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교와 보편적 세계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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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교와 보편적 세계관의 발전

우리는 종교가 발견한 진리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파괴하고자 한다. 종교의 가장 높은 발전은 종교의 종말이다. 그 종말은 종교의 사상적 성취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종교라는 형태로 자신의 역사 속에서 발견한 진리를 초월적 존재의 지배로부터 해방한다. 신의 권위가 폐위될 때에야 인간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실제로 장악하는 일은 혁명적 실천을 요구한다. 진리가 인간의 역사적 삶 속에서 생산된다면, 그 진리는 역사의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주체를 통해 자신의 현실성을 획득해야 한다.

유일신교와 보편적 세계관의 발전

종교비판이란 무엇인가

종교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은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흔히 종교에 대한 진보적 비판을 종교가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지배와 억압의 기능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를 퇴행적 구습으로 규정하고, 종교인들에게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도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비판은 종교적 당위에 대항하여 또 다른 추상적 당위를 제시할 뿐이다. 종교적 도덕과 세속적 도덕은 서로 적대할 수 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의 역사적 발생 조건을 은폐한 채 보편적인 규범으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이때 맑스주의는 종교적 세계관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느 쪽의 도덕이 더욱 정당한지를 경쟁하는 하나의 교설로 격하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종교적 도덕의 부정인 동시에 세속적 도덕의 추상적인 보편성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종교가 어떠한 역사적 필요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무엇을 설명하려 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다른 인간들과 공동의 삶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존재조건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생산한 세계가 언제나 인간 자신의 의식적인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자신이 선택한 조건 아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운동과 생명의 발생, 죽음과 고통, 사회적 질서와 권위, 인간의 노동과 그 결과는 인간에게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 세계 전체와 자신의 관계를 사유하도록 요구했다.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다양한 존재들은 어떠한 통일성을 가지는가? 인간은 그 세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며, 자신의 삶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종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하고 설명해 온 인류의 역사적 사유형식이었다.

이러한 사유의 발전에서 유일신교의 탄생은 결정적인 도약이었다. 여러 신을 하나의 신으로 대체했다는 수량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다. 유일신교는 세계의 서로 다른 영역을 지배하는 분절된 신적 권능들을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 아래 통일하였다. 하나의 신만을 승인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원리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서로 독립적인 존재근거를 갖지 않으며, 그 다양성은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총체 안에서 이해된다. 유일신교에서 종교적 사유는 세계의 보편적인 통일성을 가장 철저한 형태로 정립하였다.

이러한 절대적 유일성은 세계의 모든 유한한 존재를 상대화한다. 국왕도 절대자가 아니며, 민족과 국가도 절대자가 아니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형성한 어떠한 사회적 질서나 권위도 궁극적인 존재근거를 자처할 수 없다. 신의 절대성을 승인하는 순간, 신 이외의 모든 권위는 그 정당성을 다시 심판받아야 한다. 유일신교는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이해하는 데 도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절대화하는 모든 특수한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획득하였다. 이것이 유일신교가 종교적 사유의 가장 높은 발전형태인 이유이다.

그러나 유일신교는 자신이 발견한 세계의 통일성을 세계 자신의 속성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통일하면서도 그 원리의 궁극적인 근거를 세계와 구별되는 초월적인 신에게 귀속시킨 것이다. 세계의 총체성을 사유하는 인간의 능력은 절대자의 개념에 도달했지만, 그 절대자는 다시 세계를 초월하여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 주체로 정립되었다. 세계의 통일성을 발견한 사유가 그 통일성의 근거를 세계 자신으로부터 분리한 셈이다. 유일신교의 위대한 철학적 성취는 이 모순을 자신의 내부에 포함하고 있다.

이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유는 유일신교의 역사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가톨릭과 이슬람의 철학자들은 신의 절대성을 더욱 철저하게 탐구하면서 신과 세계의 관계를 유출과 필연적 생성, 존재의 통일성과 절대자의 자기전개라는 문제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가 신과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별을 위협하거나 세계의 내재적인 필연성을 주장하는 순간, 정통 신학은 교리의 경계를 앞세워 그 발전을 억제하였다. 신의 절대성을 끝까지 사유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신앙의 이탈로 규정된 것이다.

맑스주의는 이러한 사상적 운동의 역사적 성취를 계승해야 한다. 유일신교가 발견한 세계의 통일성을 거부할 이유가 없으며, 어떠한 유한한 권위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부정의 원리를 폐기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 통일성을 세계 바깥의 신적 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관념론적 전도는 부정되어야 한다. 인간이 세계의 보편적인 질서를 탐구하여 발견한 진리를 다시 인간과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소유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유일신교가 자신의 진리로 제시한 것은 자신의 신학적 형식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신교의 진리를 계승하는 일과 유일신교에 맞서 투쟁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 세계가 하나의 총체라면 그 통일성은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운동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모든 유한한 권위가 상대적이라면 신의 절대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적 권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하나의 질서로 이해한다면 그 질서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역시 인간들의 역사적 사회관계에서 탐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끝까지 밀어붙일 때, 신학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이 취해 온 형식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에 도달한다.

이것이 종교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출발점이다.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외부에서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는 신학의 역사적 발전을 해명할 수 없다. 신학이 발견한 절대적 보편성을 더욱 철저하게 사유하고, 그 사유가 자신의 기존 교리와 충돌하는 과정을 끝까지 전개해야 한다. 세계의 통일성을 초월적인 신에게 귀속시키는 단계에서 출발한 사유는 그 통일성을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운동으로 이해하는 데로 발전하며, 절대자의 자기규정을 탐구하는 관념론은 마침내 역사적·물질적 세계의 자기운동을 파악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지양된다. 이러한 발전은 종교를 외부에서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종교적 사유가 자신의 진리 내용을 철저하게 전개함으로써 종교라는 형식 자체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역사적 정통 신학은 이러한 발전을 자신의 교리적 경계 안에 가두려 했다. 신의 절대성을 세계의 내재적인 통일성으로 발전시키려는 사유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부정한다는 이유로 배척되었고, 절대자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를 탐구하는 사유는 신의 자유로운 창조라는 교리에 부딪혔다. 유일신교는 세계의 통일성을 발견하면서도 그 통일성을 세계 바깥의 초월적 주체에 귀속시키는 관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경계의 중심에 무로부터의 창조, 곧 Creatio ex nihilo가 있다. 신이 세계를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창조하였으며 세계는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는 교리는, 신과 세계의 관계를 절대자의 내재적 자기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사유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유일신교가 자신의 진리를 끝까지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놓여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

유일신교는 세계의 모든 존재를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는 신과 세계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낳는다. 신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라면 세계는 신과 어떠한 관계에 놓이는가? 세계가 신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실체라면 신의 절대성은 제한된다. 반대로 세계가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유일신교는 이 모순을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안에 품고 있다.

역사적인 유일신교는 신의 창조라는 개념을 통해 양자의 관계를 설명해 왔다. 세계는 신과 동일하지 않으며, 신의 실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도 아니다. 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였고, 세계의 존재 전체는 그 창조행위에 의존한다. 이러한 교리의 핵심이 무로부터의 창조, 곧 Creatio ex nihilo이다. 여기서 무는 재료가 아니다.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은 세계가 신의 창조행위에 선행하는 어떠한 독립적인 존재근거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에게 세계의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더라도 완전한 절대자로 존재할 수 있다.

바로 이 마지막 명제가 유일신교의 존재론적 난점을 드러낸다. 신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이지만, 그 존재들의 현실적인 총체를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었고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계의 존재는 신의 본질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존재근거로부터 현실적인 세계가 발생하는 필연적인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창조의 자유를 내세우는 것으로는 이 관계가 해명되지 않는다. 신의 의지가 세계의 존재를 결정했다는 설명은 남지만, 그 의지가 어떠한 필연성에 의해 그러한 규정성을 갖는지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고전적인 신학은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와 다르다고 해명한다. 신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능성을 숙고한 다음 하나를 선택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자유는 외적인 조건이나 강제로부터 독립된 완전한 자유이며, 신의 의지 또한 신 자신의 본질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의지가 본질과 동일하다면 그 의지의 현실적인 내용 역시 신의 본질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신의 본질은 필연적인데 세계의 창조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절대자의 본질과 그 본질이 산출한 현실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문제로 만든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존재가 신 자신의 본질과 맺는 관계는 자유로운 의지라는 교리적 규정 안에 남겨진다.

이러한 사고는 자유와 필연성을 서로 외재적으로 대립시키는 오성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낸다. 필연성은 자유를 억압하는 외적인 강제가 아니며, 자유 또한 어떠한 규정성도 갖지 않는 무규정적인 선택능력이 아니다. 절대적인 자유는 자기 자신의 규정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자유여야 한다. 따라서 절대자로부터 세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절대자가 외부의 강제에 종속된다는 뜻이 아니다. 절대자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 규정성의 운동을 통해 자신의 현실성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자유의 진리는 필연성과의 분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세계의 필연적인 발생을 부정하는 신학은 오히려 절대자의 자기규정 능력을 제한한다.

유일신교의 역사에서 신과 세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절대자가 모든 존재의 근거라면 유한한 존재들의 발생은 그 절대자의 본질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론과 존재일원론, 범신론과 절대자의 자기전개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하였다. 이러한 사상들의 출발점은 반드시 신의 부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의 절대성과 세계의 통일성을 더욱 철저하게 사유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유가 신과 세계의 외재적인 구별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순간, 정통 창조론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븐 시나의 철학은 이러한 충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븐 시나에게 신은 다른 어떠한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 존재이며, 유한한 존재들은 그 자체로는 가능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필연적 존재에 의존한다. 세계는 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발생이 어느 순간 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신은 영원하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존재들의 인과적 질서 역시 영원하다. 이븐 시나는 세계의 영원성과 피조성을 함께 인정하였다. 세계는 시간적으로 최초의 순간에 무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피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필연적 존재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피조된 것이다. 창조의 문제는 이로써 시간적인 발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와 유한한 존재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에 관한 문제로 전환된다.

알가잘리는 이러한 철학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철학자들의 자기모순』에서 세계의 영원성을 비판하고, 신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다는 교리를 옹호하였다. 철학자들이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의 필연적이고 영원한 발생을 주장한 데 대해, 알가잘리는 이것이 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훼손한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세계의 영원성에 관한 주장을 불신앙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철학적 논쟁을 종교적 정통성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절대자와 세계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제 신앙의 허용 가능한 경계를 둘러싼 투쟁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알가잘리의 논박으로 문제가 종결되지는 않았다. 이븐 루시드는 철학과 계시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면서 세계의 영원성에 관한 철학적 논증과 꾸란의 창조에 관한 진술을 해석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븐 아라비와 그를 계승한 사상적 전통에서는 존재의 유일성과 신적 실재의 자기현현이 중요한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철학은 서로 동일하지 않았지만, 신과 세계의 관계를 단순한 외재적 종속관계로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존재의 통일성을 해명하려는 사유는 계속해서 신학적 절대자의 개념을 변형시켰으며, 그때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둘러싼 논쟁이 재발하였다. 이븐 아라비의 존재론에 가해진 비난과 오랜 논박도 이러한 충돌의 일부였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신이 영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를 모두 무로부터 창조하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이슬람 철학의 성과가 중세 기독교 사상에 수용되면서 세계의 영원성과 창조의 필연성, 신의 전능성과 자연의 인과적 질서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277년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는 신학과 자연철학에 관한 219개 명제를 단죄하였다. 여기에는 세계의 영원성과 신의 전능성, 자연적 필연성에 관련된 명제들이 포함되었다. 자연의 운동을 필연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철학은 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수호하려는 교회 권위와 충돌하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신학은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발전시켰다. 그는 신과 영혼의 관계, 신적 근거와 존재의 발생, 영원성과 유한성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탐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과 피조물의 구별을 불명료하게 만든다고 판단된 명제들이 등장하였고,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에크하르트의 저술에서 추출된 28개 명제를 단죄하였다. 에크하르트 자신이 공식적으로 이단자로 선고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유에서 도출된 일부 결론은 정통 교리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판정되었다. 절대자에 대한 신학적 탐구가 진전될수록 교회는 자신이 승인할 수 있는 철학적 결론의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설정해야 했다.

이러한 경계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 『Dei Filius』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 누구든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주님이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부인한다면, 그는 파문받을지어다.

둘, 누구든지 물질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을지어다.

셋, 누구든지 하느님의 실체 또는 본질과 만물의 실체 또는 본질이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파문받을지어다.

넷,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을지어다. 유한한 것들, 곧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모두가, 또는 적어도 영적인 것들이 신적 실체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신적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전개함으로써 만물이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 또는 마지막으로, 하느님은 보편적이거나 불확정적인 존재이며, 자기규정을 통하여 유(類), 종(種), 개체로 구별되는 만물의 총체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하는 경우.

