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 -민주당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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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 -민주당 편-

즉, 운동진영의 담론장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독점해온 민주당에 대한 이 낡디 낡은 두 가지 입장 간의 이항대립은 어느 한 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이 소멸하는 식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양변의 쌍소멸, 대립물의 또 다른 대립물로의 이행, 즉 담론 자체가 새로운 단계로 상승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상승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단순한 선언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혁신되기 위해서는 민주당 자체에 대한 역사적 검토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

-민주당편-

본고는 지난번에 본 웹진에 게시된 <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 -보수정당 편->의 후속편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이승만 체제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연속성을 보존한 채로 유지되고 있는 파시스트 정치세력인 보수정당을 살펴보았으며, 이번 글에서는 해방 직후 한민당에서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으로까지 이어지는 민주당에 대한 포괄적 분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자유당으로부터 국민의 힘으로까지 이어지는 보수정당을 관료대자본과 친미관료, 수구적 사법부, 족벌언론 간의 정치적 동맹이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제권리들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식민지 파시스트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남한의 보수정당은 민중의 입장에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애국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철저히 격멸과 분쇄의 대상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명확히 결론을 내렸다. 허나 민주당의 문제는 비교적 복잡하다.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민족민주운동 내에서, 그리고 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진보정당운동 내에서 민주당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아포리아로 남겨져 있었다. 이 글의 목적이 바로 그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것이다.

 본고의 많은 요소들이 보수정당 편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전제로 하므로, 지난 글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은 이 글의 독해에 돌입하기 전에 <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 -보수정당 편->을 먼저 독해하길 권한다.


민주당 아포리아

남한 민중운동 내에 존재해왔던 여러 이념노선 간의 사상투쟁에 있어서 민주당에 대한 관점이라는 요소는 언제나 각각의 이념노선을 과잉대표해왔다.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곧 특정한 진영의 총노선으로 간주되던 일정한 편향이 운동진영 내 사상투쟁의 폭과 깊이를 열화 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오늘날에 보여지는 진보정당들 간의 갈등은 각 정당들이 보유하고 있는 구체적인 비전이나 총노선에 따른 대립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민주당에 대해 몇몇 정국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해왔느냐에 대한 상호배제적 적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어째서인가? 기존 운동진영 내에 존재했던 민주당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리는 입장들이 지금까지 너무도 많이 쌍방에서 제기되어 왔으며, 이러한 대립항을 지양하거나 다음 단계로 이행시키기는 커녕 오직 친민주당론과 반민주당론 간의 이항대립만을 각기 세력이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상황에서 더이상의 유효한 논쟁이 불가능해지고, 또한 이 이항대립적 논쟁이 운동 내의 다른 논쟁의 영역들을 모두 흡수포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각 변은 각각 민주대연합론, 그리고 노동계급 독자노선론으로 불린다. 이 두 변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민주대연합론이란 무엇인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제 통일을 위한 과정이다. 민주당을 진보적으로 견인하고,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여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 후, 연방제 통일을 거쳐 체제의 변혁을 시도한다는 노선이다. 즉 민주대연합론은 몇 가지 가정을 전제한다. 그 가정들이란 무엇인가? 첫째로는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이 전술이 아닌 수권을 위한 총노선으로 기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수권이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둘째로는 민주당 기층 지지층 뿐만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정치집단 자체를 견인 가능한 대상으로, 그리고 단기적 투쟁의 파트너를 넘어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의 동맹군, 즉 식민지 체제 탈피의 동맹군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정은 다소 간 기묘하게 보인다. 첫째 가정에서는 사회 내의 계급계층 요소들 간의 하층 통일전선과 특정 지도부 및 단체들 간의 상층 통일전선을 더욱 중시하고 후자의 형식적 요소를 절대화 하는 듯한 편향이 보여진다. 주관적 역량의 성장을 도외시 하고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요인에 과도한 기대를 품게 될 수 있는 위험성 또한 내포되어 있다. 둘째 가정은 민주당 내의 지도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관료대자본 및 제국주의 통치기관과의 유착-연합 과정을 바라본다면 더욱 시류와 맞지 않는다. 민주당이 배출한 네 차례의 정권- 즉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문재인 정권, 이재명 정권은 모두 보수정당들과는 그 정도와 방향성이 살짝은 다를 수 있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관료대자본과의 협력을 진행해온 정권이었다.

세 번째 가정은 더욱 위험하다. 만일 국가보안법이 폐기된 상황에서 반제자주화를 표방하는 ‘민주대연합 정권’이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과연 정말로 민주대연합 세력이 ‘국가권력’을 손에 넣은 상황인가? 그렇지 않다. 남한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재벌 관료대자본, 친미 관료, 수구 사법부, 국가기구와 군대 곳곳에 뿌리박힌 파시스트 네트워크는 결코 그 정권의 지휘를 받지 않을 것이다. 변혁적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얻는 것은 형식적이고 허울 뿐인 명령권 뿐이다. 선수들이 복종하지 않는 축구감독 자리에 대체 어떤 권력이 존재하겠는가? 남한 국가기구 자체가 식민통치기관임을 생각해볼 때, 그 어떤 종류의 선거를 통한 체제변혁, 선거를 통한 민중의 권력장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계급 독자노선론은 민주대연합론에 비해 어떤 올바른 관점이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노동계급 독자노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노동계급운동과 그 반영으로서의 ‘노동계급 정당’이 진보정치와 민중운동의 유일한 축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른 계급계층과의 연대연합과 통일전선을 거부하고 노동계급 자체의 역량을 통해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노선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관점이 아니다. 맑스주의의 논리에서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력군인 이유는 노동계급이 사회의 중첩적 모순들 및 억압들의 통합적 담지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피억압 계급계층을 영도할 역량을 지니기 때문이다. 식민지 남한 사회에서 다른 계급계층들을 영도하고 민주적 제과제, 반식민적 제과제를 내팽겨치고 오직 노동계급의 경제적 요구들만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려는 반-통일전선, 반-연대연합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진정한 노동계급 혁명정치는 노동계급을 자기폐쇄적 ‘독자성’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전사회적 계급계층에게 향외적 영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로 등극시키는 것이다. 민주대연합론에 대한 반편향으로 등장한 노동계급 독자노선론은 본질적으로 경제주의, 조합주의의 좌익적 외피를 쓴 재등장, 재발견에 불과하다.

