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 무엇을 통해서 실현되는가? 정치를 통해서 실현된다. 당의 조직, 강령의 제시, 선전, 선동, 대중운동의 추동, 전쟁, 혁명 등 모든 것은 정치에 속한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의 본령은 정치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천변만화한 세계 속에서 적과 아군을 규정하고 적을 격멸하며 아군을 늘리는 것이다. 즉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은 대결과 투쟁의 적대선을 사회 속에 긋는 것이다. 모순의 각 국면마다 적과 아군을 새롭게 규정하여 역사의 발전에게 방해되는 적을 분쇄하고 반면에 역사의 발전을 옹호하는 당파성을 지닌 아군들을 고양시켜 역사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돌리며 과거의 낡은 모순을 새로운 모순으로, 낡은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이행시키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적대선을 긋는 정치를 올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될까? 올바른 인식이 요구된다. 우리와 대립하거나 협력할 수 있는 또다른 정치적 주체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정치적 주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계급 간의 힘의 역학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정확한 인식을 얻지 않으면 우리는 올바른 적대선을 그을 수 없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구분하겠는가? 그렇듯이 사회 내의 각 세력들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정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적을 찾을 수도 아군을 찾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세 개의 대표적인 정치세력들에 대해 규정하고 그들의 성격과 적대선 상에서의 위치를 해명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가장 먼저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보수정당을, 그 다음 글에서는 더불어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민주당계 정당을, 마지막으로는 현재 진보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들을 규명하도록 하겠다.
보수정당의 연속성
국민의 힘과 국민의 힘이 역사적으로 계승해온 보수정당 세력의 역사적 기원은 무엇인가? 짧게 본다면 삼당 합당일 것이다. 신군부 정당 민주정의당과 구군부 정당 공화당, 그리고 제도 내 우익 자유주의 정당 통일민주당 간의 삼당 합당은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우익정당을 도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이 군부정당들의 극우적 선명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극우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던 노무현, 김부겸, 이부영, 이우재 등의 정치인들은 민주자유당계 정당들을 이탈했으며, 박근혜 지도부 시기에는 통일민주당 출신의 계파집단이었던 상도동계도 박근혜 지도부를 옹위하고 박정희 노스텔지어에 적극 협력하며 군부세력의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수정당의 사회적 성격과 그 이데올로기는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의 군부 정당들과 연속성을 지닌다고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군부 정당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역사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건국과 이승만체제
반식민지 남한의 건국은 미제국주의의 후견을 받았던 두 계급, 즉 매판자본가와 몰락해가는 봉건지주들 간의 정치적 동맹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건국’은 일제 패망 직후 고도로 성장하였던 농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조선민중의 자치기구였던 지역별 인민위원회들의 거대한 저항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저항을 해소하기 위해 파시스트 독재, 즉 금융자본에 의한 반민주적 테러독재를 추진하였다. 다만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식민지 파시즘 정권들에 있어서 그 파시즘의 주체인 금융자본은 식민지 국가의 금융자본이 아니라 언제나 미제국주의의 금융자본이었다.
남한 식민지 파시즘의 주된 레파토리는 어용화된 형태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문화적 애국주의로 위장된 미제에 대한 실질적 굴종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초기에는 조선민족청년당 등 고전적 파시즘의 수사를 사용하는 자들이나 전진한, 조봉암과 같은 계급협조주의자들을 동원해 계급타협의 의향을 내비추며 대중의 불만을 완화하려 하였지만 민중세력에 대한 일정한 소탕이 완수된 이후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 초기에 동원하였던 고전적 파시스트들과 계급협조주의자들을 숙청하였다. 물론 금융자본의 테러독재라는 파시즘 정권의 근본적 성격 자체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금도 청산되지 않았고, 다만 정권의 수사와 프로파간다만이 ‘자유민주주의’로 교체되었을 뿐이다.
이승만 집권시기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는 지주계급의 몰락에 있었다. 기실 지주계급은 남한의 탄생 직후부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지주계급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이 일제의 패망에 의해 쫓겨나고 그들의 토지를 소작농들이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남한의 탄생 시점에서 지주계급은 비록 매판자본의 정치적 동맹으로 존재했으나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는 중이었고, 더욱이 농민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며 정권에게 토지개혁을 압박하자 이승만 정권은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지주계급을 배반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해야만 했다.
