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론적 맑스주의 세계관의 제정립을 위한 테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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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론적 맑스주의 세계관의 제정립을 위한 테제들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이상들의 기저에는 맹목적 필연에 대한 반역의 의지, 즉 자유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이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상성의 부여와 이상의 실현을 통해 그 자신을 자유케 하는 역사이며, 동시에 즉자적 자연에게 이상성을 부여하여 자연을 맹목에 지배받는 즉자적 상태로부터 해방해 전체자연을 자유롭게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역사인 것이다

일원론적 맑스주의 세계관의 재정립을 위한 테제들

  1. 실체는[1] 하나이며, 자연이 곧 그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존재도 자연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는 자연의 의식적 부위이자 가장 고도화된 부위이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의 한 국면이고, 자연사는 인간사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놓는 이원론은[2] 틀렸다. 첫째로 이원론은 항상 그 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에 부딪힌다, 둘째로 심신이원론은 현대 뇌과학과 인지과학에 위배된다. 셋째로 심신이원론에 따르면 비물리적인 마음이 뇌의 뉴런을 움직이려면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물리계에 개입해야 하는데, 이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인 에너지 보존 법칙에[3] 위배된다. 넷째로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연 바깥에, 자연은 인간 바깥에 존재하여야 하지만 이는 기초적인 직관에 어긋나는 관점이다. 정신이 물질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 접점은 어디인가. 이 난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애초에 둘을 하나의 실체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체로서의 자연이다. 인간의 사유, 감정, 의식은 자연 바깥에서 온 별도의 원리가 아니라 자연 자체가 조직화된 방식 중 하나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와 별개의 영역으로 다룰 수 없다. 인간사는 자연사가 스스로를 의식적 부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이다.

  2. 물질은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형태만 전화한다. 개체의 죽음이나 소진은 존재에서 무로의 파열이 아니며, 개체의 탄생이나 발생 또한 무에서 존재로의 파열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물질대사적[4] 순환 속의 존재양식 전환이다. 에너지도 물질도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리학이 이미 확립한 사실이다. 이 원리가 존재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개체의 탄생과 죽음도 무에서의 도약, 무로의 추락일 수 없다. 그것은 물질이 취하는 형태의 전환일 뿐이다. 이 결론을 회피하려면 어딘가에서 "여기서부터는 물리법칙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예외가 적용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한 임의적 단절을 도입할 이유는 없다.

  3. 보편적 존재는[5] 특수한 존재의 바깥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은 오직 특수를 통해서만, 특수 속에서만 현실화된다. 인류라는 것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건 언제나 구체적인 개별 인간들뿐이고, "인류"는 그 개별자들을 통해서만, 그 개별자들 속에서만 나타난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추상적 정의 개념이 하늘에 떠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정의로운 행위들 속에서만 정의는 실재한다.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 역시 자연 외부에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자연 내의 특수한 현상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일실체인 전체자연의 구체적 현현이다.

  4.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양태를 유지하고 복원하려는 성질을 갖는다. 이 성질은 역사적으로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 (a) 즉자적[6] 단계: 비의식적 물질이나 기초적 생명체의 자기복원성. 맹목적 자기보존, 단순 복원력. (b) 대자적 단계: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개별적 존재로 자기인식하는, 추상적 인간의식 내지 동물적 의식의 자기복원성. 스스로의 개별적 욕망을 절대화 한다. (c) 즉자대자적 단계 : 자신이 처음부터 자연이라는 일부이자 유기적 전체의[7] 구체적 현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맹목적 필연이 자기보존의 가장 큰 적임을 깨달은 고차적 의식의 자기복원성. 그러므로 필연의 인식과 세계의 개조를 통해 유적 전체를[8] 맹목적 필연으로부터 해방해야만 그 자신의 보존이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즉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통된 성질은 스스로의 존재양태를 유지하려는 경향, 즉 자기복원성이다. 물질은 외력에 반발하고, 스스로의 양태를 유지하거나 복원하려고 하며,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고, 돌멩이는 외부에서 강한 힘이 가해져 부서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현재 상태와 단단한 구조를 유지하려고 한다. 사회조차 자신의 재생산 구조를 지키려 한다. 자연 자체가 무기물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의식으로 스스로를 고도화해왔으며 이러한 고도화의 정도에 따라 자기복원성의 형태 또한 달라진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자기복원성, 즉 즉자적 단계의 자기복원성은 맹목적이다. 돌도, 세포도 자신이 무엇을 보존하는지 모른 채 보존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한다. 주어진 법칙대로 스스로를 보존할 뿐이다. 다음 단계에서 자기복원성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단계로 올라선다. 다음 단계는 대자적 단계의 자기복원성이다. 동물, 그리고 미성숙한 단계의 인간은 "나"라는 것을 자연과 분리된 독립적 실체로 여기고, 자신의 욕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추상적 인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화된 자기보존은 자기 자신의 전제를 배신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자연이라는 전체의 특수한 현현일 뿐이고, 나를 위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속한 전체가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 즉 맹목적 필연이기 때문이다. 외적 자연법칙, 그리고 외적 사회법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자기보존은 불가능하다. 대자적 단계의 자기복원성을 지닌 의식들은 이러한 자연적-사회적 법칙들을 불가해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운명이나 신의 섭리, 혹은 고정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로 인식하고, 혹은 사실 자신의 의식만이 존재하며 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으로 추상화된 인식에 빠져든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세계로부터의 소외,[9]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이것을 진정으로 자각한 자기복원성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나를 정말로 지키려면 나 하나의 개체적 욕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내가 속한 전체가 맹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자기보존에 대한 사랑은 논리적 필연으로서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화한다.

어째서 자유인가? 이 문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대자적 자기의식의 스스로에 대한 규정은 ‘다른 모든것으로부터 구분되는 독립적 개체’이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로 독립적 개체인가? 신체의 물질은 음식과 공기, 즉 자연의 또다른 요소들에 의해 빌려온 것이다. 생명활동이 정지하면 신체는 보편적 자연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나의 신체가 아닌 나의 생각이 나인가? 하지만 내 머리 속에 있는 개념과 언어들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 속에서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맺어온 양식들이 의식에 반영된 것이다. 또한 가장 기초적인 의식의 원리마저, 초월적인 것에 의해 성립되는게 아니라 뉴런네트워크의 전기신호를 통해서 성립된다. 결국 "나"는 자립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보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취하는 특수한 형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자적 자기보존은 처음부터 잘못된 대상, 즉 실재하지 않는 고립된 자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마치 파도가 "바다와 무관하게 나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번 테제에서 논하였듯이 개별적 인간은 자연이라는 유기적 전체의 한 부위이다. 그렇다면 전체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자신의 무한증식만을 절대화하는 부위, 우리는 그것을 뭐라 부르는가. 암세포라고 부른다. 암세포는 유기체의 조절 신호를 무시하고 자기 생존만을 절대화하지만, 그 결과 유기체가 죽고 유기체가 죽으면 암세포도 함께 죽는다. 대자적 자기보존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도출 될 수 있는 결론은 자멸 뿐이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자기복원성이 대자적 단계에 고착됐을 때 구조적으로 도달하는 실제 결과이다. 즉자대자적 단계가 더 나은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유일하게 정합적이어서"이다.

