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개요
성별이란 무엇인가?
성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여성 억압, 성소수자 억압, 트랜스젠더 억압
제국주의의 성별 평탄화 작업
억압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법
정치적 주체로서의 트랜스젠더
시혜와 온정을 넘어서기
공산주의의 비전
결론
개요
트랜스젠더 의제가 점차 가시화되어가고 사회운동 내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이 병렬적 의제 중 하나로 부각됨에 따라 국내외의 맑스주의 조직들 또한 제각기 트랜스젠더 의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일부는 아직까지도 구세대적이고 비과학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이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개입 필요성을 유보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직들이 트랜스젠더 의제에 있어 나름의 지지와 동의를 표하고 있다. 이는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어째서인가? 트랜스젠더 의제에 대해 지지를 표한 대다수 좌파/맑스주의 조직들은 아직까지도 그저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을 사회의 주된 모순과는 분리되어 있는 ‘다른 종류의 불의’ 정도로 여기고 있거나, 혹은 ‘자본주의의 수많은 폐단 중 하나’ 정도로 병렬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트랜스젠더 의제운동을 지지하고 때로는 연대를 표하면서도 자신들이 연계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운동 중 하나의 요구로 기계적으로 결합시킬 뿐 사회총체성의 영역에서 트랜스젠더 억압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학적 지위를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는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반맑스주의적 사고관이다. 어째서인가? 간단하다. 맑스주의는 사회를 분절된 여러가지 섹터로 나누어 파악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하나의 전체로 파악한다. 이는 쿠자누스, 스피노자, 헤겔을 거쳐 맑스와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어온 유일하고 적법한 방법론이다. 우리는 단일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으며 단일한 세계는 단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사와 인간사, 자연의 물질대사와 인간사회는 하나이며 인간사회 또한 유기적 하나이다. 그렇기에 특정한 억압은 다른 억압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피식민 민족에 대한 억압과 자본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이 연결되어 있듯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 또한 다른 억압들과 기계적 병렬될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의 방법론이며, 맑스주의가 과학인 이유이다.
본고에서는 트랜스젠더 의제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성별’ 개념 그 자체에 대한 과학적 해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이 트랜스젠더 억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성별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수많은 진보적 논자들은 성별을 둘로 나누어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는 정신적인 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소수자 운동이 스스로를 혐오세력의 공세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온 개념틀이며 그 자체의 정합성과 별개로 운동 내에서는 일정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맑스주의자들도 이러한 이분법, 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지점에 있다. 맑스주의자라면 이러한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섹스가 생물학적인 성이라는 것도, 젠더가 정신적인 성이라는 것도 모두 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허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섹스가 생물학적인 성,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성이라는 관점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자연계에 남성과 여성이, 동물들 사이에 수컷과 암컷이 실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틀렸다. 자연에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마치 자연에 선함과 악함,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과도 같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어떤 절대적인 개념을 연역해내려는 모든 시도는 비과학적 관념론이다.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외성기의 형태차이를 비롯한 신체의 물질적 차이의 연속체들, 그리고 일반생물의 이형적 경향성뿐이다. 물론 외성기의 형태차이마저도 모두 남근이나 음순과 같은 양 극단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위치될 수 있는 중간형태들이 존재하고 때로는 그 둘이 중첩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섹스, 즉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남성과 여성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염색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염색체마저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xx와 xy로 무 자르듯 모든 인류를 구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염색체와 외성기의 형상이 다른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인간사회 내의 특정한 개념들을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종류의 사고관은 관념론이며, 모든 역사 속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였고, 비과학이다.
그와 동시에, 젠더가 정신적인 성이라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다. 젠더, 즉 사회적인 형태의 성은 결코 인간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 민족, 사상, 도덕, 미추와 같은 개념들이 개인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는 관점은 인간을 사회적 총체로 바라보지 못하고 분절된 원자적 개인으로 파악하는 자유주의적, 기계론적 인간관에 근거한다.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상호연관을 맺으며 집단적이고 구체적인 인간활동 및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 사이를 침투한다.
종교, 민족, 사상, 도덕, 미추와 같은 개념들은 개인의 정신 속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 사회적으로 실재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실재들이 선험적으로 본래부터 사회 속에 존재한 것은 아니다.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존재이며, 그 존재의 양식이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노동을 비롯한 구체적인 인간활동 속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지만, 동시에 노동은 인간을 개조한다. 자연과 관계하는 양식과 경험들은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며 정신을 형성한다. 또한 이러한 집단적 존재양식, 집단적 노동의 방식, 즉 생산양식은 의식의 영역, 인간 간 관계의 영역으로 반영되어 사회적 실재를 누적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머릿속으로 남자를 규정하고 여자를 규정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의 내용들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개개인의 정신에서 발원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고 생존하는 방식, 즉 노동하는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고 결정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성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종교, 신앙, 민족, 그 모든 것이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사회적 실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별이라는 문제, 트랜스젠더의 문제, 성소수자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물리적인 실체로부터 무언가를 연역하려 하거나 개인의 정신 속 기호의 문제로 침잠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법론이 아니다. 물리적 섹스와 정신적 젠더라는 이원론적 세계관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성별은 물질에 있는 것도 개인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성별은 인간노동의 양식과 경험, 형태들이 사회적으로 반영된 사회적 실재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이 글이 취할 기초적 방법론이다. 이제, 성별과 가족이 발생하고 변화해온 역사성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현행 체제 내에서 트랜스젠더 의제가 어떤 위치를 지니는지를 도출해보도록 하겠다.
