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의 시대에 자유인으로 사는 법
우리는 과연 자유로웠던가
파국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의 영역 중 우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 작다. 많은 이들이 불안과 우울을 호소한다. 굳이 현 체제에 예리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는 좌파가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 살아가는 한 오늘날 많은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추상적인 형태로나마 직관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그 직관은 옳다.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기후위기의 위협은 더이상 뉴스 기사나 책, 과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피부를 통해 느껴지고 있다.
과연 기후위기 뿐인가. 그 어떤 기만적이고 보수적인 언론사도 오늘날의 세계질서가 위험한 상황에 치닫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마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대전과 핵전쟁의 위협은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부르주아 언론은 국제정세 상의 위협을 군국주의와 종미주의를 선전하고 정당화 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지만, 적어도 그들마저 오늘날의 세계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허위 진술은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이, 전세계적 양극화는 고속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분명 기술은 가파르게 성장한다고 말해지는데도 대다수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인간 노동자를 인공지능으로 대체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수많은 기업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발화되고 있다.
어째서 우리 인류는 작금의 상황에 놓인 것인가. 분명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배우고 주입 받아온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는 내부의 문제를 토론과 합의를 통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은 자연스럽게 균형점에 이르고, 시장실패가 일어나더라도 국가가 시장을 조정해서 자기파괴적 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자유민주주의가 전세계에 퍼져나갈 수록 공존과 번영의 세계질서가 확대되고 전쟁은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유시장경제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우리의 선택권을 늘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은 선택의 자유이며, 그 선택의 결과만을 우리가 책임지면 된다고 말 해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말로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왔던가?
솔직하게 말하자. 우리에게 자유는 없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가 지닌 대다수의 시간을 기업에게 판매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판매할 가치를 늘리기 위한 훈련에 투입해야만 하는 조건 하에서 태어나고 자라오지 않았던가. 자유주의 의회정치는 다양한 신념이 경쟁하는 토론의 장을 표방하지만, 실상은 누가 권력을 쥐어야 하며 누가 생산을 통제해야 하는가 같은 본질적이고 이념적인 정치적 가치를 개인의 주관적 판단으로 유배시킨 채 실업률이나 경제 지표의 미세한 상승과 하락 같은 기술적인 관리 문제에만 몰두하지 않았던가.
이 사회가 우리에게 보장한다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국가보안법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의 자유,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자유 아니었던가. 투표와 후원, 소비자 운동, 개인적 정치참여, 시민단체 가입 등, 결국은 체제 내의 반대파, 통제 가능한 반대파로 전락될 수 있는 형태의 표현과 결사 외의, 진정한 변화를 추동하는 세력이 나타날 때에는, 결국 다원성과 차이를 존중한다는 이 체제는 파시즘과 공안기관을 불러들여 총칼로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우리는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비록 세계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도 개개인이 가족, 공동체, 커리어, 취미 등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희망을. 하지만 정말로 그 안에 자유가 있을까? 기후위기와 파시즘, 3차 세계대전의 위협이 우리를 피해갈까? 몰아치는 폭풍은 우리의 자그마한 행복을 위한 공간들을 결코 모른 채 지나쳐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스스로 살아가는 땅에 발을 딛고 세상의 법칙을 이해하며, 목적의식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해나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힘을 다른 이들에게 맡겨놓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것 외의 모든 자유는 추상적 자유이며, 개인을 단일한 원자로 바라보는 허구적 자유이고, 이 사회에 여태껏 우리에게 주입해왔던 환상 속의 자유이다.
허위의 자유만을 설파하며, 그 가짜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모든 변화를 틀어막고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전세계를 파국을 향해 이끌고 있다.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이 지구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가속하고 6차 대멸종의 전조를 불러오는 동안,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제3차 세계대전이 다가오는 있으며, 이 모든 환란 속에서 숏폼 컨텐츠와 소셜 미디어, 고도로 가공된 쾌락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파국 앞에 서게 된 우리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너무도 작고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과 우울이 수많은 이들을 지배한다.
허무주의와 파시즘이 배태한 혐오와 증오는 공동체의 지반을 붕괴시키고 있으며, 초 디지털 사회는 인간 간의 진정한 연결을 파괴하고 기존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환멸 속에서, 절망 속에서 죽어야만 하는가?
파국은 정말로 끝일까?
분명 다가올 미래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강요할 것이다. 현재의 세계도 분명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세계이지만, 당면한 파국은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알량한 위안들마저 뺏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 고통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물질의 운동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가 통곡한다고 해서 저 별들의 운행을 멈출까? 우리가 절망한다고 해서 저 역사의 맥동이 중단될까? 그렇지 않다. 마오쩌둥이 논하였듯이 만물에는 모순이 있으며 모순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다. 핵전쟁이 일어나고 기후위기가 닥쳐 더이상 인간이 정상적인 생활을 지구상에서 영위하기 어려워진다 하더라도 물질계의 모순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별들은 서로를 밀쳐내며 운동하고, 파국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파국은 새로운 모순을 낳고, 새로운 국면을 낳으며, 새로운 투쟁을 낳을 것이다. 이것은 물질세계가 우리에게 선물한 유일한 위안이다.