결국 나를 실제로 위협하는 건 다른 개인이나 자연의 다른 양태들이 아니라 맹목적 필연, 외적 합법칙성이다. 우리의 의식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신의 법칙대로만 운행하는 세계의 맹목성과 무정부성은 인간을 넘어 모든 존재들의 적이다.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공황, 전쟁, 전지구적 생태 위기, 시장의 무정부성, 우주의 엔트로피,[10] 항성의 폭발 등. 내가 아무리 부유해도 공황이나 생태 붕괴, 전염병에서 완전히 격리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맹목 자체의 극복, 즉 전체가 자기 운동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조절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 뿐이다. 필연을 이해하고, 그것을 개조하는 것. 우주를 필연의 영토로부터 빼앗아 의식의 영토로 견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이다.[11]

부르주아적-대자적 의식은 자유를 인과나 법칙성을 초월해 행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가능한 유일한 자유는 운명이나 맹목적 외부법칙에 굴종하지 않고 그것들을 이해하여, 존재 자신이 놓인 조건들과 역사성 속에서 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해나가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필요한 건 단순한 안전이나 평등 같은 것이 아니다. 배부른 노예도 여전히 노예이고, 물질적으로 평등해도 아무도 조절하지 않는 시스템은 다음 위기 앞에서 여전히 맹목적이다. 내가 필요한 건 정확히 자유, 전체가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조종하는 상태 그 자체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만의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자유의 가장 의식적이고 고등한 부위이지만, 자연 자체가 자연 스스로의 인간이라는 부위를 통한 의식적 조절과 통제 하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인간 또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연 전체가 자유로워져야 한다. 즉, 자연 전체가, 우주 전체가 의식의 통제 하에 들어와야 하며, 이러한 통제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개체적 이득만이 아니라 자연 전체의 해방, 즉 전체로서의 자연이 그 스스로를 자기통치 하는 상태를 위해 자연을 통제하고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태, 스스로가 유적 전체의 일부이며 오직 자유를 통해서만 자기보존을 이룰 수 있다는 자각을 얻은 상태의 의식이 곧 즉자대자적 의식이다.

어째서 사랑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자유의 추구나 자유로의 의지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사랑인가? 추구나 의지는 수단적 관계를 함축한다. 즉, 추구와 의지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이유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수단은 버려도 된다. 그런데 이미 확인했듯, 나 자신이 전체의 특수한 현현이라면 전체의 자유는 나에게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 존재를 보존하고 나의 의식을 진정으로 실현할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즉 인간에게 자유는 다른 이득이나 원인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는 무매개적이고 절대적이며 단일한 지향 대상이다.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상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수단-목적이 아니라 본질적 층위에서 동일성으로 묶여 있는 상태는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만 논할 수 있다. 또한, 즉자대자적 자기의식이 단순히 이성으로만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필연성을 감각하고, 스스로의 노예적 상태를 인식하며, 이에 대한 근원적인 반발과 해방에 대한 욕망을 감각한다는 점에서 즉자대자적 자기의식의 자유에 대한 지향은 이성과 정동을 모두 포괄하는 능동적 기쁨의 감정인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추구나 의지를 넘어선 사랑, 존재 자체를 내던지는 종류의 사랑이다. 물론 자유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편이 언제나 일반적 사랑의 형태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편이 특수를 통해, 추상이 구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을 기존 테제에서 확인하였다. 억압자에 대한 증오, 제국주의자에 대한 증오, 적대계급에 대한 증오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무한하고 끝없는 사랑이 특수한 상황에서 구체적 형태로 외화된 것이다. 적대라는 것이 맹목적 조건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언젠가 인간은 서로에 대한 적대를 완전히 멈출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적대 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적대와, 적대의 양식이 의식에 반영될 때 감각되는 증오는 사랑과 상호배제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랑의 구체적 형태인 것이다. 우리는 그 작은 증오들을 통해 더 큰 사랑을 이뤄낼 수 있다.

행복에 관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두려움에 기초한 자기복원성은 수축의 감각이다. 세계를 위협으로, 타인을 경쟁자로 느끼는 상태에서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해와 연대에 기초한 자기보존은 확장의 감각이다. 세계와 싸우는 대신 세계에 속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기에, 인간은 연대 속에서 안정을 감각할 수 있다. 이건 낯선 감정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때 그것을 "내 이익의 희생"으로 느끼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이득이 이미 "내 것"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느낀다. 자아의 경계가 사랑을 통해 일상적으로 늘어난다는 걸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즉자대자적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추상적 박애주의나 인류애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익숙한 경험을 혈연 너머, 나와 실제로 얽혀있는 물질대사 전체로까지 정직하게 연장하는 것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경제 위기, 기후 붕괴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의 대상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조종받지 않는 시스템 자체이다. 우리는 이미 개인적 부를 아무리 쌓아도 우리가 완전히 안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널리 공유된 불안이야말로, 맹목적 필연이야말로 진짜 적이며 개인적 자기보존은 결국 지양되어 우리가 집단적·의식적 자기결정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상 정서 속에서 이미 예감하고 있는 증거이다. 우리는 자주 텅 빈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과 호기심을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는 감각을 현대인들은 자주 느낀다. 우리는 개념적 이해를 체득하기 전에도 이미 스스로가 부자유한 상태에 있으며 맹목적 필연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음을 미연 중에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고, 자기자신의 유적이고 전체적인 본질을 실현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고통을 느낀다. 물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잘못된 해결법을 쉽게 믿어버린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은 요즘 유행하는 ‘경제적 자유’라는 말처럼 우리가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면 자유가 얻어질 것이라는 식의 사고를 하곤 하지만 기실 우리가 개별의 감옥 안에, 자아의 감옥 안에 갇혀있는 한 자유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필연에 맞설 수도, 맹목에 맞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개별적이고 추상적인 자기의식을 유지한 채로 자유를 추구할 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언가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혼자서는 이룰 수 없었던 큰 작업을 마치며, 다른 이들과 함께 스스로 결정한 것을 실현해본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 순간의 기쁨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개체적이고 개별적인, 낮은 단계의 자기의식을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 맹목에 맞선 집단적 역능을 발휘하여 자유를 감각하는 기쁨의 무의식적 인지이다. 물질적으로 안전하지만 무기력한 사람과 위태롭지만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 누가 더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집단적으로 자유를 쟁취해나가는 연대의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1. 역사유물론은[12] 인간사회 내부의 생산관계 변천에 관한 이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이 그 자신의 가장 의식적인 기관인 인간을 통해 맹목적 필연성으로부터 자기의식적 자유로 이행하는 과정에 관한, 그리고 그 이행을 수행하는 자연 내의 의식적 기관으로서의 인간의 역사적 행위에 관한 이론이다. 역사유물론을 생산관계 변천에 관한 협소한 사회이론으로 축소할 수 없다. 인간사는 맹목에서 자기의식으로"의 이행이 자연 전체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연사의 한 과정이므로, 인간사와 자연사는 분리될 수 없다. 계급투쟁은[13] 누가 잉여를 가져가는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연이 인간이라는 자신의 부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맹목을 극복해가는 과정의 지금 이 순간 취하고 있는 구체적 형태이기도 하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져 있다는 상투어 자체가, 인류가 아직 자신의 사회적 물질대사를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지 않는가?