성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남성과 여성은 본래부터 존재했는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남성과 여성의 구별,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성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이 자연 및 사회와 관계 맺는 양식이 의식에 반영되고, 이러한 의식이 사회적 실재로 외화된 것이다. 물론 외성기의 차이, 근육량의 차이, 동작능력의 차이는 본래부터 존재했겠지만 이러한 물질적 차이를 바탕으로 남성과 여성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인간을 두 가지 분류로 본질적으로 나누게 된 것은 적어도 인류 탄생 직후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구분짓기 시작한 것은 언제가 시작인가? 인간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매개되는 방식, 즉 생산양식이 인간의 의식과 사회적 존재에 있어 핵심적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생산양식의 일정한 변화 시점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남성집단이 가정 내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여성이 그와 분절된 예속집단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농경에 의한 사유재산 축적이 갓 시작된 시점이었다고 논한다.
노예를 포함한 사유재산의 상속을 위해 남성 노예주 집단은 부계혈통을 도입해야만 했으며 농경 시작으로 인한 노동의 복잡화는 단순히 신체적 차이에 의해서만 존재했던 분업을 성별 개념에 따른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배분의 수준으로 고도화하였다. 이러한 부계혈통과 성별분업은 남성과 여성의 완전한 개념적 분리와 성별이분법적 사회질서를 탄생시켰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으로 지칭된 집단이 남성의 사유재산으로 추락하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가 일어났다. 즉,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주의는 사유재산 제도를 수호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물질적 기제였다. 물론 이것은 어느 사악한 남성 노예주가 음모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 아닌, 부계혈통상속과 사회적 분업의 고도화라는 구체적 인간활동이 지배계급에게 이로운 형태로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고 사회적 실재로 자리잡은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의 결과물로 파악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개념을 구성하는 사회적 내용들, 그리고 두 성별 간의 지배관계는 그 후에도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노예제 사회에서 남성의 소유물이던 여성은 봉건제 사회에서 남성의 예속민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성의 보조인력이자 가정 내부와 외부에서 무급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병행하는 주체로 변화하였다. 가족 관계도 씨족 거주에서 대가족으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의 맥락 속에서도 비과학적인 성별 이분법과 불합리한 성별 분업, 여성 억압,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가부장제는 유지되고 있다.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가부장제란 무엇인가? 집안의 수장인 남성을 중심으로 그 아내와 자식 등이 수직적으로 종속되는 제도이다. 가부장제는 고전 라틴어로 파테르파밀리아스(Paterfamilias)인데, 이는 파밀리아(Familia)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라틴어에서 파밀리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파밀리아란 한 남성에 속한 노예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는 노예제 사회에서의 가부장제의 실질적 내용을 반영한다. 노예제 사회에서의 가부장은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과 처분권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아내나 자식을 죽이거나 혹은 판매하는 것은 가부장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반면, 봉건제 사회에서는 가부장이 영주에게서 땅을 빌려 소농경영을 책임지는 주체였다. 당대 농업의 주된 부문이 인력집약적 농업으로 전환됨에 따라 가정 내에서의 농업숙련의 계승 및 내부에서의 노동력 창출이 중시되었고, 이로 인해 가부장의 가정 구성원에 대한 생사여탈권과 처분권은 더이상 생산관계에 조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봉건제 사회의 가부장은 가정 구성원들의 주인이 아니라 훈육자이자 관리자, 가족경제를 독단적으로 경영하고 가족의 신앙활동을 지도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부장제는 다시금 일변하였다. 가족단위 영농이 해체되고 공장제 대공업과 임금노동이 확산됨에 따라 가부장은 더이상 농토의 경영자가 아니라 밖에 나가 임금을 벌어오는 생계 부양자이자 가정 내의 경제력을 틀어쥔 경제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매일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다음날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출근할 수 있도록 먹이고, 입히고, 신체 상태를 관리해야 한다. 또한 미래에 공장으로 투입할 새로운 노동자를 낳고 길러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노동력 재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가부장제의 핵심이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통해 이윤을 확보하지만 막상 노동력 재생산에는 단 한 푼도 지불하고 싶지 않아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남성은 임금노동을, 여성은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성별분업을 탄생시켰다. 여성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해 남성 가부장에게 종속된 여성으로 하여금 막대한 양의 노동재생산 업무에 무상으로 임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가정에서 남성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임과 동시에, 자본가를 대리하여 가정 내의 무급 가사노동자인 여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대리 관리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핵가족화와 고용 안정성의 파탄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여성에게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을 모두 부담시키기도 하며, 혹은 여성을 구조적으로 하위직군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여성집단을 서비스산업에 내몰아 노동재생산 서비스를 일종의 판매 가능한 상품의 형태로 유통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 즉 여성의 경제적 자결권에 대한 구조적 억제와 재생산노동의 사회적 격하, 그리고 여성 노동력의 부차화는 철저히 유지되고 있다.
여성 억압, 성소수자 억압, 트랜스젠더 억압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는 법률적 측면에서 일정한 평등권이 외면적으로 보장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혐오와 배제, 가족구성권의 일정한 제한, 구조적 차별은 본질적 층위에서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어째서 자본주의 사회는 성소수자를 억압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간단한 문제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노동재생산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여성노동력을 남성노동력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성별분업에 근거한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소수자 억압과 트랜스젠더 억압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영원히 유지하고 여성인민을 영구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대중의 저항과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에 따라 체제는 일정한 양보와 후퇴를 결단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가부장제 자체가 철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자본가들의 단순한 음모를 넘어, 자본주의의 여성억압적이고 성별분업적인 생산관계가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고 사회적 실재로 외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규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자본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청산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없다.
성소수자들의 성애와 그 내부 커뮤니티에서 생산되는 대항문화와 집단적 품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상의 성별분업에 근거한 성별규범들을 교란한다. 성소수자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전제하는 올바른 남성상, 올바른 여성상을 이탈한다. 즉 성소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별분업 구조를, 그리고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성소수자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지탄을 불러 일으키며 때로는 국가적 억압이나 부차화를 진행하려 하는 것이다.
