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정치세력 분석
민중운동 편
이 글은 웹진 “반란”에 연재되어온 “남한 정치세력의 역사적 분석”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앞서 게재된 보수정당과 민주당에 대한 분석이 적에 대해 알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글인 민중운동 편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한 것이다. 이번 편은 본래는 진보정당운동 편으로 계획되었으나, 진보정당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성립된 배경과 역사를 논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진보정당운동을 포함하여 남한의 변혁운동, 민중운동 전체를 일정하게 톺아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남한 변혁운동의 전개과정을 세 시기로 나뉜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으로 이어지는 광복 전후 국가건설운동의 제1기,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전개된 민족민주운동(소위 ‘민주화운동’)의 제2기, 그리고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진보정당운동의 제3기를 차례대로 살펴본 후,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성격과 그 성과를 평가하고, 현재 우리가 놓인 제조건들 하에서 어떠한 운동적 방향성을 모색해야 할 지 논해볼 것이다.
제1기 - 국가건설운동
인민위원회 건설과 미제국주의의 침략
제1기의 운동은 국가건설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에 이르기까지 제1기 민중운동의 총노선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와 봉건제로부터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당면한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국가건설운동의 첫 시작점은 인민위원회 건설 운동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마을 단위로부터 전국 단위까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상향식 민주적 자치기구였는데, 해방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건국동맹(이후 ‘건준’)의 조직망과 그 대의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여 1945년 11월 기준 7개 도, 12개 시, 131개 군 모두에 빠짐없이 인민위원회가 건설되었다.
각급 인민위원회는 실질적 행정과 식량배급, 치안유지, 적산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인민위원회들의 대표들이 선출한 중앙인민위원회는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 실질적인 정부로 기능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지주가 버리고 간 땅을 농민들에게 불하하였고, 일본인 사장이 버리고 간 공장과 기타 적산 산업시설들의 운영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에게 맡겼다. 전평은 현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공장관리위원회를 구성해 노동계급에 의한 생산통제를 실행에 옮겼고, 공장관리위원회는 지역인민위원회와의 협력 하에 국민경제를 유지하는, 자치-자립적 산업구조의 건설이 시도되었다. 이렇듯 인민위원회 운동은 노동자와 농민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국민적-대중적 권력 기관이었으며 인민위원회가 그 바탕이 되어 건국한 조선인민공화국 또한 기존의 부르주아 역사관에서 논하는 바와는 달리 실질적이고 민주적인 대중권력에 비롯한 정당한 국가권력이었다.
이후 1945년 9월 미군의 북위 38도선 이남 남한 지역 진주와 인민위원회의 불법화 및 탄압, 그에 따른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정은 단순한 행정조치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자립적-민주적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이었으며 대중의 민주적 자치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지주-매판자본가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식민지적 사회구조를 재확립하고자 하는 파괴적 행위였다. 정당한 권력기관인 인민위원회에게 미군의 진주를 가로막거나 그들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방해할 정치적-군사적 역량이 없었다는 것은 남한의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3당체제와 민주주의민족전선
건국준비위원회가 그 바탕이 된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의 전면적 탄압정책 하에 그 역량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남한지역의 민중운동은 정당운동을 통해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45년 8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시작으로 연안파 인사들이 주도한 조선신민당,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잔여세력을 기반으로 한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이 건설되었다. 이들 3당을 중심으로 민족적-진보적 인사들이 뭉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이 출범하면서 민중운동의 중심은 정치정당들로 변화하였다. 민전에 속한 3당 역시 인민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와 봉건적 지주-소작관계에서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유지하였다.
허나 동시에 민전과 공산당, 신민당, 인민당의 3당은 미군정의 침략성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미군정과 협력 하에 국가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룩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정판사 위조지폐조작사건[1]등의 의도적이고 우회적인 형태의 탄압이 부상하며 조선공산당이 사실상 불법화된 후에도 이는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소극성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뒤이은 10월 항쟁에서 증명된다.
9월 총파업 직전 남한 민중의 삶은 파탄 일보 직전이었다. 현지 실정에 무지한 미군정의 무능한 식량정책으로 쌀값은 일제 말기보다 수백 배 폭등했고, 길거리에는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친일경찰이 활보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전평의 공장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산업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던 적산공장들을 일방적으로 압수하여 친일지주와 매판자본가들에게 불하하였다. 결국 1946년 9월 24일, 전평 산하 부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의 체신, 인쇄, 섬유 등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동시다발적으로 파업투쟁에 나섰다. 이들의 요구는 "식량을 배급하라", "테러를 단속하라",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지극히 정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업 지도부는 9월 총파업이 미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조선공산당 또한 입으로는 비합법-합법 배합투쟁의 신전술(각주 필요)을 외쳤으나 이를 적극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은 9월 총파업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하였고, 미군 장갑차와 극우 테러조직들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며 파업을 분쇄했다.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대중투쟁에 대한 과감한 개입과 지도력 발휘를 조금도 시도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은 미군정의 만행에 분노해 계속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시위 노동자가 사망하자, 이튿날 수만 명의 시민들이 시신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항쟁은 순식간에 남한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민중은 목숨을 걸고 권력 기관을 장악하며 국가 권력의 공백을 메워갔다. 그러나 이 결정적 정세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민전 지도부는 대중의 무장 투쟁을 정교하게 조직하거나 지도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하지 않았고, 결국 민중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군사적 중심을 잃은 10월항쟁은 미군정의 압도적인 물리력과 친일 경찰의 잔혹한 보복 및 학살 앞에 각개격파 당했다.
3당 합당과 남조선로동당의 조직
1946년 11월, 10월 항쟁의 불씨가 꺼져갈 때가 되어서야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은 단일대오인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전평의 핵심 조직들이 와해되고 인민위원회의 합법적 대중 기반이 송두리째 와해된 상태였다. 남조선로동당은 구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즉 비합법투쟁과 합법투쟁의 배합을 계승하였으나 미군정이 자신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과소평가했고, 합법적인 정당 활동을 통해 미군정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합법주의적 환상을 버리지 못하였다. 인민들이 총칼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남조선로동당이 임박한 탄압 앞에서 당 지도체계를 완전히 지하화 한 것은 47년 9월 미군정이 남조선로동당을 불법화 한 이후였다.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거치며 미군정의 전면적인 체포령과 검거선풍이 불어닥치자 박헌영을 비롯한 지도부는 이전에 월북하였고 남은 남로당 조직들은 조금도 준비되지 않은 급박한 지하화와 유격대-야산대 전략 등 극단적인 군사주의 노선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에서 남로당으로 이어지는 박헌영 지도부는 결국 운동의 초반에는 우경기회주의, 중반에는 갈팡질팡하는 무노선적 배합주의, 후반에는 모험적 군사노선에 천착하는 극좌맹동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총괄하자면, 남로당은 대중을 믿는 대신 미-소 간의 타협이라는 환상을 믿었으며, 민주집중적 원리가 아닌 자기 파벌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서클주의적 원리를 따랐고, 인민을 무장시키기 보다는 인민을 볼모로 미제국주의와의 협상에 골몰하였다.
비록 헌신적인 전사들이 4.3 항쟁과 뒤이은 여순 항쟁 당시 미군정과 친일분단세력에 맞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가로막기 위해 무장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하였지만 그들 또한 정국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호기를 놓치고 대중적 토대가 붕괴한 상태에서의 무장 투쟁은 고립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과 북 간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남로당은 당시 월북해 있던 지도부의 기대와 달리 남한 내에서 그 어떤 주요한 군사행동이나 대중 봉기를 조직해내지 못했다. 이미 지도부의 노선적 파산과 유격대 전술의 참혹한 실패로 인해 세포 조직과 대중적 결합이 완전히 파산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력을 동원한 조국통일 시도가 실패하여 남한 지역에 이승만의 파시스트 통치가 장기화 되자 국가건설운동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남한 민중운동은 오랜 암흑기를 마주하게 된다. 이후 반공적 진보주의자들이었던 소위 혁신계 인사들이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사이에 몇 차례 의회 진출에 성공한 바 있으나 그들이 유의미한 정치적 블록이나 민중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으며 그들의 문제의식은 미제국주의와 한반도 민중간의 모순에 닿지 못하는 친미 타협적 개량주의 노선에 그치는 수준이었기에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국가건설운동을 돌아보며
제1기 국가건설운동은 어째서 실패하였는가? 그 이유는 네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로, 운동의 지도부는 미제국주의와 남한 민중 간의 모순이 투쟁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적대적 모순임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운동의 지도부는 끊임없이 미군정에 대한 시각에 있어 혼란을 빚고 민중에게 미제국주의에 대한 올바른 적대관을 선전하지 못하였으며 미군정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둘째로, 운동의 지도부는 대중의 힘을 믿고 대중의 역량에 깊숙히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미국과 소련 간의 합의와 협상, 그리고 소련의 정치적 선택을 기다렸으며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주체세력이 한반도 인민임을 망각하였다. 이는 신탁통치에 대한 잘못된 입장을 낳았으며, 해방공간의 정세들에 대해 일관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낳았다. 셋째로,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이 필연적임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지도부를 지하화 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부족하였으며 이러한 합법주의적 망상으로 인해 미군정의 대규모 검거령 앞에서 조직의 다수를 허망하게 잃어야만 했다. 넷째로, 계급 간의 전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검거령 이후 광범위한 대중 속으로 산개해 대항적 권력과 인민의 무력을 건설하기보다, 극좌맹동주의로 전환하여 야산대 전술, 유격대 전술과 같은 미숙한 군사주의적[2] 오류를 저질렀다.
종합하여 보면, 제1기 운동의 실패는 우리에게 두 가지 핵심적 원칙을 보여준다. 첫째로, 미제국주의와 파시스트 세력과 민중 간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이며 이는 타협이나 협상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모든 종류의 변혁운동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대중을 믿고 대중을 의지하며 대중을 각성시키고 대중을 무장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 대중을 믿지 않는 순간 모든 운동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제 2기 - 민족민주운동
4.19 세대의 등장
제2기의 민중운동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형 하에서 사회 모순 해소를 추구하는 민족민주운동(소위 ‘민주화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제2기의 운동은 남한 변혁역량의 남로당으로의 집중에 뒤이은 남로당의 완전한 파괴라는 열악한 객관적 조건 하에서 형성되었다. 제2기 운동을 낳은 것은 1960년 4.19 혁명이었다. 4.19 세대는 제1기의 운동과 조직적-인적으로 단절되어 있었으며 진지한 변혁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이들의 세계관은 국가로부터 주입된 반공주의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혁명이라는 대중의 승리는 새로운 유형의 주체들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들은 자유주의적 정치의식에 머무르거나, 5.16 당시 자칭 ‘혁명정권’을 표방했던 박정희와 군부를 지지하거나, 제도권 내의 혁신계 인사들에게 기대를 품는 등 일관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정치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기본협정 체결과 이에 맞선 대중적 저항 속에서 단련되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한일기본협정 체결에 맞선 투쟁 속에서 투쟁의 주체들은 남한의 식민지적 조건과 절대적 종속성을 자각하면서 자유주의 정치의 파산을 인식했다. 이들은 민족적인 종속과 식민적 상황의 해소를 통한 민족자립의 쟁취,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이중의 과업을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인식이 민족민주운동이라는 구체적이고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배태하였다.
초기 민족민주운동의 세계관을 형성한 이념은 자유주의와 반공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어 수입된 제3세계의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과 남미의 종속이론[3]이었다. 대학가에는 ‘사상계’등의 잡지를 통해 나세르와 네루, 수카르노 등 제3세계 민족주의 지도자와 그 정권들의 이념노선과 정책들에 대한 문건들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심화되던 대미종속과 대일종속이 보호무역과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민족부르주아적 당파성을 지닌 경제이론이 전파되었다. 이는 민족 내부의 치열한 계급투쟁과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국내 민족자본가들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초기 운동의 한계였다.
