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통 논쟁과 진보의 길
지난 6월 20일,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는 <남북 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과 자주·민주·통일(자민통) 강령에 대해>라는 이름의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7월 28일에는 사람과세상이 해당 토론회에서 자신들의 노선이 왜곡됐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노선을 설명하는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29일에는 박태훈 전 진보당 부대변인이 사람과 세상의 해당 문건을 재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며, 자민통 노선에 대한 논쟁이 화두로 불거졌다.
일련의 사태에서 논의된 핵심은 진보진영 내 소위 ‘자주파’의 자주·민주·통일 노선이 오늘날 남한 사회의 현실에 있어 유효한 전략인지의 문제이다. 사람과세상 측은 현재의 자민통 노선이 시대착오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남한의 현실과 비조응하는,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정협과 박태훈 측은 모두 자민통 노선이 일정 부분 시대에 맞게 수정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이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으며, 폐기가 아닌 발전과 재구성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노선투쟁은 전체 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이념노선 간의 대결과 토론이 오랫동안 멈추어 있었던 남한 운동 사회에서 이러한 광범위한 논쟁의 시작은 매우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셋 모두 남한 사회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자 세력의 부정확한 결론을 올바른 입장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자민통 노선에 대한 작금의 논의가 건설적이고 유효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그들 각각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올바른 대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람과세상, 노정협, 박태훈의 주장들을 각각 면밀히 비판하고, 자민통의 과제에 대한 우리의 노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우리의 목적은 위에 언급한 집단과 개인을 비난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해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지닌 동지로써 전체 운동의 이념노선 발전을 추동하기 위해 건설적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과세상의 견해에 대해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에서, 사람과세상은 ‘한국 사회는 식민지인가?’, ‘한국 사회는 독재사회인가?’, ‘평화인가? 통일인가?’라는 세 질문으로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자민통의 세 측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한다.
먼저 자주, 즉 남한 사회의 식민지성에 대한 이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원글에서 사람과세상은 일본, 독일 등의 국가들이 독자적인 제국주의 국가임에도 미국에게 굴종하는 것을 근거로 들어 남한의 대미종속이 그 자체로 남한이 식민지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국가들이 식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남한이 식민지가 아니라는 주장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사람과세상은 모호한 비유들을 여러 개 나열할 뿐 이를 제대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말대로 외교적 굴종이 그 자체로 특정 국가가 식민지라는 증거는 아니다. 일본, 독일, 영국 등은 미국에게 군사적·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미국의 지역적 하위파트너이나, 여전히 그 자신 또한 독자적인 제국주의 열강이다. 이들과 남한의 비교가 성립되려면 남한 역시 일본, 영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그릇된 견해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생산의 집중과 독점기업의 성장, 2.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상호침투로 금융과두제 성립, 3. 국내 자본과잉 해소를 위한 자본수출. 이중 남한은 1, 즉 생산의 집중과 독점기업의 성장이라는 조건만을 충족할 뿐, 2와 3의 조건은 충족하지 못한다. 남한과 일본, 영국 등의 비교는 따라서 성립되지 않는다.
남한의 재벌대자본은 자신들이 출자한 은행들과는 결합하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출자하는 외국자본과는 상호침투를 통한 결합을 수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남한에는 레닌이 규정한 금융과두가 존재하지 않으며, 남한 재벌은 라이선스, 주주배당, 로열티 등을 통해 외국자본, 구체적으로는 미국자본에게 수직적으로 종속되어있다. 남한의 대자본이 제3세계의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자본수출을 전개하며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억압-수탈에 부역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의 재벌대자본이 미제국주의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미국 자본을 타국에 중개하여 지대를 얻는 것일 뿐 독자적 자본수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과세상은 또한 전시작전권을 언급하며, 전작권 회수의 좌절이 미국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정권이 전작권 현상 유지를 희망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앞선 주장보다도 더욱 논리가 빈약한 것이다. 미국은 전작권에 큰 미련도 없는데 남한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전작권 환수를 미룬다는 것이다. 사람과세상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치자. 남한의 역대 정권들은 어째서 미국에게 그토록 굴종적이었던 것일까? 좌파는 유물론자여야 한다. 정치적 주체들의 행동은 그들의 물질적인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남한 정권들의 대미 굴종성이 비롯된 물적 원인을 지목하지 않는 사람과세상의 분석은 따라서 불완전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전작권에 아무런 미련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들의 주장 자체도 사실과는 다르다. 정치인들은 여론의 눈치를 보기에 실제 정책 방향성과 상충하는 발언들을 곧잘 한다. 분석은 구체적인 정책들이 어떻게 결정되고 시행되는지를 두고 이루어져야지, 정치인들의 발언 하나하나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트럼프를 러우전 종식을 추구했던 반전주의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 편으론 미국에 3500억 달러를 상납하고 다른 한 편으론 전작권 환수를 추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미제국주의에게 있어 남한은 착취의 대상이자 제조업 하청국가인 동시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쟁기지로써 북중러에 대한 견제에 있어 필수적인 요충지이다. 미제국주의가 그런 남한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포기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보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만약 미국이 전작권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앞으로의 남한 정권들이 자발적으로 미국의 군사노선에 복종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지난 6월 16일 미국 상원이 공개한 2027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NDAA)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주장의 허구성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해당 법안에는 전작권 전환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한국 뿐 아니라 유엔사에 참여 중인 모든 동맹국과 협의를 거쳤음을 전쟁부 장관이 전작권 전환 60일 전까지 의회에 인증해야 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기 위해 반드시 미 의회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년부터 2030년까지 매 90일마다 전쟁부 장관으로 하여금 전작권 전환 로드맵을 의회에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전작권 전환에 관련한 상황을 인증할 때 주한미군사령관, 태평양사령관, 합참의장 등의 독립적 군사 위험 평가 결과를 포함하라는 요구 또한 한 바 있다.
