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아직도 식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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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아직도 식민지다

식민지 체제의 이름없는 부속품으로 소모되다가 역사의 풍랑에 휩쓸려 갈 것인가, 아니면 혁명의 방향타를 붙잡고 우리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나갈 것인가?

우리의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 노동법이 없는가? 있다. 그러나 수백만 비정규직은 노동법이 있는 나라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법 상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한시적으로' 일하기로 계약하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재계약하고 있거나 근로계약서에 적힌 고용주와 실제로 일하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법에 대한 노골적 사기다. 단지 관습이 사실상의 제도가 되어 묵인되고 있을 뿐이다.

비정규직뿐인가? 비정규직은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의 이중고에 시달리지만 정규직도 저임금에는 예외가 아니다.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들여오는 값싼 수입 농산물로 농민은 파산한다. 소상공인은 노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자영업으로 밀려나고도 경기가 안 좋아 가게 문을 닫는다. 중소기업은 원청의 비용 전가와 갑질에 시달린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한국은 경제만 발전했지 아직 사회적으로 덜 발전해서 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것일까? 선진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정도로 비정규직 문제, 농민 궁핍, 자영업자 문제, 원청의 갑질이 심하지 않다. 그렇다면 서구 선진국의 제도를 모방하고 도입하면 해결될 문제들일까?

아니다. 이 문제들은 전부 한국 경제 자체가 거대한 '글로벌 하청 공장'으로 설계되어 있는 식민지 경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보진영이 매몰되어 있던 노동조합이나 농민회 등 부문조직의 요구, 또는 '올바른 진보적 사상'만을 내세우는 정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치는 바로 전 사회를 포괄하는 설명을 제시하고 그 설명을 바탕으로 목표를 설정해 특정 계급을 넘어선 대중에게 이 목표를 향해 사회가 나아가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즉 근본모순은 식민지 하청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제국주의와 관료자본주의와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민족자본가 사이의 모순이다.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계급이 연합해 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것 만이 비정규직 문제, 저임금, 농촌 소멸, 자영업자 대량 폐업, 하청기업 수탈 같은 식민지 경제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식민지 경제-관료자본주의

한국 사회는 왜 글로벌 하청 공장이고 왜 식민지인가? 먼저 식민지 경제란 무엇인지 살펴보고 왜 한국이 식민지 경제에 속하는지 알아보자.

과거의 주류 식민지 현지 대자본은 원자재 수출, 소비재 수입에 주로 종사하고 제조업은 국내소비를 위한 경공업 위주인 매판자본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상업자본의 하수인이다. 식민화 초기 가장 먼저 침투하는 제국주의 자본은 상업자본이었다. 운송, 인력, 기술 등 인프라와 생산재가 필요한 산업자본은 식민지에 빠르게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상업자본은 자신들보다 현지 사정을 더 잘 아는 식민지의 매판자본가를 현지 대리인으로 활용하였다.

매판자본은 이렇게 제국주의 무역에 참여해 자투리 이윤을 얻었다. 지금도 매판자본은 원자재 수출, 소비재 수입 위주 식민지 경제에서 지배적인 자본이다. 이들은 봉건지주와 연합하며 저개발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제조업보다 국가의 간섭이 덜 필요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자유시장을 지지하고 국가 개입에 반대한다. 한국에서는 과거 삼백산업, 현재 쿠팡 등 무역, 유통, 소매 자본이 속한다.

제국주의 산업자본은 인프라, 법률 등의 정비가 끝나야 식민지 진출이 가능하다. 식민지에서 제조업이 발달할 기초를 닦는 것이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기구이다. 이렇게 국가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발달하는 제조업 자본은 관료자본이라고 불린다. 과거에는 제조업도 충분히 제국주의 국가에서 독점할 수 있어 관료자본의 필요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기술의 전세계적 전파로 제조업은 경쟁 산업이 되었고 제국주의 제조업은 높은 임금으로 이윤이 잠식되었다.