다섯,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을지어다.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곧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가 그 실체 전체에 있어서 하느님에 의해 무(無)로부터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하느님이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경우. 또는 세계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물론이 다섯 가지 단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상도 신과 세계의 실체적 동일성을 주장하거나, 세계가 신적 본질로부터 유출된다고 설명하거나, 절대자의 자기전개를 통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파문의 대상이 된다. 특히 네 번째 조항은 신이 자신의 규정성을 전개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존재를 성립시킨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배격한다. 다섯 번째 조항은 신이 필연적으로 세계를 창조했다는 주장까지 단죄한다. 가톨릭은 무신론뿐만 아니라 신의 절대성을 세계의 내재적인 통일성과 필연적인 자기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사유까지 교리의 외부로 추방한 것이다.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만으로는 이 논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구분은 세계를 초월하는 신의 자유로운 창조와 절대자의 필연적인 자기전개 사이에 존재한다.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보다 그 절대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가가 정통성의 경계를 결정한다. 『Dei Filius』는 바로 이 경계를 공식적으로 확정한 문헌이다.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라는 전제가 철학적으로 중대한 전선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이 세계를 필연적으로 산출한다면 세계의 발생은 신의 본질과 무관한 사건으로 남을 수 없다. 세계는 절대자 자신의 규정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순간 신과 세계의 외재적인 창조관계는 기존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신은 세계의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완결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타자화와 자기매개를 통해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하는 절대자로 파악된다.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는 바로 이러한 개념적 이행을 차단한다. 유일신교가 발견한 절대적 존재근거를 세계와 구별된 창조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발생이 신적 본질의 필연적인 자기운동이 아니라는 명제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를 절대자의 자기규정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철학적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자가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규정성을 초월하는 순수한 존재는 어떠한 내용을 갖는가? 헤겔은 아무런 규정성도 갖지 않는 순수존재가 순수무와 구별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양자의 진리는 정지된 동일성이 아니라 생성이다. 절대자는 세계의 외부에서 이미 완성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규정성과 타자화를 매개로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한다. 절대적인 것은 자신의 운동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절대성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의 절대적 관념 역시 최종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 현실적인 세계의 운동을 관념의 자기전개로 설명한다면 인간의 역사적 실천은 여전히 관념의 운동에 종속된다. 이 관계를 다시 뒤집어야 한다. 의식과 사상, 종교와 철학은 물질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는 역사적 활동 속에서 발생하고 발전한다. 세계의 운동을 설명하는 근거는 절대적 관념의 자기전개가 아니라 물질적 현실 자체의 운동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신에게 귀속되었던 보편성과 절대성, 세계의 통일성과 자기운동의 문제는 이로써 자신의 현실적인 존재근거를 회복한다. 이것이 유일신교가 자신의 개념적 발전을 통해 도달하는 가장 높은 단계, 곧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스피노자에서 헤겔로,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발전은 종교가 제기한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었지 종교의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폐기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스피노자는 초월적인 창조주를 세계의 내재적 원인으로 전환하였고, 헤겔은 실체의 정지된 동일성을 절대자의 자기규정과 생성의 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마르크스는 관념에 귀속되었던 역사적 운동을 현실적인 인간의 물질적 실천으로 되돌려놓았다. 이 발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요청되었던 초월적 신은 더 이상 독립적인 설명원리로 존속할 필요가 없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 속류적 무신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데서 멈추는 무신론은 종교적 사유가 제기했던 세계의 통일성과 절대성의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둘 수 있다. 반면 유일신교의 개념적 발전을 끝까지 추적한 무신론은 종교가 발견한 진리의 내용을 자신의 사상적 성취로 보존한다. 신의 부정은 종교와 무관한 외부의 명제가 아니라 종교적 사유가 자기 자신의 원리를 철저하게 전개한 결과로 나타난다. 유일신교의 모든 노정을 통과한 무신론만이 유일신교의 추상적인 반대물에 머무르지 않고, 그 역사적 성취를 지양하여 더욱 풍부한 내용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자는 유일신교가 발견한 세계의 보편적 통일성을 계승하면서, 그 통일성을 초월적인 신에게 귀속시키는 신학적 형식과 투쟁해야 한다.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는 이 투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교리는 절대자와 세계의 관계를 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종속시키고, 세계의 필연적인 자기운동을 절대자의 본질과 분리한다. 역사적 정통 신학은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려는 철학적 시도들을 이단과 오류로 규정하고 배척해 왔다. 그 과정에서 교리적 정통성의 수호는 종교적 사유가 자신의 기존 형식을 넘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라는 교리적 경계는 파괴되어야 한다. 세계의 존재근거를 초월적 의지에 귀속시키는 관계가 지양될 때, 세계는 자신의 내재적인 필연성과 운동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인간 역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통일성을 외부의 절대자에게서 찾는 대신, 자연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자신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신학이 발견했던 보편성의 진리는 신학적 형식의 파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현실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유일신교는 세계의 총체적 통일성에 도달했으나 그 통일성을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귀속시켰다. 이제 그 절대적 보편성을 세계 자신의 운동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종교의 가장 높은 발전은 종교라는 형식의 영원한 보존이 아니라 종교 자신의 지양에 있다. 신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은 신학이 자신의 진리에 끝까지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끝까지 전개한 결과가 신학 자신의 부정이라면, 신학은 자신의 역사적 성취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해야 한다.

유일신교와 세계의 존재론적 통일성

가톨릭과 이슬람은 아브라함계 유일신교라는 공통의 역사적 뿌리를 갖는다. 그러나 두 종교는 신의 유일성과 세계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다. 가톨릭의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규정한다. 성육신의 교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성자라는 신적 위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역사 속에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신적 본질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세계 안에 현존할 수 있으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성육신이라는 특별한 매개가 성립한다.

이슬람의 타우히드는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한다. 알라는 유일하며 다른 어떠한 존재도 그 본질에 참여하거나 동등한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존재를 신에게 의존하지만, 신은 어떠한 피조물과도 동일하지 않다. 가톨릭 역시 신을 세계의 초월적인 창조주로 이해한다. 두 종교의 차이는 신이 초월적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두 종교의 신은 모두 초월적이다. 진정 중요한 문제는 그 초월적인 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한한 세계에 현존하는가에 있다. 가톨릭에서는 성자가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역사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알라 자신이 세계 안의 한 개별자로 존재할 수 없다. 신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와 역사 속에 나타나더라도 계시를 전달하는 인간이 신적 존재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는 신적 권위와 인간적 권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가톨릭에서는 성육신의 교리에 교회의 성사적 질서가 결합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이해되며,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등장하는 in persona Christi Capitis라는 표현은 사제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행위한다는 뜻이다. 인간인 사제가 성사의 집전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적 권위가 교회의 제도적인 직무를 통해 현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톨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회제도는 신의 의지를 해석하는 인간적 조직에 불과하지 않다. 교리 상으로 교회는 직접 신적 구원사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를 성사적인 질서 안에서 행사한다. 이러한 구조는 세속적 권위와 교회의 관계에도 독특한 가능성을 부여한다. 군주의 즉위와 통치에 대한 축복, 교회의 세속적 질서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는 신적 권위에 참여하는 교회의 행위를 통해 종교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세속의 군주가 그 자체로 신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통치는 교회의 신적 권위를 매개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성사적 매개가 성립하지 않는다. 칼리프와 술탄, 법학자와 이맘은 신의 의지를 해석하거나 신앙공동체를 통치할 수 있지만, 그들이 알라의 인격 안에서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지위는 신과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성육신적 관계나 성품성사에 근거하지 않는다. 아무리 높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갖더라도 그들은 신의 피조물이며, 자신들이 속한 움마의 역사적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치적 권력이 신의 절대성을 자신의 고유한 속성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여기에 이슬람의 급진적인 잠재성이 존재한다. 신만이 절대적이라면 어떠한 세속적 권위도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군주와 국가, 계급적 지위와 역사적 관습은 모두 유한한 인간적 질서이며, 그 어느 것도 신의 절대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 타우히드를 철저하게 전개한다면 기존의 권위가 오래 존속해 왔다는 사실이나 신앙공동체 안에서 승인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권위의 정당성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신의 유일성은 유한한 인간적 권위를 끊임없이 상대화 하는 부정의 원리로 발전할 수 있다.

신적 주권을 뜻하는 하키미야(ḥākimiyya)는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인 차원에서 제기한다. 최종적인 입법권과 주권이 신에게 속한다면 인간의 통치자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곧바로 신의 의지와 동일시할 수 없다. 인간이 신의 뜻을 해석하고 법적 판단을 내리는 일과 신 자신이 통치한다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즈티하드(ijtihād)는 인간이 경전과 법학적 전통을 해석하여 판단에 도달하는 활동이지만,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인간이 수행한 해석의 결과이다. 인간의 지식은 신의 절대성과 동일한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12이맘파 시아파의 교리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더욱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신적 임명을 받은 이맘은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갖지만, 열두 번째 이맘은 은둔 상태에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현실의 법학자와 정치적 통치자는 이맘 자신과 동일한 존재일 수 없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벨라야테 파키흐, 곧 법학자의 후견통치 역시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법학자는 종교법에 관한 지식과 특정한 교리적 해석을 근거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만, 그 자신이 은둔한 이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적 권위의 절대성과 역사적인 법학자의 통치권 사이에는 여전히 구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타우히드가 유한한 권위를 상대화한다는 사실이 이슬람의 현실적인 정치질서가 언제나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현실적인 통치로 실현하려는 순간, 신의 뜻을 해석하는 인간적 권력이 다시 등장한다. 특정한 법학자나 정치조직이 자신의 해석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한다면, 유한한 인간적 판단은 절대적인 신적 명령의 형식을 획득한다. 모든 인간적 권위를 상대화했던 신의 절대성이 특정한 인간적 권위를 절대화하는 근거로 전도되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도 신적 권위의 성사적 매개가 특정한 세속적 통치자의 정당성을 언제나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속적 권력을 승인할 수도 있고, 그 권력과 충돌하거나 그 정당성을 부정할 수도 있다. 이슬람 역시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역사에서는 종교적 해석과 정치적 권력이 결합하는 다양한 통치형태를 발전시켰다. 두 종교의 교리적 차이는 정치적 결과를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각 종교가 현실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자신의 권위를 조직하는 방식은 계급적 대립과 국가권력, 역사적인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 의해 매개된다.

그럼에도 양자의 신학적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톨릭의 성육신과 성사적 질서는 신적 권위가 교회의 역사적인 제도를 통해 현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슬람의 타우히드는 인간적 권위가 신의 절대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원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치적 권력 역시 신적 주권을 현실적인 제도로 실현하기 위해 인간의 해석과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신의 권위와 인간의 권위를 가장 철저하게 구별하려는 사유가, 현실에서는 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적 권력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이슬람이 현대의 국가권력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난다.

신적질서와 세속질서의 문제

유일신교의 세계에는 신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가 존재한다. 가톨릭에서 양자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해명한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영원한 정의와 인간의 현세적 법을 구별하였으며, 아퀴나스는 영원법, 자연법, 인간법, 신법이라는 네 가지 법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영원법은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신의 이성적 섭리이고,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이 영원법에 참여함으로써 파악하는 질서이다. 인간법은 자연법을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에 적용하여 제정한 실정법이며, 신법은 계시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법이다.

이러한 법들은 서로 비독립적 관계에 있다. 자연법은 영원법에 참여하고, 인간법은 자연법으로부터 정당성의 근거를 얻는다. 신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는 구별되지만, 세속적 질서는 신적 질서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법은 신의 법과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신의 질서에 종속된다. 가톨릭은 이러한 위계 속에서 세속적 제도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승인한다.

우리는 여기서 서구 세속주의의 신학적 기원을 발견한다. 세속적 질서가 신적 질서와 구별되며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운영될 수 있다는 관념은 그 자체로 신의 절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적 질서의 우위를 인정하는 가운데 현세의 제도와 권력에 독자적인 활동영역을 부여한다. 서구적 세속주의는 이러한 기독교적 사유의 역사 위에서 발전하였다.

오늘날 서구의 국가들은 더 이상 영원법이나 신법을 헌법의 직접적인 근거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적 언어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언어 속에서 형성된 인간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로크의 자연권 사상은 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 재산에 관한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 권리들은 정치공동체의 성립에 앞서 개인에게 속하며, 국가는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 인간을 사회적 관계에 선행하는 권리의 소유자로 파악하는 근대 부르주아적 인간관은 이러한 기독교적 자연법의 유산을 세속적인 법률의 언어로 보존하였다.

공화주의와 민주적 주권론, 공리주의와 사회권 사상은 서구 법질서의 형성에 참여하였으나, 근대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인간관을 소멸시키지는 못하였다. 국가와 사회에 앞서 권리를 소유한 개인이라는 관념은 여전히 서구적 정치질서의 중심에 놓여 있다. 신에게 부여받은 권리는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권리로 표현되고, 그 역사적 기원은 보편적인 인간성이라는 관념 속에 은폐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세속적인 보편성으로 발전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출생증명서를 폐기한 것이다.