이러한 온갖 행정적 절차들이 도입되는 이유는 하나이다. 전작권 환수 논의가 실질적으로 진척되는 것을 가로막고, 혹여 양국 지도부가 ‘정치적 결정만으로 섣불리’ 환수를 추진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미국 전체 지배계급의 의지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임기 내에 전작권을 환수하겠다 장담했지만, 이번 NDAA의 내용대로라면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작권 환수는 복잡하고 불필요한 행정절차 속에서 무한히 지연되다 흐지부지 되고 말 것이다.
사람과세상은 반미자주투쟁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이것이 남한 사회의 핵심 과제는 아니며, 평등이나 민주주의 등의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야말로 원글에서 그들이 비난한 형이상학적 관점의 전형이다. 사회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여러 모순들은 단순히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근본모순을 반영하고 그 국면의 주요모순에 의해 규정된다. 자주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가 남한이라는 하나의 통일체 내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연결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그 접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현상에 대한 규명을 포기하고 형이상학적 구분을 들이미는 사람과세상은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변증법에 대해 그들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민주에 대한 사람과세상의 관점을 살펴보자. 원글에서 이들은 남한을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그 원인이 6월 항쟁이 군부독재의 완전한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에 잔존한 수구반동세력이 남한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왔으며, 윤석열의 내란이 그것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라는 것을 올바르게 짚어냈다.
그러나 다음 문단부터 이들의 논리는 기이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사람과세상은 87년 이후 남한 민중운동의 성과들을 나열하고, 서방의 연구 보고서와 민주주의 순위표를 하나씩 제시한 뒤, 이것들이 남한의 민주주의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으며 자민통의 반독재민주주의 노선이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강령이라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이들은 남한의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수준에만 머물러있으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미비한 상태라고 말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라는 주장과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의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대신, 이들은 곧바로 실질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원인이 불평등이며, 이를 해결하는 것이 남한 진보운동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들은 반독재민주주의 강령이 자주파의 우경편향을 정당화하는 구실이라는 논조의 주장을 전개한다. 곧 자주파가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각각 민주와 독재라는 잘못된 구도로 설정함으로써, 민주당에 영합하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윤석열 파면과 이재명 당선으로 내란은 이미 종결되었으며, 자주파(원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진보당을 지목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반독재 정치연합’를 구실로 민주당에 부역하고 있으며 이것이 불평등의 해소와 진보정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사람과세상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미사여구를 쳐내면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수구반동세력’, 즉 파시스트세력은 민중에 의해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현재의 정세에 크게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다. 둘째, 남한의 민주주의는 이미 완성되어있으며, 다만 광장민심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셋째, 광장과 정책의 괴리 즉 실질적 민주주의의 부재는 불평등 때문에 발생한다. 넷째, 반독재라는 이미 달성된 과제를 붙들고 있는 자주파는 자본가 정당에 불과한 민주당을 비호하여 불평등 심화를 방관하고 있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87년 이래 민중이 계속해서 수구반동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이는 이 주장의 문제는,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87년체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아니라, 완성된 부르주아민주주의 내에 잔존한, 사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군부독재의 잔재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오판이다. 관료집단, 사법부, 검찰, 국군, 족벌언론 등에서 파시스트세력의 영향력은 아직 건재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집권 중이지 않을 때에도 상당수의 국가기관과 사회영역을 장악하여 진지로 삼고 있다. 내란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은 지지부진하다. 인터넷을 통해 젊은 층에 확산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인터넷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올공 사태가 보여주듯 파시스트 폭도들을 양성하며 물질적인 힘을 획득하고 있다. 정당 국민의힘은 분명 침체기에 있지만, 국민의힘이 사라진다 해도 파시스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들은 사회 곳곳에 잔존해있는 파시스트 부위들과 협력하여 더욱 과격한 색채의 정당 혹은 폭력조직으로 재편될 것이다. 김민전이 국회에 불러들인 백골단은 그 징조이다.
남한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보장된 국가라는 주장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공안기구 검찰과 국정원이 남아있는 나라가 어떻게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소리일까? 사람과세상은 이러한 요소를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요소를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과세상은 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광장의, 대중의 요구가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실질적 민주주의의 결여가 맞다. 그렇다면 왜 광장민심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인가? 사람과세상은 그것이 불평등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은 분명히 남한 사회의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과세상은 불평등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어째서 그러한지를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불평등이라는 것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불평등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다루지 않고 있다. 어째서 남한 사회는 불평등한가? 사람과세상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오일쇼크 이전의 자본주의 세계는 인민들이 복락을 누리는 낙원이었던가? 게다가 세상에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나라가 대한민국 뿐인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어째서 남한 민중은 유럽이나 북미의 다른 ‘선진국’ 민중들보다 더 고통받는가? 사람과세상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남한 사회의 불평등은 원인을 파고들면 결국 미국에 의해 짜여진 종속적 경제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의 주된 산업은 가치사슬의 맨 밑바닥에 위치한 저부가가치 제조업으로,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이윤이 안 되어서 청산한 것을 이전받은 것이다. 현재 슈퍼사이클을 통해 초과이윤을 벌어 올리고 있는 반도체 위탁생산부문 또한, 서구의 설계기업으로부터 극히 일부의 이윤을 분배받을 뿐이다. 한마디로 돈이 충분히 되지 않는 산업이라는 이야기다. 남한의 노동시간이 1인당GDP가 유사한 국가들 중 가장 길고 노동환경 역시 가장 열악한 것은 산업 자체의 저이윤성 때문이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땀흘려 창출한 국부조차 대부분은 미국 금융자본으로 유출되고, 기업은 손해를 메꾸기 위해 하청업체의 단가를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후려치며, 결국 만년 적자에 시달리는 좀비 하청기업들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를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 그것이 남한의 노동자들이 궁핍으로 내몰리는 이유이다.