즉, 운동진영의 담론장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독점해온 민주당에 대한 이 낡디 낡은 두 가지 입장 간의 이항대립은 어느 한 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이 소멸하는 식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양변의 쌍소멸, 대립물의 또 다른 대립물로의 이행, 즉 담론 자체가 새로운 단계로 상승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상승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단순한 선언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혁신되기 위해서는 민주당 자체에 대한 역사적 검토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로 그 것이, 오늘 이 글에서 우리가 착수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한국 민주당과 이승만 정권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인 한국민주당은 어떤 정당이었는가? 한국민주당은 본질적으로 국내 우익 세력들의 정당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기호지역, 호남지역, 서북지역의 지주들과 친일 엘리트들, 국내의 실력양성파 온건 독립운동가 및 지식인, 그리고 일부 매판자본가들의 정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해방시기 건준과 조선공산당을 제외하고는 가장 광범위한 조직망을 지니고 있던 정당으로,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을 방해하는 한 편 임시정부 출신들로 구성된 한국독립당 계열 정치세력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남한 지역에서 큰 세력을 얻었다. 허나 이승만을 비롯한 구미위원회 계열 인사들이 반탁운동 과정에서 거대한 대중운동의 세력을 얻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우익 대중정당인 독립촉성국민회를 건설하자 한국민주당의 우익 내 주도권은 금새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한국민주당은 이승만과 협력하여 남한 단정 수립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당대 성장하고 있던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맞서 이승만과 함께 친미 단일대오를 수립할 필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은 4.3 항쟁의 진압과 파쇼적 반민주 법제도인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적극 협력하였고, 제헌의회에서 이루어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게 몰표를 주었다. 물론 한민당의 소수 ‘개혁파’ 내에는 균점경제나 협동경제 등의 계급타협적 수사를 사용하는 집단들도 존재했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과거 메테르니히나 토마스 칼라일의 봉건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는, 몰락해가는 지주계급이 성장해가는 자본가 계급에게 보내는 질시의 시선 내지, 한국민주당 내 일부 후발자본가들의 매판대자본에 대한 이익공유 요구를 수사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허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연대연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격화 되어가는 소작쟁의와 민중운동 등 피억압 대중들의 불만과 투쟁을 찍어 누르는데 실패하고 농지개혁 정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국민주당은 광범위한 지주계급의 지지와 조직망을 지니고도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가로막지 못하였는가? 왜냐하면 해방 직후 한반도 지주계급의 과반을 차지하던 일본인 지주들이 떠나가고 그 적산 토지들을 소작농과 자작농을 차지함에 따라 지주계급 자체의 역량과 계급적 기반이 상당부분 붕괴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당대 지주계급은 더이상 자영농과 소작농들을 억누를 힘을 지니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그렇기에 이승만 정권은 매판자본가와 지주계급 간의 정치적 동맹을 파기하고 피억압 대중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완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 정권은 한국민주당 인사들을 내각에서 배제하고 추방하며 자파 위주의 자유당 출범을 속행하는 등 완전한 유일체제를 구축하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지주계급의 정당에서 후발자본가의 정당으로  

물론 이승만의 농지개혁 정책은 허점이 많았고 지주소작제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조치가 아니었지만 이미 구심점을 잃고 몰락해가던 남한 지주계급에게는 매우 실질적인 타격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한국전쟁 과정에서 조선인민군이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지주를 처단하는 등의 점령지 정책을 실행하자 전후에는 더더욱 지주계급의 정치적 역량이란 실질적으로 거세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은 무너지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한국민주당은 단순히 지주계급만의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민주당의 주요 명망가 중 하나였던 김성수만 하더라도 지주인 동시에 면직자본가였으며, 그 외에도 농지개혁 이후 창업과 투자 등을 통해 자본가로 계급적 전환을 추동한 한민당계 구 지주들 또한 적지 않았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 재건 과정에서 민주국민당은 후발자본가들의 정당으로 빠르게 변모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 하에서 미국 원조품 배분과 집중적 적산불하, 삼백산업 등을 통해 초기적 형태의 재벌이 나타나고 매판대자본 내에서 일부 관료자본집단이 탄생하는 등 정권과 함께 성장한 선진적 형태의 자본가들과 달리, 민주국민당이 대변하던 지주 출신의 후발자본가들은 면직 등의 매우 초기적 형태의 산업에 국한되거나 혹은 중소규모의 매판사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자본의 위계적 배열 하에서 이러한 후발자본가들은 대미-대일 종속구조 하에서의 초과이윤을 분배받지 못하거나 혹은 국소적으로 분배받는 집단이었고, 더욱이 후발자본가들 중 대다수는 향토적-지역적 배경을 두고 있었기에 개발 및 재건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급적 불만은 민주국민당을 점차 선명야당으로 변화시켰고,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승만의 파시스트 통치가 더욱 고도화-노골화 되자 자유당 내의 반개헌파와 흥사단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일부 신흥 관료집단이 민주국민당에 합세하면서 1955년에는 선명한 거대야당인 민주당이 탄생하였다.

4.19에서 5.16으로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은 국내의 유일한 수권정당으로 발돋움 하였다. 하지만 민주당의 수권능력은 당대의 정세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2공화국 체제에서 민주당이 택한 역할은 4.19를 주도한 학생세력 및 혁신세력의 에너지를 억압하고 순치시키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구파와 신파의 분열 속에서 민주당은 일관적인 정책추진의 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며, 학생세력과 혁신세력을 필두로 새로이 부상하던 노동운동-농민운동-통일운동 등 기층 민중역량의 요구들에 응답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 파쇼통치로 그들을 완전히 탄압-분쇄 할 역량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허약한 후발자본가계급 자체의 본질적 한계였다.

한 편, 이승만 정권 말에 탄생한 새로운 종류의 자본- 즉,  관료자본은 더더욱 직접적인 정부주도 경제건설 정책과 저임금-저곡가 정책, 일정한 보호무역 정책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관료자본이란 적산불하와 정부가 제공한 특혜 통해 이윤을 축적하고 정부조직과의 결합을 통해 성장한 재벌집단, 즉 ‘주요 사업부문이 직접적 산업생산부문에 치중되어 있으며 제국주의 자본에 의한 직접종속보다는 반식민지 국가기관을 매개로 한 간접종속의 형태를 띄어 제국주의 자본으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던 종류의 자본’이었다.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태생부터 반식민지적 국가기관과 결합하고 의존해야만 했으며 제국주의 금융자본에게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종류의 자본’이기도 하였다.

제2공화국의 민주당 내각들은 이러한 관료자본과 기존 매판대자본들에게 후발자본가들과의 이익균점을 강제할 힘도 없었지만, 동시에 신흥 관료자본이 요구하는 수준의 범국가적 지원을 제공할 의지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력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하고 관료자본가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 박정희 정권이었으며, 제3공화국이었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내세우던 국가재건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이었나? 국가경제 내의 매판적 부문을 일부 규제하거나 혹은 관료자본가들에게 흡수 시키고, 후발자본가들을 관료대자본에게 위계적으로 종속시키며, 제2공화국 당시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민중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여 저임금-저곡가 정책을 관철시키고, 국가의 전면적 경제개입과 지도편달정책을 통해 관료대자본에 대한 전략적이고 총력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 세력은 적절한 대응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2공화국 시절부터 지속되어온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은 무한한 이합집산으로 이어졌고, 박정희와의 대결에서 윤보선은 그 어떤 효과적인 대중적 구호나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한일기본조약 반대를 두고서도 온갖 찬반 방침들이 난립하였다. 또한 후발자본가 집단 내의 일부세력 또한 박정희의 개발정책 하에서 관료대자본과의 수직통합 관계를 통해 일정한 이득을 챙기는 등 당의 물질적 기반 자체가 분열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무력함과 혼란, 쇠퇴 속에서 민주당 세력은 다시금 사회경제적 재편을 앞두게 되었다.