제국주의 자본은 이윤이 낮을 뿐만 아니라 낮은 이윤으로 인해 불안정한 제조업 산업을 청산하려는 유인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자본은 독점을 유지하기 쉬운 가치사슬의 맨 처음인 연구 개발, 맨 끝의 마케팅과 서비스을 손 안에 남겨두고 저이윤 산업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로 이전한다. 이 현상은 흔히 스마일 커브(Smile curve)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로써 식민지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청 국가로 변모하고 내수 시장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출 중심 대규모 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스마일 커브

관료자본은 정치적으로는 국가 개입을 지지하기 때문에 중도좌파부터 파시즘까지 다양한 성향을 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부든 관료자본의 지지를 받는 정부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청 제조업 발전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부분의 한국 재벌은 관료자본이다. 한국에서 관료자본의 정치적 지배는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화되었다.

매판자본과 관료자본은 식민지 대자본의 두 유형일 뿐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에 유의하라. 한 자본에서도 매판자본성과 관료자본성은 공존할 수 있다. 한국의 재벌들은 대부분 매판자본적 부문과 관료자본적 부문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관료자본의 발달은 식민지에서 봉건적 지주소작제와 저개발이 유지 재생산되는 식민지반봉건 사회를 배제하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경쟁 시스템이며 제국주의도 열강간의 경쟁이기에 '일관된 방향성'이 없다. 여러 제국주의 국가와 자본은 충분히 한 식민지에서 저렴한 원자재 공급과 시장확보를 위해 봉건지주와 매판자본을 지원해 식민지반봉건 사회를 유지하며, 동시에 저렴한 공산품과 초과이윤을 위해 관료자본을 지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두 경향은 동시에 존재하며 식민지 국가들은 어느 쪽의 비중이 크냐에 따라 일종의 스펙트럼 상에 존재한다.

이 식민지 사회들의 스펙트럼은 한쪽 극단에 반봉건사회에 가까운 필리핀, 인도에서 다른쪽 극단에 순수한 관료자본주의에 가까운 한국, 대만, 싱가포르까지 존재하며 그 중간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등이 존재한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각각 다른 역사적 이유로 봉건지주가 소멸했으며 따라서 식민지반봉건사회 쪽으로 견인하는 동력이 소멸해 극한의 관료자본주의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인 대지주의 소멸과 민주당을 형성해 야당이 된 조선인 대지주의 권력에서의 소외, 대만에서도 일본인 대지주 소멸과 장제스의 본성인 대지주 몰수, 싱가포르에서는 토지 부족으로 인한 국유화로 인해 봉건적 지주소작제가 소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식민지 경제는 관료자본주의라는 보편적인 유형에 속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한국경제 60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사공일)는 2010년 발간한 <한국경제 60년사>에서 한국이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전통적으로 "설비와 기계를 해외에서 통째로 수입하는 방식"을 고수하였다고 실토하고 있다. 위원회는 그 결과 한국경제가 "산업의 핵심기반기술이 취약해진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수출산업은 지금도 수출을 위해 외국자본으로부터 원자재, 부품, 소재 그리고 생산기계를 수입해야만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 기업은 생산한 제품을 외국에서 값싸게 팔아야 하는 구조에 놓여있다. 이는 한국 제품이 기술적 제약으로 독점적 지위를 갖지 못하므로, 치열한 국제시장 내의 판매 경쟁 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것이 주된 원인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제조업은 국내수요가 아닌 해외수요, 해외의 기술, 장비, 부품에 의존하는 하청 제조업이다.

한국의 수출 비중 1, 2위를 차지하는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도 식민지 하청경제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그 중 한국의 주력 반도체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는 시스템반도체에 비해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인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는 미국이 독점하는 팹리스 기업에서 거의 전적으로 하고 있고 한국 기업은 생산할 뿐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시스템반도체 생산(파운드리)에서 TSMC라는 대체가능한 경쟁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설계도를 쥐고 있는 주문자가 '공급망 다변화'를 이유로 물량을 조절하거나 자국 내 생산을 강제할 때 거부할 수 없는 구조적으로 종속된 산업이다.