반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다른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보다 더욱 심층적으로 과민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인가? 다른 성소수자들이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되는 규범들을 교란한다면 트랜스젠더는 그것들이 전제로 하는 남성 개념과 여성 개념, 그리고 성별 이분법 자체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광의의 트랜스젠더, 즉 MTF나 FTM만을 일컫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성별이분법 구조가 지정해준 임의적 성별을 따르지 않으며 구조에 의해 지정된 성별과 자기자신의 실질적 존재 간의 괴리를 느끼는 집단은 그 존재 자체로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성별 개념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트랜스젠더는 어떤 특수한 형태의 정신을 지닌 인구집단이 아니라, 이분법적 성별 개념의 비과학성, 그리고 그 비과학적 개념들이 인간의 구체적 활동과 존재와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의 감각을 통해 즉자적으로 자기인식한 존재들이다. 그것이 다른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타협이나 억압의 순화가 이루어진 국가들에서도 트랜스젠더 의제만은 피 튀기는 전쟁터의 영역으로 남겨지는 이유이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트랜스젠더들이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성별 개념을 거부하는 존재들이라면 어째서 그들 중 MTF나 FTM 같은 자들은 어째서 또 다른 ‘성별’로 인정받길 바라냐고. 하지만 그것은 층위를 혼동하는 질문이다. 그들이 다른 성별로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느끼는 지정된 성별과 자신의 실질적 존재 간의 괴리에 수반되는 사회적 혐오와 공격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방어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정하게 연착륙하기 위한 당연한 대응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특정한 종류의 여성성, 남성성을 과잉 순응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선차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압박에 대한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성별 개념을 거부한다면 일체의 성별 정정을 시도하지 말라는 주장은 마치 노동자들에게 임노동을 하면 착취당하므로 일자리를 구하지 말라는 주장과도 같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임노동 관계에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폭로하고 그 착취관계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투쟁하면서도, 자본주의 임노동관계 하에서의 노동자들의 권리를 방어하며 권리향상을 위한 싸움에 함께한다. 첫째로는 모든 피억압 인민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권리향상 투쟁이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대자적 각성을 돕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트랜스젠더 인민의 성별정정권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성별평탄화 작업
기실 현대의 성소수자 억압, 성별이분법, 자본주의 단계의 가부장제에 근거한 성별분업은 제국주의의 문제와도 강력하게 묶여 있다. 많은 경우, 성소수자에 대한 국가기관을 동원한 대규모 억압정책은 서구 제국주의라는 매개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계사적으로 보편화되었다.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가 바로 소도미법의 확산 과정이다. 소도미법이란 무엇인가? 소도미법은 ‘정상적인’ 이성 간의 성관계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하고 물리적으로 처벌하는 법제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도미법의 어휘적 기원은 성경 속의 소돔으로, 철저히 기독교적 맥락 아래에서 만들어진 법령이다. 본래 이러한 소도미법은 서구 유태-기독교 사회에서만 보편적 질서의 일부였고, 이슬람권의 경우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동적이었으며,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오히려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법제도였다.
허나 제 1차, 제 2차 산업혁명 이후 서구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폭발하자 서구 열강들은 막대한 유휴상품를 해외로 밀어내고 본국의 자본과잉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상품과 자본의 수출처가 필요해졌다. 정치적-경제적 수탈과 착취를 수반한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과 열강들에 의한 세계 분할이 시작되었다. 즉, 자본주의가 그 자신의 최고단계인 제국주의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세계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침략당하고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침략은 물리적인 형태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제도적 형태로도 일어났다. 서구의 소유권 개념이 강제로 유입되었고, 식민지 국가들의 생산관계 전체가 재편되었다. 마을이나 씨족 단위의 공동경작토지는 개인에게 불하되었고, 전통적 경작권 개념이 해체되면서 지주의 권력이 극대화되었다.
서구적 생산관계가 식민지 사회에 도입됨에 따라 당연히도 서구적 성별 분업 또한 식민지 사회에 적용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영미의 소도미법이 식민지로 수출되었다. 영국은 인도의 직접통치를 시작한지 2년 뒤인 1860년에 인도 형법에 소도미법을 추가했으며 그 후 소도미법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도서국가 지역, 궁극적으로는 대영제국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일정하게 수용 받았거나, 비가시적 상태에 있었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인정 받았던 모든 종류의 동성 간 성행위는 소도미법에 의해 수사와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특정 문화에 대한 억압을 넘어서 서구 기독교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식민지 사회 내에 확립시키고 이에 근거한 성별분업을 절대화 하기 위한 시도였다.
물론 제국주의의 침탈 이전 피식민 국가들의 전통사회에도 가부장제는 존재했으며 성별분업은 존재했다. 허나 제국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진, 서구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의 강제적 수출이 성별 개념을 어떤 지역적이고 유동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제국주의에 의해 외삽된 형태의 성별분업과 가부장제가 기존의 가부장제를 더욱 극단화 하고, 기존 사회의 가족질서를 더욱 억압적인 형태로 변화시켰다는 지점도 주지의 사실이다.
서구 제국주의는 소도미법을 통해 ‘비정상적 성행위’를 규율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더욱 본질적인 요소들을 규율하기 시작했다. 피식민 국가 사회 내에서 인정받고 있는 제3의 성별들을 계획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대다수 식민당국의 주된 목표 중 하나였다. 그들은 수천년 간 현지인들의 구체적 삶이 누적 반영된 결과이자 사회적 실재인 제3의 성별 개념을 미개한 토인문화나 원시적 퇴폐 정도로 규정하고 말살하려 했다. 인도의 히즈라, 필리핀의 바클라, 멕시코의 무헤, 태평양의 파아파피네와 파칼레이티,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투 스피릿 등 현지 사회에서 인정받던 독자적 성별들은 계획적 공동체 파괴와 처벌, 희화화, 때로는 집단적 폭력을 통해 무참히 제거당하였다. 남성과 여성 외에는 그 어떤 성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남녀 성별분업을 고도로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국주의 식민당국은 남녀 외의 성별을 지닌 모든 이들을 국가폭력으로 지워버리려 한 것이었다.