물론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은 대다수 반식민지 정권의 토지개혁처럼 상당히 불충분한 형태를 띄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정보는 집행 이전에 이미 사회 전체에 유포되었으며 지주들은 이를 통해 미리 자신의 토지를 빼돌려둘 수 있었다. 지역 관료들을 매수하여 토지개혁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도 있었으며 정보력이 없던 농민들에게 토지개혁 직전에 막대한 금액으로 토지를 팔아버리는 경향 또한 존재했다. 또한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 하에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막대한 빚을 떠안아야 했다. 그렇기에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은 지주소작제 자체를 결정적으로 패퇴시키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남아있던 한국인 대지주 상당수를 해체하는 성과 정도는 거두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제국주의와 매판자본, 봉건지주와 한반도 민중 전체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해당 전쟁에서 민중들의 군대가 토지문서나 채권문서를 불태우고 남은 지주들의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 조치를 감행함에 따라 지주계급은 사실상 사회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수준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지주들은 존재했으나 그들마저도 향후 박정희 시대의 저곡가정책, 이촌향도정책 속에서 분해되었다.
관료자본의 형성과 박정희 정권
그와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적산불하 정책과 삼백산업 정책은 자본 내의 새로운 집단, 즉 제국주의 자본의 상품이나 자본을 단순 중개할 뿐인 매판자본으로부터 더 나아가, 반식민지 국가기관의 수탈적 원시축적에 의해 형성되어 반식민지 국가기관을 매개로 제국주의 세력에 간접종속되어 있는 산업자본인 관료자본, 즉 소위 ‘재벌’을 탄생시켰다. 관료자본은 직접적 생산부문에 치중되어 있으며 제국주의 자본에 의한 직접종속보다는 반식민지 국가기관을 매개로 한 간접종속의 형태를 띄어 제국주의 자본으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관료자본 또한 본질적으로는 태생부터 국가기관과 결합하고 의존해야만 했으며 제국주의 금융자본에게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종류의 자본이었다.
이러한 관료자본은 매판자본과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업하면서 이승만 후기 정권을 뒷받침하는 지배블록을 형성하였다. 관료자본은 일정한 보호무역(식민모국이 허용하는 정도 내에서)와 국가의 경제개입 확대를 요구한 반면 매판자본은 완전한 자유무역과 불개입정책을 요구하는 등 이해관계의 차이가 존재했으나 좌익세력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대한 파시스트 테러독재를 통한 전면적 탄압, 그리고 강력한 친미정책이라는 측면에서는 일관적인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합의는 향후 한국 보수정당의 이념적 원형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장면 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이 수립되면서 매판자본과 관료자본 간의 균형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고도의 국가개입과 농촌착취, 산업에 대한 재정적 지원, 파시스트 통치의 복원, 강력하고 일관된 정부를 염원하던 관료자본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 바로 박정희의 쿠데타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더이상 매판자본과 관료자본 간의 대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매판자본들을 더이상 지배블록의 동등한 일원이 아닌 정권의 하위파트너로 격하했으며, 이병철을 수배하는 등 관료자본 내에서도 매판적 부문들을 일정하게 단속하기 시작했다. 상공부의 신흥엘리트를 양성하여 경제기획원으로 대표되던, 매판자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국가기관 내 일부 부문들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보수정당 또한 박정희 정권 속에서 크게 변화하였다. 박정희 정권에는 매판자본이 아닌 관료자본을 대변하는 정당이 요구되었고, 구 자유당 잔당과 민주당계 일부 인사들이 선별되어 민주공화당의 창당 주체로 발탁되었다. 관료와 군인 출신들이 정당 내에 전진배치 되었고, 구 조선민족청년단 인사들도 적지 않게 등용되었다. 일부 혁신인사들도 등용되었으나 그들 대다수는 여러 차례의 정치파동들을 거치며 당내에서 숙청 당했다. 족청계 잔당과 혁신인사 등의 등용은 계급단결-계급협조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확립시키기 위함이었으나 그들의 주장이 정책적으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일관적으로 농촌착취를 통한 저곡가, 노동착취의 고도화를 통한 저임금, 이촌향도 정책과 강력한 국가경제개입, 지도편달을 통한 특정 부문으로의 자본집중, 미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차관과 대출을 통한 광범위한 유동성 공급을 통한 고도 산업화 정책을 펼쳤다. 허나 박정희 정권의 정책적 경향이 일부 변화하는 계기가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10월 유신이었다.