자동차 산업은 어떤가? 현대자동차는 2025년 트럼프 행정부와 한국 정부의 관세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3월에 21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발표했다. 국내의 일자리, 경제적 파급효과, 정치권의 압박 등은 현대자동차에게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에 비해서는 전혀 중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해외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의 일자리, 중간재 수요, 투자 등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 산업을 한국의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달러를 진작에 넘고 일본과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것을 보고도 한국이 식민지 경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가?

1인당 GDP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식민지 하청 경제의 극단적 형태이다. 1인당 GDP를 총노동시간으로 나누면 노동생산성이 나온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유사한 1인당 GDP를 가진 국가 중 최하위권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이 낮고 노동시간이 길다는 것은 산업의 구조가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종속적인 산업에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데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만약 필리핀 국민이 지금의 열 배 오래 노동한다면 1인당 GDP는 10배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선진 자본주의 산업구조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국 한국은 제국주의 중심부에 비해 저부가가치 산업을 하는 거대한 하청공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이 중국, 베트남 등지에 자본 수출을 하는 것을 근거로 ‘아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아제국주의가 무슨 뜻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미래에는 제국주의가 된다는 것인가? 작은 제국주의라는 것인가? 아제국주의라는 제국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것은 우리의 전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한국의 자본수출은 미국 일본 자본의 중계자로써 수행되고 철저히 그들의 목적에 종속된다.

한국 경제의 본질이 식민지 경제라는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에 파급된다. 가치사슬에서 불리한 위치를 가진다는 것은 제국주의 자본이 기술 독점, 중간재 독점, 시장 독점으로 독점이윤을 얻고 한국의 자본은 나머지 자투리를 분배받는다는 뜻이다. 낮은 제조업 이윤은 수출 대기업들이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고, 하청업체를 납품단가 후려치기, 비용 전가, 기술 약탈로 수탈하게 한다. 수출 산업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토착 자본은 생존선 이하의 초저임금으로 노동자를 쥐어짠다. 노동자의 소비 수요 부족으로 소상공인은 항상 대량 파산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 정부는 어떤 집권세력이든 미국의 군사, 외교적 통제를 받으며 대규모 하청 수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의 불만을 관리해야 하므로 한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의 존재 등 발전이 제약되고 왜곡된다. 결과는 경제 고속성장, 수출산업과 전체 경제의 괴리, 사회 전반에 대한 분배 차단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경제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기적'이 아닌 보편적 식민지 경제의 일종인 관료자본주의 경제이다. 식민지 중에서의 특수성은 봉건제를 탈피하고 제국주의 자본 중개 임무를 부여받은 데 있다. 관료자본주의적 수출 주도 성장은 외자 소유, 기술, 중간재, 판매시장의 대외 의존으로 인해 막대한 가치 유출을 동반한다. 관료자본(재벌)에 가해지는 이러한 이윤압박은 다시 하청업체로 전가되어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된다. 또한 식민지이기 때문에 한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제약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국가보안법,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정책의 부재, 노동권의 제약 등은 '사회가 덜 발전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착취로 인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본모순은 제국주의와 수탈당하는 대다수 인민간의 모순이다.

현재 진보진영과 민족-대중적 의지

단순히 '노동계급과 자본가가 있고 둘이 싸워 노동계급이 이긴다'로는 부족하다. 레닌과 마오가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목표와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땅을 원했지만 정치적으로 집중되어 있지 않았고, 부르주아는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레닌은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목표로 세웠다.

중국에서 노동계급은 인구 극소수였고, 농민들은 봉건지주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소상공인과 민족자본의 성장은 제국주의와 그에 부역하는 매판자본, 관료자본에 의해 말살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는 제국주의와 봉건지주를 타파할 혁명적 계급 연합의 신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세웠다. 과거의 어떤 이론도 한국 사회에서 검증되지 않으면 실천에 적용할 수 없다.

