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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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1. 개요

오늘날의 남한 사회가 철저히 붕괴하고 있다는 주장은 세대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제기되고 있는 논지 중 하나이다. 점차 증가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와 이백충, 삼백충 같은 단어들로 대표되는 하위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이대남 현상으로 대표되는 여성 및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극단으로 치닫는 세대 간의 증오, 물질만능주의와 계층상승에 대한 강박, 가짜뉴스와 배외주의적 음모론의 유행 등은 모두 남한 사회의 도덕적-사회적 아노미를 보여주는 예시들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아노미 상태가 전통적, 종교적 가치관의 퇴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므로 기존 사회질서를 강화하고 도덕을 재무장 시키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 모든 아노미 상황이 경제적 불황 그 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므로 경제적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적 문제의 해결로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현상을 일반화, 단순화 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일견 옳은 견지를 내포할 수는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정합적이고 총체적인 분석을 불가능케 한다. 한 사회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구조와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연역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남한 사회의 아노미의 본질을 사회구조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작금의 세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도덕과 이데올로기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퇴락을 사회적 붕괴의 지표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과연 그 도덕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도덕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착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같은 보편적인 가르침은 마치 인류 역사 내내 변하지 않았을 것만 같이 보여진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도덕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각 시대의 사회를 지배하는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로마 시대 평민들이 민회에 모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제정하려 할 때마다 귀족들이 '불길한 징조'를 내세워 평민들을 해산시킨 사례를 언급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신들이 예고한 징조 앞에서 모임을 강행하는 것을 매우 부도덕하고 심판 받아 마땅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족집단으로 구성된 신관들이 특정한 부정적인 징조를 언급할 때 즉시 모임을 해산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한 시대의 도덕은 늘 지배계급의 통치도구인 동시에,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종교였다. 중세 봉건 사회의 도덕이란 주군에 대한 충성과 교회에 대한 복종이었으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은 근면과 절약이었다. 전자의 도덕은 상호계약적 관계로 묶여 있던 무장한 지주계급들의 지위를 보전하고 지주계급들 간의 갈등을 교회를 통해 중재하여 전쟁으로 인한 생산력의 파괴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후자의 도덕은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게 임하게끔 하고 자본가로 하여금은 사업을 통해 얻은 이윤을 저축해 활발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덕은 시대에 따라, 그 중에서도 특히 각 시대의 지배계급과 생산관계에 따라 변화해왔다.

또한 도덕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회득할 수록 단순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수준의 윤리적 판단을 규율하는 가치를 넘어서, 인간이 외부세계를 인지하는 인식체계이자 세계관인 이데올로기로 확대된다. 이데올로기는 정치, 사회, 철학, 윤리 등 인간의 사회적 사유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이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는 정치적 차원에서는 헌법 하의 의회정치를, 사회적 차원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에서의 개인의 자유의 최대한의 증대를, 철학적 차원에서는 원자적 인간관과 자유의지론을, 윤리적 차원에서는 천부인권과 절대적 소유권에 바탕한 도덕체계를 주장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특정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당파성을 지니며, 사회를 해당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형태로 이끌어가는 작업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정치사회의 구성원들, 즉 지배계급의 대표자들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 사회에 퍼트리고 교육과 문화, 언론 등을 통해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교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화 작업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대중들의 현실인식과 정치사회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 간의 괴리가 일정 한도 이상으로 거대화 된다면 더이상 정치사회에 의한 대중의 교화 및 교육은 효력을 잃기 때문이다.

'옛 것은 죽었으나 새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괴물의 시대가 찾아온다'던 그람시의 주장처럼,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설득력을 잃었으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위치에 오르지 못한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보편적인 도덕이나 규범도 제공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 접어든다. 이러한 혼란은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봉합해두었던 사회 내 각 집단 간의 적대와 증오를 노골화 하며, 사회로 하여금 법과 폭력을 통한 제재 외에는 내부적 질서를 유지할 그 어떤 정신적 수단도 보유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이것이 곧 아노미이며 사회의 붕괴이다.

3. 괴물의 시대

그렇다면, 남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으며 그것들은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남한 사회의 가장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공동체주의였다. 노동자들은 기업의 위계적인 지시에 복종하고, 기업은 그 대가로 평생고용을 약속한다. 각 가족을 책임지는 가부장인 노동자들은 기업으로부터 받은 임금으로 대가족을 부양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재생산 작업, 즉 가사노동과 자기자신의 유지관리를 가족 내의 여성들에게 무상으로 맡겨 적은 임금으로도 생활할 수 있게 되며, 기업은 이를 통해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임금에 소모되는 자본을 최대한 절약하여 활발한 자본축적을 이어간다.