가톨릭이 신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를 구별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성취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별은 현실 세계의 불완전성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로 작용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사상에서 현세의 평화와 정의는 신국의 완전성과 구별되며, 아퀴나스는 인간법이 모든 악덕을 금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논하였다. 현실의 법은 인간들의 구체적인 조건을 고려해야 하며, 이 세계에서 신적 정의의 완전한 실현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항해시대 이래로 가톨릭 교회가 식민주의와 맺어 온 관계는 이러한 사고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낸다. 원주민의 인간적 존엄과 권리를 옹호한 주교와 사제들이 존재하였고, 식민지배의 폭력을 규탄한 신학적 논쟁도 있었다. 그러나 원주민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비판하면서도 식민지배의 제도와 권력 자체를 승인하는 일이 가능했다.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 것과 그 존엄을 침해하는 사회적 관계 전체를 지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현세적 질서가 신의 영원한 정의와 무매개적으로 합치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는 고통과 불평등, 지배와 착취가 존재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정의와 화해가 현세 바깥의 질서에서 완성된다면, 그러한 모순을 역사 속에서 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신앙의 필연적인 요구가 되지 않는다. 현실의 악을 완화하고 불완전한 질서를 개선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선을 실천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 속에서 지배와 착취를 생산하는 관계는 변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감내하고 조절해야 할 현세의 불완전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존재론은 가톨릭의 정치적 유연성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반혁명성의 사상적 조건을 드러낸다. 신적 질서의 완전성이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한,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는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다. 교회는 현실의 부정의를 비판하면서도 부정의를 생산하는 질서와 화해할 수 있다. 궁극적인 완성이 피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타우히드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전혀 다른 가능성이 나타난다. 신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최종적인 원리라면, 인간의 현실적인 삶 가운데 그 원리의 외부에 놓일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노동하고 소유하며, 공동체를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직접적인 신앙의 문제가 된다.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경건이나 의례의 영역으로 격리될 수 없다. 진리가 절대적이라면 그 진리는 세계 전체에 대해 절대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근본주의라고 부른다면, 근본주의라는 명칭 자체에 비난의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어떤 진리가 참이라면 그것을 세계의 일부에만 적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진리는 특정한 생활영역에서만 참이고 다른 영역에서는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에 기초하여 세계 전체를 변혁하려는 태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실천에서도 발견된다. 문제는 총체적 실천이라는 형식에 있지 않다. 그 실천이 전제하는 진리가 정말로 진리인지, 그리고 그 실천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고 어떤 계급의 역사적 운동에 봉사하는지가 문제이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그것이 근본주의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비판은 진리의 내용에 대한 판단을 회피하고, 세계관의 철저한 실천 자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자신이 진리라고 승인하는 것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무엇 때문에 비난해야 하는가? 진리와 실천의 통일을 요구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반동적이지 않다. 반동성은 그 실천이 현실의 어떠한 지배관계를 보존하고 재생산하는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을 순전히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로 환원하라는 서구 자유주의의 요구를 살펴보자. 이슬람이 진리라면 그 진리는 인간의 사회적 삶 전체를 규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무슬림의 신앙을 존중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신앙의 총체적인 실천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신앙을 믿을 자유는 인정하지만, 신앙의 진리에 따라 현실 세계를 형성하려는 활동은 세속적 질서의 침해로 규정한다. 신앙인은 자신의 진리를 승인할 수 있지만 그 진리를 자신의 삶 전체에 실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이슬람의 진리성을 부정할 수 있다. 이슬람이 제시하는 절대적 존재근거와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 신학적 형식의 지양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진리의 내용을 둘러싼 사상적 투쟁이다. 반면 이슬람을 참된 신앙으로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두어 놓으려는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미리 설정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에 종교를 복속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신앙을 사적으로 보존하되 그 신앙의 세계변혁적 역능은 거세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러한 구별을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원리로 제시하는 서구 자유주의의 태도이다. 신앙을 개인의 문제로, 정치와 법을 세속적인 공적 영역의 문제로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사상적 뿌리는 기독교적 법철학과 근대 부르주아적 인간관에 닿아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역사적 특수성을 은폐한 채 다른 세계관들에게 그 질서를 보편적인 규칙으로 승인하라고 요구한다. 자신에게는 세계를 규정할 권리를 부여하면서, 자신과 대립하는 세계관에는 개인적인 신앙의 영역에 머무를 것을 명령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주의적 자유의 본질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은 수천만 개의 상품 가운데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현대인은 주식을 사고팔고, 자신의 취향을 전시하며, 욕망에 따라 소비한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생산과 소유, 노동과 공동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 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주어진 세계 안에서 무엇을 소비하고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자유가 허용되지만, 그 세계 자체를 바꿀 자유는 끊임없이 의심과 제약의 대상이 된다.

과연 이것이 자유의 완성인가?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만 자유로워야 하는가? 인간은 세계를 선택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세계를 생산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하고, 다른 인간들과의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그러한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조건까지 변화시킨다. 인간의 자유는 이미 주어진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에 그칠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조건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능이야말로 인간의 대자적 자유를 구성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인간에게 신앙을 선택할 자유를 부여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는 활동에는 별도의 정당화를 요구한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관을 내면적으로 소유하는 동안에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중받지만, 그 세계관을 현실적인 사회관계의 변혁으로 발전시키는 순간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신앙은 선택할 수 있지만 세계는 선택할 수 없다. 세계관은 가질 수 있지만 그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는 일은 제한된다. 자유주의가 승인하는 자유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대자적 역능을 현존하는 질서의 경계 안에 가둔다.

서구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제한을 세속주의와 헌법, 인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 헌법과 권리의 체계 역시 특정한 역사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다. 샤리아법이 봉건구습이라면, 영미법과 대륙법 또한 기독교에서 유래한 봉건구습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 급급한다. 이들에 의하여 기독교적 자연법과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의 발전 속에서 형성된 권리관계가 세속적인 보편성으로 제시되고, 그 보편성에 도전하는 세계관은 비자유적이거나 비문명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정치적 자유의 역사적인 조건을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취급되는 것이다.

라이시테와 같은 세속주의 원칙도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국가는 자신이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선언하지만, 무엇이 종교적 행위이며 그것이 공적 영역에서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결정하는 권력은 국가 자신에게 있다. 국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중립성으로 명명하고, 다른 세계관의 실천을 그 중립성에 대한 침해로 규정한다. 국가의 세속성이 곧 국가의 무이념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세속주의는 종교의 정치적 절대성을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의 역사적 원리를 새로운 절대적인 규범으로 정립한다.

서구 자유주의는 자신의 실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 기독교적 자연법의 유산과 부르주아적 사회관계 위에서 형성된 권리질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무슬림과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대립적인 세계관의 실천을 제한한다고 선언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자유주의가 자신의 특수한 역사적 질서를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진리로 신성화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비난하는 근본주의의 구조는 바로 자유주의 자신의 보편성 안에서도 재생산된다. 자유주의는 자신의 근본주의를 근본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세속주의와 종교적 정치질서 사이의 대립을 진보와 반동의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은 현대사회에 대한 철저한 무지의 발로에 불과하다. 신앙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진보성을 보증하지 않으며, 신앙이 인간의 삶 전체를 규정하려 한다는 사실도 반동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가톨릭의 현세 질서론은 현실의 불완전성을 용인하는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었고, 이슬람의 타우히드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 전체를 신앙의 문제로 삼는 급진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론 이슬람의 실천 또한 그 자체로 진리를 보증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떠한 계급적 관계를 생산하고 어떤 역사적 운동에 봉사하는지를 통해 그 내용을 판단해야 한다.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변혁하는가에 있다.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불완전하지만 보존해야 할 질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 모순을 자신의 역사적 실천을 통해 지양할 것인가? 신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의 관계는 결국 인간의 집단적인 역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도달한다.

타우히드와 혁명적 이슬람

이슬람의 타우히드는 혁명적인 잠재성을 품고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근본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슬람이 근본주의적이기 때문에 혁명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절대적인 원리를 승인한다는 것은 그 원리에 위배되는 모든 현실을 부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의 의지에 반하는 사회질서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존속하였더라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다. 따라서 근본주의는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는 운동에 머무르지 않으며, 현존하는 세계 전체를 부정하는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슬람의 이러한 역능은 세 가지 신학적 전제에서 발생한다. 첫째, 타우히드는 신 이외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한다. 군주와 국가, 계급적 지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신과 동일한 권위를 소유할 수 없다. 둘째, 신앙은 인간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노동과 소유, 공동체의 조직과 정치권력은 신앙과 분리된 독립적인 영역이 아니다. 셋째, 역사적인 질서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존속해 온 제도라 하더라도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위배된다면 폐기되어야 한다. 절대적 진리를 승인하는 행위는 이렇게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의 원리를 획득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이슬람 사회의 역사적 경험과 결합하였다. 푸투와(Futuwwa)로 대표되는 의협과 행동의 윤리, 신앙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투쟁해 온 전통은 이슬람이 단순한 내면적 경건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 되었다. 여기에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 낸 사회적 모순이 더해졌다. 역사를 통과한 신앙은 현실에 순응하는 초월적 언어들의 집합에 머무르지 않고 제국주의적 지배와 기존의 계급질서를 부정하는 언어로 발전하였다.

알리 샤리아티는 이러한 혁명적 이슬람의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발전시킨 사상가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시아파의 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타우히드를 유일신에 대한 신앙고백으로부터 세계 전체의 통일성에 관한 원리로 발전시켰다. 샤리아티에게 세계는 천상과 지상, 정신과 육체, 개인과 사회, 자연과 초자연으로 분열된 별개의 영역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통일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그는 세계 전체를 의지와 지성, 감정과 목적을 지닌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이해하였다. 신의 유일성은 세계의 단일성으로 나타나며, 세계의 어떤 부분도 그 통일성의 외부에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우히드는 곧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의 원리가 된다. 세계가 본래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라면 인간사회를 분열시키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그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샤리아티는 자본과 국왕, 제국주의와 계급제도, 특권과 종교조직의 권위를 우상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신에게만 귀속되어야 할 절대성을 유한한 존재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바로 시르크(Shirk)이다.

따라서 샤리아티에게 있어 타우히드를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을 종속시키는 사회적 관계를 철폐하고, 신의 절대성과 경쟁하는 모든 지상의 우상을 파괴하는 작업이 되며, 계급적 지배와 착취는 그 자체로 신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다신론의 현실적인 표현이 된다.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은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과 결합한다.

샤리아티에게 역사는 이러한 타우히드와 시르크 사이의 투쟁이었다. 신의 주권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하지만 인간의 현실적인 삶은 계급적 분열과 지배, 억압과 종속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세계의 본래적인 통일성을 아직 실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역사는 그 분열을 극복하고 타우히드의 진리를 현실적인 사회관계 안에서 실현해 나가는 투쟁으로 이해된다.

이 투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피억압대중인 모스타자핀(Mostazafin)과 공동의 목적을 향해 조직되는 움마이다. 여기에 민중의 혁명적 의식을 일깨우고 조직하는 지식인, 곧 로우샨페크르(Roshanfekr)의 역할이 결합한다. 샤리아티에게 혁명적 지식인은 현실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학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민중이 자신의 역사적 처지를 인식하고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도록 조직하는 실천적 주체이다. 타우히드는 이로써 하나의 세계관이자 계급투쟁의 원리이며, 혁명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정치적 이념으로 발전한다.

여기서 혁명적 이슬람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난다. 샤리아티의 신학적 전환은 이슬람을 세속적인 이념으로 약화시킨 결과도, 교리를 시대의 흐름과 타협시킨 아니었다. 샤리아티의 신앙의 절대성을 더욱 철저하게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공격하였다. 신의 유일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국왕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세계의 통일성을 승인하기 때문에 계급적 분열과 제국주의적 지배를 부정한다. 타우히드는 신앙의 원리인 동시에 현실에 대한 혁명적인 부정의 원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샤리아티의 사유는 자신의 혁명성을 끝까지 전개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모순에 도달한다. 첫째, 세계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하나라면 그 세계 안에서 현실적인 분열과 적대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둘째, 신 이외의 모든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다면 혁명적 지도력은 어디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는가?

첫 번째 모순은 존재의 통일성과 역사적 운동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샤리아티는 세계가 본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역사를 타우히드와 시르크, 통일성과 분열의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분열이 단일한 세계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세계 자신의 운동에 속해야 한다. 현실의 계급적 대립과 사회적 모순은 이미 완결된 통일성에 우연적으로 침입한 이질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유한한 존재들의 현실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그 관계의 변화를 통해 극복된다. 따라서 세계의 통일성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규정성들이 하나의 전체 안에서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 모순은 혁명적 주체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이다. 샤리아티가 모든 지상의 절대적 권위를 우상으로 부정한다면, 민중을 지도하는 혁명적 조직과 지식인 역시 신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로우샨페크르의 지도력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신의 의지를 올바르게 해석한다는 사실만으로 혁명적 지도력을 정당화한다면, 타우히드가 부정했던 인간적 권위의 절대화가 다시 발생한다. 반대로 지도력의 정당성이 피억압대중의 현실적인 투쟁과 사회적 관계의 변혁에서 발생한다면, 혁명적 권위의 근거는 신의 초월적인 의지가 아니라 역사적 인간들의 집단적인 역능 속에 존재하게 된다.

이 두 모순은 하나의 문제로 연결된다. 세계의 통일성과 혁명적 실천의 근거를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샤리아티는 그 근거를 타우히드에 두었으나, 그의 혁명적 세계관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역사적 대립과 그 대립을 극복하는 집단적인 실천이다. 세계의 통일성은 현실적인 관계들의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하고, 혁명적 지도력 역시 그러한 운동의 조직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신의 유일성으로부터 출발한 논증이 인간들의 현실적인 역사적 운동으로 자신의 근거를 옮겨 가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범신론을 철저하게 전개할 때만 극복될 수 있다. 신과 자연이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면 세계의 다양한 존재들과 그 관계는 신적 실재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분열 역시 초월적인 통일성에 대립하는 이질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 안에서 발생하는 유한한 존재들의 관계와 운동이다. 유한한 존재들은 서로 작용하고 충돌하며, 자신의 역능을 증진하거나 감소시키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세계의 통일성과 세계 안의 대립은 이로써 함께 이해된다.

이 때, 혁명적 실천의 근거 또한 달라진다. 신의 역능과 자연의 역능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인간들의 집단적인 활동은 초월적 신의 의지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행위일 필요가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들의 역사적 실천 역시 자연 자신의 운동이다. 피억압대중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관계를 폐기하고 집단적인 역능을 증진시키는 활동은 그 자체로 현실적인 존재의 운동에 속한다. 혁명적 지도력은 신의 권위를 대리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러한 집단적인 역능을 조직하고 발전시킨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근거를 획득한다.