한 편, 서구제국주의는 피식민 국가의 사회성격을 특수한 형태로 변화시켰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식민지의 거점도시들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도입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이식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다수 농촌에서의 봉건적 지주소작관계를 유지 및 강화한다. 모든 종류의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당국은 현지의 두 세력, 즉 도시의 매판자본가와 농촌의 봉건지주를 협력자로 삼는다. 도시의 매판자본가가 없으면 서구제국주의의 상품 및 자본중개에 차질이 생긴다. 봉건지주가 해체되면 피식민 국가 내의 자생적 산업발전이 가능해지고 대중이 토지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국민국가에 대한 열망이 발생한다. 즉, 착취의 영구적 유지를 위해서는 이러한 두 계급을 식민당국이 보호하고 중재하며 하위 파트너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식민당국은 플랜테이션이나 곡물증산 등의 일정한 농촌생산력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그것들이 지주소작제에 균열을 내지 않도록 농촌개발을 일정한 선 안에서 억제하고 후진적 구습들의 유지와 강화를 유도한다.
즉, 식민지 체제는 도시의 매판자본주의와 농촌의 봉건적 소작제가 결합된 특수한 형태의 사회, 식민지-반봉건 사회를 탄생시킨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며, 구체적 인간활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적 실재에 반영된다. 즉 사회적 실재를 탄생시키는 것은 인간노동의 조건인 생산양식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와 봉건제라는 두 가지 생산양식이 중첩된 식민지-반봉건 사회에는 그에 조응하는 형태의 사회적 실재, 그에 조응하는 형태의 가족관계, 즉 봉건제적 가부장제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도 아닌 식민지-반봉건적 가부장제를 탄생시킨다.
봉건제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란 가문과 혈통에 종속되어 가부장의 가족 노동력 경영에 복종하는 존재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란 가내에서 노동재생산을 담당하는 무급노동자 겸 저숙련 산업예비군이다.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는 이 둘이 중첩되었다. 영국령 인도, 일본령 조선, 프랑스령 베트남 등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는 여성이 이 두가지 모두로 규정되었다. 그렇기에 여성억압의 영역에서도 둘 모두가 중첩되었다. 여성은 가문에 복종하고 가부장의 경영에 따라 하는 동시에, 무급으로 노동재생산을 담당하고 때로는 도시의 공장으로 나가 저숙련 장기간 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식민지의 남성은 자본가에게 착취 당하고 지주에게 수탈 당하면서도 식민당국을 대리하여 가내 여성의 노동력을 대리경영하고 대리감시 해야만 하는 주체로 규정되었다. 이것이 그 자신도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면서 더이상 잃을 것이 얼마 없기에 여성과 아동에 대한 알량한 대리감시권과 대리경영권에 집착해야만 하는 식민지 남성성, 그리고 식민지 반봉건 가부장제의 원형적 형상이었다.
중첩적 구조는 트랜스젠더 억압의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했다. 봉건적 가부장제의 혈통-가문 중심 성별규범과, 자본주의적인 핵가족-임노동 중심 성별분업에서 비롯된 억압이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겹쳐지면서 제3의 성에 대한 적대가 더욱 극단화되었다.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제3의 성은 ‘토속적인 미개구습’인 동시에 ‘외부에서 유입된 퇴폐’였다. 이러한 모순적인 규정들은 끊임없이 식민지 사회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강화했다. 이러한 이중적 억압, 계획적 제거, 중첩적 성별분업은 서구제국주의가 자국의 사회적 범주들을 식민지 사회에 강제로 이식하고, 현지 매판자본 및 봉건지주들과 수직적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들이다. 성별분업은 제국주의 자본이 식민지-반식민지 여성들의 노동력을 가장 값싸게 수탈하기 위해 현존체제를 유지·강화하는 물질적 기제이다.
오늘날 서구제국주의 식민모국들은 스스로를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존엄을 인정하는 인권 선진국이라는 식으로 포장하지만, 소위 ‘인권 후진국’이라 불리는 3세계 국가들의 성소수자 억압과 여성 억압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를 우리는 직시해야만 한다. 형식적 주권반환은 이루어졌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수많은 현대의 반식민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가부장제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들은 반식민지 국가들의 매판자본가 및 봉건지주와의 동맹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자원을 국유화하여 자립경제를 발달시키려 했거나, 혹은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지주제를 청산하려 했던 반식민 국가들의 혁명적 지도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이 그 최후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루뭄바, 아옌데, 샹카라가 어째서 죽었는가?
봉건제가 청산된 형태의 반식민지 국가, 즉 대만이나 싱가포르, 남한과 같은 국가들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국가들은,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종속된 국가가 직접적으로 창출한 관료자본을 중심으로 국제적 생산분업체계의 하위파트너로 자리잡아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지점에 있다. 이러한 저부가가치 위주의 산업국가들은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그리고 식민모국에게 배당금과 라이센스 비용, 핵심부품비용 등의 막대한 상납금을 바치기 위해 장기적 저임금을 유지해야만 한다. 장기적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재생산노동력을 최대한 갈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성별분업의 엄격화가 요구되고, 자연스럽게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전면화된 형태의 탄압이 요구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성소수자의 편이 아니다. 그들은 자국 내의 여성과 성소수자에게도 딱히 그들의 억압을 철폐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저 대중적 저항을 순치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정한 양보를 취할 뿐이다. 한 편, 제국주의 열강들이 반식민지 국가들에게는 무엇을 하는가? 식민지적 형태의 가부장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사회, 성별분업을 유지강화 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분업체계 하에서 강요한다. 식민지 민중들이 이러한 강요에 맞서려 하면 저항을 직간접적으로 진압하고 파괴한다. 서구의 언론들은 이러한 진압과 파괴를 ‘민주주의 수호’ 내지 ‘질서 회복’으로 둔갑시켜준다.