우리의 고통이 역사를 멈출 수 없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그 어떤 거대한 파국도, 그 어떤 반동적인 권력도, 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핵전쟁으로 지구가 초토화 되더라도 그 생존자들은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에 돌입할 것이며, 인류라는 종이 멸종하더라도 자연사는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수준의 지성을 지닌 종이 다시금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또 다시 억압을 만들어내고 착취를 만들어내고 그 무엇보다도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모순은 지양될 것이고,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낼 것이다. 미래는 영원을 향해 열려있다.
맑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지만, 자신이 원하는 조건 하에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인간의 의지는 그 조건을 딛고 앞으로 전진한다.
핵전쟁이 다가오고, 생태위기가 격화되며, 변혁세력의 주체적 역량은 지리멸렬하다. 인간은 결국 죽고, 우리 세대에 혁명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세상은 높은 확률로 피바다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오쩌둥이 말했듯이, 핵전쟁이 일어나도 인류사적 차원에서는 작은 일에 불과하며, 인류가 멸망해도 우주사적 차원에서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 제국주의자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그들이 역사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죽어도 물질은 진보한다. 지구가 터져도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투쟁하고 발전하는 물질의 일부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신체를 이루는 원자는 흩어져 흙이 되고 거름이 되고 미생물이 되고 플랑크톤이 될 것이며 또다른 물질의 일부, 또다른 모순의 일부, 그리고 자연사적 발전과 전진의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의 원자가 다시 의식을 지닌 생물의 형태로 뭉쳐질 것이고, 인류가 멸종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연은 또다시 스스로를 인식하고 개조할, 자연 자신의 가장 고등한 부위, 즉 자연을 인식하고 필연을 해부하며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하는 주체를 배태해낼 것이다.
인류라는 종의 전체가 사라지는 비극조차 우주적 차원에서는 낡은 세포가 탈락하고 새 세포가 돋아나는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미래의 내가 돌아갈 곳은 우리를 길러낸 흙이며, 핵폭발로 흩어지는 먼지이자, 지구가 폭파되더라도 수억 년 뒤 어느 행성에서 다시 피어날 지성체 종족의 세포이다.
지구가 터진다면 그것은 우주가 더 거대한 혁명을 위해 자기를 폭발시키는 축제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패배하여 정녕 멸망의 날이 온다 하더라도 그 때 우리는 이 육신을 벗어던지고 온 우주로 퍼져나가, 다음 세대의 투쟁 속에서 다시 새로운 지성체의 의식을 구성하는 원자가 되어 눈을 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지는 선택은 단 하나 뿐이다.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에서 당신은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개인으로서 소비사회가 부추기는 욕망에 따라,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말초적인 쾌락의 부스러기에 집착하며 실질적으로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노예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 우리의 이웃들의 삶을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역사를 전진시킨다는 확고부동한 목표를 위해 삶과 죽음을 바쳐 인류와 자연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영원히 투쟁하는 원자들 속에서 승리와 패배를 함께하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에 따라 자연과 투쟁한다. 인간은 자연과의 부단한 투쟁을 통해 자연을 개조하며 또한 인간 자신과 다른 인간들의 관계를 개조한다.
인간은 세계의 법칙과 필연성에 의해 지배받으며 살아간다. 유물론적으로 볼 때, 자연계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필연을 인식하고 인식을 통해 세계를 개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를 끊임없이 증대시킨다.
물리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은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을 수 있다. 사회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
현 시대의 인류는 이 사회의 모순들과 파국의 근원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러한 파악을 바탕으로 세계를 개조하여 제국주의자들의 상호 약탈전쟁을 막고, 자연의 물질대사를 계획적인 통제와 관리 하에 두어 기후위기와 대멸종을 제어하며, 무정부적 생산을 목적의식적 통제 하에 두어 무한히 공황과 위기를 반복하는 자유시장경제의 폭풍을 계획경제와 계획생산을 통해 인간의 의지와 목적에 복속시키고 빈곤과 실업, 공황을 사멸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인식과 실천, 학습과 개조와 연속은 그 실천을 가로막는 반작용과 개조에 저항하는 자연물 및 구사회의 세력에 맞선 투쟁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이 연쇄적인 투쟁의 끝에서 끝내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공산주의 사회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개별 인민이 생활 현장에서 체득한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집단의 원칙과 규율이 집체토론을 통해 추출되는 사회이다. 파편화된 개인의 욕망을 방치하고 반영할 뿐인 발산의 정치로는 보편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법과 원칙이 삶으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추상적 도덕률이나 훈시로부터 도출되는 방식으로는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 즉 법칙의 이해와 통제를 통해서 스스로와 세계를 규율하는 덕성을 체득할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집단의 결정은 집단 내부의 집체적 토론과 실천,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구체적인 행동강령의 형식으로 도출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보편은 객관적 정합성과 인민의 일반의지를 동시에 갖추며, 개인과 공동체를 완전하게 결합시킨다.