신민당과 양김의 등장

박정희 정권 하 민주당 세력의 재편은 두 가지 계기를 지니는데, 그 중 첫 번째 계기는 후발자본가 계급의 분화 완료였다. 박정희 정권의 제1차 5개년계획이 완료되고 제2차 5개년계획을 앞두던 시기에 후발자본가 계급은 관료대자본의 독점체제 하에서 특정한 종속적 지위를 보장받고 부분적 이윤이라도 공유받는 집단과, 혹은 이러한 구조에서 배제 내지 과잉수탈을 당하는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전자는 관료대자본의 완전한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후자는 일종의 민족자본가 집단으로 재탄생하였다. 물론 이러한 민족자본가 집단은 매우 허약했으며 관료대자본의 독점 및 대미-대일 종속 체제에 맞설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자신들의 생존 및 타세력과의 교섭을 위한 재-정치세력화를 추구할 역량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민족자본가 집단의 정립은 1967년의 신민당 창립, 즉 민주당계 세력들의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신민당은 일련의 친미노선과 한미기본조약 존중, 자유시장경제, 반공 등의 우익적 강령을 주장했으나 동시에 독점방지, 건전재정, 차관재검토 등 관료대자본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 또한 내세우는, 온건한 형태의 반독점-민족자본 보호 노선을 취하였다. 이것은 갓 정립된 민족자본가 계급의, 허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적  요구의 표현이었다.

두번째 계기는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탄생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이촌향도 정책과 경제개발 정책 하에 도시에는 전문직, 화이트칼라 관리직, 자영업자 등의 새로운 집단이 크게 부상하였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불만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경제 전반의 독점심화와 종속심화 속에서 자신들의 소사업체나 전문적 지위를 박탈 당하고 노동계급이나 도시빈민으로 전락 당할 실존적 위협에 놓여 있었다. 수출우선정책으로 인한 하이퍼 인플레이션, 재벌 중심의 신용정책으로 인한 중소상공인의 자금조달 상황 악화 등 또한 이들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주된 불만 중 하나였다.

기성 신민당 지도자들이 정부와의 타협 및 교섭, 기회주의적 작풍에 물들어 있었을 무렵,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정치적 명망가들은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간의 정치적 동맹이라는 새로운 헤게모니 창출 수단을 발명하였다. 양김의 조직정치에 의해 당내로 유입된 광범위한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은 기존 신민당 주류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었고 활동적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력의 유입은 신민당 전체를 뒤흔들었다. 7대 대선 후보로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대중이 선출되었고, 김대중은 기존 신민당의 주장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그가 내세운 대중경제론은 강력한 민족자본 보호, 기간산업에 대한 국가지도, 노동자 경영참여, 수입대체산업화, 외자통제, 농촌현대화 등 민족자본가와 소부르주아를 넘어 노동자와 농민까지 하나의 전선을 묶고자 하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해당 대선에서 김대중은 45% 가량의 지지를 확보하며 기존에 민주당계 정당이 얻어본 적 없는 광범위한 대중동원에 성공했다.

물론, 대중경제론은 관료독점자본에 대한 몰수나 국유화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근원적 종속구조, 미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력에 대해 전면으로 문제 삼지 않았기에 본질적으로는 개량적이고 중도반단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김대중이 전민중적 헤게모니를 창출하려 하면서도 그 핵심세력-주력군을 민족자본가로 간주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동원되는 조력군으로 간주한 지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민족자본가 계급이 본질적으로 내포한 기회주의가 표출된 현상이다.

7대 대선에서의 김대중의 선전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도출했다. 첫 번째 결과는 기회주의적이고 정권에 타협적이었던 유진산 지도부가 타도되고 명확한 선명야당 노선이 확립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을 중심으로 이철승 등의 세력이 주류로 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김영삼은 완전한 대여투쟁론을 주장했다면, 이철승은 유진산 체제의 기회주의와 과도한 타협론은 비판하면서도 정부와의 협상 여지를 열어놓는 인물이었다. 결국 이철승이 소위 중도통합론을 주장하기는 하였어도 선명야당이라는 기획 자체는 이미 신민당에서 막을 수 없는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 결과는 김대중이 신민당 내의 비주류 거물이라는 이중적 입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신민당 내에서 김대중은 확실하게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자 주요한 명망가 겸 조직가로 받아들여졌지만 그와 동시에 김대중이 대선 시기에 보인 다소 급진적인 노선은 당 주류파의 경계를 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유진산을 타도하고 새로 들어선 선명적 주류파는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당 유입을 긍정하고 대정부 강경노선에는 찬성하였지만 김대중과 김대중이 동원한 세력의 기획, 즉 노동자와 농민을 포괄하는 체제개량적 기획에는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이후 이어진 8대 대선에서 민주공화당과 겨우 득표율이 4% 밖에 차이 나지 않는 굉장한 성과를 얻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이 시점부터 후일 양김 간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균열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10월 유신과 박정희의 몰락

7대 대선에서의 김대중의 대중동원, 그리고 8대 대선에서의 신민당의 선전은 박정희 정권을 매우 당혹시켰다. 또한 보수정당 분석 편에서 살펴 보았듯이 브레튼우드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과 서독의 재부상으로 인해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감퇴 되어감에 따라 남한의 관료독점자본은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현상극복을 위해 더욱 강력한 수준의 정부주도 자본집중과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 탄압을 위한 임금억제, 그리고 국가역량의 총동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의 총합이 결국 10월 유신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제권리의 파괴와 파시스트 통치의 고도화-전면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신민당 내에서 가장 강력한 탄압을 당한 것은 역시나 가장 정권 입장에서 골치아픈 정치적 위치를 지니고 있던 김대중이었다.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김대중은 갑작스럽게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된 후 무기한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후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민주구국선언 사건 이후의 재감금 등 반복되는 탄압을 겪으며 정치활동이 극도로 제약되었다. 이후 유진산이 당수직에 복귀했고, 신민당이 사실상 정치적으로 마비된 상태에서 유진산 지도부가 여러 차례 박정희 정권과 영수 회담을 가지며 정권에 협조하였다. 김영삼 또한 복권된 유진산 지도 체제에서 다시금 당내 비주류 파벌로 밀려나고 말았다.

유진산이 암으로 사망하고 김영삼이 총재직에 오른 후에도 신민당의 역량은 쉽게 재건되지 않았다. 당권을 쥔 김영삼이 다시금 대여투쟁을 시도하자 1976년에는 이철승이 차지철의 지원 하에 김태촌 등의 정치깡패를 동원해 사실상 무력쿠데타에 가까운 형식으로 당을 장악 후 다시 ‘참여 하의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정권에 대한 협력을 진행하였다. 이철승 체제가 깨진 것은 1979년, 양심수들에 대한 전사회적 석방 요구가 고도화 되고 전국적으로 물가가 급등하여 전국적인 반정부여론이 거세진 후의 일이었다.

대중적 반정부감정과 김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79년 전당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은 다시금 선명한 대여투쟁을 시작했다. 김영삼 지도부는 2차 오일쇼크 이래로 터져나온 대표적인 노동쟁의 사건인 YH투쟁 당시 이례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표하며 시류에 발빠르게 올라탔고, 이에 진노한 유신 정권이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결국 경제난과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누적되어 왔던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부산과 마산에서 광범위한 대중항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정권에 의해 소외 당했던 부산경남지역의 민족자본가들, 도시 소부르주아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유신정권타도를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시도를 매우 경계하던 미국과 CIA는 더이상 박정희 정권을 엄호해주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동년 10월 26일에 정권 내 내분으로 인한 암살 사태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다.