억압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법
수많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이 속삭이는 것과 달리 이 모든 억압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세계는 단일하다. 교차성 페미니즘이 말하는 것과 달리 병렬적으로 교차하지도 않는다. 법칙은 단일하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총체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다.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성격 상의 모순으로부터 모든 것이 기인한다. 인간의 구체적 활동,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가 인간의 존재를 형성하기 때문이며, 그 존재가 인간 의식과 사회적 실재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노예제 시대의 노예제, 봉건제 시대의 봉건제,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언제나 모든 것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회성격 상의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수많은 억압들이 파생된다. 민족적 억압, 노동계급 억압, 여성 억압, 퀴어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 등. 하지만 근본적 모순은 그 자체의 본래 모습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구체적 억압의 형태로 인간에게 체감된다. 언제나 보편은 특수를 통해 외화되며, 무한은 개별을 통해 관측된다. 파생된 모순들이 본래의 모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며, 혹은 파생된 모순들 간에도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한 상호관계 속에서 다른 모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주요 모순은 나머지를 모두 주변화 하는 개념이 아닌, 해당 정세에서 다른 모순들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모순을 말 한다. 즉, 주요 모순의 해소를 통해 다른 모순들이 해소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수 있을 때 그것을 주요 모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직관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서 주요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의 근본모순은 그 사회의 성격과 물적 토대가 교체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기에 근본-파생 관계는 고정되지만,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은 사회의 발전과정에 따라 끊임없이 서로의 위치가 교체될 수 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반의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기에 제국주의 열강, 매판자본, 봉건지주와 인민대중 간의 모순이 사회성격 상의 근본모순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 당시에는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간의 모순이, 1차 국공내전 당시에는 봉건지주와 피억압계급 전체 간의 모순이, 2차 국공내전 당시에는 국민당을 중심으로 뭉친 지주-매판자본의 정치적 동맹과 이에 반대하는 대중들 간의 모순이,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 이후 비로소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모순이 주요 모순으로 자리잡는 등 끊임없이 주요-부차 간의 관계가 교차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다수의 맑스주의자들은 두 가지 오류를 저지른다.
첫 번째 오류는 주요모순을 근본모순처럼 하나의 사회성격 내에서 불변하는 개념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저지르는 자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 혹은 미제국주의와 민중 간의 모순 등 자신들이 주장하는 특정한 모순관계를 사회의 고정불변적 근본모순이자 주요모순으로 간주하는 교조적이고 관념론적인 정세관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오류는 근본 모순과 주요 모순을 나머지 모든 모순을 주변화 하는 모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즉 근본 모순과 주요 모순만으로 사회 내의 모든 역학 관계와 억압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머지 모순들은 운동의 보조역량이나 ‘부문’적 의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협한 사고관에서 비롯된다. 여성억압, 퀴어억압, 트랜스젠더 억압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무관심 내지 정치적 주변화는 바로 이러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 두 가지 오류는 모두 모순 개념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과제를 단순히 노동계급 내의 협소한 이해관계로 이해하고 사회 전체의 억압을 타도하는 정치적 주체이자 인민의 호민관으로서의 정치적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될 수 없도록 하는 중대한 손실을 운동에 가하였다. 사고관이 이러한 두 오류, 모순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오염된 자들은 여성운동, 퀴어운동, 트랜스젠더운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사회운동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혹은 더욱 심각하게는 ‘운동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정세 분석’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주의, 배제주의 이데올로기를 이론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이자 맑스주의 과학의 포기에 불과하다.
기실, 구호 상으로는 이러한 의제들을 지지하고 동감을 표하는 자들 또한 사회주의 혁명만 이뤄지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 갇혀 피억압 대중들에게 적절한 강령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오류 또한 본질적으로는 모순 개념에 대한 몰이해, 두 번째 오류에 기인하는 것이다. 구체적 억압의 관계들 속에서 구체적 해방의 조건을 모색하고, 특정한 모순의 해소를 다른 모순을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메시아적 대안으로 사고하기 보단 다른 모순들이 해소될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맑스주의 정치는 총체적 억압에 대한 총체적 반격이 아닌 그저 협소한 노동자주의(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로부터도 유리되어 있는)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사회운동진영 내에 팽배해 있는 교차성 담론 또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교차성 담론은 수많은 억압들이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일정한 진보성을 지니지만 그러한 진보성은 바로 교차점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지점에서 끝나버린다. 교차성 담론의 입장에서 억압들은 다종다양하고 다원적이며 특정한 원점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억압들이 한 데 엉키는 강력한 구심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해명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전략은 외양적으로는 모든 운동들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긍정적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분석 자체에 대한 포기이다. 왜냐하면 모든 억압들이 완벽하게 동등한 상태로 병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안에서의 약한 고리를 찾는 운동적 분석은 완전히 봉쇄되기 때문이다. 나열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진정한 연관성은 그 연관을 가능케 하는 인과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갈 때, 그리고 그 인과를 규율하는 상위의 법칙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때 의미값을 지닌다.