샤리아티는 이 문턱까지 도달했으나 끝내 넘어서지 않았다. 세계의 단일성을 승인하면서도 신적 의지의 독자적인 규정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과 자연을 동일한 실체로 이해한다면 세계 바깥에서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체는 더 이상 기존의 의미로 존속할 수 없다. 신의 절대성이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필연성으로 이해되는 순간, 세계를 초월하는 신적 의지를 따로 설정해야 할 이유가 소멸한다. 스피노자적 범신론이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것은 그 사유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다. 신의 절대성을 철저하게 전개한 결과, 신이라는 독립적인 초월적 존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적 동일성에 도달하는 것으로도 철학적 발전이 완결되지는 않는다. 세계의 통일성을 하나의 실체로 이해한 다음에는 그 실체가 어떠한 운동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규정성을 생산하는지 해명해야 한다. 아무런 규정성도 갖지 않는 순수존재는 순수무와 구별되지 않으며, 양자의 진리는 생성이다. 헤겔은 절대적인 것을 자기규정과 자기매개의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다시 그 운동을 절대적 관념의 자기전개로부터 해방하여 현실적인 물질세계와 인간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파악하였다. 이로써 신학이 초월적인 신에게 귀속시켰던 세계의 통일성과 자기운동은 세계 자신의 현실적인 운동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유일신교가 발견한 절대적 보편성의 진리를 끝까지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스피노자에서 헤겔로,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발전은 신과 세계의 분리를 극복하고, 세계의 통일성을 그 자신의 운동으로 해명하며, 인간의 역사적 실천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현실적인 역능으로 정립하였다. 신학이 발견한 진리는 신학의 형식을 벗어날 때 비로소 자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샤리아티는 타우히드를 세계의 단일성으로 발전시키고, 신의 유일성을 계급적 지배와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적인 부정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세계의 통일성을 생산하고 실현하는 역사적 인간들의 집단적인 역능을 여전히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귀속시켰다. 인간들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변혁하면서도, 그 변혁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인간 자신의 외부에서 찾도록 요구받는다. 이것이 샤리아티의 혁명적 이슬람이 도달한 한계이다.

그가 시작한 사상적 운동을 완성하려면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세계의 통일성은 알라의 속성으로 보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해방 또한 신의 주권을 지상에 실현하는 일로 규정될 수 없다.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적 관계를 집단적으로 변혁하는 활동이 해방의 현실적인 근거이다.

샤리아티가 발견한 타우히드의 혁명적 진리는 이슬람이라는 신학적 형식 안에서 완성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진리를 끝까지 실현하려면 이슬람 자체가 지양되어야 한다. 신의 절대적인 유일성으로부터 출발한 사유는 세계의 내재적인 통일성에 도달하고, 신의 주권을 실현하려는 혁명적 실천은 역사적 인간들의 집단적인 자기해방으로 발전한다. 샤리아티는 헤겔과 마르크스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수행했던 철학적 전환을 이슬람에 적용하기 직전에 멈추었다. 그가 도달한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여 타우히드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하는 일이야말로 혁명적 이슬람의 역사적 성취를 계승하는 길이다.

소위 ‘정치적 이슬람주의’

현존하는 이슬람주의 운동은 이슬람이 지닌 혁명적 잠재성을 실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샤리아티가 타우히드의 철저한 실천을 통해 기존의 계급적·정치적 질서를 부정하려 했다면, 오늘날의 이슬람주의 운동은 오히려 그 질서를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자신의 근본주의적 성격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이슬람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인 타우히드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와하브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잘 보여준다. 와하브주의자들은 참된 타우히드의 회복을 주장하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여러 종교적 관행과 지역적 전통을 시르크, 곧 신에게 다른 존재를 결부시키는 우상숭배로 규정해 왔다. 그들은 인간의 종교적 삶이 오랜 역사 속에서 타락하였으며, 후대에 덧붙여진 관습과 해석을 제거해야 순수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여기에는 특정한 역사관이 전제되어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참된 신앙이 온전히 실현되었으나, 이후의 역사는 그러한 순수성으로부터의 이탈과 타락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적 삶은 신앙이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고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원형을 훼손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종교적 실천의 가치는 그것이 어떠한 새로운 내용을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과거의 원형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의 종교적 삶이 다른 시대보다 순수하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타락한 관행을 제거한다고 주장하는 와하브주의자들 역시 경전과 전승을 해석하는 역사적 인간들이다. 그들이 참된 신앙의 표준으로 제시하는 종교적 형태 또한 특정한 시대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다. 인간의 역사적 실천은 타락의 원천으로 의심받지만, 그 타락을 판정하는 인간의 해석에는 절대적인 정당성이 부여된다. 와하브주의는 인간의 역사성을 거부하기 위해 또 다른 역사적 산물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현존 상태를 타락한 것으로 규정하고 순수한 상태로의 회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부 프로테스탄트적 타락론과 형식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와하브주의의 특수한 모순은 신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가장 엄격하게 주장하면서, 그 신과 구별되는 인간의 역사적 해석을 사실상 절대적인 표준으로 고정한다는 데 있다.

가톨릭에서는 신적 권위가 역사적인 제도를 통해 현존한다는 관념이 성육신과 성사, 사도계승의 교리 안에서 정당화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사제는 성사적 직무에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행위한다. 신적 권위와 인간의 역사적 제도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승인된 매개가 존재한다. 반면 와하브주의가 특히 강조하는 타우히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별을 철저하게 유지한다. 인간은 신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이 곧 신 자신의 의지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시대의 인간적 실천을 완전한 신적 질서의 현존으로 간주하거나, 특정한 해석에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는 와하브주의 자신이 수호하려는 타우히드와 충돌한다. 신의 절대성을 인간적 권위로부터 분리하려는 신앙이 오히려 인간의 역사적 산물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와하브주의의 반이슬람성이다. 와하브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타우히드를 지나치게 철저하게 주장한다는 데 있지 않다. 타우히드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대의 정치적 이슬람주의에서는 또 다른 모순이 나타난다. 그것은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서구적이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 자체가 근대 서구에서 발전한 국가관을 자신의 근본적인 정치적 형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때 서구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구에서 발전한 주권국가의 구조, 사회 전체를 통일적인 행정과 법률의 대상으로 조직하는 통치방식, 국가권력을 통해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사회 전체에 관철하려는 정치적 사고를 의미한다. 사이이드 쿠틉과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국가구상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조건 속에서 성립하였다. 18세기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이들과 다른 시대에 활동하였지만, 종교적 정화를 통해 인간의 사회적 삶을 재편하려는 그의 사상 역시 이후의 이슬람주의 운동에 중요한 자원을 제공하였다.

전근대 이슬람 사회에서 샤리아는 국가가 일률적으로 제정하고 집행하는 법률체계와 동일하지 않았다. 여러 법학파와 법학자, 지역 공동체와 종교재단, 통치자와 관습적 권위 사이에는 복잡한 관계가 존재하였다. 법학적 권위는 국가권력과 결합하기도 하였으나 그 권력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았다. 이슬람적 질서는 하나의 행정적 중심이 사회 전체를 통일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으로만 유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국가는 이러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법률의 성문화와 행정의 일원화, 교육과 사법제도의 통합, 인구와 영토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는 하나의 주권적 권력 아래 조직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러한 국가권력의 구조를 받아들인 다음, 그 국가가 사회 전체에 관철해야 할 원리를 이슬람으로 설정하였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이슬람의 법적-사회적 관계는 국가가 규정하고 집행하는 통일적인 종교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이 과정에서 신의 주권은 국가의 통치권으로 번역된다. 신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면 국가는 그 앞에서 유한한 인간적 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가가 신의 주권을 실현하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정치적 기관으로 등장하면, 국가권력은 자신의 명령을 신적 질서의 실현으로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신에게만 귀속되어야 할 절대성이 국가라는 역사적 제도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다. 국가의 명령과 신의 명령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은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통치구조 안에서 흐려진다.

이것이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근대 서구의 정치적 형식을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를 거부하면서도 국가주권의 근대적 구조는 보존한다. 달라지는 것은 국가가 사회 전체에 실현하려는 이념의 내용이다. 사회를 하나의 원리에 따라 조직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권능 자체는 의심받지 않는다. 서구 근대성을 부정한다는 명분 아래 그 근대성의 정치적 기초를 더욱 철저하게 실현하는 셈이다.

그 결과 움마의 지위도 변화한다. 움마는 특정한 국가의 영토나 국민이라는 법적 지위로 환원되지 않는 신앙공동체이다. 그러나 국가가 이슬람의 법과 정치, 사회적 실천 전체를 규정하는 중심으로 등장하면 움마의 보편성은 국민국가의 주권 아래 종속된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공동체는 국가가 통치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 재편되며, 그 공동체의 종교적 삶은 국가가 승인한 교리와 법률에 따라 규율된다. 이슬람의 보편성을 실현한다는 기획이 오히려 이슬람 공동체를 근대국가의 내부로 포획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모순의 근저에는 정치적 이슬람주의가 보편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놓여 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의 보편성을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무슬림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과 법학적 전통, 종교적 관행을 넘어 이미 완결된 하나의 교리적 원형으로 설정된다. 무슬림들의 현실적인 삶은 그 원형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원형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심판받는 대상으로 격하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들의 외부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은 언제나 서로 다른 특수한 존재들이 관계를 맺고 대립하며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는 운동 속에서만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이렇게 볼 때, 형성된 무슬림들의 삶은 이슬람이라는 세계관이 실제로 존재해 온 구체적인 형태이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역사적 관계야말로 보편성을 발전시키는 현실적인 토대이다. 이러한 삶의 역사성을 원형을 훼손하는 오염의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보편이라는 것을 일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류를 범한다. 인간들의 역사적 삶에서 추상해 낸 보편적인 이슬람의 원리를 다시 그 삶의 외부에 세우고, 국가권력을 통해 모든 인간을 그 원리에 일치시키려 한다. 인간들이 생산한 신앙의 보편성이 독립적인 권위로 나타나 그 인간들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보편성을 철저하게 실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보편성이 자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산하는 역사적 운동은 부정한다.

그렇다고 이슬람의 보편성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슬람은 이미 세계적인 신앙공동체로 존재하며, 움마의 연대는 특정한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실제로 운동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세계 무슬림들의 반응에서도 이러한 보편적인 공동체의 역동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이슬람의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성이 현실적인 인간들의 삶 속에서 어떠한 내용을 획득해야 하는가에 있다.

무슬림들의 현실적인 삶은 서로 다른 생산관계와 정치적 조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지배, 자본주의의 발전과 전통적인 공동체 질서의 변화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공동의 실천을 통해서만 움마의 통일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이미 완결된 종교적 동일성을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 놓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지배와 착취, 분열과 종속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보편성을 생산해야 한다. 움마의 통일성은 그렇게 생산된 공동의 역사적 운동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역사 안에서도 이러한 발전을 추구한 시도들이 존재하였다. 앞서 언급한 알리 샤리아티는 타우히드를 계급적 지배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피억압대중의 해방이라는 문제로 발전시켰다. 파키스탄의 임란 칸은 초기 메디나 공동체의 이상을 현대적인 사회보장과 복지, 빈곤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결합시키려 하였다. 리비아의 자마히리야는 이슬람적-아랍적 전통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결합하고 대중의 직접적인 자기통치를 제도화하려는 실험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활동하였지만, 이슬람의 보편성을 기존 교리의 반복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현실적인 사회관계의 변혁과 결합하려 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시도들의 역사적 한계는 이슬람적 보편성이 현실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새로운 내용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신앙의 진리는 더 이상 경전의 해석이나 종교적 의례 안에서만 실현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하며, 지배와 착취를 극복하고 자신의 공동체를 조직하는가에 관한 문제로 발전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발전은 이슬람 자신의 신학적 형식을 다시 문제 삼도록 요구한다.

샤리아티의 타우히드를 생각해 보자. 그는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세계의 통일성으로 발전시키고, 인간의 사회적 분열을 그 통일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계급적 지배와 제국주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극복하는 일이 타우히드의 실천적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실제로 극복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세계를 초월하는 신적 의지인가, 아니면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변혁하는 역사적 인간들인가?

피억압대중은 자신의 노동과 투쟁을 통해 기존의 사회관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공동체를 생산한다. 계급적 분열의 극복은 인간들의 집단적인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실천의 궁극적인 근거가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귀속된다면, 인간들은 자신이 생산한 역사적 변혁의 진리를 다시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에게 넘겨주게 된다. 인간들의 집단적인 역능이 세계의 통일성을 현실화하면서도, 그 통일성의 근거는 여전히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타우히드가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하려면 이 분리가 극복되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에 의존한다면, 그 절대자와 세계의 관계는 외재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머무를 수 없다. 세계의 통일성은 세계 자신의 운동을 통해 해명되어야 하며, 인간의 역사적 실천 역시 그 운동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세계의 내재적인 통일성으로 발전시키는 순간, 세계를 초월하여 별도로 존재하는 신적 의지는 더 이상 독립적인 설명원리가 될 수 없다.

이슬람 철학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였다. 이븐 시나는 필연적 존재와 가능적 존재의 관계를 통해 세계의 존재근거를 탐구하였고, 이븐 아라비의 사상적 전통은 존재의 유일성과 신적 자기현현이라는 문제를 발전시켰다. 신의 절대성을 철저하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근거에 의존한다는 명제를 넘어, 그 존재들이 절대적 실재와 어떠한 내재적인 관계를 맺는가라는 문제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유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기존 구별을 위협하는 순간, 정통 신학은 다시 교리적인 경계를 설정하였다. 신의 절대성을 끝까지 사유하려는 운동이 신의 절대성을 보존하기 위한 신학적 형식과 충돌한 것이다.

샤리아티의 혁명적 타우히드 또한 이러한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세계의 단일성을 승인하고 사회적 지배관계를 신의 유일성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하였으나, 세계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역사적 인간들의 역능을 끝내 신적 의지로부터 해방하지 못했다. 그가 발견한 보편적인 해방의 진리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집단적 실천 속에서 생산되는데, 그 진리의 궁극적인 근거는 여전히 초월적인 알라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타우히드의 철저한 발전은 이슬람이라는 신학적 형식 자체의 지양을 요구한다. 세계의 통일성을 발견하고 유한한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한 타우히드의 성취는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통일성을 초월적인 신의 속성으로 보존하고 인간들의 역사적 운동을 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관계는 파괴되어야 한다. 세계의 통일성을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운동으로 이해하고, 인간들의 해방을 인간 자신의 역사적 실천으로 실현할 때 타우히드의 진리는 비로소 자신의 현실적인 근거를 회복한다.

