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미국의 마오주의 언론 Struggle Session에 게재된 A Hammer to Smash The Enemy를 번역한 것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 코뮌의 전개를 바탕으로 중국수정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반동학자, 그리고 파시스트들에 의해 왜곡된 문화대혁명의 역사를 새롭게 복원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적을 치는 망치 (1)
상하이코뮌
상하이 코뮌
오늘날까지도 상하이 코뮌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도달한 최고봉으로 남아 있다. 그 출현은 유례없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파리 코뮌의 선례를 새롭고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하 문화대혁명)을 추동하는 동시에 새로운 모델을 탄생시켰다. 이 정도 규모의 사건에는 언제나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며, 모순으로 깊이 점철되어 있다.
그 경위를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을 발전시키는 대중적 정치투쟁이 일 년 넘게 격화된 끝에, 혁명 세력이 마침내 낡은 당위원회를 전복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도래했다. 즉 진정한 의미의 혁명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 권력 탈취 과정은 1967년 1월 상하이의 '1월 폭풍'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탈권 투쟁은 중국 전역으로 권력 탈취의 물결을 확산시켰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정점이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자 중요한 발전이었으며, 마오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중추가 강력히 지지한 것이었다. 왕훙원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그의 핵심 지지자 여럿이 이 복잡한 투쟁 과정에서 전국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장훙성(姜洪陝, Hongsheng Jiang)의 학위논문 『상하이의 파리 코뮌』(The Paris Commune in Shanghai, 이하 PCS)은 이 두 역사적 코뮌의 역사를 깊이 파고든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저작을 "제국주의자, 수정주의자, 반동분자에 맞서 감히 반란을 일으킨 1967년의 상하이 코뮌 전사들"에게 바침으로써 명확히 좌파적 입장을 취한다. [1]
상하이 코뮌의 시작
논의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일 년이 지난 시점, 상하이의 한 유리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당시의 지배적인 분업 구조가 관리자들을 실제 생산 활동에서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층이 공장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한 노동자들은 이른바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관리층과 현장 노동자 사이의 이러한 분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산계급 권리(부르주아 권리)의 일부이며, 이는 모든 사회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의식적으로 제한해 나가야 한다. 이는 생산을 최우선에 놓는 여러 수정주의적 노선과 마오주의 정치경제학을 구분 짓는 초석이다.
'자산계급 권리의 제한'이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부와 자원의 격차가 좁혀지는 것을 가로막는 세력에 맞서 상하이의 노동자와 조반파(造反派)가 공세를 펼치는 것을 의미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상품 생산으로 얻은 부의 대부분이 자본 소유자에게 돌아가고, 그 부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부양과 재생산에는 부차적으로만 쓰인다. 사회주의 혁명은 이 부를 생산자 자신에게로 되돌리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것의 대부분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이며, 이는 자본주의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유리공장을 비롯한 여러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신체적, 기술적 능력에서 커다란 차이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노동의 가치에 따라 서로 다른 비율로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가졌고, 따라서 불균등한 속도로 부를 축적할 권리를 가졌다. 이를 자산계급 권리라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집단적 이익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보상하고 강화하며, 의사결정 권력, 교육, 문화 등을 포함한 자원의 불균등한 축적을 예고하는 전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리공장의 관리직원들은 "높은 급여와 특전으로 특권을 누렸으며, 이들 관료·기술관료는 자신들만의 이익집단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중국의 정세 속에서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과 더불어 혁명적 호소에 호응하여 마오의 선집과 어록을 학습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계급적 분열에 맞서 반란의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 그리고 이는 '좌익공산주의'와 아나키즘적 서사와 대조되는데 — 노동자들이 어떤 파괴적 동기나 '반권위주의적' 동기에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관리가 아니라 정치를 통해 혁명적 노선에 입각하여 생산을 증대하도록 추동되었다는 점이다. 조반파는 책임 관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간부들은 이미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혁명을 장악할 수도, 생산을 촉진할 수도 없다." 이러한 입장 아래 조반파는 1966년 말부터 이들을 권좌에서 쓸어내기 시작했다. [2]
먼저 그들은 공장 차원에서 광범한 민주주의를 실행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치 기구를 발전시켰다. 이는 이 공장이 온전히 노동자의 손에 들어간 첫 사례였다. 지도자를 선출하는 기준은 전문성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마오로부터 직접 끌어온 원칙에 따라 누가 진정으로 인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인가였다. 선출된 노동자들은 사무실을 멀리하고 상하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장에서 동료들과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주자파(走資派)가 깊숙이 침투해 있던 상하이시 당위원회는 임금 인센티브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이는 노동자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저항의 표시로 대규모 반동적 파업을 조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유리공장은 강제와 임금 인센티브 양쪽 모두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실시함으로써 생산량을 늘렸다. 이는 오로지 평범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산의 목적과 척도가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복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이를 파악할 때마다 생산력이 해방되며, 생산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위한 계급투쟁의 대의가 된다.