억압들의 교차점과 구심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억압들이 어떠한 역학, 즉 어떠한 지배적 법칙에 따라 상호연관과 상호침투를 수행하는지 규명할 수 없다면 사실 억압들 간의 상호연관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담론은 구체적 해방의 조건과 투쟁의 전략을 도출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지침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그저 여러가지 사회운동단체들이 가끔가다 공동으로 연서명을 내거나 특정한 법제에 대한 연대체를 꾸리기 위한 알리바이 정도로 소비될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법적, 제도적 평등을 최대과제로 삼는 제도주의-자유주의로의 후퇴를 불러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실은 운동전략 자체를 산출할 수 없기에 법적, 제도적 평등의 달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교차성 담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일정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중심점, 구심점을 찾는 시도 자체가 의제들 사이에 지적 위계를 만들고 또다른 억압구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이 글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반론에 대해 재반론하고, 의심에 대해 재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중심점과 구심점을 폐기하면 의제 간의 위계가 생겨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지적 위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연력에 의한 위계, 무질서에 의한 위계가 발생한다. 활동가와 NGO 간부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의제, 더 많은 후원과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의제가 자연스럽게 위계의 최정상으로 상승한다.
결국은 그러한 의제를 담당하는 사회단체가 운동진영 내에서의 권력을 쥐게 되고 운동 내의 나머지 자원들은 해당 권력을 바탕으로 위계적으로 배분된다. 이는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이른바 교차적 신사회운동들의 결과물이다. 위계는 어디서든 존재한다. 이를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외적 자연력과 일부 간부, 언론에게 선택받은 스피커들의 관심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분석, 과학적 조사에 의해 결정되는가의 차이는 절대로 적지 않다. 교차성 담론은 전자로 귀결된다. 공산주의자들은 후자를 수행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운동과 우리의 운동이 계급적으로, 당파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다.
놀랍게도 일부 맑스주의 조직들은 교차성 담론을 적극 수용하여 여성의제나 퀴어의제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틀로 삼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학설이나 운동들에 대한 개방성이나 유연성의 반영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이론을 새로운 의제들로 확장시키기 귀찮아하고 그저 사고의 하청을 외주에 맡기고 싶어하는 게으름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유연한 적응성을 증명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론의 영역을 자신들의 협소한 관심사의 범주 안에 한정시키고 그 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해명의 시도도 하지 않는 편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맑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과학의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트랜스젠더 인민의 고통과 억압을 맑스주의의 언어로 이론화 하지 못한다면 일반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그 자체로 본래 목적의 달성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근본모순과 파생모순,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이라는 인식적 무기를 통해, 사회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각종 모순의 상호연관성과 총체성의 틀로 억압들을 바라봐야만 비로소 체제의 약한고리를 탐색하고 그에 맞는 운동의 전략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없는 항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억압들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항해도를 그려야만 한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트랜스젠더
우리는 앞서 현 사회에서의 트랜스젠더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트랜스젠더란 정치적으로 무엇인가? 반동적 세력들에게 있어서 트랜스젠더는 사회의 핵심적 가치관을 교란하는 집단이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트랜스젠더의 중요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에게 트랜스젠더란 무엇인가? 그들 중 대다수는 트랜스젠더를 병렬적인 억압을 받고 있는 피억압 민중의 일부 부위로 파악한다.
억압에 대한 모든 종류의 조사는 그 피억압자 집단이 어떤 주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마오쩌둥이 후난지역 농민들의 상황을 분석할 때, 그는 단순히 농민들이 사회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착취 당하고 있는지만을 분석하지 않았다. 마오는 농민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농민들이 어떻게 중국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가를 규명하였다. 그것이 유일하게 올바른 사회조사의 방법론이며, 우리가 트랜스젠더 인민을 규명할 때 취해야 할 태도이다.
트랜스젠더란 무엇인가? 퀴어, 성소수자 내에서도 가장 억압받는 집단이다. 가족구성권 이전에 그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기 위한 기초직 지반마저도 대다수의 경우 허락받지 못하는 집단이다. 성별 간의 횡단 가능성을 그 자신의 존재로 증명함에 따라, 성별이분법과 성별분업에 근거해 인민대중에 대한 고도착취를 유지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필연적 적으로 규정된 이들이다.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이란 무엇인가? 단일한 원인에 의한 다층적 억압에 놓여있는 집단이다. 하지만 그 다층성을 다층성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들이 노동계급으로서 겪는 착취와 억압, 트랜스젠더로서 받는 배제와 억압을 분리된 형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은 사회구조적으로 상당수의 직장으로부터 배제 당한다. 어떻게든 정체성을 숨기고 안정된 직장을 찾는다 하더라도 언제든 강제적 아웃팅과, 아웃팅에서 기인한 해고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환경으로 내몰린다. 혹은 더욱 열악한 불법적 노동에 종사하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거나, 상시적 산업예비군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동시에, 트랜스젠더 노동계급 중 성확정 수술을 희망하는 이들은 일반적인 봉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수술 비용을 마련해야만 한다. 성확정 수술을 진행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들의 경우에도 대다수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호르몬 시술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이는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 투잡, 쓰리잡, 혹은 장기적 채무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요소이다. 성확정 수술과 호르몬 시술이 비싼 이유는 단순히 그것들의 희소성 내지 원천비용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수술비와 시술비의 명목으로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서 막대한 비용을 수취하는 동시에, 그들을 끊임없이 정상사회 바깥으로 밀어낸다. 직장을 구하는 데 있어 법적 성별 정정이 사실상 필수적인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 성확정 수술과 그 비용의 지출은 사회적으로 강제되며, 이러한 사회적 강제가 트랜스젠더 노동계급들을 더욱 위험한 노동현장으로 내몰거나, 혹은 지정성별로의 재정체화를 유도해 기존 성별분업체계로의 재편입을 강제한다.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다. 인간의 완전한 상실로 내몰리고, 그렇기에 인간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자들. 스스로를 해방하여 다른 모두를 해방하고, 다른 모두를 해방하여야만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는 자들이다. 맑스는 경제적 의미에서의 노동계급을 그 자체로 프롤레타리아로 언명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프롤레타리아의 질료이다. 즉, 노동계급일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그 자신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깨닫고 역사적 주체로 설 때 비로소 모든 피억압 인민들을 대변하여 혁명을 영도하는 정치적 프롤레타리아, 역사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든 노동계급이 정치적 프롤레타리아로 각성해야 마땅하겠으나, 오늘날의 노동계급 내에서 정치적 프롤레타리아는 극히 일부이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은 정말로 잃을 것이 없는 집단일 뿐만 아니라 피억압 인민이 겪는 각종의 모순과 억압을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체현한다는 지점, 그리고 그 자신의 해방이 사회 전체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는 지점에서 가장 정치적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집단이다.