  2. 계급투쟁은 인간사 내부의 특수한 적대이자, 동시에 자연이 자기 자신의 맹목을 극복해가는 과정의 현재적 국면이다. 신석기 중반 이래로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계급투쟁의 역사였으나 자연의 역사 전체가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은 아니다. 즉 계급투쟁은 자연사 내의 인간사가 취하는 특수한 전개형태이다.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어째서 중요한가? 오늘날 계급투쟁은 자연의 가장 심층적인 모순, 즉 의식적인 요소와 맹목적인 요소 간의 대립과 투쟁을 반영하며, 계급투쟁의 전개양상에 따라 그것의 전개양상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즉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불가피성은 인간사회 뿐만이 아니라 전체 자연의 관점에서 제기된다.

  3. 생산력과 생산관계의[14] 모순은 사회적 범주이면서 동시에, 자연이 자신의 물질대사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능력, 즉 사회적 노동의 계획적 조직화를 아직 획득하지 못한 데서 오는 모순이다. 인간사적 관점에서 생산은 인간이 생존과 발전을 위해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고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창출하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연사적 관점에서 생산은 자연이 자신의 의식적인 부위를 통해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자연이 스스로의 물질대사를 의식적으로 조절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의식적 부위인 인간집단 내의 계급적 역관계가 전복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들어서야 한다.

  4. 공산주의는 분배의 문제나 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자연의 물질대사가 처음으로 맹목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식적 부위인 인간을 통해 맹목적 필연을 의식에 의해 복속시키는 사건이다. 맹목적 필연을 의식에 의해 복속시키는 사건은 즉 자유의 도래를 의미한다. 하지만 복속이나 정복은 언제나 두 개의 분리된 항, 즉 정복하는 주체와 정복당하는 객체를 전제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이원론을 처음부터 배제하였다. 자연 바깥에 자연을 정복할 별도의 주체는 없다. 그러므로 "복속"의 주어와 목적어는 궁극적으로 하나다. 자연이, 자기 자신의 의식적 부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아직 맹목적인 부위인 사회적-생태적 물질대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입법과 자기통치이지 지배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서술은 기실 인간의 주체적 역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과 동떨어진 개별적이고 원자적인 주체로 간주하는 것이며, 자연과 세계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의 주체적 실천에 의한 맹목의 극복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신경계로서, 자연 전체를 대리하고 대변하여 자유를 추구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공산주의란? 이로부터 공산주의적 계획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규정이 도출된다: 계획하는 자와 계획되는 자 사이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간극도 남아서는 안 된다. 계획이 사회의 한 특수한 부위가 나머지 부위를 대상으로 삼아 수행하는 활동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자기입법이 아니라 여전히 지배의 한 형태, 즉 시장이라는 익명의 지배에서 특정인의 공개적 지배로 자리를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복속은 자연이 자기 자신 전체를 통해 자기 자신 전체를 규제하게 될 때만 완성된다. 이 원칙이 이하 모든 구체적 규정의 기준선이다. 우리가 이미 논하였던 자기복원성 개념을 사회의 재생산 활동 자체에 적용해보자.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매 순간 특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라는 유기적 총체의 자기복원 활동이다. 상품생산 사회에서 이 지출은 서로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무수한 사적 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결정들이 실제로 사회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지는 오직 사후에,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는 순간에만 확인된다. 사적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승인되는 유일한 통로가 판매인 것이다. 가치란[15] 바로 이 "사후적으로만, 그것도 우회적으로만 확인되는 사회성"이 취하는 물질적 형태이며, 화폐는 이 우회로 전체를 응축한 결정체다. 공산주의에서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총노동의 계획된 일부로서 지출된다. 개인이 지출한 노동시간은 상품이라는 사물을 거쳐 사후에, 간접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의 한 몫으로 계산된다. 화폐가 사라지는 것은 그것이 불편하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해서가 아니라, 화폐가 수행하던 유일한 기능, 즉 사적 노동의 사후적·간접적 사회화 자체가 조건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에 대한 사회적 장부는 화폐가 아니다. 유통되지 않고, 이자를 낳지 않고, 축적되어 타인에 대한 지배력으로 전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사회적 총노동에 이미 직접 기여한 몫에 대한 영수증일 뿐이다. 이행기에는 이 장부가 "기여한 만큼 가져간다"는 등가성의 형식, 즉 가치형태가 남긴 마지막 그림자이자 부르주아적 권리의 협소한 지평을[16] 유지하지만, 높은 단계에 이르면 생산력의 발전이 희소성의 계산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면서 이 등가성마저 소멸하고 필요가 유일한 척도로 남는다. 소유형태의 역사는 크게 볼 때 세 단계로 나뉜다. 원시공동체의 소유형태는 즉자적 공유, 즉 생산력의 미발달로 인해 강제된, 무매개적이고 무의식적인 공동소유다. 사적소유의 발생은 이 즉자적 통일에 대한 부정이며, 앞서에서 논한 대자화, 즉 개별자가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해 인식하며 자신의 몫을 절대화하는 과정이다. 이 부정은 파괴가 아니라 필수적 경유지다. 사적소유를 통과하면서만 생산력은 즉자적 공동체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수준까지 발전하고, 개인은 공동체에 무매개적으로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의 개별자로서 자신을 정립한다. 공산주의는 이 부정에 대한 부정이다.[17] 부정의 부정은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원래의 항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상승이다. 또한, 부정의 부정은 단순종합이나 절충이 아닌, 새로운 단계의 대립항 중 역사를 추동하는 항이 다른 항을 잡아먹는, 즉 포괄하는 과정이다. 즉자대자적 공유는 즉자적 공유의 반복이 아니라, 사적소유가 발전시킨 생산력과 개별화된 주체성 전체를 보존한 채 그것을 의식적 통일로 끌어올린 것이며 사적소유 하에서의 사회적 생산이라는 측면이 사적 소유의 측면을 잡아먹어 포괄한 결과이다. 이 시점에서는 생산과 향유의 관계 자체가 바뀐다. 사적소유 아래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지 못한다. 생산물은 곧바로 그의 손을 떠나 낯선 것, 시장의 익명적이고 맹목적인 힘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 내가 생산한 것을 타인이 향유할 때, 나는 타인의 필요를 직접 충족시켰다는 사실 그 자체 속에서 나 자신이 유적 존재로서 확증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의 생산활동이 곧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을 매개로 한 유적 전체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 형태가 된다. 앞서 세운 사랑의 논리(전체의 번영이 나에게 수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것)가 경제적 관계의 세포 단위, 즉 개별 생산-향유 행위 속으로 내려와 응축된 형태가 이것이다. 유적 본질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구체적인 상호확증의 행위들 속에서만, 그것들을 통해서만 실재한다.