유리공장 노동자들의 이 영웅적인 투쟁은 문화대혁명의 좌파 지도자들과 당내 마오주의자들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하나의 불씨는 상하이의 모든 주요 공장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가 전국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동시에 — 이 운동의 결함은 당시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훗날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는데 — 상하이 노동자들은 관리층을 대신하여 삼결합(三結合)을 파악하고 적용해야 했으며, 이는 인민전쟁 시기 옌안 정풍운동의 경험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옌안 정풍운동에서 이러한 인민위원회는 민주와 집중, 대중의 의견 수렴과 권위, 노련한 경험과 조반파의 쇄신, 구조의 안정성과 새로운 문을 돌파하는 활력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1월 폭풍
문화대혁명의 지도자들, 특히 장춘차오는 1967년이 상하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소수의 당 간부들에 맞서 비판과 투쟁을 한층 강화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러한 비판과 투쟁이 전개되자 당내 자본주의자들은 앞서 언급한 반동적 파업으로 대응했으며, 심지어 도시의 상수도와 전력 공급을 끊으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사보타주와 책동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문화대혁명의 일반적 호소를 넘어서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주자파로부터 생산수단을 직접 탈취하기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문화대혁명의 방대한 복잡성을 살펴보다 보면 혼란스러워지기 쉽지만, 결정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은 우파가 어떤 핵심적인 투쟁 거점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일부 공장의 탈권을 시작했음에도, 상하이에서 가장 큰 신문이었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여전히 우파의 통제 아래 있었고 혁명적 소식은 거의 싣지 않았다. 좌파 신문들은 보유한 설비로는 자기 직원들에게 돌릴 부수조차 제대로 찍어내지 못했다 — 그 결과 1967년 새해 무렵 유리공장을 비롯한 여러 곳의 조반파에 고무된 『해방일보』의 노동자들이 신문사의 권력을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혁명의 확산을 크게 가속화했다. 놀랄 것도 없이, 편협한 경제주의 관료들은 이에 극좌주의라는 비난으로 응수했다. 이러한 비난에 맞서 혁명적 노동자들은 확대된 자신들의 발판으로부터 이른바 무장 호소를 발표했다. [3]
상하이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앞선 계급의식을 지닌 곳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하이시 당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던 우파는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당내 혁명파는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을 파견하여 상하이를 조직하게 했고, 마오 자신도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주시했다.
"혁명은 저녁 만찬이 아니다"라는 마오의 표현은 관대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던 문화대혁명에 생생하게 들어맞는다. 당시에는 혼란스럽거나 갈피를 잡지 못한 행동이 숱하게 벌어졌고, 음모자와 자본주의자 측의 은밀한 활동도 대단히 많았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1월 폭풍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마오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상하이만한 규모와 중요성을 지닌 도시가 노동자들이 직접 통제권을 장악하는 이런 거대한 격변을 겪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독자들에게 이 혁명의 규모를 가늠할 실마리를 주자면, 오늘날 상하이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1967년 당시에도 1천만 명이 넘는 주민이 있었다는 점을 짚어둘 만하다.
1월 6일에 열린 대규모 대중집회에서 조반파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통해 상하이 전역과 인근 지역에 자신들의 요구를 방송했다. 그들은 지역 당위원회 지도자인 차오 시장의 파면을 요구하면서, 그를 조반파의 감독 아래 노동을 통한 개조에 처하도록 강제할 것이며, 7일 이내에 자백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상하이의 신문들이 그의 실명을 거론하며 규탄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반파는 그가 류사오치-덩샤오핑 우파 사령부와 맺은 연계를 폭로하고, 그가 마오 주석의 가르침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반혁명적인 방식으로 맞섰는지를 입증하려 했다. 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대중집회는 주자파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반동파는 더 이상 대중 가운데 보수적인 부분을 동원할 수 없게 되었고, 혁명적 대중은 한층 더 굳건해졌다. [4]
상하이시 당위원회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통제권을 쥐고 있었지만, 인민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무렵 노동자들은 상하이시 당위원회 내 우파가 조직한 대중조직인 반동적 적위대(赤衛隊)의 이동을 막기 위해 항만을 장악했다. 항만 탈취 이후 조반파 노동자와 혁명가들은 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결정이 조반파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이루어지고 대출과 자금이 더 이상 적위대와 같은 반혁명분자들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했다. 대다수 조반파 조직이 수정주의 당국과 봉건적 관습을 겨냥했던 반면, 적위대와 같은 경쟁 홍위병 집단은 흔히 고위 당 간부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자신들의 특권과 부모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했다. [5]
수정주의자와 좌파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온갖 복지자본주의의 사례에 갖다 붙여 그 의미를 흐려놓는 반면, 상하이의 선진 노동자들은 복지를 주요한 반혁명적 경향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조반파는 이를 부각시키는 수많은 대자보를 내걸고, 노동자들은 이미 농민보다 높은 소득을 누리고 있으므로 임금 인상은 오직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을 파괴하려는 목적일 뿐이라고 밝혔다. 조반파는 당 관료들이 혁명을 계속해 나가는 데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부터 노동자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경제적 요구에도 서명해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조반파 노동자들의 견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규모 선전대가 조직되었다.