통일혁명당과 전위조직운동
다만 이 시기 통일혁명당이 1기 운동 이후 최초로 반제민족해방과제와 반봉건민주주의과제를 제시하고 인민민주주의 혁명[4]이라는 구체적인 변혁노선을 확립하여 전위조직을 지향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이전 남로당 잔여세력들이 전후 구축한 조직망을 규합하였으며 무기의 축적과 부문별 조직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통일혁명당은 전국 조직이었으며 북과의 직접적 접촉 하에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무기를 축적하는 등 무장력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변혁과제가 계급 간 전쟁을 매개하는 이상 무장투쟁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무장력의 건설은 언제나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기반 하에 이중적 권력의 형성과 병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기반의 창출이 불가한 상황에서의 무장력 축적은 보안 상의 취약점을 불러오기에 통일혁명당의 군사주의 노선은 쿠바 등의 포코이론[5]을 남한에 무맥락적으로 적용한 오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통일혁명당의 일제검거 이후에도 재북 인사들을 중심으로 통일혁명당 평양지도부를 형성하는 등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전위조직운동의 흐름은 향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으로도 이어진다.
청년학생들의 급진화
광범위한 청년학생들이 노동계급운동과 결합하게 된 것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그 계기로 한다.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절규와 분신은 민족민주운동의 과업을 추상적인 형태로만 인지하고 있던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계급문제를 직면하도록 했다. 이 시기부터 노동야학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청년학생들의 노동계급운동과의 결합은 초기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 도시산업선교회 등 자유주의적 종교인들에 기반한 인도주의적인 조직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공장이라는 거친 노동계급의 현실과 직접 접촉하면서 거대한 사상적 충격을 마주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지식인의 시혜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억압적인 유신독재와 식민지 체제를 밑바닥에서부터 흔들 수 있는 진정한 변혁적 주체는 다름 아닌 노동계급임을 그들은 온몸으로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을 경유한 맑스주의 문건들이 지하에서 암암리에 유통되었고,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이 대학가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급진화의 핵심적 결절점은 1980년의 5.18 광주항쟁이었다. 국가와 지배계급, 파시스트 통치기관에 의한 광범위한 학살과 이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무장항쟁, 그리고 미제국주의의 방관과 신군부 지원은 기존 민족민주운동의 불철저했던 세계관에 파괴적 충격을 가져왔다. 오월 광주의 함성, 오월 광주의 피는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유약한 환상과 기대는 오월 광주의 그 피투성이 진실 앞에서 원자 단위로 분쇄된 것이다. 1980년의 광주를 기점으로 청년학생운동은 광범위하게 맑스주의를 수용하였으며, 그것을 남한의 현실에 주체적으로 적용하여 남한의 현실에서 도출된 계급적, 민족적, 민주적 제 과제들을 과학적 세계관 하에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무림-학림 논쟁에서 1차 사회구성체 논쟁까지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와 이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무림-학림 논쟁으로 이어졌다. 주류 그룹이었던 무림은 학생운동이 노동자, 농민운동이 성장 할 때까지 대기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5월 15일 서울역 회군[6] 당시 회군을 옹호했던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시위투쟁의 자제를 주장함과 동시에 민중운동의 토대가 강화되어야 함을 제기했으나 민중운동의 토대적 강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반면 소수 그룹이었던 학림은 학생주체의 선도투쟁을 통해 국가권력과의 투쟁에서 전면에 서야만 대중들의 의식 또한 깨어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이후 무림 그룹은 1982년 야학 비판(이하 ‘야비’)을, 학림 그룹은 학생운동의 전망(이하 ‘전망’)문건을 제출하였다. 야비는 기존의 야학운동과 산업선교운동을 비판하며 지식인이 직접 공장으로 이전하여 스스로의 노동계급화를 이루고 노동계급운동의 강화를 꾀하여야 함을 주장한 반면, 전망은 학생운동이 민중운동의 선봉으로서 주체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야비-전망 논쟁은 1983년 경 MC-MT 논쟁으로 이행되었다. MC(Main Current) 그룹은 무림 그룹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이들로, 변혁의 주력군이 노동계급임을 재확인하고 학생운동의 독자성을 포기하여 노동계급운동에 대한 보조자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MC 그룹의 운동관은 정치성이 사실상 배제된 전투적 노동자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운동관은 노동계급운동을 강화하기보다, 학생운동이 지닌 정치적 역동성과 사상적 선도성을 스스로 거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MT(민주화투쟁위원회) 그룹은 학림그룹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이들로,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예속국가독점자본주의에 기반한 종속파시즘 체제로 규정하고 혁명의 성격을 NDR(민족민주혁명)으로 규정하였다. MT 그룹은 남한의 식민지성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보다는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라는 모호한 틀로 그 종속성을 해명하고자 하였고, 민족민주혁명에 있어서 노동계급의 영도에 대한 구체적 인식 없이 추상적인 ‘제계급들 간의 연합권력’을 민족민주혁명의 동력이라 호명하였다. 다만 MT 그룹은 MC 그룹과는 달리 전위 조직의 부재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노학연대를 통한 전위건설을 주장했다는 지점에 그 부분적 진보성을 견지하였다.
제1차 사회구성체 논쟁을 거치며 NDR론의 한국사회에 대한 관점은 주변부 자본주의론에서 반식민-반자본주의론으로 갱신되며 남한의 반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획득하였다. 허나 반식민-반자본주의론은 반자본주의 우클라드[7]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우클라드인지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으며 반식민-반자본주의 하에서의 독점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산업자본의 대규모 팽창에 대해 해명하지 못하였다. 또한 여전히 혁명의 주력군을 민중 전체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의 주력군과 보조역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DR론은 소부르주아를 변혁주체로 호명하고 민주혁명에서 미국과의 동맹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구시대적 CDR(시민민주주의)론과, 남한을 일반적인 형태의 고도자본주의국가로 간주하고 독점자본만이 운동의 주적이라고 주장한 PDR(민중민주주의)론에 비해서 훨씬 더 과학적인 성격을 띄었기에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은 NDR론의 보편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삼민투와 2차 사회구성체 논쟁
이후 학생운동은 NDR론에 기반하여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이하 ‘삼민투’)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삼민투는 당시의 군부독재체제를 삼반성, 즉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민족운동, 민주운동, 민중운동이 운동의 삼대 축이라 주장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이 집합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반파쇼 민주전선’으로 규정되었는데, 삼민투의 반파쇼 민주전선에서 민중운동과 민족운동은 파쇼체제의 타격을 위해 동원되어야 할 보조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1985년 5월 삼민투의 미문화원 점거농성 당시 투쟁주체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남한의 식민지적 성격을 폭로하기보다는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식의, 미국의 행동에 대해 교정을 요구하는 등의 선전을 전개할 뿐이었으며 농성 해제 당시에는 “우리는 반미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운동의 전선을 모호하게 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국제기관인 IMF-IBRD 총회가 개최되고 삼민투가 이에 대해 유효한 대응을 전개하지 않자 더 이상 삼민투가 제국주의를 타격하는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이 학생사회 내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은 반제그룹은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반제그룹은 남한 민중의 주적이 제국주의임을 주장하며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이하 ‘반전반핵투위’)로, 반전반핵투위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자민투’)로 강화 발전되었다. 자민투가 제기한 AIPDR(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은 이 시기 유입된 주체사상과 결합하여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로 계승되었다. NLPDR(NL)론은 기존의 NDR과 달리 미제국주의를 핵심적 주적으로 설정하였고, 변혁과제의 주력군을 노동자와 농민으로, 소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 애국적 군인들을 보조역군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추상적이고 계급적으로 모호한 바가 있었던 NDR의 변혁관에 비해 비약적 발전을 이룬 관점이었다.
운동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삼민투 세력은 변혁이론 및 운동관의 갱신을 요구 받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NDR론은 CA(제헌의회)론으로 변화하였다. CA 그룹은 현행 파쇼체제가 미제국주의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파쇼세력에게 일정한 자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농민과 소부르주아 등의 근로인민대중이 연합하여 파쇼정권을 타도하고 민중의 주도로 제헌의회를 건설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CA 그룹의 조직적 형태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이하 ‘민민투’)로 계승되었다. 민민투는 자민투의 반제직접투쟁, 즉 미제국주의를 직접적 투쟁 대상으로 삼는 전략전술에 반대하면서 반제국주의적 과업은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관철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NL과 CA 간의 사상투쟁은 2차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이어졌다. 2차 사회구성체 논쟁을 전후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NL이었다. 미국에 대한 학생사회의 문제의식을 가장 강렬한 형태의 직접행동으로 표현해 다수의 학생대중들을 자파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으며, CA의 제헌의회론이 대중적 호소력이 지니기 어려웠던 반면에 NL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중적이고 직설적인 구호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6월 항쟁 이후 NL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건설을 주도하는 동시에 서클해산운동을 주도하고 학생대중들을 학생회 조직에 집중시켜 광범위한 대중적 조직기반을 획득하였다.
한 편 1984년 이후 노동운동은 노동법 개정 및 민주노조 건설 투쟁을 거쳐 서노련(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과 인노련(인천지역노동운동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서노련은 삼민투의 분화 이후에도 삼민혁명론을 고수하며 민중적, 민주적, 민족적 투쟁을 주된 운동의 과업으로 삼고 MPO, 즉 대중정치조직의 건설을 주창했다. 대중정치조직론의 요는 주된 최소강령적 투쟁과업들에 동의하는 노동계급조직을 통해 대중적 각성을 추동하는 것이었다. 이후 등장한 혁명투쟁동맹과 NPR 그룹은 MPO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지역적 전위조직인 정치적대중조직(PMO)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결국 양자는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으로 종합되었다.
6월 항쟁과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쟁취된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두고 학생운동의 각 조직들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NL은 제도권 민주진영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세웠고 CA는 백기완 독자후보를 통한 합법적 민중정당 건설을 추구했다. 이 시기부터 이미 민족민주운동의 진보정당운동으로의 전환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었다. 반면 CA에서 분화된 CPC(헌법제정민중회의) 그룹은 사실상의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3차 사회구성체 논쟁
선거 이후 CPC 그룹은 계급모순을 주된 모순으로 내걸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을 주된 적으로 내세우는 제독PD(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론) 노선을 정립하였다. 이렇게 정립된 PD노선은 NL노선과 함께 학생운동의 양대 축을 이루며 서로 간의 사상투쟁을 전개하였다. 양파 간의 사상투쟁은 3차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3차 사회구성체 논쟁 당시 NL 그룹은 기존의 식민지반봉건론이 아닌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제기하였다. 본래 2차 사회구성체 논쟁 당시의 NL 그룹의 남한사회관은 식민지반봉건론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해외 반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분석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서 지주계급이 사실상 소멸하여 봉건적 우클라드가 거의 남지 않은 남한 사회에서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렇기에 NL 그룹은 이러한 비판에 맞게 식민지반봉건론을 폐기하고, 그 대신 남한 사회의 청산되지 않은 봉건성이 상부구조에 잔존해 있으며 식민지적 종속관계로 인해 독점자본이 형성되지 못하고 저발전된 매판 형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만이 존재한다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남한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독점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외견적 독과점 현상은 본질적으로 매판대자본의 유통부문에서의 지대추구에 불과하며, 남한의 산업재벌들도 결국은 유통지대를 추구하는 매판자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대에 이미 거대산업국가로 자리잡은 남한의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 분석이었다. 또한, 상부구조에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주장 또한 논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들 중 봉건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남아있지 않은 국가, 봉건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부르주아들이 전유해서 통치에 사용하지 않는 국가가 오히려 더 적은 것인데 봉건잔재가 정신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 곧 사회구성체에 봉건적 부문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남한 사회 및 그 통치기관이 철저히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반식민지적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잘 짚어냈으며 남한 자본주의가 일반적인 제국주의 열강들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경로와는 다른 경로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는 알아차렸으나 남한에 산업독점자본이 존재치 않으며 남한의 재벌이 모두 유통지대를 추구하는 매판자본이라는 비현실적 주장으로 나아가면서 남한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실패한 것이다.