제5공화국과 신한민주당

박정희의 사망 이후 서울의 봄 정국에서 신민당은 제대로 된 정치적 능력을 보이지 못하였다. 신민당은 철저히 의회 내에서 민주공화당과의 교섭에만 집중하였고, 서울의 봄 당시 학생시민대중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보다는 오히려 학생시민들을 훈계하며 군부를 자극하지 말라는 식의 입장을 낼 뿐이었다. 이 지점에 있어서는 김영삼과 김대중도 딱히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양김 모두가 시위대에 자제를 요청했다. 바로 이 모호한 태도로 인한 민주화 세력 간의 공조 실패는 군부의 암약에 대한 인민대중의 전면적인 압박을 방해했고 결국은 5.17과 12.12의 성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재야 및 학생 세력의 고립을 통해 결과적으로 신군부에게 봉사한 신민당의 소극성은 민족자본가 자체의 계급적 지위에서 발현되는 기회주의적이고 결단력 없는 정치적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도 쉽게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을 일으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되었다. 신민당은 강제 해산 되었다. 의회의 야당 지정석은 신군부가 앉혀 놓은 관제야당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결국 독재시기 민주당의 정치, 즉 민족자본가-소부르주아 동맹의 정치는 지배체제의 논리 안에서 협상 가능한 공간을 찾으려 하지만, 그 지배체제 자체가 협상의 여지를 두지 않을 때마다 무력하게 무너지는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 해왔음이 이 과정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제도권 야당의 부재 속에서 실질적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대정부 투쟁을 이어간 것은 양김에게 배신 당한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이 점차 성장해가며 정권을 위협하자 전두환 정권은 사회적 불만을 순치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제도권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해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민당의 후신 되는 신한민주당의 재건이 가능했던 제반 조건이었다.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의 성과가 제도권 야당의 재건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1985년에 창당된 신한민주당의 특징은 가신정치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직접적으로 정치참여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사저를 중심으로 모여 지령을 받는 사실상의 가신 정치인들이 신한민주당에서 양김의 의사를 대리하였고, 김대중의 동교동계, 김영삼의 상도동계, 그리고 이철승-이민우와 같은 중도타협세력이 당을 반분하였다. 이윽고 치뤄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은 재야운동의 전폭적인 조직지원과 유세지원을 받았다. 당대 재야운동 내의 문익환-백기완 등 인사들은 신한민주당의 온건성-소극성을 인지하면서도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기 위해선 제도권과의 유기적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사고하였다.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얻어 관제야당들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부터 재야운동 내의 온건세력은 민주당계 정당들의 가장 주요한 우군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신한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재야운동세력, 즉 빈민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농민운동 등의 운동진영을 전략적으로 동원해야 한다는 계급동맹적 사고관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신한민주당의 지도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계급동맹은 동원주체가 피동원대상이 위계적으로 배열되는 형식으로만 사유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 신한민주당의 대중 공약과 선전 내용은 기존에 7대 대선 시기나 YH 사태 당시에 비해 크게 후퇴하였는데, 재야 세력의 조직화 도움에도 불구하고 신한민주당은 12대 총선에서 직선제 개헌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재확보라는 몇 가지 제도적 공약만을 제시하였다.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금융자율화,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수입자유화, 외자규제 철폐 등의 종속심화 정책에 대한 뚜렷한 반론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70년대에 대중경제론을 제시한 김대중 또한 이 시기에는 대중참여경제를 주장하며 민간 대중의 경제적 참여와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강조 정도의 메세지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는 삼저호황 시기 물가가 정상화 되면서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급진성이 순치되고 민족자본가 계급이 독점심화 정세 속에서 허약화 된 정세와 연결된다. 반면 노동계급의 저항과 계급의식은 8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진화 발전 중에 있었으나 이러한 노동계급의 의식은 신한민주당의 계급적 본질 탓에 당의 정치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 시기 재야 운동의 역량은 탁월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경우 학원자율화 투쟁을 기점으로 하여 수천명의 학생이 구속된 건대 항쟁으로, 노동운동의 경우 구로동맹파업에서 서노련과 인민노련의 결성으로, 민족민주운동의 경우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의 결성과 개헌서명운동으로 급속히 대중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범국민적인 반정부 여론, 반정부 역량이 상승 강화되어갈 무렵, 신한민주당 내에서는 거대한 파국이 발생한다. 이민우 구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직접정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실무자로 내세운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는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상승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기존의 당론을 뒤집고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 등만 해결되면 전두환 정권이 밀고 있는 내각제 제도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민우 구상은 대중들과 직접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신한민주당의 가신정치가 도출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는 거대한 돌풍을 몰고왔다.

김영삼, 김대중 등을 따르던 의원들은 자신들이 대변하던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요구, 그리고 자신들이 전략적으로 동원하고 있던 재야운동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신한민주당을 탈당, 직선제 개헌을 전면적으로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당계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건설했다. 통일민주당은 기존 신한민주당의 대다수 지지층을 흡수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강력한 직선제 요구의 흐름을 가로막기 위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과 4.13 호헌사태 등을 일으켰으나 결국 대중의 강력한 반발을 찍어누를 수는 없었다. 재야운동이 주도한 5.3 민주항쟁을 시발탄으로 하여 이어진 6월 민주항쟁에서는 광범위한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과 도시 빈민, 노동계급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전두환 정권은 결국 개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후 이민우가 정계에서 은퇴하며 신한민주당 세력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하지만 보수정당 편에서 지적했듯이, 직선제 개헌은 통일민주당과 신군부 세력 간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진행되었다. 통일민주당 세력은 대중의 위력을 끝까지 밀고 가 정권과 완전한 대결을 펼칠 의지가 없었다. 직선제 개헌은 신군부와 통일민주당 인사들 간의 소위 8인회담이라 불리는 헌법제정협상을 통해 논의되었는데, 해당 협상에서 도출된 안건에는 재야운동 진영에서 요구되었던 노동권 보장, 기본권 확립, 집회시위의 완전한 자유화, 광주정신계승 등 조항을 찾아볼 수 없었고 이후 출범한 제6공화국에서도 파시스트 통치의 핵심도구였던 국가보안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후 진행된 노동자대투쟁, 억눌려 있던 노동자 계급의 전국적인 총파업과 투쟁 속에서도 통일민주당은 그렇다 할 입장을 내지 않았다.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 합의해서 적당히 잘 분규를 해소해주길 바란다는 원론적이고 방관적인 주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6월 항쟁에 앞장 선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또한 노동자대투쟁을 외면하였다. 그렇기에 노동자대투쟁은 구체적 제도적 변화라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내부적 계급역량의 축적 계기로는 성공하였다. 

양김분열과 삼당합당

통일민주당은 직선제 개헌으로 출범한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분열을 맞이하였다. 외면적으로는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장악하고 있던 당 조직 하에서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문제 삼던 김대중의 탈당화 평화민주당 탈당이라는 순수정치적 요소, 혹은 지역감정적 요소가 부각되지만 실질적으로 이는 제도권 민주화 정당의 이념적 분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김대중 휘하의 세력에는 그와 정치적 동맹을 맺은 재야운동 인사와 조직들이 적지 않았다. 김대중은 신민당 시절부터 지속되어온 자신의 당내에서의 비주류적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당외의 재야운동 세력을 등에 업고 광범위한 개혁블록을 형성하려 하였고, 이는 김대중의 경제적 비전이 대중경제론에서 대중참여경제론으로 후퇴한 상황에서도 기층민 집단의 권익 향상과 경제성장과실의 균점이라는 일정한 사회개혁적 요소들이 김대중의 대선공약에 반영되는 계기로 작동하였다.