반독재를 낡은 의제로 설정하는 사람과세상의 규정이 오류라는 것은 앞서 파시스트세력에 대해 다루며 설명했다. 내란이 이미 종식되었다는 사람과세상의 주장은 내란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치고, 숙군, 검찰해체 등의 과업이 지지부진한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다. 정말로 내란이 종식되었다면 통합사관학교에 반대한다는 명분 하에 노골적으로 정치선동을 일삼는 장교와 장성들은 이미 숙군의 칼날에 분쇄되어야 했을 것이며, 윤석열 내란 당시 광범위하게 이에 동조하거나 부역한 군-사법부-언론-관료조직-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민중의 준엄한 심판 아래 모조리 색출되어 마땅한 처벌을 받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현재진행 중인 내란을 부정하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곧 진보당이 민주당과의 반파쇼 통일전선(원글에서는 반독재 정치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우경적 오류라는 것이다.
물론 진보당의 노선은 우경편향적인 지점이 존재한다. 통일전선과 변혁에 대한 진보당, 정확히 자주파 일반의 오류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뤄볼 것이다. 그러나 반파쇼 통일전선 자체를 우경적 노선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고, 나아가 내란청산의 과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과세상의 진단 역시 그릇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좌경적 오류라고 부를 수도 없다. 사람과세상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고작 복지자본주의적 ‘불평등 해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주과업에 대한 사세의 노선은 좌익의 흉내를 내는 우익 사회민주주의에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사람과세상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사람과세상은 북이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통해 통일 노선을 폐기하고 동족됨을 부정한 것을 언급하며, 자신들은 북의 이러한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곧바로 이들은 북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북이 통일을 부정하는데 통일 지향을 유지라는 것은 ‘통일의 한쪽 상대를 반대해 투쟁하는 자가당착’이라고 선언한다. 그러고는 통일 지향의 대체재로 평화 지향을 제시하며, 당장의 통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단은 북과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미래의 통일을 위해 북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과세상은 자신들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하려는 것은 통일과업의 달성에 있어 남한 민중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통일운동을 북의 노선에 종속시키는 것에 불과함이 명백히 드러난다. 통일은 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조선민족이 그 자신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역사적 과업이다. 이를 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다. 사람과세상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이 통일을 포기했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조선로동당이 남한 좌파들의 상전이라도 되는가? 북의 통일 포기가 통일과업의 중요성을 희석시키는가? 북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은 김정은 총비서가 이끄는 현 조선로동당 지도부의 수정주의적 퇴락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저버린, 수정주의적 북조선 지도부에 대한 투쟁이 어떻게 자가당착이 될 수 있는가?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고 이후 수정주의와의 투쟁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제일과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마오쩌둥은 소련수정주의에 맞선 세계적 투쟁을 선도하였고, 흐루쇼프 반역도당에 맞서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수호하였다. 사람과세상은 이에 대해서도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올바르지 않은 노선에 대한 투쟁이 자가당착이라면, 자민통에 대한 사람과세상의 비판 역시 자가당착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과세상은 자신들이 상대방, 즉 북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남한의 좌파들이 북조선의 대외노선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과세상은 당장의 통일이 기약없기에 평화적 공존을 먼저 구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통일과업을 ‘미래의 언젠가’라는 빗장 뒤에 유폐하고, 사실상 통일을 포기하려는 것이다. 이는 민족의 역사적 과업을 저버리는 중대한 배신행위이다.
종합적으로, 자주·민주·통일의 과제에 대한 사람과세상의 분석은 그들 자신이 그렇게 비판한 형이상학의 가장 조악한 형태이다. 자신들의 ‘평등’ 노선을 기계적으로 내세우며 현실을 그에 끼워맞출 뿐인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는 과학적이지도, 변증법적이지도 않으며, 유효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노정협의 견해에 대해
사람과세상의 해당 문건은 노정협 측의 6월 20일 공개토론회 내용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노정협의 공개토론회가 먼저였으나, 이 글에서는 사람과세상의 견해를 먼저 분석하고 이후 노정협의 토론회 내용을 분석하는 구조를 취했다. 토론회 후반부에 노정협이 사람과세상의 노선과 이번 논쟁 이전의 문건들을 비판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앞서 다룬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와 혼동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노정협은 먼저 북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에 대한 여러 세력들의 분석을 나열하고,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해석, 곧 ‘북조선이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했기에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했다’, 그리고 ‘북의 해당 선언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적대적으로 전환된 것이다’를 비판한다. 적대적 두 국가 테제는 미국과 남한이 변함없이 대북 적대정책과 흡수통일 전략을 고수해왔고, 이것이 트럼프와 윤석열을 거치며 더욱 노골화된 것에 대한 당연한 대응이며, 남한과 미국에 의해 적대화된 현실을 추인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노정협의 지적은 타당하다. 적대선언의 원인이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라는 해석은 통일의 문제를 흡수와 정권교체의 문제로만 파악하는 냉전적, 대결적 인식의 산물이다.
문재인 정권은 미국의 눈치를 보며 남북합의의 이행에 실패했고, 되려 미국산 무기들을 구매하고 미국과의 합동 군사훈련을 전개했다. 윤석열 정권은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선제타격을 외치는 등 더욱 노골적인 대북적대를 보였으며, 기어이 드론을 이용한 대북도발까지 감행했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이는 남한이 자의로 미제국주의의 편에 선다고 북조선이 판단한 것처럼 들린다. 식민지 남한이 식민모국 미국에 굴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북은 마치 남한이 독립된 주권국가이며 자의로 미국을 ‘선택’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것은 남한의 성격, 그리고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의 성격에 대한 조선로동당의 오류이다.
또한 대북적대를 지속하려는 세력으로 미국의 금융자본 전체가 아닌 ‘군산복합체’만을 지목하는 것이 노정협의 잘못된 인식임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제국주의의 호전성은 자본 내의 특정 섹터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를 수탈하지 않으면 그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종양처럼 과성장한 미국 금융독점자본 전체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후단계에 이른 미제국주의 자본 전체의 총의이다.