반면 PD 그룹의 남한 사회관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었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식민지반자본주의론보다도 더욱 조악하였는데, 이를테면 ‘신식민지’라는 규정 자체가 모호하였다. 신식민주의라는 개념은 본래 과학적 맑스레닌주의의 언어가 아니다. 신식민주의란 가나의 민족부르주아 혁명가 콰메 은쿠르마[8]에 의해 창안된 개념으로, 이후 광범위한 제3세계주의 운동과 수정주의적 맑스레닌주의 정당들에 퍼져나갔다. 군대를 앞세워 지배한 구식민주의와 달리 경제체제와 다국적기업의 착취, 금융적 종속을 통해 지배하는 신식민주의가 새롭게 생겨났다는 것이 신식민지 개념의 핵심이다. 이 규정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구식민지와 신식민지 간에 일정한 지배성격 상의 단절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와 전전 간의 제국주의 열강들 및 그 통치기관과 부역세력들의 연속성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로, 신식민지 개념은 현대의 제국주의 통치를 철저히 경제적이고 간접적인 형태에 국한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장 남한만 하더라도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침략에 의해 식민화 되었으며 주한미군과 직접적 파쇼체제 지원,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서 통치되고 있다. 그렇기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신식민지’ 규정은 남한의 반식민지적 성격을 올바르게 해명하기보다 과거 종속이론 식의 경제적 종속성만을 과잉해 부각시키고 이를 정치적-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업으로 삼기 보다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해소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잘못된 규정이었다. 반제투쟁에 대한 PD 그룹의 역사적 소극성 또한 이러한 잘못된 규정에서 발원한 것이다. 또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부분은 더욱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데, PD 그룹은 남한이 ‘신식민지적’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형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다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호 모순되는 규정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 식민지적 조건은 필연적으로 독점자본의 형성을 억제하고 방해한다. 그렇기에 식민지적 상황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으며 또한 독점이 심화되고 있다는 PD 그룹의 이론이 정당화 되려면, 그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식민지적 조건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이 상호 조응할 수 있었는지를 논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 작업은 PD 그룹 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남한이 일반적이고 고도화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이나 신식민지적 종속성이 일부 부문에서 부가된다는 식의, 식민지성을 소거하는 형태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또한 그러한 정세관에 조응하는 실천을 추동하였다. 그렇기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남한의 대규모 산업발전이라는 현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개념적 오류와 그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식민지반자본주의론보다도 더욱 조악하고 비과학적인 내용으로 귀결된 것이다. 물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기존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주변부자본주의론’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전개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외부 정보의 유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수정주의화된 소련이 식민지 국가들에 유포하던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국제적 영향력의 자장에서 탈피하기 어려웠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NL PD 양 파의 모순론 오독
또한 NL 그룹과 PD 그룹은 자신들의 남한사회성격 규정을 바탕으로 NL 그룹은 ‘민족모순’을 근본모순으로, PD 그룹은 ‘계급모순’을 근본모순으로 규정했으며 양자 모두 근본모순과 주요모순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는 본질적으로 마오쩌둥의 모순론[9]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근본모순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기인하는, 사회성격 자체로부터의 모순이다. 사회성격이란 노예제 시대의 노예제, 봉건제 시대의 봉건제,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와 같은 것이 사회성격이며, 근본모순이란 그 사회성격 상의 가장 핵심적인 모순- 즉 노예제 시대의 노예와 노예 소유주 간의 모순, 봉건제 시대의 봉건지주와 소작농-농노 간의 모순,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와 노동계급 간의 모순 같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본모순의 내적 운동에 따라 생성되는 모순들이 파생모순이다. 허나 파생된 모순들이 본래의 모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며, 혹은 파생된 모순들 간에도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한 상호관계 속에서 다른 모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부상하고 그렇지 않은 모순들이 부차모순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주요 모순은 부차모순을 모두 주변화 하는 개념이 아닌, 해당 정세에서 다른 모순들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모순을 말한다. 즉, 주요 모순의 해소를 통해 다른 모순들이 해소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수 있을 때 그것을 주요 모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직관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서 주요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의 근본모순은 그 사회의 성격과 물적 토대가 교체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기에 근본-파생 관계는 고정되지만,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은 사회의 발전과정에 따라 끊임없이 서로의 위치가 교체될 수 있다. 이를테면 20세기 초반의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기에 제국주의 열강, 매판자본, 봉건지주와 인민대중 간의 모순이 사회성격 상의 근본모순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북벌 당시에는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간의 모순이, 1차 국공내전 당시에는 봉건지주와 피억압계급 전체 간의 모순이, 2차 국공내전 당시에는 국민당을 중심으로 뭉친 지주-매판자본의 정치적 동맹과 이에 반대하는 대중들 간의 모순이,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내전 승리 이후 신민주주의 시기에는 자본가와 노동계급 간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주요모순과 부차모순 간의 관계는 끊임없이 상호교차 하는 관계이다.
NL 그룹과 PD 그룹은 모두 모순론을 치명적으로 오독한 나머지 주요모순을 근본모순처럼 하나의 사회성격 내에서 불변하는 개념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PD 그룹은 ‘계급모순’을, NL 그룹은 ‘민족모순’을 사회의 고정불변적 근본모순이자 주요모순으로 간주하는 교조적이고 관념론적인 정세관에 빠져들었다. 또한 양파는 모두 근본 모순과 주요 모순을 나머지 모든 모순을 주변화 하는 모순으로 이해하였다. 이 오류는 즉 근본 모순과 주요 모순만으로 사회 내의 모든 역학 관계와 억압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머지 모순들은 운동의 보조역량이나 ‘부문’적 의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협한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운동 내 여성억압 등의 부차화 또한 이러한 잘못된 모순론 독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CA 그룹의 해체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시점에서 CA 그룹은 정치적으로 파산하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87년체제의 안착으로 제헌의회 수립이 실패한 상황에서 이미 CPC 그룹이 CA로부터 이탈하였으며 적지 않은 구성원들이 NL에 합류하였고, 잔류파는 노동해방투쟁동맹으로 집합하였지만 그 안에서도 거대한 논쟁을 벌였다. 노동해방투쟁동맹 다수파는 결국 사회운동으로의 산개를 선언하며 조직을 해산하였으나 노동해방투쟁동맹의 소수파였던 선봉그룹, 소위 ND(민족민주) 그룹은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하며 노동계급 전위당의 건설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1989년 11월에 출범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해방 이래 최초로 북의 지원 없이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한 전위조직이었다. 사노맹은 현장기반을 바탕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를 비롯한 대중적 노동조합기구의 파업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기획하는 등의 역량을 증명했으며 산업현장에 대규모 선전물을 배포하는 등 세를 과시하였다. 사노맹은 선진노동자가 조직화되고 발탁되어 간부로 성장하도록 하는 전위당의 핵심기능을 일정하게 수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을 일정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다.
허나 사노맹은 다섯 가지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사노맹 지도부들은 그 자신의 정보를 은폐하지 않고 해방노동자회와 같은 중간단계의 공개정치조직의 전면에 나섰다. 사노맹의 핵심 맹원들은 현장에 직접 나서 파업을 지도하고 유인물을 뿌리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이는 비합법적 요소를 합법적 공간에 노출시키는 보안 상의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둘째로 사노맹은 단기간에 전국적 규모의 전위정당을 결성한다는 과도한 과제를 설정하였고 이에 따라 충분한 검증이나 사상학습 없이, 파업에 열성적인 노동자가 보이기만 하면 사노맹에 직접 가입시키는 등의 작풍을 보였다. 이는 조직원들의 사상적-보안적 무능을 초래했으며 조직의 보안 유지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셋째로, 사노맹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하고 그들의 자발성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노동조합을 사노맹의 하부조직처럼 대하는 악습을 행하였다. 중앙위원회에서 "몇 월 며칠, 어느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켜라"라는 구체적인 전술 지침을 내리면, 중간조직과 현장 노조가 이를 군대처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사노맹이 추구하던 노동운동의 상이었다. 대중의 자발적인 정서와 현장 상황을 무시한 채 지하 지도부가 일방적인 정치 파업 지시를 반복하자 현장 노동자들은 피로감을 느끼며 점차 사노맹의 지시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넷째로, 광범위한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적 종속이나 파쇼정권에 대한 문제제기 보다는 사회주의 운동을 직접적인 대중선동구호로 내걸고, 노동계급만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아 실질적으로 전 사회적 통일전선[10] 작업에 소홀하였던 사노맹 특유의 노선은 이들이 적지 않은 공장현장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도 능동적으로 아군과 동맹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다수 전선에서 고립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섯째로, 사노맹은 혁명을 전 사회에서 일어나는 계급적-헤게모니적 전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공장노동자들의 일회적인 무장봉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사노맹의 정치는 조합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고양시키고 정치파업을 선전선동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협소한 노동자주의 정치에 갇히고 말았다.
민족민주운동의 종식
1991년 사노맹이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해산당한 이후 남한 민중운동은 급속하게 합법정당 건설의 방향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91년 열사정국 당시의 학생사회 내 역량 소진에 이어진 소련의 해체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동시적 몰락, 그리고 87년 이후의 실질적이지는 않았던 합법공간 창출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었다. 본래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추진하던 인민노련은 공개적인 합법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신노선’을 발표하며 조직성격을 전환하였고, 당시 민족민주운동 전체를 포괄하는 전선체였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의 일각에서도 합법적 민중정당의 결성을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87년 백기완 선본에 결합하였던 CA 그룹들이 주로 참여한 민중의 당 또한 88년 총선에서 성적을 거두지 못해 해산되었으나 그 잔류 인사들은 여전히 합법적 민중정당 건설을 추구하였다. 민족민주운동이 쌓아온 역량은 마치 강줄기가 호수로 모여들듯이 합법정당건설운동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사실상의 대규모 청산주의가 민중운동진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편, 이러한 합법정당건설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NL 그룹은 통일운동으로의 역량 결집을 촉구하는 자주단결 그룹과 광범위한 계급대중운동으로의 세력확장을 주장하는 자주혁신 그룹으로 분화되었고, 전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을 사실상의 단일의제운동으로 수행하는 길을 걸었으며, 후자는 여러 사회적 전선으로의 산개로 귀결되었다. 동시에 아직 파쇼체제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조직적 판단을 전개한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제파PD) 그룹은 직접적인 민중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구하며 당대 상승기에 있던 급진적 노동운동에 대거 결합하는 길을 택하였다.
결국 자주혁신파와 제파PD 그룹, 그리고 후일 다함께와 노동자연대로 이어지는 일동그룹(국제사회주의자들) 또한 모두 각기 기존의 민족민주운동에서는 분리되는 방향으로 새로운 운동관을 형성하며 발전하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합법 민중정당 건설론과 자주단결 그룹의 통일운동론, 자주혁신 그룹의 계급대중운동으로의 전선확장, 제파PD의 급진적 노동운동론은 제각기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민족민주운동의 해소라는 지점에서는 상호 일치하였던 셈이다.
민족민주운동을 돌아보며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민족민주운동은 과거의 민중적-변혁적 역량과 완전한 단절을 겪은 상황에서 4.19 혁명과 전태일의 분신,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며 성립된 청년학생주체들의 영웅적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어두운 정세 속에서 민중의 해방과 민족의 자결이라는 좁고 빛나는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의 선배 세대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끝내 그 자신의 숭고한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운동은 실패했다. 실패의 기록을 되짚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오로지 고통만이 우리를 강철로 단련할 수 있다.