공산주의의 무한한 기획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간 상호간 물질대사, 즉 누가 무엇을 생산하고 누가 그것을 향유하는가의 문제를 다뤘다. 그런데 우리가 일원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연을 유기적 전체로 바라본다면, 복속되어야 할 맹목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그를 둘러싼 나머지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즉 토양에서 자란 것이 식량이 되고, 폐기물이 다시 토양과 대기로 돌아가는 순환도 맹목적인 법칙성을 통해서 의식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순환에 대한 무지 위에서 생산이 이루어질 때, 그 대가는 토양의 소진이나 순환의 교란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문제는 지구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인지발달에 따라 우주적 방향으로 확장된다. 공산주의적 계획이 완성되려면, 그 대상은 인간 상호간 생산의 조절만이 아니라 인간-자연 물질대사 순환 전체, 즉 에너지의 흐름, 영양분의 순환, 폐기물의 재흡수 등의 문제를 의식적 시야 안에 두는 것으로 확장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의 첫 시작은 무제한적이고 무정부적인 이윤추구의 맹복적 법칙을 폐절하고, 그 법칙에 의해 일어난 인간과 자연 간의 심대한 균열을 회복시키는 과업이지만 해당 과업이 완수된 후 인간은 사회적이지 않은 형태의 맹목들도 극복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맑스의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물질대사"라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 요구하는 바다. 복속되는 맹목은 사회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으로 나뉘는 두 개의 별도 영역이 아니라, 전체자연 안에서는 애초에 하나의 동일한 물질대사가 취하는 두 계기일 뿐이다.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맹목적 방식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형태로 통제하는 것, 그것이 자유의 왕국의[18] 물질적 토대다.

  1. 인간은 독립적·원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보편자연의 특수한 현현이며 물질대사와 그 사회적 반영에 의해 구성된 일시적 양태이므로 죽음은 존재의 비존재로의 이행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양식의 전환이다. 사망 이후 정신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요소는 궁극적으로 원자로 분해되어 자연의 물질대사 속에서 순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인간을 이루던 모든 요소는 자연의 자기갱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과업에 계속 기여한다. 개인의 자기복원성이 즉자대자적 단계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자유는 결국 유적 전체의 자유이다. 그 자유가 실현된 상태에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유한성, 즉 자신이 언젠가 죽어 물질의 순환 속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을 결핍이나 위협으로 경험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기여한 것이 이미 유적 전체의 실현된 자유 속에, 타인들의 향유와 자유로운 활동 속에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개별자의 완성과 유적 전체의 완성이 더 이상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아니게 되는 사회, 그것이 곧 공산주의 사회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그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자신의 연장으로서의 유적 전체, 즉 인간집단을 포함한 자연전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상태, 스스로가 노예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유일한 두려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인간을 불안과 자기의심의 악무한으로 이끌지 않고, 합목적적인 실천으로 이끈다. 개체적 인간으로의 자신의 형태가 무너지더라도 그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요소와 자신이 사회적으로 행한 모든 작용은 도도한 자연의 총체 속으로 돌아가 자유를 향한 전체자연의 무한한 자기갱신 속에서 그 모든 투쟁과 성취를 함께할 것임을 믿는 것이야 말로 공산주의자가 갖춰야 할 생사관이다.

  2. 구체적 인간의 과업은 스스로가 던져진 현재 국면의 모순인 계급투쟁을 추진하고 해소하는 것이다. 이건 외부에서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즉자대자화된 자기복원성, 즉 자기보존이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화한 형태의 자기복원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며 인간존재의 자기실현이다. 어째서 인간은 계급투쟁에 복무해야만 하며, 어째서 계급투쟁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인가? 그것은 계급투쟁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며, 그 자신에게 개별적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 또한 아니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가장 성숙한 자기의식이 지니는 즉자대자적 자기복원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며 자기 존재의 논리적 완성이고, 인간본질의 총체적 실현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사랑은 인간과 자연이 놓인 구체적 조건과 역사성 속에서 구체화 된다. 자연사의 특정한 국면인 인간사의 현 지평은 계급사회라는 조건에 놓여져 있다. 바로 그 조건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은 계급투쟁의 형태로 구체화 된다. 즉 계급투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형태이며, 인간의 자기복원성이 자연스럽고 가장 고등한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스스로의 부자유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직면하고, 그것을 의식적-집단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삶을 바칠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인간의식의 발전은 자연과의 구체적 관계와 생산에의 참여, 그리고 계급투쟁의 경험 속에서 불균등하게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먼저 높은 단계의 자기인식을 형성한 부위, 즉 자유를 사랑하는 부위로 이루어진 전위당은[19] 존재론적 층위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인간집단 내에서 가장 진전된 부위로의 전위당은 계급투쟁과 사상투쟁 속에서 그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이는 의식성의 추월과 교차 속에서 언제든 변화될 수 있다. 의식의 발전은 불균등하며, 먼저 즉자대자적 자기의식을 갖춘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동시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즉자대자적 자기의식을 갖춘, 자유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하고 개조해나가는 이들의 조직이 곧 전위당이다. 전위당은 계급투쟁을 영도할 뿐만 아니라, 전위가 아닌 이들을 전위로 이끄는 매개 기관이기도 하다. 매개 기관은 처음부터 자기지양을[20] 목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매개기관의 존재이유는 의식발전의 불균등성 그 자체이며, 불균등성이 해소된다면 매개 기관이 수행하던 정치적 강제의 기능은 대상을 상실한다. 완성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당의 소멸과 국가의 소멸은[21] 인간에 대한 통치가 물자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도로 조용히 옮겨가는 자기입법-자기통치의 완성과정이다. 불균등성의 해소란, 자기자신을 유적 전체로 사고하며 자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그 유적 전체의 사회적-생태적 물질대사를 계획하며 실천하는 능력 자체가 전위라는 특수 부위의 전유물에서 유적 능력 일반으로 보편화되는 것을 뜻한다. 완성된 공산주의에서 계획은 소수가 전체를 대신해 사고하고 다수가 그 결과를 통보받는 행위일 수 없다.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자기 자신의 사회적 물질대사를 스스로, 계획적으로 사고하는 활동이다. 이 단계에서 사회적 보편(전체의 의식적 조절)은 개별자들의 실제 숙고 바깥이나 그 위에 존재하는 별도의 기관으로 남지 않고 오직 그들의 살아있는 숙고와 결정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즉 지도와 피지도의 통일, 인간 사회 내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 완성되는 것이다.