노정협의 견해가 지닌 문제점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민족과 민족모순에 대해 논한 단락부터이다. 노정협은 ‘민족 없이 민족모순이 생겨날 수 없다’며, 남북관계의 파탄은 민족모순의 특별히 격화된 양상일 뿐이지 민족 자체가 두 개로 나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김정일의 민족정의를 언급하며 ‘피줄의 공통성’을 민족의 주된 구성요소로 규정하고, 오랜 세월 피줄의 공통성을 지니고 중앙집권적 단일국가를 이루어 존재해 온 조선민족은 강력한 사회적 실재이며, 민족관계의 파탄을 이유로 사라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줄, 즉 혈연을 민족의 구성요소로 보는 김정일과 노정협의 인식은 잘못되었다. 민족에 대한 보편적이고 올바른 정의는 노정협도 원글에서 언급한 스탈린의 정의, 즉 ‘언어, 지역, 문화, 경제생활의 공통성에 기초해 역사적으로 축적된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민족이 두개로 되거나 두개의 민족이 하나로 되는 경우는 언제든 가능하며 역사적으로도 광범위하게 존재해왔다. 오늘날의 남과 북 또한 별개의 민족으로 분화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분리가 역사적으로 점층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지배블록 성격이 매우 달라짐에 따라 민족을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구조 속에서 민족성의 내용 또한 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정협이 제기한 의문, 즉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 어떻게 민족모순이 나타날 수 있는물음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답은 민족체(Ethnos)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엥겔스는 근대적-정치적 실재로서의 '민족' 이전에 전자본주의적이고 혈연, 언어, 문화, 관습, 지리적 근접성 등에 의존해 존재하는 역사적 인간집단인 민족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민족체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 자체로 역사적 사회적 공동체가 아닐 수 있지만, 일정하게 민족의 구성에 규정력을 지닌다. ‘피줄’은 민족의 구성요건이 될 수는 없지만, 일정하게 민족체의 구성요건으로 기능할 수는 있다.
민족체 개념에 기반하면 민족모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곧 남북은 서로 다른 민족이나, 동시에 동일한 민족체에 근거한다. 남북의 민족모순은 이러한 민족체적 동일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한 민족이 둘로 나눠질 수 있는 것처럼 두 민족도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 본래 하나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해방운동이 조선반도에서는 남과 북이라는 두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이들이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민족의 분단 자체가 외세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과 북은 별개의 민족이지만, 동시에 남과 북의 두 민족은 서로 동일한 민족체에 근거하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에 있어서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된다. 별개의 민족이라면 통일이나 해방의 대상으로 되지 않고, 같은 민족이라면 통일이나 해방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 과도하게 임의적인 기준이다. 맑스주의자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역사성에 기반하여, 사물의 점층된 측면들을 관찰하는 방법론을 통해 논해야 한다. 민족해방운동은 하나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지만 분단 속에서 민족이 바뀌었더라도 같은 민족체를 지니고 있다면 해방이나 통일을 통해 다시 하나의 민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나의 민족체도 사회정치적 과정에 따라 두개의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로동당의 규정, 즉 남과 북이 별개의 민족으로 되었다는 규정은 옳으나 이 과정에서 민족체적 동일성을 부인하고 남북 간 특수관계 및 분단상태의 역사성을 씻어낸 후 단순한 별개국가로 간주하는 규정은 절대로 옳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분단의 과정에서 북이 남측을 식민지가 아니라 별개의 적대적 주권국가로, 별개의 민족이 스스로 꾸린 주권적 국가로 은연 중에 간주하는 것 또한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괴뢰화라는 역사성을 올바르게 견지하지 못한 관점이다.
이러한 논리는 수정주의화된 소련의 평화공존론에 영향받은 후기 동독 지도부의 "사회주의 민족론"과 흡사하다. 동독 지도부가 ‘동서독의 민족은 동독의 사회주의 건설에 의해 서로 분화 되었으며 더이상 통일은 필요치 않다’며 제시한 사회주의 민족이론 또한 평화공존론과 평화이행론과 같은 수정주의적 이론에 경도되어 서독혁명과 민족재결합을 포기하는걸 정당화 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결국 그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북의 적대적 두국가론은 일종의 수정주의이며, 지도부의 판단오류이고, 남북간의 관계에 있어 민족의 분립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잘 짚어냈을지언정 민족의 단절이 곧 민족체와 역사성의 완전한 단절로 이어진다고 바라보는 평화공존론적 비과학이다.
노정협이 원글에서 사람과세상의 노선을 비판한 부분은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그들이 비판하는 문건들이 토론회와 작금의 논쟁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며, 이번 논쟁을 시작한 사세의 글은 우리가 위에서 이미 비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사람과세상에 대한 노정협의 비판 속에서 나타나는 오류들을 지목하고자 한다.
노정협은 오늘날의 고도성장한 재벌대자본을 매판자본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사람과세상의 의문에 ‘외국 자본가와 자국 시장을 중개하는 무역상이나 외국 상사의 대리업자를 뜻하는 의미의 소규모 매판자본은 아니지만, 확장된 의미로서 외세의존적·외세추종적 의미의 매판성’을 지니고 있다고 답한다. 이는 매판성과 매판자본이라는 개념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이다. 노정협들이 이러한 설명을 내놓는 이유는 단순하다. 상업자본이 아닌 산업자본, 그것도 거대한 생산력을 지닌 대자본의 외세에 대한 종속성을 설명할 이론적 틀이 노정협에게 부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마오주의자들은 그러한 자본을 관료자본이라고 부른다. 자생적 산업자본이 성장날 수 없는 식민지적 조건 하에서, 식민지 국가기구와의 결합 하에서만 발달할 수 있는 형태의 자본이기 때문이다. 관료자본의 개념은 중국 경제를 살명하기 위해 마오 주석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페루공산당의 곤살로 주석에 의해 체계화·보편화되었다.
