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재생산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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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재생산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활동가 재생산의 위기는 오늘날 운동사회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화두 중 하나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 전반에서 신진 활동가가 발굴되지 않고, 유입 동력이 가파르게 급감하는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된 치명적인 사안이다. 활동가가 재생산되지 못하면 조직이 유지될 수 없고, 조직이 무너진 자리에서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활동가 재생산의 위기는 오늘날 운동사회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화두 중 하나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 전반에서 신진 활동가가 발굴되지 않고, 유입 동력이 가파르게 급감하는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된 치명적인 사안이다. 활동가가 재생산되지 못하면 조직이 유지될 수 없고, 조직이 무너진 자리에서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정세의 변화나 청년층의 의식 퇴조에서 찾곤 한다. 물론 무시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들이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 그 자체가 현상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현상이란 결국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정세나 이십대의 우경화를 탓하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고, 또 반드시 바꿔야만 하는 영역은 바로 우리의 내적 역량인 주관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 주관적 조건을 어떻게 진단하고 재구성해야 할까? 단순히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열정이 더 필요하다”는 식의 당위적인 훈계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지점은 ‘우리가 청년 인자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떤 방식으로 인입시켰으며, 그들을 어떻게 훈련해왔는가’라는 구체적인 실패의 자리이다.

오늘날 운동사회 내에는 이러한 조직적 실패를 가리기 위해 ‘비정파적이고 자생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환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과거의 집단주의와 엄격한 조직 규율이 한계를 다했으므로,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생적 움직임들이 유기적으로 연대하기만 하면 새로운 운동이 건설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물론 이러한 희망의 기원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활동가를 소모품처럼 부리고 삶의 전 영역을 통제했던 과거의 과잉된 작풍이 큰 손실을 초래했던 것도 사실이며, 윤석열 정권의 계엄 정국 이후 이례적인 형태의 자생적 활동가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우연한 발생’에 의존하는 운동은 개별 주체의 기적적인 각성에만 기댈 뿐, 그들의 열정이 소진되는 순간 운동 자체가 무화된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자생적 활동가가 끊임없이 출현한다 가정하더라도, 조직적 관여 없이 운동이 자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전략적 판단이라기보다 조직론적 외양을 띤 자포자기에 가깝다. 우리가 정말 사유해야 할 지점은 방관을 정당화 할 알리바이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세련되게 제시할 수 있는가의 영역이 아니라, 이 자생적인 활동가들에게 정치조직이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이다.

지금까지 정치조직들이 자생적 활동가들을 대해온 방식은 대단히 소모적이었다. 대다수 조직은 그들을 단순히 단기적 이득과 인자 확보를 위한 중간 창구로 활용하는 데 그쳤다. 자생적 활동가가 스스로 개척한 현장을 조직의 외곽 기지로 전용하게 했고, 그들에게는 현장 활동과 조직 성원으로서의 의무라는 이중의 짐을 지웠다. 결과적으로 활동가가 지쳐 나가떨어지면 그들이 일궈놓은 현장마저 원상태로 복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는 단순한 윤리의 문제나 상도의적인 문제가 아니다. 과연 이러한 작풍이 운동 전체에 이득이 되었는지를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단기적인 조직화 사업에는 유리했을지 모르나, 본질적인 층위에서는 허리 역할을 할 활동가를 육성하는 데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자생성을 신비화하며 방치하는 이들이나, 그들을 포섭해 소모해버리는 이들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양쪽 모두 활동가에게 철갑을 입혀주지도, 무기를 쥐여주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쪽은 소진시키고, 다른 한쪽은 방기하며 기이한 희망을 전가할 뿐이다.

모든 조직에는 간부가 필요하며, 간부 양성에 드는 자원은 단순한 비용-편익 계산으로 설명될 수 없다. 간부 육성에는 산술적 수치로 포착되지 않는 동태적 이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진 활동가의 역량을 단기 사업에 갈아 넣는 태도는 소위 ‘좆소’라 불리는 비정상적 기업체들이 미숙련 노동을 될대로 소모시킨 후 재고용을 반복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방법론의 반복은 운동에서든 산업에서든 숙련의 성장 곡선을 끊임없이 초기화하며, 조직의 질적 축적을 가로막는다.

질적 축적에 실패한 조직은 간부층이 사라지고 지도부와 일반 회원 사이의 괴리가 심화된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무리하게 체계를 유지하려다 보면 필연적으로 언더에 근거한 음모적 작풍이 고개를 들게 된다. 결국 조직은 허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무너지거나, 폐쇄적인 서클로 퇴행하거나, 혹은 지도력을 상실한 채 대중 추수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흔히 조직 혁신의 대안으로 민주성 강화가 언급되지만, 조직 내 민주주의의 쇠퇴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기층의 요구와 지도부의 판단을 쌍방향으로 매개할 간부가 사라졌기에 투명한 토론과 민주적 운영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불구 상태에서 민주성만을 외치는 것은 형식적인 회의와 표결, 무의미한 토론과 모임만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뿐이다.

결국 대안은 간부의 양성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간부가 없으면 어떠한 운동도 지속될 수 없다. 스탈린이 말했듯이,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정치조직은 현장의 인자를 소모하거나 방임하는게 아니라,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전략적으로 모집하여 체계적인 교육과 보호, 그리고 보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조직은 현장의 숙련을 약탈하여 몸집을 불리는 도적떼가 아니라, 현장의 숙련을 강화하고 그 노하우를 중앙으로 흡수하여 조직 전체의 역량을 점증시키는 파이프라인이 되어야 한다. 활동가 개인이 자신의 운동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쌓으며 학습을 전개할 수 있는 잉여 역량을 보장받아야 하며, 생애 주기상의 이유로 현장 복무가 어려워질 때 조직은 이탈이 아닌 역할의 전환이라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조직은 활동가의 성장을 뒷받침할 역할의 사다리를 설계하고, 선후배 간의 도제적 관계를 조직적으로 관리하여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전선으로 계승되게 해야 한다. 조직 내에는 언제나 인자 육성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해야 하며, 개인의 실패를 조직 전체의 역량으로 완충해줄 예비대가 준비되어야 한다.

개별 활동가가 자신의 작은 실천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리고 그 확신을 주입이 아닌 체감을 통해 얻을 때 운동은 비로소 살아난다. 운동을 떠나야 하는 자들조차 유관 대중으로 남아 언제든 유기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신입 교육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육이라면, 간부에 대한 교육은 개개인의 경험을 조직적으로 분석하고 재개념화하여 노선을 갱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조직의 핵심적 이데올로기와 전략이 수뇌로부터 발가락 끝까지 관철되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러한 조직, 그러한 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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