하지만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도입되면서 이러한 평생고용체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전폭적인 노동유연화와 정리해고는 노동자와 기업 간의 가부장주의적 결속력을 약화 시켰으며, 대가정의 붕괴와 핵가족의 등장은 노동재생산 작업에 소모되는 비용을 상승시켰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는 가부장적 공동체주의가 기능할 수 없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그 대안으로 도입된 것이 바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기업이 가부장적 관계 하에서 노동자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평생고용을 통해 노동자의 평생 커리어를 관리하던 기존 사회와는 다르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도입된 이후에는 노동자는 언제 어디서든 해고 당할 수 있기에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고 자기자신을 노동시장에 판매할 하나의 상품으로서 상품가치를 끊임없이 재고해야 하는 시장 일원이 되었다. 언제 다시 현재의 직장에서 배제된 후 새로이 노동시장에 참가하게 될지 알 수 없게 된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기자신의 업무 외에도 자격증, 언어능력, 체력과 건강, 경력 등을 강화발전 및 재생산 시켜야만 하는 이중적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대중들은 더이상 가족이나 기업 등 특정한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노동시장의 무한한 경쟁 하에서 타인을 넘어서 승리해야만 하는 원자적 주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동등한 시장 참여자 중 하나이며, 노동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합당한 몫을 얻고, 더 나아가 훌륭한 커리어 관리를 통해 계급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조차 대중들의 현실인식과는 괴리되고 말았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공정한 경쟁과 각자의 공헌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이라는 환상은 청년빈곤과 교육격차, 계급질서의 공고화라는 현실 앞에서 철저히 붕괴 되었다.

기존 사회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모두 무력화된 현 남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 규범은 자연주의적인 도덕률, 즉 이데올로기가 붕괴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호소될 수 있는 형태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도덕 뿐이다. 자연주의적 도덕률의 핵심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물학적 우열을 지니며,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의 것을 빼앗고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합당하다는 행위라는 것이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약탈은 사자가 염소를 잡아 먹듯이 당연한 일이며, 우월민족이 열등민족을 지배 및 배제하는 것은 인종적, 혹은 국민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다.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가정 내에서 남성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 또한 동일한 논리로 정당화 된다.

이러한 도덕률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약육강식적 질서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 빈민, 여성과 소수자, 이주민 등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경멸을 정당화 한다. 즉, 자연주의적 도덕률은 단순히 현 체제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 현행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보장되는 최소한의 민권과 평등권, 기존 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옹호 되었던 공정성 등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주의적 도덕률은 본질적으로 파시즘과 영합하며, 현대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모든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작동하지 못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정당화 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가장 야만적인 수단으로서 자연주의적 도덕률과 파시즘을 내세우게 된다.

자연주의적 도덕률의 이주민 혐오와 배외주의는 궁극적으로 시장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 하는데 활용되며, 약육강식의 논리는 기존 체제에서 보장 되었던 일정한 시민적 권리들을 무효화 하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극단적으로 강화 시키는 작업에 사용된다. 우월한 주체에 의한 열등한 자들의 지배 및 통제라는 발상은 곧 시민사회 내에서의 주도권을 잡고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노골적이고 초법적인 폭력 사용을 논리적으로 옹호한다. 자연주의적 도덕률과 이에 기반한 정치의 파괴적인 속성은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그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자연주의적 도덕률이 전면화 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 또한 미국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정치적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만다. 이렇듯이 강자의 지배를 통한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제공할 것만 같아 보이는 자연주의적 도덕률은 기실 궁극적으로 사회 자체의 총체적 분열, 즉 괴물들의 시대를 불러오는 것이다.

4. 유일한 전망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주의적 도덕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연주의적 도덕률과 사회적 아노미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가부장적 공동체주의나 자유주의로 회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무너진 과거의 이데올로기로 회귀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이미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대중을 교육하는데 실패하고 더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에 무의미하다. 가부장적 공동체주의는 더이상 현대의 경제체제가 노동자와 기업을 가족적 결속으로 일체화 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에 의해 파산하였으며, 자유주의는 내부적 모순, 즉 총체적인 불평등과 불공정을 낳는 그 자체의 성질로 인해 파산하고 자연주의적 도덕률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 어떤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인위적으로 현 사회에 재삽입하려 하던 간에 결론적으로 그것들이 자연주의적 도덕률이라는 괴물을 낳게 된 역사적 경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작금의 아노미가 단순한 개인의 타락이나 일시적인 경제 불황의 결과가 아닌, 지배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파산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현 사회의 붕괴와 아노미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도덕적 규범을 창조하고, 이를 사회 전반에 걸쳐 지배적 위치를 지니도록 확신시키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도덕적 규범은 어떤 내용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가부장적 공동체주의는 기업가와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의 가정 구성원들을 하나의 대가정인 것처럼 묶어냈으나 그 본질은 앞서 언급했듯이 노동자의 임금절감과 가정 구성원들의 무상 재생산 노동을 위한 기제에 있었다.