  4. 모순은[22]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원리이며 자연의 모든 부위에 존재하는 보편적 요소이다. 자연의 모든 운동과 발전은 모순에 의해 추동된다. 모순은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외부에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기복원적 존재양태를 이루는 대립적 규정들이 동일한 것 안에서 맺는 통일이자 투쟁이다. 모든 발전은 오직 모순의 전개와 해소를 통해서만 일어나며, 모순의 해소는 대립의 소멸이 아니라 하나의 항이 대립되는 항을 포괄해버리는, 더 높은 통일로의 지양이다. 모순을 서로 무관한 두 사물 간의 다툼으로 이해하는 통속적 견해는 이미 첫 테제에서 배제한 이원론의 변종에 불과하다. 만일 대립하는 두 항이 애초에 아무 관계도 공유하지 않는 별개의 실체라면, 그 둘의 충돌은 우연한 사고일 뿐 필연적 발전의 원리가 아닐 것이다. 모순이 발전의 동력인 이유는 대립하는 항들이 하나의 동일한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석은 N극과 S극으로 갈라지지만 그 둘은 자석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물체를 이루며 서로를 전제하는 계기들이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23] 갈라지지만 그 둘은 상품이라는 하나의 통일물 안에서만 존재한다. 위치 A에서 위치 B로의 이동은 A와 B 사이를 운동하는 물질이 어느 순간에는 A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A에 없어야만 하는 모순을 지닌다. 대립이 통일을 낳고, 통일이 대립을 낳는다. 모든 존재양태는 자기복원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복원성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복원적 존재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경향과, 그 유지를 매 순간 위협하는 내적·외적 조건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만 실존한다. 즉자적 단계에서 이 긴장은 외부의 힘과 물체의 관성 간의 물리적 모순으로, 대자적 단계에서는 개별화된 욕망과 전체자연 간의 모순으로, 즉자대자적 단계에서는 이미 도달한 의식적 자유와 아직 극복되지 않은 사회적-물질적 맹목 간의 모순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각각의 모순이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을 낳는 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 이전 항을 포괄하며 상승하는 운동의 실질적 원리이다.

모순의 형태들 모순에는 그 지속의 범위에 따른 층위가 있다. 근본모순은[24] 하나의 존재양태가 발생하여 소멸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그 존재양태의 본질 자체를 규정하는 모순이다. 자본주의 단계의 인간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대립이다. 전체자연에 있어 이것은 의식적인 것과 맹목적인 것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즉자적 물질에도, 대자적 의식에도, 즉자대자적 의식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 있다. 반면 파생모순은 이 근본모순의 보편성이 특정한 역사적-물질적 조건 속에서 구체적 형태로 현현할 때 나타나는 개별적 모순들이다. 그런데 하나의 양태 안에는 언제나 여러 국면들이 동시에 존재하한다. 그 국면에서 다른 모든 모순들의 존재양상과 해소경로를 규정하며 지배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 주요모순이고, 그 규정을 받으며 종속적 위치에 놓이는 나머지가 부차모순이다. 부차모순은 부차적 위치에서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그 실재성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부차모순은 특정한 국면적 조건에서 스스로 주요모순의 자리로 부상할 수 있으며, 이 자리바꿈이야말로 하나의 근본모순이 여러 국면들을 거치며 자신을 구체적으로 전개해나가는 방식이다. 근본모순은 하나의 사회적-혹은 물질적 존재양태가 존속하는 한 항상적이지만, 주요모순은 국면에 따라 이동한다. 즉자대자적 의식이 갖추어야 할 실천적 판단력이란 다름 아니라, 매 국면마다 무엇이 주요모순이고 무엇이 부차모순인지를 정확히 식별하는 능력이다. 부차모순에 힘을 소진하며 주요모순을 방기하는 것도, 반대로 부차모순의 고유한 실재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주요모순으로 환원해버리는 것도 모두 근본모순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오류다. 모순은 또한 그 해소의 양식에 따라 구분된다. 적대적 모순은 두 대립항이 동일한 통일체 안에 공존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역사적으로 소진되어, 오직 한쪽에 의한 다른 쪽의 부정, 곧 기존 통일의 파열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모순이다. 적대란 서로의 존재양태가 상대의 존재양태를 위협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적대는 주관적 관념이나 개인의 감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물질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 사회와 자연에 대한 의식적 통제가 확립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적대가 폐절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이전의 적대는 추상적 박애나 개인적 화해로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적대적 모순의 대표적 예시로는 사적소유 하의 자본과 노동의 모순, 제국주의와 피억압민족의 모순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은 통일체 내부의 점진적 조정이나 교육, 설득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착취억압관계 자체가 부정되어야만, 즉 혁명적 단절이 있어야만 지양된다. 반면 비적대적 모순은 동일한 근본이해를 공유하는 항들 사이의 모순으로서, 파열이 아니라 비판과 자기비판, 교육, 정치운동, 제도의 점진적 개조를 통해 통일체를 유지한 채로 해소될 수 있는 모순이다. 즉자대자적 의식들 간의, 혹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내부의 견해차와 이해관계 조정이 여기 해당하며,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또한 비적대적 형태로 수행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점은, 적대성과 비적대성이 역사적 조건과 실천의 방식에 따라 서로 전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적대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없었던 모순이 잘못된 실천, 이를테면 즉자대자적 단계로의 이행 없이 대자적 욕망의 절대화만을 고집하는 것에 의해 적대적인 것으로 악화될 수 있으며, 반대로 혁명적 단절을 통해 적대적 모순의 물질적 토대가 지양된 이후에는 과거 적대적이었던 관계의 잔여가 비적대적인 것으로 전화하여 교육과 점진적 개조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근본모순-파생모순의 축이 "무엇이 현 상태의 근원적 인과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주요모순-부차모순의 축은 "지금 이 국면에서 무엇이 지배적인가"에 관한 것이고, 적대적-비적대적의 축은 "이 모순은 어떤 방식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세 축은 서로 다른 질문에 관한 것이지만,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중첩된다. 하나의 파생모순이 근본모순의 발현이면서 동시에 특정 국면의 주요모순이자 적대적 모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모순과 인간 따라서 모순은 부정되어야 할 오류나 불행한 사고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고도화시켜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모순 없는 존재는 운동 없는 존재이며, 운동 없는 존재는 이미 죽은 존재다. 그러나 모순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모순이 근본적이고 어떤 모순이 파생적인지, 어떤 모순이 지금 주요하고 어떤 모순이 부차적인지, 그리고 어떤 모순이 적대적이어서 단절을 요구하고 어떤 모순이 비적대적이어서 점진적 개조로 족한지를 구체적 국면 속에서 정확히 식별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전위당이 그 내부에서 조직해야 할 집단적 역능이며, 즉자대자적 의식이 지니는 최고의 기능이다. 맹목적 필연에 굴종하는 단계의 자기의식은 자기자신의 모든 삶을 규정짓는 모순 속에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끌려다닐 뿐이지만 즉자대자적 의식을 지닌 주체는 모순의 구조 자체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개조할 수 있게 된다.