남한 사회의 발전 문제를 다루는 단락에서 노정협은 자민통의 전통적 반자본주의론이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 문제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올바른 분석이다. 그러나 노정협은 그 대안으로 신식민주의라는 수정주의적 개념을 수용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신식민주의는 가나의 민족부르주아 혁명가 은쿠르마에 의해 제시된 개념이다. ‘신식민지’란 이론상으로 독립국이며 주권을 지닌 국가이지만, 경제적인 종속이 남아있기에 정치적으로도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를 의미한다. 신식민지론은 제국주의의 지배가 정치적·군사적 층위가 아닌 오직 경제적 층위에만 가해지며, 앞의 두 층위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글의 전반적인 논조를 보았을 때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닌 걸로 보여지지만, 수정주의적인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이들의 오류이다.
사람과세상의 노선전환을 ‘신좌파 인권노선’의 일환이라 부르며 비판하는 것 역시 올바른 입장이라 볼 수 없다. 최근 들어 진보당의 반미 기조가 후퇴한 것은 사실이나, 노정협의 진단은 진보당의 후퇴가 마치 ‘덜 중요한 의제들에 정신이 팔려’ 일어나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주요모순을 절대화하고 부차모순을 주변화하며, 주요-부차 관계를 고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모순론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의회주의를 비판하고 국내반동세력의 제압과 혁명적 신권력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노정협의 진단은 전적으로 옳다. 자주를 전면에 내세우더라도 노동의제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역시 올바르다. 분단모순이 계급모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들은 올바르게 진단하고 있다. 이것을 계급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전선에 일관되게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노정협의 북에 대한 인식을 짚어보고자 한다. 노정협은 현재 북이 자주적 사회주의 발전을 최대과제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북의 핵무장 강화, 농촌개발, 중러와의 결속 등이 이를 위한 노력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물론 북의 핵무기 보유는 미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현실적 위협에 맞선 자위적 수단이므로 당연히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층위에서의 광범위한 자본주의 복고나 조선로동당의 수정주의화 등을 고려하지 않고 북이 사회주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중러와의 결속 강화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술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옹호될 수 있겠으나, 러시아 파병 등은 전술적 선택이라기보단 신흥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불필요한 과밀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정협의 정세인식은 사람과세상의 그것보단 훨씬 과학적이고 정합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여전히 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축적된 역사적 경험에 기초해 새로운 인식틀로의 질적 도약을 이루는 대신, 이들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인식틀을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과거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설명의 공백을 메꾸는 대신 외부의 이론을 그대로 갖다붙이는 모습도 보인다.
우주의 팽창운동을 부정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우주상수를 도입하였듯이, 이론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면 설명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임시방편적인 가설들을 덧붙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식의 양적 축적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더 이상 임시방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때 요구되는 것이 인식론적 단절이다. 양이 질로 전화하고, 기존의 이론이 지양되어 새로운 이론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는 1953년과 1976년의 반혁명을 통해 그 한계에 직면했다. 우리에게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양하는 새로운, 발전된 이론이 요구된다. 즉 마오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박태훈 씨의 견해에 대해
박태훈 전 부대변인은 직접적으로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를 인용하고 그 내용을 비판하는 글을 작성해 트위터(현 X)에 게시했다. 해당 게시글은 사람과세상의 주장들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들 곳곳에서 남한의 사회성격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기초한 주장이 나타나므로, 지면을 할애해 이를 비판해보고자 한다.
먼저 실질적 민주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사람과세상의 평면적이고 환원론적인 불평등론을 비판하며 실질적 민주주의의 조건이 다면적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은 올바른 접근이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부재한 원인으로 분단체제와 대미예속을 꼽은 것 역시 남한의 파시스트부위가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집단이라는 점에서 타당한 분석이고, 이것과 경제적 불평등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과세상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한이 ‘형식적 민주주의는 달성된’ 나라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타당하다.
문제는 박태훈 씨가 이들 네 가지 축, 즉 불평등, 제도의 미완, 분단체제, 대미종속을 단순나열하기만 할 뿐, 각 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미종속이 분단체제를 항구화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반공논리가 제도적·형식적 민주주의를 가로막으며, 제국주의자본이 국내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상호병렬적인 네 항의 단순교차가 아니며, 남한 국체의 근본모순, 즉 미제국주의와 그에 종속된 관료자본 및 친미파시스트 집단과 민중 사이의 모순이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이다. 박태훈 씨는 이것을 올바르게 지목하지 못하였다.