1월 11일에서 14일 사이에 조반파 노동자와 그 혁명적 지도자들은 모든 항만과 철도를 포함해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조반파 노동자와 학생 홍위병의 단결은 강력한 좌파 진영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이 진영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우파를 완전히 압도했다. 조반파 지도자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이미 사실상 무력화되어 기능을 상실한 상하이시 당위원회를 대체할 중앙 기구의 결성을 논의하고 있을 무렵, 여러 조반파와 홍위병 집단은 이미 대중집회와 광범한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들은 '상하이 혁명조반 조직 연락소'(이하 연락소)라 불리는 중심 기구를 결성했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은 장춘차오가 이끄는 노동자 총사령부였다. [6]
연락소는 매우 다양한 분파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최대한 광범한 단결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조반파 지도자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의 핵심 임무는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분파들 사이의 노선투쟁을 조직하고, 혁명적 노선을 따라 노선투쟁을 조직하며, 항의 활동과 공장 운영 등 양면에서 조반파의 권력 기관을 강화하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것 — 문자 그대로 반동적 파업과 사보타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린 도시를 구해내는 것 — 이었다. 연락소는 장기적으로는 그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지만, 상하이 인민공사의 맹아적 형태였으며 모든 조반파 분파를 다 포함하지는 못했어도 대다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조반파 집단은 때때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기도 했으며, 어떤 조직은 연락소와 통합되고 어떤 조직은 축출되었다. 이러한 정화 과정을 '하나가 둘로 나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노동자와 조반파의 손에 쥐어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강화되고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기의 주요한 논쟁과 노선투쟁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물음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지도자가 잘못되었을 때 지휘 계통을 존중하며 정치적으로 그릇된 길을 걷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공식 지도부에 맞서더라도 올바른 정치 노선을 고수하는 편이 나은가 하는 물음, 그리고 자본주의 노선을 걸어온 자들이 폭력적으로 전복되어야 할 자산계급 정권을 구성하는가, 아니면 그들 대다수는 그저 혼란에 빠졌거나 마오쩌둥 사상을 오해했을 뿐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장춘차오와 같은 최고 지도자들은 문화대혁명을 추동해 나가려는 이해관계 속에서 단결을 유지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해냈다. 바로 이러한 활동 때문에 그들은 1976년 반혁명 쿠데타 이후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문화대혁명 전체의 교훈을 평가하고 종합하는 데 있어 사후적 통찰은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이것이 없었다면 온전한 의미의 마오주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 내내 저우언라이와 같은 우파는 노동자들의 권력 탈취를 우파의 음모로 규정지었다. 저우 총리가 원흉적 수정주의자 덩샤오핑의 정치적 복권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는 미제국주의에 수많은 양보를 했으며,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반동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가 사망했을 때 우파는 그를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을 정체된 무언가로 바라보며, 현상이 그 반대로 전화할 수 있고 실제로 전화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오류다.
저우와 여타 보수파는 낡은 주자파 간부들을 파면할 것이 아니라 조반파가 그저 '감독'하기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늘 그렇듯이, 양보와 중간주의의 기교는 여러 사람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활용되었는데, 이들은 발각을 피하면서도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권력자들에게 더없이 요긴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인도의 마오주의 혁명가 차루 마줌다르는 중간주의를 우파주의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당내에는 두 노선 사이의 투쟁이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릇된 노선에 반대하고 그것을 격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중간주의는 수정주의의 한 유형 —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형태다. 과거 수정주의는 혁명적 분자들에 의해 거듭 격파되었으나, 중간주의는 언제나 투쟁의 승리를 가로채어 당을 수정주의의 길로 이끌었다. 우리는 중간주의를 증오해야 한다." [7] (「중간주의를 증오하고, 낙인찍고, 분쇄하라」)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중간주의가 발각되지 않은 채 넘어갈 수 있다는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수정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라는 마줌다르의 입장이다. 마줌다르 동지는 그릇된 노선을 단호히 격파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중간주의자는 1) 노선투쟁이란 그릇된 노선에 대해 지속적으로(그리고 흔히는 갈수록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2) 단결을 위한 투쟁 대신 거짓된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 3) 결국 둘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술책은 우파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해왔으며, 중국만큼 그것이 두드러진 곳도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중간주의자들은 우파보다 더 큰 해악을 끼쳤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우파를 곁에 두어 활동하게 만드는 당내 모순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상하이시 당위원회 내 낡은 우파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권력 안팎에서 불화와 분열, 기능 마비를 초래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작을 벌였다. 절대다수의 노동자가 장춘차오 동지를 마오의 현지 대표로 여겼던 반면, 변두리 홍위병 분파와 지역 당위원회는 그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모든 혁명에서 타당성을 갖는 역사의 한 가지 교훈은, 반동 세력이 언제나 운동의 머리를 자르고 운동을 그 지도부로부터, 대중을 활동가로부터 떼어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장춘차오는 상하이의 혁명가들과 베이징의 당 중앙을 잇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알든 모르든 마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표적이 되었다.
상하이시 당위원회는 이름뿐인 존재로 명맥만 이어갔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제시한 혁명적 노선은 공사의 수많은 조반파 집단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세력을 조직하여 이를 접수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보다 신중하지 못하여 소수의 집단만으로 당위원회를 접수하려 했다. 그들은 아무런 지지도 없이 당위원회의 핵심 공간을 점거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심지어 승리를 선언하는 대표단을 베이징에 파견하기까지 했다. 마오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온 대표단은 베이징에서 돌아오면서, 자신들의 지도부를 인정한다는 천(陳)과 저우의 위조 서한을 만들어내어 공식 승인을 받아 당위원회를 접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명백히 거짓이었는데, 주요 노동자 조반파 조직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 탈취 행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권력 찬탈의 주동자들은 더 폭넓은 조반파 집단에 의해 신속히 축출되었으며, 새로운 중앙 기관 — 즉 장춘차오의 지도 아래 있는 상하이 인민공사 — 을 어디에 수립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이어졌다.