유신체제
1971년 당시, 닉슨의 금태환중단으로 인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는 국제금융시장을 고도로 불안케 만들었으며 특히 달러 변동환율제 도입은 다른 제3세계 개발독재 정권과 마찬가지로 외채 의존도가 높던 박정희 정권에게도 직접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일본, 서독 등 전후 재건국들이 본격적인 수출경쟁자로 부상하면서 단순 경공업 및 제철/콘크리트 등 초기적 중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는 성장의 한계가 명확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압력에 대한 관료자본의 대응은 중화학공업화였으나, 중화학공업화는 몇 가지 조건을 선행조건으로 하였다. 첫째, 중화학공업화는 기존 남한 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국가투자를 요구했다. 둘째, 중화학공업화는 장기적이고 일관적인 정책을 요구하였는데 야당이 부상하고 김대중의 지지율이 크게 증가하던 당대의 남한 정치는 일정한 불안요소로 작동할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중화학공업화는 더 강도 높은 노동착취와 저임금 유지를 필요로 했는데, 고양되는 노동운동이 이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파쇼적 탄압의 전면화가 요구되었다. 넷째, 중화학공업화를 위해서는 아랍 지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원료 공급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존 외교정책의 일정한 변화와 외교적 다각화가 요구되었다.
이것은 모두 파시스트 통치의 고도화 및 전면화와 식민모국인 미국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 확보가 요구되는 과제들이었다. 그렇기에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 1972년에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10월 유신의 실질적 내용들은 의회의 실질적 무력화와 대통령 권한의 절대화, 선거의 요식행위화, 공안정국의 상시화였다. 한 편, 수사적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 이후로 민족주체성과 양키문화배격, 한국적 민주주의 등을 내세우며 미국으로부터의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작업에 있어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통해 기존 노동운동에 대한 절대적 탄압 기조를 앞세우는 동시에 사회복지사업법 제정과 농촌현대화 지원을 진행하여 기층 민중의 불만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진행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이윤균점원칙을 도입하고 소위 ‘독과점 기업’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진행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자본규제나 정책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자본집중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들을 옥죄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중화학공업 부문에 대한 자본투자를 거부한 총수들은 밀수 혐의로 묶어 줄줄이 처벌당했으며, 중화학공업화라는 일대과제에 협조한 관료대자본들은 천문학적인 지원금과 특혜, 세제혜택을 받았다. 즉, 이러한 ‘독과점 기업 규제’는 독과점의 완화 보다는 오히려 독과점 및 관료대자본의 경제지배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혹시 모를 주한미군 철수 우려에 대비하여 남한 체제를 영구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핵개발에 착수하였으며, 아랍문제에 있어 전향적으로 친 팔레스타인 기조를 강화하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해 중화학공업을 위한 원료수급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하였다. 관제 반미데모를 펼치고 민족문화를 함양하겠다는 이유로 미국식 소비문화를 대량규제 하였으며 남북공동선언을 관철시키고 동구권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노력하는 등 박정희 정권은 탈미 외교기조를 보이는 듯 하였으나 이러한 탈미 기조는 본질적인 층위에서 추진된 정책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동안 미국에 대한 금융적 종속을 해소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수입부문을 대체하거나 국부유출을 차단하려는 시도를 벌인 적 없었다. 오히려 유신체제 기간 동안 남한의 전체 경제부문에서 미국 및 일본에 대한 하청수출의 비중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두 국가로부터의 외자도입은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매년 막대한 규모의 국부가 차관이자와 기술 라이센스 비용, 로열티 등의 명목으로 서구와 일본에 빨려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한미동맹의 불평등조항들을 해결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남북 간의 종전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친미성향의 관료와 테크노크라트들은 대량 등용되었다. 총론적으로 볼 때에 유신체제는 수사 상으로, 문화 상으로, 그리고 외교의 일부 부문 상으로 탈미기조를 추구했으나 경제적으로, 거버넌스적으로, 산업적으로는 대미종속을 심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제한적 자율성의 추구마저 미국은 용납하지 않았고, 기존 박정희 체제 내에서의 인권문제들을 늦게나마 재점화 시키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이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백악관은 박정희 정권을 강력하게 압박하였다. 주한미군과 CIA는 더이상 박정희에 협력하려 하지 않았고, 미국에 의한 주한미군의 일방적 철수가 거론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안정성이 급속도로 추락하였다.