민족민주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한국전쟁 이후 소수 비밀서클 수준에 머무르던 변혁역량을 역사의 질곡을 거치며 집단적 각성으로 이끌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승시키고 군사파쇼 체제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각계각층의 민중운동을 다시금 부활시켰다는 지점에 있다. 오늘날 남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민중적-노동계급적 역량과 단체들 중 그 어느 것도 민족민주운동의 세례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민족민주운동 내에 존재하였던 세 가지 심대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오류는 남한 사회성격에 대한 잘못된 규정에 있다. 해외의 식민지반봉건론을 무리하게 남한 사회에 적용하여 남한 산업자본의 대규모 발전을 설명하지 못하였던 NL 그룹, 신식민지라는 모호한 규정을 통해 남한의 식민지성을 제대로 해명하는 데 실패하고 남한 자본주의를 일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잘못 해석한 PD 그룹 모두 자신들의 핵심 문제의식을 이론에 끼워 맞춰 관철하려 했을 뿐 남한 사회성격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를 올바르게 규정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둘째 오류는 외부 세력에 대한 맹종에 있다. PD나 CA 그룹은 소련을, NL 그룹은 북한을 관성적이고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전자의 경우 소련의 붕괴와 동시에 거대한 청산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합법주의-개량주의 노선으로 후퇴하고 말았고, 후자의 경우 남한 사회의 구체적 조건들을 주체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을 추진하기 보다는 북이 제시한 노선을 추종하며 협소한 실천에 머무르는 경향을 보였다. 북에 이미 한반도 전체의 전위당인 조선로동당이 존재하므로 남한에는 전략당[11]이나 대중조직만이 필요하다는 현실과 맞지 않는 관점도 바로 그것에서 파생된 문제점이었다. 또한 민족민주운동의 최고조기에 이미 해외에서는 소련-중국 수정주의에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갱신하여 혁명적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재확립하는 흐름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민족민주운동의 대외관과 이론노선적 수준은 충분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 할 수 밖에 없다.
셋째 오류는 청년학생의 과잉부각에 있었다. 청년학생들의 광범위한 민중과의 결합은 대체로 청년학생들이 민중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 침투하여 선전, 의식화를 통해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고 조직을 건설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기층인자를 투쟁의 주체로 내세우고 광범위한 대중의 바다 속에서 간부와 전위를 발굴하는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물론 레닌이 논하였고 세계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증명 되었듯이 선도적 주체에 의한 계급의식의 외삽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외삽이 현장에서 전위를 양성하는 형태로 제대로 기능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냉엄한 평가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엘리트주의-청년학생중심주의는 결국 민족민주운동이 운동의 최고조기에도 대중운동의 물결을 제대로 추동하거나 전 사회적 헤게모니를 확보하지 못하고 90년대 이후 끝내 상당수 전선에서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세 가지 오류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과학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민족민주운동의 영웅적 패배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숙제로 될 것이다.
제3기 - 진보정당운동
민중당의 창당과 실패
제3기의 운동은 제도권 의회정치로의 진출을 추구한 진보정당운동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CA 그룹의 해소를 주도한 노동해방투쟁동맹 다수파와 인민노련의 한국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 그리고 전민련 내 합법정당 추진파가 결성한 민중당은 1990년 11월,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허나 민중당은 전노협의 지지 결정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등 제반 사회운동의 역량을 당운동에 집중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더군다나 공안당국의 기획수사에 의해 조작된 강경대 유서대필조작사건과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휘말리며 대중적 인식이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며 해산 처분을 당하였다. 법적 해산 이후 민중당 잔류파는 92년 12월로 예정된 제14대 대선의 대응을 두고 내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장기표를 비롯한 전민련-재야세력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한 반면 노회찬을 비롯한 인민노련 세력은 백기완 추대를 통한 독자후보 전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열의 과정에서 민중당의 재건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김문수와 이재오 등 노동자해방투쟁동맹 다수파 그룹은 이 때부터 당운동과 사실상 거리를 두며 노동인권회관, 건강사회실천운동협의회 등 온건한 형태의 시민운동으로 이탈하였다. 결국 이들은 94년 당시 김영삼 정권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자유당으로 집단입당하는 대규모 전향을 결단하였다.
전노협의 투쟁과 청산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상승과 강화를 지속해온 노동운동은 노동법개정운동을 거치며 1988년 전노협의 모태가 되는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이하 ‘전국회의’)의 결성에 성공하였다. 전국회의는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을 대체할 전국적 민주노조 조직의 건설을 결의하였다. 정부는 이를 가로막기 위해 갑호 비상령을 발령하고 전방위적인 탄압과 체포를 행하였지만 1990년 1월 22일, 대다수의 지도부가 체포되거나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일천명 가량의 간부가 출범식을 성사시키며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출범 즉시 전노협은 폭력적인 탄압과 간부들에 대한 구속조치에 직면하였지만 전노협의 세는 3당합당저지투쟁,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을 거치며 가파르게 불어났다. 1990년 후반에 가서 전노협은 20만 조합원과 600개의 단위노조를 거느린 거대조직이 되었다.
전노협의 정치투쟁과 업종을 넘나드는 투쟁은 민주노조 운동 자체의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제시하였으며 각계 현장의 노동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가 노동계급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노동자들도 노동계급으로 스스로를 호명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계급의식을 갖춘 현장 활동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92-93년 간의 대규모 산업구조조정과 자본의 해외 이전, 대규모 공안탄압은 전노협 내에서 기존의 전투적이고 공세적인 노선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전노협의 노선을 합법적인 선으로 조정하고, 지노협(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 체제를 산별(산업별노동조합)체제로 전환하며, 전투적 조합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회의를 주도하던 세력의 주장이었다. 허나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의 주장은 그 근거가 없었을 뿐 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배반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전노협의 노선을 합법화 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기존 전노협의 노선이 불법적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전노협의 노선은 어디까지나 민주노조에 기초한 계급적 노동운동을 주장하였을 뿐이고, 무장투쟁이나 혁명을 내세운 바가 없다. 전노협의 정치투쟁은 현장으로부터 올라온 노동계급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계급의 생존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기에 그것이 어떤 불법적인 것이나 과잉정치화된 것이라고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산별체제로의 전환과 지노협 체제의 청산은 본질적으로 노동조합을 관료화 시키고 노동운동을 개량주의화 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주장이었다. 당시 지노협 체제는 중소사업장 위주로 전노협에 가맹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현장까지 지역에서에서 협의회에 가담시키고 투쟁에 동참시키는 산업단지 및 산업구역 단위의 운동을 가능케 추동한 전노협 운동의 핵심요소였다. 물론 산업부문을 단위로 한 노동조합들 간의 연대 또한 건설이 필요하였으나 그것이 운동 전체가 산별체제로 전환되어야 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산별이 요구되었는가, 이 당시 산별 전환을 주장하던 이들은 민주적 코포타리즘(노사협조주의)이나 산별교섭 등 반식민지 남한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일부 유럽 국가들의 노사관계를 흠모하거나 그 모델을 들여와 대형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여 사회적 타협과 대화를 통해 대기업과 대산별 간의 포괄적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후일 자신들이 주장했던 산별체제 마저도 완수하지 못하는 실천적 무기력함을 보여주었다.
셋째로 전투적 조합주의의 청산에 대한 그들의 일련의 주장은 전투적 ‘조합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적’ 조합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전투적 조합주의를 정치적이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혁신하는 것이 아니라 개량적, 타협적 조합주의로 후퇴시키고, 선진적인 의식의 주입과 전위당의 건설이 아니라 합법 민중정당의 의회-제도권 진출 전술에 역량을 집중하고 이를 보조하기 위한 형태의 노동운동으로 기존 전노협을 재편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는 단순히 당시 막 형성되고 있었던 노조 관료들 뿐만이 아니라 합법 민중정당 건설론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던 정치조직 세력들도 대거 가세하였다. 전노협 지도부는 처음에는 이러한 청산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경향에 맞서 전노협 체제를 사수하려 하였지만 결국 이들 또한 어느 순간 입장을 바꿔 전노협 청산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전노협은 대기업 업종회의와 함께 대기업 노조를 포괄하는 대규모 노총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대기업노조 위주의 외면적 산별-실질적으로는 기업별 노조로 정립되자 전노협이 추구하던 계급적 노동운동, 변혁적 노동운동 노선은 끝내 청산되었다.
멈춰 선 총파업과 노동계급 헤게모니의 파산
1996년, 김영삼 정권은 ‘신노사관계 구상’을 명분으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의 도입을 포함한 노동법 개정을 예고하였다. 동시에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를 구성하여 민주노총에게 참여를 요구하였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개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노동법 개악의 주된 쟁점인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에 대한 조합원 및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고도화 되면서 기층으로부터의 선전과 교육이 이루어져 총파업이 가능한 폭발적인 정세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총파업의 객관적 정세와 조건들이 마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총파업 일정을 미루었고, 결국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의원 154명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후에야 권영길 위원장은 급박하게 총파업을 선언했다.
26일 오전 무기한 총파업 선언이 이루어진 즉시 전국의 모든 공장에서 파업의 깃발이 올랐다. 전국의 모든 부문에서 수십만의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초반부터 타협주의적-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시민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파업을 잠정 중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파업의 불길은 점점 더 솟구쳐 올랐다. 현총련, 전문노련, 건설노련, 병원노련 등이 새롭게 파업에 동참했으며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노총의 파업에 대한 지지가 70%를 돌파하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갑자기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전술을 전환하였다. 이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반발과 항의는 사실상 무시 되었다. 총파업에 대한 일관적인 믿음이 지도부 내에서 부재했던 것이다. 군경은 이를 틈 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격화하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영수회담 거부, 민주노총 지도부 영장 집행, 노동법 재개정 불가론을 밀어붙인 후에야 민주노총 지도부는 다시 전면파업을 재개하는 매우 혼란스럽고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한 편, 총파업은 사업장과 단위 노동조합 내에 갇혀 있지 않았다. 파업 집회가 열릴 때면 주변의 지나가던 시민들과 소상공인들, 주민들이 함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고 이러한 연대자들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물이나 식량을 전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반드시 이겨달라”, “반드시 노동법 개악을 막아달라”는 응원은 일상이었다. 기층 민중 대다수가 파업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는 남한 단독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노동계급이 다른 모든 피억압계급을 영도하고 그들의 권리를 방어하며 그들을 지도하며 노동계급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성립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갑자기 전면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하였다. 명분은 조합원들의 피로감 누적이었으나 이는 현장의 요청이 아닌, 상층 지도부의 독단적이고 기습적인 결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이러한 지도부의 지침을 두고 ‘파업이 끝났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본은 이를 기회로 하여 각급 노동조합들에 대한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임금지불거부 등의 전면공세를 시작하였다.
이후 정부가 민주노총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영수회담을 거쳐 노동법 재개정을 진행하자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것을 ‘승리’라 불렀지만 근로자 파견제와 정리해고제는 2년 간 유예되었을 뿐 재개정된 노동법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쟁의 시 생산시설 점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임금요구의 금지 등 핵심적 독소조항은 유예 조차 없이 그대로 관철되었다. 이것은 승리라고 부를 수 없다. 그 대가로 민주노총 지도부는 무엇을 얻었는가. 첫째로 실질적으로 제1노총의 지위를 얻었다. 둘째로 민주노총 합법화 시도의 단초를 얻었다. 셋째로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 집행취소를 얻었다. 이것은 전체 계급전선의 성과라기 보다는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들에게 국한된 성과였다.
본질적으로, 이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전체 노동자민중을 배신한 일이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파업노동자들의 헤게모니 안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온 시민들을 배반한 일이기도 하였다. 대중들은 ‘민주노총도 결국 자신들의 이권만을 지킬 뿐이다’ 라는 인식을 얻게 되었고 그 후로 광범위한 파업에 대중이 결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민주노총 지도부의 후퇴는 단순히 한 전선에서의, 혹은 한 국면에서의 후퇴가 아니라 단정수립 이래 최초로 구축된 노동계급 헤게모니와 전사회적 통일전선을 지배계급에 투항하며 스스로 파괴한 자해적 행위였다.
