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수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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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수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이 논의는 단순히 민주노총 위원장의 처신이나 투쟁전략을 넘어서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 문제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정부 주관 행사 참여라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쟁은 결국 노동조합이 무슨 정치를 해야 하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돌아보고, 정치참여에 대한 여러 의견들에 대해 평가한 다음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고자 한다.

지난 5월 1일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정부주관 “2026 다시 함께하는 노동절 기념식”에 참여했다. 그 이전인 4월 20일, BGF리테일이 화물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고자 불법 대체차량을 투입하고 경찰이 이를 비호하는 과정에서 故 서광석 열사가 대체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위원장이 정부 주관 노동절 행사에 참석해 저들에게 정치적 명분을 쥐여주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내부에서 격렬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이 논의는 단순히 민주노총 위원장의 처신이나 투쟁전략을 넘어서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 문제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정부 주관 행사 참여라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쟁은 결국 노동조합이 무슨 정치를 해야 하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돌아보고, 정치참여에 대한 여러 의견들에 대해 평가한 다음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고자 한다.

1.    민주노조의 정치활동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해방 이후 한반도 남반부에서 최초의 노동조합 활동은 1945년 설립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이 최초였다. 전평은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유급휴가제, 완전고용제, 사회보험제, 단체계약권,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 노동자의 공장관리, 노농동맹, 인민공화국지지, 자주독립, 노동자계급이 국제적 연대 등을 주장하며 활동했다. 특히 전평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946년 '9월 총파업'이다. 당시 미군정 치하에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일제강점기에도 하지 않던 하곡(보리쌀) 공출이 이뤄지고, 미군정이 철도산업 합리화를 이유로 철도노동자 25% 감축 및 월급제의 일급제 전환 등을 강요했다. 이에 부산 지역 철도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총파업에 나섰고, 전평이 이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미군정의 강경진압과 전위 역할을 맡아야 했던 남조선공산당의 우유부단한 결단이 겹쳐 전평은 파업과 항쟁에서 패배하고 48년 비합법조직으로 지정, 이후 해산된다. 미군정은 이승만, 김두한 등이 주도했던 어용노조 대한노총만 남기고 남한의 노동조합 운동은 이승만 독재와 군사독재라는 긴 암흑기를 맞이한다.

시간이 흘러 전태일 열사의 삶과 분신, 열사의 유지를 이어받은 청계천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79년 박정희 암살 이후부터 80년 신군부 집권까지의 기간 동안 잠시 활성화되었는데 이 때의 대표적인 사례가 동원탄좌 사장과 어용노조에 반발한 사북항쟁 등이 있다. 이후 신군부의 탄압으로 다시 줄어들었던 민주노조 운동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겨났고, 6월항쟁과 전두환의 6.29 선언과 퇴진으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87년 노동자대투쟁이다.

6월 3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제조업 노동자들 만이 아니라 이른 바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까지 참여해 3311건의 쟁의와 122만 5830명의 인원이 참가한 남한 최대의 총파업 투쟁이었다. 이 때 당시 노동자들은 임금 문제부터 시작해 작업장 민주화, 노조활동 및 단체협약을 요구하고 또 8시간 노동, 노동악법 개정,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등 정치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각 지역별, 업종, 회사별 민주노동조합 연합체들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14개의 지역별노조협의회(지노협)이 결성되어 전국적 규모의 민주노조연합이 결성되었다.

이후 전노협은 울산노동조합협의회 건설 실패,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분열 등으로 한계론이 대두되었다. 1991년 'ILO 공동대책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여러 민주노조의 상급 단체 격인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만들어졌다. 이어 1994년에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최종적으로 같은 해 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공식 설립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요구되면서 민중당, 국민승리21 등 여러 진보정당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걸고 대선 등에 참여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1998년부터 민주노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국민승리21을 기반으로 민주노조와 제 민중들이 결합하여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고자 했고 99년에 원탁회의를 여는 등 여러 노력 끝에 2000년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창당 이후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운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를 결의하며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로 창당 초기에는 노동자, 공단 밀집지역을 위주로 당선자를 배출하는 등 여러 과실을 얻는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설정에 어려움을 겪거나 배타적 지지에 대한 갑론을박, 조합원들의 정치교양 향상 실패로 점점 흔들리고 노무현 정권 심판론에 휩쓸려 지지율이 점점 줄어든다. 이후 당 내부 정파 갈등으로 인해 진보신당이 분열해 나가며 그 의미를 잃는다.

