주아 국가가 노동자의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은 계급투쟁의 일부이지 계급투쟁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의 경험은 한국의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문제를 던진다. 파시즘이 성장할 때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뒤로 노동계급을 줄 세우고, 극우보다 덜 나쁜 후보를 선출하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으로 반파시즘을 대신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한 번, 두 번, 열 번 극우를 선거에서 패배시킨다고 하더라도 실업과 불황, 주거비와 가계부채, 비정규직과 산업재해, 노동자의 정치적 무력화와 독점자본의 지배가 그대로라면 그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계급적 출구를 갖지 못한 분노는 저절로 진보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파시스트는 바로 거기서 힘을 얻는다. 자본가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이주노동자에게 돌리고, 계급적 불평등을 성별과 세대의 전쟁으로 바꾸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이 만들어낸 위기를 외부의 적과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증오로 바꾼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로 대중의 불만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파시스트가 그것을 자신의 정치로 조직한다.

따라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노동계급이 자기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파시즘에 반대한다고 해서 자유주의 세력의 꽁무니를 따라다닐 이유는 없다. 반대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세력이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배계급 간의 싸움’이라며 냉소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일반민주주의적 요구를 둘러싼 공동투쟁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정치적 종속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필요한 곳에서는 가장 넓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계급노선을 포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노동계급이 자신의 깃발을 접고 부르주아 정당의 깃발 아래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통일전선은 혁명적 노동계급의 헤게모니와 영도력을 동맹계급계층을 향해 확장하기 위한, 전체 민족-국민적 의지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공동으로 타격해야 할 적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할 민주적 권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계급적 이해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계급적 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동일한 전선에서 함께 싸울 수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상호 이해가 다른 형태의 공동투쟁 속에서 누가 끝까지 싸우고 누가 타협하며, 누가 파시즘의 뿌리를 공격하고 누가 그 가지 몇 개만 잘라내려 하는지가 대중 앞에 드러나게 되어있다. 노동계급은 가장 전투적으로 파시스트들과 싸워 전체대중의 이해를 가장 헌신적으로 방어하면서도, 독자적 발언권과 폭로할 역량을 잃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결국 조직의 문제로 돌아온다. 자연발생적인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계엄에 분노한 수백만의 대중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분노가 자동적으로 노동계급의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파시즘에 대한 증오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투쟁은 저절로 정치투쟁이 되지 않고, 정치투쟁은 저절로 혁명적 정치로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영속적이고 집단적인 의지를 체현할 현대의 군주가 요구된다. 흩어진 투쟁을 하나의 계급적 전망으로 결집시키고, 개별적인 모순 속에서 전체를 발견하며, 대중에게 배우고 다시 대중에게 집중된 정치적 노선을 돌려주는 조직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은 거대한 수적 힘을 가지고도 부르주아 정치의 관객으로 남을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파시즘이 청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국가에서 우리가 막연히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정치적 가능성이 얼마나 빠르게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그리고 체제와 국가 내에 잔존한 파시스트 부위가 필요 시 어떤 식의 결단을 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독일의 노동계급이 헌법수호청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없듯 이,한국의 노동계급 역시 자신의 운명을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선의에 맡길 수 없다.

이번 사례에서 독일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AfD만이 아니다. AfD를 낳은 사회를 보아야 한다. 헌법수호청만이 아니라 헌법수호청을 필요로 하는 지배계급을 보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 한 사람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대통령에게 군대를 내어준 국가를 보아야 한다. 그 국가를 자신들의 집행위원회로 삼고 있는 관료독점자본가들을 보아야 한다. 극우 유튜버 몇 명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언어가 대중의 불만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노동계급을 해체하고 대중을 정치적으로 무력화한 사회적 관계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파시스트가 다시 나타날 때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악순환 자체를 보아야 한다.

파시즘은 오직 노동계급이 약할 때면 강해질 수 있다. 노동계급의 조직이 사라진 곳에 파시스트의 조직이 들어서고, 계급정치가 사라진 곳에 인종과 민족과 성별과 세대의 정치가 들어선다. 독일의 사례가 한국 노동계급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혁명적 당을, 전위와 간부들의 정당을 건설하여 정치적 주체로 서지 못한다면 그 어떤 수단으로도 파시즘을 격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과 전체 근로대중은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파시즘이냐, 혁명적 당건설이냐!

파시즘이냐,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이냐!

파시즘이냐, 신민주주의 혁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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