남한의 식민지성과 독재성에 대해 논하는 부분은 더욱 조악하다. 박태훈 씨는 원글에서 자민통이 ‘한국 사회를 '독재사회' 혹은 '식민지'라고 규정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단지 남한 사회의 독재적 요소와 식민지적 요소에 맞서 투쟁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남한이 더 이상 그 성격상 식민지 파시스트 국가가 아니며, 단지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에 잔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많은 자주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남한은 그 성립부터 미제국주의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종속된 식민지였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은 단 한 번도 변화한 적이 없다. 도대체 언제 남한의 식민지성이 해소되었는가? 전작권이 여전히 미국의 손에 있고, 미군이 여전히 국내에 주둔하며, 국내의 재벌대자본들은 여전히 미국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종속되어있다. 이것이 식민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예들은 여전히 군 내에 깊게 뿌리박고 있고, 행정부와 사법부, 언론 내에도 파시스트들은 강력한 진지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미제국주의와 그 하수인인 관료자본에 충성하며, 윤석열의 내란이 보여주듯 언제든지 남한의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 파괴하고 파시스트 독재를 수립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고 있다. 현재의 남한을 파시스트 국가라고 볼 수는 없으나, 이것을 단지 ‘사회 내에 파시스트 독재적 요소가 남아있다’는 식으로 축소하는 것 역시 올바른 인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한 국가의 파시스트 부위는 청산되지 않은 군부독재의 잔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파시스트의 미봉적 타협으로 성립된, 87년체제라는 통일체를 이루는 대립물의 한 측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태훈 씨, 그리고 많은 자주파들이 공유하고 있는 식민성과 독재성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자주파의 전통적 입장인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 남한 사회와 비조응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식민지적 종속으로 인해 남한에는 독점자본이 존재하지 않으며, 독점자본처럼 보이는 남한 재벌은 외국 상품을 중개하여 지대이윤을 추구하는 매판부르주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의 산업대자본이 존재하는 남한의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실과 조응하는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대신, 반자본주의론을 슬그머니 묻어두고 ‘식민지적 요소가 있다’는 수준으로 퉁치고 넘어가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이들의 이해이다. 소련에서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대두된 이래 개량주의적 편향은 남한의 모든 좌익세력들을 지배하고 있다. 자주파의 전통적인 변혁전술인 자주적 민주정부론은 국가를 계급과 무관한 중립적 행위자로 간주하며, 자유주의세력과 연합하여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 북과의 통일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국가기구의 성격에 대한 중대한 오류이다. 맑스가 말하였듯 프롤레타리아는 낡은 국가기구를 그대로 인수해 휘두를 수 없으며, 기존 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권력을 건설하는 식으로만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 자유주의세력과의 연합 자체는 전술적 층위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마오 주석이 밝혔듯이 통일전선 내의 지도력은 언제나 노동계급이 거머쥐어야 한다. 자주파의 자주적 민주정부론은 이를 간과하며, 자유주의세력이 주도하고 노동계급이 보조적 역량에 머무른다 하여도 ‘자주적 민주정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 두 가지 오류는 3평화론, 소련식 민족민주혁명론 등 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 이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남한에서 민주화운동이 꽃피던 시기는 이미 소련에서 흐루쇼프 수정주의 도당에 의한 권력찬탈이 일어난 뒤였고, 따라서 남한 좌파들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그 전략을 일정하게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라면 몰라도, 맑스레닌주의가 지양되고 그 연속이자 파열로써 마오주의의 지평이 열린 오늘날에도 이같은 오류를 답습하는 것은 자주파 진영의 명백한 잘못이다.
박태훈 씨는 이어서 사람과세상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에 대한 규정을 비판한다. 사세 측이 둘을 ‘보수 진영 내의 온건 보수와 극우 보수’일 뿐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맞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각각 헌정수호세력과 내란세력에 해당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올바른 방향에서의 접근이다. 자유주의세력인 민주당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유지에, 파시스트세력인 국민의힘은 그것의 파괴에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둘을 헌정수호세력과 내란세력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타당하다. 다만 박태훈 씨가 이어서 사람과세상이 ‘민주당의 계급적 성격만 보고 헌정수호 진영으로서의 역할을 지운’다고 이야기한 것은 오류이다. 이는 마치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하나의 ‘자본가 계급’ 내에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부위인 것처럼 읽힌다. 또한 어떠한 이념적 대립이 계급적 위치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한 그릇된 도식을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모두 자본가 계급의 정당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소위 재벌이라고 불리는 관료대자본에 직접적으로 기반한다면, 민주당은 비록 그 자체의 무력성과 무능성에 의해 집권 시기에는 관료대자본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통치를 할 수 없으나 그 자신의 정치적 기반 자체는 민족자본가와 소부르주아 계급에 있다는 차이가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하나의 계급적 기반에서 발원한 두 정치세력이 아니다. 남한에서 민족자본은 하청 구조를 통해 관료자본의 수탈 대상이 되는 계급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남한을 단일한 자본가 계급에 존재하는 사회, 곧 식민지가 아닌 중견자본주의 내지 선진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잘못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 대변하는 민족자본의 동요하는 성질을 무시하고 민주당을 ‘헌정수호세력’으로 단언하는 것 역시, 민족자본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오류이다.
사람과세상이 남한의 식민지성을 부정하는 예시로 사용한 일본, 영연방의 사례에 대한 박태훈 씨의 비판은 따로 첨언할 부분이 없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의 모순된 행보를 ‘전환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이중적 면모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불완전하더라도 대미굴종에서 자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앞서 말하였듯 민족자본은 변혁과 반동, 자주와 굴종 사이에서 동요하는 계급이며, 노동계급의 영도 없이 이들 스스로 자주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다.
박태훈 씨는 자주와 평등의 과제를 상호무관한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과세상의 규정을 올바르게 반박한다. 97년의 신자유주의화와 그 결과인 불평등의 심화가 미제국주의의 기획이었음을 그는 정확히 지적한다. 다만 그 이전부터, 남한 국체의 성립부터 존재했던 미일제국주의에의 경제적 종속과 남한 관료자본주의 경제의 성격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쉽다.
통일과 분단모순,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한 그의 입장 역시 대체로 타당하다. 다만 수정주의적 적대적 두 국가론 테제에 대한 비판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북한이 남한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이 적대적 두 국가의 선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맞으나, 북 자체의 수정주의화를 ‘통일 노선에서의 후퇴’ 정도로 축소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전반적으로 박태훈 전 부대변인의 주장들은 올바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론적 토대가 취약하여 세부적인 부분에서 올바르지 않은 결론을 내고 있다. 이는 비단 그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자주파 진영 전체에서 보여지는 이론적 빈곤의 한 사례라고 보아야 정당할 것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 설명력을 상실한 후, 자주파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론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다.
자민통을 돌아보며
자민통 노선이란 무엇인가? 자주독립, 민주주의, 조국통일의 세 가지를 남한 사회의 변혁운동이 달성해야 할 당면과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민중운동 내 자주파 진영의 일관된 지향이었다.
자주파의 변혁전술인 자주적 민주정부론은 자민통 노선의 구체적 적용이다. 자주적 민주정부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세력을 포함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구성하고,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전작권 회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자주와 민주의 과제들을 달성하고, 북과의 연방제 통일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주장이다.
자주적 민주정부론에는 다음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 통일전선의 구성에 있어 노동계급 지도력의 필요성을 간과한다. 둘째, 권력 장악의 방법으로 선거를 통한 집권을 제시하는 의회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셋째,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닌 제도적 개혁의 층위에서 사고한다. 넷째, 북한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기초한다.