2011년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하며 다시 진보정당 통합이 시도된다. 그러나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성격에 대해 논쟁만 할 뿐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며 통합진보당의 배타적 지지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창당부터 불안했던 통합진보당은 2012년 비례대표경선 부정선거 논란과 폭력사태 문제로 산별 간부들을 모아 “통합진보당에 재창당 수준의 고강도 쇄신 촉구” 성명을 발표하고,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통합진보당 지지 철회를 결의한다. 이 과정에서 진보정의당이 분당하고, 이후 통합진보당은 2014년 헌재에서 위헌정당 판결을 받고 해체된다.

통합진보당 해체 이후 진보정당들이 분열되면서 민주노총의 정치 개입은 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 중대선거구제 등 정치개혁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노동당, 녹색당, 진보당, 정의당 등 이른바 '진보 4당'을 지역과 산별 노조의 성향에 따라 각각 지지하는 형태로 정치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일각에서 진보연합당 건설이 제안되었으나 정파문제로 지지부진 했고, 정의당에서는 정의당에 타 정당 후보들이 입당하여 활동하는 플랫폼 정당 제안이 나왔으나 역시 호응이 오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제대로 세워지지 못하고 점차 주변화되었다.

2024년 제 22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은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합류하고, 정의당의 플랫폼 제안은 녹색당만 받아들여 녹색정의당 이름으로 선거에 나섰으며, 노동당은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노총은 기존 진보4당의 분열로 민주노총은 제대로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한 체 선거를 보내야 했다. 결과적으로 진보당은 3석의 의석을 챙기며 의회 내 교두보를 얻었고 노동당과 녹색정의당은 원외정당으로 남았다. 한편, 보수 야당과 연대해 선거를 치른 진보당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두고 이견이 갈리면서, 민주노총 중앙은 제대로 된 총선 평가서를 제출하지 못한 채 서비스연맹과 공공운수노조의 평가를 병기하는 형태로 이를 대체해야 했다.

윤석열 정부의 계엄 선포 사건 이후 진보당은 야5당 원석회의에 참여하는 한편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과 단일화를 결정했다. 한편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은 연합정당인 민주노동당을 구성하고 권영길 대표를 대선후보로 내세운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보수야당 지지 금지 방침을 지키고 독자 진보후보인 권영길 후보를 배타적 지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지만 중앙에서는 22대 총선 때처럼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했다.

전평의 해산 이후 민주노조의 정치행동과 참여를 돌아보면 군사정권 시기와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까지는 파쇼군사독재의 정치적, 사회적 억압이 극심하고 광범위했기에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부터 노동3권 보장, 노동악법 개정 등 노동조합적 정치 요구까지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와 맞아 떨어지고 대다수 민중이 동의했기에 정치적 참여를 지휘하고 독려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은 정치방침을 세우고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 진출을 시도하지만 제대로 된 노선을 세우지 못하고 기층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며 진보정당 내부의 정파 싸움에 휘말린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라는 것이 평조합원들에게 닿지 못하고 상근 활동가들간의 정파, 당파 싸움의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렸다. 평조합원들에게 노조를 넘어서는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주의, 경제주의 의식 이상의 정치적 고양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2.    양경수 체제 속에 노동조합주의적 모습은?