  1. 선과 악, 법률과 언어 같은 것들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Ideal)들이다.[25] 하지만 이상은 관념(Idea)와 달리 인간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물질들처럼 인간 의식을 매개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자연에 작용하는 인간의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활동의 의식적-사회적 반영을 통해 형성되어 사회 속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이렇듯 자연은 인간의 의식적-사회적 실천을 통해 의미와 가치를, 즉 이상성(Ideality)을 부여받는다.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이상들은 이러한 이상성의 구체적 형태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서 자연과 관계를 맺고,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변형시킨다. 이러한 변형 속에서 인간은 즉자적 자연에 이상성을 부여하며, 자연을 통해 인간은 이상성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자연사로서의 인간사 속에서 자연을 이상으로 변형하고 이상성을 실현해나가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연 내의 맹목적 필연을 몰아내고 자연의 법칙들을 의식에 복속시켜 자유를 건설한다. 인간이 등장하기 전의 지구는 즉자적 자연, 즉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며 스스로에 대해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주어진 채의 자연이었다. 강물은 그저 흐르고, 바위는 그저 굴러다니며, 나무는 맹목적인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자라고 썩을 뿐이었다. 즉자적 자연에는 어떤 의미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선도 악도, 법도 언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두바이 협곡의 초기 인류가 강가의 자갈돌을 다른 돌로 내리쳐 날카로운 날을 만들어냈을 때, 그 돌은 더 이상 단순한 광물 덩어리가 아니게 되었다. 돌의 물리적 형태 그 자체 속에, 무언가를 자르고 가르는 노동의 몸짓이 새겨져 들어간 것이다. 이 각인은 그것을 만든 개인의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돌을 가공한 인간이 죽고 없어도 돌은 남아, 그것을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의 손에 쥐여 졌을 때 스스로 자신의 용도를 지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의식이 만들어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의 갈림길을 본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명멸하다 사라지는 표상, 이를테면 "이 돌로 무언가를 자를 수 있겠다"는 그 개인만의 순간적 착상은 주관적 관념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 착상이 돌의 형태 속에 객관화되어 사회적으로 전승되는 형식이 되었을 때, 그 형식은 더 이상 어느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이상이 된다. 자연물인 돌은 여전히 물질이지만, 그 물질에 새겨진 도구로는 형식은 물질의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새겨진 형식, 자연물이 인간의 실천을 통해 얻게 된 이 사회적 의미의 층위가 바로 이상성이며, 주먹도끼는 처음으로 이상성이 구체화된 최초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세대의 인간은 맨손으로 자연을 마주하지 않게 되었다. 앞 세대가 물질화해 놓은 주먹도끼라는 객관적 이상을 손에 쥐고 사용하면서, 뇌 속에 "이 물건은 사냥을 돕는 도구다"라는 주관적 표상인 관념을 형성하였다. 인간은 이 관념을 통해 선조들의 문화적 유산을 학습하며 비로소 '인간'으로 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 또한 단순한 생물학적 진화로 체득된 것이 아니라 수만 세대에 걸쳐 인간이 선도들이 이미 구축해놓은 객관적 행동법칙, 즉 이상들을 학습하고 흡수하며 공동으로 사회적 실천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관적 관념이 점차 의식의 형태로 발전해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같은 시기, 인간은 자연물에 형태만이 아니라 가치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씨족은 특정한 동물이나 장소를 신성한 것으로, 혹은 범접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것으로 지정했다. 토템이 된 동물의 몸이나 금기가 걸린 샘물은 물리적으로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씨족 전체에 대해 손대서는 안 되는 것, 침범하면 공동체 전체의 제재가 뒤따르는 것이 되었다. 이 구속력은 어느 한 개인이 그 금기를 사적으로 믿는지 믿지 않는지와 무관하게 작동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악이라는 오래된 이상의 원형이 태어난다. 좋음과 나쁨,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구분은 각 개인의 사적 감정이나 주관적 관념이 모여서 생긴 것이 아니라, 씨족 전체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실천, 즉 사냥과 채집에 요구되는 규율, 근친 회피, 공동 분배, 원시적 보건 등이 반복되면서 사회 전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규범으로 응결된 것이었다.