식민지 민족자본은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기에 이들에 반대하는 변혁적 잠재성을 지니나, 제국주의와 완전히 손을 놓는 것도, 제국주의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 반동적 성격 역시 지닌다. 하나의 몸에 두 임무를 지닌 민족자본은 따라서 언제나 동요할 수 밖에 없다.
노동계급이 아닌 민족자본에 의해 영도되는 통일전선은 결코 변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인도의 네루 정권,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등이 그 예시이다. 이것이 통일전선에서 노동계급의 지도력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역사는 몇 번이고 선거를 통한 집권이 변혁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왔다. 오늘날의 의회주의 미세관리정치 하에서 정부의 역할은 기술행정 부분에 한정되어있다. 대통령을 배출한다고 해서 우리가 국가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가? 의회를 장악한다고 해서 우리가 관료조직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실권을 지닌 관료조직이 우리를 비토하고, 무력을 쥔 군부집단이 우리를 위협하며, 친미 테크노크라트들이 광범위한 사보타주를 벌일 것이다. 선거로 집권한 변혁세력에게는 이러한 자들과의 타협 끝에 부르주아 정치의 왼쪽 날개 수준으로 퇴화하거나(유럽의 수많은 ‘공산당’들을 보라), 자본에 포섭된 관료조직의 쿠데타로 붕괴하는(아옌데를 보라) 결말만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은 결코 구 국가를 ‘인수’할 수 없다. 오직 대중에 기대어 새로운 권력을 바닥부터 건설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구 국가를 대체하는 것만이 노동계급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전술이다.
남한의 대미종속은 개별적인 정책의 층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경제의 층위에서부터 정치, 군사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미제국주의는 남한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철수된다고, 전시작전권이 환수된다고 남한 민중의 고통과 불행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람과세상의 지적은 옳다. 다만 그들의 말처럼 남한이 ‘식민지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개별 사안들의 해결이 곧 자주의 달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적 종속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관료매판자본을 몰수하여 국민의 통제 하에 두고, 저부가가치 제조업에 집중된 기형적 경제체제를 건강한 자립적 국민경제로 개조해야 한다. 정치적 종속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종미파시스트세력에 대한 완전한 청산과 더불어 미제국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민중에 뿌리내리고 민중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권력의 건설이 필요하다. 군사적 종속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친미파시스트의 소굴인 국군을 해체하고, 미제국주의의 필연적 침략에 대비해 대중을 무장시키는 전인민총동원전쟁의 테세를 갖춰야 한다.
오늘날까지도 자민통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규정하며, 북과의 통일을 통해 남한 역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김정은 지도부의 출범 이후에는 사회주의노선을 버리고 수정주의에 투신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근로인민대중보다 군을 앞세우던 김정일 시기의 기형적 노선을 지나, 김정은 시기에는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각 기업소 관리인들에게 생산과 경영의 전권을 제공하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 도입 되었다. 국가기간산업의 건설 대신 러시아의 생산하청경제를 자임하더니 전국적인 암시장의 성장을 수구방관하고, 이제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업을 포기하는데 이르렀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수정주의적 경향의 강화와 함께 광범위한 자본주의 복고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와 농장책임관리제로 나뉜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는 무엇인가? 기업이 독자적으로 생산과 경영을 계획하고, 가격을 자유롭게 책정하며 수익을 처분할 수 있도록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독립채산이 아니라, 기업 자체가 그 자신의 수익을 그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고 축적하며 생산 자체가 중앙이 아닌 기업에 의해 계획되게 하는 완전한 자본주의 복고 정책이다. 비록 기업 지배인을 국가에서 임명하고 그 소유관계가 형식적으로 국가에 복속된다고 하더라도 기업의 생산이 중앙계획에 귀속되지 않으며 수익이 자유롭게 처분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또한 이에 수반되는 ‘가격자율책정’이 고르바쵸프의 가격자유화와 다른 바가 무엇일까?
농장책임관리제는 무엇인가? 농장에 있어 집단농장 부문의 축소와 개별영농 부문의 확대, 잉여농산물의 판매 및 가격 결정권 자율화이다. 이것은 곧 영농 기반의 농업자본주의의 확대와 강화를 추동하는 정책이다. 농업에 있어서도 북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을 매우 전형적인 방식, 즉 흐루쇼프와 덩샤오핑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있다.
물론 당장 북 사회에서 사회주의 생산양식과 자본주의 생산양식 중 무엇이 우세한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계측할 방도는 없다. 그러나 일련의 정책적 연속성을 파악할 때에 우리는 현 조선로동당 지도부의 수정주의 노선이 자본주의 복고를 추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설령 북한의 지도부가 수정주의자들이 아닌 원칙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하더라도, 통일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한다는 기획은 공상적인 것이다. 변혁의 모든 단계에서 변혁의 주체는 일관되게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의 당이 영도하는 혁명적 인민대중이다. 남한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그 연장으로 남한에서 전위당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민주기지론의 규정은 대중과 유리되어 있기에 실제로 변혁을 수행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북의 도움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제 복고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다. 오늘날 전위당의 부재가 남한 민중운동을 몰락으로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보면, 민주기지론의 전위당 부정 역시 올바른 입장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물론 북이 현 국제정세에서 보이고 있는 일정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성과, 그리고 남한과 비교되는 고도자립 및 주권확보의 성과는 부정할 수 없으며 우리는 미제국주의와 남한 내 파시스트 세력의 북에 대한 침략책동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응징하며, 제국주의의 음모로부터 북을 방어해야 할 것이다. 다만 북의 지도부가 남한 민중이 지도를 받아들여야 할 어떠한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입장은 오늘날 사실상 파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주·민주·통일의 세 목표는 남한 민중의 해방을 위해 필수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것임이 틀림없다. 미제국주의의 타도, 종미파시스트세력의 청산, 분단된 조국의 통일은 남한 민중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일 뿐 아니라 세계반제투쟁의 일부로써 인류 전체의 해방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주파는 결코 자민통의 숙원을 이룰 수 없다. 그들이 잘못된 이론에 기초해 잘못된 정세판단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전술 역시 잘못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주·민주·통일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과감하게 낡은 이론을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에 기초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전략이 요구될까? 우리는 반제·반관료자본 신민주주의혁명론이 오늘날에 요구되는 변혁전략이라고 판단한다.