상하이 인민공사가 완전히 수립되기 전, '홍색혁명파(紅色革命派)'라 불리는 한 집단이 정부의 직인을 탈취하여 새로운 공사 중앙에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공사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조반파 집단이 홍색혁명파와 무관했기 때문에, 이는 노골적인 내전의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위기로 인해 상하이 인민공사의 공식 출범식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신망을 잃은 홍색혁명파는 그 원한과 분노를 장춘차오에게로 돌려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들의 보복 공작에는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의 이력을 캐내어 그들을 깎아내릴 흠집을 찾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이미 축출된 낡은 당위원회 쪽에서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 어쨌든 당 문서보관소에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색혁명파는 지도부를 깎아내릴 만하다고 여긴 이력들을 찾아냈다고 여겼지만, 그 어느 것도 장춘차오 동지나 야오원위안 동지의 인격에 흠집을 내지 못했다. 당이 이미 잘 알고 있던, 혁명가들의 가족 구성원이 저지른 잘못을 근거로 한 값싼 공격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8]
홍색혁명파의 관념 속에서 자신들은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적의 첩자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수정주의자들에게서도 배드재킷팅(bad-jacketing)이나 피그재킷팅(pig-jacketing)이라는 형태로 이와 똑같은 필사적인 책동을 볼 수 있다. 공개적인 선전 공작을 통해 장춘차오를 공격함으로써, 우파는 충동적이고 쉽게 조종당하는 좌파의 일부 세력을 이용하여 상하이 인민공사의 형성과 공고화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탈권 사례 가운데 여러 곳에서, 권력을 탈취한 이들은 그것을 공사의 대표들에게 넘기지 않고 이미 신망을 잃은 당위원회에게 도로 넘겨주는 데 동의하고 말았다. 이는 '형식은 좌익, 본질은 우익'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장춘차오에게 가해진 수많은 허위 비난 가운데 하나가, 그가 이미 축출된 낡은 우파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어 '신경제주의'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을 깎아내리려는 시도에서는 흔히 이들이 낡은 상하이시 당위원회에 몸담았던 이력을 들먹였는데, 정작 이들이야말로 상하이시 당위원회 자체에 맞서 조반파 노동자 조직을 지지하고 나선 최초의 당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편의적으로 누락되었다. 이렇게 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진정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인민과 혁명에 봉사하려는 의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러한 오류는 조반파 노동자들에게 늘 반대하며 고통과 굴욕을 안겨왔던 당위원회 구성원들에게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1965년에 함께 협력하여 연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는 논문을 썼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자체의 첫 포문이었다. 충동적이고 쉽게 조종당하는 이들에 의해 이 모든 역사는 손쉽게 내던져졌고,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은밀한 자본주의자로 왜곡되어 묘사되었다.
흔히 은밀하게 조직된, 장춘차오에 대한 우파의 거듭된 공격은 공사의 출범을 한층 더 지연시켰다. 이 공격의 배후 분파들은 연이은 실패로 좌절을 겪으면서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고, 그 결과 장춘차오의 지지자 최소 한 명이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9]
이 역사에서 분명한 것은 공사의 건설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일체가 아니라 격렬한 계급투쟁의 산물이었으며, 어떤 순간에는 무장투쟁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결국 장춘차오의 올바른 지도와 마오가 그를 거듭 공개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반(反)장춘차오 홍위병 집단 일부를 끌어들이며 한층 더 공고해진 기구인 상하이 인민공사가 형성되었다. 물론 당시 많은 이가 상식으로 여겼던 것 — 즉 과거 적위대에 속했던 수십만 명이 완장만 바꿔 찼을 뿐 정치적 본질에서는 그대로였고 오직 표면적으로만 변했다는 것 — 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들 다수는 반동적이고 반공사적이며 반장춘차오적인 공작을 계속하기 위해 기존의 대중조직에 가담했다.
상하이 인민공사는 당 형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이 두 가지 마오주의 원칙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공사를 위한 투쟁은 훗날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리게 되는, 마오를 옹호한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에 의해 대단히 훌륭하게 이끌어졌다. 이 네 사람 가운데 공사를 이끌지 않은 유일한 인물은 장칭(江靑)이었는데, 그녀는 마오와 더불어 공사를 열렬히 옹호했다. 이 시기와 그 지도자들은 『정치경제학의 기초』(이른바 '상하이 교과서')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비롯해 대단히 유용한 여러 서적도 만들어냈다. 이 책들은 당의 운영, 마오주의자로서 살아가는 방법, 마오주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입문서다.
우리는 공사의 수립으로 이어진 사건들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했다. 모든 세부 사항을 다 펼쳐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는 공사의 삶과 죽음을 논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상하이 인민공사에 대한 평가
공사는 상하이의 중앙 통치 기관으로 기능했으며, 그 다양한 활동에 대한 책임은 파리 코뮌의 원칙에 따라 공사를 구성하는 여러 조직들로부터, 그리고 그 조직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여러 팀에 맡겨졌다. 그 팀들은 다음과 같았다.
- 혁명 장악과 생산 촉진팀 — 공업과 통신 담당
- 조직팀 — 공사 및 대중조직 구성원의 등록과 심사 담당
- 정치선전팀 — 뉴스와 예술 분야의 선전 사업 담당
- 연락팀 — 기층 단위의 각종 대중조직 및 조반파와의 통신·조사 담당
- 조사팀 — 정책 연구와 문서 초안 작성 담당
- 보위팀 — 치안과 사법 문제 담당
- 접대팀 — 방문객 접대, 상하이 외부 인사와의 연락 및 관련 업무 담당
- 판공실 — 공사의 일상 업무 담당
- 후근팀 — 병참 지원 담당 [10]
파리 코뮌 모델과는 달리, 상하이 인민공사는 계속혁명이라는 마오주의 원칙과 사회주의 시기가 하나의 과도기라는 사실에 부합하여 스스로를 과도기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공사는 정치를 우선시하고 계급투쟁을 핵심 고리로 삼으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주주의의 실행 범위를 넓혀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한 민주주의는 공사가 몰락하기 전까지 실행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의 방침으로서 조반파에게는 민주를, 반동파에게는 독재를 실행했다. 지도자는 총선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사 내 대중조직의 대표로서 지명되고 선출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여전히 언제든 비판받고 소환당할 수 있었다.