또한 부품수출 제한을 통해 중화학공업 정책을 노골적으로 견제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더이상 미국의 힘을 빌려 내부적 불만을 억제할 수 없었고, 거기에 정책실패로 인한 초인플레이션 현상까지 겹치자 유신체제는 부마 항쟁과 10.26 사태를 기점으로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관료자본과 그 계급적 대변인은 스스로에 내재한 본질적 종속성 탓에 진정한 자주성을 추구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의 보위 없이는 반식민지 체제의 내부모순을 봉합할 수 없으므로 종속이라는 틀 안에서의 제한된 자율성 추구마저도 식민모국의 의사에 의해 쉽게 분쇄될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전두환과 신군부
미국은 박정희 정권을 인권문제를 들어 압박하였지만 인권 문제는 미국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은 직후 신군부의 쿠데타를 묵인 내지 지원했으며 CIA 한국 지부장은 후일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 당시 CIA의 최대 성과였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백악관 기밀해제 문서를 보면 광주항쟁 당시 백악관 내에서 전두환 정권의 ‘질서 확립’이 필요하다고 논하기도 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체제 당시 추구되었던 종속 하의 자율성 테제마저 폐기하고 미국의 요구를 거의 무한히 받아들였는데, 이를테면 금융자율화와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수입 자유화와 외자규제 철폐 등의 정책이 대표적이었다.
중화학공업과 중공업부문에 대한 국가주도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도축된 자본들의 시설과 기술은 주요한 관료대자본들에게 무상 내지 사실상의 헐값으로 인계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료대자본들의 시장지배와 독과점화는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관료대자본들이 산업은행이나 국가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직접 해외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산업 전체의 금융종속성이 심화되었다. 대우는 제너럴모터스와, 현대는 미쓰비시와, 삼성 및 LG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및 AT&T와 합작사업을 전개하면서 경제종속의 형태가 다변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수정당 또한 일정한 재편성 과정을 거쳤는데, 구군부 인사의 숙청과 민주정의당으로의 재집합 과정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내걸던 일련의 구호들, 이를테면 민족주체성이나 양키문화배척, 한국식 민주주의 등의 테제들이 다시금 ‘자유민주주의’로 대체되었다. 일련의 구조조정 속에서 몸집을 키우고 살아남은 거대한 관료대자본들은 정권과 더욱 밀접한 형태로 결합하게 되었으며 세계화나 시장경제와 같은 구호들이 전면화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유신관료들은 그대로 남거나 영전하고 공안탄압과 군사통치에 대한 정당화, 광적 반공주의 등의 테러독재적 요소들은 민주정의당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 편, 5.18 직후의 전두환 축복기도회와 한기총을 통한 개신교우익들의 집합을 기점으로 개신교는 단순히 정권에 의해 동원되는 것을 넘어 보수정당 내에 개신교 아젠다를 전파하고 이념적 영향을 끼치는 지배블록의 일원으로 격상되었다. 향후 대형교회의 조직력에 바탕한 정치적 개신교우익은 보수-파시스트 정치세력의 주요한 기지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이는 기존 보수정당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점차 기독교적 가치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같은 서구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어가는 과정의 주요한 기점이었다.