1997년 IMF 구제금융사태 이후, 김대중 정권이 정리해고제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조직하기는 커녕 즉시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갔다. 이들은 ‘전체 국민경제’를 위한다며 정리해고제를 수용하고 민주노총 합법화 약속을 받아왔다. 물론 노동계급은 전체 국민경제를 방어하고 발전시켜 전체 대중의 이익을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정리해고제의 수용과 IMF의 신자유주의 조치들에 대한 수용이 전체 국민경제를, 국익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미제국주의를 대리하는 반식민지 통치기관이 운운하는 가짜 국익이다. 이들이 정말로 전체 국민경제와 전체 국익을 위하고 대중의 이익을 방어하는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하려 하였다면 IMF의 경제개입에 맞서 국민경제를 외세에 팔아먹는 정부에 반대하고 자립적이고 종속탈피적인 방향의 대안적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강령을 제시했어야 한다. 또한 그 강령의 실현을 위한 전방위적 정치투쟁을 전개했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는 ‘합법 민주노조’에 기반한 ‘합법 민중정당’이라는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허울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하였으며, 민주노총이 직접 공개적으로 정리해고제를 수용하고 그것이 국민경제를 위한 것이었다고 발표하는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배신, 그 대가로 조직의 합법화를 승인받아 자조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 전체에 대한 배신, 그리고 정리해고제를 비롯한 IMF의 경제개입 및 요구에 대한 그 어떤 저항도 시도하지 않은 민족 전체에 대한 배신을 저질렀다. 조합원들은 이러한 배신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단병호 비상대책위원회가 수립되어 총파업을 결의하였으나 총파업의 제대로 된 방향성이나 조직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파업을 철회하였다. 왜냐하면 민주노총 내에서 개량주의적-합법주의적 지도부의 배신에 맞서는 이들 또한 전투적 조합주의 수준의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었을 뿐 전체 민중을 영도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정치를 행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 총파업의 기억을 되새기며 ‘아래로부터의 총파업’을 추동하는 것으로 모든 종류의 노동계급정치를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이러한 환상과 정치적 비전의 부재는 합법주의자들의 배신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었을 뿐 운동의 주체로서 실질적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민주노총 내의 소위 좌파세력 내에 되물림 되고 있는 문제이다.
결국 정리해고제는 도입되었으며, 전국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합법적 민중정당의 건설은 막힘없이 계속되었다.
국민승리21와 민주노동당
95년, 사노맹 잔류세력인 민중정치연합과 민중당 재건파인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을 발족, PD계 학생운동조직인 21세기 진보학생연합 또한 이에 합류하였다. 이후 97년, 진보정치연합은 민주노총 지도부 및 민중정치연대, NL세력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후 ‘전국연합’)과 함께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국민승리21은 ‘96-97 총파업의 지도자’ 라는 언론의 보도로 광범위한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권영길과, 재야 노동운동인사로 향후 민주당에 입당하게 되는 이창복을 공동대표로 하였다. 국민승리21은 본래부터 대통령 선거 대응을 위한 조직이었고, 권영길이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전체 민중운동의 역량을 끌어내지 못하였고 전국연합이 선거 직전에 갑작스럽게 김대중 지지를 선언하며 대오에서 이탈하는 등의 문제로 인해 1.2% 가량을 득표하는 데 머물렀으나 이를 계기로 권영길은 확실히 ‘제도권 정치인’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1999년 4월, 민주노총,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전국빈민연합, 그리고 국민승리21 등은 진보정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동년 8월 29일 발기인대회를 열어 '민주노동당'의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현실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는데, 즉 이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론과 경험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를 합법주의-개량주의가 아닌 것으로 포장하고 싶어하는 태도의 표명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초기 구성세력은 민주노총의 노조 활동가 집단, 진보정치연합으로 계승된 인민노련 세력,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을 비롯한 NL 내 일부 자주혁신 세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승리21에서 이탈했던 비 자주혁신 계열의 NL 정파들, 다함께로 이어지는 일동 그룹의 후신세력,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해방실천연대 또한 내부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정파들은 평등파(PD)와 자주파(NL)라는 광범위한 규정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당내의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한 내부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8.13%를, 같은 해 실시된 제16대 대선에서는 권영길 후보가 3.9%를 득표하는 일정한 성과를 누적하다가, 2004년의 제17대 총선에서는 정당 투표에서 13.03%를 득표하여, 총 10명의 국회의원(지역구 2명, 비례대표 8명)을 배출, 원내 진입에 성공하였다. 이는 분명히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로 최초로 이룩한 혁신세력의 의회 진출이라는 성과였으나 이후 민주노동당은 하술하는 여러 문제들로 인해 내홍과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첫째로, 의회주의에 의한 당의 침식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중앙은 의회에 파견된 의원들에 대한 그 어떤 통제력을 발휘하는 데도 실패하였으며, 당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의해 도출된 당론을 의원들이 따르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결국 의원들이 실질적으로 그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짓고 의원들의 의회 내에서의 활동만이 과잉대표 되면서 사실상 민주노동당은 ‘민중정당’이라기 보다는 의회 내에서 다른 당들과 경쟁하는 의원집단들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둘째로, 당 전체에서 종파주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다. 모두가 동의하는 실질적 강령에 대한 인식과 교육이 없이 각 정파들이 각자의 강령을 지니며 당 공식강령은 형식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각 정파들의 비조직적이고 종파주의적인 온갖 난행들이 이루어졌다. 대규모 위장전입을 통한 당기구 장악이 이루어진 강남지구당, 종로지구당 사태와 용산지구당 사태, 당의 승인 없이 당원명부를 조선로동당에 전달한 일심회 사태, 조승수 등 일부의원들에 의해 자주파 세력에게 가해진 냉전반공적 ‘종북’ 규정, 평등파가 다수였던 민주노동당 상근자 노동조합에 대한 자주파 지도부의 탄압, 대의원 대회에서의 폭력적 충돌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결국 이러한 당내의 이질성과 공통적 인식 부재는 민주노동당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합의 지점만을 당의 정책으로 관철하는 최소공배수의 정치, 소극적 정치를 행하도록 강제했다.
셋째로, 반공주의와 냉전체제에 대한 부역적 경향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북의 정권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를 수 있으나 미제국주의의 북에 대한 고립압살책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미제국주의가 북에 대한 침략과 정권교체 의도를 부인하지 않고 있고, 남한의 파시스트 군부가 미군과의 협력 하에 매년 북침군사훈련을 전개하는 한 북의 핵무기 보유는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자위적 수단으로서 옹호되어야 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당내의 자칭 ‘평등파’ 세력은 자주파가 북의 핵보유를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냉전반공주의적 공안논리를 동원, 지속적인 비난을 전개하며, 마치 미제국주의의 외적 규정력이 부재하기라도 한다는 것 마냥 북의 군사훈련과 핵실험을 무조건 비판해야 한다는 친제국주의적 주장을 개진하였다. 이는 이러한 발화 주체인 개인들의 문제를 넘어, 소위 ‘합법 민중정당’ 구상 자체가 낳은 필연적인 우경화이자 파쇼체제와의 타협이었다.
상술한 문제들과 정파 간 투쟁 속에서, 일심회 사건의 청산을 두고 만들어진 심상정 비대위의 개혁안이 부결되자 전진그룹(평등사회로전진하는활동가연대)과 노회찬, 심상정 등을 필두로 한 주요 평등파 세력이 탈당을 결의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탈당파는 적록보라(노동-기후-페미니즘의 병렬적 연합) 노선을 표방하는 진보신당을 건설하였고 민주노동당 사수파는 더욱 민족주의적-통일우선주의적 형태의 구호들을 전면화 하였으나 양쪽 모두 실질적인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통합진보당과 공안탄압
민주노동당 분열 이후 이루어진 진보정당운동 일반의 퇴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은 전체 민중운동 진영에서 일정한 공감대를 사고 있었으며, 이러한 공감대는 진보세력 재통합 시도로 이어졌다. 진보신당 내에서는 재통합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패배한 심상정과 노회찬이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하였고,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수 차례의 재표결 후에야 통합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후 2011년 12월 5일, 민주노동당과 새진보통합연대, 그리고 유시민의 국민참여당의 합당을 통해 통합진보당이 결성되었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과 같은, 현대의 우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강령과 흡사한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기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 비해 극도로 후퇴한 것이었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한 내용은 삭제 되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완수는 “노동존중 사회 건설”이라는 시혜적 내용으로 대체되었다. 미군철수와 한미동맹 폐지는 “평화체제 건설 이후”로 명시적으로 미루어졌으며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 파시스트 기관에 대한 “철폐”는 “민주적 통제”로 바뀌었다. 민주노동당과 새진보통합연대는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위해 과감한 강령 후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NL 세력은 자주적 민주정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에서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새진보통합연대의 노회찬-심상정 세력은 ‘대중적 진보정당의 필요성’이라는 논리로 이를 정당화하였다.
통합진보당은 19대 총선에서 10.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13석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에서도 민주노동당의 문제들은 반복되었다. 정파세력들 간의 쌍방 부정경선 논란과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또다시 반복된 소위 ‘종북’ 논란과 하술할 이석기 사태 등 여러 사건들 끝에 결국 국민참여당 세력과 새진보통합연대 세력, 그리고 NL 세력 내의 인천연합 세력은 분당을 결의하여 진보정의당을 결성하였다.
이후 고립된 통합진보당 잔류세력은 공안기관의 희생양이 되었다. 검찰은 후일 대법원에 의해 실체조차 없는 것으로 확인된 지하혁명조직(RO)을 결성했다는 명분으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하였다. 내란음모의 증거로 제출된 녹취록은 원본이 아닌 검찰의 편집본이었고, 증거수집과정 일체가 내부 배신자를 이용한 불법이었다. 북과의 연계성 또한 없는 것으로 판정 되었다. 법원은 스스로 내란음모가 증명될 수 없음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란음모 없는 내란선동죄라는 형식논리 상으로도 말이 안되는 죄목으로 이석기에게 유죄를 선고하였고, 통합진보당의 경우에는 당 강령 상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상충된다며 우파 사회민주주의적 강령마저도 반국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강제해산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결국 파시스트 정권이 민중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공안기관을 통해 저지른 반민주적 폭거로, 소위 ‘보수정당’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일익이 아닌 그 제한적 민주성조차 파괴하려는 당파성을 지닌 파시스트 정당이며 국가기구 곳곳에도 파시스트적 부위들이 잔존해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사례였다. 한 편, 진보정의당 세력은 이러한 공안탄압의 과정에서 ‘헌법 안의 진보’를 내세우며 파시스트 국가기구의 만행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등 노골적으로 스스로의 당파성을이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이후 진보정의당은 정의당으로 당명을 바꾸었고, 통합진보당 잔존 세력은 민중연합당과 새민중정당, 민중당 등을 거쳐 진보당으로 재결집 하였다.