반면 김영삼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김대중의 광범위한 계급동맹에 선을 그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적 핵심기반은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으로 동일했으나 정치의 구상에 있어서 김영삼은 이러한 기반을 관료대자본과 상위 소부르주아 계급으로까지 확장하려 한 반면 김대중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 등으로 확장하려 한 것이었다. 결국 양김의 분열은 민족자본가-도시 소부르주아 간의 계급동맹이 주류 블록으로 세력을 확장할 것인지 혹은 기층민중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것인지를 두고 대립한 이념노선적 투쟁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양김의 분열로 인해 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승리한 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노태우-전두환의 민주정의당과 삼당합당을 결의했다. 노태우-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은 무엇이었는가? 일관적으로 관료대자본의 이익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파시스트 정당이었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관료대자본 지배체제를 충청지역에서 대리하면서도 5공화국 시기의 몇몇 정치적 범죄들을 비판함으로서 신군부 인사들을 순치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부산경남지역을 중심으로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김영삼이 대변하는 부산경남지역의 민족자본은 다른 지역과 달리 관료대자본 발달의 중심지인 경북 산업벨트의 축과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집단이었고, 정권의 적극적 투자와 경제적 동맹의 계기가 있다면 경북 산업벨트에 대한 접근성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6공화국 출범 이후로 광범위하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노동운동의 위력은 부산경남지역의 민족자본가들을 정치적으로 보수화 시키는 계기로 작동하였다. 김영삼의 삼당합당 참여는 일어날 수 없는 정치적 이변이라기 보단 철저히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 하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다. 민주자유당의 결성은 관료대자본과 부산지역 민족자본가, 그리고 일부 상류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간에 새로운 정치블록이 결성되는 계기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상도동계나 부산경남지역의 재야운동 출신 정치인들이 이탈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상도동계 전체의 정치적 역량에 타격을 입히는 수준의 분열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의 민주파는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계열 인사들에 대한 점진적 숙청을 진행하는 한 편, 임기 후반 인기가 떨어진 노태우의 공안탄압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노태우에게 그의 옹위를 대가로 차기 대권을 약속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초기에는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일정하게 반영하였다.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 확보라는 금융실명제의 명분은 경제구조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지만 그 투명성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적 요구였다. 기존의 가명-차명 거래로 이득을 보는 건 대부분 관료대자본이었으며, 그로 인해 조세 부담이 전가되고 부패 구조가 온존하는 피해를 보는 건 주로 도시 소부르주아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의 하나회 청산,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공직자 재산공개 등을 비롯한 일련의 5공청산작업 또한 김영삼이 기존에 대변하던 세력과 기반의 요구에 가까웠다.

허나 점차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와 파업 중 대체근로를 허용하는 형태의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해외자본의 유치를 자유화 하며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를 대거 철폐하는 등 관료대자본의 요구를 반영하였다. 한총련과 민주노총을 초법적으로 탄압하는 등 공안탄압 또한 끊이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파시스트 정당 내에서, 그리고 청산되지 않고 잔존해있는 국가기구 내 파시스트 요소들 내에서 수권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일관적으로 관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위 ‘세계화’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압박 또한 김영삼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삼당 합당은 신군부와 구분부의 파시스트적 성향을 순치시키기 보단 그것들을 일정하게 개혁하면서도 김영삼 세력마저 큰 틀에서는 파시즘 정치의 일각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도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외자본 유치 자유화와 자본시장 규제철폐는 김영삼 정권 말, IMF 사태라는 사상 전례없는 규모의 공황, 즉 관료대자본의 본질적 무정부성과 미제국주의의 약탈성, 그리고 공황의 타격을 근로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한 파시스트 국가기구의 무책임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충격적 사태로 이어졌다.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 

삼당합당, 김영삼과의 맞대결에서 패배, 정계은퇴 선언과 복귀라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김대중의 정치적 경향성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일관적인 우경화였다. 이 시기의 김대중은 대중참여경제론마저 폐절하고는 뉴 DJ 플랜이라는 이름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대중경제론이 좌익 민족주의적 개혁주의 노선이었다면 뉴 DJ 플랜은 토니 블레어의 뉴 레이버 노선, 즉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일정하게 사회복지망을 병진시키는 정책노선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재벌구조의 문제나 종속성의 문제는 더이상 다루어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는 신군부 정권과 노태우-김영삼 정권 하에서 추구된 재벌자유화-수입개방의 흐름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두 번째는 재야운동에 대한 이례적인 영입 및 포용 정책이었다. 김대중은 신민주연합당의 창당 과정, 그리고 정계은퇴 후 복귀 과정에서 신계륜, 이해찬, 김근태 등을 비롯한 광범위한 재야운동 진영 인사들을 영입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에는 온건 재야 출신 뿐만이 아니라 급진적인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마저 포괄적으로 영입대상에 두기도 하였다. 이는 김대중 본인과 당노선의 우경화와는 일견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제 더이상 본인이 재야운동의 요구를 평화의제 외에는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지만 당 자체의 스펙트럼은 더욱 확장적으로 넓힘으로서, 정치적 리스크를 최소화 하면서도 재야운동과의 동맹체제 자체는 확고하게 굳히고자 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의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는 재야운동가들에게 일종의 정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철저한 가신정치의 지속이었다. 김대중은 정계은퇴 상황에서도 동교동계 가신들을 이용해 당무에 간섭했으며 확고한 동교동계 이너서클을 유지하였다. 김대중의 이러한 정치적 작풍은 당내에서 부산경남 출신 인사들 및 재야운동 출신 인사들과의 적지 않은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눈 여겨봐야 할 지점은 이기택 체제인데, 김영삼에게 패배한 김대중이 정계를 은퇴하고 동교동계가 당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정치적 구심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주도권은 부산경남 지역의 개혁적 소부르주아 정치네트워크를 대변하던 이기택이 쥐게 되었다. 이기택은 이부영이나 제정구 같은 재야운동 출신 인사, 그리고 노무현이나 김원기 같은 상도동계 이탈파 인사들을 직접적 우군으로 두고 있었고, 이러한 개혁적 소부르주아와 재야운동의 연합체로 출범한 이기택 지도부는 이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띌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공약은 기존에 김대중도 전면화 하지 못했던, 파시스트 통치기구의 핵심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 회담론 또한 당대의 정치기구에서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과정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이 새정치국민회의로 대거 이탈하자 이기택의 야당 주도력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이후 이기택의 정치적 동맹들만이 남은 통일민주당은 이기택이 부산경남 지역에서의 정치적 생명 유지를 위해 한나라당으로 합류하자 나머지 재야출신-혹은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97년 대선에서 김영삼을 꺾고 집권한 김대중은 집권을 전후로 이종찬 등의 민주정의당 계열 인사를 영입하고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세력과 연합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김대중이 IMF 사태로 인한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을 억압하고, 구조조정된 기업들의 자산을 현대와 삼성 등 소수의 관료대자본들에게 몰아준 일련의 정책기조들은 명확한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킨다. 김영삼이 그랬듯이 결국 민주당을 이루는 계급적 세력, 즉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간의 정치동맹은 관료대자본에게 맞설 정치적 역량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국 관료대자본에게 협력하고 협조하는 형태로만 수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김대중 정권에서 재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김영삼 및 그의 세력과 달리 김대중 정권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완전히 파시스트 정치에 침습되지는 않고 자당의 계급적 본질을 유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블록은 집권 정국에서는 필연적으로 관료대자본이 그어놓은 선을 지켜야만 했고, 또한 전두환-노태우 사면과 보수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그 선을 적극적으로 지킬 용의가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물론 김대중 정권이 일관적으로 관료대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남북화해정책은 민족자본가의 경제적 야망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분단체제 하에서의 식민지 파시즘적인 반민족통치에 반발해온 기층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고, 국가보안법 적용대상 축소와 양심수 석방은 국가기구에 잔존한 파쇼통치적 요소를 순치시키려는- 민족민주운동의 반파시스트적 제요구들을 일부나마 수용한 것이었다. 재벌부채비율 축소요구 또한 비록 소부르주아적 형태의 개혁이었지만 분명히 관료대자본에게 일정한 강제를 부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동맹은 김대중 정권 내내 관료대자본의 독점체제와 미제국주의에 의한 종속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였고, 그들이 추진 가능했던 개혁들은 미국의 반식민지 통치와 관료대자본의 인내심 안에서 포용될 수 있는 개혁들 뿐이었다. 그것이 김대중 정권의 한계였으며 그 후 노무현과 문재인, 이재명 정권에게도 계승되는 한계들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대분열