공사가 자체적으로 각료를 임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높은 소환율을 초래했다. 여러 분파와 대중조직은 자신들의 대표를 빈번하게 소환하고 교체했으며, 이는 공사의 일관성과 효율성을 해쳤다. 최고 지도부에 간부들이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당위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공사를 제대로 지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모순은 공사 내 반체제 분파와 반당 분파, 그리고 은신해 있던 수많은 우파에게 필연적으로 이로운 것이었다. 절대평등주의는 이러한 우파의 구호가 되었으며, 그들은 최후통첩과 가짜 선언문을 만들어냈다.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은 노동운동의 기회주의적 죄악에 대한 일종의 응보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 두 가지 기형은 서로를 보완했다." [11]
마오주의적 입장은 계급투쟁과 구체적 조건에 따라 시간을 두고 의식적으로 자산계급 권리를 제한해 나가는 것인 반면, 절대평등주의 노선은 모든 구별, 모든 개인적 직함, 모든 분업을 파괴함으로써 자산계급 권리를 단번에 폐지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혁명을 수행하며 사회주의를 혁명의 길을 따라 공산주의로 추동해 나가는 반면, 후자의 입장은 생산을 파괴하고 빈곤과 불화를 퍼뜨리며, 실제로는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 공공연한 우파가 보호받으며 행진하여 국가의 고삐를 다시 거머쥘 수 있도록 이념적 엄호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레닌이 아나키즘을 기회주의라는 죄악에 대한 응보라 부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극단적 민주주의와 같은 유사한 오류들과 마찬가지로, 절대평등주의는 지도의 원칙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오류를 야기하는 동시에 재생산하는 우익 기회주의적 대중 추수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수평주의는 언제나 우파적 병폐이며, 때로는 좌파적 위장을 하고 나타난다. 공사의 경우, 절대평등주의 노선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정체성주의 노선과 유사한 무언가를 닮게 되었다. 예컨대 우파가 삼결합 위원회에 반대할 때 내세운 근거는, 일부 당 간부의 과거 행적 때문에 이제는 어떤 당 간부도 더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간부들과 그들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이력, 그들이 어떤 노선을 견지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절대평등주의자들의 기회주의를 뒷받침하도록 왜곡될 수 있는 경우는 예외였지만 말이다. 본질적으로 수평주의와 이런 식의 정체성주의는 혁명에 대한 일치된 공격을 가하며, 중국의 경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일치된 공격이었다. 절대평등주의자들은 마오쩌둥 사상의 진정한 신봉자를 자처하면서도, 모든 간부를 그저 간부라는 정체성을 근거로 규탄했다. 어떤 이유와 논리로 보더라도, 이는 대체로 당을 이끌고 혁명과 권력 장악 이후의 모든 주요 결정을 이끌어온 마오와 그의 노선에 대한 공격으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이 반체제 분파들은 파리 코뮌을 파멸로 이끈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결함을 되풀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집단들은 공사를 구성한 분파들 가운데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좌익공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오주의, 아나키즘 전통에 속한 이들은 당 형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미 극복되었다는 증거를 필사적으로 찾아왔다. 공사를 당과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대안으로 그려내려는 기만적인 시도 속에서, 이들은 공사 내 조반파 조직 대다수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이 소수 집단에만 초점을 맞춘다. 장춘차오 동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자산계급이 장악한 '요새화된 마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하나가 파괴되면 또 다른 하나가 솟아나며, 설령 하나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무쇠 빗자루가 그곳에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2]
소수의 반체제 분파(단 세 곳)가 베이징의 당 중앙이 상하이 인민공사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이는 장춘차오의 책임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를 구실 삼아 그들은 공사를 불법적인 것으로 몰아가고 장춘차오가 이끄는 노동자 총사령부를 공격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공격이 실패한다면, 이미 해체된 상하이시 당위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여전히 반(反)공사적 정서를 지닌 노동자들을 동원해 총파업을 일으켜 경제를 교란하고 새로운 중앙 기관이 이루어낸 생산 증대를 되돌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사와, 그 안에서 지배적 세력을 이루었던 노동자 총사령부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반체제 분파와 낡은 당위원회 내 그 동맹 세력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친(親)공사 분파 앞에서 무력했다. 훗날 더 커다란 위협 — 사인방에 대한 쿠데타, 문화대혁명의 중단, 혁명의 반전과 자본주의 복벽 — 은 인민해방군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13]
그리고 군대가 초래하는 위험을 보여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공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로 입증되었다. 이러한 실물 교훈은 당의 군사화와 혁명의 세 가지 도구의 동심원적 구축의 필요성을 이론화함으로써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주로는 마오주의(MLM)의 전반적 종합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인민해방군에 대한 공식 노선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마오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동원된 조반파에게도 인민해방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개입은 우파와 좌파 양쪽 모두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부패한 당 관료 다수는 혁명적 대중과 인민해방군 사이의 이러한 분리를 십분 활용하여, 홍위병의 끊임없는 습격 위협으로 자신들의 사무실이 안전하지 못했던 까닭에 군 기지를 유죄를 입증할 문서(그리고 훗날 쿠데타 이후 마오주의자와 그 지지자들을 대규모로 체포하는 데 쓰이게 되는 조반파에 대한 신상 자료)를 은닉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주자파와 군 장교 사이의 늘 긴밀했던 관계 — 서로에게 이롭고 궁극적으로는 반동적인 관계 — 는 이곳을 그러한 자료를 숨기기에 이상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군대 내에서 문화대혁명을 확산시키려는 혁명가들의 모든 시도는 가장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문화대혁명이 실제로 군에 침투하여 그곳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기는 했지만, 이는 끊임없는 오르막 싸움이었으며 결코 충분한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겨우 일 년 만에) 공사가 수립될 무렵 특히 그러했지만, 문화대혁명 전체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군대와 대중 사이의 이러한 분리는 당내 자산계급의 이해관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오 자신이 조금도 모호함 없이 표명한 마오주의 노선은, 불개입이란 하나의 신화이며 군대는 계급투쟁을 벗어날 수도 대결을 피할 수도 없고, 인민의 종복으로서 좌파, 즉 혁명적 대중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인민해방군은 이미 우파의 문서를 은닉하는 데, 심지어 문화대혁명과 지역 홍위병의 표적이 된 우파 자신들을 은닉하는 데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마오는 군대로 하여금 조반파를 공공연히 지지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기회주의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군대는 좌파를 우파로, 우파를 좌파로 규정함으로써 이 호소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하여 찾을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인 세력을 지지했다. 이는 상하이에서 주된 양상은 아니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 전역에서 혁명 세력이 씨름해야 했던 커다란 어려움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14]
현지 수비대는 공사를 지지했지만, 전국적 차원의 군은 그렇지 않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상하이 전역에 걸친 탈권은 최고위 군 지도자들을 극도의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과 마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혼란을 두고 이를 공격하며 유례없는 규모의 재앙이라고 규정지었다(이는 훗날 부르주아 학자들이 문화대혁명에 맞서 펼쳐온 것과 똑같은 논리다). 마오주의자들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이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을 지속하는 데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는 입장을 한결같이 견지해왔다.
