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기존에 번역한 Strugglesessions의 A Hammer to Smash The Enemy의 제 2부를 번역한 것으로, 문혁 시기 조반파 일파 중 하나였던 성무련이 보인 실천의 의의와 한계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의 역사를 재구성해 제시하고 있다.
적을 치는 망치(2)
성무련과 대중의 군사화
1967년, 급진 좌파 집단인 성무련(湖南省無産階級革命派大聯合委員會)은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 제1장을 변용한 문서인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를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5·7 지시를 소련식 평화이행 모델과 비교·비판하며 시작한다. 비록 이 문서에 많은 오류가 존재할지라도, 우리는 정오(正誤)를 엄밀히 판별하고 수정주의자( 및 여타 우익분자들로부터 그 안에 내포된 정당한 핵심을 회수하기 위하여 이를 과학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무릇 성무련은 현실과 동떨어진 극좌분자로 치부되어 무정부주의자, 좌경공산주의자, '자유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따위의 아둔한 변두리 세력에게나 추앙받거나, 혹은 어떠한 연구 가치도 없는 단순한 역사적 유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를 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본질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즉, 이 문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진리의 알맹이를 확고히 움켜쥐고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론이 거쳐야 할 과학적 검증 과정이다. 안타깝게도 성무련의 이론은 지금까지 이러한 엄밀한 검증의 기회를 박탈당해 왔다.
본질적으로 해당 문건은 마오쩌둥 동지 스스로가 주창했던 대중의 군사화를 옹호하고 있다.
“이 문서(1967년 3월 8일자)를 전국에 배포할 수 있다. 인민해방군(PLA)은 대학생, 중학교 생도,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에게 시차를 두고 분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또한 이들은 개교, 학교 조직의 재조정, 3자 결합에 기초한 지도기구의 결성, 그리고 투쟁·비판·개혁(鬪爭·批判·改革)의 수행 업무에 참여해야 한다. 먼저 시범점을 설정한 후,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을 더 넓은 범위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 즉 ‘프로레탈리아트는 전 인류를 해방시킨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명제를 학생과 아동들이 [수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군사훈련 과정에서 과오를 범한 교사와 간부라 할지라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연로하거나 병든 자를 제외하고는 이들이 개조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참여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진실로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이 모든 일은 대단히 용이할 것이다.” (1967년 3월 7일 발령된 문화대혁명 관련 지시)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노선을 왜곡해 온 다수의 인물들과는 달리, 실제로는 마오쩌둥 동지의 명확한 입장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상하이 공사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저자들은 문화대혁명을 권력 쟁취의 과정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물론 좌경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권력 쟁취 촉구를 두고 "마오쩌둥을 놀라게 한 행위"라며 프레임을 씌우겠지만, 이는 권력 쟁취를 직접 영도했던 마오주의자들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이다. 저자들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성무련의 공적을 저평가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사인방의 체포 이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자본주의 복고가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를 후대의 시각에서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선견지명을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된다.
“무릇 모든 혁명은 반드시 군대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내에 이미 붉은 자본가 계급이 형성된 이상, 군대 역시 이러한 현실로부터 탈각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 폭풍은 모든 혁명의 핵심적 문제, 즉 군대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못했다. 이로 보아 이번 혁명은 심도가 부족했으며 낮은 발전 단계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혁명적 대중의 정치사상적 성숙도 또한 이러한 낮은 수준의 혁명에 조응하여 지극히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문화대혁명과 군대 사이의 모순은 일찍이 1967년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예리한 젊은 저자들은 불과 1년 만에 이를 정확히 포착해 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놀라운 통찰에 이어, 공社의 실현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분파주의자 및 수정주의자들의 논리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삼결합원칙의 제시는 1월 혁명에서 이미 타도된 관료들의 복권을 의미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군대와 지방 관료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부르주아 권력 찬탈의 형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주관주의가 현실의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점 외에도, 본질적으로 이들은 어떠한 당 간부의 참여도 혁명을 희생시키는 관료적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라 주장했던 절대적 평균주의자들의 패배주의적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전 장에서 확인했듯 이는 비역사적인 관점이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당 위원회의 일원인 동시에 당 위원회를 타도하는 데 앞장선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모든 이들이 마오쩌둥의 기치를 공공연히 내걸었던 정치적 전복과 대중 봉기의 대혼란 속에서, 당시의 청년들이 우익분자들에 의해 자본주의 복고를 도모하는 데 의도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노선을 순수한 열정으로 포섭당하고 혼란을 겪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무련의 한계에 집착하기보다 그들 문서가 지닌 강점과 급진적 선견지명에 더욱 주목할 수 있게 된다.