노무현 돌풍은 무엇이었나? 동교동계의 민주당 장기수권에 본질적 균열을 낸 노무현의 경선승리와 대선승리는 두 가지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첫 번째는 민주당 내의 일정한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노무현은 경선 승리 과정에서 당내의 386 영입인사들 및 재야운동 인사들에게 조직적인 지지를 받았다. 노무현을 주로 지원한 집단은 기존에 반부패와 당혁신을 내걸고 정풍운동을 벌였던 이들로, 민주당 내의 기성 가신정치를 혁파하고 재야운동의 의제를 더욱 강력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는 청장년층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전격적인 직접동원이었다. 소위 노사모라 불리는 친-노무현 대중운동집단은 기존 민주당의 조직네트워크를 거치지도, 재야운동을 통한 간접적 동원과정을 겪지도 않은 채 대중 개개인이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지도자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정치공간에 동원되었다. 노사모의 주된 구성원은 젊은 대기업 화이트칼라 직원, 교사, 변호사,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이었다. 즉 기존 민주당의 주된 지지기반인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이라는 틀 안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으나 사무직 상층프롤레타리아를 일정하게 포괄했으며 조직 동원방식 상으로, 그리고 동원하는 세대 상으로 기존과는 차이가 있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주요공약은 행정수도 이전, 부동산 규제, 한미 간의 수평외교, 그리고 재벌 개혁이었다. 행정수도 이전론은 관료대자본의 이해와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고, 부동산 규제의 경우에도 관료대자본 자체를 겨냥한다기 보다는 토건부문의 경제적 조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민감한 집값 문제를 겨냥하는 공약이었다. 한미 간의 수평외교는 당대 반미여론이 폭발하고 있던 기층 민중의 고도화된 의식을 후험적으로 반영한 것이었고, 재벌개혁의 경우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장하고 관료대자본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는 내용이었는데 소액주주 권익보장의 경우 분명하게 민족자본가와 소부르주아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나 관료대자본의 확장규제의 경우 관료대자본들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충돌을 방지하는 성격이 강했다.

한 편, 노무현 정권은 집권 후 기존 민주당 세력, 특히 동교동계 가신세력과 적지 않은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시대적 흐름과 연결된다. 세계화와 개방 정책, 그리고 IMF를 거치며 전통적인 김대중 세력의 호남 민족자본가 집단은 매우 약화 되었고, 전국적으로 보아도 민족자본가는 하청체제에 종속되어서만 생존할 수 있는 매우 빈약한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은 민족자본가와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간의 정치적 동맹 내에서 더이상 자신들이 보조적 측면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고, 민족자본가-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동맹 내 주도권 대결이 민주당 내에서의 일정한 투쟁과 분열로 외화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노사모를 통해 정치적으로 동원된 상층 화이트칼라 노동계급이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과 정치적 동일체로 자리잡고, 민주당 내의 재야운동세력들이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주도력에 힘을 실어주자 민주당이라는 대립물의 주요측면과 부차적 측면이 서로 교차되는 과정에서 대북송금 특검사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협조와 열린우리당의 창당이라는 사선이 발생한 셈이다.

이후 노무현 탄핵시도 사태를 거치며 열린우리당은 민주당계 정당들 내에서의 완전한 주도권을 손에 쥐게 되었으며, 제17대 총선에서는 부산경남지역의 개혁적 소부르주아 정치 네트워크들을 완전히 흡수하며 제2공화국 이래 민주당계 정당 최초로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리고 해당 총선에서는 소위 ‘탄돌이’라 불리는, 현재까지 민주당의 핵심엘리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386 인사들이 의회에 대거 입성하였다.

총선 이후의 열린우리당은 수많은 세력들이 난립하는 빅텐트 정당의 성격이 지극히 부각되었다. 김대중 시기부터 유입 되어온 재야운동 출신 인사들은 김근태의 개량주의-좌익민족주의 강령 하에 당내에서 일정한 축을 형성하였고, 구 민주당에서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의 인사 또한 노무현 정권의 부산경남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핵심 친노세력과 거리를 두었다. 총선 승리를 위해 영입했던 보수적 테크노크라트들은 당과 청와대의 노선을 사사건건 비판하며 자신들의 독자적 방향성을 내세우려 했다. 사실 친노 핵심세력들도 이념노선 문제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정책과 진보적 사회개혁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 공개정파등록제를 시행했던 열린우리당에는 가히 10개에 가까운 회파들이 구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권은 핵심 정책문제를 제외하고는 당에게 자율적으로 의회 내 교섭과 법안추진을 전개하라며 구체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교동계의 가신정치와 한나라당 파시스트 집단에 반대하는 조건 하에 범계급적-범지역적으로 연합한 열린우리당이라는 신흥 빅텐트 정당 속에서, 정권의 핵심 축이었던 부산경남의 개혁적 소부르주아들과, 노사모를 통해 우발적으로 동원된 무정형의 대중들에게는 확고한 정치강령을 통해 동맹세력들을 영도할 역량이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상당수의 민중운동역량이 민주노동당을 축으로 재편됨에 따라 더이상 정권은 재야진영을 손쉽게 동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러한 한계는 노무현 본인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무현 정권은 주체적 수권역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수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대자본과의 끈끈한 밀착과 결합을 수용하였다. 노무현 정권의 대다수 경제정책은 삼성그룹 미래기획실에서 하달되었고, 인사기용에 있어서도 미래기획실의 일정한 지침을 따랐다. 이는 민족자본가와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동맹이 실제로 집권했을 때 결국은 관료대자본이 제시한 정치적 틀을 따를 수 밖에 없게 되는, 남한 정치의 보편적 법칙과도 연결된다. 노무현 정권은 전작권 문제에 있어서 일정하게 미국과의 대등한 외교를 시도하려 한 적도 있지만, 결국은 미국과 관료대자본의 압박에 굴하여 당내에서의 거대한 반발을 감수하고서 한미 FTA와 이라크전 파병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기할 지점은 관료와 군부의 전면적 항명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김대중 정권 당시에도 외교통상부 관료들의 항명과 재정경제부의 명령 불복종 등이 일어났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김대중 정권이 민주정의당계 인사를 영입하고 자민련과 동맹을 맺는 등 범보수세력과 협조를 중시했기에 관료들의 집단적 항명이 비교적 적었다면, 노무현 정권은 다른 정권들처럼 전적으로 국가행정의 주도권을 쥐려 했기에 국가기관 전체의 반발을 얻었다. 외교부 고위관료들은 노무현 정권의 외교노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대미 협상 보고체계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하려 하였고, 검찰도 노골적으로 정권의 사법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군 또한 문민화 및 군개혁 시도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일삼으며 정권을 겁박했다.