군 자체는 대중으로부터 대단한 위신을 누리고 있었으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축출된 상하이시 당위원회는 처음에 인민해방군의 군복을 제공함으로써 조반파 조직을 매수하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15] 또한 군은 대중이 겪는 대부분의 고난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지역 당위원회 내 주자파와 달리 대중 사이에서 그 영향력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군대와 대중 사이의 모순은 존재했으며 주기적인 갈등으로 계속해서 표출되었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이중의 제국주의 위협에 직면한 중국의 세계정세는 마오주의자들이 최고위 군 지도자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지만, 이러한 양보와 배려가 자본주의 노선을 걸어온 간부들에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군은 상하이 인민공사의 원칙에 대해 무지했거나, 무지한 척했거나, 아니면 그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다수의 최고위 군 지도자들은 국가를 관리하고 방어하는 문화대혁명 이전의 관행적 방식을 선호했으며,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을 공황에 빠뜨린 주된 원인은, 상하이 인민공사가 문화대혁명의 다른 발현들과 달리 자산계급 사령부와 그들이 강제한 자산계급 독재를 전복하기 위한 무력에 의한 탈권의 원칙 — 즉 국가를 분쇄하고 그것을 공사 모델로 대체하기 위해 혁명적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칙 — 을 구현했다는 데 있었다.
상하이 인민공사의 존재는 군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파리 코뮌이 상비군의 폐지를 추구했다는 사실과 상하이가 파리 코뮌의 경험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적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일부 최고위 군 지도자들은 사회주의가 일단 달성되면 그것이 정태적인 것이 되며 그러한 상태로 방어되어야 한다고까지 여겼다. 공사가 노동계급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리고 무장투쟁을 통해 서둘러 교육하고 끌어올리려 하자, 최고위 지휘부는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자신들이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것을 몹시 증오하게 되었다. 어떤 마오주의자도 (자산계급 권리의 즉각적인 근절을 주창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비군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군사적 특권이 제한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군 관료들 사이에 불만을 퍼뜨리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마오쩌둥 사상과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의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소련 홍군의 군사 노선과 구조를 거부하는 것인데, 물론 인민해방군 내에는 군 구조에 있어 소련식 모델을 선호하는 군국주의적 우파도 존재했다.
군 내부의 많은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본질에 반대했음에도, 마오와 그 추종자들은 문화대혁명이 실패한다면 올바른 노선은 농촌으로 돌아가 무장투쟁을 개시하고 유격전을 벌여 권력을 재탈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해방군에 있는 그대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가서 홍군을 찾아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16] 이러한 입장은 마오의 이 예언적인 태도를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오늘날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에게 특히 유의미하다. 일부 문화대혁명 연구자(예컨대 쉬유위)는 1967년 군이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혁명가들을 구금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 해에 마오 자신과 그 지지자들은 그들의 석방을 주창했다. 군대가 자신들에게 항의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가한 조반파를 살해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1월 폭풍과 상하이 인민공사는 중국 전역에서 혁명의 물결과 완강한 반동적 대응을 함께 촉발했다.
마오는 1월 폭풍의 지지자이자 옹호자였으며 장춘차오가 이끄는 공사 내 다수파를 뒷받침했지만, 공사 모델에는 많은 결함이 있으며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마오의 비판은 대부분 파리 코뮌의 역사적 교훈과 그 오류를 피할 필요성, 삼결합을 적용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부와 당의 역할에 관한, 해당 논설에서 이루어진 관찰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오는 또한 삼결합 없이는 사태가 빠르게 균형을 잃을 것이며, 반(反)장춘차오 절대평등주의자들과 같은 분파들이 갈수록 커지는 문제가 되리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장춘차오에 대한 이러한 공격들 속에서, 이력과 정치적 노선을 가리지 않고 모든 간부를 공격하는 반동적 노선이 권력에서 축출된 우파의 도구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아마도 몇몇 핵심 군 지도자들의 분노와 보수주의, 그리고 당시 소련과 미국이 가하던 위협 때문에, 공사 형태에 반대하는 것이 군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한 타협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인데, 이 시기 마오 자신의 정보가 덩샤오핑 시대에 제한되거나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과 그 하수인들이 공사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저작물(상하이 교과서의 경우 인쇄기에서 뜯겨나가 파기되었다)을 파기하려 시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오 자신의 저작물과 그의 수많은 기록도 뒤쫓아 일부 경우에는 성공적으로 말살했다.