법과 도덕 정착과 경작이 시작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더 깊은 상호 변형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가의 사람들이 수로를 파고 둑을 쌓아 치수를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강이라는 즉자적 자연을 물리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내 밭'과 '네 밭'을 가르는 경계라는 이상을 만들었다. 수메르인들이 밭 가장자리에 박아 넣은 경계석에는 저주의 문구와 함께 소유권이 새겨졌다. 그 돌은 땅이라는 자연물에 소유라는 사회적 관계가 부여되었음을 물질적으로 증언하는 사물이었다. 그리고 이 변형은 자연에서 그치지 않았다. 땅을 갈아엎는 실천을 통해 인간 자신도 지주와 소작인, 자유민과 예속민으로 재편되었다. 자연을 바꾸는 행위가 곧 인간 자신을 바꾸는 행위였던 것이다. 교역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이상성이 물질과 얼마나 미묘하게 얽히면서도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물인 화폐를 만들어낸다. 소금과 조가비를 거쳐 리디아 왕국의 호박금화에 이르기까지, 화폐로 선택된 물질들은 저마다 다른 물리적 속성을 지녔다. 그러나 금이 화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금이 잘 늘어나고 녹슬지 않는다는 물리적 성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성질은 금을 화폐 재료로 편리하게 만들어줄 뿐, 금을 화폐 그 자체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금 조각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보편적 힘을 지니게 된 것은, 오직 사회 전체의 교환 관계가 합의를 통해 그 금 조각에 그런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후대에 이르러 더 선명해진다. 송나라의 교자나 오늘날의 지폐는 물질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지닌 구매력이라는 이상적 힘은 막대하다. 반대로 그 지폐를 표백시켜 백지로 만들어도 그 종이라는 물질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종이가 지녔던 화폐라는 사회적 형식, 즉 이상성은 사라지고 만다. 화폐는 이렇듯 순수한 관념도 아니고 순수한 물질도 아닌 채로, 교환이라는 인간의 물질적 실천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실재하는 사물로서 사회 속에 객관적으로 서 있다.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개념적 지식을 바탕으로 대규모 치수 사업이나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통제할 새로운 이상들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이상이 바로 법률이다. 이를테면 함무라비 법전에 새겨져 있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똑같이 갚게 한다"는 법률은 인간의 대규모 협동과 사유재산의 유지를 통한 사회질서의 확립을 실현하기 위해 형성된, 구체적 인간행위의 의식적-사회적 반영물이다.이 법률은 개인의 머릿속에만 있지 않기에 관념이 아니며, 그렇다고 법전 돌기둥의 화학적 성분 자체에 '정의'라는 물질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므로 독립적 물질 또한 아니다. 채무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계약이 부당하다고 마음속으로 아무리 되뇌어도, 점토판이나 석판에 새겨진 조항의 구속력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법은 이렇게 개인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함으로써,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관념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실재하는 이상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함무라비 법전에 적혀진 법률은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지탱하는 법칙을 개념화하여, 사회 속에 객관적으로 작동하도록 고정해 놓은 이상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이 법률이라는 이상을 건설함으로써, 약육강식이라는 맹목적 필연을 사회 내부에서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우루크의 신전 창고지기들은 곡물 자루와 가축의 수를 기록하기 위해 점토로 작은 토큰을 빚고, 그것을 봉투에 넣어 봉하면서 봉투 겉면에 안에 든 토큰의 개수만큼 자국을 눌러 찍기 시작했다. 이 실용적인 회계 습관이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되고 단순화되면서 마침내 쐐기 모양의 기호, 즉 설형문자로 응결되었다. 점토판에 눌린 자국 하나하나는 물질적으로는 그저 진흙 위의 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홈이 '보리 세 자루'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새긴 한 개인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호 체계를 함께 쓰는 공동체 전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다. 문자를 처음 발명한 이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문자 체계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뒤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그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그것을 배워야 했다. 즉 언어라는 이상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탄생에 앞서 사회 속에 이미 서 있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가장 오래된 이상은 이 모든 물질적 관계의 변화와 함께 그 구체적 형태를 끊임없이 바꾸어왔다. 원시 공동체에서 사냥감을 함께 나누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의 윤리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고 사적 소유와 계급이 갈라져 나오면서 재편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자연의 이치로 정당화 하였고, 중세의 기사도는 신분에 대한 복종과 명예를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상품 생산과 자유로운 계약이 지배적인 관계로 자리 잡으면서, 1789년 프랑스에서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신분과 무관한 보편적 기본권을 선과 정의의 새로운 기준으로 세웠고, 이후에는 여성과 피억압민족 또한 개각기의 존엄성과 권리를 선언하기 시작하였다. 이 각각의 단계에서 선악은 그 시대 사회 전체를 구속하는 실재하는 이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시대마다 다른 구체적 형태를 취해왔다는 사실은, 선악이 하늘에 고정되어 있는 영원한 이데아가[26]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실천이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사회적 실재이자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행동양식이 의식적-사회적으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이상임을 보여준다.

개념과 과학 인간의 실천이 축적되면서 이상성은 더욱 고도로 매개된 형태에 도달하기도 한다. 바빌로니아의 천문 관측자들은 오랜 세월 별들의 운행을 기록했지만, 그들에게 그 운행은 여전히 신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항해와 역법을 위한 실천적 관측이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끝에, 케플러와 뉴턴은 마침내 그 운행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연관, 즉 중력이라는 개념(Concept)을 사유 속에서 끌어냈다. 우리는 흔히 개념을[27] 사전적 정의나 어휘의 내연 정도로 인식하지만 개념이란 개별 사물들을 단순히 비교해서 얻어지는 평균적 인상, 곧 관념과는 다른 층위의 성취다. 개념은 사물들의 표면적 유사성이 아니라 그것들을 낳는 관계와 조건, 역사성 자체를 실천과 이론적 사유를 통해 통찰한 과학적 지식이며, 그렇기에 그것을 낳는 물질적 실천 자체가 충분히 성숙해 있어야만 비로소 사유 속에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렇게 도구에서 화폐로, 법에서 언어로, 도덕에서 개념으로 이어지는 이상성의 축적은 마침내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필연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던 존재에서, 그 필연을 인식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넘어가는 데까지 이른다. 오랫동안 번개는 제우스의 손에 들린 무기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노여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벤저민 프랭클린이 연을 날려 구름 속의 전기를 확인하고 피뢰침을 고안했을 때, 동일한 자연력은 인간의 의식적 통제 아래 놓이는 장치로 전환되었다. 흑사병이 신의 진노로 여겨지던 시절을 지나, 파스퇴르와 코흐가 병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임을 밝혀내고 백신과 항생제가 개발되어, 마침내 1980년 세계보건기구가 천연두의 완전한 박멸을 선언하기까지, 자연력 자체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인간사회가 바뀌었을 뿐이다. 전에는 맹목적으로 인간을 덮치던 그 힘이, 이제는 인식되고 예측되고 다루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자연을 인식하고 그 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합치시킬 수 있는 능력 속에서 자유를 얻어왔다. 인간은 자연 바깥에 서서 자연에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덧씌우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부딪치고 그것을 변형시키는 가운데 스스로도 변형되어온 존재다. 그 변형의 과정에서 자연물들은 하나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얻어갔다. 물질도 아니고 어느 한 개인의 사적 상상도 아닌, 인간의 반복된 구체적 실천이 사회 전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새겨놓은 의미와 가치의 층위, 즉 이상성을 얻어간 것이다. 자연사의 한 국면으로서의 인간사 속에서, 인간은 선조들이 실현해 놓은 이상성을 주관적으로 흡수하여,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목적을 세우고 자연을 변화시켜 더 고도화된 이상성을 객관적 물질세계에 실현해왔다. 인간이 만들어온 모든 이상들의 기저에는 맹목적 필연에 대한 반역의 의지, 즉 자유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이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상성의 부여와 이상의 실현을 통해 그 자신을 자유케 하는 역사이며, 동시에 즉자적 자연에게 이상성을 부여하여 자연을 맹목에 지배받는 즉자적 상태로부터 해방해 전체자연을 자유롭게 하는 프로메테우스의[28] 역사인 것이다.