우리는 흔히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국가권력을 쥐는 것이라고 믿지만, 국가기구는 그 자체의 동역학에 따라 기능한다. 시행령과 명령, 지시 등은 관료조직에 저항할 의사와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 그렇기에 관료조직에게 정치적 목적을 강제할 물리적-대중적 힘과 조직 내 기반이 있어야만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기간 동안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가권력을 사실상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소위 ‘민주화’ 이래로 전혀 청산되지 않은, 국가기구 내의 파시스트적 부위들이 매우 강성한 반개혁적-종미적 강령을 바탕으로 민선권력을 억제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 사회개혁의 포기와 대미투항, 그리고 관료조직의 집단적인 항명은 노무현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07년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출마한 정동영은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에게 두 배 차이에 가까운 득표율로 패배하며 민주당의 정치적 파산이 증명되었다.

 문재인의 당 재건

이후 민주당은 오랜 분열의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민주당의 지지집단은 사실상 와해 되었고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민주당을 사실상 재건설한 것은 문재인이었다. 정계를 떠났다가 복귀한 문재인은 그 자신의 상징성을 통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원한과 트라우마로 뭉친 노무현 친위그룹 네트워크를 재구축했다. 뿔뿔히 흩어지고 정치적 구심점을 잃었던 친노 집단은 문재인을 중심으로 재규합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8대 대선에 도전한 문재인은 박근혜를 상대로 나름의 성과를 거두며 민주당 재건의 시발탄을 쏘았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이 동원한 것은 소위 ‘수도권 중산층’, 즉 서울-경기도 지역의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과 사무직 노동계급의 정치적 통일체였다. 이들은 과거 노무현 정부를 파멸시킨 파시스트 세력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실질 가처분 소득과 고용사정 에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의 당내정치에 핵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주체로 유입된 수도권 중산층 집단은 이후 문재인이 구 동교동계 세력과 천신정 세력, 그리고 친노 그룹 내의 반 문재인 세력을 몰아내고 당의 통일성을 확보함에 따라 새로운 민주당의 가장 주요한 지지 축이자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기존의 민주당이 대변하던 민족자본가 집단은 민주당 지지기반의 비교적 보조적이고 조력적인 역할로 밀려났으며 지역 소부르주아 계급 또한 주변화 되었다. 386 세력이 이념적으로 완전히 순치된 상황에서 문재인과 핵심 친문 그룹을 중심으로 재건된 민주당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는 민주당의 묵인 하에 통합진보당이 공안탄압으로 강제 해산된 상황에서 제반 진보역량이 매우 후퇴하였고, 민주당의 입장에서도 수도권 중산층이라는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한 상황에서 더이상 기층역량을 동원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기층 노동운동의 힘으로 박근혜가 탄핵된 후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첫째는 소득주도성장이었다. 소득주도성장이란 무엇인가? 포스트케인지언경제학의 임금주도성장 모델에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포괄하여 개조한 형태의 정책노선이다. 구체적 정책은 최저임금 인상, 카드수수료 인하, 근로시간 단축, 부가세 공제 확대, 실업급여 강화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대체적으로 임금상승 압력의 수혜를 많이 받는 대기업 사무직 노동계급과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이었다. 허나 문재인 정권은 노동권/교섭권 문제와 관료독점자본에 의한 시장지배라는 문제, 그리고 건물주에 의한 임대료 폭리수취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았기에 구조적인 해법을 도출할 수 없었고, 코로나로 인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임금압을 버티지 못해 퇴출위기에 처한 자영업자 집단이 민주당 진영에서 대거 이탈하고 말았다.

둘째는 남북화해정책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은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데 성공하였으나, 동시에 문재인 정권은 미제국주의가 일방적으로 요구한 비현실적이고 망상적인 ‘즉각적 비핵화’ 테제를 거스르려는 의도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권은 북한에게 약속한 남북경협재개를 이행하지 않고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에 협조하길 멈추지 않음으로써 대북관계에서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고 협상을 파탄으로 이끌고 말았다. 이는 미제국주의로부터의 정치경제적 독립과 주권 재확립 없이는 한반도 평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의 증명이었다.

셋째는 검찰개혁이었다. 민주당의 핵심지지층은 양승태의 사법농단에서 증명 되었듯이 국가기구 내에 잔존한 파시스트적 부위의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강력한 구성요소인 검찰에 대한 타격을 요구하였고, 이는 검찰 수사권 박탈이라는 구체적인 입법과제로 현실화 되었다. 민주당의 검찰개혁은 일종의 반파시스트 투쟁이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반파시스트 투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연대연합을 강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정권의 틀 안에서의 몇 가지 행정적-입법적 조치들로 검찰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오판을 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민주당은 파시스트 검찰에 의한, 민주당 인사들에 대한 연쇄적 수사로 인해 여론적 타격을 입고 말았으며 결과적으로 검찰개혁을 완전히 마무리 하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목표의 실현 실패는 결국 정권재창출의 실패와 윤석열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의 당에서 이재명의 당으로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의 파시스트 쿠데타가 민중의 힘으로 좌절된 후 내란청산의 열망을 품고 탄생한 정권이다. 이재명 정권의 임기는 아직 초반기에 속하지만, 몇 가지 특수한 지점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이재명 정권은 노동운동 내의 온건세력을 친위집단으로 포섭하고자 한다. 이재명 정권은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김영환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였고, 노랑봉투법을 수용했으며, 그 이후로도 노동계가 요구하는 몇 가지 정책들을 순치된 형태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이재명 개인의 정치성향 보다는, 물질적으로 재림할 뻔한 파시스트 통치에 대한 경각심에서 비롯된, 반파시스트 전선의 일정한 강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나 동시에 이재명 정권은 삼성노조의 파업에 대해 과거 유신 시기에 노동운동탄압을 위해 쓰이던 제도인 긴급조정권 사용을 고려하는 등, 본질적으로는 노동계급운동의 성장을 견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로, 이재명 정권의 경제정책은 과거 박정희 정권을 연상시킬 정도로 개발주의적이다. AI-반도체 사이클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부 챔피언들, 즉 첨단부문의 관료대자본들을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지원하고 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한 편, 정책금융과 금리조정, 금융 관련 시행령 등을 통해 부동산을 억제하고 부동산에 묶인 자금을 생산적 자본시장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다. 동시에 이재명 정권은 국민정책펀드나 대통령 발언, 관련 미디어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주식 구매를 권장하고, 상법개정과 주주권리강화라는 조치들 속에서 급상승한 코스피로 인한 이윤을 적극적으로 주식을 구매한 대중들에 대한 수혜로 이어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기술패권경쟁에서의 집약적 자본투입을 위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상층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경제 독점체의 주주로 만들어 그 자신의 실제 계급과 의식을 유리시키기 위한 기획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권이 내세우고 있는 일련의 경제정책은 최근 적지 않은 서구 국가들이 시도하고 있는 금융억압-국가전략산업투자 정책의 일환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국가개입은 공공부문의 형태보다는 오히려 관료독점대자본과 국가 간의 더욱 끈끈한 결합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결코 개혁적인 방향이라고 볼 수 없다.