이것이 현대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보편성을 완결된 교리적 원형으로 고정하고 근대국가를 통해 사회 전체에 강제하는 일은 타우히드의 철저한 실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역사적 삶이 새로운 보편성을 생산하는 운동을 중단시키고, 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국가라는 유한한 제도의 권력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의 보편성을 지나치게 철저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 보편성을 자신의 기존 신학적 형식과 근대국가의 정치적 형식 안에 가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지양은 더욱 완전한 종교국가를 건설하거나,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따라 이슬람을 개인의 사적인 신앙으로 후퇴시키는 것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 이슬람이 발견한 세계의 통일성과 움마의 보편적인 공동체성을 끝까지 발전시켜, 그 진리의 근거를 현실적인 인간들의 집단적 실천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인간은 신의 주권을 지상에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세계를 스스로 생산하고 변혁하는 주체이다.

이슬람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이슬람의 폐기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슬람의 철저화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슬람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슬람이 발견한 진리를 끝까지 실현하여 이슬람 자체를 지양하는 일이다. 타우히드는 자신의 신학적 형식을 부정함으로써 세계의 내재적인 통일성으로 발전하고, 움마는 초월적인 신적 주권에 대한 종속을 넘어 인간들의 현실적인 공동적 해방으로 발전한다. 이슬람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은 이슬람 신앙의 발전이 성취한 진리를 끝까지 전개하여, 그것이 자신의 낡은 종교적 형식을 파괴하도록 요구한다.

가톨릭의 ‘사랑’과 현대사회로의 편입

가톨릭은 너무나 많은 것을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계급적 대립은 화해의 대상이 되고, 착취는 정의로운 분배를 통해 완화되어야 할 문제가 되며,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개선될 수 있는 관계로 이해된다. 현실의 사회적 모순은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지만, 가톨릭의 세계관에 있어 그 모순을 생산하는 질서 자체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은 이러한 방식으로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비판하면서도 그 질서와 화해할 수 있다. 인간의 선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계급사회의 존속과 그 사회의 개선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다.

이슬람과 가톨릭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배체제의 일부로 기능해 왔다. 두 종교 모두 국가권력을 정당화하고 지배계급과 결합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른 종교들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과거의 권력과 결탁한 사례를 열거하는 것으로 종교의 본질이 해명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은 종교의 교리가 어떠한 사회적 관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교리가 현대사회의 모순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이다.

가톨릭은 근대사회와 오랫동안 충돌했으나, 결국 현대적인 국가질서와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존하는 체제를 발전시켰다. 교회는 신앙의 절대적인 진리를 보존하면서도 세속적인 법과 국가, 경제활동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에게 있지만, 인간이 현세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은 그 자체의 법칙과 제도를 통해 다루어진다. 가톨릭은 자신의 신학적 원리를 포기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사회질서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 사상적 기초를 이해하려면 가톨릭이 말하는 사랑, 곧 카리타스(Caritas)를 살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리타스를 신과 인간 사이의 우정으로 설명하였다. 이 우정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행복을 나누어 주고, 인간이 신의 선에 참여한다는 관계에 기초한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자신의 선을 의지한다. 신을 사랑하는 인간은 신의 선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다른 인간들 역시 사랑해야 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카리타스를 구성한다.

여기서 아퀴나스의 설명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 타인의 선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선을 실현할 수 있기를 의지한다는 뜻이다. 굶주리는 사람의 선을 의지하면서 그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조건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노동자의 선을 의지하면서 그가 어떠한 노동조건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생산한 부를 누구에게 빼앗기는지 외면할 수도 없다. 사랑받는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 인간의 현실적인 존재조건을 문제 삼게 된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산한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으로부터 배제되는지, 누구의 지배를 받으며 누구를 지배하는지, 어떠한 노동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누가 차지하는지가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카리타스가 진정으로 타인의 선을 의지한다면 이러한 관계들을 사랑의 외부에 남겨둘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 전체에 대한 요구로 발전한다.

가톨릭 사회교리 역시 이 문제를 이미 승인하였다. 교회는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정의, 공동선과 제도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논의해 왔다. 사랑은 정의와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제도 역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카리타스를 개인적인 자선과 선행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비판은 가톨릭의 실제 교리적 성취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추궁해야 할 것은 그 사랑이 현실의 계급적 대립 앞에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두 사람은 카리타스의 관점에서 모두 사랑받아야 할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산과 소유의 관계에서 서로 대립하는 계급적 존재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고 자본가가 그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취득하는 관계는 양자의 도덕적 태도와 무관하게 성립한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노동자가 자본가를 존중하더라도 이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계급적 대립의 근거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자를 모두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가톨릭 사회교리가 강조해 온 상호의무와 협력, 정의로운 보상은 계급적 대립을 완화한다. 그러나 계급 자체를 생산하는 관계는 보존된다. 노동자에게 더 나은 임금을 지급하는 일은 그의 삶을 개선하지만,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까지 폐기하지는 않는다. 착취관계의 개선과 착취관계의 폐기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실천이다. 카리타스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선을 요구한다면, 노동자와 자본가를 대립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는 생산관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계급적 화해를 사랑의 실현으로 승인할 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선이 신과의 일치에 있기 때문이다. 현세의 어떠한 사회질서도 그 선의 완전한 실현과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지만, 모든 모순이 극복된 궁극적인 화해는 신의 구원사업과 종말론적 완성에 귀속된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선과 변혁은 궁극적인 선에 이르기 전의 불완전한 성취로 남는다.

이러한 신학적 구조는 가톨릭의 정치적 유연성을 가능하게 한다. 교회는 특정한 사회제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제도를 개혁하여 존속시키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다. 부분적인 정의가 인정되는 한, 계급사회의 존속도 인간의 불완전한 현세적 삶을 위한 잠정적인 질서로 승인된다. 궁극적인 화해가 피안에서 완성된다면,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실천을 통해 계급적 지배를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는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가톨릭 사회교리의 반혁명적 성격이 존재한다. 가톨릭은 현실의 부정의를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사랑의 궁극적인 완성이 역사적 인간의 실천 바깥에 보존되어 있으므로, 현실적인 모순을 끝까지 지양하지 않고서도 사랑을 실천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사랑은 현존하는 질서 안에서 충분한 개선을 추구하는 사랑과 화해한다. 종말론적 완전성이 현세의 불완전성을 용인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충분함'의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 교회가 어떤 사회적 관계를 승인하고 무엇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지는 교회 자신이 속한 역사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가톨릭이 자본주의 사회와 안정적으로 공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이러한 교리적 유연성과 함께 교회가 실제로 맺어 온 계급적 관계가 작용한다. 신의 사랑을 주장하는 교회 역시 구체적인 사회 안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노동을 조직하며, 국가와 관계를 맺고 서로 대립하는 계급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역사적 조직이다.

이 사실은 현대 가톨릭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프란치스코와 레오 14세의 개인적인 성향을 중심으로 교회의 변화를 설명한다면 역사를 거꾸로 읽게 된다. 세계 가톨릭 신앙의 사회적 기반은 이미 유럽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거대한 신도 대중은 식민주의와 종속, 빈곤과 착취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이다. 이들은 교회가 정한 교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만 남아 있지 않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삶과 요구를 통해 교회의 정치적-사회적 지향을 변화시키려 하고있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운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민중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빈곤과 착취를 신앙의 문제로 제기하였고,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사회적 해방의 과제와 결합시켰다. 그들의 투쟁은 교회의 기존 질서와 충돌하며 가톨릭 내부에 새로운 대립을 만들어 냈다. 신앙의 실제적인 내용은 민중의 역사적 삶에 의해 변화하였다. '진보적' 교황은 이러한 변화를 홀로 창조한 인물이 아니다. 교황 자신이 이미 변화하고 있는 세계교회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민중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민중이 교회를 변화시킨다. 이 명제는 가톨릭의 신학적 구조 전체를 뒤흔든다. 교회가 사랑의 진리를 역사 속에 전달하고 실천하는 기관이라면, 민중의 삶에 의해 변화하는 것은 그 진리의 적용 방식만인가? 민중이 자신들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과 연대의 관계를 생산한다면, 카리타스의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그들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공동적 삶을 변화시키면서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런데 가톨릭은 그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를 여전히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완전한 신에게 귀속시키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생산한 보편적인 사랑은 신적 명령의 형식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인간들은 자신이 형성한 공동체와 그 안에서 발전시킨 연대의 진리를 자신들의 집단적인 역능으로부터 분리한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 속에서 새롭게 생산된 사랑은 역사 이전부터 완결되어 있던 신적 사랑의 불완전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살아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생산한 진리를 그 관계의 외부에 있는 절대적 존재의 속성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역사적 내용과 계급적 성격을 잃고 추상적 보편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신적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에 놓여 있다. 가톨릭은 신이 곧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사랑은 신의 본질에 속한다. 그런데 사랑은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가 사라진다면 사랑은 자신을 실현할 내용을 잃는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타자의 선을 의지하고 실현하는 활동이다. 사랑이 구체적인 내용을 얻는 곳은 언제나 그 관계의 현실적인 운동 속이다. 가톨릭은 삼위일체를 통해 이러한 문제에 응답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구별된 위격들이며, 신은 이 위격들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더라도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이미 완결된 신적 본질이 피조물에게 자유롭게 베푸는 은총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신적 사랑과 인간의 역사적 삶 사이의 단절을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신이 세계 없이도 완전한 사랑이라면, 인간의 존재는 신적 사랑의 완성을 위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든, 지배와 착취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든 신적 사랑의 본질에는 어떠한 새로운 내용도 더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신에게 사랑받지만,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신의 사랑은 조금도 불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톨릭은 신의 완전성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의 역사적 실천이 사랑의 진리에 부여하는 새로운 내용을 부정한다. 인간들의 사랑은 신적 사랑을 새롭게 규정하지 못한다. 신의 본질은 세계의 창조와 무관하게 이미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생산하는 사랑은 신적 사랑의 실현으로 설명되지만, 신적 사랑의 본질을 구성하는 필연적인 운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발전은 신의 완전성 앞에서 끝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구조의 근저에는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가 존재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계의 존재는 신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가 아니며, 이미 완전한 절대자가 자유로운 의지로 산출한 피조물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신적 사랑 역시 세계의 운동을 자신의 필연적인 내용으로 갖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사랑의 내용이 변화해도, 신은 그 운동과 무관하게 완전한 사랑으로 존속한다.

그러나 타자와의 관계가 사랑의 필연적인 내용이라면, 관계의 구체적인 발전을 사랑의 본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사랑은 실제로 사랑하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규정되고 변화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생산관계를 폐기하고, 민중이 공동체를 스스로 조직하며, 인간들이 기존의 적대적인 관계를 새로운 연대의 관계로 바꾸는 과정에서 사랑은 새로운 역사적 내용을 획득한다. 이러한 운동을 이미 완결된 신적 사랑의 불완전한 표현으로 격하시킬 이유는 없다. 오히려 신적 사랑이 인간적 사랑을 설명한다는 관계 자체를 전도해야 한다. 역사적인 인간의 사랑으로부터 추상적인 신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 전도는 가톨릭의 신학적 형식을 파괴한다. 신적 사랑을 인간적 사랑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설정했던 관계를 뒤집으면, 사랑의 현실적인 근거는 인간들의 집단적 삶 속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고 변화시키면서 사랑의 보편적인 내용을 새롭게 형성한다. 인간의 사랑은 신에게서 내려온 완전한 진리의 불완전한 재현이라는 지위를 벗어난다. 신이 사랑을 인간에게 부여했던 관계는 인간이 자신의 사랑을 신에게 귀속시켰던 관계로 밝혀진다.

여기서 무로부터의 자유로운 창조라는 교리는 끝내 유지될 수 없다. 세계가 절대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창조된 우연적인 피조물의 총체로 남는 한, 세계 자신의 운동은 신적 본질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로 인정되지 못한다.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삶을 통해 생산하는 사랑의 내용 역시 신의 완전성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창조론은 사랑의 진리를 세계 자신의 운동으로부터 분리하고, 이미 완결된 초월적 존재의 속성으로 보존하기 위한 인위적인 장벽이다.

이 장벽은 파괴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사랑의 보편성을 끝까지 실현하려 한다면, 사랑을 초월적인 신의 완전성에 귀속시키는 관계부터 폐기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을 신에게 바치고 다시 그 신으로부터 사랑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머물 수 없다. 자신의 노동과 투쟁, 공동체의 형성과 변혁을 통해 사랑을 생산하는 현실적인 주체로서 스스로를 회복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집단적인 삶 속에서 생성되며, 그 삶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때, 카리타스가 발견한 공동선과 정의, 보편적인 연대의 진리도 새롭게 이해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선은 인간들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집단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정의는 인간들이 서로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관계를 폐기하는 역사적 실천 속에서 실현된다. 사랑의 보편성은 계급적 적대가 존속하는 현실 위에 화해를 선언한다고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을 서로 대립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는 관계가 폐기될 때만, 인간들의 공동적인 삶은 비로소 새로운 내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은 자신이 발견한 사랑의 보편성을 끝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 인간이 타인의 선을 의지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선이 실현되는 역사적 세계의 운동을 신적 사랑의 완성으로부터 분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현실적인 내용을 생산하는 인간은 여전히 초월적인 절대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귀속시켜야 하며, 자신의 역사적 역능을 신적 구원사업의 불완전한 실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톨릭의 반혁명성은 바로 이러한 자기모순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따라서 카리타스가 자신의 진리를 완성하려면 가톨릭 자체가 지양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발견한 사랑과 공동선, 정의와 연대의 진리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신의 영원한 본질 속에 가두고 현실적인 인간의 실천을 종속시키는 종교적 형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인간들의 보편적인 사랑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완성될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를 직접 변화시키고, 지배와 착취를 폐기하며, 공동의 세계를 스스로 생산하는 이들의 역사적 활동 속에서만 완성된다.