혁명과 반동 사이의 대립물 간의 투쟁이라는 상호연관적 법칙을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역사적 기록은 조금의 모호함도 남기지 않는다. 혁명 뒤에는 반드시 반동의 발악이 뒤따르며(진보에 대해 역으로 작용하므로 이를 반동이라 칭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동 역시 혁명을 자극할 수 있다. 반동분자들은 혁명가가 시련에 직면하는 순간을 노려 때를 기다리곤 한다. 신생 소련이 적위군의 백색 테러에 맞서 전시 공산주의와 적색 테러로 대응해야 했던 외침과 침략의 역사를 떠올려 보라. 그 이전에는 코뮌 패배 이후 부르주아지가 인민 대중에게 잔혹한 반동을 가했던 파리의 사례가 있으며, 그보다 앞서 로베스피에르의 타도 이후 자코뱅파에 가해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있었다. 저항과 반동은 대립물의 투쟁 속에 결합되어 있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반드시 압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대규모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소규모적 차원에서도 일관되게 관여하는 보편적 법칙이다. 공사의 좌절은 혼란스러운 문화대혁명의 미증유의 우여곡절 속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반동의 책동을 수반했다. (공사의 경우, 이는 공사 내부의 모순과 사회주의 중국의 외부적 조건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 외부의 수많은 마오쩌둥 사상 수호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선견지명의 또 다른 발현으로서, 성무련은 저우언라이를 자본주의 조반파 우두머리로 정확히 식별해 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2월과 3월의 승리에 도취된 저우언라이—현재 중국 홍색 자본가 계급의 총대표—는 전국 각지에 혁명위원회를 급조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만약 이 부르주아적 음모가 관철되었다면 프로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무덤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중앙문화혁명소조는 모든 혁명위원회의 설립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인 반격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8월, 전국적인 규모의 대대적인 지방 혁명 전쟁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향후 도래한 세월 속에서, 저우언라이가 은밀한 우익분자였다는 주장은 자본주의 복고를 영도한 최고 수정주의자 덩샤오핑을 그가 복권시킴으로써 형형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수정주의 사학자 레이먼드 로타(Raymond Lotta) 역시 저우언라이를 우익의 중심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1968년 말 시작되어 1969년에 심화된 린뱌오를 향한 투쟁은 중국공산당 내부의 두 세력을 한시적으로 결합시켰다. 한쪽은 마오쩌둥 동지를 위시하여 문화대혁명 지도부[편집자 주: 즉, 사인방]를 기반으로 하는 좌파였으며, 다른 한쪽은 당 중앙, 국무원, 그리고 지방 및 중앙 군부의 계층 구조 내에 존재하는 구태 세력으로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과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당내 세력이었다. 이들은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집결해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류샤오치와 그 측근 지도자들을 폭로하고 청산했다. 류샤오치와의 투쟁 과정에서 수천 명의 간부가 비판을 받고 타도되었다. 그러나 당내에는 기본적으로 류샤오치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그의 직접적인 파벌에는 속하지 않아 비교적 가혹한 비판을 면했던 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안위를 보존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에 동조하는 척했으나, 그 기본 강령을 결코 진심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And Mao Makes Five』)
“저우언라이는 1950년대와 60년대의 대중 운동을 마지못해 주저하며 지지했으나, 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운동이 중국의 부강함과 현대화를 저해한다고 보았기에 결코 대중 운동과 일체화되거나 이를 올바르게 영도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저우언라이가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운동이 심화됨에 따라 그는 적극적인 반대자로 돌아섰다. 류샤오치가 몰락할 때 수많은 우익분자들을 비호했던 그의 행적은 노련한 부르주아 정치꾼인 저우언라이를 후원자로 삼는 새로운 부르주아 본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수정주의자들이 마오쩌둥 노선을 맹렬히 공격하는 동시에 저우언라이를 추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우언라이가 상당한 기간—어쩌면 1949년으로까지 소급되는—동안 우익의 이익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공작을 펼쳐왔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덩샤오핑이 이끄는 우익이 저우언라이를 추앙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망 직후 그들은 혁명가들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고, 지극히 보수적이었던 인민해방군조차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이는 그에 대한 충성심과 주요 우익 지도자들을 보호했던 그의 결정적 역할 때문이었다. 로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저우언라이의 강력한 후원이 없었다면 덩샤오핑의 복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처음부터 덩샤오핑을 풀어놓아 좌파를 공격하고자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비판받았던 인물들과 기관들을 향한 저우언라이의 공자식 '배려와 관심', 그리고 덩샤오핑의 거침없는 오만함은 권력 찬탈을 노리던 우익의 이해관계와 완벽히 부합했던 것이다.”