셋째로, 이재명 정권의 내란청산 기조는 그 성립 과정에서 공언한 것들과 달리 매우 미온적이다.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의 파시스트 친위쿠데타에 동의하거나 이를 묵인한 광범위한 규모의 장성과 지휘관들을 인적으로 청산하기 보다는 몇몇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며, 검찰개혁 또한 결국 검찰 수사권 박탈이라는 과제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조직 자체의 인적 청산에는 그 어떤 적극적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실질적 요소보다는 절차적/형식적 요소의 개변을 중시하는 소부르주아적 정치작풍을 반영하는 것이다. 부실선거로 인해 촉발된 잠실과 올림픽 공원에서의 극우 폭동과 내란옹호 선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진압을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파시스트들의 반헌법적-반민주적 위협을 두고만 보고 있는 현행 이재명 정권은 사실상 내란청산, 즉 국가기구 내에 잔존한 파시스트적 부위의 대규모 청산이라는 반파쇼적 요구를 유기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재명 정권의 정책은 국가개발주의와 생산적 금융, 반도체 빅테크들에 대한 경제역량 집중, 그리고 기존 엘리트 집단을 분쇄하기 보단 오히려 그 자신들이 집단 내로 편입되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재명 정권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말로를 맞이할까?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당의 구-민주주의로는 결코 다가오는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설 수 없으리라는 점 뿐이다.

 우리는 민주당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민주당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어째서 민주당을 지지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대다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결국 파시스트 정치세력 및 파시스트 관료세력에 대한 거대한 반감, 민주당이라면 이들에 맞선 투쟁과 청산을 제대로 집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권은 내란청산이라는 문제에 있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모습만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사실 이러한 우유부단성, 정치적 기회주의와 허약성은 민주당이 집권할 때마다 언제나 반복되어온 패턴이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러한 무력성은 결국 민주당이 민족자본가와 도시소부르주아의 정치적 동맹체라는 역사적 한계로부터 도출되어온 한계이다.

마오쩌둥은 식민지 국가의 민족자본가 계급이 결코 혁명을 영도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논하였다. 어째서인가? 식민지 국가의 민족자본가는 계급 간의 역학 속에서 매우 세력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진동할 수 밖에 없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남한 사회의 민족자본가와 소부르주아들은 준동하고 있는 파시스트들을 청산하고 관료독점자본과 미제국주의에 맞서 민중의 이익을 관철할 수 없는 집단이다. 진정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의 주도 하에 기층운동의 역량이 수직적으로 동원되는 작금의 구조를 깨고, 노동계급이 농민과 소부르주아, 민족자본가를 영도하는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세력이 단순히 민주당을 거대양당으로 묶어 양비론을 펼치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어째서인가? 첫째로, 반파시스트 투쟁이 노동계급의 가장 직접적인 이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파시스트청산-내란청산이라는 구체적 민중의 요구를 도외시하고 민주당과 국민의 힘을 모두 ‘균형 있게’ 비판하는 방향성은 결국 파시스트들을 정당화 하고 그들에게 명분을 주는 형태로만 기능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민주당의 주된 계급적 기반인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 잔존한 민족 자본가 계급, 그리고 상층 사무직 노동계급은 장기적으로 노동계급이 우군으로 포섭해야만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단순히 절대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순간 일련의 통일전선적 과업들은 사멸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민주당 정권의 행보에 협조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성일까? 그렇지 않다. 민주당은 결국 노동계급운동을 비롯한 기층 운동의 역량을 자신들이 손쉽게 동원한 후 버릴 수 있는 형태로 방치하는 패턴을 역사 내내 보여왔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그 자신이 사회제집단을 영도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정치이지, 누군가와의 영합과 정치적 통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안은 무엇인가? 민주당의 기회주의-자유주의 정치를 노동계급의 혁명정치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의 지지자들을 우리의 지지자로 만들어야 한다. 파시스트에 맞선 투쟁과 청산이라는 간결하면서도 절박한 요구를 제기하고 있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보수양당의 주구라며 배척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것은 결국 파시스트들만을 이롭게 하는 반역적이고 퇴행적인 노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을 우리의, 노동계급 정치의 우군으로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는 간단하다. 노동계급 정치세력이 내란청산과 반파시스트 투쟁에 더욱 적극적이고 유능하며 급진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야 한다.

즉, 노동계급 정치세력의 과제는 구름 위의 신선이라도 된 것처럼 양당 간의 충돌을 비웃고 냉소적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반파시즘 투쟁의 최선봉에 서서 성과를 내고, 스스로의 비전을 증명하며, 민주당의 소극성과 무능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각각의 정세들에서 민주당과의 상호독립적 연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점차 노골화 되어가는 극우의 위협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기층 대중들에게 있어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 대해 파시즘을 가로막기 위한 비전과 방책을 제시하고 파시즘에 맞선 투쟁 전선에서 민주당을 뛰어넘는 적극성을 증명해 반파쇼 대중들에 대한 영도력과 헤게모니를 창출하려 단계적으로 노력하는게 곧 진정한 반민주당 투쟁인 것이지, 민주당에 대한 일방적이고 정념적인 비토나, 과도한 환상에 가득 찬 무제한적 협력노선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이미 거대한 전선이 그여져 있고, 그 전선에서의 복무가 모든 정치행위를 결정 짓는다.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 관료독점자본과 노동자계급, 미제국주의와 민족해방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진보정당이 파쇼세력과 기회주의적 반파쇼세력 간의 ‘중간 세력’이자 ‘양측에 대한 비판자’로 자리잡으려는 일련의 시도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시스트 세력에 대한 부역이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 관료독점자본과 이에 결탁한 파시스트 정치세력 및 관료세력,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우군으로 남아있는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노동계급 정치세력이 거침없이 뛰어들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계급 내에서의 리더십을, 그리고 노동계급 외의 수많은 피억압 계급계층에 대한 영도력을 쌓아나가는 것만이 오늘날의 노동계급이,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이다.

이 사회 내에서 부상하고 있는 파멸적인 극우파시즘의 물결을 막아 세우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민주당과 충분히 동맹을 맺을 수 있으며, 양비론을 벗어나 실재하는 전선 위에 서서 실제 민중들의 급진적 요구를 대변할 때 노동계급 정치세력은 비로소 전민중을 영도하는 헤게모니 정치의 주체로 부상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계급이 전 사회의 피억압 계급계층 대중을 영도하고 그들과의 동맹을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해 혁명을 이룩하는 진정한 의미의 노동계급 정치이며 진정한 의미의 혁명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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