남한 노동계급운동의 현 상황은 공산당의 건설을 요구한다. 공산당이란 무엇인가? 공산당은 노동계급 전위정당이다. 노동계급 전위정당이란 무엇인가? 노동계급 내의 가장 선진적인 분자들로 구성되어 노동계급 내의 다른 분자들을 견인하고 그들을 정치적 프롤레타리아로 상승시키는 정당이다. 당은 노동계급의 많은 선진적 부위들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당의 건설과정은 언제나 그 건설과정의 고난한 초창기 과정을 끈질기게 수행하고 추진할 인자들의 초기축적을 필요로 한다. 당의 초기축적은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잃을 것이 없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은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잃을 것이 없는 자들 중 하나이다. 물론 그들이 그 자체로 정치적 프롤레타리아인 것은 아니다. 모든 피억압대중은 처음에는 즉자적 형태로만 스스로의 억압을 인지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이 남한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전위정당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인자의 초기축적에 있어서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 의제에 대한 수동적 대응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고, 강령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해방의 비전을 제공하여 그들을 당건설의 초석을 쌓는 해방의 대열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시혜와 온정을 넘어서기
그렇다면 우리가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전체 트랜스젠더 대중에게 제시해야 할 강령은 무엇인가. 많은 트랜스-친화적 맑스주의 조직들이 이미 내세우고 있는 구호들이 존재한다. 성확정수술 비용의 국가책임, 법적 성별정정의 자유화, 차별금지법제의 제정, 다양한 종류의 가족 구성권 인정 등. 물론 그것이 당면의 최소강령으로 내세워질 수는 있으며, 매우 진보적인 조치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충분치 못하며, 그러한 조치들 자체로 트랜스젠더의 억압을 철폐할 수도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사회주의적 형태의 개혁을 통해 트랜스젠더들에게 몇 가지 편익들을 시혜적으로 베풀겠다는 온정주의적 공약들에 불과하다.
어째서인가? 성확정수술 비용을 국가가 책임지고 법적 성별정정을 자유화하며 차별금지를 법적으로 제정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성확정수술과 호르몬시술, 그리고 그 이전에 이루어지는 병리학적 성격의 정신과 진단 전반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의지 보다는 의료권력의 판단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대독점자본의 의료산업에 의해 수직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거대한 의료 관료집단은 언제나 사회의 특정 부문을 병리화 하고 격리하는 과정을 통해 지배체제에 봉사해왔다. 부르주아 정신의학과 그들이 책정하는 ‘질병코드’는 객관적 과학이라기 보단 성별분업과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유지보수하기 위한 당파적 학설에 더욱 가까운 성격을 지녀왔고,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료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한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렇기에 단순히 트랜스젠더 대중이 요구하는 의료시술 등에 대한 비용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같다. 인민에게 권력을 돌려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게 권력을 돌려줘야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신의학적 연구를 트랜스젠더가 지도해야 한다. 트랜스젠더를 규정하고 분류하는 보건의료체계를 트랜스젠더가 통제해야 한다. 트랜스젠더의 외성기에 대한 물리적 시술과 호르몬 요법의 전 과정을 트랜스젠더가 자기결정 해야 한다. 트랜스젠더 인민이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트랜스젠더 억압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시해야 할 제 일의 강령이다.
법적인 성별 정정을 자유화하는 것 또한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성별의 역사적-사회적 맥락, 성별분업체제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관점이다. 단순히 국가가 특정한 개인에게 여성에서 남성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법적 분류를 변경할 권리를 주는 것은 과도기적 최소강령으로는 일정하게 유의미 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트랜스젠더 대중들을 다시금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틀로 복귀시키고 포섭시키는 정책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국가가 구체적 인간의 성별을 둘로 나누어 법적으로 정의하고 이에 따라 억압적 성별분업체계를 제도적으로 재생산하는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과도기적으로는 성별 정정의 자유화, 제3의 성의 법제화를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개인의 성별을 관리하는 체계 자체를 분쇄하는 것이 공산주의자의 강령이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 모든 인간이 그 자신의 존재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성별분업체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며, 유일하게 혁명적일 수 있는 입장이다.
공산주의의 비전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외부의 강제 없이 개인의 주관적 의지가 마음대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 개념은 거대한 사기극이다. 이러한 자유관은 인간을 인간이 처해있는 물질적-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떼어놓는다. 아무런 사회적 중력도 받지 않는 진공 상태의 원자적 자아가 존재하고, 그 자아가 자유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인간관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적 생산을 통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와 역사적 토대의 반영물이다. 이러한 조건들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킨 채로 주장되는 자유 개념은 마치 날개도 없이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날아 오르겠다는 망상과도 같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신이 원해서 현재의 회사에 취직했으며 자신이 원해서 특정한 상품을 구매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와 가치법칙이라는 ‘맹목적 필연’, 즉 인간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작동하는 필연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자유관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구조적 강제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자유관은 필연성의 지배를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유물론적 자유관은 무엇인가? 유물론적 자유관은 가상의 독립적 인간 상태를 가정하여 필연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인간 의지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이나 사회법칙을 모를 때 인간은 그 법칙의 맹목적인 노예가 된다. 원시인이 번개를 신의 진노라고 여기며 두려워 했던 것과 같다. 하지만 인간이 전자와 전기에 대해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피뢰침을 만들고 전기를 통제하며 번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사회적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은 자본주의의 주기적 공황과 고도착취에 순응해야 하지만, 그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전복할 혁명의 무기를 쥐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맑스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향하는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생산과 물질대사의 주인이 되어 맹목적으로 날뛰며 인간을 필연의 노예로 만들던 외적 법칙들을 인간의 이성과 계획 아래 두는 것, 그것이 공산주의 기획의 본질이다.