상기 인용문에서 로타(Lotta)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혁명파와 인민해방군 당국 사이의 모순을 식별해 내며, 이를 저우언라이와 연결짓고 있다. 성무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2월 역류(二月逆流)에 반격을 가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혁명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징후는 바로 군대 문제가 실제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월 혁명 당시 혁명적 대중은 군대에 대해 지극히 천진난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즉 지방의 조반파들이 타도되기만 하면 마오 주석의 상명하달식 결합 명령에 따라 무장력이 혁명적 대중과 결합하여 조반파들을 진압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들이 여기서 언급한 마오 주석의 "결합 명령"은 지난 장에서 다루었듯 실제로 존재했던 지시였다. 1967년 같은 달인 2월, 마오 동지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과 관련하여 또 다른 지시를 발령하였다.
“인민해방군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파 집단을 적극 수호·지원해야 하며, 우익분자들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전인 1967년 1월 27일, 마오 동지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각 지역에서 위대한 혁명이 맹렬히 전개되고 있으며 권력 쟁취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 무장력은 그곳의 좌경 혁명파들이 벌이는 권력 쟁취 투쟁을 지원해야 하며, 따라서 지방의 문화대혁명에 구경꾼으로 방관해서는 안 된다.” (강조는 필자)
린뱌오 사건 이전인 1967년 1월 23일, 마오 동지는 당시 인민해방군의 수장이었던 린뱌오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기했다.
“동지는 광범위한 좌경 혁명 대중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 향후 진정한 혁명파들이 인민해방군의 지원을 필요로 할 때마다 동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이른바 ‘불개입’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인민해방군은] 이미 일정 기간 개입해 왔다. 나는 동지가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하며, 구 명령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본다.”
상기 인용문에서 마오 동지는 자신의 뜻이 무시당해 온 현실을 지적하고 '불개입'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더욱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마오 동지의 이러한 지시들은 철저히 무시당했으며, 이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에 나타난 문채의 좌절감과 전투성을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사회주의적 신 생산관계가 지닌 실험적 성격과 우익 세력의 영향력을 예리하게 인지한 성무련은, 문화대혁명을 무장 투쟁으로 진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복고를 저지하는 이론화를 시도하였다.
“오늘날의 군대는 해방 전의 인민군대와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해방 전 군대와 인민은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군대와 인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았다. 그러나 해방 후 혁명의 대상이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에서 조반파로 전환되고, 이들 조반파가 군대의 권력집행자로 들어앉음에 따라, 혁명 무장력의 일부는 해방 전에 유지했던 인민과의 혈육 관계를 변질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을 진압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따라서 첫 번째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성공하려면 군대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수적이다. … 오늘날 혁명적 대중이 무장한 홍색 자본가 계급을 제압하고자 한다면 전국적 규모의 혁명 전쟁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입증되고 있다.”
일찍이 1967년에 성무련은 비록 '형태상 좌경, 본질상 우경'이라는 오류를 범했을지언정, 인민해방군이 자기 반대물로 이행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정확히 식별해 내고 있었다. 이러한 변질은 우리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교훈 중 하나이지만, 이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주로 마오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당의 군사화' 및 '혁명의 3대 수단의 동심원적 건설' 이론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3부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들은 혁명적 삼결합의 역할을 오해하였고, 그 결과 저우언라이 패거리들이 이를 어떻게 왜곡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마오주의자로서 저우언라이의 사령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성무련의 투쟁 자체는 정당한 것이었다.