반면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분석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거나 현재 그 의의가 없어졌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박현채, 이진경, 윤소영 등이 제시한 이론으로 한국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신식민지이나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단계인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은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전략을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들의 목표는 한국 사회에 대한 학술적 분석이였을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민족해방 진영의 주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과거의 식민지반봉건론에서 시작해 한국에서 반봉건성의 비중이 줄어들고 반자본주의성이 성장하고 있다는 변화를 포착했으나 왜 일어났는지, 그래서 전략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설명하지는 못했으며 사회의 변화를 이론으로 뒤따라가는 것에만 만족했다. 제국주의와 민중간의 모순 해결을 목표로 삼았으나 이 모순이 유지되면서도 어떻게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는지, 전략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화 이후 전략적 의미가 소멸하였다.

결국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 한국 사회 전체의 근본모순과 근본모순이 나타나는 형태인 주요모순을 분석하며 그에 따라서 정치를 한 조직은 없었다. 진보정당이든, 사회주의 이론을 내세우는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은 '우리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보수 양당보다 더 나은 설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노선이 사회가 나아가기 위한 더 나은 길이다'고 떠들어 댔다. 그런데 대다수 대중이 그런 주장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대중은 차라리 김어준의 뉴스공장, 매불쇼, 극우 유튜버들이 사회에 대한 더 명쾌하고 상식적인 설명을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털보지만 맑스보다는 김어준을 선택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전략 수립을 보면 어떤가? 회의실에서 한참 떠들어대다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술집으로 직행해 뒷풀이하는 진보 단체 회원들과, 삼성의 사업지원실(구 미래전략실) 중 누가 더 치밀하게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는 것 같은가?

"우리는 옳지만 힘이 없어서 졌다" 이들이 항상 되뇌이는 말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우리에게 ‘실천 외에 진리의 기준은 없다’고 가르친다. 조직의 역량을 투입한 파업 투쟁에 실패해도, 선거에서 져도 ‘옳다’면 대체 언제 틀린 것인가?

한국에는 원내 의석이 있는 진보정당도,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하는 조직들도 있었지만 이들 누구도 정치를 한 적은 없다. 이 나라의 진보정치는 '위기'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활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일군 대중단체들의 회원들이 당원이 되어 정당이 결성되고 선거도 나가지만 이들의 정책은 대중단체들이 제시하는 요구의 단순 집합이거나, 대중단체들과 연관 없이 상층 활동가들이 채택한 ‘진보적’ 주장들에 불과하다. 사회 전체에 대한 정치적 설명은 실종되고 국민 대다수는 물론 지지 단체 구성원들조차도 정당의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대중조직들의 여의도 출장소 정도의 역할을 하였다. 이미 정해진 부문 대중조직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정치적 동원을 할 뿐이다.

한국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내세우는 여러 이론조직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본인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학습하며 대중에게 이 이론을 전파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도래하는지에 대해서는 ‘정세의 변화’나 ‘대중의 의식 고양’으로 일관한다. 여기서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혁명적 정세’를 포착하고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혁명을 시작할 때 올라타는 것 뿐이다. 본인들의 '올바른 사상'을 학습하는 것에 매몰되어 무의식적으로 본인들처럼 세상 전부가 학습을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현 상태가 어떻게 본인들이 바라는 상태로 전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은 없다. 이들은 노조 내에서 활동하기도 하나 이론 전파 외에 일반 노조 활동가와 차별성은 없다.

레닌이 당은 ‘노조의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고 한 것과 비교해보라! 한국 진보진영의 미래는 천천히 쇠락하거나, 파시즘에 의해 빠르게 제거되거나 둘 중 하나 밖에는 남지 않았다. 우리가 전 사회를 포괄하는 설명을 제시하고 그 설명을 바탕으로 노동계급을 넘어선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는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모든 지배계급은 사회 다수의 이름으로 통치한다는 것이 그람시의 통찰이었다. 모든 지배계급, 통치 분파는 그들이 진보적인 시대에는 부문적 이익이 아니라 전민족적이고 대중적인 이익을 대표하기 때문에 사회혁명에 성공해 지배계급이 되며, 더 이상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혁명의 대상이 된다.