공산주의는 아래서는 개인과 집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해소된다. 인민의 삶과 실천에서 얻어진 진리가 곧 법의 유일한 규준이 되며 전인민적 소유제도 하에서 생산자가 직접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여 스스로의 노동을 스스로의 목적의식에 일치시킨다.
개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진리는 교리서나 법전 같은 외부적 요건에서 기인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의 존재적 조건에서 도출된다. 그렇기에 개인과 공동체 간의 모순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목적의식 자체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조사로부터 도출되기에 자유와 필연 또한 하나로 일치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생리적 상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만큼이나, '나는 우리의 정치를 실천한다'는 행동강령을 자연스러운 존재의 양식으로 삼게된다.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라는 이분법적 개념은 사라지고, 앎과 행동이 일치되는 지행합일의 사회가 구현된다.
이러한 정치는 사회주의 사회의 구체적 현장에서 당과 대중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실천된다. 공장과 농장 등 각 기층 단위는 집단적 진리를 도출하는 민주주의의 현장이 되고, 당은 수많은 기층에서 제기된 사회적 인식을 과학적으로 재조합하여 다시 대중에게 돌려주는 군중노선을 수행한다. 결국 대중은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주체로서 생산과 통치에 참여하며, 이 과정의 반복과 발전을 통해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인간의 자유를 극도로 증진하는 공동체, 즉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 구축된다.
자유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태껏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다른 목표를 위해 살아가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일종의 취미나 관심사 정도의 수준으로 사회적 문제에 개입하고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런 ‘참여’들이 정말로 충분한가? 물론 그러한 형태의 운동도 우리에게는 요구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광범위한 운동은 세상을 바꿈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체제를 정당화 하는데 기여하는 NGO, 대중을 뿌리부터 조직하거나 대안으로 묶어세우지 못한 채 의회 내로 갇히거나- 혹은 의회에서마저 쫓겨나고 만 제도권 진보운동들, 이런저런 ‘좌파 학자’들이 쏟아내는 현실과 무관한 담론들이 체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당장 하나의 현장에서 대중들을 조직하는 과업만 하더라도 한 활동가의 인생 전체가 필요하며 그 활동가를 훈련하고 길러낼 조직이 필요하다.
기존의 방식이 틀렸다면, 우리는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당당히 역사의 파국을 돌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쟁취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자로서 어떠한 삶의 원칙을 가져야 할까?
첫째, 우리는 우리가 타도해야 할 구 사회에서 나고 자랐으며 생활해온 구 사회의 잔재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 사회를 분쇄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자기 자신을 혁명해야만 한다. 구 사회의 낡은 편견, 습속, 행동양식, 이데올로기, 관념론적 사고관, 근거없는 믿음을 끊임없이 혁명하고 자신을 새로운 사회에 살아갈 첫 번째 사람으로 고쳐나가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는 발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대중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혁명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대중의 집단적 지성과 대중의 물리적 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개인이 아무리 이념적으로 무장한다 하여도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의미한 테러 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는 대중이라는 바다 속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쳐야 한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공간에서부터, 공산주의자는 끊임없이 대중을 설득하고 대중을 행동으로 이끌며 조직화 하고, 대중의 의식을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고양하기 위한 작업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먼저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
셋째, 우리는 끊임없이 조사하고 학습해야 한다. 맑스주의는 성경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다. 대중들의 의식수준과 요구, 불편사항, 문제의식, 사회적 구조, 계급 간의 힘의 역학을 조사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검증하는 과정에서만 맑스주의의 과학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 또한 공산주의자는 이러한 조사를 더욱 과학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맑스주의 이론과 이전세대 혁명가들의 경험을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학습은 맑스주의적 기초로부터 시작하되, 자신이 대중에게 선전하고 선동하고자 하는 내용이 적실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선전선동의 의제와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 지식을 쌓으려 노력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자부심과 긍지를 지녀야 한다.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작금의 시대에서, 공산주의자의 활동은 세상의 그 어떤 활동과 사업보다도 값진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이 무엇보다 값진 일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헌신할 각오를 해야한다. 공산주의자는 스스로가 역사의 담지자라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자신이 임한 거대한 사명에 일치시키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의무를 위해 삶과 죽음을 바칠 각오를 해야만 한다. 만약 자신이 혁명의 성공을 보기 전에 죽는다 하여도 그 후세대가 자신의 과업을 이어서 이뤄줄 것임을, 공산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운동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조직되어야 한다. 전위들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으며 반면 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다. 당을 건설하고, 대중사업과 정치사업을 전개하며 혁명을 추진하는 일련의 과정은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첫 발이라도 뗄 수 있다. 집단 속에서 배우고 조직 속에서 배우며, 목적의식적이고 노선과 비전을 지닌 형태의 조직 내에서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공산주의자로서의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이익보다 집단의 결정을 우선시 할 각오를 지녀야 하며,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주의적 습성을 당적 활동을 위해 스스로 개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며, 지구촌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깃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 삶 또한 그럴 것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가봤자 시대적 파국 속에서 불쏘시개로 전락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우리 함께 태산처럼 무거운 삶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