반제·반관료자본 신민주주의혁명론
좌파의 사명은 사회의 변혁이다.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올바른 변혁전략이 요구되고, 올바른 변혁전략의 창출은 올바른 사회조사를 통해서 달성된다. 따라서 남한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그로부터 어떤 변혁전략을 도출해내느냐의 문제는 사회변혁의 수행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남한의 사회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진자본주의-제국주의국가도, 신식민지 매판자본주의국가도, ‘식민성과 독재성이 잔존하는 중견자본주의국가’도 아니다.
남한은 형식적 주권은 지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반식민지 국가이다. 반식민지 남한의 경제는 식민지경제의 보편적 형태인 관료자본주의, 그것의 특수하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써, 지주계급의 소멸로 봉건적 우클라드가 사라진 결과 관료대자본이 극도의 양적 팽창을 이룩한 사회이다.
남한의 독점적 지배계급인 관료대자본은 제국주의 상업자본을 중개할 뿐인 매판자본과는 구분되는 대규모 산업자본으로, 국가기구, 주주배당, 라이선스 등을 통해 식민모국에 수직적으로 종속되어 이들로부터 제조업 분야의 저부가가치 산업을 이전받는 거대하청집단이다. 관료대자본은 이윤을 위해 대금 후려치기와 피라미드식 하청구조로 중견 민족자본을 수탈하고, 민족자본은 손해를 메꾸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며, 만성적 저임금으로 인한 소비위축은 소상공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국가기구와 밀착하여 성장한 관료자본은 군, 사법부, 관료조직, 언론 내의 파시스트들을 후원하며, 국민의힘은 그들의 정치적 결사체로 관료자본의 지배를 수호한다. 이들이 충성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이 아닌 관료자본과 그 주인인 미제국주의다.
남한의 사회성격에 대한 이러한 규정으로부터, 변혁운동의 구체적 과제들이 도출된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종미파시스트세력의 청산, 외세에 종속된 관료자본의 몰수, 미제국주의로부터의 군사외교적 독립, 그리고 외세의 종속에서 벗어난 자주적 국민경제의 건설이다. 즉 반제반관료자본 신민주주의 혁명이 남한 사회의 변혁운동이 취해야 할 방향성이 된다.
신민주주의는 자산계급이 주도했던 프랑스 혁명이나 신해 혁명 등, 과거 세계의 민주혁명과는 구분되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혁명이다. 혁명의 주체는 노동계급, 그리고 노동계급이 이끄는 농민, 소상공인, 민족자본, 진보적 지식인 등의 광범위한 통일전선이며, 혁명의 목표는 미제국주의 지배의 종식과 관료대자본 몰수, 그리고 계급연합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자립적 국민경제의 건설이다.
사회변혁은 선거를 통한 정권획득의 방식으로 달성될 수 없다. 공상적인 전국적 총파업이나 좌경적 군사맹동주의를 통해서도 달성될 수 없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대중 사이에 깊게 뿌리내리고, 대중 안에서 이중권력을 건설하며,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여 방어하고 기존 권력을 대체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혁명이란 권력을 장악하거나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을 인민대중의 의지에 기반하여 건설하고 기존 권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신민주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은 통일전선의 구성원인 민족자본, 소상공인, 농민의 자유로운 성장을 지원하는 한편, 몰수한 관료자본을 국가를 통해 통제하여 자립적 국민경제의 건설에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민중의 물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생산력을 건설할 수 있다.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민족자본에 대한 노동계급 통제의 확대, 농업의 기계화 및 집단화, 소상공인의 협동조합화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그러나 중단 없이 이루어지며, 이는 강압과 폭력이 아닌 설득과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적대적 과정이다.
민족자본가의 경우 중간마진이 최소화된 유통을 제공하고, 정상적인 단가지급과 독점기업의 횡포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여 정부의 우군으로 삼되 점차 이들의 사업장에서도 노동계급의 경영참여를 확대하고, 노동자에 대한 운영요령의 전수를 요구하며, 국가부문에 이들의 사적부문이 종속되게 함으로써, 결국은 고정이윤제를 거쳐 점진적 압박과 설득 하에, 노동계급이 계획경제를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순간에는 국가의 경제계획기구에 사업장을 매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까지는 약 15년에서 20년 가량이 요구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의 국가권력 전복이나 사회주의 이행의 중단을 막기 위한 지속적인 문화혁명과 대중에 의한 당의 비판과 정화, 그리고 계급투쟁에 박차를 기해야 할 것이다.
반제·반관료자본 신민주주의혁명론은 맑스주의 과학의 새로운 보편적 단계인 맑스-레닌-마오주의를 남한 사회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오직 신민주주의혁명을 통해서만 미제국주의로부터의 자주의 과제, 파시스트청산과 경제의 민주적 통제 등 민주의 과제, 그리고 조국통일과 한반도 평화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고, 사회주의로, 나아가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있다.
반제·반관료자본 신민주주의혁명은 자민통 노선의 폐기도, 관성적인 반복도 아닌, 자주·민주·통일의 과업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합적인 방법이다. 수정주의자들과 청산주의자들, 교조주의자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신민주주의혁명론은 그 자신의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을 변혁할 것임을 우리는 당당히 선언한다.
원문 링크
<남북관계의 적대관계로의 전환과 자주·민주·통일(자민통) 강령에 대해(전문)> —전국노동자정치협회
https://mlkorea.org/v3/?p=17990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 —사람과세상
https://hmnwd.org/posts/mbtqdvo
박태훈 트위터 게시글
https://x.com/i/status/2082368398969753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