마오가 야오원위안, 장춘차오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공사와 장춘차오에 맞선 공작을 이끈 파괴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모든 것을 공사로 바꾼다면 당은 어떻게 되는가? 당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공사 위원회 구성원 가운데는 당원도 있고 비당원도 있다. 당위원회는 어디에 둘 것인가? 어떻게든 당은 있어야 한다! 무엇이라 부르든 핵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공산당이라 부르든, 사회민주당이라 부르든, 국민당이라 부르든, 일관도(一貫道)라 부르든, 당은 있어야 한다. 공사에는 당이 있어야 하지만, 공사가 당을 대체할 수 있는가?"
모든 개인적 직함을 없애야 한다는 절대평등주의 노선의 제안을 공격할 때 그는 한층 더 신랄했다. "이는 극단적인 아나키즘이며 가장 반동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어떤 것의 '장(長)'이라 부르는 대신 '당번병'이나 '조수'라 부른다면, 이는 실제로는 형식적인 변화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는 언제나 '장(長)'이 존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17]
여기서 마오는 영웅적인 혁명적 대중이 역사를 만들지만 굳건한 대중적 연계를 지닌 공산주의적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조금도 완곡함 없이 명확하게 주장한다. 지도부는 반드시 출현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존재는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다.
마오는 상하이의 교훈을 끌어와 도시를 조직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창했다. "혁명위원회의 기본 경험은 이러하다 — 그것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혁명적 간부의 대표, 무장력의 대표, 그리고 혁명적 대중의 대표를 갖는다. 이것이 혁명적 '삼결합'을 이룬다. 혁명위원회는 통일된 지도를 행사하고, 중복되거나 겹치는 행정 구조를 없애며, 정예 병력과 간소한 행정이라는 방침을 따르고, 대중과 접촉을 유지하는 혁명적 지도 집단을 조직해야 한다."
이전에 권력을 쥐고 있었던 우파와, 형식은 좌익이지만 본질은 우익인 자들은 다시금 인민 대다수에게 해를 끼치는 파업과 태업을 조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실질적으로 문화대혁명의 공격 대상을 권력자들로부터 평범한 간부, 가도위원회, 심지어 대중에게로 옮기도록 부추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식으로 권력을 잃은 우파는 다시 한번 슬며시 복귀하여, 자신들의 활동 자체를 혁명가들의 사상이 통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권력자들은 대중이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이러한 경제적 요구를 하도록 부추겼고, 그런 다음 그 요구에 양보함으로써 대중에게 뇌물을 주어 투쟁을 멈추게 했다. 이러한 종류의 경제주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찬양받는다. 그들은 상하이 인민공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주장하려 하면서도, 당시의 가짜 좌파가 그랬던 것처럼 경제주의와, 모든 것을 향해 애처롭게 마구 후려치며 무너뜨리려는 시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엘리엇 류(Elliott Liu)는 자신의 저서 『마오이즘과 중국 혁명: 비판적 입문』과 그 전신으로 치노(Chino)라는 필명으로 쓴 『피어나 논하다(Bloom and Contend)』에서 대체로 소수의 절대평등주의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며, '스탈린주의'가 원흉이라는 낡은 트로츠키주의적 분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여 모든 모순을 마오 자신에게 떠넘긴다. 유일한 차이라면 절대평등주의자들은 형식적으로는 마오 사상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장춘차오를 공사의 반대자로 그려내면서, 그가 공사를 이끌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마오와 당내 마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 모두를 무시한다. [18]
더욱 나쁜 것은, 모든 간부와 군대를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를 나쁜 것으로 봄으로써 그가 스탈린의 가장 나쁜 오류 가운데 하나 — 즉 당 자체를 단일체로 보는 오류 — 를 대체로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당에 대한 판단을 뒤집으면서도 반(反)변증법적 오류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삼결합을 지배 구조에 불균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된 새로운 장치로 자리매김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옌안과 같은 홍색 근거지에서 벌어진 항일투쟁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중국 혁명가들이 사용해온 방법이었다. 옌안과 유사한 근거지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앞선 투쟁을 겪었으며, 이는 문화대혁명을 이끈 여러 원칙과 궁극적으로 공사 그 자체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미미한 반체제 홍위병 분파에만 초점을 맞추고 심지어 낡은 당위원회의 경제주의를 지지함으로써, 류를 비롯한 이와 같은 이들은 공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 한다. 이는 전형적인 주관주의의 한 사례다.
지도부의 역할은 조직된 노선투쟁을 통해 단결을 이루고 혁명적 노선을 종합하는 것이다. 마오는 삼결합을 실행함으로써 이를 성취했으며, 이는 장춘차오가 노동자 총사령부를 대다수의 조반파 노동자 조직 및 혁명적 대중조직과 통합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독자들에게 사태를 한층 더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류를 비롯한 이러한 이들이 자신들의 비판을 마오쩌둥 사상에 집중하면서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주로는 마오주의와는 실제로 씨름하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는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의 세 번째이자 최고 단계로 요약되는, 과거의 성공과 오류에 대한 전반적인 종합이다. 삼결합은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안에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근거지를 다스리고 인민전쟁 속에서 계급투쟁을 이끄는 인민위원회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실제로 삼결합은 페루공산당과 그 곤잘로 주석이 제창한 혁명의 세 가지 도구의 동심원적 구축 이론과 더불어 그 자체로 질적으로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주로는 마오주의자들 — 스스로를 마오주의자라 칭하는 여러 보수적, 기회주의적, 우파적 세력과 대조적으로 — 은 다음과 같은 커다란 물음을 다룬다.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 복벽을 막는다는 표방된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게 만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 답은 당의 군사화, 무장한 대중의 바다, 그리고 동심원적 구축이며, 이 모든 것은 문화혁명 —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 혁명의 지속 — 안에서 가장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이러한 해법에 도달하는 것은 당과 대중, 군과 당, 군과 대중 사이에 형성된 균열이 동시에 자본주의 복벽이 수행되는 장소이자 복벽을 향한 자산계급적 충동의 온상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문화혁명과 인민전쟁 지구전을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의 일부는, 군대가 혁명가들에 맞선 자산계급적 쿠데타에 이용될 수 있게 만든 이러한 모순들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의미한다.