87년 체제와 3당합당
이승만 정권과 구군부 체제, 그리고 신군부 체제를 거치며 일관적으로 유지되어온 저임금 정책과 노동탄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이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전투적 노동운동의 가파른 성장은 정권에 대한 거대한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거기에 더해 선도적 학생운동의 성장과, 군부파시즘 체제에 질린 중산층의 민주화 요구는 정권의 핵심 지지블록을 해체시켰으며 결국 신군부는 내각제를 통한 연착륙과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포기하고 기층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아무런 보장 없이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직선제 개헌을 두고 신군부의 민정당, 김영삼의 상도동계, 그리고 김대중의 동교동계 간에는 소위 8인회담이라 불리는 헌법제정협상이 이루어졌는데, 해당 협상에서 도출된 안에는 민주화 진영에서 요구되었던 노동권 보장, 기본권 확립, 광주정신계승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정당 국회의원이자 8인 회담의 일원이었으며 후일 DJP 연합의 일환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게 된 이한동의 말에 따르면 87년 헌법은 박정희가 만든 ‘제 3공화국 헌법’을 주로 참고하였다. 기실 87년 헌법은 3공 헌법 외에도 유신헌법의 요소들도 대거 복구시켰는데, 이를테면 공무원 노동조합 금지, 대통령 긴급명령권, 국가배상제한 등이 대표적이었다. 공안기관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민중운동을 규제하기 위한 집시법의 제정도 함께 합의되었다. 그야말로 밀실에서 만든 헌법이었다. 파시스트 독재의 핵심부품인 국가보안법은 ‘민주화’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으며 유신체제와 신군부체제 하에서 양성된 공안 엘리트들은 청산되지 않았다.
이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통치 안정성을 위해 3당 합당을 추진하였다. 민주정의당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과 통일민주당이 합류한 3당 합당을 거치며 구군부 세력을 대변하는 신민주공화당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김영삼 통일민주당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신군부 세력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 하에 순치되었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사상적 체계성이나 일관성은 결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반공주의와 시장경제(정경유착 하의) 숭배, 재벌체제의 긍정과 민중운동에 대한 적대, 광적인 친미주의라는 일정한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있어 효과적이었다.
구군부 세력에 기반한 신민주공화당은 취약한 조직적-정치적 기반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당합당에 응해야만 했다. 구군부 및 신군부 체제 하에서 파시스트 통치에 맞서 자유주의의 언어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던 김영삼 세력의 경우 더욱 복잡한데, 이들이 본래 신군부와 고도의 정치적 적대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변하던 부산-경남 지역의 중견규모 민족자본가들은 노동자대투쟁 이래로 노동운동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그룹 해체 이래로 진행된 부산-경남 지역의 산업쇠퇴 속에서 정권에 참여해 이권과 특혜를 얻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김영삼 통일민주당 세력은 그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3당합당에 응할 수 밖에 없었고, 3당합당을 전후로 부산 지역에는 대규모 인프라 및 금융규제 완화가 제공되었다.
물론 통일민주당-상도동계와 그 외 세력 간의 민주자유당 내 갈등 및 충돌은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역사청산 문제, 하나회 숙청 문제, 금융실명화 및 공직자 재산공개 문제 등이 대표적이었다. 또한 3당합당 및 그 이후 과정 속에서 민주자유당을 이탈한 상도동계 인사들 또한 존재했다. 허나 이러한 갈등은 점차 신한국당 시대, 한나라당 시대를 거치며 순치 내지 이탈을 통해 처리되었다. 특히 김영삼 정권 당시 이루어진 광범위한 공안탄압과 그 정당화 과정은 상도동계의 보수성을 전면화 하였다.
결정적으로는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를 역임하던 당시, 이회창에 의해 대규모 숙청을 당했던 상도동계는 이회창에 맞서기 위해 박근혜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이후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은 친박연대 및 박근혜캠프를 거치며 아스팔트 보수세력과 결합하며 사실상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투항하게 되었고 박근혜 정권 이래로는 상도동계 인사들과 민정당계 인사들 간의 이념적 차이는 실질적으로 소멸하였다.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민주자유당과 그 후신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87년 체제의 청산되지 않은 파시즘적 부위로 남아있다. 매카시즘, 공안탄압, 냉전적 사고관, 재벌체제 옹호 등의 이념적인 측면 외에도 이들이 군부 파시스트 체제 내에서 관료대자본과 맺은 관계들, 파시스트 언론들과 쌓은 신뢰, 그리고 공안엘리트 및 광범위한 친군부 계통의 테크노크라트들과의 정치적 동맹을 생각해볼 때 이들의 파시즘적 본질은 위장되었을 뿐 청산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87년 체제는 파시즘의 청산이나 민주혁명의 완수라기 보단 파시스트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 간에 이루어진 중도반분의 타협에 의해 도출된 대립물의 통일체이다.