우리는 가톨릭을 한낱 미신으로 규정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가톨릭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발견한 진리를 끝까지 실현할 것을 명령한다. 인간을 사랑하라. 인간의 선을 실현하라. 인간의 자유롭고 공동적인 삶을 가로막는 관계를 폐기하라. 그리고 그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를 인간 자신의 외부에 두는 신학적 형식을 총체적으로 파괴하라.

가톨릭이 자신의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려면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형태를 포기해야 한다. 사랑은 신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역사적 세계를 생산하고 변혁하는 인간들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와 부르주아적 인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하며, 그것을 누구에게 판매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자본가 역시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한다. 양자는 법적으로 평등한 계약의 당사자이며, 어느 한쪽도 상대방의 인격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소유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 법률은 그에게 계약을 거부할 자유를 부여하지만, 그가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은 끊임없이 계약을 체결하도록 강제한다. 자유롭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개인은 바로 그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계급적 종속을 재생산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자유는 이러한 역설 위에 성립한다. 인간은 법적으로 독립된 개인으로 승인되지만,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지배하지 못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자유롭게 계약하는 개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맺는 계약은 이미 형성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 계급적 분업을 전제한다. 개인들이 자유로운 의지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나타나는 바로 그 사회에서, 그들의 의지와 선택을 규정하는 생산관계는 독립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인간관은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적 개인주의와 깊은 친화성을 갖는다.

종교개혁은 인간이 신 앞에서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성직자의 중개와 교회의 신분적 위계에 궁극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신교인들은 성경과 신앙을 통해 신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양심과 신앙적 결단에 책임을 진다. 인간을 외적인 종교적 권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려는 이 운동은 중대한 역사적 성취였다.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은 기존의 성직자적 권위가 독점하던 신앙적 주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았다.

그러나 신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앙인은 다른 인간의 중개 없이 신과 관계를 맺지만, 그 자신은 이미 언어와 관습, 노동과 가족, 국가와 계급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간이다. 신을 이해하는 관념과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과 삶의 목적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를 통해 획득한다. 인간은 신 앞에 서기 이전부터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의 본질을 고립된 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물인가? 그렇지 않다. 현실적인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신앙을 가진 개인 역시 이러한 관계의 산물이다. 그런데 신 앞에서의 직접적인 책임을 인간의 존재 전체를 설명하는 원리로 확장한다면, 인간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는 개인의 외부에 놓인 조건으로 밀려난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조건에 선행하는 독립적인 주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러한 전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한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력과 재산을 소유한 법적 주체로 인정되며, 사회는 독립적인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형성하는 관계로 이해된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과 선택, 재산과 노동은 이미 사회적 생산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다른 인간들의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독립적인 사적 소유자로 등장한다. 인간들의 집단적인 생산활동이 개인들의 사적인 거래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적 개인주의가 이러한 부르주아적 인간관과 결합하면,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 모순은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로 전도된다. 빈곤은 개인의 실패가 되고, 사회적 소외는 영적 공허가 되며, 계급적 종속은 개인의 노력과 책임, 도덕적 결단에 관한 문제로 바뀐다. 결국 인간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마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세계관에서 진정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들은 개인의 신앙과 양심, 성실성과 책임, 타락과 구원의 문제들이다.

이러한 인간관은 프로테스탄트 내부에 머무르지 않는다. 로크적 자연권 사상과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을 거치면서 인간을 독립적인 권리의 주체로 파악하는 관념은 세속적인 법과 정치의 원리로 발전하였다. 특히 미국의 법질서와 정치적 이념은 프로테스탄트적 인간관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결합한 중요한 역사적 산물이다. 신 앞에서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개인은 세속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과 재산, 권리와 선택에 책임지는 개인으로 나타난다. 신학적 언어를 아무리 숨겨도 그 인간관은 보존되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는 서로 적대하는 두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한쪽은 개인의 책임과 노력, 도덕적 의무를 강조한다. 다른 한쪽은 개인의 권리와 존엄,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다.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정치적 대립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며, 그 대립은 종교의 경계를 넘어 세속적인 우파와 진보주의의 대립 속에서도 반복된다. 하지만 이 두 방향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시장주의적 개인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주체로 이해한다.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며, 경제적 불평등은 서로 다른 개인들의 활동이 낳은 결과로 제시된다. 사회는 경쟁하는 개인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와 계급적 지위는 부차적인 조건으로 밀려난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개인의 게으름이나 부덕함, 혹은 무능과 선택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러한 사고는 사회적 관계의 산물을 개인의 속성으로 돌린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노동자를 생산하면서도, 그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낸 독립적인 개인으로 취급된다. 노동자가 빈곤하다면 더욱 노력해야 하고, 경쟁에서 패배했다면 자신의 선택을 반성해야 한다.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라는 요구는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규정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생산한 계급적 조건을 개인에게 책임지우면서 그 조건 자체는 비판으로부터 보호한다.

진보적 개인주의는 이러한 책임론을 비판한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태어나며, 빈곤과 차별, 사회적 배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며, 개인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사회적 조건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개인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한 집단적 책임도 강조된다.

그러나 진보적 개인주의자들도 개인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여전히 바꾸지 않는다. 개인은 권리를 소유한 독립적인 주체로 설정되며, 사회적 관계는 그 권리의 실현을 보장하거나 가로막는 조건으로 이해된다. 사회는 개인에게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고 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인간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관계가 어떠한 계급적 대립을 통해 유지되는지는 개인의 권리 보장이라는 문제 아래 종속된다.

시장주의는 개인에게 자기 삶의 책임을 돌리고, 진보적 개인주의는 개인에게 사회적 보호를 제공한다. 한쪽은 경쟁의 결과를 개인이 감당하도록 요구하며, 다른 한쪽은 경쟁에서 발생하는 불이익을 제도로 보완한다. 그러나 양자는 이미 형성된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 개인을 생산하는 사회적 관계는 책임의 대상이 되거나 보호의 대상이 될 뿐, 인간의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역사적 관계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대립은 부르주아 사회의 인간관을 폐기하지 못한다. 이 두 방향은 각자 개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하거나, 혹은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의 주체도 권리의 주체도 개인이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두 방향은 서로를 비판하면서도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공통의 전제를 보존한다. 사회적 관계는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거나 뒷받침하는 외적인 조건으로 남는다. 인간들이 자신의 집단적인 생산활동을 통해 어떠한 존재가 되는가라는 문제는 끝내 제기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개인은 자신이 생산한 세계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노동자들은 서로 연결된 생산과 분업의 체계 속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 생산활동의 결과는 사적으로 소유되며, 사회 전체의 생산과 분배는 시장의 운동과 자본의 축적에 종속된다.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만들어 낸 경제적 힘은 그 인간들 자신에게 독립적인 법칙으로 대립한다. 시장이 침체하고 기업이 파산하며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는 과정은 인간들의 의식적인 공동 결정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객관적인 운명처럼 작용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생산한 사회적 관계에 지배받는다. 상품과 화폐, 자본은 인간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존재하면서도 그 활동의 주체들 위에 군림한다. 개인은 법적으로 자유롭지만 자신이 속한 생산관계의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받지만,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들은 개인의 의지 바깥에서 결정된다. 이러한 모순은 개인의 도덕성을 개선하거나 권리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인간들의 사회적 생산활동 자체를 새로운 관계로 조직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적 자유 역시 동일한 구조의 모순을 품고 있다. 종교개혁은 인간을 성직자적 위계로부터 해방하여 신 앞에 직접 서는 주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주체의 궁극적인 존재근거와 구원은 여전히 신에게 속한다. 인간은 자신의 신앙에 책임을 지지만, 자신의 공로와 의지만으로 구원을 생산할 수 없다.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존한다. 신앙인은 성직자의 중개에서 벗어난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구원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승인한다.

신 앞에 선 개인은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자유를 획득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 신 앞에 선 개인이 아무리 성직자의 권위를 거부해봤자 신의 절대적인 권위는 보존된다.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은 여전히 인간 자신이 지배할 수 없는 힘에 의존한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자신의 단독성을 성립시키기 위해 초월적 타자를 전제해야 했으며, 바로 그 이유로 끝내 홀로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신 앞에서 선 단독자는 결코 단독자일 수 없어진다.

신앙적 자유와 부르주아적 자유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두 마리의 괴물이다. 부르주아적 개인은 법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의 집단적인 생산활동에서 발생한 시장과 자본의 지배에 종속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적 개인은 성직자의 중개로부터 해방되면서도 자신의 구원과 존재근거를 신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존한다. 양자는 모두 개인의 독립성을 선언하면서 그 개인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힘을 개인의 외부에 남겨둔다.

이러한 공통성은 두 세계관이 역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사상적 조건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적 복음주의는 그 책임을 시장의 경쟁과 도덕적 규율로 발전시킨다. 개인의 존엄을 강조하는 진보적 프로테스탄트는 권리의 확대와 사회적 보호를 통해 신앙적 평등을 실현하려 한다. 양자는 현실의 정치에서 서로 대립하면서도 신 앞에 선 개인이라는 인간관을 공유한다. 신앙의 보수성과 진보성 사이의 대립은 인간의 자유를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출발시키는 근본적인 형식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인간들과 함께 노동하며, 자연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조직한다. 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역능이다. 개인의 의지가 사회적 관계의 외부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현실적인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조건을 집단적으로 지배할 때 자유는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자유로운 개인과 자유로운 공동체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면, 그 관계를 지배하는 능력은 개인의 자유를 구성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공동적인 생산과 생활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집단적 실천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외적인 힘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공동적인 실천은 개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활동 자체가 된다.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그러한 공동적 관계 속에서 실현되며, 그 관계의 발전 역시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유는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무로부터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해 변화시킨다. 자신의 존재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에 작용하는 능력이 인간의 자유를 이룬다. 자유는 필연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의지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필연성을 이해하고 변혁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이때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형식은 결정적인 한계로 등장한다. 신 앞에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관념은 그 개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를 신에게 귀속시킨다. 인간은 아무리 자유로워져도 자신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신의 자유로운 창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는 인간의 자유를 이러한 종속관계 안에 가둔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간의 존재는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가 아니며, 신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산출한 피조물의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자신을 초월하는 신의 절대적인 자유에 의존한다. 인간은 신 앞에서 독립적인 신앙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존재와 구원의 궁극적인 근거를 스스로 지배하지 못한다. 종교개혁이 성직자적 권위를 부정하여 획득한 인간의 자유는 창조주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다.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발전시키려면 이러한 신학적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변화시키는 현실적인 역능이 자유의 근거이다. 인간의 의식과 신앙, 도덕적 판단과 삶의 목적은 모두 역사적인 인간들의 활동 속에서 형성된다. 신 앞에서의 양심과 결단 역시 그러한 활동을 통해 생산된 주체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가 신으로부터 부여된다는 설명은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활동 속에서 발전시킨 역능을 초월적인 존재의 속성으로 귀속시키는 일이다.

결국 프로테스탄트가 발견한 개인의 주체성은 그 신학적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 인간을 성직자적 권위로부터 해방한 사상적 운동은 자신의 성취를 신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보존함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였다.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초월적인 신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적인 해방은 그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생산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자유의 근거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역사적 세계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전환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의 극복과 분리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인간들의 집단적인 생산활동은 시장과 자본이라는 독립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존재근거가 신의 절대적인 권위에 귀속된다. 인간이 자신의 활동에서 발생한 힘을 자신과 구별된 존재로 경험한다는 점에서 두 관계는 동일한 전도의 구조를 갖는다. 하나는 현실적인 생산관계의 운동 속에서,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념의 형식 속에서 인간의 자기소외를 재생산한다.

따라서 개인의 책임을 강화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는 국소적인 조치로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을 고립된 권리의 소유자로 이해하는 부르주아적 인간관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 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를 다른 인간들과 함께 생산하고, 그 관계의 운동을 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존재로 발전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공동체의 자유로운 발전은 동일한 역사적 운동 안에서 실현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자기지양 또한 여기에서 완성된다. 신앙적 개인주의가 발견한 양심과 주체성, 외적인 권위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성취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를 초월적 창조주와 은총에 종속시키는 종교적 형식은 파괴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신 앞에서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자유로워져야 한다.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은 끝내 홀로 설 수 없었다. 자신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근거를 신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신 앞에서 물러나 다른 인간들과 함께 서야 한다.

인간의 자유는 스스로가 처한 필연적 조건을 인식하고 변화시켜나가기 위한, 다른 인간들과의 집단적인 실천 속에서만 실현된다. 자신들의 노동으로 세계를 생산하는 인간들이 그 세계를 스스로 지배할 때, 개인은 비로소 자신의 현실적인 존재조건을 자유롭게 형성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발견한 자유의 진리를 완성하는 일은 프로테스탄트 자체의 개인관이 지양되고, 부르주아적 개인이 사라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적 동일성과 보편성의 자기실현

진리는 누구의 것인가? 군주의 것인가? 신의 것인가? 혹은 ‘국민’의 것인가?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절대적인 권위를 요구해 왔다. 군주는 자신의 인격으로 제국의 통일성을 보증했고, 신정체제는 모든 인간을 초월하는 신의 권위에서 정치적 질서의 근거를 찾았다. 근대의 국민국가는 마침내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물러나고 신의 자리가 비워진 뒤에도, 인간은 자신이 생산한 세계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지 못했다. 국민은 주권을 소유한다고 선언되었지만,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생산관계를 소유하지 못했다. 법률 앞에서는 평등했으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공장과 토지, 자본과 노동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어져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선언은 무엇을 실현했는가? 자신의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는 인민이 어떻게 그 세계의 주권자일 수 있는가? 정치공동체의 진정한 통일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성립한다. 인민이 자신을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조직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사회를 의식적으로 지배해야 한다. 인간이 생산한 세계를 인간 자신의 권력 아래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정치적 형식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 뿐이며, 그 역사적 진리를 조직적으로 체현하는 주체가 바로 혁명적 당이다. 어째서인가? 이 결론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적 통일성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지 살펴야 한다.