오늘날의 진보정당운동
정의당은 창당 이후 진보신당에서 이름을 바꾼 노동당에서 이탈한 진보결집+와 민주노총 중앙파 세력의 노동정치연대 등을 흡수하며 조직적 세를 불렸으며 각종 매체를 통해 민주당 지지대중들에게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하였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처럼 지속적으로 민주당과의 당대당 연대를 통해 선거에서 의원을 배출하는 방식의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를 통해 정의당은 지속적으로 원내에 머무를 수 있었다. 물론 민주당과의 전술적 동맹은 가능하다. 보수정당이라는 파시스트 세력이 국가기구와 사회 전체에서 우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일반민주주의적 제권리를 수호하고 파시스트 세력을 타격하기 위한 전술적 동맹은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정의당의 민주당과의 동맹은 그러한 전략적이고 합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선거연합을 통한 의석 유지와 선거법의 개정을 목표로 하는 형태였다. 정의당의 당권파 세력은 의회 내에서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지상의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민주당과의 협조를 통해 선거법이 비례성이 강화되는 형태로 개정되면 자신들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적-노동자적 정당의 선거 참여는 선거 과정에서의 선전과 선동, 의회에서의 적대세력에 대한 폭로를 통해 당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선거를 수단화 하는 것이지 선거 결과 그 자체의 성과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정의당은 선거 자체를 위해 당의 정책과 노선, 중대 과제를 설정하고 선거에서의 성과를 모든 목표보다 앞서는 것으로 파악하는, 더이상 민중정당이나 노동자정당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의 퇴보를 감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거제일주의 노선은 정의당이 조국 사태 당시에 조국의 비리를 제대로 비판하지도 폭로하지도 못하며 대중의 신뢰를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이후에는 정반대의 역편향이 벌어졌는데, 민주당이 선거법 개정 이후 비례위성정당을 내세워 선거법 개정을 무의미하게 만들자 정의당 지도부는 갑작스럽게 대-민주당 노선을 전환하였다. 정의당은 ‘보수양당론’을 내세우며 민주당과 보수정당을 당파적-내용적으로 동일한 세력으로 잘못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국가 내 파시스트적 부위에 대한 타격이었던 검찰개혁 당시 사실상 보수정당의 편을 들어 검찰수사권 박탈을 저지하려 드는 등, 민주당에 반대하기 위해 파시스트 공안기구를 옹호하는 비일관적 기회주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의당은 대중의 지지를 철저하게 잃었으며, 참여계 등 당내의 온갖 분파들이 사방으로 이탈하는 분열의 과정을 거쳤다.
허나 그 후에도 정의당은 여전히 내란 정국 당시 조희대 등 사법내란세력들을 옹호하고, 내란청산을 부차적 과제로 밀어내며 실질적으로 진보정당운동에서 이탈, ‘민주당과 보수정당 사이의 정당’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진보당은 창당 이후 통합진보당 시절 지방조직의 재건과 풀뿌리 조직화를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사회 곳곳에 유관조직과 기지를 만들고 자신의 정파가 배출한 민주노총 양경수 지도부와의 강력한 공조 하에 정치적 역량을 일정하게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진보당 세력은 오늘날 제반 사회운동 대부분을 포괄하는 전선을 형성하였으며 통합진보당 사태의 오명을 딛고 사회운동 내의 주류 세력으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진보당은 2023년 4월 전주을 재보궐선거에서는 강성희 후보를 당선시키며 의회에 복귀하였고,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3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자파가 배출한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이 스스로 관철한 민주노총의 선거방침을 일방적으로 어겨 민중운동에서의 신뢰관계를 훼손하였고, 당내의 적지 않은 세력들이 남한을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종속적 성격이 있는 중견자본주의 국가로 바라보기 시작하며 형식적인 변혁적 관점마저 포기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제반 민중운동진영의 역량을 당의 선거운동을 위해서만 일방적으로 동원-집중 시키는 등 민중운동을 선거정치에 종속시키는 흐름 또한 보이고 있다. 선거참여를 통한 제도권 정치참여의 과정에서 계급전선을 전진시키고 민중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전선과 민중운동을 선거의 동력원으로만 삼는 경향성으로부터 진보당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당과 그 유관조직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주민에 대한 배외주의적 발언, 그리고 당원교육의 부재로 인한 신규 당원들의 통일성 부재는 새로운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노동당은 과거 진보신당 시절 진보정당 통합파의 지속적인 이탈, CA 잔류파가 결성한 사회당 세력과의 합당과 노동당으로의 당명 개정 이후 구 사회당 세력의 기본소득당으로의 분열, 사회변혁노동자당과의 합당을 거치며 지속적인 노선과 방향성의 변화가 있었지만 현재의 노동당은 선명한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당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명확한 방법론이나 노선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당 내에서 사회주의가 무엇이며 어떠한 이념이고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추상적 사회주의’는 노동당의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청산주의적 태도로 인해 과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경험과 이론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버린 결과이다. 노동당의 강령에서는 노동자민중을 정치투쟁의 주체로 세운다는 표현이 반복되지만 당이 조직노선을 통해 이를 직접적으로 추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당의 당 조직은 이제 실질적으로 노동운동 현장활동가들 간의 네트워크에 가깝다.
동시에 선언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내란정국 당시에는 파시스트 부위에 대한 투쟁인 내란청산과 사법부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교조적인 보수양당론에 빠져 사회 내에서 가장 반사회주의적-반공적인 세력인 사법부를 방관하고, 전세계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해방 세력을 무력으로 짓밟아온 미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이 반미투쟁-미군철수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만을 보이고 있는 노동당의 태도는 이들의 ‘사회주의’ 표방에 진정성이 없음을 증명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 사이에서
반면, 역사적으로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정치와 전위조직 건설 노선을 고수해온 이들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으로 90년대 초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동맹(혁노맹),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 해방의 심장 등의 중소규모 급진 그룹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그룹은 93년~95년 시기에 국가의 탄압으로 인해 사실상 소멸 되었지만 그 후로도 선진 노동자의 길, 신질서, 현장과 정치 등 비슷한 성격의 그룹들이 기존 운동 내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되었다. 이들 그룹들은 90년대 후반까지 선전만을 행하는 이념서클로 존재했으나 2000년대 이후로 현장이전을 통해 하청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개입하면서, 혁명적 이론과 전투적 조합주의 간의 결합을 통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노동운동의 개량주의화-합법주의화 경향 속에서 상대적 급진성을 견지하고 있던 이들 그룹들은 비정규직 운동, 특히 대공장 하청노동운동에 개입하여 일정한 지도적 위치를 획득하였다.
본래 이들의 이념적 노선은 합법주의-개량주의에 대한 반발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 되었으나 점차 이러한 그룹들의 노선은 몇 가지 공통된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첫째는 단계론에 대한 거부와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론이었다. 이는 기존 민족민주운동의 민주혁명론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었다. 둘째는 인민전선에 대한 거부였다. 이들은 계급 간의 동맹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철저한 노동계급 독자노선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청산주의 노선이었다. 이들은 국가자본주의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소련 체제를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스탈린주의’와 그 파생물인 ‘민중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사상투쟁을 주장하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조직노동운동의 쇠락으로 인해 이들 특유의 운동론, 즉 기존 노동운동 내에서 급진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부위에 침투해 운동을 지도하는 형태의 운동방식은 점차 실효성을 잃어갔고, 자연스럽게 현장에 대한 영향력 또한 감소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각종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과 현장 조직들은 당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통합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실이 바로 2008년 2월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출범이었다. 사노련은 이후 노동자의 힘, 노동자해방당 건설 투쟁단,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준비모임(사노준), 국제볼셰비키그룹(IBT) 등과 함께 통합을 거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를 조직하였다.
이후 사노위는 당건설에 앞서 강령토론을 실행하였는데, 이러한 강령 토론과정에서 3인안, 5인안, 그리고 4인터(제4인터내셔널)안 등의 강령안이 제출되었다. 각 강령안들은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주의적이거나 유사트로츠키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관점에서 주된 차이가 존재했다. 5인안은 소련과 중국, 북한을 자본주의 국가로 간주했으며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3인안은 소련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소멸을 진행하지 않은, 공산주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규정하면서 북에 대해서는 북 노동자들의 정권타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4인터안의 경우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과 북한을 기형적 노동자국가로 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노련 해산과 사노위로의 집중에 대해 반발한 사노련 사수파는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투쟁위원회(노건투)라는 더욱 현장지향적인 조직으로 이탈하였으며, 강령안을 정치토론이 아닌 다수투표로 결정한다는 방침에 항의한 사노위 의견그룹이 추가적으로 이탈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사노위 지도부가 서로의 이견 부분은 삭제하고 공통부분만을 기술하는 강령 형태를 제시하자 이에 반발한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이탈하였다.
이후 사노위 잔류파는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 활동가 모임(이하 ‘변혁모임’)으로 개칭하였고, 김소연을 제17대 대선 후보로 내세워 선거운동 과정을 거치며 선거운동에 함께한 활동가들 및 몇몇 서클들과 합쳐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를 결성하였다. 노동계급정당추진위는 약 3년 간의 활동 끝에 2016년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을 창당하였다. 변혁당은 기존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 대중화’를 내세웠다. 사회주의 대중화란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대중을 상대로 제시하고 선전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변혁당이 선전한 ‘사회주의’ 정책이란 사회보장 국가책임 강화, 공공성 강화, 국민연금 등 국가지주회사들의 적극적 주주기능 강화 등 수정자본주의적인 정책들이었다. 혹은 실체조차 없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환수론도 있었다. 물론 전자의 경우 최소강령 중 일부로 제시될 수 있는 것들이지만(후자는 사내유보금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하기에 최소강령으로도 제시해선 안 된다) 변혁당은 이것을 최소강령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선전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선전들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혁명정치 기획이라기 보다는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 등의 정치, 즉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모방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정한 성과조차 거두지 못한 변혁당은 점차 합법정당 등록을 당의 목표로 삼게 되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단일한 사회주의 대중정당’ 결성을 위해 노동당, 노동해방투쟁연대(구 노건투), 노동전선 등에게 통합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통합논의가 우여곡절 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노동당에 대한 합류로 귀결되면서 변혁당 당권파의 경우 노동당에 합류해 진보정당운동으로 흡수되었고, 비당권파의 경우 노동해방투쟁연대와 함께 통합사회주의조직인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을 결성하였다. 전자의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분명한 이탈이며, 후자의 경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답습해온 관성으로의 회귀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강력한 전투성, 현장에서의 헌신성, 그리고 단호한 반개량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전체 민중운동에 일정한 파장을 일으키며 지난 30년 간 운동진영 내에서 진보정당운동의 가장 주요한 안티테제로 기능해왔으나, 결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당건설이나 노동계급 헤게모니의 창출에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그 세력이 점차 확장되기 보다는 점차 축소되는 방향으로 이어져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끊임없이 관성적 총파업주의와 선전주의 사이를 진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현장 의제에 대해 ‘그러므로 총파업이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대응하며 기층 조합원에게 총파업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며 동시에 유일한 해결책임을 선동하였다. 자연스럽게도 조합원들은 이뤄질 수도 없고 구체적 방법론도 없는 이들의 총파업 요구에 점차 지쳐갈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현장에서 보여온 전략은 맑스주의 정치라기 보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그것이었다. 혹은 더욱 비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부류는 소위 ‘스파크 론’, 이미 자본주의는 몰락-쇠퇴기에 있고 계급적 불만이 광범위하게 누적되어 있으므로 정태적 노동계급에 혁명적 사회주의 선전만 더해진다면 그것이 화학적 효과를 일으켜 사회주의 혁명을 낳는다는 독선적인 형태의 선전주의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일련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바로 이 두개의 노선, 즉 관성적 총파업주의와 선전주의 사이를 끊임없이 길항해왔다.
