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운동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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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운동의 종말

최근의 광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연대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사람은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하던가. 사회운동이 파편화 되고 사회 전체의 극우화가 가속될 수록 연대라는 기표는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도구로 호명되고는 한다. 예컨대, 노동운동, 생태운동, 여성운동, 소수자운동, 평화운동, 이주민운동, 그 외의 수많은 의제운동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대해야 한다. 각 운동의 당사자들은 모두 소위 ‘사회적 약자’이며 힘을 합쳐 강자에게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은 ‘같은 편’이며, 서로의 힘을 합쳐 광장에 나선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소위 말해지는 ‘사회적 약자’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길 때가 더욱 많다.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일자리 감소의 원인이라 생각하며, 여성들은 트랜스젠더를 여성인권향상의 걸림돌로 여긴다. 무슬림은 성소수자 인권을 탄압하는 악의 축이며, 페미니즘은 남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협한다. 이것이 대중의 인식이다. 이 중에서 나름의 ‘전향적인’ 인식을 가지고 ‘연대’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다수가 특정한 조직의 간부 내지 관료들이다. 이들의 기계적이고 병렬적인 연대론은 대중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들은 무식하고 증오로 가득찬 존재이기에 연대를 거부하고 극우적 담론에 젖어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와 물신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전체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며, 즉자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식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이 상태에서 어떤 집단이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뭉칠 때,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가장 쉽고 가깝게 보이는 곳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대중이 구조적 원인을 인지하지 못하고 쉬운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 대한 증오를 통해 협소한 소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이 아니라, 즉자적이고 협소한 인식 내에서는 어찌 보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중들 앞에서, 폭넓은 연대를 주장하는 일련의 활동가 무리는 ‘우리 모두가 약자’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주장을 제시할 뿐이다. 이들은 각각의 억압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상호연계 하는가를 논하지 않으며 그저 기계적으로 여러 운동들을 병렬 시켜놓고 그 모두가 ‘같은 편’이라는, 좋은게 좋다는 식의 언사를 반복한다. 사회구조를 분석하고 억압과 모순의 기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모든 억압이 연결되어 있다는 일반론을 기계처럼 늘어놓은 결과, 대중들은 소위 사회운동을 한다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탁상공론으로 취급하게 되기에 이른다.

대중들에게 정말로 타 집단과의 연대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여러 사회적 집단들이 받고 있는 억압이 어떤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모순으로부터 파생되어 있는지, 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으며 어떤 정치적 전략을 통해 모순의 해소를 이뤄낼 수 있는지를 논해야 한다. 사회 전체를 하나의 전일적인 세계관으로 조망하고, 현실에 발을 딛은 공통된 달성목표를 위한 공동투쟁을 기획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많은 ‘좌파’들에게 ‘시대착오적 거대담론논리’ 내지 ‘자생성과 다원성을 짓밟으려는 간악한 스탈린주의’ 정도로 취급된다.

최근 들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사회연대정치라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특정한 비전이나 목표를 제시하기 보다는 일단은 모든 것을 모아놓고 집합시키자는 주장에 가깝다. 그저 병렬 시켜놓은 각 의제운동들이 각각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면 그 요구사항들 중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들만을 골라내어 집회나 청원 등의 의제로 띄워놓는 이 최소공배수의 정치는 구조적 문제를 철저히 회피할 뿐만 아니라 ‘무노선’적 운동을 모아놓는 것이 마치 하나의 ‘노선’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한다는 점에서 더욱 유독하다. 이를테면,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114개 요구사항에서는 어떤 전략이나 최종적 목표점도 보이지 않으며 체제전환운동의 구호들은 표면적으로는 체제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전환하려는 체제가 무엇이고, 이후에는 어떤 체제가 들어서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그 어떤 고려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연대정치는 단순히 무능하기에 유해한 것을 넘어, 각기 운동의 간부와 활동가들을 대강 모아놓은 후 최소공배수의 구호들을 외치게 하는 무의미한 작업에 모든 역량을 투입시킨다는 점에서 사회적 변화 이전에 의제운동의 동력 자체를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유해하다. 무노선의 노선화를 마치 구태의연한 이념놀음에 빠지지 않고 유기적이고 유연하며 개별 운동의 다원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운동 모델로 찬양하는 자들은 사기꾼이거나 어리석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한다. 혹은 둘 모두에 속할지도 모른다.

자생적 운동을 숭배하고, 그 운동들의 의제를 선별적으로 모아 공공연하게 제출하면 그것이 곧 정치가 될 수 있다는 운동론의 귀결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유럽과 미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노동조합은 이주노동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 국민연합이나 AFD 같은 극우 정당을 지지하고, 소수자 운동은 공격받을 소지를 줄이기 위해 LGBT에서 T를 빼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여성인권을 위해 외국인과 난민들을 쳑결하자 외치고, 의회에서 군비증강과 해외 전쟁원조를 찬성하는 녹색정치.

과학적인 정세분석을 바탕으로 한 전일적인 강령과 노선의 제시를 포기하고 모호한 연대지상주의와 사회연대정치론으로 인해 당사자 대중의 설득에 실패한 운동은 결국 자생성과 즉자성에 굴복하고 모든 자생적 운동의 필연적 귀결인 협소한 이기주의와 쇼비니즘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좌파들의 무의미한 언사들에 질린 조합적 운동들은 결국 유럽에서처럼, 미국에서처럼 극우파들의 명백한 목표 제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표를 몰아줄 것이다. 이는 모든 운동의 종말이며, 곧 다가올, 어쩌면 이미 다가오고 있는 미래이다.

우리는 모호한 연계성이나 교차성 따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피억압 계급계층이 겪는 억압과 모순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전일적 체계로 연결시켜 대중에게 명확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혁명정치이다. ‘노동조합의 서기’로서의 진보정당이  아닌, 사회 내의 모든 모순을 맞받아치고 모든 민중을 대변할 호민권인 혁명정당이다, 전일적인 사회인식과 목표를 제공해줄 수 있고, 모든 의제운동 내부에 세포조직을 심어 의식화와 급진화를 수행할 전위정당을 건설하지 않는 한 근시일 내로 모든 운동에는 종말이 찾아올 것이며, 좌파에게는 아무런 미래도 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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