루소는 일반의지의 개념을 통해 인민의 정치적 통일성을 사유하였다. 일반의지는 개인들이 가진 사적인 의사를 모두 합산한 결과가 아니다. 일반의지는 정치공동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의지이며, 주권의 양도와 분할을 거부하는 보편적인 원리이다. 하나의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동일한 영토에 거주하거나 같은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민은 자신들의 공동적인 삶을 하나의 정치적 의지로 형성하는 주체여야 한다.

칼 슈미트가 제기한 민주주의적 동일성의 문제도 이러한 정치적 통일성을 다룬다. 수많은 개인이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은 하나의 정치적 인민을 산출하지 않는다. 하나의 정치적 인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어떠한 전체에 속하며, 무엇을 통해 하나의 정치적 존재가 되고, 무엇이 공동의 적인지를 현실적으로 확립해야 한다. 인민의 동일성은 추상적인 선언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정치적 동일성에는 현실에 존재하게 하는 정치적 형식이 필요하다.

역사는 이 문제에 여러 가지 해답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정치적 통일성을 인격에 귀속시키는 군주정, 절대적 신앙에 귀속시키는 신정체제, 국민의 추상적인 동일성으로 정립하는 세속적 국민국가, 그리고 역사적 진리를 조직적으로 체현하는, 국가무신론과 일당제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별할 수 있다. 각 정체는 정치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원리를 서로 다른 곳에서 발견한다. 그 차이는 곧 인간이 자신의 공동적인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의 차이이다.

군주정의 정치적 성취부터 살펴보자. 군주정은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 언어와 관습을 하나의 정치적 질서 아래 결합할 수 있다. 왕국의 구성원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도, 하나의 민족으로 동화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각 공동체는 자신의 역사적 특수성을 보존하면서도 하나의 정치적 전체에 속한다. 이러한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군주의 인격이다. 군주는 다수의 공동체를 하나의 질서로 묶는 중심이며, 서로 다른 권위와 이해관계를 자신의 권력 아래 통합한다. 제국의 통일성은 군주라는 살아 있는 인격을 통해 눈앞에 나타난다.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같은 군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사실로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성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군주가 행하는 기적이다.

군주정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보존하는 정치적 형식이다. 서로 다른 공동체를 하나의 추상적인 신앙이나 민족적 정체성으로 강제로 일치시키지 않고도 거대한 정치적 전체를 형성한다. 하나의 인격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통해 다원적인 세계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성은 끝내 한 사람의 인격에 묶여 있으며, 집단적 의지의 창출을 방해한다. 제국의 삶을 실제로 생산하는 것은 군주의 몸도, 그의 의지도 아니다.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고 노동자는 생산하며, 각 공동체는 자신의 관계 속에서 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제국의 질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활동을 통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생산한 정치적 통일성은 군주의 인격에 귀속된다. 전체의 힘이 한 사람의 권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군주도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공동체의 역사적 삶을 자신의 인격 안에 담을 수는 없다. 군주의 명령은 왕국을 통일하지만, 왕국의 실제적인 삶은 언제나 그 명령보다 넓고 복잡하다. 공동체가 생산한 보편적인 정치질서는 그 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격으로 표현된다. 군주정 치하의 인민은 자기 자신의 통일성을 군주에게서 발견해야만 하는 곤경에 놓인다.

군주의 덕성과 능력도 이러한 한계를 제거할 수 없다. 물론 탁월한 군주가 통치할 때 왕국은 번영할 수 있고, 무능한 군주가 통치할 때 왕국은 쇠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정치공동체의 주권은 그 공동체를 생산하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집단적 역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민의 통일성이 군주의 인격을 빌려 나타나는 한, 인민은 자기 자신의 정치적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반면, 유일신앙의 신정체제는 이 한계를 넘어선다. 신 앞에서 군주는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권력은 신의 절대적인 권위에 종속되며, 국가와 민족, 법률과 역사적 관습 또한 그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군주의 인격이 정치적 전체의 중심이었던 제국과 달리, 신정체제는 모든 인간적 권위를 넘어서는 하나의 진리를 통일성의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전환은 정치적 보편성의 중대한 발전이다. 특정한 인간의 인격에 의존하던 질서가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보편적 원리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신적 진리가 절대적이라면 어떠한 세속적 권위도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군주조차 신 앞에서는 유한한 존재이며, 인간이 만든 제도는 신의 절대적인 질서에 의해 심판 받는다.

‘종교적 원리 하의’ 민주주의 역시 신정을 뿌리로 한다. 인민은 신이 승인한 질서를 공동으로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한다. 하나의 통치자가 자신의 인격으로 공동체를 대표하는 형식은 절대적 진리를 함께 승인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형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신은 직접 법률을 집행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예산을 편성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정치적 결정은 인간들이 내려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신정의 난관이 존재한다. 신의 의지를 해석하는 자도 인간이고, 그 해석에 따라 국가를 조직하는 자도 인간이다. 법학자와 성직자, 군주와 관료는 모두 특정한 역사적 사회관계 속에서 형성된 존재들이다. 그들이 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판단을 신 자신의 판단으로 바꾸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신정체제는 바로 이 인간적인 정치적 결정을 초월적인 진리의 실현으로 규정한다. 역사적 인간이 생산한 법률과 국가제도는 신의 권위에 의해 정당화되고, 그 권위를 해석하는 인간적 기관은 다시 신성한 질서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인민은 자신이 생산한 정치적 질서의 근거를 자기 자신의 역사적 활동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그 근거는 세계 바깥의 절대자에게 귀속되어 있다.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복종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적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할수록 그 주권을 현실에서 행사하는 인간적 권력의 문제는 더욱 첨예해질 수 밖에 없다. 신의 권위는 모든 인간적 권위를 상대화하면서도, 신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제도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한다. 신정체제는 군주의 인격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발견하였으나 그 보편성을 현실적인 인민의 집단적 역능으로 되돌려놓지 못했다.

세속적 국민국가는 정치적 주권을 인간 자신에게 귀속시켰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로 선언되었으며, 법률은 시민의 평등을 승인한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통치한다는 원리가 마침내 국가의 정식적인 기초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누구인가? 동일한 국적을 가진 자본가와 노동자는 법률 앞에서 평등하다. 둘 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으며, 동일한 헌법 아래에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된다. 그러나 공장과 토지,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소유관계에서 그들의 지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한쪽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다른 한쪽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둘은 동일한 국민으로 선언되지만 서로 대립하는 계급이다.

국민국가의 정치적 통일성은 이 현실적인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 국민이라는 이름은 계급적 대립을 지우지 못하며, 법적 평등은 생산관계의 불평등을 폐기하지 못한다. 인민이 주권자라는 선언은 그 인민을 실제로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은 국가의 주권자가 되었으나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주권자가 되지 못했다.

이 모순은 세속적 국민국가의 정치적 양태를 세 가지 방향으로 분열시킨다.

첫째, 정치는 서로 다른 개인과 집단의 요구를 조정하는 절차로 축소된다. 국민이 하나의 역사적 의지를 생산하지 못하면 정치는 이미 존재하는 이해관계들을 집계하고 타협시키는 활동이 된다. 국가는 전체의 역사적 과제를 조직하는 능력을 잃고 서로 충돌하는 사적 요구들을 관리하는 기구로 변한다. 국민의 통일성은 법률의 문장 속에 남아 있지만, 현실의 정치는 끝없는 이해관계의 경쟁으로 분해된다.

둘째, 국가와 민족, 헌법이 새로운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신의 권위를 거부한 세속국가는 자신이 생산하지 못한 정치적 통일성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역사 속에서 형성된 헌법이 불가침의 원리로 신성화되거나, 민족이 영원한 운명공동체로 숭배된다. 특정한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이 국민 전체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정립된다. 과거의 신적 권위가 차지하던 자리에 헌법에 대한 신앙과 민족적 신화가 들어서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 통일성의 모든 선언을 꿰뚫고 자본의 지배가 관철된다. 국가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의 현실적인 지배권은 자본을 소유한 계급에게 집중되어 있다. 법률은 노동자에게 자유를 선언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살아갈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의 공동적인 이익을 주장하지만, 그 공동체의 물질적인 생활은 자본의 축적에 종속된다. 추상적인 국민의 이름으로 정치적 보편성을 선언하는 동안 자본은 그 보편성의 현실적인 내용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 세번째 유형은 첫번째 유형이나 두번째 유형과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절차의 무한한 경쟁, 민족과 헌법의 신성화, 자본의 지배. 이것들은 세속적 국민국가가 자신의 정치적 통일성을 현실적인 계급관계 속에서 생산하지 못한다는 동일한 모순에서 발생한다. 국가는 인민의 주권을 선언하였으나 인민은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역사적 문제는 정치적 권리의 확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민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에 대해서도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유, 노동과 분배를 규정하는 관계가 인민 자신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정치적 통일성이 실제적인 통일성이 되려면 계급적 분열을 생산하는 사회관계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계급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한 계급이지만, 그 계급의 역사적 사명은 계급사회 전체의 지양에 있다. 자본가의 계급적 지배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의 존속을 요구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해방은 자신을 노동력의 판매자로 재생산하는 생산관계를 폐기하는 데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통해 계급지배 일반의 물질적 조건을 제거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운동에는 보편적인 역사적 내용이 존재한다. 자신을 하나의 피지배계급으로 생산하는 사회관계를 폐기하는 순간, 그 계급은 자신을 포함한 계급적 분열 전체를 지양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계급사회 자체의 폐기를 요구한다. 특정한 계급의 역사적 투쟁이 인류의 보편적인 해방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의 객관적인 역사적 지위가 저절로 의식적인 정치적 실천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지만, 각각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이해관계와 투쟁은 서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임금과 노동시간, 작업장과 산업, 지역과 국가의 문제들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운동 속에서 하나의 관계를 이루면서도 개별적인 투쟁으로 흩어져 있다.

이 분산된 투쟁을 하나의 역사적 운동으로 조직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모순을 폐기할 정치적 전략과 조직을 생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객관적인 역사적 지위를 의식적인 혁명적 실천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전위당의 존재 이유이다. 혁명적 당은 계급투쟁을 하나의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한다.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투쟁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전체의 변혁으로 연결하고, 사회적 모순의 역사적 필연성을 인식하여 그 지양을 실천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당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계급이며, 자신의 해방이 어떠한 역사적 과제를 요구하는지 의식한다.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존재가 당의 조직적 실천 속에서 의식적인 정치적 주체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은 역사적 진리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혁명적 당은 역사적 진리의 조직적 체현이다. 당의 외부에 이미 완성된 진리가 따로 존재하고, 당이 그것을 전달받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진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모순과 그 모순을 지양하는 계급투쟁 속에서 발생한다. 혁명적 당은 이 운동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조직하며 국가권력의 형태로 실현한다. 이 시대의 역사적 진리는 당의 실천을 통해 현실적인 정치적 힘에 의해서만 산출된다.

진리는 당 안에서 의식적으로 조직된다. 혁명적 당의 활동은 계급투쟁의 분산된 계기들을 하나의 역사적 전체로 결합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특수한 계급적 처지를 인류의 보편적인 해방을 향한 운동으로 발전시킨다. 그 안에서 진리는 현실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당은 진리를 독점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 경쟁을 통해 획득한 독점적 지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사회적 전체의 역사적 진리는 서로 대립하는 계급적 이해관계들을 동등한 부분적 진리로 합산하여 얻어지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유지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그 관계의 폐기를 통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한다. 양자의 이해관계는 동일한 역사적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취향이 될 수 없다.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리는 그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의 모순을 어떻게 지양하는가에 있다. 혁명적 당은 그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주체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진리가 국가권력을 획득한 형태이다. 당의 진리 독점은 이러한 역사적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사회의 적대를 정면으로 인정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인 국가를 상상하지 않는다. 모든 계급을 초월하는 국가권력이라는 관념은 이미 존재하는 계급적 지배를 은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보존하는 국가권력을 혁명적으로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새로운 국가권력을 수립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민주성은 체제 안에 정당이 몇 개나 존재하는가 따위의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양이라는 하나의 보편적인 역사적 과제를 수행한다면, 그 운동의 정치적 지도력 또한 서로 대립하는 계급적 진리들의 병렬적인 경쟁으로 이루어질 이유가 없다. 당의 조직적 통일성은 계급투쟁의 역사적 진리가 의식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발전하는 형식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진리가 국가권력의 형태로 현실적인 사회관계를 변혁하는 운동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적으로 진리이기에 전적으로 민주적이다. 어째서인가? 민주의 주체인 인민이라는 범주 자체가 진리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의 지도적 지위를 개별적인 정치적 의사들의 동의로부터 도출하려는 시도는 이 관계를 전도한다. 당의 혁명적 정당성은 이미 완성된 개별적 의사들의 총합이 당에게 권한을 위임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당의 정당성은 프롤레타리아와 인민대중이 자신의 객관적인 역사적 지위를 의식적인 혁명적 실천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당이라는 조직적 형식을 통해 자신의 보편적인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려 해온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혁명적 당의 지도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역사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실천의 구체적인 조직적 존재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민은 계급투쟁의 운동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 지위를 획득하고, 그 운동을 통해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형성된다. 혁명적 당은 그 운동의 의식적인 통일성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인민의 역사적 진리가 국가권력으로 실현된 형태이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일성은 자신의 근거를 회복한다. 군주정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정치적 전체를 통일하였다. 신정에서는 초월적인 절대자가 그 통일성을 보증하였다. 세속적 국민국가는 주권을 인민에게 귀속시켰으나 그 인민을 현실적으로 분열시키는 생산관계를 보존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관계를 뒤집는다. 정치공동체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역사적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조직하며, 자신을 분열시키는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폐기한다. 인민은 자신의 보편적인 힘을 군주의 인격이나 신의 권위, 추상적인 국민의 이름으로부터 되찾는다. 그 힘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당의 조직적 실천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인 형태를 획득한다.