자유주의는 우리 모두를 끝없이 경쟁하는 원자적 주체로 만들었으나, 현실에서 이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없는 계급 질서의 공고화를 낳았다. 모든 종류의 사회적 자원이 지배계급에게 집중되어 있는 한, 대중들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진 것은 자유주의가 주장하던 공정한 경쟁이 아닌, 정해진 패배 뿐이었다. 자연주의적 도덕률은 약육강식의 논리 하에 수많은 대중들에게 당신도 타인을 지배하는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퍼트렸으나 실질적으로 그것이 대중들에게 가져다준 것은 대다수 민중의 비인간화와 폭압의 정당화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앞서 논의한 모든 종류의 과거의 도덕들에는 그 이면의 억압, 즉 특정계급의 타 계급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숨기고 정당화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억압은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을 항상적인 빈궁화와 생존의 불안 속으로 밀어넣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 언제 약자의 처지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 주거와 교육, 의료 등에 대한 불안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밥솥'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타인과 외부집단에 대한 증오를 불러오며 사회적 아노미의 토대가 된다. 새로운 규범은 이러한 구조적 불안정을 가장 비도덕적인 상태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해결을 요구해야 한다.

사회의 도덕적 목표는 소수의 이윤 증대가 아닌, 모든 구성원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프라와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과 약탈이 존재하며, 그리하여 생존의 공포라는 이름의 야만이 상존하게 되는 한, 공동체에는 그 어떤 사회적 미덕도 뿌리내릴 수 없다. 우리는 기존 체제와 기존 이데올로기에서 주장되었던 소유권의 절대성을 넘어서, 주거, 의료, 교육, 소비재 등 인간 삶의 기초적 기반이 되는 모든 영역을 공동의 책임 하에 두는 것을 새로운 도덕률의 핵심으로 선포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자연주의적 도덕률을 타도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연대와 단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허나, 애초에 자연주의적 도덕률이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체제가 대중들을 원자화시키고 서로를 적으로 보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청년과 중장년,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사회 내의 여러 집단들의 사회적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서로를 탓하게 유도했고, 본질적으로 대중 간의 연대를 가로막아 생활불안정이라는 거대한 폭풍우 앞에 홀로 서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질서는 분열과 증오를 압도하는 강력한 연대를 요구해야 한다. 자기자신의 안전은 개인이나 가정이 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수호해나가는 것임을 새로운 시민 정신으로 확립해야 한다.

새로운 도덕,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관계를 철폐하여 인간사회 내에서의 본질적인 적대와 증오를 극복하고 동질적인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 정신을 사회 내에 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의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회 내의 모든 자원과 생산력을 일부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전체 대중의 필요와 삶의 풍요를 위한 수단으로서 계획적으로 조직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끔 만들어야 한다. 개인이 불안정과 사회적 적대, 무제한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통합된 사회 하에서 공동체에 기여하며 약탈과 착취 없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증오와 경멸의 도덕률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우리는 원자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공민이 되어야 하며, 서로를 제치고 넘어서려는 적이 아닌 동일한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동료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는 계급관계가 아닌, 공공의 것을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 연대하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획은 결코 유토피아에 대한 몽상적인 담론이나 비정치적 문화운동을 통해 성립될 수 없다. 새 사회를 건설하고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계획적, 조직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기획을 추진할 주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선포하고 새로운 도덕적-사회적 질서를 창조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작금과 같은 역사적 전환기에 등장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과 규범을 선포하는 주체로서의 '현대의 군주'를 말한 바 있다. 그람시에게 있어 현대의 군주란 하나의 뛰어난 개인이나 카리스마적인 독재자가 아닌, 새로운 집단의지를 대표하는 전위정당이었다. 피지배계급 내의 선진의식적 분자들로 이루어진 전위정당은 기존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교육, 문화, 언론, 일상생활의 영역에 침투하여 대중의 상식과 사고를 재구성 하는 주체이다.

남한 사회에 드리운 괴물의 시대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사회적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전망은 사회변혁을 통해 기존의 계급억압을 철폐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기존 사회의 능력에 따른 경쟁이나 타고난 우월성 등의 개념을 넘어 기존 사회에서 주변화 되었던 모든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포괄해 인간의 존엄성과 모두의 삶을 위한 연대를 내세울 수 있는 주체로서의 전위정당을 형성하는 것 뿐이다.

결론적으로, 남한 사회의 아노미는 낡은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죽었으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태동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징후이다. 괴물의 시대는 낡은 사회로 회귀하려는 허망한 시도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려는 주체들의 자기조직화와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권력장악을 통해서만 비로소 퇴치될 수 있다. 결국 현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아노미에 대한 한탄이나 기존 사회질서의 복고를 위한 무의미한 시도가 아닌, 대항 이데올로기의 확립과 전파, 대중의 조직화와 동원, 사회 전체의 총체적인 변혁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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