민주노총의 정치참여는 노동조합을 넘어서 해방세상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노동조합 스스로의 조합주의, 경제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일정한 정치방침을 세우지 못하는 현재에는 더 강화되고 있다. 여기서는 오늘 반대파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고 있는 현 민주노총 위원장 양경수 체제의 두 가지 결정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주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23년 윤석열 정부의 노조 회계공시 압박 수용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전에는 120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집권하자마자 화물연대의 파업에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며 정당한 파업을 방해하고, 건설노조의 쟁의행위와 노조활동 일체를 건폭(건설노조+조폭)이라 부르며 고공농성 중이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사무처장의 머리를 경찰이 곤봉으로 수차례 가격하며 유혈 연행하는 등 연일 노동자들에게 공세를 퍼부으며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건설과 화물 등 각 산업별로 분리해서 공격하던 윤석열 정부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중앙을 상대로도 노동운동을 약하게 하려는 압박을 펼치는데, 그것이 23년에 노조 회계공시 압박이다. 당시 윤석열 정부는 그 이전에는 회계공시 여부와 상관없이 주어지던 조합비용 세제 혜택을 상급단체가 일괄적으로 회계공시에 참여하지 않으면 단위노조에서 회계공시를 해도 세제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등 사실상 파업을 총지휘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중앙에 정부 상대로 예산 내역을 공개하라 압박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에게 노조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미 독립적인 회계감사원을 두고 감사원이 요구하면 회계감사를 진행할 수 있으며, 조합원들이 요구하면 언제든 자료를 제공해야 하고 모든 예산안은 중집에서 검토되는 등 이미 회계 투명성을 위한 조치는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감시하고, 관련 정보를 자본(사용자) 측에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쟁의 활동을 사전에 파악해 대비하도록 돕고자 했다. 즉, 노사·노정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공격한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결국 양대 노조 모두 회계공시를 수용했다. 두 조합 다 회계공시에 반대하지만 조합원들에게 갑자기 세제 혜택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향후 투쟁 과정에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중앙 차원에서 조합원들을 어떻게 조직하려 하는지가 담긴 재정 자본의 흐름을 사용자 측과 정부에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점에서, 이는 정당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노총, 그리고 양경수 지도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결국 조합주의, 특히 대공장 정규직들에 기반한 조합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이들의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경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임금이 어느정도 보장되고 이미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확보한 대공장의 정규직 조합원들은 세제 혜택을 포기하는 것을 꺼렸고, 지도부는 이들에게 장기적인 투쟁에서의 불리함을 설득하는 대신 이들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나 양경수 지도부의 주요 지지층들이 대공장 정규직임을 감안하면 이런 선택은 결과적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최근에도 양경수 지도부의 정부 주최 노동절 행사 참여에 많은 비판이 잇따랐다. BGF리테일 상대로 화물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리테일 자본이 불법 대체인력을 투입했고 경찰은 이들을 비호하는 과정에서 故 서광석 열사의 참극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부 주도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비판이다. 지도부에서는 BGF리테일과 화물노동자들이 단체협약에 성공했기에 참여했다고 했다. 지지하는 측에서는 그 자리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러 투쟁들을 환기하고 故 양회동 열사, 故 서광석 열사를 이야기하면서 민주노총과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민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물론 어느정도 그런 효과를 노려볼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대체인력 금지,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 경찰의 대체인력 비호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상태로 정부 주도 행사에 가서 화합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들이 진정으로 해결된 상태인지, 이러한 요구의 정당성을 조합원들에게 선전·선동하며 이들을 본격적인 정치 투쟁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실제로 현 정부 하에서 민주노총 소속은 아니지만 삼성 초기업노조의 파업에 긴급조정권 발동을 검토하는 등,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임의로 저지하고 자본의 편에 서기 위한 법리적 압박이 지속되는 상황을 보면, 다른 사업장 역시 언제든 정부의 타격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양경수 지도부는 BGF리테일과 교섭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정치투쟁을 포기하면서 민주노총이 노정 갈등 국면에서 정부에 사실상 투항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3.    조합주의의 “진보적”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글에서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결국 극복하지 못한 노동조합주의, 경제주의가 어떻게 현재 민주노총의 정치적 갈등에 자리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주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사회변혁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 전에 앞서 민주노총 내 대립구조와 시중에 나돌고 있는 반대파들의 대안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 바 ‘좌단위’라 불리는 여러 조직들은 양경수 지도부에 대해 민주노총 안팎으로 비판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차례 노동절 행사에서 항의행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람들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 양경수 위원장에 대해 가장 격렬히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이들 비판의 핵심 논지를 정하면 양경수 지도부는 적극적으로 진보정치에 결합하던 “민주노조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경수 지도부를 몰아내고 “민주노조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좌익 활동가들을 위원장에 당선시켜 사회운동에 적극 결합하고 강경한 투쟁기조를 이어가며 총파업을 결의하면 노동자 집권, 해방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민주노조정신”이라는 것이 과연 민주노조에서 더 이상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모순인 '노동 대 자본'의 관계를 몸소 겪는 주체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생산력의 유지와 발전을 담당하는 중추 세력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곧 바로 사회운동을 이끄는 정치적 조직이라는 결론은 비약이다. 노동조합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결성된 집단이다. 노동조합은 정치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착취체제에서 덜 착취 받는 방어적, 수비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요구들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스스로 정치적 전망을 취득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전망을 제시해야 할 정치집단들이 본연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그 때는 파쇼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이 사회 전반에 넓고 강하게 투사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는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어용노조 타파 및 민주노조 건설 등의 조합주의적 의제들이 독재정권 타도와 정치·사회적 민주화라는 선제적 과제와 맞물려 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선진 노동자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 노동자, 나아가 농민, 빈민, 소수자들까지 통일전선에 참여할 수 있는 정세적 조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진보정치에 노조가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기층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며 상근자들과 간부들만의 이야기가 되었다.