국가무신론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가적 선언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국가무신론은 인간의 집단적인 활동으로부터 발생한 힘이 인간 자신의 외부에 독립적인 절대자로 군림하는 관계를 폐기하고, 이러한 관계의 사상적 양태들을 물리적 수단을 통해 사회 내에서 전적으로 추방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이다. 신에게 귀속되었던 절대적 권위가 부정되고, 인간의 사회적 생산활동에서 발생한 지배적인 힘 또한 인간 자신의 의식적인 통제 아래 되돌아온다.

종교적 소외의 지양은 사회적 소외의 지양으로 발전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관계를 끝장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이 인간의 삶을 명령하는 사회, 인간의 노동이 생산한 힘이 인간 자신에게 낯선 권력으로 대립하는 사회는 폐기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생산하면서도 그 역사의 힘을 외부의 절대적 존재에게 넘겨주는 일을 끝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정치적 보편성은 현실적인 인간들의 운동과 결합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사회의 모순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발견하고, 혁명적 당은 그 사명을 의식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조직한다. 당은 역사적 진리가 자신의 주체를 획득한 형태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진리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국가권력으로 실현된 형태이다. 보편적인 정치질서는 자신을 생산하는 역사적 운동 속에서 자신의 근거를 획득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정치적 공동체의 통일성은 더 이상 자신을 생산한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는 낯선 힘으로 남지 않는다. 인간들은 자신의 역사적 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을 변화시키는 집단적인 실천 속에서 스스로를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형성한다. 계급적 분열을 폐기하는 운동이 인민의 새로운 통일성을 생산한다.

군주는 인민을 대표하였다. 신은 인민 위에 군림하였다. 국민국가는 인민의 주권을 선언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주권을 현실적인 역사적 권력으로 완성한다. 인민이 생산한 세계는 인민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 세계를 지배하는 힘도 인민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의식적으로 조직하여 현실에 관철하는 혁명적 당은 역사적 진리의 체현자이다.

결론

우리는 이 글에서 종교를 거짓말이나 미신이라고 선언하는 손쉬운 비판을 거부하였다. 그러한 비판은 신앙의 대상이 존재하는지를 다툴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어째서 신을 필요로 했으며 그 신의 개념을 통해 무엇을 발견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유일신교는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중대한 사상적 성취였다. 세계의 모든 존재를 하나의 원리로 통일하고, 어떠한 유한한 권위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했으며, 사랑과 자유, 인간의 공동적인 삶을 보편적인 진리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유일신교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인간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세계의 통일성은 신의 유일성이 되었고, 인간의 사랑은 신적 사랑의 불완전한 표현이 되었으며, 인간의 자유는 신의 창조와 은총에 의존하는 자유로 남았다.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삶 속에서 발견하고 발전시킨 보편적인 진리는 인간의 손을 떠나 초월적인 절대자의 소유가 되었다.

이것이 종교적 소외의 본질이다. 이슬람은 타우히드를 통해 모든 유한한 권위를 상대화 하였다. 타우히드의 개념을 가장 철저하게 전개한 샤리아티는 국왕과 자본, 제국주의와 계급적 지배를 우상으로 규정하고 그 파괴를 신앙의 과제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통일성을 현실에서 생산하는 피억압대중의 혁명적 역능은 끝내 알라의 주권 아래 놓였다. 인간은 자신의 억압자를 타도하면서도 그 타도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신에게서 찾아야 했다.

가톨릭은 신이 곧 사랑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웃의 선을 의지하는 사랑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 전체를 문제 삼도록 요구한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사랑한다면 착취를 생산하는 관계를 폐기해야 한다. 지배받는 인간을 사랑한다면 지배와 종속의 조건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사랑의 완전성을 세계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신의 본질에 보존하였다. 인간들이 자신의 역사적 투쟁을 통해 생산하는 새로운 사랑은 이미 완결된 신적 사랑의 불완전한 실현으로 격하되었다. 사랑은 인간에 의해 실천되었으나 그 진리는 신의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인간을 성직자의 권위로부터 해방하였다.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은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책임지는 주체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개인은 자신의 구원과 존재근거를 끝내 신의 은총과 창조에 맡겨야 했다. 성직자의 중개에서 벗어난 인간은 여전히 초월적인 절대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앙적 개인주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독립적인 권리의 소유자라는 인간관과 결합하였다. 법률 앞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자신이 생산한 사회적 관계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로 남아야만 했다.

세 종교적 전통의 성취는 인간 자신의 역사적 성취이다. 세계의 통일성을 사유한 것도 인간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발전시킨 것도 인간이며, 자유로운 주체의 지위를 쟁취한 것도 인간이다. 그런데 그 모든 성취의 궁극적인 근거를 인간 자신의 외부에 두어야 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자신이 발견한 진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종교의 진리를 끝까지 실현하려면 종교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는 이 관계를 보존하는 최후의 방벽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 세계의 존재는 신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 없이도 완전하다. 따라서 세계의 생성과 운동, 인간의 역사적 실천은 이미 완성된 절대자의 본질에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 인간이 세계를 변혁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더라도 신의 완전성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지만 신의 진리는 처음부터 완결되어 있다. 인간의 사랑은 새로운 내용을 생산하지만 신적 사랑은 그 모든 발전 이전부터 완전하다. 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전하지만 그 자유의 궁극적인 근거는 인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러한 절대자는 폐위되어야 한다. 신에게 귀속되었던 세계의 통일성은 세계 자신의 내재적인 운동으로 돌아와야 한다. 신에게 바쳐졌던 사랑은 인간들의 공동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근거를 회복해야 한다. 신 앞에서 승인받던 개인의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조건을 스스로 생산하고 지배하는 역능으로 발전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분리하던 장벽을 무너뜨렸다. 헤겔은 절대자를 자기규정과 생성의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맑스는 관념에 귀속되었던 역사적 운동을 현실적인 물질세계와 인간의 집단적 실천으로 되돌려 놓았다. 마오쩌둥은 물질세계를 움직이는 모순의 원리를 규명하였다. 유일신교가 제기한 세계의 통일성과 절대성의 문제는 이 발전을 거쳐 자신의 현실적인 근거에 도달한다.

여기서 종교의 유물론적 비판은 자신의 과제를 완성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에 직면한다. 인간이 신의 권위를 부정하더라도 자신이 생산한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장을 보라. 토지를 보라.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과 그 상품을 지배하는 자본을 보라. 누가 이 세계를 생산하는가? 인간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누가 이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가? 이 명확한 사실을 부정하는 자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비판의 무기가 아니라 무기의 비판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생산한 세계는 인간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움직인다. 시장은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법칙으로 군림하고, 자본의 축적은 노동자의 삶을 종속시키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하는 법적 주체이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자신의 계급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들의 집단적인 노동이 생산한 힘이 그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들에게 낯선 지배력으로 돌아온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지위를 벗어나면서도 자본의 노예라는 지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폐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낯선 권력이 폐위되어야 한다. 자본의 지배가 철폐되고, 인간들의 사회적 생산이 그 생산을 수행하는 인간들 자신의 의식적인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 종교적 소외의 지양은 사회적 소외의 지양을 요구한다. 신에게 빼앗긴 절대성을 회복하는 일은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세계를 다시 장악하는 일과 하나의 역사적 과제를 이룬다.

세속적 자유주의는 신의 자리를 감춰놓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은 새로운 보편적인 원리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 아래에서도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열되어 있다. 권리의 평등은 소유의 불평등을 폐기하지 못하고, 정치적 자유는 생산관계의 지배를 제거하지 못한다. 추상적인 인간의 권리는 계급적으로 분열된 현실의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정치적 주권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제국은 인민의 통일성을 군주의 인격에 맡겼다. 신정체제는 그 통일성을 초월적인 신에게 귀속시켰다. 국민국가는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인민이 자신의 생산관계를 지배하지 못하는 한, 국민주권은 현실적인 사회의 지배관계와 분리된 정치적 선언으로 남는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일한 국민으로 호명되지만, 한쪽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다른 한쪽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한다.

인간의 해방은 이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계급적 대립을 인정하고, 그 대립을 생산하는 관계를 폐기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추상적인 화해를 선언하는 일은 계급적 지배를 종식시키지 못한다. 계급사회의 모순을 실제로 지양하는 역사적 주체가 필요하다. 그 주체는 오직 프롤레타리아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자신을 하나의 피지배계급으로 재생산하는 생산관계의 폐기를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계급적 지배를 통해 계급지배 일반의 물질적인 조건을 제거할 때, 자신의 특수한 계급적 이해관계는 인류의 보편적인 해방으로 발전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사회를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계급적 존재까지 지양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바로 이 역사적 과제가 국가권력을 획득한 형태이다.

정치적 보편성은 비로소 현실적인 계급투쟁의 운동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발견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역사적 처지를 의식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혁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집단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적 힘으로 등장한다. 인민의 주권은 사회적 생산과 소유의 관계에까지 관철된다. 그러나 역사적 진리는 스스로 조직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투쟁은 하나의 계급적 운동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그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모순을 인식하고 지양하는 의식적인 실천으로 발전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혁명적 당이 이 진리의 조직적 체현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역사적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직한다. 생산관계의 모순을 파악하고, 계급투쟁의 분산된 계기들을 하나의 혁명적 운동으로 결합하며, 그 운동을 국가권력의 형태로 실현한다. 역사적 진리는 당의 조직적인 실천 속에서 자신의 현실적인 정치적 역능을 획득한다. 당의 지도력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운동 자체에서 발생한다.

당은 진리를 독점한다. 계급사회의 역사적 진리는 서로 대립하는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중립적으로 합산하여 얻어지지 않는다. 자본가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존속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이해관계는 그 관계의 폐기를 요구한다. 이 두 계급의 이해관계는 동일한 역사적 진리를 이루는 동등한 부분들이 될 수 없다. 계급사회의 지양이라는 역사적 진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며, 혁명적 당은 그 실천이 의식적인 조직적 주체로 등장한 형태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역사적 진리의 유일하게 현실적인 정치적 형식인 이유이다. 당의 존재 속에서 역사의 진리는 자신의 조직적 주체를 획득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그 진리는 국가권력의 형태로 현실의 생산관계를 변혁한다.

그리고 이로써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전도가 이루어진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이 생산한 힘을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귀속시켰다. 자신이 발견한 세계의 통일성을 신에게 바쳤고, 자신이 실천한 사랑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자유를 신의 은총에 의존시켰다. 자신이 생산한 사회적 부와 집단적인 노동의 힘은 다시 자본의 권력으로 인간을 지배하였다. 정치적 공동체의 통일성은 군주와 신, 추상적인 국민의 이름으로 인간 자신의 머리 위에 군림하였다. 이제 그 모든 관계를, 그 모든 추상성을, 그 모든 초월성을 분쇄해야 한다.

인간은 신에게 바쳐진 절대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본에 빼앗긴 생산의 힘을 되찾아야 한다. 군주와 신과 추상적인 국민의 이름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던 정치적 보편성을 역사적인 인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적 세계를 인간 자신에게 되돌려놓는 일이다. 신학은 절대성을 발견했으나 절대성을 인간에게서 분리하였다. 부르주아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선언했으나 개인을 자본의 지배 하에 두었다. 세속적 국민국가는 인민주권을 선언했으나 인민을 생활세계의 주권자로 만들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 모든 분리를 강제로 폐기한다. 인간이 자신들의 집단적인 노동으로 생산한 세계를 스스로 지배할 때, 자유는 현실적인 자유가 된다. 인간들이 자신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생산할 때, 사랑은 신의 명령이라는 추상성의 껍질을 벗고 역사적인 인간들의 관계로 존재한다. 인간이 자신을 생산한 사회적 관계의 전체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할 때, 세계의 통일성은 초월적인 절대자의 소유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신학에게 더 이상 그 자신의 진리를 보존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학이 발견한 진리는 신학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다. 신학이 인간에게 세계의 통일성을 가르쳤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는 그 통일성을 신의 소유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신학이 인간에게 사랑을 명령했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는 그 사랑의 완성을 위해 계급사회를 폐기할 것이다. 신학이 인간에게 자유를 선언했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유의 근거를 신에게서 빼앗아 자기 자신의 역사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현실세계에 자유의 불을 전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될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발견한 진리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파괴하고자 한다. 종교의 가장 높은 발전은 종교의 종말이다. 그 종말은 종교의 사상적 성취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종교라는 형태로 자신의 역사 속에서 발견한 진리를 초월적 존재의 지배로부터 해방한다. 신의 권위가 폐위될 때에야 인간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실제로 장악하는 일은 혁명적 실천을 요구한다. 진리가 인간의 역사적 삶 속에서 생산된다면, 그 진리는 역사의 운동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주체를 통해 자신의 현실성을 획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해방을 통해 계급사회의 종말을 수행한다. 혁명적 당은 그 역사적 진리를 조직하고 체현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진리가 국가권력으로 실현된 형태이다. 신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는 프롤레타리아의 국가권력에 의해 으깨지고 부수어져 사라질 것이다. 세계의 창조자라고 주장하던 신은 옥좌에서 쫓겨날 것이며, 세계를 실제로 생산해 온 인간들이 옥좌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주인은 비로소 자신의 역사를 탈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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