오늘날의 보수정당
국민의 힘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보수정당은 특정한 지점에서는 약화되고 있지만 특정한 지점에서는 강화되고 있다. 약화되고 있는 지점은 수권에 대한 독점적 능력이다. 본래 남한의 국가기관은 전통적으로 늘 보수정당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그렇기에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보수정당과의 협상을 거치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행정권한의 발휘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정부를 거치며 민주당은 점차 독자적 수권 역량을 갖추고 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테크노크라트들, 그리고 이제는 재계 내에서도 형성된 일정한 민주당에 협력적인 블록이 이를 방증한다. 민주당의 수권역량강화는 곧 국가기관과 사회전반에 대한 보수정당의 영향력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영향력의 약화는 인재 풀과 조직 풀의 약화로, 당 자체의 전문성과 역량의 약화로, 궁극적으로는 수권능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체제를 유지하고 제계급세력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관료자본의 요구를 정책적으로 관철하는 능력은 오늘날에는 보수정당이 민주당에 비해 열세에 놓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강화되고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박근혜와 윤석열의 탄핵, 부정선거 음모론의 전파, 청년층의 우경화, 개신교우익의 급속 성장을 계기로 보수정당과 그 유관조직들의 대중동원력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배외주의 및 안티페미니즘의 심화는 이들의 아젠다가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어 굉장히 좋은 환경을 구축해주고 있다. 당과 유관조직, 동맹블록 간의 피드백루프는 국민의힘 자체의 우경화를 매우 강력하게 추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비록 선거정치에는 악영향을 끼칠지언정 동원능력과 사회 전반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작에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의 파시스트성이 노골화, 전면화 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중일각의 호응이 나름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위협적인 현상이다.
또한 비록 민주당이 국가기관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사법부에 한정해서는 여전히 보수정당의 영향력이 강하다. 검찰은 박근혜-윤석열 정권 내내 공안탄압과 반대파탄압, 민주주의 파괴공작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민주당 정권의 사법개혁에 극렬히 저항하고 있다. 조희대를 비롯한 판사집단은 연이은 사법농단과 사법내란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과 당파성을 노골적으로 전 사회에 드러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은 이들에 대한 전면적 청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중이다. 사법부 외에도 군 내에 보수정당의 파시스트 아젠다를 따르고 지지하는 세력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 또한 지난 내란정국을 통해 드러났으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전개되어야 할 숙군은 이재명 정권 하에서도 큰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이들이 단순 미국숭배를 넘어 트럼프와 MAGA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며 극우개신교와 음모론의 세계관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는 사태에는 대중동원과 핵심지지층 단속이라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당의 수권역량향상에 맞서 미제국주의 식민모국과 관료자본, 그리고 사회주류세력에게 충성경쟁을 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존재한다. 이들의 변화는 국민의힘 지지층 전체의 사고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들이 언제든 폭력적 형태로 완전한 테러독재를 수립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난 윤석열 내란 사태와 서부지법 폭동 사태를 통해 완전히 증명되었다.
결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때, 남한의 보수정당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테러독재를 펼쳐왔을 뿐만 아니라 87년 이후에도 내부청산이나 질적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파시스트 집단이다. 이들은 재계와 관계, 언론계, 그리고 군부와 종교계로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동맹 네트워크를 지니고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최근에는 점점 더 자신들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노골화, 고도화, 전면화 하고 있는 위험세력이다. 그러므로 보수정당이라는 집단은 남한 노동계급과 민중의 필연적 타도 대상이자 제 1의 적이며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파괴하려 하는 호전적 반민주주의 집단이다. 민중진영에게는 보수정당을 타도하고 분쇄하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과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전선의 구축이 요구되고 있으며, 단순한 보수양당론으로의 환원은 아무런 전략전술적 통찰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증명되었다.
본문에서는 의도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억제하였는데, 그것은 이 기획연재의 다음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다음 글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을 분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