본문의 초반부에서 규정했듯 성별은 생물학적 숙명도 아니거니와, 주류 퀴어 담론이 주장하듯 물질적 토대와 분리된 채 개인의 내면적 의지로 발명하거나 수행할 수 있는 순수관념적 선택지도 아니다. 성별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특정한 생산관계였으며, 특히 현 단계에서는 자본주의적 분업과 재생산 노동의 양식이 인간의 신체와 경험 위에 주조해 낸 확고한 사회적 실재다. 즉, 현 체제에서 개인에게 성별이 각인되는 현상은 자유로운 자아실현의 결과가 아니라, 성별분업이라는 맹목적인 사회법칙이 인류의 물질대사를 이분법적 착취 구조에 옭아매며 강제한 족쇄인 것이다.
따라서 성별의 해방, 트랜스젠더의 해방은 부르주아적 법질서 안에서 '내가 원하는’ 성별로 승인받을 법적 권리를 확장하는 방식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맑스주의가 말하는 참된 자유란 맹목적 필연성의 과학적 인식과 주체적 장악이다. 성별이라는 사회적 실재를 낳은 이 억압적 필연성, 즉 자본주의와 개별화된 무상 재생산 노동이라는 토대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 토대 자체를 변혁하는 것. 그리고 인류가 맹목적 분업의 강제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사회적 생산를 계획하는 것만이 성별이분법이 그 물질적 토대를 잃고 마침내 역사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만은 불충분하다. 성별분업의 토대를 변혁하는 것은 해방의 조건을 창출할 뿐, 해방을 즉시 이행시키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르주아 성별 관념을 지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전 파트에서 언급했듯이 트랜스젠더 인민에게 그 자신의 신체에 적용될 의료과정을 통제할 권리를 주는 것, 트랜스젠더에 대한 보건의료체계와 정신의학을 트랜스젠더 인민이 직접 감독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성별분업과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반동적이고 후진적인 의식과 문화에 맞선 전면적 투쟁을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지속하는 것이 요구된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즉각적으로-그리고 선언적으로 철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대중들의 머리 속에, 관습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과도기적인 조치는 인민들이 스스로 체감하는 그 자신의 성별을 제도 하에 반영하는 동시에, 제3의 성을 국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성별 개념은 이러한 제도적 변화, 문화적 투쟁, 그리고 성별분업적 토대의 개조를 통해 점차 와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과업은 성별 개념 자체를 사회적으로 지양시키는 것, 즉 특정한 인간집단에 대한 억압과 착취, 수탈을 위해 기능해왔던 성별 개념을 폐기하고 오직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는 인간신체의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차이들만을 남기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간이 특정한 성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총체적으로 변혁된 사회이다.
결론
성별 개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이 세상에 나왔다. 여성집단의 세계사적 패배로부터 산출된 고정적 성별이라는 개념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득을 위해 봉사해왔다. 그것은 물질적 착취의 사회적 반영인 동시에, 물질적 착취를 고도화하는 지배체제의 하위 파트너였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억압은 단순히 다종다양한 사회적 문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위 중 하나이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필연이다. 트랜스젠더는 이 맹목적이고 외적인 필연의 균열로부터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전면적 억압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형태를 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하였듯이, 거대한 고난은 거대한 영광을 예비한다. 사회의 중층적 억압에 짓눌리고, 사회의 다종다양한 모순을 체감하는 주체는 그 자신의 존재 자체로 사회총체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조할 대자적 주체의 가능성을 지닌다. 트랜스젠더는 피억압자이지만, 무력한 피억압자가 아니다. 총체적 억압에 대한 총체적 반역을 가능케 할, 현대의 군주의 질료, 정치적 프롤레타리아의 가능태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 의제를 외면하거나 병렬적 억압들 중 하나로 나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 인민에게 주목해야만 한다. 트랜스젠더 인민 그 자신의 해방과 인류의 자유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들의 기획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트랜스젠더 노동계급들에게 제공할 정치적 강령을 준비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패배하고 말 것이다.
본문의 본래 목표는 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보고>에서 농민집단에 대해 취한 방법론을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 적용하는 것, 즉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이 현 사회에서 겪는 억압의 기원과 형태를 해명한 다음 그들을 단순한 피해자를 넘어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그들의 주체적 역량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을 본문에서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본고는 트랜스젠더의 사회구조적 억압과 현 체제에서의 위상에 대해 탐구하였지만, 남한 트랜스젠더 대중의 구체적 삶에 대한 현장적 조사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문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엥겔스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수행한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육화된 형태의 사회조사가 요구된다.
모든 인식의 발전은 추상에서 구체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이행한다. 본문은 추상적 사회 분석에서 출발하여 구체적 강령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였다. 이후 요구되는 사회조사는 구체적 현실로부터 추상적인 사회성격의 문제로 도약하는 시도이다. 사회조사를 통해서 추상과 구체 간의 변증법적 종합이 이루어져 본문이 물리적 힘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역사적 조건 하에 성별분업의 해소와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지양이라는 이중의 사명을 띈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에게 우리의 작업이 앞으로 그들이 행할 항해의 지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