현재의 정세는 그때와 다르다. 조직노동운동의 중추인 대공장 정규직과 공무원들의 고용안정성은 과거에 비해 향상된 반면, 비정규직, 취업준비생 등 자본주의 모순의 최전선에서 더 불안하고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미조직 대중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조직노동운동은 방어적 임무를 위해 결성된 조직이고, 대공장 정규직, 공무원이 주도하기에 그들의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요구에 충실한 지도부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을 특정 지도부의 정치적 실책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내쫓는 것 만으로 노동조합이 노동조합주의적 정치를 넘어 진보적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오류일 뿐이다. 노동조합의 정치적 입장과 조합주의를 넘어선 정치적 전망은 현재까지 기층 조합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재도 그렇다. 이들을 끌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단순히 더 급진적인 후보들이라는 대공장 정규직들이 기존의 조합주의 지도부에서 이탈해 뽑아 줄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설사 어떻게 대항세력을 전부 끌어모아 당선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혹은 기층 조합원들을 모으지 못한 상태로 다시 조합주의자들에게 위원장직을 넘겨줄 뿐이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을 어떻게 조합주의에서 끌어내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급진적이라서, 사회주의자라서, 선명하니까 라는 이유로 다가가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이것을 넘어서 노동자계급에게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성공적인” 정치폭로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선도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기존 노조가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현장의 틀을 넘어서 사회전체의 여러 문제들을 폭로하고, 규합하고 해결할 총체적 전망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적 문제를 총망라하고 노동자들과 민중들에게 전망과 목표를 제시하며, 정치적 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은 오직 전위당이다. 레닌은 노동자의 자생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노동조합 투쟁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폭로를 제기하려면 선진적인 인자들로 구성된 전위당을 조직하여 민중들 전체를 망라하는 비전을 노동자들에게 선전, 선동하고 그들을 지도해야 혁명에 나설 수 있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은 그동안 민주노조 운동의 조직력과 행동력에 기대어 왔고 민주노조운동 또한 일정한 정치적 전망을 가지지 못한 체 정파싸움에 휘말리다가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에서는 전위당을 건설하고 민중 전체를 영도하는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선전, 선동을 진행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지도해야 조합주의, 경제주의를 극복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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