둘째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거부’와 ‘인민전선에 대한 거부’라는 명분 하에 다종다양한 사회문제와 정치적 의제들에 대한 무관심했다. 그 어떤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소될 수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은 기층에서의 경제투쟁의 고도화와 그것의 정치투쟁으로의 전화, 공장평의회의 건설을 통해 가능하다는 놀라우리만치 환원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하였다. 이들의 사회주의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는 형태의 사회주의, 조직노동 안에 갇혀있는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셋째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계급이 고도로 분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공장 노동자 운동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공장 노동자가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선도적인 부위이며 혁명에 있어서도 공장 노동자만이 영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점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유지해왔다. 이들은 공장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을 심화시키는 것 그 자체로 전체 노동계급을 대변할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더 나아가서는 경제투쟁의 심화를 통한 정치투쟁으로의 이행이 ‘아래로부터의 당건설’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들이 전체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 대중선전에 대한 고민을 쉽게 회피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는 역사적으로 진행되어온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즉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트로츠키주의가 결합된 대공장 비정규직 조직노동운동의 급진화를 주된 전략으로 하는 운동은 진보정당운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막다른 길 앞에 놓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의 전통과 이념적 노선이 결코 앞으로의 시대에서 우리가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제3기를 청산하라
진보정당운동은 본질적으로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그 자신을 배반한 대가로, 또한 전체 인민대중을 배반한 대가로 얻어낸 합법공간을 통해서 성립된 운동이었다. 물론 배반 자체는 필요에 따라 용인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 정치는 도덕가나 협객의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정당운동의 성과가, 노동계급 헤게모니 형성의 기회를 포기하고 조직노동운동을 개량주의화-타협화 시키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호하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진보정당운동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적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의 전성기에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의회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군소정당에 불과했다. 진보정당운동은 단 한 차례도 제1기의 10월 항쟁이나 제2기의 노동자대투쟁처럼 국가 전체를 뒤흔들거나 지배계급을 벌벌 떨게 만들지 못했다. 진보정당운동은 제반 계급운동과 전선운동을 강화하기 보다는 그것에 기생하여, 특히 합법화 된 민주노총의 원조와 독점적 지지, 그 네트워크에 기생하여 그 역량들을 소모하고 갉아먹는 형태로 발전해왔고 지금도 바로 그 방식으로 스스로를 유지하고 있다. 확고한 지도조직과 이념이 부재한 선거참여는 결국 선거’전략’이 될 수 없고 선거’주의’로 귀결될 뿐임이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를 통해 증명된 셈이다.
이를 고려할 때, 진보정당운동은 현재 독자적인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지위나 자기재생산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정기적으로 민주노총의 지원 하에 의회에 국회의원 몇 명 가량을 보내는 고비용 행사 정도에 그친다고 평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국회에 민중 친화적인 국회의원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확실히 나을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운동의 지상과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변혁적 과제를 수행할 전략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당운동은 아니지만 최근 논의되는 체제전환운동 역시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사회운동 내에서의 네트워킹을 통해 동원한 각종 의제운동 활동가들의 역량을, 그 내용조차 뚜렷하지 않은 모호한 체제전환이라는 구호 하에 집중시켜 그것을 어떤 정치운동 창출의 계기로 삼는 일련의 행태는 각급운동을 강화하거나 실질적으로 지도할 노선을 건설하기 보다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강령 하에서 자 파벌의 세력 확장과 이득을 좇는 형태의 반운동적 운동, 소모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밖에 평할 수 없다.
따라서, 합법적 공간에 민중정당을 건설하여 선거전략과 당운동을 통해 제2기 민족민주운동의 과제들, 즉 민족해방과 노동해방, 민주주의의 완성 등을 달성한다는 제3기 진보정당운동의 초기 목적은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제3기의 운동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사실상 독자적인 운동으로 기능하기를 멈췄다는 사실을, 진보정당운동은 이미 종언을 고하였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이 남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이며 무엇이 변혁의 과제인지를 규정해야만 한다.
총론
남한 사회의 올바른 이해 -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
그렇다면 어떻게 남한 사회를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남한의 식민지적 측면과 자본주의적 측면을 나누어서 살펴보자. 남한의 식민성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상술하였듯이, 신식민지 규정으로는 부족하다. 신식민지라는 규정은 미제국주의의 남한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지배를 설명할 수 없다. 대안은 반식민지 규정이다. 반식민지란 무엇인가? 마오쩌둥이 중국 혁명 과정에서 중국 사회를 규정한 개념이다. 형식적 독립과 주권을 지니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치적-군사적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제국주의 식민모국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회가 바로 반식민지 사회이다. 당대 중국의 식민모국은 영국,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여러 제국주의 열강으로 다각화 되어 있었고 남한 또한 초기에는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과 일본 양자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80년대와 90년대의 일본 산업의 퇴조에 맞물려 미국이라는 단일한 식민모국에 대한 종속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파쇼세력에 대한 능동적인 엄호와 지원, 종미적 관료와 언론, 사법당국을 통한 대민통제, 전시작전권 통제와 주한미군의 존재 등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정치적-군사적 지배 요소이다.
남한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남한은 고도의 산업적 발전을 이룬 제조업 국가이며 수출 국가이기도 하다. 외양적으론 첨단 부문을 선도하고 있는 기술 국가이기도 하다. 남한에서는 해방정국 당시의 농민운동과 일본인 대지주의 소멸,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토지분배 등을 거치며 봉건제가 사실상 소멸하였는데, 이렇듯이 반식민지이면서 동시에 봉건적 생산양식이 소멸한 대표적인 국가로는 대만과 싱가포르 등이 존재한다. 이승만 정권 시기 남한의 주요 자본은 매판적 성격을 짙게 띄었으나 삼백산업의 지대이윤이 공업부문에 재투자 되고 박정희 시기 국가가 지정한 산업부문으로의 자본집중이 이루어짐에 따라 점차 비생산적이고 유통-중개를 통한 이윤만을 추구하는 매판자본은 금새 남한 총자본 내의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이 때 새로운 종류의 자본, 관료자본이 등장한 것이었다. 관료자본이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시기 중화민국 경제를 분석하기 위해 창안한 개념으로, 민족자본의 성장이 억제된 식민지적 조건 하에서 식민통치적 국가기구와의 결합을 통해서만, 그리고 식민모국의 금융자본에 의한 직간접적 종속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는 종류의 산업자본이다. 관료자본은 그 탄생 및 초기축적부터가 국가기구와의 결합에 의존하며, 외세에 종속된 식민지 금융대리기관인 중앙은행 및 산업은행의 통제를 받는다.
관료자본은 어째서 탄생하는가? 제국주의 자본은 발전과 집적, 독점화를 거듭할 수록 이윤이 낮을 뿐만 아니라 낮은 이윤으로 인해 불안정한 제조업 산업을 청산하려는 유인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자본은 독점을 유지하기 쉬운 가치사슬의 맨 처음인 연구 개발, 맨 끝의 마케팅과 서비스를 손 안에 남겨두고 저이윤 산업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로 이전한다. 이 현상은 흔히 스마일 커브(smile curve)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로써 식민지는 제국주의 국가의 하청 국가로 변모하며, 내수 시장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출 중심 대규모 산업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필리핀이나 인도 등과 달리 봉건적 지주소작제가 철폐되어 대규모 저가 노동력이 확보된 남한과 대만은 관료자본이 성장하기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일본재벌들의 하청 물량을 담당하며 급성장한 관료자본은 관료독점자본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동차, 반도체, 조선, 석유화학 등의 기술집약적 제조업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허나 오늘날의 관료독점자본 또한 종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남한의 관료대자본은 지금도 수출을 위해 외국자본으로부터 원자재, 부품, 소재 그리고 생산기계를 수입해야만 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자동차산업은 여전히 해외에서 핵심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며, 반도체 산업의 경우 사실상 미국이 설계 부문을 독점한 상황에서 남한 반도체 기업들은 대만의 TSMC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파운드리 부문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업과 석유화학산업은 이미 저부가가치 산업의 범주에 해당한다. 또한 이 모든 산업부문에 종사하는 관료대자본들은 매 해 막대한 양의 라이센스 비용, 핵심부품비용, 해외주주 배당금을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헌납한다. 남한 관료대자본이 아세안 지역에 자본수출과 착취를 가한다는 관점 또한 존재하지만, 관료대자본 자체가 미제국주의 금융자본의 통제를 받는다는 구조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남한 관료대자본이 미제국주의 자본을 아세안에 중개하여 중간지대를 얻는 형태로 인식하는 것이 정합적이다.
그렇기에 남한의 관료대자본은 자본의 총량과 그 집적 수준, 생산력의 수준 등 양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수준의 발전을 이뤘다고는 볼 수 있겠으나 금융적-공급망적으로 미제국주의 금융자본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으며 첨단산업부문 내에서도 미제국주의가 외주화 한 저부가가치적 부위를 맡고 있기에 질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관료대자본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융합을 통한 완전한 금융자본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재벌 관료대자본들은 금융지주사를 두고 있거나 자회사로 금융사를 두고 있지만 이것은 자사의 출자에 의한 것일 뿐, 자사’에’ 출자하고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외국 금융기관과는 쌍방적인 형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한의 재벌대기업들이 자신들에게 출자한 JP모건체이스나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의 지분을 확보하거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남한 관료대자본은 레닌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조건으로 제시한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을 통한 금융자본의 창출과 금융과두제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한의 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아닌, 관료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
즉, 남한의 사회성격은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 단계의 사회이므로 사회의 근본모순은 자본가와 노동계급 간의 모순이지만 현 단계에서의 주요모순은 미제국주의와 그에 부역하는 관료자본 및 매판자본 대 대다수 민중 간의 모순이다. 혁명의 영도계급은 노동계급이며, 농민, 소상공인, 민족부르주아가 통일전선을 이룰 동맹세력이다. 당면혁명의 성격은 신민주주의 혁명이며 혁명의 내용은 목표는 제국주의 지배의 종식과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관료-정치세력의 분쇄, 제국주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료독점자본의 몰수이다. 신민주주의 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민주주의 시기 동안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계급연합 형태의 민주주의를 구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을 준비하고, 하청구조를 청산해 건전한 국민경제를 발달시키며, 과도기적 혼합경제 하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생산통제의 역량을 점차 발달시켜 장기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다.
미완의 건국, 미완의 민주주의, 미완의 계급정치
우리의 현대사는 미완의 역사였다. 모든 과제들이 미완된 채로 연기되고, 그 미완의 상황 속에서 도출된 모순과 억압이 무한히 자기재생산을 반복하는 역사였다. 물론 동시에 저항의 역사, 희망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저항과 그것이 낳은 희망마저도 우리에게는 미완으로 남아있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던 제1기 운동의 조선인민공화국 구상은 미국의 침략과 인민위원회 분쇄로 인해 실패하였고 건국이라는 과업은 우리에게 완수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제2기의 운동이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완성 또한 87년의 야합과 파쇼세력에 대한 청산 실패, 미군 주둔의 유지로 인해 우리에게 완수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제3기의 운동이 창출하고자 했던 민중의 정치, 노동계급의 정치는 합법주의-개량주의로의 귀결로 인해 우리에게 완수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건국,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치라는 세 과제들은 우리에게 모두 미완된 형태로 주어져 있다. 이것을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외양이 아닌 실질로 쟁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건국을 가로막은 것은 미제국주의와 그 부역세력이다. 민주주의를 가로막은 것은 파시스트 정치세력인 보수정당과 족벌언론, 친미부역적 관료들이다. 노동계급정치를 가로막은 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합법주의-개량주의 경향과 전투적 조합주의 경향이다. 이것들을 청산하는 것, 그것이 이 미완의 역사를 끝낼 유일한 방법이다.
제4기의 운동은 무엇인가
제 3기의 운동은 종결되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4기의 운동, 즉 과거의 운동과 그 형식적, 내용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전략과 전술, 비전을 지닌 새로운 운동이다. 그렇다면 제4기의 운동은 무엇인가. 바로 현실에서 혁명을 건설하는 운동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 즉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파시스트들에 대한 청산, 관료자본주의의 타도는 기존 국가기구의 제도적 장악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그 장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오직 그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이 건설하는 혁명적 계급전쟁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운동이, 제1기운동의 소극성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오판, 제2기운동의 비과학적 사회성격 규정, 제3기운동의 개량주의와 합법주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 바로 제4기의 운동이다.