인민전쟁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원칙은 군사 기술이 아닌 인민의 지지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적의 무기를 탈취하는 전술과 전략—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든 장기인민전쟁이 증명했듯 적을 물자 보급선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도출된다.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 내 여러 시기에서도 관철되었다. 이 원칙은 만약 문화대혁명이 실패할 경우 인민해방군이 자본주의 복고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므로, 덜 무장되었으나 혁명적인 대중이 게릴라전으로 전환하여 인민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마오 동지의 입장에서 더욱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당시 자행된 무기 탈취 운동이 일부 청년들의 맹동주의로 인해 항상 정당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성무련은 후일 곤살로 의장이 '무장 대중의 바다'라고 칭했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8월의 무기 탈취 운동은 위대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최초로 온 나라 인민을 군사화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문화대혁명 이전의 관료들은 감히 인민에게 무기를 진정으로 넘겨주지 못했다. 민병(民兵)은 관료들이 인민의 무장력을 통제하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그것은 결코 노동자 계급의 무장력이 아니었으며 관료들의 손에 쥐어진 순종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무기 탈취 운동 속에서 대중은 위로부터의 시혜로서 무기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 스스로의 폭력적 힘에 의거하여 관료들의 손에서 최초로 무기를 쟁취했다. 노동자들은 최초로 자신들 '소유'의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좌파를 무장하라!’는 마오 주석의 기세 높은 호소는 노동자 계급의 용맹함을 집약적으로 체현한 것이었다.”
여러 면에서 성무련은 자신들의 정치와 정세 분석이 당시 대중의 정치적 의식 수준을 너무 앞서갔음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장 치명적이고 명백한 한계 중 하나는 중국의 외적인 적들인 소련과 미국에 대한 정세 분석의 부재였다. 마오 동지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의 위대한 문화대혁명을 이용하여 반중 공작을 펼치고 있다. 예컨대 소련은 [우리] 유학생들을 탄압하고 있으며, 신장(신강) 국경 인근의 [소련] 군용기들의 활동이 더욱 비등해졌고,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었다. 지난, 난징, 푸저우, 쿤밍 등 변방 대군구에 주둔한 모든 무장 부대는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전투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 따라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일정은 정세로 인해 다소 연기되어야 하나, 이는 향후 반드시 완수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며 성무련 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에서 새로운 사회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마오쩌둥 사상은 과거의 모든 모순 속에서 대중을 단계적으로 각성시킬 것이다. 혁명적 대중은 실천을 통해 왜 혁명이 필요한지, 혁명을 통해 누구를 청산해야 하는지, 그리고 혁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다. 혁명 투쟁은 자발성의 단계에서 의식성의 단계로, 필연에서 자유의 단계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상기 기술은 예언적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마오쩌둥 사상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마오 사상과 과거의 모순들을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제 삼의 더 높은 단계를 정립해 낸 새로운 혁명들의 불꽃을 피워올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성무련의 오류가 정정되었으며, 그들의 정당한 가치들은 마오주의의 정립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비록 성무련 스스로가 관료들을 청산할 현대적 형태의 소비에트라고 자처했으나, 그들의 야망과 자기평가는 구체적 현실 조건에 결코 부합하지 못했다. 그들의 근본적 결함은 당(또는 그 본질) 및 인민해방군과의 모순을 스스로의 이론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절박한 절개 수술을 통해 병균만을 잘라내어 환자를 살리려 하기보다, 환자 자체를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병균을 온존시키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일정 부분 참작의 여지를 주어야 한다. 당의 군사화, 혁명의 3대 수단의 동심원적 건설, 그리고 공산주의에 이르는 장기인민전쟁이라는 절실했던 이론적 교정본이 동지들에 의해 정립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인 중국 전체를 (상비군조차 없었던) 거대한 '파리 코뮌'으로 만들겠다는 그릇된 관념과, 더욱 오류투성이였던 '대중독재'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로서는 실패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그들의 해체주의적 맹동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러하지만—이 문서의 주저자가 불과 19세의 수학 천재였다는 사실이다. 이 문서는 군대가 자기 반대물로 이행하여 우익들에 의해 혁명을 파괴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성, 저우언라이의 혁명 배반, 그리고 복고를 저지하기 위해 인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장 대중의 바다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포함한 수많은 핵심적 개념들을 예리하게 지적해 냈다.
Sheng-wu-lien: Whither China?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No. 37, June/July 1969. Pg. 24-27.
Lotta, Raymond. And Mao Makes 5: Mao Tsetung’s Last Great Battle. September 1978. Banner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