역사적으로 맑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의 단독혁명’ 같은 개념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쁘띠부르주아 등 다른 피착취 계급이 노동계급과 함께 혁명을 해야 하는 이유는 혁명이 그들의 객관적 계급이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지 단순히 ‘노동계급이 다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칼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여 민족을 이끄는 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며'라고 언급하였다. 이렇게 사회 다수를 그 주변에 응집시킬 수 있는 사회의 모순이 주요모순이다.

사회의 주요 모순은 어떻게 찾는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요모순은 실제로 사회의 모든 모순의 중심이 되고 모든 모순이 의존하는, 사물의 발전과정의 각 단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모순이며, 근본모순의 각 발전단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이 주요모순은 '일체 문제가 순순히 풀리'게 한다. 부차적 모순은 이 주요모순에 의해 관통되기 때문에 부차적 모순이지 주요모순을 해결할 때 까지는 제쳐두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주요모순은 여성 문제, 환경 문제등의 부차적 모순을 '실제로' 주도하며 결정한다. 주요모순 그 자체가 주요모순인 이유도 부차적 모순을 포괄하고 주도하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고 다른 모순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주요모순이 아니다. 중년 여성 노동자들을 반찬값이나 벌러 왔다고 모욕하는 관리자를 제쳐 두고, 한 사람이 평생 마실 물을 하루에 낭비하는 AI 데이터센터를 제쳐 두고 노자모순, 민족모순 같은 사회의 주요모순을 논할 수 있는가? 볼셰비키는 1917년 러시아의 주요모순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빵, 토지, 평화! 중국공산당도 국면에 따라 바뀌는 주요모순에 기민하게 반응하여 국공합작, 항일전쟁, 토지개혁를 바꿔가며며 맨 앞에 내세웠다.

반제국주의 신민주주의 혁명

한국 사회에서 주요 모순은 제국주의와 그에 부역하는 관료자본과 매판자본 대 대다수 민중의 모순이다. 주체는 노동계급, 농민, 소상공인, 민족부르주아의 통일전선이며 목표는 제국주의 지배의 종식과 제국주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재벌 대자본의 몰수이다.

잠깐, 그 자신이 착취자이며 오히려 재벌보다도 노동자를 더 악랄하게 착취하는 민족자본과의 동맹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적(主敵)을 고립시키는 전략적 지혜'가 필요하다. 적의 힘을 빼고 우리 편을 늘리는 것이 통일전선의 철칙이다. 통일전선은 반제 반관료자본에 객관적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계급을 포함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중소 민족자본은 관료자본의 수출이윤 분배에서 배제되고 재벌의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기술 약탈에 짓눌려 질식하고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지만, 본질적으로는 관료자본에 의해 고사당할 운명에 처한 시한부 자본들이다. 노동계급은 하청 자본의 노동 착취와는 단호히 투쟁하되, 동시에 그들을 재벌의 수탈 구조에 맞서 싸우도록 견인해야 한다.

하청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를 쥐어짜서 연명하다 결국 재벌에게 먹히는 길'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연대하여 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자립경제의 일원으로 생존하는 길'이 더 이득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즉, 민족자본과의 동맹은 그들의 착취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적인 제국주의와 재벌을 타격하기 위해 그들을 혁명의 우군으로 묶어두는 고도의 정치적 실천이다.