그것은 남한 사회가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임을 명확하게 인식하며 미제국주의와 파시스트와의 공존이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개량주의와 합법주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계급이 즉자적 이득을 넘어 사회 전체 피억압계급의 이익을 방어하고 그들을 이끌어 나갈 혁명적 계급으로 각성시킬 혁명적 전위당을 건설하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을 필두로 소부르주아, 민족자본가, 농민, 지식인과의 연합에 기반한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미제국주의를 몰아내며 관료자본을 몰수하고, 파시스트를 청산하여 제1기에 미완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의 기획을 진정으로 완수하는 운동이다. 제2기에 미완된 민주주의 건설을 진정으로 완수하는 운동이다. 제3기에 미완된 노동계급 정치를 진정으로 완수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의 모든 미완들을 한꺼번에 완수하여 되갚는 운동이다.
그렇다면 제4기의 운동, 즉 신민주주의 혁명운동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무엇으로 되어야 하는가.
첫째로, 합법주의와 개량주의에 투항하지 않되 그와 동시에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운동이어야만 한다.. 즉, 혁명적이고 지하화된 지도부와 반합법 형태의 변혁적 중간조직, 합법 형태의 광범위한 대중조직을 동시에, 그리고 병진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공개된 간부들의 중핵인 공산당은 전체 전선에 있어서 정치적 강령을 제시하고 모든 사회 영역에 간부들을 파견해 각급 운동을 추동하며 운동의 가장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합법 대중조직은 대중들의 각성과 투쟁을 이끌며 최소강령적 요구들을 전면화해 국민적-민중적 헤게모니 정치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변혁적 중간조직은 대중조직을 이데올로기화/고양화 하는 한 편 대중들의 문제의식을 당에 전달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 마오주의 운동에서 실천과 경험을 통해 누적되고 검증되어온 당의 동심원적 건설 노선이다. 이 노선은 지하 비밀결사 노선과 공개 합법 노선 양자를 모두 지양하는 방법론인 동시에, 당의 핵심적 부위의 건설만을 추동하거나 혹은 대중운동 속으로 산개하는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핵과 대중운동의 병진적이고 교차적 성장을 추동하는 방법론을 통해 필리핀, 터키, 페루, 인도,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운동은 진보정당운동의 개량주의-합법주의의 문제와 과거 사노맹의 지도부 노출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새로운 운동은 한국 사회성격에 대한 과학적인 규정, 즉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론을 우리의 핵심적 정세관으로 채택하고 이에 걸맞는 형태의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혁명노선을 실천해야만 한다.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의 타도를 가로막는 적은 관료독점자본과 파시스트 정치-관료-언론 세력, 미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이다. 정치란 적을 고립시키고 아군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새로운 운동은 관료독점자본-파시스트-미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을 제외한 모든 피억압 근로인민대중을 혁명의 우군으로 삼되 그 안에서 노동계급의 영도력과 지도력을 당을 통해 명확하게 관철하고 통일전선에서 노동계급의 주도권을 확보하여아 할 것이다. 이 사회의 소부르주아, 농민, 민족자본가에게는 모두 노동계급의 지도를 따라 혁명의 우군이 되어 반식민지 관료자본주의 사회를 타도 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 이득이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남한의 소부르주아 계급은 내부의 극소수를 제외하면 극도로 불안한 사정에 놓여 있거나 준-프롤레타리아적 처지에 놓여있다. 남한의 농민계층은 미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의 경제침탈에 의해 그 자신이 소멸의 위기에 놓여있다. 남한의 민족자본가, 즉 관료독점자본에게 고도의 하청구조와 대금 후려치기를 통해 수탈 당하고 있는 군소자본은 관료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실질적으로 분배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자본주의에 따라 점차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자본가 계급은 마오쩌둥이 논하였듯이 언제나 동요하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계급이지만, 혁명세력은 가능한 많은 민족자본가들을 실리를 따지는 설득과 단호한 압박을 통해 혁명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 인민대중 내에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강화 발전시키고, 노동계급을 그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넘어 모든 피억압 계급계층을 선도할 수 있는 현대의 군주로 상승시켜야 한다.
셋째로, 새로운 운동은 혁명을 어떠한 일회의 봉기나 임계점을 달성한 피억압자들의 폭발을 계기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장기간의 축적과 단기간의 파열의 집합 정도로 이해해선 안 된다. 혁명은 경제투쟁의 심화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무정형적 분노에 혁명적 선전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발적인 형태의 공장점거나 그에 결부된 평의회 건설이 그 자체로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몇몇 혁명적 간부들의 선도적 무장투쟁이나 모험적 음모를 통해 창출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혁명은 전략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가장 낮은 수준의 투쟁부터 가장 높은 수준의 투쟁까지, 사회 모든 부문에서 계급대중의 역량을 계획적으로 상승시켜 그것을 반혁명세력에 맞선 계급전쟁의 전선으로 총동원하는 과정이 바로 혁명이다. 혁명의 모든 과정은 합법적인 수단과 비합법적인 수단, 폭력적인 수단과 비폭력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공장과 거리, 주택단지와 교육현장, 문화와 언론, 첨단산업단지와 농촌 등 피억압 대중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과 모든 전선에 침투하고 대중의 저항과 고양을 추동하며 투쟁이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도록, 투쟁주체들 간의 민주적 규율이 점차 대항권력으로 발전하도록 유도하고, 그 안에서 혁명적 간부대오와 자위능력을 건설해나가며, 동시에 이러한 대항권력들을 탄압으로부터 방어하고 사수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장기적으로 지속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포위된 대항권력을 전국적-전부문적으로 퍼트리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인민대중의 지지를 얻어 반혁명세력과 혁명세력 간의 전략적 균형을 이루며, 인민권력의 영향력을 적의 근거지 속에서 더욱 확대시켜 적을 역포위하며 끝내는 인민권력에 기반한 새로운 정권을 수립, 적대세력을 격멸 및 청산하는 것까지가 계급전쟁의 단계들이다.
넷째로, 신민주주의 혁명은 사회주의로의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가능한 형태의 이행을 추동할 것이다. 신민주주의 체제의 경제체제는 국가자본주의이지만, 동시에 사회주의를 향해 이행해가는 국가자본주의이다. 관료독점자본의 몰수를 통해 첨단핵심산업과 유통업, 금융업, 플랫폼산업 일체를 국가의 손에 넣어 잔존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혁명권력의 구체적 통제 하에 놓고, 과거 중국의 안산헌법[12]과 같은 형태로 국가부문에서의 노동계급의 경영참여를 점진적으로 확대하여 노동계급의 경제계획 역량과 운영 노하우를 전략적으로 축적하여야 한다. 소부르주아 계층의 경우에는 관료독점자본에게 수취 당하던 임대료와 각종 가맹료, 플랫폼 사용료 일체를 면제해주는 조건 하에 자재나 기구 등을 느슨하게 공유하는 초기적 단계의 협동조합으로 묶고, 이러한 협동조합을 점진적으로 낮은 단계의 통일성을 갖춘 협동조합에서 높은 단계의 통일성을 갖춘 협동조합으로 끌어 올리는 장기적인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소유관계를 비적대적인 형태인 전인민적 소유관계로 전환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자본가의 경우 중간마진이 최소화된 유통을 제공하고, 정상적인 단가지급과 독점기업의 횡포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여 정부의 우군으로 삼되 점차 이들의 사업장에서도 노동계급의 경영참여를 확대하고, 노동자에 대한 운영요령의 전수를 요구하며, 국가부문에 이들의 사적부문이 종속되게 함으로써, 결국은 고정이윤제를 거쳐 점진적 압박과 설득 하에, 노동계급이 계획경제를 실질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순간에는 국가의 경제계획기구에 사업장을 매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까지는 약 15년에서 20년 가량이 요구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의 국가권력 전복이나 사회주의 이행의 중단을 막기 위한 지속적인 문화혁명과 대중에 의한 당의 비판과 정화, 그리고 계급투쟁에 박차를 기해야 할 것이다.
실패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우리의 선배들은 영웅이었다. 이 글에서 우리가 지적해온 그 모든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투사들은 이 질곡 아래 고통스러운 역사의 매 국면마다 인식과 결단을 요구 받아왔고, 각자의 소신으로 그 요구에 답해왔다. 물론 그들은 실패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비판할 수 있으며, 동시에 비판해야만 한다. 가장 철저한 비판이야 말로 가장 철저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판이 단죄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실패했기에 그 다음 세대가 더 낫게 실패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다음 세대가 더 낫게 실패하였기에 다시 또 다음 세대가, 또 다시 다음 세대가 새로운 실패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실패들의 연쇄에서 도출되는 변증법적 발전이 바로 맑스주의 과학의 핵심 원리이다.
지난 세기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실패했으나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분명히 더 나은 형태로, 다시금 시도될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 또한 남한에서의 기존의 운동이 실패하였고, 또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시도를 감행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후대는 반드시 우리보다 더 나은 운동을 창출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에 낙관주의자들이다.
조국해방의 과제,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해방의 과제, 궁극적으로 모든 물질대사 해방의 과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가 영원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삶은 유한하다. 그러므로, 영원을 향해 우리의 삶을 바쳐보자.
미군정이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정판사 직원들이 남한 내 공산주의 정권 수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대량 발행 및 유통했다고 발표한 사건 ↩︎
무력투쟁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직 지하화에 대한 준비가 그 이전부터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요구된 상황에서 군사투쟁을 결의한 것이라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없고, 남한의 특수성 하에서 야산과 농촌이 혁명의 근거지로 기능할 수 없었던 상황이며,대중과 유관조직으로부터 무력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당원을 병사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무력투쟁을 인민 속에서 무장력을 건설하는 대중운동적 과정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병력과 병력 간의 대결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중심부와 개발도상국인 주변부 간의 불평등한 교역과 구조적 종속으로 인해, 후진국의 부가 선진국으로 유출되고 후진국은 '저발전'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 개량주의적 국제정치·경제학 이론 ↩︎
자본주의적 발전이 고도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주도하여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혁명 이론 ↩︎
혁명에 필요한 조건이 완벽히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정예 게릴라 부대가 특정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무장 투쟁을 시작하면 그 자체로 민중의 봉기를 이끌어내고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내용의 군사주의적-극좌적 혁명이론. 인민전쟁 이론과 자주 혼동되지만 인민전쟁 이론의 경우 대중을 조직화 하여 계급전쟁을 추동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기에 포코이론과 달리 정예조직에 의한 게릴라투쟁을 주장하지 않는다. ↩︎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철폐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이 지도부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후퇴를 진행한 사건 ↩︎
한 사회경제구성체에 존재하는 특정한 생산관계의 형태를 의미 ↩︎
가나의 민족주의적 혁명지도자이자 3세계주의 이론가 ↩︎
마오쩌둥의 저서. 현대 맑스주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물질과 사회 내에 존재하는 모순들에 대한 이론이 담겨있다. ↩︎
서로 이질적인 계급계층들이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특정한 목표(반제국주의, 반파시즘, 반독점 등)의 달성을 위해 위해 상호적 동맹과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전략전술. 동시에 노동계급과 그 당은 통일전선 내에서 동맹들의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지도부를 비판 및 폭로하고 노동계급과 그 당이 당면한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가장 유효한 투쟁세력임을 각인시켜 각계각층 대중들에 대한 영도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
혁명 전체의 전략과 전술을 확립 및 집행하는 전위당이 아닌, 전위당의 지시에 따라 특정한 목표나 기획의 달성을 위해 기능적으로 존재할 뿐인 종속적 형태의 정당 ↩︎
중국의 안산제강소에서 제정되어 당대 중국의 여러 공장과 작업장에 전파된 내규.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간부가 생산 노동에 참여한다는 양참(兩參), 작업장 민주주의를 통해 불합리한 규칙과 제도를 개혁하는 일개(一改), 간부·기술자·노동자의 협력을 의미하는 삼결합(三結合)을 기본 정신으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