물론 누구나 기억하듯이, 마오의 네 대표는 문화대혁명의 온갖 '과잉'에 대한 희생양으로 중국의 반동파에 의해 지목되어 투옥되었으며, 그 사이 조반파 노동자와 마오주의를 지지하는 대중은 대규모로 구금되었다. 바로 그 주자파가 병영에 보관해두었던 흑색 파일과 신상 자료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마오주의와 마오주의 최고 지도부의 상징으로서 이 네 사람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인방 가운데 세 사람이 공사의 지도자였는데,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그 최고 지도자 두 명이었고 왕훙원은 공사의 마오주의 조반파 운동과 우한 사건 양쪽 모두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마오의 네 주요 지지자 가운데 공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은 장칭 동지였는데, 그녀는 그럼에도 공사의 일관된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
결론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옹호하는 주장은, 애초에 자산계급과 지주계급의 전복을 가능케 했고 지금도 가능케 하는 바로 그 원칙 자체를 부정한다. 레닌과 마르크스가(그리고 사실상 모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장했듯이, 공산주의적 지도 없는 노동자 자신의 의식만으로는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기에 불충분하다. 바로 이 때문에 절대평등주의자들과 낡고 부패한 당 간부들이 경제주의를 중심으로 결합했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와 똑같은 영향력은 '기지 건설(base-building)'의 주된 수단으로서 인민에 대한 봉사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노선을 실천에 옮기는 조직과 경향은 인민이 있는 그대로 재생산되도록 그 기본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 이상은 하지 못하며, 그들을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들은 곤잘로가 말했듯 "권력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대중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요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지도와 계급투쟁 속 대중의 자발성 및 열정의 결합이야말로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주로는 마오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바로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군대(홍군 또는 인민군)는 당이 대중 사업을 수행하는 주된 통로가 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대중과 군대 사이의 연계의 견고함을 보장한다. 그리고 군사화된 당에 의해 주도되는 이러한 연계를 통해, 대중 자신이 공산주의 군대를 중심으로 한 민병대로 편입되며 — 대중은 군사화되고 교육받으며 전사로 단련된다. 대중과의 접촉을 통해 공산주의 군대는 이러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필연적으로 출현하게 마련인 주자파에게 물질적으로 동조하는, 대중과 단절된 세력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요컨대 노동자 자주관리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복벽을 향한 요구를 치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하이 인민공사를, 그 자체로 계급투쟁과 혁명의 정점이었던 문화대혁명의 일종의 정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회주의의 고도로 발전된 단계가 무엇을 수반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그것은 사회주의 안에서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심지어 더욱 첨예해짐에 따라, 불균등 발전의 조건 속에서 잘못될 수 있고 실제로 잘못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한 가지 결정적인 교훈은, 중앙 기관을 만들어내기 위해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공산주의 지도부를 살해하거나 고립시키려는 경제주의자들에 맞서 그 어떤 보호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이들은 상하이 인민공사에 더 많은 시간과 연구를 할애하고 이를 마오주의자로서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동계급 권력의 첫 발현으로서 파리 코뮌을 둘러싼 논의는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지지만, 상하이 인민공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대규모 혁명적 탈권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우리는 이를 방어하고 이로부터 배워야 하며, 특히 그것을 이끈 혁명적 마오주의자들과 장춘차오의 역할을 방어해야 한다.
혁명적 과학은 그 지도부를 통해 발전하며, 사인방의 활동은 마오쩌둥 사상에서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로 나아가는 마오주의 발전 과정의 필수적인 일부였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하고 그것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탈권이 필요하다 — 즉 기회주의자들의 더러운 손아귀로부터 공사를 빼앗아, 그것을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주로는 마오주의로 발전하는 데 이바지한 마오주의의 선진적 산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2부에서 더 다룰 것은 무장한 대중의 바다라는 문제, 그리고 당의 군사화가 복벽을 막는 데 있어 핵심 고리가 되는 방식이다. 공사의 경험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삼결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 당과 군대와 대중운동이 함께 서서 함께 일하며 당의 지도력과 그 대중적 연계를 유지하는 동심원적 구축이라는 그 더 높은 발현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다.
[1] 장훙성(姜洪陝) (2010). 『The Paris Commune in Shanghai: the Masses, the State, and Dynamics of "Continuous Revolution"』. [2] 위의 책. [3] 위의 책. [4] 위의 책. [5] Perry, Elizabeth J., Li, Xun (1997). Proletarian Power: Shanghai in the Cultural Revolution. Boulder, Colorado: Westview Press. [6] 위의 책. [7] Majumdar, Charu (1970). "Hate, Stamp and Smash Centrism." The Collected Works of Charu Majumdar. [8] 장훙성, 2010. [9] 위의 책. [10] 위의 책. [11]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1940).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 마르크스주의 전략전술에 관한 대중적 논설』. 뉴욕: International Publishers. [12] 장훙성, 2010. [13] 위의 책. [14] 위의 책. [15] Perry, Li, 1997. [16] 마오쩌둥 (1959). 「루산회의 연설」. 『마오쩌둥 선집』. [17] 마오쩌둥 (1967). 「장춘차오·야오원위안 동지와의 세 차례 담화」. 『마오쩌둥 선집』. [18] Liu, Elliott (2016). Maoism and the Chinese Revolution: A Critical Introduction. PM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