현재 민족자본은 독자적 정치력이 없고 관료자본의 노선에 의탁하고 있으며 정당 중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민족자본이 억압당하고 수탈당하지 않는 자립경제의 달성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이나 이들은 스스로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노동계급은 하청 자본이 대기업보다도 더 심하게 자행하는 갑질과 임금 체불, 노동법 위반 등 노동 착취와 단호히 투쟁하면서도, 오히려 그 투쟁을 통해서 하청 자본이 재벌의 단가 후려치기와 제국주의 종속 구조에 맞서 싸우도록 그들을 견인하고 재벌에 맞선 동맹을 이룩해야 한다. 하청 자본을 압박해 최대한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양쪽에서 짓눌려 파산하는 것 보다 노동계급과 동맹해 재벌에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제국주의에서 군사 외교적 독립, 관료자본과 매판자본의 몰수, 국가자본주의를 통한 자립경제의 발전을 과제로 한다. 혁명을 통해 수립할 수 있고 수립해야 하는 경제체제는 오직 국가자본주의뿐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어떤 머릿속의 이상적 사회주의도 곧바로 현실에 도입될 수는 없다. 소련이나 북한식의 사회주의도 실제로 실행되었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지만 한국에 그대로 도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노동계급은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고도 어떤 경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구상하고 배울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몰수한 재벌 기업들을 국가가 운영하며 농민, 소상공인, 민족자본의 독자적 운영과 발전을 지원하는 국가자본주의가 신민주주의의 경제체제가 된다.

국가자본주의는 자립경제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립경제는 불가능한 완전한 자급자족 경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국주의 자본이 기술, 핵심 장비, 유통망을 쥐고 흔들며 우리 경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구조적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스마일 커브'의 하단인 제조 공정에만 머물러 있는 한,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가치의 태반은 특허료, 로열티, 배당금 등의 이름으로 제국주의 중심부로 유출될 수밖에 없다. 국부 유출을 막아내고 그 재원을 국내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 투입하기 위해서는 핵심 기술과 생산 수단을 내재화해 외국의 기술, 중간재,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에 대한 신민주주의 연합 계급의 민주적 통제가 실현되는 자립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이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존재 자체를 제국주의 시장에 의존하는 재벌 대자본을 몰수해 자립경제 건설의 임무에 복무시켜야 한다.

국가자본주의는 신민주주의가 계급 연합 체제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노동자 뿐만 아니라 농민, 소상공인, 민족자본 모든 연합세력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므로 이들의 사유재산과 경영권을 존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가능한 목표는 국가자본주의 경제 수립이다. 미래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계급연합 내에서 필연적으로 민중의 사유재산과 모순을 빚게 되지만 통일전선 내부의 모순은 강압을 동원하지 않고 비판, 교육, 설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비적대적 모순이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위해서는 사회의 근본모순 뿐 아니라 주요모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의 근본모순이 언제나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근본모순이 직접적으로 나타났다면 전 민중이 그것을 인식하고 해결을 위해 뭉치기 쉬울 것이고 어떤 사회 체제든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근본모순은 항상 주요모순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고 근본모순이 같더라도 주요모순은 단계별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주요모순은 근본모순에서 나왔기 때문에 본질을 탐구하면 항상 근본모순에 닿는다.

한국 사회의 주요모순은 계속 변화해왔다. 한국에서는 같은 제국주의 근본모순이 50년대 한반도 전체 민중과 그들의 군대가 미 제국주의와 전면전을 벌이던 시기,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관료자본의 후견인으로 관료자본주의 식민지 하청 경제를 성장시키며 민중을 억압하던 시기, 민주화 이후 정부와 재벌이 정치 형태는 바뀌는 와중에도 관료자본주의 식민지 하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중의 반발을 억누르던 시기별로 다른 주요모순으로 나타났다. 2024년 말에는 파시스트 정권과 민중 사이의 모순이 나타날 뻔 했으나 당장은 무산되었다. 미래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한국을 끌어들이려는 미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민중간의 모순이 격화될 것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3차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다. 21세기의 미국 제국주의의 몰락과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의 부상은 세계 재분할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이는 ‘다극화’, 즉 새로운 균형 상태로 연착륙하지 않을 것이다. 레닌이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을 비판했듯이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력관계가 변화하면 무력에 의한 세계 재분할, 즉 전쟁을 추구한다. 지난 두 세계대전도 부상하는 신흥 제국주의 열강과 몰락하는 열강 사이에 세력관계와 세력권 분배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세번째 제국주의 세계재분할 전쟁이 가까워진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한국은 중국 앞의 항모이다.' '북한을 격퇴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발언은 미 제국주의가 다가올 제국주의 전쟁에 한국을 동원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미 제국주의를 위해 한국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의 전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 지지하며 부역하는 매국노들과 전쟁에 피해를 입는 민중 사이의 계급투쟁 전선 또한 필연적이다. 경제적 종속은 필연적으로 정치·군사적 종속을 낳는다. 핵심 산업이 외세에 종속되어 있을 수록 원치 않는 강대국 간의 충돌이나 전쟁에 대리전 양상으로 끌려갈 위험이 커진다. 국민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교적 협상력을 담보할 수 있는 튼튼한 국가자본주의적 자립 경제 기반이 있어야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는 신민주주의를 위한 계급 연합의 통일전선을, 전술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규합하는 통일전선을 만들어야 한다.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천하대치(天下大治)로