  1.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그 자신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궁극적 존재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이 유일한 실체를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 불렀다. ↩︎

  2.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철학적 입장으로, 정신(사유하는 실체)과 물질(연장을 가진 실체)을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개의 독립적 실체로 구분하는 관점이다. 그 중 인간의 마음과 몸을 별개의 실체로 보는 입장을 특별히 심신이원론이라 부른다. ↩︎

  3. 외부와 상호작용이 없는 고립계 안에서는 에너지의 총량이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 채 그대로 보존된다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열역학 제1법칙). ↩︎

  4. 원래는 생명체가 외부와 물질·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신진대사 과정을 가리키는 생물학 용어(독일어 Stoffwechsel)이나, 마르크스는 이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과 순환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사용하였다. ↩︎

  5. 헤겔 논리학에서 다루어지는 범주쌍으로, 보편은 여러 개별자들에 공통되는 일반적 규정을, 특수는 그 보편이 구체적인 개별 사례로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보편이 특수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수 속에서만, 특수를 통해서만 현실화된다는 관계로 사용되고 있다. ↩︎

  6.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발전 단계 구분. 즉자(即自, an sich)는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잠재적으로만 존재하는 단계, 대자(對自, für sich)는 자기 자신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립적 존재로 자각하는 단계, 즉자대자(即自對自, an und für sich)는 자신이 처음부터 더 큰 전체의 계기였음을 자각하면서 그 자각을 능동적으로 실현해나가는 종합적 단계를 가리킨다. ↩︎

  7. 사회나 자연을 서로 무관한 부분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각 부분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와 기능을 갖는 살아있는 통일체로 파악하는 헤겔·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리킨다. ↩︎

  8. 마르크스가 초기 저작(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사용한 유적 존재(Gattungswesen) 개념에서 온 표현으로, 인간이 개별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인류라는 보편적 종적(種的) 차원에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존재임을 가리킨다. ↩︎

  9. 헤겔·마르크스 철학의 개념으로, 본래 자기 자신에게 속해야 할 본질적 힘이나 그 활동의 산물이 자신과 무관한, 심지어 자신을 억압하는 낯선 힘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

  10. 열역학에서 계의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물리량. 외부와 에너지를 주고받지 않는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열역학 제2법칙과 관련된 개념이다. ↩︎

  11. 이 글은 자유를 "인과나 법칙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상태"로 규정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와 헤겔을 거쳐 엥겔스의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라는 정식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

  12. 사회의 정치·법률·사상 등이 궁극적으로 물질적 생산양식과 그 발전에 의해 규정되고 설명된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해 방법. ↩︎

  13.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나뉜 상반된 사회집단(계급)들 사이에서 생산물의 분배와 사회적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과 투쟁을 가리킨다. ↩︎

  14. 생산력은 인간이 자연에 작용해 재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적·물질적 역량(도구, 기술, 노동력 등)을, 생산관계는 그 생산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소유관계, 분배관계 등)를 가리키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본 범주이다. ↩︎

  15.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 상품생산 사회의 개별 생산자들이 서로 무관하게 지출한 사적 노동은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후적으로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는데, 가치란 이러한 사회적 관계가 상품이라는 사물의 형태로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 ↩︎

  16.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사용한 표현으로, 사회주의 이행기에는 "노동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등가교환의 형식적 평등이 여전히 적용되는데, 이것이 사람마다 다른 필요와 능력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르주아적 권리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

  17. 헤겔 변증법의 발전 도식. 하나의 상태가 그와 대립하는 상태에 의해 부정된 뒤, 그 부정 자체가 다시 한 번 부정됨으로써 앞선 단계들을 더 높은 차원에서 포괄하는 종합에 이르는 운동을 가리킨다. 단순한 원점 회귀가 아니라 질적으로 상승된 통일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

  18.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사용한 표현으로, 노동이 생존의 필요에 의해 강제되는 "필연의 왕국"과 대비하여, 인간이 자신의 힘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

  19. 레닌주의 정치이론에서, 노동계급 가운데 가장 앞선 의식을 갖춘 부위가 조직한 정당으로, 계급 전체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을 가리킨다. ↩︎

  20. 헤겔 변증법의 지양(止揚, Aufhebung) 개념에서 온 표현. 지양은 '부정'과 '보존'과 '고양'을 동시에 뜻하며, 자기지양은 어떤 것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극복하고 폐기하여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

  21. 엥겔스와 레닌이 사용한 표현으로, 계급대립이 소멸한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정치적 통치(지배)의 기능이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로 대체되면서 국가가 억압기구로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소멸해간다는 전망을 가리킨다. ↩︎

  22. 헤겔·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서 자연과 사회의 모든 운동과 발전을 추동하는 근본 원리로 다루어지는 범주. 서로 대립하는 두 규정이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맺는 상호의존과 상호배제의 관계를 가리킨다. ↩︎

  23.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 상품이 지니는 두 가지 속성. 사용가치는 그 물건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구체적 유용성을, 교환가치는 그것이 시장에서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비율로 나타나는 사회적 속성을 가리킨다. ↩︎

  24. 마오쩌둥이 「모순론」에서 체계화한 모순의 세 가지 분류축. 근본모순-파생모순은 한 사물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본질적 모순과 그것이 구체적 국면에서 취하는 개별적 형태를, 주요모순-부차모순은 특정 국면에서 다른 모순들을 규정하는 지배적 모순과 그에 종속된 모순을, 적대적 모순-비적대적 모순은 기존의 통일이 파열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모순과 통일을 유지한 채 점진적 개조로 해소될 수 있는 모순을 구분하는 개념이다. ↩︎

  25. 소련의 철학자 예발트 일리옌코프(Evald Ilyenkov)가 정식화한 구분. 관념(Idea)은 개인의 두뇌 속에만 머무는 주관적 표상이며, 이상(Ideal)은 그러한 관념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물(도구, 화폐, 법전 등)의 형태나 사회적 관계 속에 객관적으로 새겨져 개인의 의식 여부와 무관하게 실재하게 된 것이다. 이상성(Ideality)은 자연물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얻게 되는,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의미와 가치의 층위를 가리킨다. ↩︎

  26. 플라톤 철학에서 감각세계 너머에 영원불변하게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의 참된 본질이자 원형을 가리키는 개념. 이 글은 선악과 같은 이상이 이러한 초시간적 이데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변화해온 사회적 실재임을 대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

  27. 이 글에서 개념은 사물들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을 추상해낸 관념적 일반화가 아니라, 그 사물들을 낳는 관계와 조건, 역사적 발전 자체를 사유 속에서 포착한 것을 가리킨다. 헤겔 논리학에서 유래한 용법이다. ↩︎

  28.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준 티탄 신. 인간에게 문명과 기술, 곧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다준 대가로 제우스에게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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