위기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으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역사상 모든 종류의 위기는 그 위기에 맞설 역량을 탄생시켰다. 작금의 체제에 의구심을 느끼는 청년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며, 임박한 사회적 파국에 대한 감각은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지금까지의 방법을 반성하고, 대중을 설득할 목표와 전략전술을 제시하는 집단이 없다면 위기가 불러낸 기회는 역사 속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지금까지의 방법이 왜 실패했는지 되짚어 보고, 대중을 설득할 목표와 전략전술을 제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혁명가이다. 사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론을 하거나 시위에 나간다고 해서 혁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란 언제나 위기의 시대에 전체 인민의 최선봉이 되어 위험에는 가장 먼저 나서고, 혜택은 가장 늦게 누리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목표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는 혁명가들이, 그리고 혁명가들의 당이 필요하다. 혁명가들의 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선거철마다 나타나 표를 구걸하는 정치 자영업자들의 집단이 아니며, 골방에 모여 난해한 이론이나 읊는 지식인들의 사교 클럽은 더더욱 아니다. 혁명가들의 당은 거대한 글로벌 하청 공장의 부품으로 전락한 우리 삶의 근본 원인을 꿰뚫어 보고, 그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가장 먼저 단련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절규와 농민의 탄식, 소상공인의 절망을 하나의 정치적 의지로 녹여내는 거대한 용광로여야 한다. 그것은 대중과 유리된 엘리트들의 음모집단이 아닌, 대중들의 의식을 자신들과 같이 끌어올려 대중을 진정한 주체로 세우는 헌신가들의 조직이어야 한다. 그것은 부문적, 조합적, 종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레닌이 말한 인민의 호민관이자 그람시가 말한 현대의 군주가 되어 당은 비정규직의 서러움과 실업청년의 분노가 압제자라는 단 하나의 과녁을 노리는 화살이 되도록 벼려내는 존재여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는 통일전선이 필요하다. 통일전선은 제국주의와 관료자본주의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 당하는 이 땅의 모든 대중들을 단 하나의 싸움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거대한 동맹체이다. 억압자들에게 동맹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동맹이 필요하다. 거대한 민중의 바다를 우리의 정치적 아젠다 속에 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권을 손에 넣을 수도, 국가를 통치할 수도 없다.

통일전선은 말로 떠든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통일전선은 책상 위에서 산술적으로 합계되지도 않는다. 통일전선은 하청노동자들의 일터에서, 전쟁의 공포가 엄습하는 거리에서, 그리고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대중들의 삶의 터전 속에서 혁명가가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그 대안을 몸소 증명해낼 때 비로소 획득되는 정치적 헤게모니의 결과물이다. 통일전선은 제국주의의 위협과 재벌의 수탈 앞에서 혁명가들이 헌신과 희생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것을 전체 민중이 보고 그들의 지도력을 진심으로 인정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 한국 혁명을 이끌 당은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시대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조국해방을 위해 스러져간 선대의 열사들이, 우리가 남겨준 터전 위에서 자라나갈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피 끓는 우리의 심장이 우리 청년들에게 스스로 묻고 있다. 우리는 그 단 하나의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식민지 체제의 이름없는 부속품으로 소모되다가 역사의 풍랑에 휩쓸려 갈 것인가, 아니면 혁명의 방향타를 붙잡고 우리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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